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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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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昌元年이라
趙光初五 後趙四年이라
春正月 이어늘 譙王氶 甘卓 移檄討之하니 分兵寇長沙하다
既與朝廷乖離 乃羈錄朝士有時望者하여 置己幕府注+羈錄, 羈縻收錄也.하여 以羊曼, 謝鯤으로 爲長史注+曼, 祜之兄孫也.하니 終日酣醉 不委以事러라
將作亂 謂曰 劉隗姦邪하여 將危社稷이라 吾欲除君側之惡하노니 何如 鯤曰 隗誠始禍 然城狐社鼠注+後漢虞延曰 “城狐社鼠, 不畏熏燒, 謂有所憑托也.” 又中山王勝曰 “社鼷不灌, 屋鼠不熏, 所託者然也.” 曰 “管仲稱 ‘社束木而塗之, 鼠因往託焉, 燻之則恐燒其木, 灌之則恐敗其塗, 此鼠之所以不可得而殺者, 以社故也.’ 以喩君之左右.”니이다 怒曰 君 庸才 豈達大體리오
至是하여 舉兵武昌하고 上疏하여 稱劉隗佞邪讒賊하여 威福自由하니 臣輒進軍致討하오니 隗首朝懸이면 諸軍夕退하리이다
太甲 顛覆厥度러니 幸納伊尹之忠하여 殷道復昌하니 願陛下深垂三思하시면 則四海乂安하고 社稷永固矣注+三, 去聲.리이다
沈充 亦起兵於吳興하여 以應敦하다
至蕪湖하여 又上表하여 罪狀刁協하니 帝大怒하여 詔曰
王敦 憑恃寵靈하고 敢肆狂逆하여 方朕太甲하여 欲見幽囚하니 是可忍也 孰不可忍이리오 今親帥六軍하여 以誅大逆하리니 有殺敦者 封五千戸侯하리라
太子中庶子溫嶠 謂僕射周顗曰 大將軍此舉 似有所在 當無濫邪 顗曰 人主自非堯舜이면 何能無失이리오 安可舉兵以脅之리오 舉動如此하니 豈得云非亂乎
初起兵 遣使하여 告梁州刺史甘卓하여 約與俱下한대 許之러니 更狐疑不赴
説卓호되 且偽許敦하고 待至都而討之하라 卓曰
昔陳敏之亂 吾先從而後圖之하니 論者謂吾懼逼而思變이라하니 心常愧之 今若復爾 何以自明이리오
遣參軍桓羆하여 説譙王氶하여 請爲己軍司한대 歎曰 吾其死矣 地荒民寡하고 勢孤援絶하니 将何以濟리오이나 得死忠義하니 夫復何求리오하니라
檄長沙虞悝하여 爲長史하니 悝遭母喪이라
往弔之하고 曰 王室方危하니 金革之事 古人所不辭 將何以教之注+禮記 “子夏問曰 ‘三年之喪, 卒哭, 金革之事無辟也者, 禮與. 初有司與.’ 孔子曰 ‘吾聞諸老聃, 昔者, 魯公伯禽, 有爲爲之也. 今以三年之喪, 從其利者, 吾弗知也.’” 春秋公羊傳曰 “古者, 臣有大喪, 則君三年不呼其門, 已練, 可以弁冕, 服金革之事, 君使之, 非也, 臣行之, 禮也. 閔子要絰而服事, 孔子蓋善之也.”
悝曰 鄙州荒弊하여 難以進討 宜且收衆固守하고 傳檄四方이면 敦勢必分이니 分而圖之 庶幾可捷也리이다
乃囚羆하고 以悝爲長史하고 弟望爲司馬하고 移檄遠近하여 列敦罪惡하니 州内皆應之
惟敦姊夫鄭澹 爲湘東太守하여 不從命注+吳孫亮太平二年, 分長沙東部都尉, 立湘東郡.이어늘 使望討斬之하여 以徇四境하다
又遣主簿鄧騫하여 説甘卓曰 劉大連 雖驕蹇失衆心이나 非有害於天下注+大連, 隗字.어늘
大将軍 以私憾으로 稱兵向闕하니 此忠臣義士竭節之時也 受任方伯하니 奉辭伐罪 乃桓, 文之功也니라
參軍李梁曰
隗囂跋扈 竇融 保河西以奉光武하여 卒受其福하니
今但當按兵坐待 敦事若捷이면 必委将軍以方面이요 不捷이면 朝廷 必以将軍代之하리니 何憂不富貴하여 而釋此廟勝하고 决存亡於一戰邪
騫曰 光武當創業之初 故隗, 竇可以從容顧望이어니와 今将軍之於本朝 非竇融之比也 襄陽之於大府 非河西之固也注+襄陽, 以王敦府爲大府.
使敦克劉隗하고 還武昌하여 増石城之戍하고 絶荆, 湘之粟이면 将軍 欲安歸乎注+賢曰 “石城故城, 在復州沔陽縣東南.”
勢在人手어늘 而曰我處廟勝 未之聞也로라 且爲人臣하여 國家有難이어늘 坐視不救 於義安乎
以将軍之威名으로 杖節鳴鼓하여 以順討逆이면 舉武昌 若摧枯拉朽耳
武昌既定 據其軍實하고 招懐士卒하여 使還者如歸 此吕蒙所以克關羽也니라
恐卓於後爲變하여 又遣參軍樂道融하여 往邀之한대 道融 忿其悖逆하여 反説卓曰
王敦 背恩肆逆하여 舉兵向闕하니 受國厚恩하고 而與之同이면 生爲逆臣이요 死爲愚鬼 不亦惜乎 爲君之計 莫若偽許應命而馳襲武昌이니 必不戰而自潰矣리라
卓意始决하여 遂露檄하여 數敦逆狀하고 帥所統致討하고
遣參軍하여 至廣州하여 約陶侃하니 遣參軍髙寳하여 帥兵北下한대 武昌城中 傳卓軍至하니 人皆奔散이러라
遣魏乂하여 帥兵攻長沙하니 城池不完하고 資儲又闕하여 人情震恐이러라
説氶하여 南投陶侃하고 或退據零, 桂어늘
氶曰 吾之志欲死忠義하니 豈可貪生茍免하여 爲奔敗之将乎 事之不濟라도 令百姓知吾心耳라하고 乃嬰城固守하다
虞望 戰死하니 甘卓 亦遺氶書하여 勸之하고 且云 當以兵出沔口하여 斷敦歸路 則湘圍自解矣라하니
復書曰 足下能卷甲電赴 猶有所及이어니와 若其狐疑 則求我於枯魚之肆矣注+莊子見車轍鮒, 鮒曰 “豈無斗升之水以活我乎.” 莊子曰 “待我决西江之水而迎汝.” 鮒曰 “如君言, 不如早索我於枯魚之肆.”어다
不能從하다
封子昱하여 爲琅邪王하다
◑趙封楊難敵하여 爲武都王하다
趙主曜自撃楊難敵하니 難敵 逆戰不勝하여 退保仇池하고 遣使稱藩이어늘 趙以爲武都王하다
陳安 叛趙하다
趙秦州刺史陳安 求朝於曜어늘 曜辭以疾한대하여 大掠而歸하다
隴上氐, 羌 皆附之하여 有衆十餘萬하니 自稱涼王하고 獲趙將呼延寔及魯憑하여 將用之러니 二人 不屈이어늘 皆殺之하다
三月 據石頭하여 殺驃騎將軍戴淵 尙書僕射周顗하니 甘卓 還襄陽하다
夏四月 還武昌하다
帝徴戴淵, 劉隗하여 入衛하니 百官 迎於道러니 隗岸幘大言하여 意氣自若注+岸幘者, 幘微脫額也.하고 與刁協으로 勸帝盡誅王氏하니 帝不許하다
王導帥宗族하고 每旦 詣臺待罪러니 周顗将入 導呼之曰 伯仁 以百口累卿注+伯仁, 顗字. 人謂其家之親屬爲百口, 欲使顗保護導, 以全其家也.하노라 顗直入不顧하고
既見帝 言導忠誠하여 申救甚至하니 帝納其言하다 顗喜飲酒하여 至醉而出이어늘
導又呼之호되 顗不與言하고 顧左右曰 今年 殺諸賊奴하고 取金印如斗大하여 繋肘後라하다
既出 又上表하여 明導無罪하여 言甚切호되 導不知하고 恨之러라
帝命還導朝服하고 召見之하니 導稽首曰 逆臣賊子 何代無之리오마는 不意今者 近出臣族이니이다
帝跣而執其手하고 曰 茂弘 方寄卿以百里之命하노니 是何言邪注+茂弘, 導字. 寄百里之命, 謂攝君之政令.
以爲前鋒大都督하고 詔曰 導以大義滅親하니 可以吾爲安東時節假之注+懷帝時, 帝鎭揚州, 領安東將軍.하노라
將軍周札 素矜險好利러니 帝使隗軍金城하고 札守石頭注+金城, 在丹楊江乘蒲洲上.하다
至石頭하여 欲攻隗어늘 杜弘曰 隗死士多하여 未易可克이요 周札少恩하여 兵不爲用하니 攻之必敗 札敗則隗走矣리이다
從之하여 以弘爲前鋒하니 果開門納弘하다
據石頭하고 歎曰 吾不復得爲盛徳事矣로다 謝鯤曰 何爲其然也 但使自今已往으로 日忘日去耳注+言率德改行, 當使人心上日漸忘日漸去耳, 蓋因其知非而導以善也. 或曰 “言日復一日, 浸忘前事, 則君臣猜嫌之跡亦日去耳.”니이다
帝命協, 隗, 淵, 導, 顗等하여 分道出戰이러니 皆大敗
太子紹欲自帥將士决戰이어늘 温嶠執鞚諫曰注+鞚, 苦貢切, 馬勒. 殿下 國之儲副어시늘 奈何以身輕天下니잇고하고 抽劍斬鞅하니 乃止注+鞅, 於兩切, 頸靻也.하다
擁兵不朝하고 放士卒刼掠하니 宫省奔散호되 惟將軍劉超 按兵直衛하고 及侍中二人으로 侍帝側이러라
帝遣使謂敦曰 公 若不忘本朝하고 於此息兵이면 則天下尙可共安이어니와 如其不然이면 朕當歸琅邪하여 以避賢路하리라
協, 隗敗還 帝流涕하고 執其手하여 勸令避禍하고 給人馬하여 使自爲計하다
素無恩紀하니 募從者 皆委之하여 爲人所殺注+恩紀, 謂恩情相紀錄也, 此言刁協素無恩意, 記念收錄人也.하다
隗奔後趙러니 官至太子太傅而卒하니라
帝令百官으로 詣石頭見敦한대 謂淵曰 前日之戰 有餘力乎 淵曰 豈敢有餘리오 但力不足耳로라
敦曰 吾今此舉 天下以爲何如 淵曰 見形者 謂之逆이요 體誠者 謂之忠이니라 笑曰 卿可謂能言이로다
又謂周顗曰 伯仁 卿負我注+愍帝建興元年, 顗爲杜弢所攻, 投敦於豫章, 故敦以爲德.로다 顗曰 公 戎車犯順이어늘 下官 親帥六軍하여 不能其事하여 使王旅奔敗하니 以此負公이로라
敦以太子有勇略하여 爲朝野所嚮이라하여 欲誣以不孝而廢之하여
大會百官하고 問溫嶠曰 皇太子以何徳稱고하니 聲色俱厲
嶠曰 鈎深致遠 蓋非淺局所量이요 以禮觀之하면 可謂孝矣注+言太子旣有鉤深致遠之才, 而又盡事親之禮, 所以解敦不孝之誣也.니라 衆皆以爲信然하니 敦謀遂沮하다
帝召周顗하여 謂曰 近日大事 二宫無恙하고 諸人平安하니 大將軍 固副所望邪 顗曰 二宫 自如明詔어니와 臣等 尙未可知니이다
勸顗避敦한대 顗曰 吾備位大臣하니 朝廷喪敗 寧可草間求活하여 外投胡, 越邪
參軍吕猗 素以姦諂으로 爲淵所惡러니 説敦曰 周, 戴皆有髙名하니 足以惑衆이요 近者之言 曽無怍色注+謂二人答敦之言.하니 公不除之 恐必有再舉之憂리이다
然之하여 以問導曰 周, 戴 南北之望이니 當登三司無疑也리라 導不答注+顗汝南人, 淵廣陵人, 晉氏南渡, 二人名冠當時. 三司, 太尉․司徒․司空也.하니
又曰 止應令, 僕邪 又不答注+令僕, 尙書令及左右僕射也.이라 敦曰 若不爾 正當誅爾리라 又不答하니 遂遣部將收之하다
顗被收 路經太廟러니 大言曰 賊臣王敦 傾覆社稷하여 枉殺忠臣하니 神祇有靈이면 當速殺之하소서
收人 以戟傷其口하여 流血至踵이로되 容止自若하니 觀者皆爲流涕 并淵殺之注+爲, 去聲. 下正爲․竊爲同.하다
帝使敦弟彬勞敦하니 素與顗善이라 先往哭之하고 然後見敦하니
怪其容慘하여 問之어늘 彬曰 向哭伯仁하니 情不能已로이다
怒曰 伯仁 自致刑戮하고 且凡人遇汝어늘 汝何哀而哭之
勃然數之曰 兄 抗旌犯順하고 殺戮忠良하여 圖爲不軌하니 禍及門戸矣注+抗, 擧也.리이다 辭氣慷慨하고 聲淚俱下
大怒曰 爾以吾爲不能殺汝邪 導勸彬起謝한대 彬曰 脚痛不能拜 且此復何謝닛고
敦曰 脚痛 孰若頸痛이리오호되 殊無懼色이러라
導後料檢中書故事라가 乃見顗表하고 執之流涕曰 吾雖不殺伯仁이나 伯仁 由我而死하니 幽冥之中 負此良友注+自愧於敦三問不答之時也.라하니라
聞甘卓起兵하고 大懼하여 卓兄子卬 爲敦參軍이러니 遣卬歸説卓하여 使旋軍하니
雖慕忠義 多疑少决이라 聞周, 戴死하고 流涕謂卬曰
吾之所憂 正爲今日이라 若徑據武昌이면 敦勢逼하여 必刼天子하여 以絶四海之望하리니 不如更思後圖 吾據敦上流하니 敦亦未敢遽危社稷也라하고 即命旋軍하다
樂道融曰 今分兵斷彭澤하여 使敦上下不得相赴하면 其衆 自然離散이니 可一戰擒也注+彭澤縣, 屬豫章郡, 彭蠡湖自此入於大江.리이다 將軍 起義兵而中止하시니 竊爲將軍不取也하노이다
不從하니 道融 憂憤而卒하다 本寛和러니 忽更彊塞하여 徑還襄陽하여 意氣騷擾하니 識者知其將死矣注+此彊, 謂彊暴也. 塞, 謂窒塞而不疏通.러라
改易百官及諸軍鎮하여 惟意所欲하고 將還武昌이어늘
謝鯤曰 公 若朝天子하여 使君臣釋然이면 則物情 皆悦服矣리이다 竟不朝而去하여 四月 還武昌하다
敦兵 陷長沙하니 湘州刺史譙王氶 死之하다
魏乂等 攻湘州하여 百日拔之하여 執譙王氶하고 殺虞悝하니
子弟對之號泣이어늘 悝曰 人生 會當有死 今闔門 爲忠義之鬼하니 亦復何恨이리오
又以檻車載氶하여 送武昌하니 主簿桓雄 書佐韓階 從事武延 毁服爲僮하여 從氶하여 不離左右注+府諸曹, 各有書佐. 毁服者, 謂毁其常服, 爲僮奴之服.러라
乂見雄姿貌舉止非凡人하고 憚而殺之하며
王廙承敦旨하여 殺氶於道하니 階, 延 送氶喪至都하여 葬之而去하니라
五月 하다
卓家人 皆勸卓備敦호되 不從하고 悉散兵佃作이러니
襄陽太守周慮 承敦意하여 襲殺之하고 傳首於敦하니 敦以從事周撫代卓하여 鎮沔中注+撫, 訪之子也. 自南鄭至襄陽, 沔水所由也, 故謂之沔中.하다
敦既得志 暴慢滋甚하여 四方貢獻 多入其府하고 將帥, 岳牧 皆出其門注+舜有四岳․十二牧, 故後之居方面者, 謂之岳牧.이러라
以沈充, 錢鳳爲謀主하니 二人所譛 無不死者러라
在鄒山三年 有衆數萬注+愍帝建興元年, 帝以鑒鎭鄒山, 今旣數年矣. 所謂三年有衆數萬者, 言鑒旣鎭鄒山之後, 三年之間, 民歸之者, 有此數也.이로되 戰争不息하고 百姓饑饉하니 爲後趙所逼하여 退屯合肥하다
僕射紀瞻 以鑒雅望清徳 宜從容臺閣이라하여 疏請徴之한대 乃徵拜尙書하다
徐, 兗間諸塢 多降於後趙하니 趙置守宰以撫之하다
冬十月 後趙冦譙하니 祖約 退屯壽春하다
祖逖 既卒 後趙屢冦河南하여 拔襄城, 城父하고 圍譙注+此河南, 槪言黃河之南, 非專指河南郡也. 父, 音甫, 城父縣, 前漢屬沛郡, 後漢屬汝南郡, 魏․晉屬譙國.하니 祖約 不能禦하여 退屯壽春하다
後趙遂取陳留하니 梁, 鄭之間 復騷然矣러라
閏十一月 注+壽, 四十七이라하다 司空導受遺詔輔政하고 太子紹即位하다
帝恭儉有餘 而明斷不足이라 大業未復而禍亂内興하여 竟以憂憤成疾而崩하니
太子即位하여 尊所生母荀氏하여 爲建安君하다
後趙右長史張賓하다
後趙王勒 哭之慟하여 曰 天不欲成吾事邪 何奪吾右侯之早也
程遐代爲右長史러니 每與遐議 有不合이면 輒歎曰 右侯捨我去하니 豈非酷乎아하고 因流涕彌日注+酷, 慘也, 虐也. 言天奪張賓之年, 何其虐我之慘也.이러라
張茂取隴西, 南安하여 置秦州하다


[] 나라(동진東晉) 중종中宗 원황제元皇帝 영창永昌 원년이다.
[] 조주趙主(전조前趙) 유요劉曜 광초光初 5년이고, 후조後趙 고조高祖 석륵石勒 4년이다.
[] 봄 정월에 왕돈王敦이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초왕譙王 사마승司馬氶감탁甘卓이 격문을 돌려 토벌하니, 왕돈이 군대를 나누어 장사長沙를 침략하였다.
[] 처음에, 왕돈王敦은 이미 조정의 뜻과 괴리가 있어서 조정의 인사 중에 당시 명망이 있는 자를 억지로 끌어다가 임용하여注+① “羈錄”은 억지로 끌어다가 임용하는 것이다. 자기의 막부幕府에 두었다. 양만羊曼사곤謝鯤장사長史로 삼았는데,注+② 羊曼은 羊祜의 형의 손자이다. 사곤이 종일토록 술에 취하여 지내므로 일을 맡기지 않았다.
왕돈이 장차 난을 일으키려 할 적에 사곤에게 이르기를 “유외劉隗가 간사하여 장차 사직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내 황제( 원제元帝) 곁에 있는 악한 자들을 제거하고자 하니, 어떠한가?” 하니, 사곤이 말하기를 “유외가 실로 의 시초가 되나 의 여우와 (사당)의 쥐입니다.”注+③ 後漢의 虞延이 말하기를 “城의 여우와 社의 쥐가 불을 놓아 태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음은, 의탁할 곳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또 中山王 劉勝이 말하기를 “社의 쥐에게는 물을 주입하지 않고 집의 쥐에게는 불을 놓아 연기를 피우지 않으니, 이는 의탁한 곳이 社이고 집이기 때문이다.” 하였다. ≪爾雅翼≫에 “管仲이 말하기를 ‘社를 만들 적에 나무를 묶어 흙을 바르면 쥐가 가서 몸을 의탁하는데, 불을 놓아 연기를 피우면 그 나무를 태울까 두렵고, 물을 주입하면 그 진흙이 떨어져 나올까 두려우니, 이 쥐를 죽일 수 없는 것은 社 때문이다.’ 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군주의 좌우에 있는 신하를 비유한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왕돈이 노하여 말하기를 “그대는 용렬한 재주이니, 어찌 대체大體를 알겠는가.” 하였다.
王敦擧兵謀逆叛王敦擧兵謀逆叛
[] 이때에 이르러 왕돈王敦무창武昌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다음과 같이 상소上疏하였다. “유외劉隗가 아첨하여 간사하고 남을 모함하며 해쳐서 생사여탈生死與奪의 권한을 제 마음대로 행사하니, 이 곧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려 합니다. 아침에 유외의 머리가 매달려 있으면 제군諸軍이 저녁에 후퇴할 것입니다.
옛날 태갑太甲나라의 법도를 무너뜨렸는데 다행히 이윤伊尹의 충성된 뜻을 받아들여서 나라의 가 다시 창성하였으니, 원컨대 폐하는 깊이 여러 번注+① 三(여러 번)은 去聲이다.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사해四海가 다시 편안하고 사직이 영원히 견고할 것입니다.”
심충沈充 또한 오흥吳興에서 군대를 일으켜 왕돈에게 호응하였다.
[] 왕돈王敦무호蕪湖에 이르러 또다시 표문을 올려서 조협刁協의 죄상을 아뢰니, 황제가 크게 노해서 다음과 같은 조령詔令을 내렸다.
“왕돈이 은총과 위엄을 믿고 감히 함부로 패역한 짓을 하면서 태갑太甲에 비하여 유폐하여 가두고자 하니, 이것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인들 차마 못하겠는가. 내 이제 직접 육군六軍을 거느리고서 큰 역신逆臣을 주벌할 것이니, 왕돈을 죽이는 자가 있으면 오천호五千戸에 봉하겠다.”
태자太子 중서자中庶子 온교溫嶠복야僕射 주의周顗(주의)에게 이르기를 “대장군(왕돈)의 이 조처가 근거한 바가 있는 듯하나, 응당 지나치지 않은가.” 하니, 주의가 말하기를 “군주가 만일 요순堯舜이 아니면 어찌 잘못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하여〉 어찌 군대를 들어 협박한단 말인가. 대장군의 거동이 이와 같으니, 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왕돈王敦이 처음 군대를 일으켰을 적에, 양주자사梁州刺史 감탁甘卓에게 사자를 보내 통보해서 함께 양자강을 따라 내려가기로 약속하자 감탁甘卓이 이를 허락했었는데, 뒤에 다시 주저하며 달려가지 않았다.
혹자가 감탁을 설득하기를 “우선 거짓으로 왕돈에게 허락하고 왕돈이 도성에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토벌하라.” 하니, 감탁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에 내가 먼저는 그를 따랐다가 뒤에 도모하였는데, 의논하는 자들이 ‘내가 핍박을 두려워하여 변란을 생각했다.’고 하니, 나는 마음속으로 항상 이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이제 만약 다시 그렇게 한다면, 어떻게 스스로 해명할 수 있겠는가.”
[] 왕돈王敦참군參軍 환비桓羆(환비)를 보내어 초왕譙王 사마승司馬氶을 설득해서 자기의 군사軍司가 되어 줄 것을 청하자, 사마승이 탄식하기를 “나는 아마도 죽을 것이다. 땅이 멀고 백성들이 적으며 형세가 외롭고 원조가 끊겼으니, 장차 어떻게 성공하겠는가. 그러나 내가 충의에 죽을 수 있으니,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하였다.
[] 사마승司馬氶장사長沙 우회虞悝(우회)에게 격문을 보내어서 그를 장사長史로 삼았는데, 이때 마침 우회는 모친상母親喪을 치르고 있었다.
사마승이 가서 조문하고 말하기를 “황실이 막 위태로우니, 상중에 금혁金革(전쟁)의 일은 고인古人이 사양하지 않은 바이다. 장차 어떻게 나를 가르쳐주겠는가.”注+① ≪禮記≫에 “子夏가 묻기를 ‘삼년상에 卒哭을 하고 金革의 일을 피하지 않는 것이 禮입니까? 이것은 애당초 有司가 하는 것입니까?’ 하자, 孔子가 말씀하시기를 ‘내 老聃에게 들으니, 옛날 魯公 伯禽은 이유가 있어서 〈부득이하게 전쟁을〉 하였지만, 지금 삼년상을 만난 자가 자신의 이로움을 따라 출전하는 것은, 내 알지 못하겠다.’ 하셨다.” 하였다. 또 ≪春秋公羊傳≫에 “옛날에 신하가 큰 喪을 당했으면, 人君은 3년 동안 그의 문에 가서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小祥을 지내고 난 뒤에는 皮弁과 冕服으로 金革의 일에 종사할 수 있으니, 인군이 이 일을 시키는 것은 잘못이요, 신하가 행하는 것은 예이다. 閔子가 要絰을 하고서 전쟁하는 일에 종사하였는데, 공자가 이를 좋게 여기셨다.” 하였다. 하자,
우회가 말하기를 “저의 고을은 황폐하여 나아가 토벌하기가 어렵습니다. 마땅히 우선 병력을 거두어 굳게 지키고 사방四方에 격문을 돌리면 왕돈王敦의 형세가 반드시 분열될 것이니, 분열된 뒤에 도모하면 거의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마승이 마침내 왕돈이 보낸 환비桓羆를 가두고 우회를 장사長史로 삼고 아우 사마망司馬望사마司馬로 삼고는 원근遠近에 격문을 돌려서 왕돈의 죄악을 나열하니, 의 안이 모두 호응하였다.
오직 왕돈의 자형姊兄정담鄭澹상동태수湘東太守注+② 吳나라 孫亮 太平 2년(257)에 長沙의 東部都尉를 나누어 湘東郡을 세웠다. 있으면서 명령을 따르지 않자, 사마승은 우망虞望을 시켜 토벌하여 참수해서 사방 경내에 보이게 하였다.
[] 사마승司馬氶은 또다시 주부主簿 등건鄧騫을 보내어 감탁甘卓을 설득하기를 “유대련劉大連(유외劉隗)이注+① 大連은 劉隗의 字이다. 비록 교만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잃었으나, 천하에 큰 해를 끼친 인물이 아니다.
그런데 대장군大將軍(왕돈王敦)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대궐로 향하니, 지금이야말로 충신忠臣의사義士가 충절을 다할 때이다. 방백方伯의 임무를 맡고 있으니, 황제의 말씀을 받들어 죄인을 토벌한다면, 바로 나라 환공桓公, 나라 문공文公과 같은 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감탁甘卓참군參軍 이량李梁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외효隗囂(외효)가 세력을 믿고 마구 날뛸 적에 두융竇融하서河西 지역을 보존하고서 광무제光武帝를 받들어 끝내 그 복을 받았습니다.
지금은 다만 군대를 주둔시키고 앉아서 기다려야 하니, 왕돈王敦의 일이 만약 성공하면 반드시 장군에게 방면方面의 임무를 맡길 것이요, 승리하지 못하면 조정이 반드시 장군으로 왕돈을 대신하게 할 것입니다. 어찌 부귀하지 못함을 근심하여 조정에서 마련해놓은 승리할 계책을 버려두고 한 번 싸움에 존망存亡을 결단하려 합니까.”
이에 등건鄧騫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광무제는 창업할 초기를 당했기 때문에 외효와 두융이 머뭇거리며 사태를 관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본조本朝에 있어 장군의 처지는 두융에 비할 바가 아니요, 대부大府에 있어 양양襄陽의 입지는注+① 襄陽은 王敦의 府를 大府(상급관부)로 삼았다. 하서河西처럼 견고하지 않습니다.
만일 왕돈이 유외劉隗를 이기고 무창武昌으로 돌아가서 석성石城注+② 李賢이 말하기를 “石城의 옛 성은 復州 沔陽縣 동남쪽에 있다.” 하였다. 수비병을 증원하고 형주荆州상주湘州의 곡식을 수송하는 길을 차단한다면, 장군이 어디로 돌아가려 하신다 말입니까?
형세가 남의 손에 달려 있는데, ‘내게는 묘당廟堂에서 필승하기 위해 세운 계책[廟勝]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내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또 남의 신하가 되어서, 국가에 위난이 있는데도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는 것이 의리에 온당합니까.
장군의 위엄과 명성으로 부절符節을 잡고 북을 울려 함으로써 역신逆臣을 토벌하면, 무창을 점령하는 것이 썩은 나무를 꺾어 주워 모으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무창을 평정한 다음 그곳의 군수 물자를 점유하고서 사졸士卒들을 불러 회유하여 돌아오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집으로 돌아가듯 편안하게 해준다면, 이것이 바로 입니다.
[] 왕돈王敦감탁甘卓이 뒤에서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또다시 참군參軍 악도융樂道融을 보내어 가서 감탁을 맞이해오게 하였는데, 악도융은 왕돈의 패역함에 분노하여 도리어 다음과 같이 감탁을 설득하였다.
“왕돈이 배은망덕하고 반역하여 군대를 일으켜 대궐을 향하여 가는데, 그대가 나라의 큰 은혜를 받고서 그와 행동을 같이한다면, 살아서는 역신逆臣이 되고 죽어서는 어리석은 귀신이 될 것이니, 애석하지 않습니까. 그대를 위한 계책으로는, 거짓으로 허락하여 그의 명에 응하는 것처럼 하고 급히 달려가서 무창武昌을 기습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싸우지 않고도 왕돈이 스스로 궤멸할 것입니다.”
감탁이 비로소 뜻을 결단하고서 마침내 격문을 내어 왕돈의 반역하는 죄상을 나열하고 자기가 통솔하고 있는 군대를 거느리고서 왕돈을 토벌하였다.
참군參軍광주廣州로 보내어 도간陶侃과 약속하게 하니, 도간이 참군參軍 고보髙寳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가게 하였다. 무창武昌의 성안에 감탁의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니,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 왕돈王敦위예魏乂(위예)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장사長沙를 공격하게 하니, 장사는 해자垓子가 완전하지 못한 데다가 비축해놓은 물자도 없어서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혹자가 사마승司馬氶에게 남쪽으로 도간陶侃에게 가서 의탁하거나 혹은 후퇴하여 영릉零陵계양桂陽을 점거하라고 설득하자,
사마승이 말하기를 “나의 뜻은 충의忠義에 죽고자 하니, 어찌 살기를 탐하여 구차히 죽음을 면해서 패하여 달아난 장수가 되겠는가. 일이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백성들로 하여금 나의 마음을 알게 하고자 할 뿐이다.” 하고는 마침내 성에 올라 굳게 지켰다.
우망虞望전사戰死하자, 감탁甘卓 또한 사마승에게 편지를 보내어 〈굳게 수비할 것을〉 권하고 또 말하기를 “마땅히 병력을 거느리고 면수沔水 어귀로 출동하여 왕돈의 돌아가는 길을 차단해야 하니, 그렇게 하면 상주湘州의 포위가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하니,
사마승이 답서에 이르기를 “족하足下가 능히 갑옷을 말아 가볍게 무장을 갖추고 번개처럼 빨리 달려가면 그래도 미칠 수 있지만, 만약 의심을 품고 머뭇거리면 나를 마른 생선 가게에서 찾게 될 것이다.”注+① 莊子가 수레바퀴 자국의 고인 물에 빠져 있는 붕어를 보았는데, 붕어가 말하기를 “어찌 나를 살려 줄 한 말, 한 되의 물이 없겠는가.” 하였다. 장자가 말하기를 “내가 西江의 물을 터서 너를 맞이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붕어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처럼 한다면, 일찌감치 나를 마른 생선가게에서 찾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하였다.
그러나 감탁은 사마승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다.
[] 아들 사마욱司馬昱(사마욱)을 봉하여 낭야왕琅邪王으로 삼았다.
[] 나라(전조前趙)가 양난적楊難敵을 봉하여 무도왕武都王으로 삼았다.
[] 조주趙主 유요劉曜가 직접 양난적楊難敵을 공격하니, 양난적이 맞아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서 후퇴하여 구지仇池를 점거하고는 사자를 보내어 번신藩臣을 칭하였다. 나라는 그를 무도왕武都王으로 삼았다.
[] 진안陳安나라(전조前趙)를 배반하였다.
[] 나라(전조前趙) 진주자사秦州刺史 진안陳安유요劉曜에게 자신이 입조入朝하여 알현할 것을 청하였으나, 유요가 병을 이유로 사양하니, 진안이 노하여 크게 노략질을 하고 돌아갔다.
이에 농상隴上저족氐族강족羌族이 모두 진안에게 귀의하여 10여 만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니, 진안은 스스로 양왕涼王을 칭하였다. 나라 장수 호연식呼延寔노빙魯憑을 사로잡아 장차 그들을 등용하려고 하였는데, 두 사람이 굴복하지 않자 모두 죽였다.
[] 3월에 왕돈王敦석두성石頭城을 점거하여 표기장군驃騎將軍 대연戴淵상서복야尙書僕射 주의周顗를 죽이니, 감탁甘卓양양襄陽으로 돌아갔다.
周顗周顗
여름 4월에 왕돈이 무창武昌으로 돌아갔다.
[] 황제( 원제元帝)가 대연戴淵유외劉隗를 불러 들어와 건강建康을 호위하게 하니, 백관百官들이 길에서 맞이하였다. 유외는 두건을 높이 써 이마를 드러내고注+① “岸幘”은 두건이 이마에서 약간 벗겨진 것이다. 큰소리로 말하여 의기意氣가 평상시와 똑같았고, 조협刁協과 함께 황제에게 왕씨王氏를 다 주살할 것을 권하였는데, 황제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왕도王導종족宗族들을 거느리고 매일 아침 대청臺廳에 나가 죄가 내리기를 기다렸는데, 주의周顗가 궁궐로 들어가려고 할 적에 왕도가 그를 부르며 말하기를 “백인伯仁아, 우리 친족의 목숨을 에게 부탁하노라.”注+② 伯仁은 周顗의 字이다. 사람들이 자기 집안의 친속을 일러 百口라 하니, 周顗에게 왕도 자신을 보호해서 집안 식구들을 온전하게 해줄 것을 바란 것이다. 하였으나, 주의는 돌아보지 않고 곧장 들어갔다.
주의가 황제를 알현하고는, 왕도의 충성을 말하면서 그의 억울함을 하소하고 구원을 청하기를 매우 지극히 하니, 황제가 주의의 말을 받아들였다. 주의가 기뻐하여 술을 마시다가 술이 취한 뒤에 궁궐을 나왔다.
왕도가 또다시 그를 불렀으나, 주의는 그와 말하지 않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금년에 여러 역적의 종놈들을 죽이고 말만큼 큰 금인金印을 취하여 팔뚝 뒤에 차겠다.” 하였다.
주의는 궁궐에서 나온 뒤에 또다시 표문을 올려서 왕도의 무죄함을 변명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였다. 그러나 왕도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주의를 원망하였다.
[] 황제가 하여 왕도王導에게 조복朝服을 다시 돌려주고 불러들여 만나보니, 왕도가 머리를 조아리고 아뢰기를 “역신逆臣난신적자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이번에 가까이 신의 집안에서 나올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맨발로 달려 나가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무홍茂弘아, 이 막 그대에게 백리百里을 맡기려 하는데, 이 무슨 말인가.”注+① 茂弘은 王導의 字이다. 百里의 命을 맡기는 것은 군주의 政令을 대리하게 함을 이른다. 하고는,
왕도를 전봉대도독前鋒大都督으로 삼고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왕도가 대의大義를 위하여 친족 간의 사사로운 정을 돌아보지 않으니, 내가 안동장군安東將軍으로 있었을 때의 부절符節을 그에게 빌려주노라.”注+② 懷帝 때에, 元帝가 揚州를 진주하면서 安東將軍을 겸하였다. 하였다.
[] 장군將軍 주찰周札이 평소 교만하고 음험하며 이익을 좋아하였는데, 황제가 유외劉隗로 하여금 금성金城注+① 金城은 丹楊郡 江乘縣 蒲洲 가에 있다. 주둔하게 하고 주찰로 하여금 석두성石頭城을 지키게 하였다.
왕돈王敦이 석두성에 이르러 유외를 공격하려고 하자, 두홍杜弘이 말하기를 “유외에게는 사력死力을 다하여 싸우는 병사가 많아서 쉽게 이길 수가 없고, 주찰은 은혜가 적어서 병사들이 그를 위해 쓰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니, 그를 공격하면 반드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주찰이 패하면 유외가 달아날 것입니다.” 하였다.
왕돈이 그 말을 따라서 두홍을 선봉으로 삼자, 주찰이 과연 성문을 열고 두홍을 받아들였다.
왕돈이 석두성을 점거하고서 탄식하기를 “내 다시는 성덕盛德의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자, 사곤謝鯤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다만 지금 이후로 〈옛사람의 덕을 따라 행실을 고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이 일을〉 날마다 잊게 하고 날마다 기억에서 사라지게 할 뿐입니다.”注+② 〈“自今己往 日忘日去”는〉 옛사람의 덕을 따라 행실을 고쳐서 마땅히 사람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이 일을 날마다 점점 잊게 하고 날마다 점점 기억에서 사라지게 함을 말한 것이니, 이는 자신의 잘못을 아는 것을 바탕으로 善으로 옮겨가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하루 또 하루 날마다 점점 지난 일을 잊으면 군신 간에 의심하고 혐의하는 자취 또한 날로 사라지게 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황제가 조협刁協유외劉隗, 대연戴淵왕도王導, 주의周顗 등에게 명해서 길을 나누어 나가 싸우게 하였는데, 이들이 모두 대패하였다.
태자太子 사마소司馬紹가 직접 장병들을 거느리고 결전决戰하고자 하자, 온교温嶠가 말고삐를注+③ 鞚은 苦貢의 切이니, 말의 고삐이다. 잡고 하기를 “전하殿下는 나라의 세자이신데, 어찌하여 천하에 가볍게 처신하려 하십니까.” 하고는 검을 뽑아 말의 가슴걸이를注+④ 鞅은 於兩의 切이니, 말의 목에 매는 가죽끈이다. 베니, 태자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 왕돈王敦이 병력을 보유한 채 황제에게 조회하지 않고 사졸士卒들을 풀어놓아 백성들을 겁탈하고 노략질하니, 궁성宫省 안의 사람들이 사방으로 달아나 흩어졌으나, 오직 장군將軍 유초劉超가 군대를 거느리고 궁성을 호위하면서 시중侍中 두 사람과 함께 황제의 곁에서 모셨다.
황제가 사자를 보내어 왕돈에게 이르기를 “이 만약 본조本朝를 잊지 않고 여기에서 군대를 해산한다면 천하가 그래도 함께 편안할 수 있지만, 만일 그렇지 않으면 은 마땅히 낭야琅邪로 돌아가서 황제의 지위를 현자賢者에게 사양하겠다.” 하였다.
[] 조협刁協유외劉隗가 패하고 돌아오자, 황제가 눈물을 흘리고 그들의 손을 잡고서 를 피하라고 권하고는, 그들에게 하인과 말을 지급하여 스스로 살 계책을 세우게 하였다.
조협은 평소 은혜로운 정이 없으니,注+① “恩紀”는 은혜로운 정으로 기억함을 이르니, 이는 刁協이 평소 은혜로운 뜻으로 사람들을 기억하여 거두어 씀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자신이 불러들여 따르게 하던 자들마저도 모두 그를 버려서, 〈결국에는〉 남에게 살해를 당하였다.
유외는 후조後趙로 달아났는데, 벼슬이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이르러 하였다.
[] 황제가 백관百官들로 하여금 석두성石頭城에 나아가 왕돈王敦을 보게 하자, 왕돈이 대연戴淵에게 이르기를 “지난날 전투를 하고도 여력餘力이 있는가?” 하니, 대연이 대답하기를 “어찌 감히 여력을 남겨두었겠습니까. 다만 힘이 부족할 뿐입니다.” 하였다.
왕돈이 묻기를 “나의 이번 거사擧事를 천하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자, 대연이 말하기를 “외형外形을 보는 자는 반역이라고 이르고, 성심誠心을 아는 자는 충성이라고 이릅니다.” 하였다. 왕돈이 웃으며 말하기를 “은 말을 잘한다고 할 만하다.” 하였다.
왕돈이 또다시 주의周顗에게 이르기를 “백인伯仁아, 이 나를 저버렸다.”注+① 愍帝 建興 원년(313)에 周顗가 杜弢에게 공격을 당하고 豫章에 있는 王敦에게 가서 의지하였으므로, 왕돈은 자신이 주의에게 은덕을 베풀었다고 여긴 것이다. 하니, 주의가 말하기를 “병거兵車를 동원하여 〈반역을 일으켜서〉 순종하는 도리를 범하였는데, 하관下官이 친히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출전하였으나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여 황제의 군대로 하여금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으니, 이 때문에 을 저버렸습니다.” 하였다.
[] 왕돈王敦은 태자가 용맹과 지략이 있어서 조야朝野의 인심이 태자를 향한다고 여겨, 태자를 불효한다고 모함해서 폐위시키고자 하였다.
왕돈이 백관百官들을 크게 모아놓고 온교溫嶠에게 묻기를 “황태자皇太子는 무슨 덕으로 칭송을 받는가?” 하였는데, 이때 왕돈의 목소리와 얼굴빛이 모두 험악하였다.
온교가 말하기를 “심오하고 원대한 것을 탐색하여 아시는 것은 진실로 저와 같이 국량局量이 얕은 자가 헤아릴 바가 아니요, 예로써 관찰하면 효도한다고 이를 만합니다.”注+① 〈“鈎深致遠……可謂孝矣”는〉 태자가 이미 심오하고 원대한 것을 탐색하여 알아내는 재주가 있고 또 어버이를 섬기는 예를 다하였다고 말하였으니, 王敦이 태자를 불효한다고 모함한 것을 변명해준 것이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옳다고 하였다. 이에 왕돈의 계책이 마침내 저지되었다.
[] 황제가 주의周顗를 불러 이르기를 “근일近日의 큰일에 이궁二宫(황제皇帝태자太子)에 탈이 없고 여러 사람들이 평안하니, 대장군大將軍(왕돈王敦)이 진실로 나의 소망에 부응하겠는가?” 하자, 주의가 말하기를 “이궁二宫의 처지는 폐하의 밝으신 말씀과 같을 듯하지만 신들의 처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혹자가 주의에게 왕돈을 피하여 숨으라고 권하자, 주의가 말하기를 “내 대신大臣의 반열에 있으니, 조정이 패망하는 즈음에 어찌 수풀 사이에서 살기를 구하여 밖으로 북쪽과 남쪽 오랑캐에게 의지하겠는가.” 하고 거절하였다.
[] 왕돈王敦참군參軍 여의吕猗(여의)가 평소 간사하고 아첨하였으므로 대연戴淵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는데, 여의가 왕돈을 설득하기를 “주의周顗대연戴淵은 모두 높은 명성이 있으니 충분히 사람들을 현혹시킬 수 있고, 또 근래 그들의 말에 일찍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으니,注+① 〈“近者之言 曾無怍色”은〉 周顗와 戴淵 두 사람이 王敦에게 대답한 말을 이른다. 이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재차 거병擧兵하는 우려가 있을 듯합니다.” 하였다.
왕돈이 그의 말을 옳게 여겨 왕도王導에게 묻기를 “주의와 대연은 남쪽과 북쪽 지역에 명망이 있는 사람이니, 삼사三司의 지위에 올라야 하는 것은 추호도 의심할 것이 없다.”注+② 周顗는 汝南 사람이고 戴淵은 廣陵 사람이니, 晉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했을 적에 두 사람의 명성이 당시의 으뜸이었다. 三司는 太尉, 司徒, 司空이다. 하였으나, 왕도가 대답하지 않았다.
또다시 말하기를 “이들은 다만 상서령尙書令우복야右僕射注+③ 令僕은 尙書令과 左右僕射이다. 지위를 맡겨야 하는가?” 하였으나, 왕도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왕돈이 말하기를 “만일 그렇지 않다면 바로 주벌誅伐을 당할 뿐이다.” 하였는데, 왕도가 또다시 대답을 하지 않으니, 왕돈은 마침내 부장部將을 보내어 이들을 체포하였다.
[] 주의周顗가 체포될 때에 태묘太廟를 지나게 되었는데, 큰 소리로 말하기를 “적신賊臣왕돈王敦사직社稷을 전복하고서 억울하게 충신을 죽이니, 천지신명天地神明이 영험하다면 마땅히 속히 그를 죽이소서.” 하였다.
그를 압송하던 사람이 창으로 그의 입을 찔러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렸으나, 주의의 행동거지가 태연자약하니, 이를 본 자들이 모두 그를 위하여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니, 아래 “正爲”와 “竊爲”의 爲도 같다. 눈물을 흘렸다. 주의를 대연戴淵과 함께 죽였다.
[] 황제가 왕돈王敦의 아우 왕빈王彬을 보내 왕돈을 위로하였다. 왕빈은 평소 주의周顗와 친하게 지냈으므로 먼저 주의의 에 가서 하고 난 뒤에 왕돈을 만나보았다.
왕돈이 그가 슬픈 용모를 띠고 있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까닭을 묻자, 왕빈은 대답하기를 “조금 전 백인伯仁(주의周顗)의 상에 통곡하였는데, 슬픈 정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왕돈이 노하여 말하기를 “백인은 형륙刑戮을 자초하였고 또 너를 보통 사람으로 대하였는데, 네가 무엇 때문에 그의 상에 슬퍼하여 곡하는가.” 하였다.
왕빈이 발끈하여 〈왕돈의〉 죄를 조목조목 열거하기를 “형이 깃발을 들고注+① 抗은 듦이다. 반역하여 순종하는 도리를 범하고 충량忠良을 살육하여 불궤不軌(반란)를 도모하니, 가 우리 가문에게 미칠 것입니다.” 하였는데, 어기語氣가 비분강개하였고 말할 때마다 눈물이 함께 흘러내렸다.
왕돈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내가 너를 죽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였다. 왕도王導가 왕빈에게 일어나 사죄할 것을 권하자, 왕빈은 말하기를 “다리가 아파서 절을 할 수가 없고, 또 이것이 무슨 사죄할 것이 있단 말입니까.” 하였다.
왕돈이 말하기를 “다리가 아픈 것이 어찌 목이 아픈 것만 하겠는가.” 하였으나, 왕빈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 왕도王導가 뒤에 중서성中書省에 보관된 옛 문건을 점검하다가 마침내 주의周顗가 올린 표문을 보고는 이것을 손에 쥐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내가 직접 백인伯仁을 죽이지는 않았으나, 백인은 나 때문에 죽었다. 내가 어리석어서 이 좋은 벗을 저버렸구나.”注+① 〈“幽冥之中 負此良友”는〉 王敦이 세 번 물었는데 대답하지 않았던 때를 스스로 부끄러워한 것이다. 하였다.
[] 처음에, 왕돈王敦감탁甘卓이 군대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였다. 감탁의 형의 아들 감앙甘卬이 왕돈의 참군參軍으로 있었는데, 왕돈이 감앙을 돌려보내서 감탁에게 군대를 되돌리라고 설득하였다.
감탁은 비록 충의忠義를 사모하였으나 천성이 의심이 많고 결단력이 부족하였다. 주의周顗대연戴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감앙에게 이르기를
“내 근심하는 바는 바로 오늘과 같은 상황이었다. 만약 내가 곧바로 무창武昌을 점거하면 왕돈은 형세가 절박해져서 반드시 천자天子를 협박하여 사해四海의 기대를 끊을 것이니, 다시 후일의 도모를 생각하는 것만 못하다. 내가 왕돈의 상류 지역을 점거하고 있으니, 왕돈 또한 감히 대번에 사직을 위태롭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고는 즉시 회군回軍을 명하였다.
악도융樂道融이 말하기를 “지금 병력을 나누어 팽택彭澤注+① 彭澤縣은 豫章郡에 속하니, 彭蠡湖(팽려호)가 여기에서 양자강으로 들어간다. 길을 차단해서 왕돈의 위아래의 군대로 하여금 서로 달려가 구원하지 못하게 하면 그 무리가 자연히 흩어질 것이니, 이렇게 되면 한 번의 싸움으로 왕돈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장군이 의병義兵을 일으켰다가 중간에 그만두시니, 내 적이 장군을 위하여 이를 찬성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감탁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니, 악도융은 근심하고 분노하다가 하였다. 감탁은 본래 성품이 너그럽고 온화하였는데 갑자기 강포해지고 고집불통이 되어注+② 여기의 彊은 강포함을 이르고 塞은 막혀서 소통하지 못함을 이른다. 곧바로 양양襄陽으로 돌아가서는 의기意氣가 안정하지 못하니, 식견이 있는 자들은 장차 그가 죽을 줄을 알았다.
[] 왕돈王敦백관百官과 여러 군진軍鎮을 바꾸어 자기 마음대로 배치하고 장차 무창武昌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사곤謝鯤이 말하기를 “이 만약 천자天子에게 조회하여 군신 간에 불신不信이 풀리면,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기뻐하여 복종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돈은 끝내 조회하지 않고 떠나가서 4월에 무창武昌으로 돌아갔다.
[] 왕돈王敦의 군대가 장사長沙를 함락하니, 상주자사湘州刺史초왕譙王 사마승司馬氶이 이에 죽었다.
[] 위예魏乂 등이 상주湘州를 공격하여 100일 만에 함락해서 초왕譙王 사마승司馬氶을 사로잡고 우회虞悝를 죽이려 하였다.
자제子弟들이 우회를 향하여 울부짖자, 우회가 말하기를 “사람이 태어나서 응당 죽게 마련이다. 지금 온 가문이 충의로운 귀신이 될 것이니,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하였다.
위예가 또 함거檻車에 사마승을 태워 무창武昌으로 보내니, 주부主簿 환웅桓雄, 서좌書佐 한계韓階, 종사從事 무연武延이 자신들이 평상시 입던 의복을 훼손하여 종의 행색을 하고는 사마승을 따르면서 좌우를 떠나지 않았다.注+① 府의 曹마다 각각 書佐가 있었다. “毁服”은 평상시의 의복을 훼손하여 종의 복식으로 만듦을 이른다.
위예는 환웅桓雄의 모양새와 행동거지가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보고 두려워하여 그를 죽였다.
왕이王廙가 왕돈의 뜻을 받들어 사마승을 길에서 죽이니, 한계와 무연이 사마승의 상여喪輿도성都城까지 전송하여 장례하고 떠나갔다.
[] 5월에 왕돈王敦감탁甘卓을 죽였다.
[] 감탁甘卓의 집안사람들이 모두 감탁에게 왕돈王敦의 침입에 대비할 것을 권하였으나, 감탁은 이 말을 따르지 않고 군대를 모두 해산하여 농사에 종사하게 하였다.
양양태수襄陽太守 주려周慮가 왕돈의 뜻을 받들어 기습하여 감탁을 죽이고 그의 수급首級을 왕돈에게 전하니, 왕돈은 종사從事 주무周撫에게 감탁을 대신하여 면중沔中에 진주하게 하였다.注+① 周撫는 周訪의 아들이다. 南鄭에서 襄陽에 가려면 沔水를 경유해야 하므로 이곳을 일러 沔中이라 한다.
왕돈은 뜻을 얻자 포악함과 교만함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서 바치는 공물貢物을 대부분 자기의 로 들여보내고 장수와 악목岳牧注+② 舜임금에게는 四岳과 十二牧이 있었다. 그러므로 후세에 方面(藩鎭)에 거한 자를 岳牧이라 이른다. 모두 그의 문하門下에서 나왔다.
심충沈充전봉錢鳳모주謀主로 삼았는데, 두 사람이 참소하면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 가을 7월에 후조後趙태산泰山를 함락하여 서감徐龕을 죽이니, 연주자사兗州刺史 치감郗鑒(치감)이 후퇴하여 합비合肥에 주둔하였다.
[] 치감郗鑒추산鄒山에 진주한 지 3년 만에 수만 명의 무리를 보유하였으나注+① 愍帝 建興 원년(313)에 황제가 郗鑒을 鄒山에 진주하게 하였는데, 이제 몇 년이 지났다. 이른바 ‘3년 만에 수만 명의 무리를 보유하였다.’는 것은, 치감이 鄒山에 진주한 후 3년 사이에 백성들 중에 귀의한 자가 이런 숫자에 이르렀음을 말한 것이다. 전쟁이 계속되고 백성들이 기근에 허덕이는 데다가 후조後趙에게 핍박을 받으니, 후퇴하여 합비合肥에 주둔하였다.
복야僕射 기첨紀瞻이 치감의 높은 명망과 깨끗한 덕은 마땅히 대각臺閣에서 그 재능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하여, 상소를 올려 치감을 조정으로 불러들일 것을 청하자, 마침내 치감을 불러 상서尙書에 제수하였다.
서주徐州연주兗州 사이의 여러 들이 거의 다 후조後趙에 항복하니, 후조後趙수재守宰를 설치하여 진무鎭撫하였다.
[] 겨울 10월에 후조後趙 지역을 침략하니, 조약祖約이 후퇴하여 수춘壽春에 주둔하였다.
[] 조적祖逖하자, 후조後趙가 자주 하남河南 지역을 침략하여 양성襄城성보城父를 함락하고 지역을 포위하니,注+① 여기의 河南은 黃河의 남쪽을 널리 말한 것이요, 河南郡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다. 父는 音이 甫이니, 城父縣은 前漢 때에는 沛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汝南郡에 속하였고, 魏나라와 晉나라 때에는 譙國에 속하였다. 조약祖約이 방어하지 못하고 후퇴하여 수춘壽春에 주둔하였다.
후조後趙가 마침내 진류陳留를 점령하니, 지역의 사이가 다시 소란해졌다.
[] 윤11월에 황제( 원제元帝)가 하였다.注+① 향년이 47세였다. 사공司空 왕도王導유조遺詔를 받아 정사를 보필하고, 태자太子 사마소司馬紹가 즉위하였다.
[] 황제는 매우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나 시비를 밝게 가리고 과감하게 결단하는 능력은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대업大業을 회복하기 전에 화란禍亂이 안에서 일어나서 끝내 근심과 분노로 병을 이루어 하였다.
태자가 즉위하여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 순씨荀氏를 높여 건안군建安君이라 하였다.
[] 후조後趙우장사右長史 장빈張賓하였다.
[] 장빈張賓하자, 후조왕後趙王 석륵石勒이 슬피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하늘이 나의 일을 이루어주고자 하지 않는 것인가. 어찌하여 우리 우후右侯를 이렇게 빨리 빼앗아가는가.” 하였다.
정하程遐가 장빈을 대신하여 우장사右長史가 되었는데, 석륵은 정하와 의논할 적에 의견이 합치하지 않을 때마다 번번이 탄식하기를 “우후右侯가 나를 버리고 갔으니, 어찌 혹독한 재앙이 아니겠는가.”注+① 酷은 참혹함이요, 사나움이다. ‘하늘이 張賓의 수명을 빼앗았으니, 어쩌면 그리도 나에게 참혹한 재앙을 내리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하고는, 인하여 종일토록 눈물을 흘렸다.
[] 장무張茂농서隴西남안南安를 점령하고서 진주秦州를 설치하였다.


역주
역주1 王敦舉兵反 : “≪周易≫ 坤卦 初六 〈象傳〉에 말하기를 “신하가 그 군주를 시해하며 자식이 그 아비를 시해하는 것은 하루아침 하루저녁에 갑자기 생긴 변고가 아니다. 그 유래한 바가 점점 번져간 것이니, 이는 분변하기를 일찍 하지 못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하였다. 亂臣賊子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는가. 人君은 높은 자리[九五]에 거하였으면 진실로 은미할 때 방비하고 점점 번져갈 때 막아서 환란을 싹트기 전에 없애야 하니, 어찌 반역하는 형세가 이미 이루어지기를 기다린 뒤에 주벌하겠는가. 王敦(王處仲)이 오랫동안 큰 권력을 장악하여 사방을 제멋대로 통제하였으니, 그가 군주를 무시하는 마음을 간직한 것이 이미 하루이틀이 아니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전에 이미 이것을 책에 여러 번 써서 그가 신하 노릇 하지 않으려는 자취를 드러내었는데, 晉나라 황제는 이에 대처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왕돈이 군대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자 곧바로 그가 반란했다고 썼으니, 그렇다면 그가 애당초 의지한 바가 없이도 반란한 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에 군대를 일으키기 쉬움을 나타낸 것이다. 아래에서 石頭城을 점거하고 武昌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으니, 왕돈이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은 비록 刁協과 劉隗 등이 출전하였다가 패한 일이 있었으나 모두 삭제하고 쓰지 않았다. 왕돈이 거동하기 쉬움이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그를 통제하겠는가. 군주가 이에 이르면 진실로 이미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하와 국가를 소유한 자가 어찌 또한 그 은미할 때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在易坤初六之象曰 臣弑其君 子弑其父 非一朝一夕之故 其所由來者漸矣 由辨之不早辨也 夫亂臣賊子何世無之 人君尊居九五 固當防微杜漸 銷患未萌 豈待逆勢已成而後誅翦之哉 王處仲久握大權 專制方面 其無君之心 已非一日 綱目前已屢書於冊 皆以著其不臣之跡 而晉帝則未有處也 一日舉兵向闕 直書其反 則見其初無所因 爲反已久 故易於舉兵耳 下書據石頭 還武昌 惟意所欲 雖有協隗等出戰而敗 皆削不書 其舉動之易如此 將何以制之哉 人主至是 固已末如之何矣 然則有天下國家者 盍亦謹其微乎]” ≪發明≫
역주2 爾雅翼 : 宋나라 羅願이 지은 ≪爾雅≫의 주석서이다. ≪이아≫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詞義 해석서로, 고대의 名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쓰인다.
역주3 陳敏의 난리 : 晉 惠帝 永興 2년(305), 廬江 사람 陳敏이 石冰을 토벌한 功을 믿고 歴陽을 점거하고서 배반한 사건을 이른다. 진민은 皇太弟의 命을 사칭하고 揚州刺史가 되어, 남쪽으로 江州를 함락하고 동쪽으로 여러 군을 경략하여 마침내 江東을 점거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뜻을 함께한 자들이 배반하여 참수당하였다.
역주4 吕蒙이……방법 : 三國時代에 吳나라의 장수 呂蒙이 荊州의 접경지대인 陸口에 부임하자, 關羽는 여몽을 경계하여 魏나라의 樊城을 공격하면서도 많은 병력을 잔류시켜 公安과 南郡을 방비하게 하였다. 이에 여몽이 관우를 방심하게 하기 위해 자신을 도성인 建業으로 소환할 것을 孫權에게 청원하니, 손권은 공개적으로 여몽을 도성으로 불러들이고 육구의 守將을 陸遜으로 교체하였다. 육손이 관우에게 편지를 보내 관우의 공로와 덕을 칭송하고 의탁하려는 뜻을 밝히니, 관우가 안심하고 차츰 수비병을 철수하여 樊城으로 집결시켰다. 이에 여몽은 장사꾼으로 위장한 배에 정예병을 숨겨 관우가 설치해둔 강변의 초소와 망루를 기습 공격하여 점거하였다. 관우는 吳軍에게 公安과 南郡을 빼앗기고 마침내 荊州 전역을 잃게 되었다.(≪三國志≫ 권54 〈呂蒙列傳〉)
역주5 敦殺甘卓 : “‘甘卓이 〈襄陽으로〉 돌아갔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감탁을 죄책한 것이다. 司馬氶과 감탁에게 모두 일찍이 역적을 토벌했다고 인정하였는데, 이때 或者(사마승)에게는 ‘死之’라고 쓰면서 그 관직을 구비해주고 혹자(감탁)에게는 ‘殺’이라고 쓰면서 그 관직을 삭제하였으니, 의를 행하되 끝마치지 못하는 자들이 거울로 삼을 만하다.[書卓還 何 罪卓也 氶卓皆嘗予之以討矣 於是或書死之而具其官 或書殺而削其爵 爲義不終者 可以鑑矣]” ≪書法≫
“사마승과 감탁에게 처음에는 격문을 돌려 역적을 토벌했다고 써서 功績을 똑같이 하였고, 지금은 또다시 모두 적에게 살해당하여 애당초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어찌하여 사마승에게는 ‘死之’라고 쓰고 감탁에게는 ‘殺’이라고 써서 書法을 이와 같이 다르게 하였는가. 이는 사마승은 시종 의리를 지켰고 감탁은 머뭇거리면서 결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만일 감탁이 나라를 위해 죽을 각오로 몸을 떨치고 일어나 힘을 다하여 역적을 토벌했더라면, 비록 군대가 패하여 몸이 죽었더라도 충절을 온전히 지킨 선비가 되는 데 부끄럽지 않았을 터인데, 머뭇거리고 관망하면서 한편으로는 전진하고 한편으로는 퇴각하였으니, 과연 무슨 일을 한 자인가. 그러므로 앞에서는 ‘감탁이 襄陽으로 돌아갔다.[卓還襄陽]’라고 써서 그의 잘못을 드러내었고, 여기서는 ‘王處仲(왕돈)이 감탁을 죽였다.[敦殺甘卓]’라고 쓰면서 그 관직을 쓰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義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되 끝마치지 못한 자를 경계한 것이다. 애석하다.[氶卓始書移檄討賊 同功一體 今又皆爲賊所殺 初無少異 胡爲氶書死之 卓書殺 書法不同如此 蓋氶始終守義 卓猶豫不决故也 向使卓能奮身徇國 戮力討逆 則雖兵敗而死 亦不失爲全節之士矣 徘徊顧望 且前且却 果何爲者 故前書卓還襄陽 以著其失 此書處仲殺卓 而不書其官 皆以戒徇義不終者也 惜哉]” ≪發明≫
역주6 後趙拔泰山殺徐龕 : “徐龕과 〈蜀漢의〉 孟達은 똑같은 경우인데, 맹달에게는 ‘死之’라고 쓰고(漢나라 後主 建興 6년(228)) 여기서 서감에게는 ‘殺’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서감을 죄책한 것이다. 서감이 배반한 것은 맹달처럼 劉封의 핍박이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功을 다투었기 때문이요, 얼마 후에 또다시 濟河와 海岱 지역을 침략하여 황제의 군대를 물리쳤으니, 맹달과는 크게 다르다. 그러므로 맹달이 〈魏나라에서 다시〉 蜀漢으로 귀의했을 때에는 ‘來歸’라고 쓰고 서감에게는 ‘復降(다시 항복하였다)’이라고 썼으니, 이는 그가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반복무상했음을 드러낸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功過를 판단함이 분명하다.[徐龕孟達一也 孟達書死之(漢後主建興六年) 此其書殺 何 罪龕也 龕之叛 非有劉封之偪 徒以争功故耳 既又冦濟岱 敗王師 與孟達異矣 故孟達之反正 書來歸 而龕書復降 所以著其反覆也 綱目之權衡 審矣]” ≪書法≫
역주7 [後] : 저본에는 ‘後’가 없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8 帝崩 : “賀善의 賛에 말하였다. ‘琅邪王(司馬睿)이 揚州를 도독한 뒤로부터 「紀瞻을 보내어 石勒을 토벌했다.」라고 1번 썼을 뿐이요, 長安이 함락된 뒤에야 군대를 출동하여 야외에서 노숙하면서 격문을 돌려 북쪽을 정벌하였으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 특별히 써서 이것을 유감스럽게 여긴 것이다. 그러나 그가 즉위했을 때에는 晉王이라고만 칭하였고, 中外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청했으나 감히 따르지 않다가, 愍帝가 살해를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황제의 칭호를 바로잡았으니, 또한 節度을 안 자에 가깝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 光武帝의 경우와 같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라고 썼다. 다만 큰 뜻과 원대한 지략이 없어서 〈北伐을 주장하였던〉 祖逖의 재주를 다 펼치게 하지 못하여 마침내 河南 지역으로 하여금 끝내 左袵(옷깃을 왼쪽으로 여밈)하는 오랑캐의 풍속에 빠지게 하였으니, 애석하다.’[賀善賛曰 琅邪自督揚州 一書遣紀瞻討石勒而已 長安既陷 然後出師露次 移檄北征 故綱目特書病之 然其即位 止稱晉王 雖中外勸進 弗敢從也 愍帝遇害 始正帝號 亦庶乎知節者 故綱目書即皇帝位 如光武 獨其無志遠略 不能盡祖逖之才 遂使河南終淪左衽 惜哉]” ≪書法≫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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