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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0)

자치통감강목(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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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申年(192)
임신년壬申年(192)
三年이라 春正月 遣校尉李傕, 郭汜, 張濟하여 擊朱儁於中牟하여 破之하고 하다
荀彧荀彧
나라 효헌황제 초평孝獻皇帝 初平 3년이다. 봄 정월에 동탁董卓교위校尉이각李傕곽사郭汜, 장제張濟를 보내어 주준朱儁중모中牟에서 격파하고 마침내 영천潁川을 노략질하였다.
荀淑 有孫曰彧하니 少有才名注+彧, 乙六切.이라 何顒 見而異之하여 曰 王佐才也라하니라
】 처음에 순숙荀淑에게 순욱荀彧이라는 손자가 있었으니, 어려서부터 뛰어나다는 명성이 있었다.注+을륙乙六이다. 하옹何顒(하옹)이 그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왕자王者를 보좌할 재주이다.” 하였다.
及天下亂 謂父老曰 潁川 四戰之地 宜亟避之注+四戰之地, 言其地平, 四面受敵.니라
천하가 혼란해지자, 순욱이 부로父老들에게 이르기를 “영천潁川 지방은 〈지형이 평평하여〉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땅이니, 마땅히 빨리 피해야 합니다.”注+사전지지四戰之地”는 그 땅이 평평하여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鄕人 多懷土不能去어늘 獨率宗族하여 去依韓馥이러니 袁紹已奪馥位 待以上賓之禮하다
그러나 고을 사람들은 대부분 고향 땅에 연연하여 떠나가지 못하였는데, 순욱은 홀로 종족을 거느리고 떠나가 한복韓馥에게 의지하니, 때마침 원소袁紹가 한복의 지위를 빼앗고는 순욱을 상빈上賓로 대우하였다.
度紹終不能定大業이러니 聞曹操有雄略하고 乃去從操하니
순욱은 원소가 끝내 대업大業을 이루지 못할 것임을 헤아렸는데, 조조曹操가 웅대한 지략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원소를 버리고 조조를 따랐다.
操與語하고 大悦曰 吾子房也라하고 以爲奮武司馬注+操初起兵, 爲奮武將軍, 故以彧爲奮武司馬.하다 至傕, 汜旣破中牟 遂掠潁川하니 其鄕人留者 多爲所殺注+傕, 訖岳切. 汜, 似ㆍ泛二音.하니라
조조는 순욱과 함께 말을 해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나의 이다.” 하고는 분무사마奮武司馬로 삼았다.注+조조曹操가 처음 기병起兵했을 적에 분무장군奮武將軍이 되었으므로 순욱荀彧분무사마奮武司馬로 삼은 것이다. 그 후 이각李傕곽사郭汜중모中牟를 격파한 뒤에 마침내 영천潁川을 노략질하니, 이 지방 사람들 중에 남아 있던 자들은 대부분 죽임을 당하였다.注+글악訖岳이다. 두 가지 이 있다.
袁紹擊公孫瓚於界橋하여 大敗之하다
원소袁紹공손찬公孫瓚계교界橋에서 공격하여 대패시켰다.
袁紹自出拒公孫瓚하여 戰於界橋南二十里注+水經註 “淸河東北逕界城亭東, 水上有大梁, 謂之界城橋.”하니 瓚兵三萬 甚鋭
원소袁紹가 직접 출동하여 공손찬公孫瓚을 막아서 계교界橋의 남쪽 20리 지점에서 싸우니注+수경주水經註≫에 “청하淸河동북東北으로 계성정界城亭 동쪽을 지나가는데 물가에 큰 교량이 있어, 이것을 계성교界城橋라고 한다.” 하였다., 공손찬의 군대 3만 명이 매우 정예로웠다.
紹令麴義 領精兵八百하여 先登하고 彊弩千張으로 夾承之注+麴, 姓也.하다
원소는 국의麴義를 시켜 정예병 800명을 거느리고 먼저 올라가게 하고 강한 쇠뇌 1,000을 좌우에 설치하고서 공손찬의 군대를 맞게 하였다.注+이다.
輕其兵少하여 縱騎騰之어늘 義兵 伏楯下不動注+楯, 所以扞身蔽目者.이러니 未至數十歩하여 一時同發하고 讙呼動地注+讙, 許元切.하다
공손찬은 국의의 병력이 적음을 얕잡아보고 기병騎兵을 풀어 달려가게(공격하게) 하였는데, 국의의 군대는 방패 아래에 숨어서 움직이지 않다가注+(방패)은 몸을 막고 눈을 가리는 도구이다. 공손찬의 군대가 채 수십 보도 안 되는 곳에 이르자, 일시에 함께 쇠뇌를 발사하고 함성을 질러 땅이 진동하였다.注+(함성을 지르다)은 허원許元이다.
大敗瓚軍하여 斬其將嚴綱하고 追至瓚營하여 拔其牙門하니 餘衆 皆走注+牙, 旗名也. 古者軍行, 則建立牙於軍門, 尊者所在. 後人因以所治爲牙.하다
공손찬의 군대를 대패시켜 그의 장수 엄강嚴綱을 참살하고 추격하여 공손찬의 진영에 이르러 그 아문牙門을 함락하니, 남은 무리가 모두 달아났다.注+는 깃발의 이름이다. 옛날에 군대가 출동하면 아기牙旗군문軍門에 세웠으니, 높은 자가 거처하는 곳이다. 후대 사람들이 이를 인하여 치소治所아문牙門이라고 하였다.
兗州刺史劉岱 與紹, 瓚連和하니 紹令妻子 居岱所하고 瓚亦遣從事范方하여 將騎助岱러니
】 처음에 연주자사 유대兗州刺史 劉岱원소袁紹, 공손찬公孫瓚과 함께 연합하여 화친하니, 원소는 처자식을 유대의 처소에 보내어 거처하게 하였고, 공손찬 또한 종사 범방從事 范方을 보내어 기병을 거느리고 유대를 돕게 하였다.
及瓚破紹軍 語岱하여 令遣紹妻子注+程昱傳 “瓚擊破紹軍, 乃遣使語岱, 令遣紹妻子, 使與紹絶.”하고 勅方호되 若岱不遣紹家어든 將騎還注+紹家, 謂袁紹妻子.하라
공손찬이 원소의 군대를 격파하자, 공손찬은 유대에게 말하여 원소의 처자식을 돌려보내게 하고注+정욱전程昱傳〉에 하였다., 범방에게 명하기를 “만약 유대가 원소의 가솔을 돌려보내어 〈원소와의 관계를〉 끊지 않으면 기병을 거느리고 돌아오라.”注+소가紹家원소袁紹의 처자식을 이른다. 하였다.
岱問程昱한대 昱曰 棄近援而求遠助하면 此假人於越以救溺子之說也注+言勢不能相及也. 越人習水, 故以爲能救溺.니라 非紹敵이니 終爲所禽이라한대
유대가 정욱程昱에게 묻자, 정욱이 말하기를 “가까운 곳에 있는 원소의 원조를 버리고 먼 곳에 있는 공손찬의 도움을 구하면, 이는 나라에서 사람을 빌려 와서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게 한다는 말과 똑같습니다.注+〈“가인어월이구익자지설假人於越以救溺子之說”은〉 형세가 서로 미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나라 사람들이 수영을 잘하였기 때문에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공손찬은 원소의 적수가 아니니, 끝내 그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하니,
岱從之하다 將其騎歸러니 未至而瓚敗하다
유대가 그의 말을 따랐다. 범방이 기병을 거느리고 공손찬에게 돌아갔는데, 범방이 이르기도 전에 공손찬이 패하였다.
】 여름 4월에 왕윤王允중랑장 여포中郞將 呂布를 시켜 동탁董卓을 주살하자, 조서詔書를 내려 왕윤을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고 여포를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삼아 함께 조정의 정사를 맡게 하였다.
董卓 以其弟旻爲左將軍하고 兄子璜爲中軍校尉하여 皆典兵事하니 宗族內外 竝列朝廷하고 侍妾懷抱中子 皆封侯하여 弄以金紫하며
王允과 呂布가 董卓을 주살할 것을 모의하다王允과 呂布가 董卓을 주살할 것을 모의하다
동탁董卓이 그의 아우 동민董旻(동민)을 좌장군左將軍으로 삼고 형의 아들 동황董璜중군교위中軍校尉로 삼아서 군대의 일을 모두 주관하게 하니 내외의 종족이 모두 조정에 나열되어 있었고, 시첩侍妾이 낳은 품안에 있는 자식을 모두 로 봉하여 어린아이가 금인金印자수紫綬를 가지고 희롱하였다.
車服僭擬하고 召呼三臺하여 尙書以下詣府啓事注+弄以金紫, 謂弄戲金章紫綬也.하고 築塢於郿하니 高厚皆七丈이요 積榖三十年儲
동탁은 또 수레와 의복을 참람하게 황제와 똑같게 하고, 의 관리들을 불러서 상서尙書 이하가 태사부太師府에 나와 일을 아뢰게 하였으며注+농이금자弄以金紫”는 금장金章자수紫綬를 가지고 희롱함을 이른다., 미현郿縣(소형 성보城堡)를 쌓으니 높이와 두께가 모두 7이었고 30년 먹을 곡식을 비축하였다.
自云 事成이면 雄據天下하고 不成이라도 守此足以畢老라하니라
동탁은 스스로 말하기를 “일이 이루어지면 천하에 웅거雄據할 것이고, 이루어지지 못하더라도 이것을 지키면 노년을 마칠 때까지 충분하다.” 하였다.
忍於誅殺하여 諸將言語有蹉跌이면 便戮於前하니 人不聊生이라
동탁董卓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주살하여 장수들이 말을 하다가 잘못하는 경우가 있으면 곧바로 앞에서 죽이니, 사람들이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
司徒王允 與司隷校尉黃琬 僕射士孫瑞 密謀誅卓注+士孫, 複姓.하다
사도 왕윤司徒 王允사례교위 황완司隷校尉 黃琬복야 사손서僕射 士孫瑞와 함께 동탁을 주살할 것을 은밀히 모의하였다.注+사손士孫복성複姓이다.
中郎將呂布 便弓馬하고 膂力過人하니 愛信之하여 誓爲父子
중랑장 여포中郞將 呂布는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타며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니, 동탁이 그를 아끼고 신임하여 부자간이 되기로 맹세하였다.
이나 性剛褊하여 嘗小失卓意어늘 拔手戟擲布한대 布拳捷避之하니 卓意亦解注+手戟, 小戟, 便於擊刺者. 勇力爲拳, 迅疾爲捷.하다
그러나 동탁은 성격이 괴팍하고 편협하여 여포가 일찍이 동탁의 뜻을 조금 어기자 동탁이 수극手戟을 뽑아 여포에게 던졌다. 여포가 용맹하고 민첩하게 피하고 〈용모를 고쳐 사죄하니〉 동탁의 노여움이 또한 풀렸다.注+수극手戟은 작은 창이니, 공격하고 찌르기에 편리한 것이다. 용력勇力이라고 하고 민첩함을 이라고 한다.
素善待布하니 布見允言狀이어늘 因以誅卓之謀 告之하고 使爲內應한대
왕윤이 평소에 여포를 잘 대우하니, 여포가 왕윤을 만나 이러한 상황을 말하였다. 왕윤이 이를 인하여 동탁을 주살하려는 계책을 그에게 고하고 내응內應이 되게 하였다.
布曰 如父子何 曰 君自姓呂 本非骨肉이라 擲戟之時 豈有父子情邪 布遂許之하다
여포가 말하기를 “부자간이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자, 왕윤이 말하기를 “그대는 원래 여씨呂氏이니 본래 동탁의 골육骨肉이 아니다. 동탁이 수극手戟을 던질 때에 어찌 부자간의 정이 있었겠는가.” 하니, 여포가 마침내 이를 허락하였다.
四月 帝有疾新愈하여 大會未央殿하니 朝服乘車而入할새 陳兵夾道하여 屯衞周匝하고 令呂布等으로 捍衞前後
】 4월에 황제가 병이 들었다가 막 쾌차하여 신하들이 미앙전未央殿에서 크게 모이니, 동탁董卓조복朝服을 입고 수레를 타고서 들어올 적에 길 좌우에 병력을 진열하여 호위가 삼엄하였으며, 여포呂布 등을 시켜 앞뒤를 막고 호위하게 하였다.
王允 使士孫瑞 自書詔以授布注+使尙書ㆍ僕射自書詔者, 懼其泄也.한대 布令勇士十餘人으로 僞著衞士服하여 守北掖門이러니
왕윤王允사손서士孫瑞로 하여금 직접 조서詔書를 써서 여포에게 주게 하자注+상서尙書복야僕射로 하여금 직접 조서詔書를 쓰게 한 것은 이 일이 누설될까 두려워한 것이다., 여포가 용사勇士 십여 명에게 위사衛士의 복장을 거짓으로 입고서 북액문北掖門을 지키게 하였다.
이어늘 以戟刺之하니 衷甲不入이라 傷臂堕車注+衷甲者, 被甲於內而加衣甲上.하여 顧大呼曰 呂布何在
동탁이 들어오자 이들이 창으로 그를 찌르니, 동탁은 갑옷 위에 옷을 덧입은 상태였으므로 창이 들어가지 못하였다. 동탁이 팔을 다쳐 수레에서 떨어지면서注+충갑衷甲’은 안에 갑옷을 입고 갑옷 위에 옷을 덧입은 것이다. 돌아보고 크게 고함치기를 “여포야! 어디에 있느냐?” 하였다.
布曰 有詔討賊臣이라하고 應聲持矛刺卓하여 趣兵斬之注+趣, 讀曰促.하고
여포가 말하기를 “적신賊臣을 토벌하라는 조서詔書가 있었다.” 하고는 소리에 응하여 창을 가지고 동탁을 찌르고서 병사들을 재촉하여 참살하게 하였다.注+으로 읽는다.
卽出懷中詔板하여 以令吏士曰 詔討卓耳 餘皆不問이라한대
그리고 즉시 품안에 있던 조판詔板(조령詔令을 쓴 서판書板)을 꺼내어 관리와 군사들에게 명령하기를 “조서詔書를 받들어 동탁을 토벌할 뿐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불문不問에 부친다.” 하니,
吏士皆稱萬歲하고 百姓 歌舞於道하고 士女賣衣裝하여 市酒肉相慶이러라 宗族在郿 皆爲其群下所殺하다
관리와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고 백성들이 길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며, 사녀士女들은 의복을 팔아 술과 고기를 사서 서로 경하慶賀하였다. 미현郿縣에 있는 동탁의 종족들은 모두 그 부하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暴卓屍於市하니 素充肥 守吏爲大炷하여 置臍中然之하니 光明達曙하여 如是積日注+炷, 音注, 燈也, 燼所著者.이러라
동탁董卓의 시신을 저자에다가 버려두었는데, 동탁은 평소 몸집이 크고 살이 쪄서 시신을 지키는 관리가 큰 심지를 만들어 배꼽 가운데에 놓고 불을 붙이니, 불빛이 새벽까지 밝게 타올라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날 동안 하였다.注+로 등불이니, 불꽃을 붙이는 것이다
塢中 有金二三萬斤 銀八九萬斤이요 錦綺奇玩 積如丘山이러라
미현郿縣에 금 2, 3만 근과 은 8, 9만 근이 있었고 비단과 진귀한 보배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以王允錄尙書事하고 呂布爲奮威將軍하여 假節하여 儀比三司하고 封溫侯하여 共秉朝政注+奮威將軍本無節, 今以節假之者, 欲以重其威也. 儀比三司, 猶同三司也. 溫縣, 屬河內郡.하다
왕윤王允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고 여포呂布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삼아서 부절符節을 빌려주어 의식을 삼사三司와 비견하게 하고 온후溫侯로 봉하여 함께 조정의 정사를 맡게 하였다.注+분위장군奮威將軍은 본래 부절符節이 없는데 지금 부절符節을 빌려준 것은 그의 위엄을 중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의비삼사儀比三司와 같다. 온현溫縣하내군河內郡에 속하였다.
卓之死也 蔡邕 在王允坐러니 聞之驚歎이어늘 勃然叱之曰 董卓 國之大賊으로 幾亡漢室이라
동탁董卓이 죽었을 적에 채옹蔡邕왕윤王允과 자리에 함께 있었는데, 채옹은 이 소식을 듣고는 놀라 탄식하였다. 그러자 왕윤이 발끈하여 꾸짖기를 “동탁은 나라의 큰 역적으로 나라 황실을 거의 망하게 하였다.
君爲王臣하여 所宜同疾이어늘 而懷其私遇하여 反相傷痛하니 豈不共爲逆哉아하고 卽收付廷尉하니
그대는 황제의 신하로서 마땅히 함께 동탁을 미워해야 하는데 그가 사사로이 대우한 것을 생각하여 도리어 서글퍼하고 애통해하니, 어찌 함께 역신逆臣이 되지 않겠는가.” 하고는 즉시 체포하여 정위廷尉에게 회부하였다.
謝曰 身雖不忠이나 願黥首刖足하여 繼成漢史注+初邕徙朔方, 自徒中上書, 乞續漢書諸志, 蓋其所學所志者在此.호리이다
그러자 채옹이 사죄하기를 “몸은 비록 불충不忠하였으나 원컨대 얼굴에 자자刺字하고 발꿈치를 베는 형벌을 받아 계속하여 나라의 사서史書를 완성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注+처음에 채옹蔡邕삭방朔方으로 유배 보냈는데 유배지에서 글을 올려 ≪한서漢書≫의 여러 를 뒤이어 완성할 것을 청하였으니, 그가 배운 바와 뜻한 바가 여기에 있었다. 하였다.
太尉馬日磾 謂允曰注+日磾, 融之族孫也. 伯喈 曠世逸才 多識漢事注+伯喈, 邕字.하니 當續成後史하여 爲一代大典이요
태위 마일제太尉 馬日磾가 왕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마일제馬日磾마융馬融족손族孫이다.백개伯喈(채옹蔡邕)는 세상에 드문 뛰어난 인재이고 나라의 역사를 많이 알고 있으니注+백개伯喈채옹蔡邕이다., 마땅히 이어서 후사後史를 완성하게 하여 한 시대의 큰 전고典故가 되게 해야 합니다.
而所坐至微하니 誅之 無乃失人望乎 允曰 昔 武帝不殺司馬遷하여 使作謗書하여 流於後世注+凡史官記事, 善惡必書, 謂遷所著史記, 俱是漢家不善之事, 皆爲謗也. 非獨指武帝之身, 卽高祖善家令之言, 武帝算緡榷酤之類, 是也. 班固集云 “司馬遷著書, 成一家之言, 至以身陷刑, 故微文刺譏, 貶損當世, 非誼士也.”
또 지은 죄가 지극히 미미하니, 그를 죽임은 너무 인망人望을 잃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왕윤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에 무제武帝사마천司馬遷을 죽이지 아니하여 그로 하여금 비방하는 글을 지어 후세에 전하게 만들었다.注+〈“사작방서 유어후세使作謗書 流於後世”는〉 무릇 사관史官이 일을 기록할 적에 한 일과 한 일을 반드시 모두 쓰는데,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는 모두 나라의 선하지 못한 일로써 다 비방이 됨을 말한 것이다. 비단 무제武帝의 일신을 가리켰을 뿐만이 아니니, 과 같은 따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方今國祚中衰하여 戎馬在郊하니 不可令佞臣執筆하여 在幼主左右 旣無益聖德이요 復使吾黨으로 蒙其訕議니라
지금 국운이 중간에 쇠하여 융마戎馬(군마軍馬)가 교외에 있으니, 아첨하는 신하가 붓을 잡고서 어린 군주의 좌우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 이는 황제의 성덕聖德에도 유익함이 없고 또 우리들이 그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日磾退而告人曰 王公 其無後乎인저 善人 國之紀也 制作 國之典也어늘 滅紀廢典하니 其能久乎 遂死獄中하다
마일제가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왕공王公은 아마도 후손이 없을 것이다. 선인善人은 나라의 기강이고 예악禮樂과 같은 제도를 제작制作함은 나라의 전고典故인데 기강을 멸하고 전고를 폐하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채옹이 마침내 옥중에서 죽었다.
黃門侍郎荀攸 尙書鄭泰 侍中种輯等 謀曰 董卓 驕忍無親하니 雖資彊兵이나 實一匹夫耳 可直刺殺也니라
】 처음에 황문시랑 순유黃門侍郎 荀攸상서 정태尙書 鄭泰, 시중 충집侍中 种輯(충집) 등이 모의하기를 “동탁이 교만하고 잔인하여 친한 사람이 없으니, 비록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나 실로 한낱 필부匹夫일 뿐이다. 곧장 찔러 죽이면 된다.” 하였다.
事垂就而覺하여 收繫獄이러니 卓死하여 得免하다
일이 거의 성공하려던 차에 발각되어서 체포되어 에 갇혀 있었는데, 이때 마침 동탁이 죽어서 를 면하였다.
黃巾 寇兗州하여 殺刺史劉岱어늘 하다
황건적黃巾賊연주兗州를 침략하여 연주자사 유대兗州刺史 劉岱를 죽이자, 조조曹操연주兗州로 들어가 연주兗州를 점거하고 스스로 자사刺史를 칭하였다.
靑州黃巾 寇兗州어늘 劉岱欲擊之한대 濟北相鮑信 諫曰
청주靑州황건적黃巾賊연주兗州를 침략하자 유대劉岱가 이들을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제북상 포신濟北相 鮑信이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今賊衆百萬이라 百姓 皆震恐하고 士卒 無闘志하니 不可敵也
“지금 의 병력이 백만입니다. 백성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하고 사졸士卒들은 싸울 의지가 없으니,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이나 賊軍 無輜重하고 唯以鈔略爲資하니 今不若畜士衆之力하여 先爲固守
그러나 적군賊軍치중輜重이 없고 오직 노략질하는 것에 의지하고 있으니, 지금은 우선 병사들의 힘을 길러서 먼저 굳게 방어하는 것만 못합니다.
彼欲戰不得하고 攻又不能하면 其勢必離散이니 然後 選精鋭하여 據要害擊之 可破也리이다 岱不從하고 遂與戰하여 果爲所殺하다
저들이 싸우고자 하여도 싸울 수 없고 공격하고자 하여도 공격할 수 없으면 그 형세가 틀림없이 이산離散될 것입니다. 그런 뒤에 정예병을 선발해서 요해처를 점거하여 공격한다면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마침내 그들과 싸워서 결국 죽임을 당하였다.
曹操部將陳宮 謂操曰注+宮, 兗州東郡人. 州今無主하고 而王命斷絶하니 請說州中綱紀하리니
조조曹操부장 진궁部將 陳宮이 조조에게 이르기를注+진궁陳宮연주兗州동군東郡 사람이다.연주兗州에는 지금 주인이 없고 황명皇命이 단절되었습니다. 제가 청컨대 연주兗州 안의 강기綱紀들을 설득할 것이니,
明府尋往牧之하여 資之以收天下 此霸王之業也注+說, 輸芮切, 下同. 綱紀, 卽謂州別駕及治中諸從事也. 牧之, 謂爲州牧.니이다 因往說別駕, 治中하여 迎操하여 領兗州刺史하다
밝으신 태수太守(조조는 당시 동군태수東郡太守임)가 뒤이어 가서 이 이 되어 이를 기반으로 삼아 천하를 거두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이는 패왕霸王의 대업이 될 것입니다.”注+(설득함)는 수예輸芮이니, 아래의 “왕세往說”도 같다. 강기綱紀는 바로 별가別駕치중治中 등의 여러 종사從事를 이른다. “목지牧之”는 이 됨을 이른다. 하였다. 진궁이 인하여 가서 별가종사別駕從事치중종사治中從事 등을 설득하여 조조를 맞이해서 연주자사兗州刺史를 겸하게 하였다.
賊衆 精悍하고 操兵 寡弱이러니 操撫循激勵하며 明設賞罰하고 乘間設奇注+承間, 謂乘其間隙之時.하여 晝夜會戰하여 戰輒禽獲하니 賊遂退走
황건적의 병사들은 정예롭고 사나우며 조조의 병사들은 숫자가 적고 약하였는데, 조조가 병사들을 어루만지고 격려하며 상과 벌을 분명하게 내리고 틈을 타 기이한 계책을 써서注+승간承間”은 틈나는 때를 탐을 이른다. 밤낮으로 회전會戰하여 싸울 때마다 적군을 사로잡으니, 황건적이 마침내 패퇴하였다.
鮑信 戰死注+操先與信出行戰地, 後步軍未至, 而卒與賊遇, 遂接戰. 信殊死戰以救操, 操僅得潰圍出, 信遂沒.어늘 操追至濟北하여 悉降之하여 得卒三十餘萬하고 收其精鋭하여 靑州兵이라하니라
포신鮑信이 전사하자注+〈“포신전사鮑信戰死”는〉 조조曹操포신鮑信과 미리 나가 전투할 지역을 순행하였는데, 뒤에 보군步軍이 도착하기 전에 갑자기 과 만나서 마침내 접전하게 되었다. 포신이 결사적으로 싸워서 조조를 구원하여 조조가 겨우 포위망을 뚫고 나왔는데, 포신은 결국 전사하였다. 조조가 적을 추격하여 제북濟北에 이르러서 모두 항복시켜 30여만 명의 병졸을 얻고 그중에 정예병을 거두어 청주병靑州兵이라고 호칭하였다.
詔以金尙爲兗州刺史하여 將之部러니 操逆擊之하니 犇袁術하다
】 황제가 조령詔令을 내려 김상金尙연주자사兗州刺史로 삼아 김상이 장차 연주兗州에 부임하려고 하였는데, 조조曹操가 그를 맞이하여 공격하니, 김상이 원술袁術에게로 달아났다.
이각李傕곽사郭汜 등이 군대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여 사도 왕윤司徒 王允을 죽이니, 여포呂布가 달아나 무관武關을 나갔다.
呂布勸王允하여 盡殺董卓部曲한대 允曰 此輩無罪하니 不可니라 布欲以卓財物 班賜公卿將校한대 允又不從하다
】 처음에 여포呂布왕윤王允에게 동탁董卓의 부하들을 다 죽일 것을 권하였으나 왕윤은 말하기를 “이들은 죄가 없으니 불가不可하다.” 하였다. 여포가 동탁의 재물을 공경公卿장교將校들에게 나누어 하사하고자 하였으나 왕윤은 또 따르지 않았다.
素以劍客遇布하고 布負其功勞하여 多自誇伐이러니 旣失意望 漸不相平이러라
왕윤은 평소 여포를 검객으로 대우하였고 여포는 자신의 공로를 자부하여 스스로 과시하는 일이 많았는데, 여포는 이미 자신의 뜻과 기대를 잃게 되자 점점 서로 불화하게 되었다.
性剛稜疾惡注+稜, 方稜也. 剛稜, 猶言剛方.호되 初懼董卓故 折節下之러니 卓旣殲滅 自謂無復患難이라하여 頗自驕傲하니 以是 群下不甚附之하니라
왕윤은 성품이 강하고 모가 나며 을 미워하였으나注+은 모남이니, 강릉剛稜강방剛方(강하고 모남)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처음에는 동탁을 두려워하였으므로 몸을 굽혀 낮추었다. 그러나 동탁이 이미 섬멸되자, 스스로 ‘다시는 환난이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자못 스스로 교만하고 오만해지니, 이 때문에 부하들이 그리 따르지 않았다.
始與士孫瑞議하여 特下詔赦卓部曲이러니 旣而 疑曰
왕윤王允이 처음에 사손서士孫瑞와 의논하여 특별히 조령詔令을 내려 동탁董卓의 부하들을 사면하려고 하였는데, 이윽고 의심하기를
部曲 從其主耳어늘 今若名之惡逆而赦之 恐適使深自疑 非所以安之也라하고 乃止하다
“부하들은 그 주인을 따를 뿐인데 지금 만약 이들을 악역惡逆이라고 명명했다가 사면해준다면 다만 깊이 스스로 의심하게 할 것이니, 편안히 하는 방법이 아닐까 염려된다.” 하고는 마침내 중지하였다.
又議悉罷其軍이러니 說允曰 涼州人 素憚袁氏而畏關東注+卓將校及在位者, 多涼州人.이라
또 동탁의 군대를 모두 해산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혹자가 왕윤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양주涼州 사람들은 평소에 원씨袁氏를 겁내고 관동關東의 군대를 두려워합니다.注+동탁董卓장교將校와 지위에 있는 자들이 대부분 양주涼州 사람이었다.
今若一旦解兵開關이면 必人人自危하리니 可以皇甫義眞爲將軍하여 就領其衆하고 因使留陝以安撫之라한대
지금 만약 하루아침에 군대를 해산하고 관문을 연다면 틀림없이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위태롭게 여길 것이니, 황보의진皇甫義眞(황보숭皇甫嵩)을 장군으로 삼아서 나아가 양주涼州의 군대를 거느리게 하고 인하여 지역에 머물면서 백성을 안정시키고 어루만지게 해야 합니다.”
允曰 不然하다 關東擧義兵者 皆吾徒也 今若距險屯陝이면 雖安涼州 而疑關東之心이니 不可也니라
그러나 왕윤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관동關東에서 의병義兵을 일으킨 자들은 모두 우리의 무리이다. 지금 만약 험한 곳을 막고 지역에 병력을 주둔시킨다면 비록 양주涼州는 편안하더라도 관동關東 사람들의 마음을 의심하게 할 것이니, 불가하다.” 하였다.
百姓 訛言當悉誅涼州人이라하니 卓故將校遂轉相恐動하여 皆擁兵自守러라
】 이때 백성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를 “양주涼州 출신의 사람들을 모두 죽일 것이다.” 하니, 동탁의 옛 장교들이 마침내 서로 두려워하고 놀라서 모두 병력을 보유하고 스스로를 지켰다.
李傕等 還至陝注+傕等自陳留ㆍ潁川還也.하여 遣使詣長安求赦호되 不得하니 傕等 益懼하여 欲各解散하여 間行歸鄕里러니
이각李傕 등이 돌아와 지역에 이르러서注+〈“이각등환지합(?)李傕等還至陜”은〉 이각李傕 등이 진류陳留영천潁川에서 지역으로 돌아온 것이다. 사자使者장안長安으로 보내어 사면을 청하였으나 사면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자 이각 등이 더욱 두려워하여 각자 해산해서 사잇길로 향리에 돌아가고자 하였다.
校尉賈詡曰 諸君 若棄軍單行이면 則一亭長 能束君矣리니 不如相率而西하여 以攻長安하여 爲董公報仇
이때 교위 가후校尉 賈詡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들이 만약 군대를 버리고 단신單身으로 간다면 한낱 정장亭長 따위가 능히 그대들을 체포할 것이다. 우리가 서로 병력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서 장안長安을 공격하여 동공董公(동탁董卓)을 위해 원수를 갚는 것만 못하다.
事濟 奉國家以正天下하고 若其不合이라도 走未後也注+不合, 謂事不濟, 不與本計合也.니라
일이 이루어지면 국가(황제)를 받들어 천하를 바로잡을 것이고, 만약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본래의 계책과 부합하지 못하면 그때 달아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注+불합不合”은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본래의 계책과 부합하지 못함을 이른다.
傕等 然之하여 乃相與結盟하고 率軍數千하여 晨夜西行하여 隨道收兵하니 比至長安 已十餘萬이러라
이각 등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서로 결맹하고 수천 명의 군대를 거느려 이른 새벽부터 밤늦도록 서쪽으로 가면서 길을 따라 병사를 수합하니, 장안에 도착할 때에는 이미 10여만 명의 군사가 모였다.
與卓故部曲樊稠, 李蒙等으로 合圍長安城하니 城峻하여 不可攻이라 守之八日이러니
】 이들(이각李傕 등)이 동탁董卓의 옛 부하인 번주樊稠, 이몽李蒙 등과 연합하여 장안성長安城을 포위하였으나 이 높아서 공격할 수가 없어 8일 동안 지키고 있었는데,
呂布軍 有叟兵內反注+叟兵, 卽蜀兵也, 漢代謂蜀爲叟.하여 引傕衆入城하여 放兵虜掠이어늘
여포呂布의 군대 중에 수병叟兵이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켜注+수병叟兵은 바로 촉병蜀兵이니, 한대漢代에는 지역을 라고 하였다. 이각의 군사들을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와서 군대를 풀어 노략질하였다.
呂布與戰不勝하여 將數百騎하고 駐馬靑瑣門外하고 招王允同去한대
여포가 이들과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수백 명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청쇄문靑瑣門 밖에 말을 멈추고서 왕윤王允을 불러 함께 떠나고자 하였다.
允曰 若蒙社稷之靈이면 上安國家 吾之願也 如其不獲이면 則奉身以死之
이에 왕윤은 다음과 같이 거절하였다. “만약 사직社稷신령神靈의 보우를 받는다면 위로 국가를 편안히 함이 나의 소원이요, 만약 이를 얻지 못한다면 몸을 바쳐 죽을 것이다.
朝廷 幼少하여 恃我而已시니 臨難苟免 吾不忍也로라 努力謝關東諸公하여 勤以國家爲念하라 太常种拂 戰死하다
조정朝廷(황제)이 나이가 어리시어 나를 믿고 있을 뿐이니, 을 당하여 구차히 죽음을 면함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하겠다. 부디 관동의 제공諸公들에게 말하여 부지런히 국가를 생각하게 하라.” .
傕, 汜屯南宮掖門이어늘 王允 扶帝上宣平門避兵注+三輔黃圖曰 “長安城東面北頭門, 號宣平門.”이러니 傕等 於城門下 伏地叩頭曰
이각李傕곽사郭汜남궁南宮액문掖門에 군대를 주둔하였는데, 왕윤王允이 황제를 부축하여 선평문宣平門에 올라 병란을 피하였다.注+삼보황도三輔黃圖≫에 “장안성 동면長安城 東面의 북쪽 첫 머리의 문을 선평문宣平門이라고 부른다.” 하였다. 이각 등이 성문城門 아래에서 황제를 향해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董卓 忠於陛下어늘 而無故爲呂布所殺하니 臣等 爲卓報讐 非敢爲逆也니이다 請事畢 詣廷尉受罪라하고
동탁董卓이 폐하에게 충성하였는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여포呂布에게 죽임을 당하였으니, 신들은 동탁을 위하여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고 감히 반역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일이 끝난 다음 정위廷尉에게 나아가 죄를 받겠습니다.” 하였다.
圍門樓하여 共表請王允出오하니 問太師何罪 窮蹙하여 乃下見之하다 傕等 收司隷黃琬하여 殺之하다
그러고는 문루門樓를 포위하고 함께 표문表文을 올려 왕윤을 나오게 할 것을 청하여 왕윤에게 묻기를 “태사太師(동탁)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하니, 왕윤이 곤궁하고 위축되어 마침내 내려와 이들을 만나보았다. 이각 등이 사례교위 황완司隷校尉 黃琬을 체포하여 죽였다.
王允 以宋翼爲馮翊하고 王宏爲扶風注+通鑑, 王允上有初字.이러니 傕等 欲殺允하여 乃先徵翼, 宏한대
】 〈처음에〉 왕윤王允송익宋翼풍익馮翊으로 삼고 왕굉王宏부풍扶風으로 삼았었는데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왕윤王允”의 위에 자가 있다., 이각李傕 등은 왕윤을 죽이고자 하여 마침내 먼저 송익과 왕굉을 불렀다.
遣使謂翼曰 汜, 傕 以我二人在外故 未危王公注+危, 謂殺也.하니 今日就徵이면 明日俱族하리니 計將安出
왕굉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송익에게 이르기를 “곽사郭汜이각李傕이 우리 두 사람이 밖에 있기 때문에 아직 왕공王公(왕윤王允)을 죽이지 못하는 것이니注+는 죽임을 이른다., 오늘 부름에 나아가면 내일에 모두 족멸族滅당할 것이다. 계책을 장차 어떻게 내어야 하겠는가?” 하니,
翼曰 雖禍福難量이나 然王命 所不得避也니라 宏曰 關東義兵 鼎沸하여 欲誅董卓하니
송익이 말하기를 “비록 을 헤아리기 어려우나 황제의 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왕굉이 말하기를 “관동關東의 의병이 솥에 물이 끓듯이 함께 일어나 동탁董卓을 주살하고자 하였으니,
今若擧兵共討傕等하여 與山東相應하면 此轉禍爲福之計也니라 不從이어늘 不能獨立하여 遂俱就徵하니
지금 만약 군대를 일으켜 이들과 함께 이각 등을 토벌하여 산동山東과 서로 호응한다면 이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책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러나 송익이 따르지 않자, 왕굉은 독립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함께 부름에 나아갔다.
收允及翼, 宏하여 幷殺之하고 屍王允於市하니 莫敢收者러니 故吏趙戩 棄官收葬之注+戩, 子淺切.하다
이각이 왕윤과 송익, 왕굉을 체포하여 모두 죽이고 왕윤의 시신을 저자에 버려두니 감히 거두는 자가 없었는데, 왕윤의 옛 관리인 조전趙戩(조전)이 관직을 버리고 시신을 거두어 장례하였다.注+자천子淺이다.
呂布自武關으로 犇南陽하니 袁術 待之甚厚러니 布恣兵鈔掠하니 患之
여포呂布무관武關에서 남양南陽으로 달아났다. 원술袁術이 그를 매우 후대하였으나 여포가 멋대로 군대를 풀어 노략질하니, 원술이 이를 근심거리로 여겼다.
布不自安하여 去從張楊於河內러니 傕等 購求布急이어늘 又逃歸袁紹라가 旣而 復歸張楊하다
여포는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원술을 떠나 하내河內로 가서 장양張楊을 따랐는데, 이각李傕 등이 현상금을 내걸어 여포를 찾기를 급박하게 하자 또다시 도망하여 원소袁紹에게 돌아갔다가 이윽고 다시 장양에게 돌아갔다.
自專討卓之勞하니 士孫瑞歸功不侯 得免於難하니라
처음에 왕윤王允이 동탁을 토벌한 공로를 독차지하니, 사손서士孫瑞는 왕윤에게 을 돌리고 에 봉해지지 않았다. 사손서는 이 때문에 이 병난兵難에서 를 면할 수 있었다.
司馬公曰 易稱勞謙이니 君子有終吉이라하니 士孫瑞有功不伐하여 以保其身하니 可不謂之智乎
사마공司馬公(사마광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주역周易겸괘 구삼효사謙卦 九三爻辭에 ‘공로功勞가 있으면서도 겸손함이니, 군자가 끝마침이 있어 하리라.’ 하였다. 사손서士孫瑞이 있어도 자랑하지 아니하여 그 몸을 보존하였으니, 지혜롭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가을 7월에 태부 마일제太傅 馬日磾태복 조기太僕 趙岐를 보내어 관동關東 지방의 군벌들을 화해시켰다.
◑九月 李傕, 郭汜, 樊稠, 張濟 自爲將軍하다
】 9월에 이각李傕, 곽사郭汜, 번주樊稠, 장제張濟가 스스로 장군이 되었다.
傕, 汜, 稠 筦朝政하고 出屯弘農注+筦, 通作管.하다
이각李傕곽사郭汜번주樊稠는 조정의 정사를 관장하고 장제張濟는 나가 홍농弘農에 군대를 주둔하였다.注+(관장하다)은 과 통한다.
以馬騰爲將軍하여 屯郿하다
마등馬騰을 장군으로 삼아 미현郿縣에 주둔하게 하였다.
董卓 入關 召韓遂, 馬騰하여 圖山東이러니 會卓死하니 傕等 皆以爲將하여 遣遂還하고 留騰屯郿하다
동탁董卓관중關中으로 들어올 적에 한수韓遂마등馬騰을 불러 산동山東을 도모하였는데, 이들이 이르자 마침 동탁이 죽으니, 이각李傕 등은 이들을 모두 장군으로 삼아서 한수는 돌려보내고 마등은 남아서 미현郿縣에 주둔하게 하였다.
冬十月 以劉表爲荆州牧하다
】 겨울 10월에 유표劉表형주목荆州牧으로 삼았다.
◑曹操遣使上書하다
조조曹操사자使者를 보내어 글을 올렸다.
曹操辟毛玠하여 爲治中從事하니 玠言於操曰 今天下分崩하여 乘輿播蕩하고 生民廢業하여 飢饉流亡하니
조조曹操모개毛玠벽소辟召하여 치중종사治中從事를 삼으니, 모개가 조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천하가 분열되고 무너져서 가 파천하고 백성들이 생업을 포기하여 기근에 허덕이고 유리流離하니,
公家無經歲之儲하고 百姓無安固之志하여 難以持久 夫兵義者勝이요 守位以財하나니
국가에는 1년을 버틸 저축이 없고 백성들은 편안하고 견고한 뜻이 없어서 오랫동안 버티기가 어렵습니다. 군대는 의로운 자가 승리하고 지위는 재물로써 지키는 법이니,
宜奉天子以令不臣하며 修耕植以畜軍資 如此 則霸王之業 可成也리이다
마땅히 천자를 받들어서 신하 노릇 하지 않는 자들에게 명령하고 농업을 닦아서 군자軍資를 저축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면 패왕霸王의 대업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操納其言하여 遣使詣河內太守張楊하여 欲假塗西至長安이러니 不聽하다
조조는 그의 말을 받아들여 사자使者를 보내어서 하내태수 장양河內太守 張楊을 찾아가 길을 빌려 서쪽으로 장안長安에 이르고자 하였는데, 장양이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董昭說楊曰 袁, 曹雖睦이나 勢不久群이요 曹今雖弱이나 然實天下之英雄也
동소董昭장양張楊을 설득하기를 “원소袁紹조조曹操가 비록 화목하지만 형세상 오랫동안 함께할 수가 없고 조조가 지금은 비록 약하지만 실로 천하의 영웅입니다.
宜通其上事하고 幷表薦之 若事有成이면 永爲深分이라한대 從之注+分, 扶問切, 契分也.하다
마땅히 를 통하게 하고 아울러 표문表文을 올려서 그를 천거해야 하니, 만약 일이 성공한다면 오래도록 깊은 친분을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장양이 이 말을 따랐다.注+부문扶問이니, 친분이다.
昭乃爲操作書하여 與傕, 汜等하여 致殷勤하다 傕, 汜議留操使어늘
이에 동소가 조조를 위하여 편지를 써서 이각李傕곽사郭汜 등에게 보내어 간곡한 뜻을 다하였다. 이각과 곽사가 조조의 사자를 억류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黃門侍郎鍾繇說曰 方今 英雄竝起하여 各矯命專制호되 唯曹兗州 乃心王室이어늘
황문시랑 종요黃門侍郎 鍾繇가 그들을 설득하기를 “지금 영웅들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각각 황명皇命을 사칭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는데, 오직 조연주曹兗州(조조曹操)만이 황실皇室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鍾繇鍾繇
而逆其忠欵 非所以副將來之望也라한대 傕, 汜從之하다 皓之曾孫也
그런데도 그의 충심을 물리치는 것은 장래의 바람에 부응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니, 이각과 곽사가 그의 말을 따랐다. 종요는 종호鍾皓의 증손이다.
주준朱儁을 불러 태복太僕으로 삼았다.
陶謙 與諸守, 相으로 共奏記하여 推朱儁爲太師注+守, 郡守也. 相, 諸侯相也.하고 因移檄牧伯하여 欲以同討李傕하고 奉迎天子러니
도겸陶謙이 여러 군수郡守들과 함께 를 올려 주준朱儁을 추대하여 태사太師로 삼고 이어서注+군수郡守이고 제후諸侯이다. 목백牧伯들에게 격문을 돌려 함께 이각李傕을 토벌하고 천자를 받들어 맞이하고자 하였다.
李傕 用尙書賈詡策하여 徵儁入朝하니 乃辭謙議而就徵이어늘 復爲太僕하다
그런데 마침 이각이 상서 가후尙書 賈詡의 계책을 따라 주준을 불러 조정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러자 주준이 마침내 도겸의 의견을 거절하고 부름에 나아가니, 다시 그를 태복太僕으로 삼았다.
范曄曰 皇甫嵩, 朱儁 竝以上將之略으로 當倉卒之時하여 而舍格天之大業하고 蹈匹夫之小諒하여
卒狼狽虎口하여 爲智士笑注+狽, 博蓋切, 狼屬也, 無前足, 附狼而行, 失狼則不能動, 故猝遽謂之狼狽.하니 豈天之長斯亂也 何智勇之不終乎
끝내 위험한 곳에서 낭패를 당하여 지사智士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注+박개博蓋이니, 이리의 등속이다. 앞발이 없어서 이리에게 붙어 다니니, 이리가 없으면 움직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갑작스럽게 어려운 일을 당함을 낭패狼狽라고 한다. 이는 하늘이 이 혼란을 조장한 것인가. 어찌하여 지혜와 용맹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하였는가.”
역주
역주1 遂掠潁川 : “‘노략질했다.’라고 쓴 것은 李傕 등을 賊으로 여긴 것이다.[書掠 賊之也]” ≪書法≫
역주2 子房 : 劉邦(高祖)을 도와 漢나라를 일으킨 張良의 字인바, 智謀가 뛰어났으므로 荀彧을 그에게 견주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3 公孫瓚이……했다 : 이 내용은 ≪三國志≫ 권14 〈魏書 程昱傳〉에 보인다.
역주4 夏四月 王允……共秉朝政 : “‘使’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功을 王允에게 돌린 것이다. 이 때문에 呂布가 董卓을 주살했을 적에 ‘王允使(왕윤이 시켰다.)’라고 썼고 唐나라의 田神功이 史朝義를 패퇴시켰을 적에 ‘光弼使(李光弼이 시켰다.)’라고 썼으니, 모두 그 윗사람에게 공을 돌린 것이다. 주살의 例는 두 가지가 있으니, ‘伏誅’라고 쓴 것은 중하게 여긴 말이고 곧바로 ‘誅’라고 쓴 것은 시원하게 여긴 말이다. ≪資治通鑑綱目≫에 ‘군주를 폐위하고 시해했다.’고 쓴 것이 20번인데 ‘역적이 토벌되었다.’고 쓴 것이 4번이고, ‘군주를 弑害했다.’고 쓴 것이 73번인데 시해에 대해 殺이라고 쓴 것이 8번이고 ‘역적이 토벌되었다.’고 쓴 것이 26번이다. 이는 역적 열 명 중에 두세 명을 얻은 것이니, 亂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書使 何 歸功允也 是故呂布之誅董卓 書王允使 田神功之敗朝義 書光弼使 皆歸功其上者也 誅例有二 書伏誅者 重辭也 直書誅者 快辭也 綱目書廢君而弑之者二十 賊討者四 書弑君者七十三 弑書殺者八 賊討者二十六 蓋什得其二三焉 亂豈有極哉]” ≪書法≫ “董卓은 몸에 대역죄를 지고 황실을 전복시켰으니, 죄가 죽음으로도 용서받지 못한다. 그러나 당시의 여러 신하들이 사방을 두리번거리기만 하고 능히 그를 토벌한 자가 있지 않았는데 오직 王允이 은밀히 呂布를 심복으로 삼아서 능히 元惡을 죽였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 ‘왕윤이 여포로 하여금 동탁을 주살하게 하였다.’라고 썼으니, 왕윤에게 功을 돌린 것이 매우 분명하다. 왕윤이 끝을 잘 마치지 못했다고 하여 어찌 그 사실을 없앨 수 있겠는가.[卓身負大逆 蕩覆帝室 罪不容誅 然當時諸臣環視四顧 無有能討之者 惟王允潛布腹心 克殄元惡 故綱目書允使呂布誅董卓 其歸功於允 彰彰明矣 豈以其不終之故而遂泯其實乎]” ≪發明≫
역주5 三臺 : 尙書臺, 御使臺, 謁者臺를 이른다.
역주6 (儁)[儀] : 저본에는 ‘儁’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儀’로 바로잡았다.
역주7 儀同三司 : 散官의 명칭이다. 三司는 곧 三公으로, 漢나라 때에는 太尉, 司徒, 司空을 三司라고 하였는바, 儀同三司는 본래 三司는 아니지만 儀制를 그와 동등하게 갖추는 것을 이른다. 後漢의 殤帝 延平 원년(106)에 鄧騭(등질)이 車騎將軍 儀同三司가 됨으로부터 시작되었다.(≪後漢書≫ 권46 〈鄧隲列傳〉)
역주8 高祖가……것 : ‘家令’은 漢나라 때에 皇家의 屬官으로, 그 집안일을 주관하였다. 제후국에서도 家令을 두었는데 후세에는 ‘太子家令’이라는 관직만 남게 되었다. 漢 高祖 즉위 6년(B.C.201)에 고조가 닷새마다 한 번씩 太公(고조의 부친)을 배알하였는데 私家에서 행하는 부자간의 禮를 따랐다. 그러자 태공의 家令이 태공에게 아뢰기를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 사람의 왕이 없습니다. 지금 고조는 비록 아들이지만 군주이시며, 태공께서는 비록 아버지이지만 신하인데, 어찌 군주로 하여금 신하를 배알하게 하실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하면 황제의 위엄과 권위가 서지 않습니다.[天無二日 土無二王 今高祖雖子 人主也 太公雖父 人臣也 奈何令人主拜人臣 如此則威重不行]” 하였다. 그 뒤 고조가 배알하러 왔을 때에 태공이 빗자루를 들고 문에서 맞이하여 뒤로 물러서니, 고조가 크게 놀라며 어가에서 내려서 태공을 부축하였다. 그러자 태공이 “황제는 군주이시니, 어찌 저 때문에 천하의 법도를 어지럽힐 수 있겠습니까.[帝 人主也 奈何以我亂天下法]” 하였다. 이에 고조는 태공을 太上皇으로 추존하고, 마음속으로 家令의 말을 훌륭하게 여겨서[心善家令言] 그에게 金 500斤을 하사하였다.(≪史記≫ 권8 〈高祖本紀〉)
역주9 武帝가……것 : 원문의 ‘算緡’은 ‘算緡錢’이라고도 하는바, 漢나라 때에 시행한 稅法이다. 이는 일종의 所得稅로서 상인, 수공업자, 고리대금업자 및 수레와 선박에 부과하였는데, 주된 과세 대상은 商品이나 資產으로 ‘緡錢’은 세금을 계산하는 단위이다. ≪漢書≫ 권6 〈武帝紀〉에 “〈元狩 4년(B.C.119)에〉 처음으로 산민전을 시행하였다.[初算緡錢]” 하였는데, 이에 대한 顔師古의 注에 인용한 李斐의 말에 “緡은 명주실이니, 錢을 꿰는 데에 쓴다. 1꿰미는 1,000錢이니, 1,000錢에 20錢을 算錢으로 낸다.[緡 絲也 以貫錢也 一貫千錢 出算二十也]”라고 설명하였다. 원문의 ‘榷酤’는 ‘榷酒’, ‘榷酒酤’, ‘酒榷’이라고도 하는바, 漢나라 때 처음으로 실시한 이후로 역대 왕조에서 시행한 주류전매제도로 나라에서 주점을 두어 주류를 전매하거나 일반 주점에 대해 酒稅를 징수하거나 榷酒錢을 균등하게 배당하여 田地의 畝數에 따라 징수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국가의 재정수입을 증가시켰다. ≪한서≫ 권6 〈무제기〉에 “〈天漢 3년(B.C.98)에〉 처음으로 술 판매를 전매하였다.[初榷酒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顏師古의 注에 인용한 韋昭의 말에 “나무로 〈다리를 놓아〉 물을 건너는 것을 榷이라 하니, 백성들이 술을 빚어 파는 것을 금하고 오직 관청에 주점을 설치하여, 도로에 나무를 설치해서 다리를 놓고 이로움을 독점하는 것처럼 함을 이른다.[以木渡水曰榷 謂禁民酤釀 獨官開置 如道路設木爲榷 獨取利也]”라고 설명하였다.
역주10 班固의……하였다 : 後漢 明帝 永平 17년(74)에 ‘明帝는 ≪史記≫에 있는 司馬遷의 贊語가 전부 다 옳은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한 班固의 말을 듣고,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적어서 올리게 하여 읽어본 뒤에 詔書를 내려서 “사마천이 글을 지어 一家의 말을 이루어서 후세에 그 이름을 드날렸다. 그러나 그 몸이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도리어 그 글을 은미하게 하여 조정을 풍자하고 비판하며 漢나라 當代를 폄훼하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의로운 선비가 아니다.[司馬遷著書 成一家之言 揚名後世 至以身陷刑之故 反微文刺譏 貶損當世 非誼士也]”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文選≫ 권48 〈符命 典引〉)
역주11 曹操入據之……自稱刺史 : “이때에 詔令을 내려 金尙을 兗州刺史로 삼았는데 曹操가 그를 맞이하여 공격하자 김상이 袁術에게로 달아났다. 이에 ‘據’라고 쓰고 ‘自稱’이라고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조조를 〈어떻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於是詔以金尙爲兗州刺史 操逆擊之 尙奔袁術 書據 書自稱 綱目之於操可見矣]다” ≪書法≫
역주12 李傕郭汜等……呂布走出關 : “당시의 상황으로 말하면 李傕과 郭汜의 변고는 王允이 포용하지 못한 데에서 격발된 것이다. 만일 왕윤이 혹자의 의견을 따라 皇甫嵩으로써 나아가 董卓의 군대를 거느리게 하였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사면을 요구하는 것을 따라서 사면해주었더라면 또한 충분히 反側하여 불안해하는 마음을 다소 안정시켜서 반드시 이처럼 혹독한 禍를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資治通鑑綱目≫에서 이에 대하여 조금도 왕윤을 허물하는 뜻이 없음은 어째서인가. 왕윤은 大臣의 신분으로 역적을 토벌할 것을 은밀히 도모하여 목소리와 얼굴빛을 동하지 않고서 弑逆한 자를 하루아침에 섬멸하였으니, 漢나라에 공을 세운 것이 크다. 하늘이 만약 漢나라를 도왔다면 반드시 政勢가 뒤집힐 이치가 없었을 것인데, 불행히도 漢나라의 덕이 종말을 고하여 逆黨이 다시 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왕윤 자신은 불측한 禍에 빠지고 漢나라 또한 뒤따라 망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버린 것이지 단지 사람이 계책을 잘못한 실수 때문만은 아니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이각과 곽사가 군대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였다.’라고 썼으니 역적들이 배반하여 반란한 죄를 볼 수 있고, ‘司徒 왕윤을 죽였다.’라고 썼으니 왕윤이 죄가 없이 죽임을 당하여 그 지위에서 죽은 충절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惡을 징계하고 善을 권면하는 뜻은 逆順이 있음만 알고 成敗가 있음은 알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엄중하지 않겠는가.[以當時言之 傕汜之變 激於允之不能容 使允能從或者之議 以皇甫嵩就領其衆 不然 因其求赦而赦之 亦足少安反側之心 未必召禍如是之烈 然綱目於此略無咎允之意 何哉 允身爲大臣 密謀討賊 不動聲色 使弑逆之虜 一旦勦滅 其有功於漢多矣 天若祚漢 必無反覆之理 不幸漢德告終 逆黨復出 故允身罹不測之禍 而漢亦隨之 此則天之所廢 非特人謀不善之失也 綱目書傕汜擧兵犯闕 則見逆賊反叛之罪 書殺司徒王允 則見允無罪見殺 死於其位之節 然則懲惡勸善之義 知有逆順而不知有成敗也 豈不嚴哉]” ≪發明≫
역주13 太常……죽었다 : ≪資治通鑑≫에는 “太常 种拂이 말하기를 ‘나라의 大臣이 되어서 포악한 자와 침략하는 자를 막지 못하여 적의 시퍼런 칼날로 하여금 궁궐을 향하게 하였으니 가면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為國大臣 不能禁暴禦侮 使白刃向宫 去將安之]’ 하고 마침내 싸우다가 죽었다.” 하여, 충불이 싸우다가 죽은 이유가 보인다.
역주14 遣太傅馬日磾……和解關東 : “‘關東 지방의 군벌들을 화해시켰다.[和解關東]’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비난한 것이다. 天子는 是非와 曲直의 주체이다. 관동의 여러 장수가 군대를 일으켜 서로 공격하였으면 그 시비와 곡직이 매우 분명한데도 이것을 분변하여 바로잡지 못하고, 마침내 大臣을 보내어 節을 가지고 가서 화해시켰으니, 그 떨치지 못함이 심하다. 이에 곧바로 써서 비난하였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使者를 보내어 화해시켰다.’고 쓴 것이 2번이다.(이해와 唐 昭宗 乾寧 3년(896)이니, 모두 쇠미한 시대이다.)[書和解關東 何 譏也 天子者 是非曲直之主也 關東諸將擧兵相攻 其是非曲直必有在矣 不能分辨而匡直之 乃遣大臣 持節和解 甚矣 其不振也 直書譏之 終綱目書遣使和解二(是年唐昭宗乾寧三年 皆衰世也)]다” ≪書法≫
역주15 (與)[以] : 저본에는 ‘與’로 되어 있으나, ≪御批資治通鑑綱目≫에 의거하여 ‘以’로 바로잡았다.
역주16 乘輿 : 天子가 타는 수레로, 때로는 천자를 지칭하기도 한다.
역주17 上事 : 朝廷에 글을 올려서 사안에 대해 말하는 것 또는 그러한 奏章을 가리킨다.
역주18 徵朱儁爲太僕 : “朱儁이 이전에 義를 제창하여 역적을 토벌하였으니, 功을 비록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뜻이 또한 가상하다. 지금 李傕과 郭汜가 횡포를 부리고 亂을 일으켜서 조정을 위협하였는데 이때에 여러 郡守와 相이 함께 주준을 추대하여 맹주로 삼았으니, 만일 주준이 이로 인해 동맹들을 규합하여 인솔해서 힘써 황실을 부지하였다면 어찌 매우 아름답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도리어 머리를 숙여서 이각의 부름에 나아감은 어째서인가. 게다가 주준은 오히려 격문을 돌려 董卓을 토벌하였는데 또 어찌하여 이각과 곽사를 두려워한단 말인가. ≪資治通鑑綱目≫에 ‘주준을 불러 太僕으로 삼았다.’라고 써서 글에는 폄하하는 말이 없으나 이때 조정의 명령이 이각과 곽사에게서 나왔으니, 그렇다면 주준이 부르는 명에 나아감은 그가 이각과 곽사에게 몸을 굽힌 것임을 따라서 알 수 있다. 주준은 충성과 지혜를 모두 잃어서 천고에 비난을 받게 되었으니, 이는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儁前唱義討賊 功雖不就 志亦可嘉 今傕汜暴亂 劫制朝廷 於是諸守相共推儁爲主 使儁能因此 糾率同盟 力扶王室 豈不甚美 顧乃俛首以就李傕之召 何耶 且儁尙能移檄討卓 又何畏於傕汜哉 綱目書召儁爲太僕 文無貶詞 然是時朝命出於傕汜 則儁之就召 其屈身從可知矣 忠智俱失 貽譏千古 是果誰之咎歟]” ≪發明≫
역주19 奏記 : 漢나라 때에 官府의 長官에게 의견을 기술하여 올리던 문서를 가리킨다.
역주20 皇甫嵩과……못하였는가 : 이 내용은 ≪後漢書≫ 권101 〈皇甫嵩朱儁列傳〉의 끝부분에 실려 있는 范曄의 論에 보인다.

자치통감강목(10)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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