起己亥漢高帝五年하여 盡甲申漢文帝後七年이니 凡四十六年이라
綱
漢太祖高皇帝五年
注+諡法無高, 以帝爲功最高而爲漢帝之太祖, 故特起名焉.이라
綱
十二月
에 圍籍垓下
한대 籍
이 走自殺
하니 楚地悉定
하다
目
十月
에 漢王
이 追項羽
하여 至固陵
注+ “陳國陽夏縣, 有固陵.”한대 齊王信, 魏相國越
이 期會不至
하고 楚擊漢軍大破之
어늘
漢王이 復堅壁自守하고 謂張良曰 諸侯不從하니 奈何오 對曰
楚兵且破
에 二人
이 未有分地
하니 其不至固宜
注+分, 扶問切, 言信等雖名爲王, 未爲分畫疆界也, 固宜, 理宜然也.라
君王
이 能與共天下
하시면 可立致也
注+共天下, 共有天下之地, 割而封之.리이다
信之立
이 非君王意
니 不自堅
이요 且其家在楚
하여 欲得故邑
注+非君王意, 言信自請爲假王, 乃立之耳, 非君王本意.하고 越
이 本定梁地
하여 亦望王
注+王, 望王, 謂望爲王也.이어늘 而君王不早定
하시니 今能出捐此地
하여 以許兩人
하여 使各自爲戰
이면 則楚易破也
리이다
目
十一月에 劉賈圍壽春하여 誘楚大司馬周殷한대 殷이 畔楚하고 擧九江兵하여 迎黥布皆會하다
十二月
에 羽至垓下
하니 兵少食盡
注+垓, 音該. 垓下, 聚邑名. 一云 “垓, 堤名.” 正義 “垓下, 是高岡絶巖, 今猶高三四丈. 其聚邑及堤, 在垓之側, 因取名焉, 今在亳州眞源縣東十里.”이라
信等
이 以大軍乘之
하니 羽敗入壁
이어늘 漢及諸侯兵
이 圍之數重
注+重, 平聲.이러니
羽夜聞漢軍四面皆楚歌
注+楚歌者, 爲楚人之歌, 猶言吳謳越吟也. 九江兵歸漢, 故多楚聲.하고 乃大驚曰 漢
이 皆已得楚乎
아
是何楚人之多也
오하고 起飮帳中
하고 悲歌忼慨
하여 泣數行下
注+忼, 口黨切, 亦作慷. 慨, 口漑切. 忼慨, 悲歎也. 行, 胡郞切. 下, 胡嫁切.하니 左右皆泣
하여 莫能仰視
러라
目
於是
에 羽乃乘其駿馬
하고 從八百餘騎
하여直夜潰圍
하여 南出馳走
注+直, 讀曰値, 當也.러니
渡淮至陰陵
하여 迷失道
注+班志 “陰陵縣, 屬九江郡.”하여 問一田父
한대 田父紿曰左
하라
左
하여 乃陷大澤中
注+上左字, 田父欺令項羽向左去也. 下左字, 羽從其言而向左去也.하니 漢騎將灌嬰
이 追及之
하다
至東城
注+班志 “東城縣, 屬九江郡.”하니 乃有二十八騎
요 漢追者 數千人
이라
吾起兵八歲에 七十餘戰호대 未嘗敗北하여 遂霸天下러니
今日에 固決死호리니 願爲諸君決戰하여 必潰圍斬將하여 令諸君知之호리라하고
乃分其騎
하여 爲四隊四鄕
注+鄕, 讀曰嚮.하니 漢軍
이 圍之數重
이어늘
羽令四面騎馳下
하여 期山東爲三處
注+期遇山東分爲三處.하다
於是에 大呼馳下하여 斬漢一將하고 與其騎로 會爲三處하니
漢軍이 不知羽所在하여 乃分軍爲三하여 復圍之어늘 羽復馳하여 斬漢一都尉하고 殺數十百人하고 復聚其騎하니 亡其兩騎耳라
目
於是
에 羽欲東渡烏江
注+地理志 “烏江, 在東城縣.”이러니 亭長
이檥船待曰
注+檥, 音蟻, 附也. 附船著岸也. 江東雖小
나 地方千里
요 衆數十萬
이니 亦足王也
라
羽笑曰 籍이 與江東子弟八千人으로 渡江而西러니 今無一人還하니 縱江東父兄이 憐而王我나 我獨不愧於心乎아하고
目
爲其守禮義之國
이니 爲主死節
注+爲, 去聲. 懷王初封項籍爲魯公.이라하고 乃持羽頭示之
한대 乃降
이어늘
以魯公禮
로 葬羽於穀城
注+皇覽 “項羽冢, 在東郡穀城東, 去縣十五里.”하고 親爲發哀
하여 哭之而去
하다
諸項氏枝屬
을 皆不誅
하고 封項伯等四人
하여 爲列侯
하여 賜姓劉氏
하고 諸民略在楚者
를 皆歸之
注+列者, 見序列也.하다
目
自矜功伐하여 奮其私智而不師古하고 欲以力征으로 經營天下라가 國亡身死호대 尙不覺寤하고 乃引天亡我非戰之罪하니 豈不謬哉리오
目
漢
은 屈群策
하여 群策屈群力
注+屈, 盡也.이어늘 楚
는憞群策而自屈其力
注+憞, 徒對切, 惡也.하니 屈人者
는 克
하고 自屈者
는 負
하나니
綱
◑ 遣劉賈
하여 擊臨江王共尉
하여 虜之
注+尉, 敖之子也.하다
目
韓信
이 至楚
하여 召漂母
하여 賜千金
하고 召辱己少年
하여 以爲中尉
하고 曰此壯士也
注+漢制, 諸侯王國, 有中尉, 掌武職.라하다
目
兵不得休八年
이라 萬民與苦甚
注+與, 音預.이러니 今天下事畢
하니 其赦天下殊死已下
注+殊死, 斬刑也. 殊, 絶也, 異也, 言其身首離絶而異處也.하라
目
諸侯王
이 皆請尊漢王爲皇帝
어늘 二月甲午
에 卽位于氾水之陽
注+氾, 敷劍切. 張晏曰 “氾水在濟陰界.”하다
綱
更王后曰皇后라하고 王太子曰皇太子라하고 追尊先媼曰昭靈夫人이라하다
綱
◑ 立故衡山王芮爲長沙王
하고 故粤王無諸爲閩粤王
注+芮封衡山王, 都邾, 今封長沙王, 都臨湘. 粤, 通作越. 無諸, 越王句踐之後. 閩, 音緡, 春秋, 七閩地. 戰國時, 越人所居, 其人本蛇種, 其字從虫.하다
目
不書名數者
를 令各歸其縣
하여 復故爵田宅
注+保, 守也, 安也, 守而安之, 以避難也. 名數, 戶籍也, 復, 還也.하고
吏以文法敎訓辨告
호대 勿笞辱
注+辨告者, 分別義理以曉喩之.軍吏卒
하고
爵及七大夫以上
은 皆令食邑
하고 已下
는 皆復其身及戶
하고 勿事
注+七大夫, 公大夫也, 爵第七, 故謂之七大夫. 秦制, 列侯乃得食邑, 今七大夫以上皆食邑, 所以寵之也. 復, 除也. 除免其身役‧戶稅也. 勿事, 不給徭賦也.하다
目
置酒洛陽南宮
注+秦時, 洛陽已有南北宮.할새 上曰 徹侯諸將
은 毋敢隱朕
하고 皆言其情
하라三傑을 임용하다
吾所以有天下者는 何며 項氏之所以失天下者는 何오
高起, 王陵
이 對曰
注+高起, 姓名. 陛下
는 使人攻城略地
하여는 因以與之
하여 與天下同其利
하시고
項羽는 不然하여 有功者를 害之하고 賢者를 疑之하며 戰勝而不予人功하고 得地而不予人利하니 此其所以失天下也니이다
夫運籌帷幄之中
하여 決勝千里之外
는 吾不如子房
注+籌, 筭也, 如借食前箸, 指畫爲漢王, 陳不可者八之類. 帷幄, 軍幕也. 子房, 張良字.이요塡國家, 撫百姓
하고 給餉餽
하여 不絶糧道
는 吾不如蕭何
注+塡, 與鎭同. 給, 供給也. 餽, 與饋同.요 連百萬之衆
하여 戰必勝, 攻必取
는 吾不如韓信
하니
三者
는 皆人傑
이어늘 吾能用之
하니 此吾所以取天下者也
注+傑, 言傑然獨出也.요
項羽는 有一范增而不能用하니 此所以爲我禽也라하니
目
范增이 爲之謀主하여 曾無一言以救其敗하고 其得計 不過數欲害沛公耳니
目
田橫
이 與其徒屬五百餘人
으로 入海
하여 居島中
注+渤海中有島, 名嗚呼, 又號半洋山.이러니
大者
면 王
이요 小者
면 乃侯耳
注+大者封王, 小亦不失爲侯.어니와 不來
면 且擧兵加誅焉
호리라
橫
이 乃與其客二人
으로 乘傳詣洛陽
하여 至尸鄕廐置
注+傳, 張戀切. 四馬高足爲置傳, 四馬中足爲馳傳, 四馬下足爲乘傳, 一馬二馬爲軺傳, 急者乘一乘傳. 古者以車, 謂之傳車, 其後單置馬, 謂之驛騎. 正義 “尸鄕在洛州偃師縣西南五里亳阪之北.” 廏置, 謂置馬以傳驛處.하여 謂其客曰
橫이 始與漢王으로 俱南面稱孤러니 今漢王爲天子어늘 而橫乃爲亡虜하여 北面事之하니 其恥固已甚矣요
且吾烹人之兄
하고 與其弟
로 倂肩而事主
注+其弟, 謂酈食其弟酈商也. 先是, 齊烹食其. 倂, 步鼎切. 倂肩, 謂比肩竝立也.하면 縱彼不動
注+此下脫一我字.나 我獨不愧於心乎
아하고 遂自剄
하여 令客奉其頭
하여 從使者馳奏之
한대
二客이 自剄하니 餘五百人在島中者 聞之하고 亦皆自殺하다
目
初
에 楚人季布 爲項籍將
하여數窘辱帝
注+季, 姓也. 窘, 巨隕切, 迫也.러니
籍滅
에 帝購求布千金
호대 敢有舍匿
이면 罪三族
注+舍, 止也. 匿, 隱也.호리라
布乃髡鉗爲奴
하여 自賣於魯朱家
注+髡, 音坤, 𩮜髮也. 鉗, 其炎切, 以鐵束頸也. 朱家, 魯人也.어늘
朱家心知其季布也하여 買置田舍하고 身之洛陽하여 見滕公하고 曰
臣各爲其主用
이 職耳
注+爲, 去聲. 職耳, 言臣職當然耳.라
今上이 始得天下하여 而以私怨求一人하시니 何示不廣也오
且以布之賢으로 漢求之急하니 此不北走胡면 南走越耳라
夫忌壯士以資敵國
은 此伍子胥所以鞭荊平之墓也
注+子胥, 伍員字, 父奢爲楚平王所殺. 員奔吳, 敎吳伐楚, 平王已卒, 掘墓取屍, 鞭之三百.니라
滕公이 言於上한대 上乃赦布하고 召拜郞中하니 朱家遂不復見之하다
目
布
의 母弟丁公
이 亦爲項羽將
하여 逐窘帝彭城西
하여 短兵接
注+丁公, 名固, 布同母異父弟. 短兵, 刀劍也. 謂用刀劍以相接擊也.이러니 帝急
注+句.하여 顧曰 兩賢
이 豈相戹哉
리오하니 丁公乃還
注+回視曰顧. 兩賢者, 高祖自謂倂與固也. 戹, 乙革切, 或作厄.이러니
至是謁見
이어늘 帝以徇軍中曰 丁公
이 爲臣不忠
하여 使項王失天下者也
라하고 遂斬之曰 使後爲人臣
으로 無傚丁公也
注+傚, 倣也.라하니라
目
高祖罔羅豪桀
하여 招亡納叛
이 亦已多矣
注+魚罾謂之罔, 鳥罟謂之羅.로대
當群雄角逐之際
하여 民無定主
하니 來者受之 固其宜也
注+角, 競也爭也.어니와
及貴爲天子하여는 海內爲臣하니 苟不明禮義以示人하여 使爲臣者로 人懷二心하여 以徼大利면 則國家豈能久安乎아
是故로 斷以大義하여 使天下로 曉然皆知爲臣不忠者 無所自容하여 而懷私結恩者는 雖至於活己나 猶不與也라
目
齊人婁敬이戍隴西할새 過洛陽이라가 求見上曰 陛下都洛陽하시니 豈欲與周室比隆哉잇가 上曰 然하다
陛下取天下與周異
하니 周自后稷
으로 積徳絫善十有餘世
注+絫, 古累字.에 至於文武
하여 而諸侯自歸之
어늘 遂滅殷爲天子
러니
及成王卽位에 周公相焉하여 乃營洛邑하니 以爲此天下之中也니 諸侯四方이 納貢職에 道里均矣일새니이다
故로 周之盛時에 諸侯四夷莫不賓服이러니 及其衰也하여 天下莫朝호대 周不能制하니 非唯徳薄이요 形勢弱也니이다
今陛下起豐沛
하사 卷蜀漢
하고 定三秦
注+卷, 讀曰捲.하시고 與項羽
로 戰滎陽成皐之間
하여 大戰七十
이요 小戰四十
하여
使天下之民
으로 肝腦塗地
하여 哭聲未絶
하고 傷者未起
어늘 而欲比隆於成康之時
하시니 臣竊以爲不侔也
注+侔, 音牟, 等也.라하노이다
夫秦地는 被山帶河하여 四塞以爲固하고 卒然有急이어든 百萬之衆을 可立具也니이다
夫與人鬪
에 不搤其亢 拊其背
하면 未能全其勝也
注+搤, 音厄, 捉持也. 亢, 音剛, 咽喉也, 以喩關中. 拊, 音撫, 擊也. 以背脊喩天下.하나니
今陛下案秦之故地하시면 此亦搤天下之亢而拊其背也니이다
目
帝問群臣
한대 群臣
이 皆山東人
이라 爭言 周
는 王數百年
호대 秦
은 二世卽亡
注+王, 于況切.하니이다
洛陽
은 東有成皐
하고 西有殽澠
하고 倍河鄕洛
하니 其固亦足恃也
注+河在洛陽城北, 故曰倍. 洛在洛陽城南, 故曰鄕.니이다
目
洛陽
이 雖有此固
나 其中
이 小
하여 不過數百里
요 田地薄
하고 四面受敵
하니 非用武之國也
注+言無險可恃, 非用兵之地.어니와
關中
은 左殽函 右隴蜀
이요 沃野千里
注+沃者, 灌漑也, 言其土地皆有灌漑之利, 故曰沃野.요 南有巴蜀之饒
하고 北有胡苑之利
注+養禽獸處, 通名曰苑. 謂安定‧北地‧上郡之北, 與胡地相接, 可以畜牧, 又多致胡馬, 故曰胡苑之利.하며 阻三面而守
하고 獨以一面
으로 東制諸侯
하니이다
諸侯安定
이면 河渭漕輓天下
하여 西給京師
注+輓, 引也. 漢漕關東之粟, 自河入渭, 自渭而上, 輸之長安.하고 諸侯有變
이면 順流而下
하여 足以委輸
注+委‧輸, 竝去聲, 謂輸送委積者.니
此所謂金城千里
요 天府之國
이니 敬說
이 是也
注+金城, 言秦有四塞之固如金城. 財物所聚, 謂之府, 言關中之地, 物産饒多, 可備贍給, 故稱天府.니이다
上
이 卽日
에 西都關中
注+卽日, 蓋謂其日卽定計, 非卽日遂行也.하고 拜敬郞中
하여 號奉春君
이라하고 賜姓劉氏
注+春, 歲之始也, 以敬首謀都關中, 故號奉春君.하다
目
高帝起兵八年에 歲無寧居라가 至是하여 天下平定하니 當亦少思安逸之時也어늘
而敏於用言하여 不自遑暇 如此하니 其成帝業이 宜哉로다
光武下隴하고 歸才六日에 潁川盜起어늘 而往征之하니 可謂能繩祖武矣로다
目
良
이 素多病
이러니 入關
에 卽杜門道引
하고 不食穀
하고 曰
注+道, 讀曰導. 道引, 導氣令其和, 引體令其柔. 華陀傳曰 “古僊人導引之事, 熊經鴟顧, 引接要體, 動諸關節, 以求難.” 家世相韓
이라가 及韓滅
에 不愛萬金之資
하여 爲韓報讐彊秦
하니 天下振動
이러니
今以三寸舌로 爲帝者師하여 封萬戶侯하니 此는 布衣之極이니
於良
에 足矣
라 願棄人間事
하고 欲從赤松子遊耳
注+赤松子, 仙人號也, 神農時, 爲雨師.라하니라
目
夫生之有死는 譬猶夜旦之必然이니 自古及今에 固未嘗有超然而獨存者也라
故로 子房이 托於神僊하여 遺棄外物하니 所謂明哲保身者與인저
目
以爲奮匹夫之勇하여 以僥倖於一旦이 不若陰求天下之豪傑而徐圖之러니 及得沛公하여 而知其足以濟吾事也하고
於是에 委身從之하여 敎以滅秦之計하고 及事之濟하여는 則去漢歸韓호대 而但敎以燒絶棧道하고 至於定三秦 討項氏之策하여는 則無一言及之하니 豈其智之不及哉리오
其心이 固將輔韓成하여 以馳騁於中原이요 而不欲漢王之東也러니
及成爲項羽所殺하여는 則韓之子孫이 無若成之賢者하여 而子房之志 無所復伸矣라
然이나 羽之讐를 不可以不報요 而欲報羽인댄 則非漢이면 又不足資以成功也라
於是에 不得已復西하여 以再致吾復讐之志하여 使漢事得成하고 而吾責亦塞然後에 自託於神僊之說하여 以遂其不欲仕漢之本心焉하니
此子房之智謀節義 所以遠過於人하여 而自漢至今千有餘年에 未有能窺之者라
惟子程子蓋嘗言之하시고 又以爲子房進退從容하여 有儒者之風하니 非高祖之能用子房이요 實子房能用高祖라하시니 其可謂知子房矣로다
綱
◑ 秋七月
에 燕王臧荼反
이어늘 帝
虜擊之
하고 立盧綰爲燕王
하다
目
綰家與上同里閈
이요 綰生
이 又與上同日
이라 故特王之
注+閈, 音汗, 里門曰閈.하니라
目
敖尙帝長女魯元公主爲后
注+尙者, 尊也, 帝王之女, 尊而尙之, 不敢言娶. 元, 諡也, 食邑於魯.하다
綱
利幾反
이어늘 帝自將擊破之
注+利幾, 姓名. 以陳令降, 上候之潁川. 上至洛陽, 普召通侯, 而幾自以羽將, 故恐懼而反也.하다
綱
◑ 後九月
에 治長樂宮
注+後九月, 卽閏九月. 秦以十月爲歲首, 應置閏者, 摠置於歲末, 漢因之, 久而不革. 或曰 “此說未盡. 秦知置曆有閏, 何故皆以爲九月乎. 蓋司馬氏爲史記, 旣以秦正月稱十月, 遂以閏月爲後九月, 是司馬氏如此敍之, 非秦法也.” 長樂宮, 本秦之興樂宮, 周迴二十里, 在長安城東隅.하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제3권은 기해년己亥年 한漢나라 고조高祖 5년(B.C. 202)부터 시작해서 갑신년甲申年 한漢나라 문제文帝 후後7년(B.C. 157)까지이니, 모두 46년이다.
綱
[綱]
한漢나라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 5년이다.
注+시법諡法에 고高자를 쓴 경우가 없는데, 한漢 고조高祖(유방劉邦)는 황제皇帝로서 공이 가장 높고 한漢나라 황제의 태조太祖이기 때문에 특별히 ‘고황제高皇帝’라고 한 것이다.
綱
[綱] 10월에 한왕漢王(유방劉邦)이 항적項籍(항우項羽)을 추격하여 고릉固陵에 이르니, 제왕齊王 한신韓信, 위魏나라의 상국相國 팽월彭越, 유가劉賈가 초楚나라 장수 주은周殷을 유인하여, 〈주은이 초楚나라를 배반하고〉 경포黥布를 맞이하여 다 모였다.
12월에 항적을 해하垓下에서 포위하였는데, 항적이 달아나다 자살自殺하니, 초楚나라 땅이 다 평정되었다.
目
[目] 10월에
한왕漢王이
항우項羽를 추격해서
고릉固陵에 이르렀는데,
注+유소劉昭의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진국陳國 양하현陽夏縣에 고릉固陵이 있다.” 하였다.제왕齊王 한신韓信과
위魏나라의
상국相國인
팽월彭越이 회합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오지 않았고,
초楚나라 군대가
한漢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한왕漢王은 다시 성벽을 견고하게 하여 스스로 지키고 장량張良에게 이르기를 “제후諸侯들이 따르지 않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니, 장량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초楚나라 군대를 장차 격파할 상황인데,
군왕君王께서 이 두 사람에게 아직도 땅을 구분 지어 주지 않으셨으니, 그들이 오지 않는 것은 진실로 당연합니다.
注+분分(구분, 한계)은 부문扶問의 이니, 한신韓信 등이 비록 명목상으로는 왕이지만 아직 경계를 나누어 봉지封地를 주지는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고의固宜”는 이치상 당연하다는 말이다.
군왕께서 이들과 천하를 함께 소유하시면 당장 오게 할 수가 있습니다.
注+“공천하共天下”는 천하의 땅을 공유하여 떼어서 봉해주는 것이다.
한신을
제왕齊王으로 세운 것은 군왕의 본뜻이 아니므로 그 지위가 자연 견고하지 못하고, 그의 집이
초楚나라에 있어서 옛날 살았던 고을을 얻고자 하며,
注+“비군왕의非君王意”는 한신韓信이 〈제왕齊王이 된 것은〉 가왕假王(임시 왕)으로 세워줄 것을 자청해서 세워준 것일 뿐이지 군왕의 본의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팽월은 본래
양梁나라 땅을 평정해서 그도 왕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데,
注+왕王(왕이 되다)은 본음대로 읽으니, “망왕望王”은 왕이 되기를 바람을 말한 것이다. 군왕께서는 일찍 왕으로 봉해주지 않으셨으니, 지금이라도 능히 이 땅을 내놓고 이 두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을 허락해주어 각자 스스로 싸우게 한다면
초楚나라를 쉽게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왕이 이 말을 따르자, 한신과 팽월이 모두 군대를 이끌고 왔다.
目
[目] 11월에 유가劉賈가 수춘壽春을 포위하여 초楚나라의 대사마大司馬인 주은周殷을 유인하자, 주은이 초楚나라를 배반하고 구강九江의 군대를 다 동원해서 경포黥布를 맞이하여, 모두 회합하게 되었다.
12월에
항우項羽가
해하垓下에 이르니, 병력이 적고 식량이 다하였다.
注+해垓는 음이 해該이니, 해하垓下는 취읍聚邑(취락聚落)의 이름이다. 일설에 “해垓는 제방의 이름이다.” 하였다. 에 “해하垓下는 높은 산의 깎아지른 암벽이니, 지금도 높이가 3, 4장丈이 된다. 이곳의 취읍聚邑과 제방이 해垓의 옆에 있어서 이로 인해 이름을 취한 것이니, 지금 박주亳州 진원현眞源縣 동쪽 1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다.
한신 등이 대군을 거느리고 이때를 틈타 공격하니, 항우가 패해서 성벽으로 들어가자,
한漢나라와 제후의 군대들이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注+중重(거듭하다)은 평성平聲이다.
항우는 밤에
한漢나라 군대의 사방에서 모두
초楚나라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는
注+“초가楚歌”는 초楚나라 사람의 노래를 부른 것이니, ‘이라는 말과 같다. 구강九江의 군대가 한漢나라로 귀속되었기 때문에 초楚나라 노랫소리가 많았던 것이다. 크게 놀라 말하기를 “
한漢나라가 이미
초楚나라를 모두 차지하였는가?
어찌하여
초楚나라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가?” 하고, 일어나 장막 안에서 술을 마시고 서글픈 심정으로 구슬피 노래를 부르는데 눈물이 몇 줄기 흐르니,
注+강忼(강개하다)은 구당口黨의 절切이니 강慷으로도 쓰고, 개慨(개탄하다)는 구개口漑의 절切이니 강개忼慨는 슬퍼서 탄식하는 것이다. 행行(항렬)은 호랑胡郞의 절切이고, 하下(내리다)는 호가胡嫁의 절切이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울면서 우러러보지를 못하였다.
目
[目] 이에
항우項羽는 자신의
준마駿馬를 타고 80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서 밤중에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탈출하여 달아났다.
注+치直은 치値로 읽으니, 당當한다는 뜻이다.
회하淮河를 건너
음릉陰陵에 이르러서 길을 잃었는데,
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음릉현陰陵縣은 구강군九江郡에 속하였다.” 하였다. 어느 농부에게 길을 물으니, 농부가 왼쪽으로 가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이에 왼쪽으로 가다가
대택大澤 가운데에 빠지니,
注+위에 좌左자는 농부가 속여서 항우項羽에게 왼쪽으로 가라고 한 것이고, 아래에 좌左자는 항우가 그의 말에 따라 왼쪽으로 간 것이다. 이 때문에
한漢나라
기장騎將 관영灌嬰이 따라잡을 수 있었다.
동성東城에 이르니
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동성현東城縣은 구강군九江郡에 속하였다.” 하였다. 28명의
기병騎兵만 남았는데 추격하는
한漢나라 군사들은 수천 명이었다.
항우는 자신의 기병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군대를 일으킨 이후 8년 동안 70여 번의 전투를 하였지만 일찍이 패배한 적이 없어서 마침내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
그런데 지금 마침내 여기서 곤궁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탓이 아니다.
오늘 참으로 죽기로 결심하였으니, 내가 제군들을 위해 결전을 벌여서 반드시 적의 포위망을 무너뜨리고 장수의 목을 베어 제군들에게 이를 알게 하겠다.”
항우는 마침내 자신의 기병을 4
대隊로 나누어 사방을 향하게 하니,
注+향鄕(향하다)은 향嚮으로 읽는다.한漢나라 군대가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그러자 항우가 기병들에게 사면으로 말을 달려 내려가서 산의 동쪽 세 곳에서 나누어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注+산의 동쪽을 세 곳으로 나누어 만나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에 항우가 크게 소리치며 달려 내려가서 한漢나라 장수 한 명을 베고 자신의 기병과 세 곳에서 모였다.
한漢나라 군대가 항우가 있는 곳을 몰라서 마침내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다시 포위하자 항우가 다시 달려가서 한漢나라 도위都尉 한 명을 베고 수십여 명을 죽인 다음 다시 자신의 기병들을 모았는데, 기병 둘을 잃었을 뿐이었다.
항우는 자신의 기병들에게 말하기를, “어떠한가?” 하니, 모두 “대왕大王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目
[目] 이에 항우가 동쪽으로 가서
오강烏江을 건너려고 하였는데,
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오강烏江은 동성현東城縣에 있다.” 하였다. 오강의
정장亭長이 배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말하기를,
注+의檥는 음이 의蟻이니 붙인다는 뜻이다. 〈“의선檥船”은〉 배를 강기슭에 대는 것이다. “
강동江東 지역이 비록 작지만 땅이 사방 천 리이고 백성도 수십만 명이나 되니, 또한 충분히 왕 노릇을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저만이 배를 가지고 있으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서둘러 건너소서.” 하니,
항우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강동 지역의 자제 8천 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었는데, 지금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했으니, 설령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삼더라도 내 마음에 유독 부끄러운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目
[目] 초楚나라 땅이 모두 평정되었으나 노魯나라 지역만은 항복하지 않았다.
한왕漢王이 노魯나라 지역을 도륙하고자 하여, 노魯나라의 도성 아래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현악기를 타고 시詩를 외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한왕이
노魯나라는
예의禮義를 지키는 나라이니
주군主君을 위해 목숨을 바쳐 절개를 지키려는 것이라고 하고
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초楚 회왕懷王이 처음 항우項羽를 봉해 노공魯公을 삼았었다. 〈그러므로 군주를 위해 충절을 지킨다고 한 것이다.〉항우項羽의 머리를 가져다가 보여주니,
노魯나라 사람들이 그제야 항복하였다.
그러자 한왕은 항우를
노공魯公의 예로
곡성穀城에 장사 지낸 다음
注+에 “항우의 무덤은 동군東郡 곡성穀城의 동쪽에 있는데, 현縣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하였다. 직접 항우의
상喪을 공포하고
조문弔問하여 곡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여러
항씨項氏의
지속枝屬들을 모두 죽이지 않고,
항백項伯 등 4인을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고는
유씨劉氏 성姓을 내려주었으며,
초楚나라에 잡혀 있던 백성들을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注+열列은 서열을 나타낸 것이다.
目
[目] 태사공太史公(사마천司馬遷)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스스로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고 사사로운 지혜를 뽐내어 옛 도리를 본받지 않고서 무력 정벌로 천하를 경영하려고 하다가 나라가 망하고 자신은 죽게 되었으나 아직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자신이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니라고 말하였으니,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目
[目] 양자揚子(양웅揚雄)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하늘이 어찌 일부러 망하게 하였겠는가.”
注+〈“천갈고언天曷故焉”은〉 하늘이 어찌 일부러 망하게 하였겠는가. 또한 사람이 한 일일 뿐이라는 뜻이다.
綱
[綱] 한왕漢王이 돌아와 정도定陶에 이르러 제왕齊王 한신韓信의 성벽(진영)으로 달려 들어가서 그의 군대를 빼앗았다.
綱
[綱]
유가劉賈를 보내
임강왕臨江王 공위共尉를 공격해서 사로잡았다.
注+공위共尉는 의 아들이다.
綱
[綱] 봄 정월에 제왕齊王 한신韓信을 바꾸어 초왕楚王으로 삼고, 위魏나라 상국相國 팽월彭越을 양왕梁王으로 삼았다.
目
[目]
注+한漢나라 제도에, 제후왕諸侯王의 나라에 중위中尉를 두어 무관직武官職을 담당하게 하였다.
目
“병사들이 8년 동안 쉴 수가 없었고, 모든 백성들도 매우 고생을 하였는데,
注+여與(참여하다)는 음이 예預이다. 이제 천하의 일이 끝났으니, 온 천하의
참형斬刑 이하에 해당하는 자들을 사면하라.”
注+“수사殊死”는 참형斬刑이다. 수殊는 끊고 분리된다는 뜻이니, 몸과 머리가 분리되고 끊기어 따로 있음을 말한 것이다.
綱
[綱] 2월에
왕王이 황제의 자리에 나아갔다.
注+범氾은 부검敷劍의 절切이다. 이 말하기를 “범수氾水는 제음현濟陰縣의 경계에 있다.” 하였다.
目
[目] 제후왕諸侯王이 모두 한왕漢王을 높여 황제로 삼자고 하자, 2월 갑오일甲午日에 〈한왕이〉 범수氾水의 북쪽에서 황제의 자리에 나아갔다.
綱
[綱] 왕후王后를 고쳐 황후皇后라 하고, 왕태자王太子를 고쳐 황태자皇太子라 하고, 선온先媼(죽은 어머니)을 추존追尊해서 소령부인昭靈夫人이라 하였다.
綱
[綱]
注+〈항우項羽가〉 오예吳芮를 형산왕衡山王으로 봉해서 주邾에 도읍하게 하였었는데, 이제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서 임상臨湘에 도읍하게 하였다. 월粤은 월越과 통용하여 쓰인다. 무제無諸는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후예이다. 민閩은 음이 민緡이니, 《춘추春秋》에 나오는 의 지역이다. 전국戰國시대에 월越나라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인데, 이 지역 사람들이 뱀에서 근본했다고 여기므로 글자에 충虫자를 쓴 것이다.
綱
[綱] 황제가 서쪽으로 낙양洛陽에 도읍하기로 정하였다.
綱
[綱] 여름 5월에 군대를 파(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目
“백성들 가운데 예전에 간혹
산택山澤에 모여 피난해서
호적戶籍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을 모두 자기
현縣으로 돌아가게 해서 옛날의
작위爵位와
전택田宅을 돌려주고,
注+보保는 지키고 편안히 하는 뜻이니, 지켜서 편안히 하여 난리를 피하는 것이다. “명수名數”는 호적戶籍이고 복復은 돌려주는 것이다.
관리는 그들에게 글과 법을 가르쳐서 의리를 분별하게 하되 군대의
이졸吏卒들에게
태장笞杖을 쳐서 욕보이지 말고,
注+“변고辨告”는 의리義理를 분별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작위爵位가
이상인 자는 모두
식읍食邑을 받게 하며, 이 이하인 자는 모두
신역身役과
호세戶稅를 면제하고,
요역徭役과
부세賦稅를 면제하게 하라.”
注+칠대부七大夫는 공대부公大夫이니, 작위爵位의 순위가 일곱 번째이므로 칠대부라고 한 것이다. 진秦나라 제도에 열후列侯여야 식읍食邑을 받을 수 있었는데, 이때에는 칠대부 이상이 모두 식읍을 받게 하였으니, 이는 총애한 것이다. 복復은 면제하는 것이니, 〈“복기신급호復其身及戶”는〉 신역身役과 호세戶稅를 면제해주는 것이다. “물사勿事”는 요역徭役과 부세賦稅가 미치지 않게 하는 것이다.
目
[目]
낙양洛陽의
남궁南宮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注+진秦나라 때 낙양洛陽에 이미 남궁南宮과 북궁北宮이 있었다.상上이 말하기를 “
와 여러 장수들은 감히
짐朕에게 숨기지 말고, 모두 자신의 실제 생각을 말하도록 하라.
내가 천하를 소유한 까닭은 무엇이며, 항씨項氏가 천하를 잃은 까닭은 무엇인가?” 하니,
고기高起와
왕릉王陵이 대답하기를
注+고기高起는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폐하께서는 사람을 시켜 성을 공격하고 땅을 공략하면 그로 인하여 그 성과 땅을 그들에게 주어서 천하와 그 이익을 함께하셨는데,
항우는 그렇지 않아서 공이 있는 자를 해치고 어진 자를 의심하였으며, 싸워 이겨도 그 사람의 공功을 인정해주지 않고 땅을 빼앗아도 그 사람에게 땅을 나누어주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천하를 잃은 이유입니다.” 하였다.
“그대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하는구나.
군막軍幕 안에서 궁리하고 계책을 내어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것은 내가
자방子房(
장량張良)만 못하고,
注+주籌는 계산한다는 뜻이니, 예를 들면 유악帷幄은 군막軍幕이다. 자방子房은 장량의 자字이다. 국가를 잘 진정시키고 백성들을 어루만지며 군량을 공급하여 군량 수송로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내가
소하蕭何만 못하고,
注+진塡(진무하다)은 진鎭과 같다. 급給은 공급供給한다는 뜻이고 궤餽(군량)는 궤饋와 같다. 백만의 군사를 연합하여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 것은 내가
한신韓信만 못하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인걸人傑인데 내가 능히 이들을 쓸 수 있었으니, 이것이 내가 천하를 차지한 까닭이다.
注+걸傑은 특출하게 홀로 뛰어남을 말한다.
항우는 범증范增 한 사람이 있었으나 능히 쓰지 못하였으니, 이 때문에 나에게 사로잡힌 것이다.”
目
[目] 양씨楊氏(양시楊時)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항적項籍이 무도無道해서 지나가는 곳의 백성들을 모두 죽이고 없애버렸으니 백성들이 친근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범증范增은 자기 군주를 위해 계책을 세우면서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나마 세운 계책도 여러 차례 패공沛公을 해치고자 한 것일 뿐이었다.
아, 항적이 참으로 예전의 잘못된 방식을 고치지 않는다면, 이것은 바로 지난날 멸망한 진秦나라의 행위인 것이다.
가령 패공이 죽었더라도 천하에 어찌 패공과 같은 자가 없겠는가.
그렇다면 항적이 비록 범증의 말을 들어주었더라도 패망하는 데에는 별 보탬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綱
[綱] 예전에 제왕齊王이었던 전횡田橫을 불렀는데, 경사京師에 이르기 전에 자살自殺하였다.
目
[目]
전횡田橫이 자신의 무리 500여 명과 함께
해도海島에 들어가 거주하였다.
注+발해渤海 가운데에 섬이 있는데, 이름을 오호嗚呼라고도 하고 또 반양산半洋山이라고도 한다.
황제는 이들이 난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전횡의 죄를 사면하고, 부르기를 “전횡아, 오너라.
네가 오면 크게는
왕王을 시킬 것이고 작게는
후侯를 시킬 것이지만,
注+〈“대자왕大者王 소자내후이小者乃侯耳”는〉 크게는 왕王을 봉해주고, 작아도 후侯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만일 오지 않으면 장차 군대를 동원해서 죽일 것이다.” 하였다.
전횡이 마침내
문객門客 두 사람과 함께
전거傳車를 타고 낙양에 올라왔는데,
시향尸鄕의 역참에 이르러
注+전傳(수레)은 장련張戀의 절切이다. 준마駿馬 4마리가 끄는 수레를 치전置傳이라 하고, 중마中馬 4마리가 끄는 수레를 치전馳傳이라 하고, 하마下馬 4마리가 끄는 수레를 승전乘傳이라 하고, 말 1마리나 2마리가 끄는 수레를 초전軺傳이라 하는데, 급한 경우에는 4마리가 끄는 한 대의 수레를 탄다. 옛날에는 수레를 전거傳車라고 했었는데, 그 뒤에 말만 둔 것을 역기驛騎라고 하였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시향尸鄕은 낙주洛州 언사현偃師縣 서남쪽 5리쯤에 있는 박판亳阪의 북쪽에 있다.” 하였다. “구치廏置”는 역말을 둔 역참驛站을 이른다. 문객에게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한왕漢王과 함께 남면南面하여 고孤라고 일컬었는데, 지금 한왕은 천자가 되었으나 나는 망한 나라의 포로가 되어 북면北面해서 섬기게 되니, 그 부끄러움이 참으로 심하다.
그리고 내가
이제 그의 아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군주를 섬긴다면
注+그의 아우는 역이기酈食其의 아우 역상酈商이다. 이보다 앞서 제齊나라에서 역이기를 팽형烹刑에 처하였다. 병倂은 보정步鼎의 절切이니, “병견倂肩”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서 있는 것을 이른다. 비록 그가 나를 위협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注+이 아래에 아我자가 빠져 있다.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고 문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머리를 받들어
사자使者를 따라 달려가 아뢰게 하였다.
이에 황제는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왕王의 예禮로 장사 지내주었다.
〈장례가 끝나자〉 두 문객이 스스로 목을 찔러 죽고, 해도海島에 있던 나머지 500명도 이 소식을 듣고 모두 자살自殺하였다.
綱
[綱]
계포季布를
으로 삼고
정공丁公을
참斬하여 조리돌렸다.
目
[目] 예전에
초楚나라 사람
계포季布가
항적項籍의 장수가 되어 여러 번 황제를 곤궁하게 하고 욕보였다.
注+계季는 성姓이다. 군窘은 거운巨隕의 절切이니, 핍박한다는 뜻이다.
항적이 멸망하자 황제가 계포를 잡으려고
천금千金을 현상금으로 내걸고 ‘감히 계포를 집에 머물게 하거나 숨겨주면
삼족三族을 멸하겠다.’
注+사舍는 머물게 한다는 뜻이고, 익匿은 숨긴다는 뜻이다. 하였다.
계포가 마침내 머리를 깎고 목에
항쇄項鎖를 차고 노예가 되어서 스스로
노魯나라 지역의
주가朱家에게 팔려갔다.
注+곤髡은 음이 곤坤이니 머리를 깎는 것이고, 겸鉗은 기염其炎의 절切이니 쇠로 목을 묶는 것이다. 주가朱家는 노魯나라 지역 사람이다.
주가는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 계포임을 알고 그를 사서 전사田舍(농가農家)에 두고는 자신이 직접 낙양洛陽에 가서 등공滕公(하후영夏侯嬰)을 만나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하는 각각 자기 군주를 위하여 쓰이는 것이 당연한 직분입니다.
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직이職耳”는 신하의 직분에 당연함을 말한 것이다.
항씨項氏의 신하를 어떻게 다 죽일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상上께서 처음으로 천하를 얻고서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한 사람을 찾으시니, 어찌 넓지 못한 도량을 보이신단 말입니까.
그리고 한漢나라에서 그를 급하게 잡으려 하니, 계포의 현명함으로 볼 때, 북쪽의 호胡로 달아나지 않으면 남쪽의 월越나라로 달아날 것입니다.
대저
장사壯士를 꺼려하여 적국에게 주는 것은
오자서伍子胥가
초楚나라
평왕平王의 묘에 매질한 이유입니다.”
注+자서子胥는 오원伍員의 자字인데 아버지인 오사伍奢가 초楚나라 평왕平王에게 살해당하였다. 오원이 오吳나라로 달아나서 오吳나라로 하여금 초楚나라를 치게 하였는데, 평왕이 이미 죽고 없자 그의 무덤을 파서 시신을 꺼내 300대나 채찍질을 하였다.
등공이 이것을 상에게 말하자, 상이 계포를 사면하고 불러 낭중郎中을 제수하니, 주가는 마침내 〈자신이 은혜를 베푼 것을 남들이 알까 두려워하여〉 더 이상 계포를 만나지 않았다.
目
[目]
계포季布의
동모제同母弟인
정공丁公도
항우項羽의 장수가 되어 황제를
팽성彭城의 서쪽에서 추격하여 곤궁하게 해서 짧은 병기(칼)을 가지고 맞붙어서 싸웠는데,
注+정공丁公은 이름이 고固이니,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른 계포季布의 아우이다. 단병短兵은 도검刀劍이니, 〈“단병접短兵接”은〉 도검을 사용하여 서로 맞붙어 싸움을 이른다. 황제가 다급하자
注+여기서 구句를 뗀다. 정공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두 현자가 어찌 서로 곤궁하게 하는가?” 하니, 정공이 군대를 이끌고 그대로 돌아갔다.
注+돌아보는 것을 고顧라고 한다. “양현兩賢”은 고조高祖 자신과 정고丁固를 함께 말한 것이다. 액戹(곤궁하다)은 을혁乙革의 절切이니, 혹 액厄으로도 쓴다.
이때에 이르러 정공이 찾아와 뵙자, 황제가 정공을 군중에 조리돌리고 말하기를 “정공은
항왕項王(항우)의 신하가 되어 불충해서 항왕으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했다.” 하고는 마침내 그의 목을 베고 말하기를 “후세에 남의 신하 된 자들로 하여금 정공을 본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注+효傚는 본받는다는 뜻이다. 하였다.
目
[目] 사마온공司馬溫公(사마광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
고조高祖가 호걸들을 망라하여 도망온 자들을 불러오고 배반한 자들을 받아들인 것이 또한 이미 많았다.
注+물고기 잡는 그물을 망罔이라 하고 새 잡는 그물을 나羅라고 한다.
그런데 정공丁公이 홀로 불충하다고 하여 죽임을 당한 것은 어째서인가?
여러 영웅들이 서로 다투던 때에는 백성들에게 정해진 군주가 없으니, 오는 자를 받아주는 것이 진실로 당연한 것이다.
注+각角은 겨루고 다툰다는 뜻이다.
그러나 존귀한 천자가 되어서는 사해四海 안의 사람들이 모두 신하가 되었으니, 만일 예의禮義를 밝혀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아서 신하 된 자로 하여금 모두 두 마음을 품어 큰 이익을 바라게 한다면 국가가 어찌 장구하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큰 의리로 결단하여, 신하가 되어 불충한 자는 스스로 용납될 곳이 없어서, 사심私心을 품고 은혜를 맺은 자는 비록 자기를 살려주었다 해도 오히려 의리로 허여하지 않겠다는 것을 천하의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알게 한 것이다.
한 사람을 죽여 천만인을 두렵게 하였으니, 일을 생각함이 어찌 깊고 원대하지 않은가.”
綱
[綱] 황제가 서쪽으로 가서 관중關中에 도읍하기로 정하고, 누경婁敬을 낭중郞中으로 삼고서 유씨劉氏 성姓을 하사하였다.
目
[目] 제齊나라 사람 누경婁敬이 농서隴西에서 수자리를 살게 되어 낙양洛陽을 지나다가 상上을 만나뵙기를 청하고, 말하기를 “폐하께서 낙양에 도읍하기로 정하셨는데, 이것은 주周나라 왕실과 융성함을 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하니, 상上이 “그렇다.” 하고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천하를 얻으신 것은
주周나라와는 다르니,
주周나라는
후직后稷으로부터
덕德과
선善을 10여 대 동안 쌓아
注+루絫(쌓다)는 누累의 고자古字이다.문왕文王과
무왕武王 때에 이르러 제후들이 저절로 귀의하자, 마침내
은殷나라를 멸하고 천자가 되었습니다.
성왕成王이 즉위하여서는 주공周公이 정승으로 보필하여 마침내 낙읍洛邑(낙양洛陽)을 경영하였으니, 이곳은 천하의 중심이 되는 곳이어서 사방의 제후들이 공물貢物을 바칠 때 오고 가는 거리가 고르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낙양은〉 덕이 있으면 왕 노릇 하기가 쉽고, 덕이 없으면 망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므로 주周나라가 번성했을 때에는 제후들과 사방의 오랑캐들이 복종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으나, 쇠약해지자 천하에 조근朝覲하는 나라가 없는데도 주周나라에서 제재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덕이 부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형도 약했던 탓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풍패豐沛에서 일어나서
촉蜀과
한중漢中을 석권하고
삼진三秦을 평정하였으며,
注+권卷(말다)은 권捲으로 읽는다.항우項羽와
형양滎陽과
성고成皐 사이에서 싸워 큰 전투는 70번, 작은 전투는 40번이나 벌였습니다.
그리하여 천하 백성들로 하여금
간肝과
뇌腦를 땅에 범벅이 되게 하여 통곡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다친 사람들이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성왕成王과
강왕康王 때와 융성함을 견주고자 하시니, 신은
주周나라와 같지 않다고 삼가 생각됩니다.
注+모侔는 음이 모牟이니 같다는 뜻이다.
대저 진秦나라 지역은 산으로 덮여 있고 황하黃河가 띠처럼 둘러져 있어 사방이 요새로 막혀 견고하고, 별안간 급한 일이 있으면 백만 명의 군대를 즉시 갖출 수가 있습니다.
무릇 적과 싸울 적에 그 사람의 목을 조르고 그 사람의 등을 치지 않으면 완전하게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注+액搤은 음이 액厄이니 잡고 있다는 뜻이다. 항亢은 음이 강剛으로 인후咽喉이니 이것으로 관중關中을 비유한 것이다. 부拊는 음이 무撫로 친다는 뜻이다. 배척背脊(등)을 가지고 천하天下를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폐하께서 진秦나라의 옛 땅을 장악하시면 이것은 천하의 목을 조르고 등을 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目
[目] 황제가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신하들이 모두
산동山東 사람들이었으므로 다투어 말하기를 “
주周나라는 수백 년 동안 왕 노릇 하였지만
진秦나라는 2대 만에 곧바로 망하였습니다.
注+왕王(왕 노릇 하다)은 우황于況의 절切이다.
그리고
낙양洛陽은 동쪽에는
성고成皐가 있고 서쪽에는
효산殽山과
민지澠池가 있으며
황하黃河를 등지고
낙수洛水를 향하고 있으니, 그 견고함을 또한 충분히 믿을 만합니다.”
注+하수河水는 낙양성洛陽城의 북쪽에 있기 때문에 배倍라고 하였고, 낙수洛水는 낙양성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향鄕이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目
[目] 상上이 장량張良에게 물으니, 장량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낙양洛陽이 비록 이러한 견고함이 있으나 그 안이 작아서 수백 리에 불과하며,
전지田地가 척박하고 사면으로 적의 침공을 받을 수 있는 지형이니, 군대를 써서 싸우기에 적합한 지역이 아닙니다.
注+〈“비용무지국非用武之國”은〉 믿을 만한 험한 지형이 없어서 용병用兵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관중關中은 왼쪽에는
효산殽山과
함곡관函谷關이 있고 오른쪽에는
농隴과
촉蜀이 있고 비옥한 들이 천 리나 되며,
注+옥沃은 관개灌漑하는 것이니, 이 지역의 토지가 모두 관개灌漑하는 이로움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옥야沃野라고 한 것이다. 남쪽으로는
파巴와
촉蜀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으로는
호胡의 초원에서 나오는 이익이 있으며,
注+금수禽獸를 기르는 곳을 일반적으로 원苑이라고 한다. 안정安定, 북지北地, 상군上郡의 북쪽 지역은 호胡의 땅과 서로 인접해서 가축을 기를 수 있고, 또 호마胡馬를 많이 오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호원胡苑의 이로움’이라고 한 것이다.삼면三面이 막혀서 저절로 지켜지고 오직 한쪽 면만 가지고 동쪽으로 제후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제후들이 안정되면
하수河水와
위수渭水를 통해 천하의 곡식을
조운漕運해서 서쪽에 있는
경사京師에 실어다 줄 수 있고,
注+만輓은 끌어온다는 뜻이다. 한漢나라는 관동關東의 곡식을 조운漕運해서 하수河水로부터 위수渭水로 들여오고, 위수渭水로부터 올라와서 장안長安으로 수송하였다. 제후들에게 변고가 있으면 물길을 따라 내려가서 관중의
양초糧草를 수송해줄 수 있습니다.
注+위委와 수輸는 모두 거성去聲이니, 쌓여 있는 곡식을 수송해감을 말한다.
그러니 이것은 이른바
금성金城(철옹성)이 천 리이고
천부天府(천연적인
부고府庫)의 나라라는 것이니,
누경婁敬의 말이 옳습니다.”
注+“금성金城”은, 진秦나라 지역이 사방으로 막힌 견고함이 있는 것이 철옹성 같음을 말한 것이다. 재물財物을 쌓아놓은 것을 부府라고 하니, 관중關中 지역은 물산이 풍족해서 넉넉하게 공급할 수가 있기 때문에 천부天府라고 한 것이다.
상上은 당일로 서쪽으로 관중에 가서 도읍하기로 정하고,
注+“즉일卽日”은 그날 즉시 계책을 정함을 말한 것이지, 그날로 즉시 결행한 것은 아니다. 누경을
낭중郎中에 제수하여
봉춘군奉春君이라 칭하였으며
유씨劉氏 성姓을 하사하였다.
注+춘春은 한 해의 시작이니, 누경婁敬이 관중關中을 도읍으로 삼을 것을 맨 처음 건의하였기 때문에 봉춘군奉春君이라고 칭한 것이다.
目
[目]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고제高帝가 군사를 일으킨 8년 동안 편안히 지낸 해가 없다가 이때에 이르러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의당 편안하기를 조금 생각해야 할 때였다.
그런데 남의 말을 따르는 데에 민첩해서 스스로 편안하게 있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으니, 제업帝業을 이룬 것이 마땅하다.
광무제光武帝가 농隴을 함락하고 돌아온 지 겨우 6일 만에 영천潁川에서 도둑 떼가 일어나자 직접 가서 정벌하였으니, 광무제光武帝는 선조先祖(고제高帝)의 자취를 잘 계승했다고 이를 만하다.”
綱
[綱]
장량張良이 병을 핑계 대고 물러가 있으면서 곡식을 먹지 않았다.
注+벽辟은 필익必益의 절切이니, 배제排除한다는 뜻이다.
目
[目]
장량張良은 평소 병이 많았는데,
관중關中에 들어와서는 즉시 문을 닫고
도인導引하며 곡식을 먹지 않고 말하기를
注+도道는 도導로 읽으니, 도인道引은 기운을 운행하여 조화롭게 하고 몸을 당겨 유연하게 하는 것이다. 《후한서後漢書》 〈화타전華陀傳〉에 말하기를 “옛날 신선들이 도인導引하는 것은 곰이 나뭇가지를 잡고 매달려 있고 올빼미가 몸은 움직이지 않고 머리를 돌리는 것처럼 하여, 허리와 몸을 끌어당기고 관절關節을 움직여서 장수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한韓나라의 정승을 지냈는데,
천하가 진동하였다.
이제 세 치의 혀로 황제의 스승이 되어 만호후萬戶侯에 봉해졌으니, 이는 포의布衣(평민)로서는 최고의 지위이다.
나에게는 충분하니,
인간人間의 일을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놀고자 한다.”
注+적송자赤松子는 신선의 이름이니, 신농씨神農氏 때에 우사雨師가 되었다. 하였다.
目
[目] 사마온공司馬溫公(사마광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생生에 사死가 있음은 비유하면 밤과 아침이 반드시 있는 것과 같으니, 예로부터 지금까지 진실로 이것을 벗어나 홀로 생존한 자는 있지 않았다.
자방子房(장량張良)과 같이 밝게 분변하고 이치를 통달한 자는 신선술이 허망하고 거짓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겠다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그의 지혜로움을 알 수 있다.
대저 공명功名을 이룬 바로 그때는 신하가 처하기 어려운 법이다.
회음후淮陰侯(한신韓信)는 죽임을 당하였고 소하蕭何는 옥에 갇혔으니, 이는 성하고 가득 참을 누리고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자방이 신선神仙에 의탁해서 인간人間의 일을 버렸으니, 이른바 명철明哲하여 몸을 보존한 자라고 칭할 수 있다.”
目
[目] 양씨楊氏(양시楊時)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자방子房의 마음은 한韓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으려는 것일 뿐이었으니, 그가 고조高祖를 섬긴 것은 본심이 아니었다.
그가 박랑사博浪沙에서 〈진秦 시황始皇을 저격하려고〉 계획한 모의가 성공하지 못한 뒤로 그의 마음속에 참으로 하루도 진秦나라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가 ‘필부의 용맹을 떨쳐 하루아침에 갑자기 요행을 바란 것은 천하의 호걸들을 은밀하게 구하여 서서히 도모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패공沛公을 만나게 되어서는 그가 자신의 일을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에 패공에게 몸을 맡겨 진秦나라를 멸망시킬 계책을 가르쳐주었고, 이 일이 이루어지자 한漢나라를 버리고 한韓나라로 돌아오면서 다만 잔도棧道를 불태워 끊어버리라고 가르쳐주었을 뿐, 삼진三秦을 평정하고 항씨項氏를 토벌할 계책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어찌 그의 지혜가 미치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그의 마음은 진실로 장차
을 보좌해서
중원中原을 치달리려고 하였지,
한왕漢王이 동쪽으로 진출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한성이 항우에게 죽임을 당하고 나서는 한韓나라 자손 중에 한성처럼 뛰어난 자가 없어서 자방의 뜻을 더 이상 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항우에 대한 원수를 갚지 않을 수가 없었고, 항우에게 복수를 하려고 할 경우 한漢나라가 아니면 도와서 성공할 만한 나라가 없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서쪽(한漢)으로 가서 자신의 복수하려는 뜻을 다시 바쳐 한漢나라로 하여금 일을 이루게 하고, 자신의 책임을 마친 뒤에는 스스로 신선의 설에 의탁해서 한漢나라에 벼슬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본심本心을 이루었다.
이것은 자방子房의 지모智謀와 절의節義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서 한漢나라 때부터 지금까지 천여 년 동안 이런 사실을 엿본 자가 없었던 것이다.
오직 정자程子께서 일찍이 이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기를 ‘자방의 진퇴進退는 조용하고 여유로워 점잖은 유자儒者의 풍모가 있었으니, 고조가 능히 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실은 자방이 능히 고조를 이용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자방을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아니면 고조가 자방을 부림에 있어 자방의 계책을 다 쓰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綱
[綱] 가을 7월에 연왕燕王 장도臧荼가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여 장도를 사로잡고 노관盧綰을 세워 연왕燕王으로 삼았다.
目
[目]
노관盧綰의 집이
상上과 같은 마을이었고,
노관盧綰의 생일이 또
상上의 생일과 같았기 때문에 특별히 왕으로 삼은 것이다.
注+한閈은 음이 한汗이니, 마을에 있는 문을 한閈이라고 한다.
目
[目] 아들인 장오張敖가 왕위王位를 계승하였다.
장오는 황제의
장녀長女인
노원공주魯元公主와 결혼하여 공주를
후后로 삼았다.
注+상尙은 높인다는 뜻이다. 제왕帝王의 딸을 높여서 감히 취娶(장가들다)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원元은 시호諡號이다. 그녀는 노魯나라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綱
[綱] 예전에
초楚나라 장수였던
이기利幾가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격파하였다.
注+이기利幾는 성명姓名이다. 이기가 진陳 지방의 현령縣令으로 있다가 항복하자, 상上이 그를 영천潁川에서 맞이하였다. 상上이 낙양洛陽에 이르러 통후通侯(철후徹侯)를 모두 불렀는데, 이기는 자신이 항우項羽의 장수로 있었던 것 때문에 두려워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綱
[綱]
윤閏9월에
장락궁長樂宮을 수리하였다.
注+“후구월後九月”은 바로 윤閏9월이다. 진秦나라는 10월을 세수歲首로 삼아서 윤달을 두어야 할 경우에는 모두 그해 말에 두었는데, 한漢나라는 이것을 따르고 오랫동안 고치지 않았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 설은 완전하지 못하다. 진秦나라는 책력에 윤달을 둘 줄 알았으니, 무엇 때문에 윤
달을 모두 9월로 삼았겠는가. 이는 사마천司馬遷이 《사기史記》를 저술할 적에 진秦나라의 정월正月을 10월이라고 일컬었다 하여, 마침내 윤달을 후구월後九月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사마천이 이렇게 서술한 것이지 진秦나라의 법이 그런 것은 아니다.” 하였다. 장락궁長樂宮은 본래 진秦나라의 흥악궁興樂宮인데, 둘레가 20리이고 장안長安 성城의 동쪽 귀퉁이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