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綱] 한漢나라 효성황제孝成皇帝수화綏和 원년이다. 봄 2월에 정도왕定陶王유흔劉欣을 세워 황태자皇太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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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상上은 승상丞相과 어사御史, 장군將軍을 불러들여 중산왕中山王과 정도왕定陶王 중에 누가 후사後嗣가 되기에 합당한가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기를 “예禮에 ‘형제兄弟의 아들은 자식과 같고 후사가 된 자는 그의 아들이 된다.’ 하였으니, 정도왕이 마땅히 후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였다.注+① 형제의 아들은 자식과 똑같이 보는 것이니, 아우의 아들로 형兄의 후사後嗣를 삼으면 형兄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공광孔光은 홀로 말하기를 “〈예禮에〉 가까운 친족을 후사로 세운다 하였고, 형兄이 죽으면 아우가 대신하는 것은 《상서尙書》 〈반경盤庚〉에 보이는 은殷나라의 왕위계승 방법입니다.’ 하였습니다.注+② 형제는 같은 아버지의 친아들이니, 그 친함이 형제의 아들(조카)보다 더 친하다. 형이 죽으면 아우가 대신하는 것은 은殷나라의 법이다. 은殷나라는 외병外丙과 중임仲壬으로부터 반경盤庚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형제가 대신하여 즉위하였는데, 《상서尙書》에는 이런 글이 없으니, 공광孔光이 인용한 것은 아마도 《금문상서今文尙書》일 것이다. 중산왕은 황제皇帝의 친아우이니, 마땅히 후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였다.
상上은 중산왕은 재능이 없고 또 예禮에 ‘형제가 함께 사당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하여, 공광의 의논을 따르지 않고注+③ 〈사당에서〉
[강綱] 공길孔吉을 봉하여 은殷나라의 소가후紹嘉侯로 삼고 3월에 주周나라의 승휴후承休侯와 함께 모두 작위爵位를 승진시켜 공公으로 삼았다.注+① 《한서漢書》 〈외척은택후표外戚恩澤侯表〉에 “은殷나라의 소가후紹嘉侯는 패현沛縣을 국도國都로 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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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명하여 은殷나라의 후손을 찾았는데, 10여 개의 성姓으로 분산되어 그 적사嫡嗣를 널리 구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注+① 은殷나라는 자성子姓이니, 그 뒤에 송씨宋氏‧공씨孔氏‧화씨華氏‧대씨戴氏‧환씨桓氏‧상씨向氏(상씨)‧악씨樂氏(악씨) 등의 성姓이 되었다.
광형匡衡과 매복梅福이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공자孔子의 후세(후손)를 봉하여 탕왕湯王의 후손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니, 상上이 그 말을 따랐다.注+② 광형匡衡의 의론議論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왕자王者가 하夏나라와 은殷나라 두 왕王의 후손後孫을 남겨둔 것은 그 선왕先王을 높여
을 통하게 한 것입니다. 주벌誅罰하여 대를 끊을 죄를 범한 자는 끊고, 다시 다른 친족을 봉하여 시봉군始封君(처음 봉하는 군주)으로 삼아서 위로는 왕자王者의 시조始祖를 받들게 하였습니다. 《춘추春秋》의 의리義理에 제후諸侯가 능히 그 사직社稷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끊었습니다. 이제 송宋나라가 이미 그 계통을 지키지 못하여 나라를 잃었으니, 그렇다면 마땅히 다시 은殷나라의 후손을 세워서 시봉군으로 삼아 위로 탕湯임금의 계통을 이어야 합니다. 송宋나라의 끊어진 후侯의 지위를 이어주는 것은 옳지 않고, 마땅히 은殷나라의 후손을 분명하게 찾아야 할 뿐입니다. 지금 옛 송宋나라는 그 적손嫡孫을 널리 찾아보면 아득히 오래되어 찾을 수가 없고, 비록 그 적손을 찾더라도 적손의 선조가 이미 끊어졌기 때문에 세워서는 안 됩니다. 《예기禮記》에 공자孔子가 말씀하시기를 ‘나(구丘)는 은殷나라 사람이다.’ 하셨습니다. 선사先師가 전한 바이니, 마땅히 공자孔子의 후세後世로 탕湯임금의 후손을 삼아야 합니다.” 이는 원제元帝 때의 의논인데, 이때에 매복梅福이 다시 이것을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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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여름에 삼공三公의 관원을 세우니, 대사마大司馬왕근王根은 장군將軍의 칭호를 버리고, 어사대부御史大夫하무何武를 바꾸어 대사공大司空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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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어사대부御史大夫하무何武가 건의하기를 “말속末俗의 일이 번거롭고 재상宰相의 재능이 옛날에 미치지 못하는데, 재상이 홀로 삼공三公의 일을 겸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는 것이니, 마땅히 삼공三公의 관원官員을 세워야 합니다.” 하였다.
상上은 그의 말을 따라 왕근王根을 표기장군驃騎將軍의 관직을 파하고 대사마大司馬로 삼고, 하무를 대사공大司空으로 삼아 승상(대사도大司徒)과 함께 삼공三公이 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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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 8월에 중산왕中山王유흥劉興이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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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시호諡號를 효孝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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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흉노匈奴의 차아단우車牙單于가 죽자, 아우인 낭오주류약제단우囊烏珠留若鞮單于(낭오주류약제선우, 흉노의 제18대 선우)가 즉위하였다.注+① 낭오주류囊烏珠留는 바로 낭지아사囊知牙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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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한漢나라가 하후번夏侯藩을 흉노匈奴에 사신으로 보낼 적에, 혹자가 왕근王根을 설득하기를
“흉노匈奴의 땅이 외따로 떨어져 한漢나라 지역 안으로 쑥 들어와 장액군張掖郡과 맞닿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기이한 재목材木과 화살대와 독수리 깃털 등이 생산되니, 만약 우리가 이곳을 얻는다면 변방이 매우 풍족해질 것입니다.” 하였다.注+① 두斗는 외진 것이니, 〈“흉노유두입한지匈奴有斗入漢地”는〉 흉노匈奴의 땅 중 일부가 외따로 떨어져 한漢나라의 경계 가운데로 굽어 들어옴을 이른다. 직直는 맞닿은 것이다. 간竿은 공한工旱의 절切이니, 화살대이다. 취鷲는 음이 취就이니, 큰 독수리이다. 머리가 누렇고 눈이 붉고 오색五色 깃털을 모두 구비하였으니, 그 깃털로 화살 깃을 만들 수 있다.
왕근이 상上에게 이 내용을 말하자注+② 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니, 아래의 “위유爲有”와 “역위亦爲”도 모두 같다., 상上은 곧바로 선우單于에게 그 땅을 요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만일 요구한 바를 얻지 못하면 황제의 명령과 위엄이 손상되므로注+③ 직直은 곧바로이다. 〈“위유부득爲有不得상명손위傷命損威”는〉 조명詔命이 행해지지 못하면 황제의 명령과 위엄이 손상되니, 중국中國의 위엄이 손상됨을 이른다. 왕근은 즉시 다만 상上의 뜻을 하후번에게 타일러주고는 하후번의 뜻으로 〈선우를〉 설득하여 그 땅을 요구하게 하였다.注+④ 설說(설득하다)는 음이 세稅이니, 〈“종번소설이구지從藩所說而求之”는〉 하후번夏侯藩의 뜻으로 선우單于를 설득하여 그 땅을 요구하게 함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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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하후번夏侯藩이 흉노국匈奴國에 이르러 서로 말하던 차에 선우單于를 설득하기를 “마땅히 황제皇帝에게 글을 올려 이 땅을 바쳐야 하니, 그렇게 하면 두 도위都尉의 병졸兵卒 수백 명을 줄이게 되어 그 보답이 반드시 클 것이다.” 하였다.注+① “어차語次”는 서로 말하던 차이다. 장액군張掖郡에 두 도위都尉가 있었으니, 한 곳은 목륵탁삭곡目勒澤索谷(목륵탁삭곡)을 치소治所로 하고 한 곳은 거연居延을 치소治所로 하였다. “기보필대其報必大”는 한漢나라가 이 땅을 얻으면 반드시 선우單于에게 많은 상賞을 내려 보답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택澤은 음이 탁鐸이고 색索은 선각先各의 절切이다.
선우가 묻기를 “이것은 천자天子가 명命한 말씀인가? 아니면 사자使者가 요구하는 것인가? ” 하니注+② 종從은 말미암는다는 뜻이다.,
하후번이 대답하기를 “황제皇帝가 조령詔令한 뜻이다. 그러나 나 또한 선우를 위하여 좋은 계책을 낸 것이다.” 하였다.注+③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이 아래에 “선우單于가 말하기를 ‘이 지역은 온우도왕溫偶駼王이 거주하는 지역인데, 그 지형地形과 생산되는 것을 내 알지 못하므로 사신을 보내 묻기를 청한다.’ 하였다. 하후번夏侯藩이 한漢나라로 돌아온 뒤에 다시 흉노匈奴에 사신 가서 도착하자 그 땅을 요구했다.” 하였다.
선우가 말하기를 “내 이미 온우도왕溫偶駼王(온우도왕)에게 물어보니注+④ 온우도溫偶駼는 흉노匈奴의 왕호王號이다. 우偶는 마땅히 우禺으로 읽어야 하고 도駼는 음이 도塗이다., 흉노匈奴의 서쪽 변경에서 높은 장막과 수레를 만들 적에 모두 이 산山의 재목材木에 의지한다고 하였고, 또 이 땅은 선친先親의 땅이니 내가 감히 잃을 수 없다.” 하였다.注+⑤ “궁려穹廬”는 모직으로 만든 장막(천막)이니, 그 형체가 우뚝이 높으므로 궁려穹廬라 이름하였다. 앙仰은 우향牛向의 절切이니 의지함이다. 선부先父는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를 이른다.
하후번이 돌아오자 태원태수太原太守로 좌천되었는데, 선우가 장계狀啓를 올려 보고하니,
조서詔書로 답하기를 “하후번이 제멋대로 조령詔令을 칭하였으니 법法에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두 번이나 큰 사면령赦免令을 거쳤으므로注+⑥ 갱更(지내다)은 공형工衡의 절切이다. 이제 하후번을 옮겨 제남태수濟南太守를 삼아서 그로 하여금 흉노匈奴를 담당하지 못하게 하였노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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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겨울 10월에 대사마大司馬왕근王根이 병으로 면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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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11월에 초효왕楚孝王의 손자인 유경劉景을 세워 정도왕定陶王으로 삼았다.注+① 효왕孝王은 이름이 효囂이니, 선제宣帝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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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상上은 태자太子(정도왕定陶王유흔劉欣)가 이미 대종大宗의 후사後嗣를 받들었으니 사친私親(본생부모本生父母)을 돌아볼 수 없다 하여 유경劉景을 세워 정도왕定陶王으로 삼아서 공왕共王의 후사를 받들게 하였다.注+① 살펴보건대 예禮에
하였다. 정도왕定陶王은 황제皇帝의 아우의 아들로 들어와 대종大宗의 후사後嗣를 받들었으니, 의리상 다시는 사친私親인 정도공왕定陶共王을 돌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태자太子가 의논하여 사양謝讓하려고 하자, 소부少傅염숭閻崇은 “사양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태부太傅조현趙玄은 “마땅히 사양해야 합니다.” 하니,
태자太子는 태부太傅조현趙玄의 말을 따랐는데, 황제皇帝는 조령詔令을 내려서 사양한 이유를 묻게 하고는 조현을 소부少府로 좌천시키고 사단師丹을 태부太傅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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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태자太子가 어렸을 적에 조모祖母부태후傅太后가 몸소 보살펴 길렀는데注+① 〈“태자지유太子之幼”는〉 정도국定陶國에 있을 때이다., 태자가 되자 조령詔令을 내려 부태후와 태자의 어머니인 정희丁姬에게 그대로 정도국定陶國저택邸宅에 거처하게 하여 서로 만나보지 못하게 하였다.
얼마 후에 황태후皇太后가 부태후와 정희로 하여금 열흘에 한 번 태자의 집에 이르게 하고자 하니,
황제皇帝가 말하기를 “태자는 정통正統을 계승하였으니, 다시는 사친私親을 돌아볼 수 없습니다.” 하였다.注+② 여기의 사친私親은 부태후傅太后와 정희丁姬를 이른다.
황태후가 말하기를 “태자가 어렸을 적에 부태후가 안아서 길렀으니, 지금 태자의 집에 이르게 하는 것은 유모乳母의 은혜를 생각해서일 뿐입니다. 굳이 방해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注+③ 태자太子를 안아서 길렀으므로 은혜가 유모乳母와 같음을 이른다.
이에 부태후로 하여금 태자의 집에 이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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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위위衛尉순우장淳于長이 죄가 있어 하옥되어 죽고, 폐위된 황후皇后허씨許氏가 자살하였다.
왕망王莽을 대사마大司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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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위위衛尉와 시중侍中인 순우장淳于長이 총애를 받아 귀함이 공경公卿을 압도하였다.
허황후許皇后의 언니인 허미許孊(허미)가 과부寡婦로 살았는데注+① 미孊는 음이 미靡이니 태후太后의 언니 이름인데, 용락사후龍雒思侯한보韓寶의 부인夫人이 되었다., 순우장이 그녀와 은밀히 간통하고는 취하여 소처小妻(소실)로 삼았다.注+② 무릇 정실부인正室夫人이 아닌 자는 모두 소처小妻이다. 허미許孊가 비록 허황후許皇后의 언니이고 열후列侯의 부인夫人이었으나, 음탕하여 순우장淳于長에게 정조를 잃었고 순우장은 본래 정실부인正室夫人이 있었으므로 소처小妻로 삼은 것이다.
허미를 통하여 금전과 수레와 의복과 사용하는 물건을 순우장에게 뇌물로 주어서 다시 첩여倢伃가 되고자 하였다.注+③ 허황후許皇后가 폐위되어 거처를 소대궁昭臺宮으로 옮겼다가 1년여 만에 다시 장정궁長定宮으로 옮겼으니, 장정궁은 임광궁林光宮 안에 있었다.
순우장은 뇌물을 받고 거짓으로 그녀를 위해 황제皇帝에게 아뢰어 좌황후左皇后로 세워주겠다고 허락하고는注+④ “허위許爲”의 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니, 아래 “위장爲長”과 “위지爲之”도 같다.,
허미가 장정궁長定宮에 들어올 때마다 번번이 허미에게 편지를 주어서 허황후를 희롱하고 업신여겼는데, 설만하고 경멸하여 못 하는 말이 없었다.注+⑤ 만嫚은 설만함이고, 역易는 경멸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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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왕망王莽은 마음속으로 순우장淳于長의 총애를 시기하여 상上에게 아뢰었으나, 상上은 태후太后 때문에 순우장의 죄를 다스리지 않고 봉국으로 내보냈다.注+① 순우장淳于長은 태후太后의 언니의 아들이다. “취국就國”은 정릉후定陵侯의 나라로 나아감을 이른다.
홍양후紅陽侯왕립王立은 옛날부터 순우장과 원한이 있었는데注+② 처음에 홍양후紅陽侯왕립王立이 정사를 보필하지 못하게 되자, 왕립은 순우장淳于長에게 훼방과 참소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의심하여 항상 순우장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상上이 이것을 알고 있었다., 이때에 사자嗣子인 왕융王融으로 하여금 순우장에게 수레와 말을 청하게 하였다.注+③ 사자嗣子는 적장자適長子로서 마땅히 후사後嗣가 될 자를 이른다. 순우장淳于長이 이때 자신의 봉국封國으로 나아가게 되니, 항상 따르던 수레와 말이 사용할 곳이 없게 되었으므로 왕근王根이 이것을 달라고 청한 것이다.
순우장이 진귀한 보물을 왕립에게 많이 선물하니, 왕립은 인하여 상서上書하여 순우장이 도성都城에 머물게 해달라고 주청하였다.
상上이 이것을 의심하여 옥리獄吏에게 회부하여 조사하게 하니注+④ 〈“상의지上疑之”는〉 황제皇帝는 왕립王立이 평소에 순우장淳于長을 원망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순우장을 위하여 봉사封事를 올려 그를 도성都城에 머물게 해달라고 주청하였으므로 이에 의심이 난 것이다., 왕립은 왕융으로 하여금 자살하게 하여 입을 막았다.注+⑤ 〈“입立영융자살이멸구令融自殺以滅口”는 왕립王立은〉 왕융王融이 옥리獄吏에게 나아가 이 일이 누설될까 두려워한 것이다.
상上이 더욱 의심하여 순우장을 체포해서 조옥詔獄에 가두고 끝까지 죄를 다스리니注+⑥ “궁치窮治”는 고문하여 그 간악함을 끝까지 밝혀낸 것을 이른다., 순우장이 모두 자백하였는데, 대역죄에 이르러 옥중에서 죽었다.
정위廷尉공광孔光으로 하여금 절節을 가지고 가서 폐위된 허황후許皇后에게 사약을 내려 자살하게 하였다.
상上은 차마 왕립을 법法에 회부하지 못하고 봉국으로 내보내니, 적방진은 다시 왕립의 무리인 주박朱博 등을 아뢰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注+① 주박朱博은 두릉杜陵 사람이다.
적방진 또한 평소 순우장淳于長과 잘 지냈는데, 상上은 그가 대신大臣이라 하여 그를 위해 은밀히 숨겨주었다.
적방진이 내심 부끄러워하여 상소上疏하여 사죄하고 물러날 것을 청하자,
상上은 답하기를 “아침에 지은 허물을 저녁에 고치는 것을 군자君子가 허여하였으니, 그대는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注+② 여與는 허여한다는 뜻이다.
적방진이 일어나 정사를 살펴보고 다시 순우장과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을 차례로 아뢰어서 20여 명을 면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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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상上은 왕망王莽이 첫 번째로 큰 간악함을 적발했다고 하여 왕망의 충직함을 칭찬하자, 왕근王根이 이로 인해 왕망을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에 마침내 왕망을 대사마大司馬로 삼으니, 이때 나이가 38세였다.
왕망은 이미 동렬同列에서 빼어나 네 명의 백부伯父와 숙부叔父를 계승하여 정사를 보필하니注+① 왕봉王鳳과 왕상王商, 왕음王音과 왕근王根 네 사람이 모두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는데, 이들은 왕망王莽의 백부伯父와 숙부叔父들이었다., 자기의 명예가 옛사람보다 뛰어나기를 바라서 사욕을 이겨 자신을 엄하게 단속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가 되고 여덟 주州에 여덟 백伯이 있어서 제후국諸侯國을 통솔하였으니, 지금 주목州牧을 설치하여 옛 주백州伯의 제도에 부응할 것을 청한 것이다.
상上이 그 말을 따라 주목州牧을 설치하니, 질秩이 이천석二千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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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조령詔令을 내려 벽옹辟雍을 세우게 하였는데, 짓기 전에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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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건위군犍爲郡의 물가에서 옛 석경石磬 16매枚를 얻었는데注+① 경磬은 악기를 만드는 돌이다. 옛날에 무구씨毋句氏가 석경石磬을 만들었는데 후일에는 혹 옥玉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좋은 상서祥瑞이다.” 하였다.
유향劉向이 이로 인하여 다음과 같이 상上을 설득하였다. “마땅히 벽옹辟雍(태학太學)을 일으키고 상서庠序의 향학鄕學을 설치하여 예악禮樂을 진열해서 아송雅頌의 음악을 높이며 읍하고 사양하는 용모를 성대히 하여 천하를 교화시켜야 합니다.注+② 벽辟은 벽璧과 통하고 옹雍은 못이니, 벽옹辟雍은 천자天子의 태학太學으로 대사례大射禮를 행하는 곳이다. 물이 언덕(벽옹)을 도는 것이 벽옥璧玉과 같아서 구경하는 자들을 통제하였으므로 벽옹이라 이름한 것이다. 일설에 “벽辟은 밝음이요 옹雍은 화和함이니, 〈벽옹은〉 천하天下에 화합和合함을 밝히는 것이다.”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예禮를 다 갖출 수 없다.’고 하나注+③ “혹왈或曰”은 유향劉向이 힐난詰難하는 자의 말을 가설하고 그런 뒤에 답하여 해석한 것이다.,
예禮는 사람을 기르는 것(교화, 훈도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니, 만일 잘못이 있더라도 이는 지나치게 하여 사람을 기르는 것이 되지만注+④ “과차過差”는 실착失錯(잘못)이란 말과 같다. 형벌이 지나치면 혹 사람이 죽거나 상하게 됩니다.
만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입니다.注+⑤ 삭削은 삭제할 내용이 있으면 칼로 간독簡牘을 깎아냄을 이르고, 필筆은 더 보충할 내용이 있으면 붓으로 간독簡牘에 씀을 이른다. “삭즉삭削則削필즉필筆則筆”은 군주의 뜻에 따라 법령法令을 변경함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예악에 이르러서는 ‘감히 하지 못한다.’고 말하니, 이는 사람을 죽임에는 과감하고 사람을 기름에는 과감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조두俎豆와 관현管絃의 사이에 다소 미비한 점이 있다 하여 이로 인해 끊고 행하지 않는다면注+⑥ 관管은 생황笙簧(생황)과 퉁소의 등속이고, 현絃은 거문고와 비파의 등속이다., 이는 다소 미비한 점을 없애려고 크게 미비한 데로 나아가는 것이니, 의혹됨이 이보다 더 심할 수가 없습니다.注+⑦ 그 예禮를 모두 갖추지 못한다 하여 예禮를 폐하니, 이는 다소 미비한 점을 없애려고 크게 미비한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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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교화敎化를 형법刑法에 비교하면 형법이 가벼우니, 이는 소중한 것을 버리고 가벼운 것을 시급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교화敎化는 이에 의지하여 정치를 하는 것이고 형법刑法은 정치를 보조하는 것인데, 이제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을 폐하고 보조하는 것만을 세우니,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황제皇帝가 유향劉向의 말을 공경公卿들에게 회부하여 의논하게 하니, 승상丞相과 대사공大司空이 벽옹辟雍을 세울 것을 주청하여 장안성長安城 남쪽을 순찰하여 벽옹을 만들 터를 측량하고 표시하였는데, 짓기 전에 파하였다.注+① 영營은 땅을 측량함이요, 표表는 표標를 세우는 것이다.
공광孔光 등은 경전經傳의 뜻을 어지럽히고 아첨하는 글을 올려서 충직한 선비들을 배척하여 등용하지 않았고,
정권이 외척에게 돌아가서 국가가 장차 기울게 되었으니, 어찌 태학太學을 세울 필요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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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유향劉向은 항상 드러나게 종실宗室을 변호하고 왕씨王氏를 비난하였는데, 그 말이 몹시 간절하여 지극한 정성에서 나오니,
상上은 여러 번 등용하고자 하였으나 그때마다 왕씨王氏와 승상丞相, 어사御史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注+① 지持는 붙들어주고 도와줌이다.
그러므로 유향은 끝내 승진하지 못하여 대부大夫의 열列에 있은 지 30여 년에 졸卒하였다.
그 후 13년 만에 왕씨王氏가 한漢나라를 대신하였다.
역주
역주1아버지는……것이다 :
昭는 사당의 밝은 곳이고 穆은 어두운 곳이다. 1세인 아버지가 昭이면 2세인 아들이 穆이어서 1‧3‧5‧7‧9世가 昭, 2‧4‧6‧8‧10世가 穆이 된다. 만일 아우가 형을 이어 즉위하면 昭와 穆이 같아지므로, 아우가 아들의 자리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는 왕통을 위주로 하여 혈통에 관계없이 다음 왕을 先王의 아들 자리에 있게 하였다.
역주2三統 :
夏‧商‧周 세 왕조의 正朔을 이르는바, 夏나라는 北斗星 자루가 초저녁에 寅方을 가리키는 달을 正月로 하니 이것을 人統이라 하고, 商나라는 북두성 자루가 丑方을 가리키는 달을 정월로 하니 이것을 地統이라 하고, 周나라는 북두성 자루가 子方을 가리키는 달을 정월로 하니 이것을 天統이라 하였다. 天統‧地統‧人統은 “하늘은 子會에서 열리고 땅은 丑會에서 열리고 사람(만물)은 寅會에서 생겨난다.[天開於子 地闢於丑 人生於寅]”는 運會說에 근본한 것이다. 1會는 1만 8백 년으로 子‧丑‧寅의 12會가 지나가면 天地가 다시 개벽된다고 한다.
역주3(村)[材] :
저본에는 ‘村’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材’로 바로잡았다.
역주4할아버지와……된다 :
《禮記》 〈喪服小記〉에 “別子가 祖가 되고 別子를 계승한 자가 宗이 되고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자가 小宗이 되니, 百世토록 遞遷하지 않는 宗이 있고 五世가 되면 체천하는 宗이 있다.[別子爲祖 繼別爲宗 繼禰者爲小宗 有百世不遷之宗 有五世則遷之宗]” 하였는바, 五世가 지나면 체천하는 宗 이상을 大宗이라 한다.
역주5衛尉淳于長……爲大司馬 :
“이때에 廷尉인 孔光으로 하여금 節을 가지고 가서 廢后에게 死藥을 내렸는데, 이것을 쓰지 않고 ‘自殺’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그녀가 罪人이기 때문이니, 자초함이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有罪(죄가 있다.)’라고 쓰지 않았는가. 위에서 ‘淳于長 有罪(순우장이 죄가 있다.)’라고 썼으면 許皇后가 자살한 이유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폐위되었으나 자신의 죄로 폐위되지 않았기 때문에 쓰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后를 ‘廢后(폐위된 황후)’라고 쓴 것이다.[於是 使廷尉孔光 持節賜廢后藥 不書 書自殺 何 罪人也 以爲有以自取云爾 然則曷爲不以有罪書 上書淳于長有罪 則許后之所以自殺者著矣 故雖廢 不以罪 不書 故后書廢后]” 《書法》
역주6許皇后가……거처하였는데 :
許皇后는 成帝의 황후로 B.C.18년에 폐위되었는바, 이 일이 본서 22쪽에 보인다.
역주7掾史 :
漢나라 制度에 丞相의 官屬은 長史 아래에 掾史와 令史 등이 있다 하였다. 연사는 漢나라 때 중앙과 각 지방의 관아에서 실무를 담당하던 직책이다. 이때 왕망이 賢良을 불러 大司馬의 속관으로 삼은 것이다.
역주8春秋에……회맹하였으니 :
周나라의 惠王이 庶子 帶를 총애하여 王世子 鄭을 폐하고 帶를 세우려 하자, 齊나라 桓公이 尊王을 명분으로 首止에서 제후를 회합하고 왕세자를 회견하여 그 지위를 보전해준 일을 이른다.
역주9畿內 :
고대에 천자국의 도읍과 그 주변 1,000리 이내의 지역으로, 천자가 직접 통치하였다.
역주10皐陶 :
舜임금 때의 유명한 法官으로 그에 관한 글과 말이 《書經》의 〈舜典〉‧〈大禹謨〉‧〈皐陶謨〉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14孔子는……양성하였는데 :
布衣는 일개 선비이다. 《史記》 〈孔子世家〉에 “공자는 門徒가 3천 명이었는데, 몸소 六藝를 달통한 자가 72명이었다.”라고 보인다.
역주15夏나라에서는……명칭이다 :
《孟子》 〈滕文公 上〉에 “庠‧序‧學‧校를 설치하여 백성들을 가르쳤으니, 庠은 봉양한다는 뜻이요 校는 가르친다는 뜻이요 序는 활쏘기를 익힌다는 뜻이다. 夏나라에서는 校라 하였고 殷나라에서는 序라 하였고 周나라에서는 庠이라 하였으며, 學(太學)은 三代가 이름을 함께하였으니, 이는 모두 人倫을 밝히는 것이었다.[設爲庠序學校以敎之 庠者養也 校者敎也 序者射也 夏曰校 殷曰序 周曰庠 學則三代共之 皆所以明人倫也]”라고 보인다. 庠‧序‧校는 모두 鄕學이고, 學은 國學(太學)으로 국도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