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魏南邊諸將이 表稱宋將入寇하니 請兵三萬하여 先其未發에 逆擊之하여 以挫其鋭라하고 因請悉誅河北流民在境上者하여 以絶其郷導한대 魏主使公卿議之하니 皆以爲然이어늘
崔浩曰 不可하다 南方下濕하여 入夏水潦에 草木蒙密하고 地氣鬱蒸하니 易生疾癘라 不可行師요
且彼既嚴備하니 城守必固라 留屯久攻하면 則糧運不繼요 分軍四掠이면 則衆力單寡하니 以今擊之면 未見其利라
彼若果能北來인댄 宜待其勞倦하여 秋涼馬肥어든 因敵取食하여 徐往擊之면 此萬全之策也라
西北守將이 從陛下征伐하여 多獲美女珍寳하여 牛馬成群하니
南邊諸將
이 聞而慕之
하여 亦欲南鈔以取資財
하니 皆營私計
하여 爲國生事
라 不可從也
注+爲, 去聲.니이다 魏主乃止
하다
目
諸將復表하여 乞簡幽州以南勁兵하여 助己戍守하고 及就漳水造船이어늘 公卿皆以爲宜如所請이라하고 仍署司馬楚之魯軌韓延之等爲將帥하여 使招誘南人하니
浩曰 楚之等이 皆彼所畏忌라 今聞國家悉發精兵하고 大造舟艦이면 謂國家欲存立司馬氏하고 誅除劉宗이라하여 必擧國震駭하여 悉發精銳하여 以死爭之하리니
則我南邊諸將이 無以禦之라 欲以却敵而反速之니 張虛聲而召實害 此之謂矣니라
且楚之等은 皆纎利小才라 止能招合輕薄無賴하여 而不能成大功하니 徒使國家兵連禍結而已니이다 魏主未以爲然이어늘
目
夏主遣使求和於宋하고 約合兵滅魏하고 遥分河北하여 自恒山以東은 屬宋하고 以西는 屬夏러니
魏主聞之
하고 治兵將伐夏
한대 群臣咸曰 劉義隆兵
이 猶在河中
注+言在河之中流.이어늘 捨之西行
하면 前冦未可必克
하고 而義隆乘虛濟河
면 則失山東矣
注+此山東, 謂太行․恒山以東, 卽河北之地.리라
崔浩曰 義隆이 與赫連定으로 遥相招引하여 以虛聲唱和언정 莫敢先入하니 譬如連雞하여 不得俱飛라 無能爲害리이다
臣始謂義隆軍來에 當屯止河中이라가 兩道北上하여 東道向冀하고 西道衝鄴하리니 如此면 則陛下當自討之하사대 不得徐行이니이다
今則不然하여 東西列兵이 徑二千里하여 一處不過數千이라 形分勢弱하니 此不過欲固河自守요 無北度意也니이다
赫連定은 殘根易摧하니 擬之必仆이라 克定之後에 東出潼關하여 席卷而前하면 則威震南極하여 江淮以北이 無立草矣리이다
目
宋到彦之王仲德
이 沿河置守
하고 還保東平
이어늘 魏安頡
이 自委粟津濟河
하여 攻金墉
注+委粟津在洛陽北. 又有委粟山在洛陽南.하니 杜驥欲棄城走
호되 恐獲罪
러니
初에 高祖滅秦하고 遷其鐘簴於江南할새 有大鐘이 没於洛水라 帝使姚聳夫로 往取之하니
驥紿之曰 金墉修完하고 糧食亦足호되 所乏者는 人耳라 今虜騎南渡하니 相與并力禦之하여 大功既立이어든 牽鐘未晚하니이다하니 聳夫從之하다
既至에 見城不可守하고 乃引去한대 驥南遁하니 安頡拔洛陽하다
驥歸言於帝曰 本欲以死固守러니 姚聳夫及城遽走하니 人情沮敗하여 不可復禁이러니이다 上大怒하여 誅聳夫於壽陽하다
聳夫勇徤하니 諸偏裨莫及也러라 頡與將軍陸俟로 進攻虎牢하여 拔之하다
目
[目] 北魏의 남쪽 변경에 있는 여러 장군들이 표문을 올려서 말하기를 “宋나라 사람들이 침입해 들어오려고 하니, 군사 3만을 청하여 그들이 아직 출동하지 않았을 때 먼저 그들을 공격하여 그 銳氣를 꺾어버려야 합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국경에 있는 河北의 유민들을 다 죽여서 그들이 송나라 군대를 鄕導하는 것을 단절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魏主가 공경들에게 이를 논의하도록 하니 모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崔浩가 말하기를 “안 됩니다. 남방은 땅이 낮고 습하여 여름에 접어들어 장맛비가 내리면 초목이 무성하며 빽빽하고 땅의 기운은 찌는 듯이 더워서 질병에 걸리기 쉬우니, 출병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저들은 이미 엄중히 방비하고 있으니, 성을 지키는 것도 반드시 견고할 것입니다. 머물러 주둔하며 오랫동안 공격하면 군량의 운송이 이어지지 못하고, 군사를 나누어 사방을 약탈하면 군사의 힘이 분산되어 약해질 것이니, 지금 그들을 공격하면 승리를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
저들이 만약 과감히 북쪽으로 침입해올 경우에 마땅히 저들이 피로하고 지치기를 기다려 가을이 되어 날이 서늘하고 말이 살찌면 이를 이용하여 적에게 식량을 탈취하여 서서히 가서 그들을 공격하면 되니, 이것이 萬全의 계책입니다.
서북을 지키는 장수들이 폐하를 따라서 정벌하여 많은 미녀와 진귀한 보물을 획득하여 소와 말도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남쪽 변경의 여러 장수들이 이를 듣고서 부러워하여 또한 남쪽을 공략하여 재물을 취하려 하는 것이니, 이는 모두 사사로운 계획을 써서 그 때문에
注+① 爲(때문에)는 去聲이다. 나라에 사건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魏主가 마침내 그만두었다.
目
[目] 여러 장군들이 다시 표문을 올려 幽州 이남의 강한 병사를 선발하여 자신들의 수비를 원조하고, 그리고 漳水에서 선박을 제조할 것을 청하였는데, 공경들은 모두 마땅히 요청한 대로 해야 한다고 하였고, 이어서 司馬楚之․魯軌․韓延之 등을 임명하여 장수로 삼아 남쪽 사람을 불러 끌어들이게 하였다.
崔浩가 말하기를 “사마초지 등은 모두 저들이 두려워하고 꺼리는 대상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정예 병사를 다 징발하고 대대적으로 선박을 제조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宋나라는〉 우리나라가 司馬氏를 존립시키고 劉氏 종실을 주멸하려 한다고 하여, 반드시 온 나라가 놀라서 정예 병사를 모두 징발하여 죽기로 싸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남쪽 변경의 여러 장군들이 그들을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니, 적을 물리치려고 하면서 도리어 그들을 부르는 격입니다. 허장성세를 펼치다가 실제 피해를 부른다는 것은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마초지 등은 모두 작은 이익을 탐내는 소인배이므로, 단지 경박하고 무뢰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데 그쳐서 큰 공을 세우지 못할 것이니, 한갓 우리나라에 전쟁이 이어지고 재앙이 얽히도록 할 뿐입니다.”라고 하였으나, 魏主가 옳게 여기지 않았다.
目
[目] 崔浩가 마침내 다시 天時를 들어 남방에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반드시 불리하다 하여 말하기를 “올해는 해로운 기운이 揚州에 있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注+① 揚州는 12방위의 丑方에 있고 이번 歲次(庚午年)가 午에 있다. 丑은 金庫(金 창고)가 되고 午는 火旺(火氣의 旺盛)이 되는데, 火는 金을 해치므로 해로운 기운이 양주에 있는 것이다. 庚과 午는 스스로를 刑殺하는 형상이므로 먼저 발동하는 사람이 상해를 당할 것이 두 번째입니다.
注+② 歲次가 庚午에 있으니, 庚은 金이고 午는 火이다. 화는 금을 이기므로 스스로를 刑殺하는 형상이 된다.
일식으로 대낮에도 어두웠는데 그 분야가 斗宿와 牛宿에 해당한 것이 세 번째입니다.
注+③ 지난해 11월 초하루에 星紀(별자리 이름)의 分野에서 일식이 일어났는데 斗宿와 牛宿에 해당한다. 宿(별)는 음이 秀이다. 熒惑星(火星)이 翼宿와 軫宿에 있으면서 어지러움과 죽음을 주관하는 것이 네 번째입니다.
注+④ 熒惑은 罰星이니, 머무는 별자리[宿]에는 〈그 분야에 해당하는〉 나라가 재앙을 받아서 죽거나 난리가 난다. 翼宿와 軫宿는 楚의 분야이니, 荊州에 속한다. 太白星(金星)이 아직 나오지 않아서 진군하는 자가 패하는 것이 다섯 번째입니다.
注+⑤ 太白은 군대의 상징이니, 태백이 아직 나오지 않아서 진군하는 것이 불리한 것이다.
나라를 흥성하게 하는 군주는 먼저 人事를 정비하며 그 다음으로 지형의 이점을 다한 후에 天時를 살피므로, 만 가지를 거행하여 만 가지가 다 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劉義隆의 막 건국한 나라는 人事가 흡족하지 않고, 災異가 자주 나타나니 天時가 돕지 않고, 배가 가려해도 물이 말랐으니 地利도 다하지 못합니다.
이 人事․天時․地利 세 가지 중에 하나도 가능한 것이 없는데도 유의륭이 이를 행하려 하니, 반드시 패배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目
[目] 魏主가 많은 사람들의 말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마침내 조서를 내려 선박 3천 척을 건조하고, 幽州 이남의 수비병을 선발하여 黃河 가에 집결시켰다. 司馬楚之를 安南大將軍으로 삼고 琅邪王에 책봉하여, 潁川에 주둔하게 하였다.
到彦之가 淮水에서 泗水로 들어갈 적에, 사수가 말라
注+① 滲(마르다)은 所禁의 切이니, 물이 마르는 것이 滲이다. 하루에 가는 길이 겨우 10리였다.
7월에 비로소 須昌에
注+② 須昌縣은 前漢 때에 東部에 속했고, 後漢과 晉나라 때에 東平郡에 속했다. 도착하여 마침내 황하를 역류하여 서쪽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魏主가 河南 4鎭의
注+③ “四鎭”은 金墉․虎牢․滑臺․碻磝이다. 군사가 적다고 하여 명을 내려 모든 군사에게 북쪽으로 건너가게 하였다.
도언지는 朱脩之를 남겨서 滑臺를 지키게 하고, 尹沖에게 虎牢를 지키게 하고, 杜驥에게
注+④ 杜驥는 杜預의 현손이다. 金鏞을 지키게 하고, 여러 군대가 靈昌津으로 나아가 주둔하여 남쪽 연안을 줄지어 지켜서 潼關까지 닿았다.
이에 司州와 兗州가 평정되고 나자 여러 군대가 모두 기뻐하였는데, 王仲徳만은 홀로 걱정하는 기색을 하여 말하였다.
“그대들은 북방 사람들의 眞僞를 알지 못하니 반드시 그 계략에 빠질 것이다. 오랑캐는 비록 仁義는 부족하지만 흉악과 교활함이 넘치니 지금 수비하는 병사를 거두어 북쪽으로 돌아갔는데 반드시 힘을 합쳐 집결할 것이다. 만약 황하가 얼어붙고 나면 장차 다시 남쪽으로 올 것이니, 어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目
[目] 夏主(赫連定)가 사절을 보내 宋나라와 강화를 요청하고, 군사를 연합하여 北魏를 멸망시키고 멀리 河北을 나누어 恒山에서 동쪽은 宋나라에 소속시키고 서쪽은 夏나라에 소속시키기로 약정하였다.
魏主가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정비하여 장차 夏나라를 정벌하고자 하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劉義隆의 군사가 아직도 황하 중류에 머물러 있는데
注+① 〈“猶在河中”은〉 황하 중류에 있음을 말한다. 이를 버려두고 서쪽으로 간다면 앞에 있는 적을 반드시 이길 수는 없을 것이고, 劉義隆이 빈틈을 타고 황하를 건너게 되면 山東을
注+② 여기의 山東은 太行山․恒山의 동쪽으로, 바로 河北 지역을 말한다. 상실하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崔浩가 말하기를 “유의륭이 혁련정과 멀리서 서로 호응하여 虛張聲勢로 맞장구나 치고 있을 뿐이지, 감히 먼저 〈우리나라에〉 침입하지 않을 것입니다. 비유하면 한 쌍 닭을 얽어매어 함께 날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으므로 해가 될 수 없습니다.
신이 애초에 말하였듯이, 유의륭의 군대가 침입해올 적에는 마땅히 황하 중류에 주둔했다가 두 갈래 길로 북상하여 동쪽 길로는 冀州로 향하고, 서쪽 길로는 鄴城으로 돌진할 것이니, 이와 같다면 폐하께서는 마땅히 스스로 그들을 토벌하시되 천천히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아 동서로 늘어선 군사의 길이가 2천 리에 걸쳐서, 한 곳을 지키는 군사가 수천 명에 지나지 않으므로 형세가 분산되고 세력이 약합니다. 이는 견고히 황하를 지키고자 하는 것에 불과하며 북쪽으로 건너오려는 의도가 없는 것입니다.
혁련정은 夏나라의 잔존한 무리로 꺾기 쉬우니 그를 치면 반드시 쓰러질 것입니다. 혁련정을 평정한 후에 동쪽으로 潼關으로 나가 멍석을 말 듯이 전진하면 위세가 남쪽 끝까지 진동하여 長江과 淮水 이북에는 풀 한 포기도 제대로 서 있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魏主는 이를 따라서 마침내 統萬에 가서 平涼을 습격할 것을 모의하였다.
目
[目] 宋나라의 到彦之와 王仲德이 黃河의 연안에 수비대를 설치하고 돌아가서 東平을 지켰다. 北魏의 安頡이 委粟津에서
注+① 委粟津은 洛陽 북쪽에 있고, 또 〈같은 이름을 가진〉 委粟山이 洛陽 남쪽에 있다. 황하를 건너 金埇城을 공격하였다. 〈宋나라의〉 杜驥가 성을 버리고 달아나고자 하였으나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였다.
애초에 宋 高祖(劉裕)가 後秦을 멸망시키고 그 종과 종틀을 江南으로 옮길 적에 大鐘을 洛水에 빠뜨렸는데, 宋 文帝가 姚聳夫에게 가서 그것을 가져오게 하였다.
두기가 요응부를 속여서 말하기를 “금용성은 이미 수리가 다 끝나고 양식도 풍족한데, 부족한 것은 사람뿐입니다. 지금 北魏의 기병이 남쪽으로 건너오니 마땅히 서로 힘을 합하여 그들을 막아야 합니다. 큰 공을 세우고 나거든 종을 끌어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요용부가 이를 따랐다.
요응부는 도착하고 나서 성을 지킬 수 없음을 보고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떠나자 두기도 남쪽으로 달아나니, 안힐이 洛陽을 탈취하였다.
두기가 돌아와서 황제(劉義隆)에게 말하기를 “본래 죽음으로 견고히 지키고자 하였는데, 요용부가 성에 이르자마자 황급히 달아나 군인들의 사기가 꺾여서 다시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하니, 上이 크게 노하여 요용부를 壽陽에서 주살하였다.
요용부는 용감하고 건장하여 여러 偏將들 중에 따라갈 자가 없었다. 안힐이 장군 陸侯와 진군하여 虎牢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目
[目] 王仲德이 말하기를 “洛陽이 이미 함락되자 虎牢가 지켜지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형세입니다. 오랑캐들은 여전히 우리와 천 리나 떨어져 있고, 滑臺에는 아직도 강한 병사가 있는데, 만약 황급히 배를 버리고 남쪽으로 도망가면 사졸들은 반드시 흩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到彥之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淸水에서 濟水로
注+① 郭緣生의 ≪述征記≫에 말하기를 “淸河가 먼저 洪水를 받아서 북쪽으로 가서 濟水로 흘러간다. 혹자는 淸河가 바로 濟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들어갔고, 남쪽으로 가서 歷城에 이르러 배에 불을 지르고 갑옷을 버리고 걸어서 彭城으로 향하였다. 이때 靑州와 兗州가 크게 어지러웠다.
長沙王 劉義欣이 팽성에 있었는데 장수와 보좌관들은 모두 수비를 포기하고 도읍지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으나 유의흔이 따르지 않았다.
北魏의 군사가 濟南을
注+② 濟南郡은 歷城에 治所를 두었다. 공격하자, 濟南太守 蕭承之가 수백 명을 거느리고 이들을 막았다. 北魏의 무리가 대거 모여들자 소승지는 군사들을 숨기고 성문을 열게 하였는데,
무리들이 말하기를 “적들은 많고 우리들은 적은데 어찌 적들을 가볍게 여기십니까.”라고 하니, 소승지가 말하기를 “지금 궁벽한 성을 〈원조 없이〉 외로이 지키면서 사태가 이미 위급한데, 만약 다시 연약함을 보인다면 반드시 도륙당할 것이니, 오직 강함을 보이면서
注+③ 見(보이다)은 賢遍의 切이다. 그들을 대처해야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北魏의 군사들은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