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綱】 한漢나라 현종 효명황제顯宗 孝明皇帝영평永平 12년이다. 봄에 애뢰哀牢가 내부内附하였다.
目
【목目】 애뢰왕 유모哀牢王 柳貌(유모)가 자신의 백성 5만여 호戶를 거느리고 와서 내부内附하자, 이 지역에 애뢰哀牢와 박남博南 두 현縣을 설치하였다.注+애뢰哀牢는 남이南夷인 구륭九隆의 종족이다. 뇌산牢山에 거주하였는데 지역이 매우 멀고 산천이 험하고 깊어서 일찍이 중국中國과 통하지 못하였다. 이 지역 사람들은 몸에 모두 용龍의 무늬를 새기고 옷에 모두 꼬리를 달았으니, 서남쪽으로 낙양雒陽과 7천 리 떨어져 있었다.
【목目】 처음 평제平帝 때에 하수河水와 변수汴水가 터져서 오래도록 수리하지 못하였다.注+변汴은 음이 변卞이니, 물이 진류군 준의현陳留郡 浚儀縣음구陰溝에서 발원하여 몽현蒙縣에 이르러 옹수雝水(옹수)가 되어 동쪽으로 사수泗水에 들어간다.
건무建武 10년(34)에 광무제光武帝가 수리하고자 하였는데, 준의령 악준浚儀令 樂俊(악준)이 “백성들이 막 병란을 겪었으니, 부역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라고 상언上言하자注+준의浚儀는 현縣의 이름이다., 마침내 중지하였다.
그 뒤에 변수汴水가 동쪽으로 침식하여 날로 달로 더욱 넓어져서 연주兗州(연주)와 예주豫州의 백성들이 원망하고 탄식하였는데, 마침 낙랑樂浪 사람 왕경王景이 치수治水를 잘한다고 천거한 자가 있었다.
여름 4월에 조령詔令을 내려 수십만의 병졸을 동원해서 왕경을 보내 장작알자 왕오將作謁者 王吳와 함께 변수汴水의 제방을 수리하게 하니, 형양滎陽으로부터 동쪽으로 천승千乗의 바다 입구에 이르기까지 천여 리가 되었다.注+알자謁者는 광록훈光祿勳에 속하였다. 왕오王吳는 알자謁者로서 장작將作의 벼슬을 하였으므로 장작알자將作謁者라 한 것이다. 변거汴渠는 바로 랑탕거莨蕩渠(낭탕거)이니, 금제金堤라고도 한다.
10리에 수문 하나를 설치해서 물을 번갈아 주입하여 다시는 무너지고 새는 근심이 없게 하니注+회洄는 호회戶恢의 절切이니, 역류하여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주注는 물을 댐을 이른다., 비록 부역과 비용을 크게 줄였으나 그래도 비용이 백억 전錢으로 헤아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