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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5)

자치통감강목(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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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午年(B.C. 51)
경오년(B.C. 51)
三年이라
[綱] 나라 중종中宗 효선황제孝宣皇帝 감로甘露 3년이다.
봄 정월에 흉노匈奴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조회하러 왔다가 돌아가 사막의 남쪽 변방 아래에 거주하였다.
幸甘泉하여 郊泰畤할새 匈奴呼韓邪單于來朝어늘 賜以冠帶, 衣裳, 金璽, 盭綬, 玉具劍佩, 弓矢, 棨戟, 安車, 鞍馬, 金錢, 衣被, 錦繡, 縠帛, 絮注+盭, 古戾字, 通作綟, 草名也. 以戾染綬, 亦諸侯王之制也. 玉具劍佩, 七制作玉具鐔衛ㆍ佩刀, 解云 “摽首鐔衛, 盡用玉爲之.” 鐔, 音淫, 劍口旁橫出者也. 衛, 劍鼻也. 佩刀, 所佩之刀也. 棨, 音啓. 棨戟, 前驅之器也. 以木爲之, 以赤黑繒爲衣. 하고
[目] 감천甘泉에 행차하여 태치泰畤교제郊祭를 지낼 적에 흉노匈奴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조회하러 오자, 관대冠帶의상衣裳(예복), 금새金璽(황금 인장)와 여수盭綬(초록빛 인끈), 옥구검패玉具劍佩(옥으로 장식한 패도佩刀)와 궁시弓矢, 계극棨戟(의장용 창), 안거安車안마鞍馬, 금전金錢의피衣被(의복과 이불, 요), 금수錦繡(꽃무늬가 있는 고급 비단)와 곡백縠帛(일반 비단), 옷에 두는 솜을 하사하였다.注+고자古字와 통하니, 풀이름이다. 라는 풀을 가지고 인끈을 물들이니, 또한 제후왕諸侯王의 제도이다. “옥구검패玉具劍佩”는 《칠제七制》에 “옥구심위패도玉具鐔衛佩刀”로 되어 있으니, 해설에 “의 끝과 자루, 날밑[]과 코를 모두 을 사용하여 만들었다.”라고 하였다. (칼코등이)은 음이 이니, 검의 입 옆에 가로로 튀어나온 것이요, 는 검의 코이다. 패도佩刀는 차는 칼이다. 는 음이 이니, 계극棨戟은 앞에서 선도하는 기물(창)인데, 나무로 만들고 검붉은 비단으로 집을 만들었다.
禮畢 使使者하여 道單于先行하여 宿長平注+道, 讀曰導. 長平, 阪名也, 在池陽南上原之阪. 有長平觀, 去長安五十里.하다
가 끝나자 사자使者에게 선우單于를 인도하여 먼저 길을 떠나서 장평판長平阪에 가서 유숙하게 하였다.注+(인도하다)는 로 읽는다. 장평長平(산비탈)의 이름이니, 지양池陽 남쪽 상원上原의 산비탈에 있다. 여기에 장평관長平觀이 있으니, 장안長安과의 거리가 50이다.
還登長平阪하여 詔單于毋謁注+不令拜也.하고 其群臣 皆得列觀하며
은 돌아와 장평판에 올라가 선우에게 배알拜謁하지 말도록 명하고,注+〈“조선우무알詔單于毋謁”는〉 선우單于로 하여금 절하지 않게 한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나열하여 구경하게 하였다.
及諸蠻夷君長數萬 咸迎於渭橋下夾道陳注+陳, 如字. 夾道陳, 言夾道之兩旁陳列也. 一說 “陳, 塗也.”이라가 登渭橋 咸稱萬歲러라
그리고 여러 만이蠻夷군장君長 수만 명이 모두 마중 나와 위교渭橋 아래 양쪽 길가에 진열하여 있다가,注+(진열하다)은 본음本音대로 읽으니, “협도진夾道陳”은 길을 끼고 있는 양 곁에 진열陳列하는 것을 말한다. 일설에 “은 길이다.” 하였다. 이 위교에 오르면 모두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單于就邸長安이러니 置酒建章宮하여 饗賜之하다
선우가 장안長安의 저택으로 가 있었는데 건장궁建章宮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연향을 베풀어주고 물건을 하사하였다.
二月 遣歸國할새 發邊郡士馬하여 送出塞하고 又轉邊穀米糒 前後三萬四千斛하여 給之하다
[目] 2월에 선우單于를 본국으로 돌려보낼 적에 변방 고을의 병사와 말을 징발해서 전송하여 변경을 나가게 하였고, 또 변방의 곡식과 쌀과 마른 양식 등을 수송하여 전후 34,000을 주었다.
單于 請居光祿塞下하여 有急이면 保受降城注+武帝遣光祿徐自爲, 出五原塞, 築亭障列城, 後人因謂之光祿塞. 保, 守也. 恐郅支來攻. 故請有急, 入城自保.하니 自是 烏孫以西 至安息諸國 近匈奴者 咸尊漢矣러라
선우가 광록새光祿塞 아래에 거주하여 위급한 일이 있으면 수항성受降城에서 스스로 지킬 것을 청하니,注+무제武帝광록훈光祿勳 서자위徐自爲를 보내어 오원새五原塞로 나가 정장亭障(보루)과 여러 을 축조하게 하였는데, 후대의 사람들이 인하여 이곳을 광록새光祿塞라 칭하였다. 는 지킨다는 뜻이니, 질지선우郅支單于가 공격해올까 염려되었으므로 위급한 일이 있으면 이 에 들어가 스스로 지킬 것을 청함을 이른다. 이로부터 오손烏孫 서쪽에서 안식安息까지 흉노에 가까운 여러 나라들이 모두 나라를 높였다.
畫功臣於麒麟閣하다
[綱] 공신功臣들의 화상畫像기린각麒麟閣에 그렸다.
上以戎狄賓服이라하여 思股肱之美하여 乃圖畫其人於麒麟閣하고 署其官爵姓名注+麒麟閣, 在未央宮中, 武帝獲麒麟時, 作此閣, 圖畫其像於閣, 遂以爲名. 一說 “蕭何所造.” 署, 表也, 題也. 圖畫功臣, 自此始. 호되
[目] 융적戎狄이 와서 복종한다 하여, 고굉股肱(대신大臣)의 아름다움을 생각해서 마침내 이들의 화상畫像기린각麒麟閣에 그리고 그 관작과 성명을 열거하였다.注+기린각麒麟閣미앙궁未央宮 가운데 있으니, 무제武帝가 기린을 잡았을 적에 이 을 지었는데, 기린의 모습을 에 그리고 마침내 기린각으로 이름하였다. 일설에 “소하蕭何가 만든 것이다.” 하였다. 는 표출하고 쓰는 것이다. 공신功臣화상畫像을 그린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惟霍光 不名하고 曰大司馬大將軍博陸侯姓霍氏라하고 其次 張安世, 韓增, 趙充國, 魏相, 丙吉, 杜延年, 劉德, 梁丘賀, 蕭望之, 蘇武 凡十一人이니 皆有功德하여 知名當世注+梁丘, 複姓. 賀, 名也.러라
오직 곽광霍光은 이름을 쓰지 않고 ‘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 박륙후博陸侯 곽씨霍氏’라 하였고, 차례로 장안세張安世, 한증韓增, 조충국趙充國, 위상魏相, 병길丙吉, 두연년杜延年, 유덕劉德, 양구하梁丘賀, 소망지蕭望之, 소무蘇武 등 모두 열 한 사람이었으니, 이들은 모두 공덕功德이 있어서 당세에 이름이 알려진 자들이었다.注+양구梁丘복성複姓이고, 는 이름이다.
注+新蔡縣, 屬汝南郡.하다
[綱] 봉황鳳凰신채新蔡에 내려앉았다.注+신채현新蔡縣여남군汝南郡에 속한다.
胡氏曰
[目]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宣帝之時 天地變異하고 刑殺過差하며 一歲之間 子弟殺父兄하고 妻殺夫 至二百餘人하니 不得稱爲太平 決矣어늘 鳳凰 何爲數來哉
선제宣帝 때에 하늘과 땅에 재변災變이 있었고 형벌하여 죽이는 것이 지나쳤으며, 1년 사이에 자제가 부형을 죽이고 아내가 남편을 죽인 것이 200여 명에 이르렀으니, 태평성대라고 할 수 없음이 분명한데, 봉황鳳凰이 어찌하여 자주 내려왔단 말인가.
豈宣帝自喜其政하니 臣下有窺見其微意者 爭言祥瑞하여 以侈耀之하고 而帝亦以此自欺也與인저
아마도 선제가 본래 이러한 일을 좋아하니, 신하 중에 그 은미한 뜻을 엿본 자가 상서祥瑞를 다투어 말해서 과장하여 자랑하려 하였고, 선제 또한 이로써 스스로 자기 양심을 속였는가 보다.
以張敞所論鶡雀觀之하면 亦可見矣로다
丞相霸卒커늘 以于定國爲丞相하다
[綱] 승상丞相 황패黃霸가 죽자, 우정국于定國승상丞相으로 삼았다.
注+石渠閣, 蕭何所造, 在未央殿北, 以藏秘書. 其下礲石爲渠, 因以導水, 以名閣.하다
[綱] 여러 유자儒者들에게 명하여 오경五經이동異同석거각石渠閣에서 하게 하였다.注+석거각石渠閣소하蕭何가 만든 것으로 미앙전未央殿 북쪽에 있는데, 이곳에 비서秘書(궁중의 도서)를 보관하였다. 그 아래에 돌을 곱게 다듬고 개천을 만들어서 물을 끌어들이고는 석거각石渠閣이라고 이름하였다.
詔諸儒하여 論五經異同注+施讐論易, 周堪ㆍ孔霸論書, 薛廣德論詩, 戴聖論禮, 公羊則嚴彭祖, 穀梁則尹更始. 異同者, 謂與經旨合否也.하여
[目] 여러 유자儒者들에게 명하여 오경五經이동異同을 논하게 하였다.注+시수施讐는 《주역周易》을 논하고, 주감周堪공패孔霸는 《상서尙書》를 논하고, 설광덕薛廣德은 《시경詩經》을 논하고, 대성戴聖은 《예경禮經》을 논하였으며, 《공양전公羊傳》은 엄팽조嚴彭祖이고, 《곡량전穀梁傳》은 윤경시尹更始였다. 이동異同이란 의 뜻과 부합하는가의 여부를 이른다.
蕭望之等 平奏어든 親稱制臨決注+平, 猶評也. 或云, 去聲, 平其不平曰平. 稱制, 卽制曰是已, 謂自臨視其論議, 而斷決可否也.하고 立梁丘易, 夏侯尙書, 穀梁春秋博士注+梁丘, 卽梁丘賀也. 夏侯, 大夏侯勝ㆍ小夏侯建也. 穀梁, 複姓. 名, 赤.하다
그리하여 소망지蕭望之 등이 논평해서 아뢰면 이 직접 제왈制曰을 칭하고 임석臨席하여 결정하였으며,注+(논평)은 과 같다. 칭제稱制는 바로 ‘제왈制曰’이 이것이니, 황제가 직접 임석하여 그 의논을 보고서 가부可否를 결단하는 것을 말한다. 양구역梁丘易》‧《하후상서夏侯尙書》‧《곡량춘추穀梁春秋》의 박사博士를 세웠다.注+양구梁丘는 바로 양구하梁丘賀이다. 곡량穀梁복성複姓이고, 이름은 이다.
[綱] 황손皇孫 유오劉驁가 탄생하였다.
皇太子所幸司馬良娣病死하니 太子忽忽不樂이러니 帝令皇后 擇後宮家人子하여
[目] 황태자皇太子가 총애하는 사마량제司馬良娣가 병으로 죽으니, 태자太子는 몹시 실망하여 즐겁지 못하였는데, 황제가 황후로 하여금 후궁後宮가인자家人子를 간택하게 하였다.
得元城王政君하여 送太子宮하니 政君 故繡衣御史賀之孫女也注+家人子, 婦官名. 元城縣, 屬魏郡. 賀之孟長曰禁, 次曰弘. 禁生四女八男, 長女君俠, 次政君, 次君力, 次君弟, 長男鳳, 次曼, 蚤卒, 莽之父, 次譚, 次崇, 次商, 次立, 次根, 次逢時, 弘‧音之父也.
是歲 生成帝於甲館畫堂하니 爲世適皇孫이라
이해에 그녀가 성제成帝(유오劉驁)를 갑관甲館화당畫堂에서 낳으니, 세적황손世適皇孫이라 칭하였다.
帝愛之하여 自名曰驁 字太孫이라하고 常置左右注+甲館, 館名, 館蓋以甲乙丙丁爲次, 因名. 畫堂, 彩畫之堂. 適, 讀曰嫡. 曰世適者, 謂正統繼世之重也. 驁, 五到切.하니라
황제가 그를 매우 사랑하여 직접 이름을 라 하고 태손太孫이라 하여, 항상 곁에 두었다.注+갑관甲館의 이름이니, 은 대개 으로 차례를 정하고 인하여 이름하였다. 화당畫堂채색彩色으로 장식한 이다. 으로 읽으니, “세적世適”이라고 한 것은 정통正統으로 대를 잇는 것의 중함을 말한 것이다. 오도五到이다.
烏孫公主來歸하다
[綱] 오손공주烏孫公主(초주楚主)가 돌아왔다.
公主上書하여 言年老土思하니 願歸葬漢地注+土思者, 懷故鄕也. 어늘 天子閔而迎之하여 待之如公主之制러니 後二歲注+楚主, 本以宗室女嫁烏孫, 今待之, 如公主之制, 儀比皇女.하다
[目] 공주公主가 글을 올려 “나이가 늙어 고향이 그리우니, 나라 땅으로 돌아가 죽기를 원한다.”注+토사土思”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다.고 말하므로, 천자天子가 가엾이 여기고 그를 맞이하여 공주의 제도와 똑같이 대우하였는데, 2년 뒤에 죽었다.注+초주楚主는 본래 종실宗室의 딸로 오손烏孫에게 시집갔었는데, 지금 그를 공주公主의 제도와 똑같이 대우하여 의식을 황녀皇女에 견준 것이다.
역주
역주1 匈奴……南塞下 : “匈奴는 秦 始皇 32년(B.C. 215)부터 처음 《資治通鑑綱目》에 보이기 시작하여 漢 文帝 3년(B.C. 177)에 처음으로 ‘單于’를 썼고, 宣帝 五鳳 4년(B.C. 54)에 이르러 처음으로 ‘臣이라고 칭했다.’라고 썼고, 금년에 처음 ‘와서 조회했다.’고 썼으니, 이때 165년이 되었다. 오랑캐는 백 년의 운이 없다는 말이 참으로 맞는다. 이로부터 西漢의 세대가 끝날 때까지 선우가 와서 조회한 것을 쓴 것이 4번이다.[匈奴自秦始皇三十二年 始見於綱目 漢文帝三年 始書單于 至宣帝五鳳四年 始書稱臣 今年始書來朝 於是百六十五年矣 信哉 無百年之運也 自是終西漢之世 書單于來朝四]” 《書法》
역주2 鳳凰 集新蔡 : “宣帝의 세대에 ‘鳳皇이 와서 내려앉았다.[鳳皇來集]’고 쓴 것이 모두 6번이다. 漢나라 史書를 살펴보면 이에 그치지 않고 또 이것을 詔令으로 전파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資治通鑑綱目》에서는 모두 삭제하여 기록하지 않고, ‘지진이 나서 산이 무너진 것’과 ‘선조의 사당이 파괴된 것’과 ‘宗廟의 화재’와 ‘일식’과 ‘孛星이 나타난 것’과 ‘우박이 내려 사람이 죽은 것’ 등의 이변에 이르러서는 책에 골고루 썼으니, 이는 祥瑞를 억제하고 두려워하라고 경계한 뜻이 엄하다. 군주의 지위에 있는 자가 알지 않으면 안 된다.[宣帝世鳳皇來集 至是凡六書矣 考之漢史 則不止是 而又播之詔令 不一而足 然綱目皆削而不錄 至於地震山崩祖廟壞 宗廟火 日食星孛雨雹殺人之異 則備書於冊 所以抑祥瑞戒恐懼之意嚴矣 居人上者 不可不知]” 《發明》
역주3 張敞이……있다 : 鶡雀은 파랑새로, 위 宣帝 五鳳 3년(B.C. 55)에 黃霸가 丞相으로 있었는데, 京兆尹 張敞의 집에 있던 분작이 날아가 丞相府의 관사에 내려앉자, 황패는 이것이 봉황의 일종인 神雀이라 생각하여 황제에게 아뢰고자 하였다. 이에 장창이 황패를 논박하여 아뢴 일이 있었다.
역주4 詔諸儒……於石渠閣 : “이것을 쓴 것은 학문이 하나로 통일됨을 가상히 여긴 것이니, ‘五經을 講했다.’고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書嘉統一也 書講五經始此]” 《書法》
역주5 혹은……한다 : 平은 ‘評(논평)’으로 읽으면 庚韻으로 平聲이고, ‘고르다’의 뜻으로 읽으면 敬韻으로 去聲이다.
역주6 夏侯는……建(夏侯建)이다 : 夏侯勝은 字가 長公으로 어려서 宗族父인 夏侯始昌에게 《尙書》와 《洪範五行傳》을 전수받았는데, 앞의 5권 元平 원년(B.C. 74)조에 昭帝가 崩하고 昌邑王 劉賀가 大統을 이었으나, 방종하여 예법이 없고 자주 놀러 나가자, 하후승이 乘輿 앞을 가로막고 諫한 일이 보인다. 夏侯建은 字가 長卿으로 하후승의 從兄의 아들인데, 역시 《尙書》를 전공하여 博士가 되었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는 하후승을 ‘大夏侯’, 하후건을 ‘小夏侯’라 칭하였다. 이는 동시대에 戴聖이 從子인 戴德과 함께 《禮經》에 밝아 대성을 ‘大戴’, 대덕을 ‘小戴’라 하여 대성이 지은 禮書를 《大戴禮》, 대덕이 지은 禮書를 《小戴禮》 또는 《小戴禮記》라 칭한 것과 같다. 《소대례》는 바로 지금의 《禮記》이다.
역주7 皇孫驁生 : “皇孫이 태어난 것을 쓴 적이 없는데, ‘劉驁가 태어났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유오는 王政君의 소생이니, 뒤에 王氏가 漢나라를 찬탈한 것과 漢나라가 중간에 비색해진 것은 유오의 출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삼가 이것을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皇孫이 태어난 것을 쓴 것은 이번 1번뿐이다.[皇孫生不書 書驁生 何 驁 王政君所生也 王氏之簒 漢之中否 自驁生始矣 故謹書之 終綱目 書皇孫生一而已]” 《書法》
역주8 王賀의……아비이다 : 뒤에 成帝가 즉위하여 王政君이 皇太后가 되자, 成帝는 元舅(큰외숙)인 王鳳을 大司馬 大將軍으로 삼고 외숙인 王崇을 安成侯로 봉하였으며, 王譚과 王商ㆍ王立ㆍ王根ㆍ王逢時에게 關內侯의 작위를 하사하였다. 이후로 王氏 一門이 軍權과 政權을 독차지하여, 王鳳이 죽자 王音이 大司馬가 되고, 왕음이 죽자 王商이, 왕상이 죽자 王根이, 왕근이 신병으로 사면되자 王莽이 大司馬가 되었다가 결국 漢나라를 찬탈하였다.

자치통감강목(5)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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