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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6)

자치통감강목(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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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寅年(A.D.6)
병인년(A.D.6)
孺子嬰居攝元年注+莽旣攝政 遂改元爲居攝하다이라
[] 나라 유자孺子 유영劉嬰 거섭居攝 원년이다.注+왕망王莽이 이미 섭정하자, 마침내 거섭居攝(A.D.6~8)으로 개원改元하였다.
春正月 하다
[] 봄 정월에 왕망王莽남교南郊에서 제사하였다.
◑三月 立宣帝玄孫嬰하여 爲皇太子하고 號曰孺子注+亦因周公輔成王, 三叔流言曰 “公將不利於孺子.” 而爲此號.라하다
[] 3월에 선제宣帝현손玄孫유영劉嬰을 세워 황태자皇太子로 삼고 ‘유자孺子’라 칭하였다.注+① 이 또한 이 칭호(유자孺子)를 취한 것이다.
廣戚侯勳之孫이요 顯之子也注+楚孝王子勳, 封廣戚侯, 顯則勳之子也. 地理志 “沛郡, 有廣戚侯國.”
[] 유영劉嬰광척후廣戚侯 유훈劉勳의 손자이고 유현劉顯의 아들이다.注+초효왕楚孝王의 아들 유훈劉勳광척후廣戚侯로 봉했으니, 유현劉顯은 유훈의 아들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패군沛郡광척후廣戚侯의 나라가 있었다.” 하였다.
年二歲러니 託以爲卜相最吉하여 立之注+相, 息亮切.하니라
나이가 2살이었는데, 점괘가 가장 하다고 칭탁하여 그를 세운 것이다.注+(점치다)은 식량息亮이다.
尊皇后曰皇太后라하다
[] 황후皇后을 높여 황태후皇太后라 하였다.
[] 여름 4월에 안중후安衆侯 유숭劉崇이 군대를 일으켜 왕망王莽을 토벌하다가 이기지 못하여 죽었다.
安衆侯劉崇 與相張紹謀曰注+地理志 “安衆侯國, 屬南陽郡.” 長沙王發生丹, 封安衆侯, 崇卽丹玄孫之子也.
[] 안중후安衆侯 유숭劉崇국상國相장소張紹와 함께 모의하기를注+①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안중후安衆侯의 나라는 남양군南陽郡에 속했다.” 하였다. 장사왕長沙王 유발劉發유단劉丹을 낳았는데 안중후安衆侯에 봉하니, 유숭劉崇은 바로 유단의 현손玄孫의 아들이다.
必危劉氏하여 天下非之로되 莫敢先擧하니 此乃宗室之恥也
왕망王莽이 반드시 유씨劉氏를 위태롭게 할 것이므로 천하가 그를 나쁘게 여기나 감히 먼저 거병擧兵하는 자가 없으니, 이야말로 종실宗室의 수치이다.
吾帥宗族爲先하면 海內必和注+和, 去聲.하리라
내가 종족들을 거느리고 선도가 되면 해내海內가 반드시 호응할 것이다.” 하였다.注+(호응하다)는 거성去聲이다.
從者百餘人이어늘 遂進攻宛이러니 不得入而敗注+宛, 南陽郡治所.하다
따르는 자가 백여 명이었는데, 마침내 완현宛縣으로 진공進攻하였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패하였다.注+완현宛縣남양군南陽郡치소治所이다.
五月 太皇太后詔莽朝見 稱假皇帝하다
[] 5월에 태황태후太皇太后조령詔令을 내려 왕망王莽조현朝見(조현)할 적에 가황제假皇帝라고 칭하게 하였다.
群臣 復白호되 劉崇等謀逆者 以莽權輕也 宜尊重以塡海內라한대
[] 여러 신하들이 다시 아뢰기를 “유숭劉崇 등이 반역을 도모한 것은 왕망王莽의 권세가 가볍기 때문이니, 마땅히 호칭을 높여 해내海內를 진정시켜야 합니다.” 하자,
太后乃詔莽朝見 稱假皇帝하다
태후太后가 마침내 조령詔令을 내려 왕망이 조현할 적에 가황제假皇帝라 칭하게 하였다.
冬十月朔 日食하다
[] 겨울 10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西羌하다
[] 서강西羌이 배반하였다.
西羌龎恬等 怨莽奪其地하여 反攻西河太守어늘 遣兵擊破之하다
[] 서강西羌방념龎恬(방념) 등이, 왕망王莽이 자신의 땅을 빼앗은 것을 원망하여 배반하고 서하태수西河太守를 공격하자, 왕망이 군대를 보내어 격파하였다.
역주
역주1 王莽祀南郊 : “앞서 시해할 적에는 ‘安漢公 莽’이라고 쓰고 여기에서는 ‘王莽’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왕망이 南郊에 제사함을 허여하지 않은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는 혐의를 분별하고 은미함을 밝혔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王莽’이라고〉 배척하여 썼고, 이때부터 일이 있을 경우에는 모두 배척하여 ‘莽’이라고 써서 그 姓을 삭제하였다.[前弑 書安漢公莽矣 此書王莽 何 不予其祀南郊也 綱目別嫌明微 故於此斥書之 自是有事 皆斥書莽而削其姓]” 《書法》 “王莽이 나라를 도둑질함은 진실로 말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居攝하기 이전에는 《資治通鑑綱目》에 모두 官職을 쓴 것은 그가 아직 漢나라의 臣子가 됨을 밝힌 것이요, 이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관직을 삭제하였으나 ‘王莽’이라고 칭하고, 이후부터는 다만 ‘莽’이라고만 썼다.[莽之竊國 固無足言 然自居攝以前 綱目皆書其官者 明其猶爲漢之臣子也 至是始削去之 而稱王莽 自此以後 止書莽矣]” 《發明》
역주2 周公이……따라 : 三叔은 成王의 세 숙부인 管叔 姬鮮, 蔡叔 姬度, 霍叔 姬處를 이르며, 孺子는 어린 사람이란 뜻으로 당시 나이 어린 성왕을 가리킨다. 周公은 武王을 도와 殷나라를 멸망시키고 紂王의 아들 武庚을 殷나라에 봉한 다음 三叔으로 하여금 殷나라를 감시하게 하였다. 그 후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이 즉위하여 주공이 섭정을 하자, 삼숙은 주공이 장차 孺子를 해치고 왕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무경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주공의 토벌을 받고 패망하였다. 王莽은 이 고사를 따라 周公으로 자처하고 어린 황제를 孺子라 칭한 것이다.
역주3 安衆侯……死之 : “이때에 劉崇이 100여 명을 거느리고 宛邑을 공격하였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패하였는데, ‘군대를 일으켰다가 죽었다.[起兵死之]’라고 쓴 것은 倡義를 인정한 것이니, ‘死之’라고 쓴 것이 이때에 처음 시작되었다.[於是 崇帥百餘人 攻宛不入而敗耳 書起兵死之 予倡義也 書死之始此]” 《書法》 “劉崇이 군대를 일으키자, 그를 따르는 자가 겨우 100여 명이었으니 매우 미약한 자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그의 ‘爵’을 쓰고 ‘討’와 ‘死之’라고 쓴 것은 逆賊의 죄를 바로잡고 忠節에 죽은 義理를 표창하여 후세의 권면으로 삼은 것이다.[劉崇起兵 從者僅百餘人 可謂微之微者矣 然書爵書討書死之者 所以正逆賊之罪 褒死節之誼 爲後世勸也]” 《發明》

자치통감강목(6)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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