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제 그 위의威儀를 보고 그 본의本意를 살펴보니, 비로소 효명황제孝明皇帝의 지극히 효성스럽고 측은히 여기신(인자한) 마음을 쉽게 빼앗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注+≪후한서後漢書≫ 〈예의지禮儀志〉를 근거해보면 서도西都(전한前漢)에는 예전에 능陵에 올라가는 의식이 있었는데, 동도東都(후한後漢)에 이르러서는 그 예의와 형식이 더욱 구비되었다.예禮에는 번거로워도 줄일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예를 제정할 적에 사당에 제향하는 것만을 오로지하고 묘墓에는 제사하지 않았으니, 그 의리에 있어서 정밀하다.
명제明帝의 거조擧措와 채옹蔡邕의 의논은 아마도 이것을 상고하지 못하여 잘못되었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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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3월에 태전 호광太傳 胡廣이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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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호광胡廣은 30여 년 동안에 사공四公(사공司空, 사도司徒, 태위太尉, 태부太傅)을 두루 거치면서注+≪후한서後漢書≫ 〈호광전胡廣傳〉에 “무릇 한 번 사공司空을 거치고, 두 번 사도司徒가 되고, 세 번 태위太尉에 오르고, 또 태부太傅가 되었다.” 하였다. 여섯 황제를 차례로 섬겼는데, 황제들의 예우와 신임이 매우 융성하였다.注+여섯 황제는 안제安帝, 순제順帝, 충제沖帝, 질제質帝, 환제桓帝, 영제靈帝이다. 그가 천거하여 임용한 사람들은 대부분 천하의 명사名士로서 고사故事에 숙달하고 조정의 법을 잘 알았다.注+해解는 밝게 앎이다.
그리하여 경사京師의 속담에 이르기를 “만사萬事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을 때에는 백시伯始에게 물어보라, 천하의 중용中庸은 호공胡公에게 있다네.”注+백시伯始는 호광胡廣의 자字이다. 하였다.
그러나 성품이 온화하고 유순하고 삼가서 항상 말을 겸손히 하고 얼굴빛을 공손히 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뿐 충직한 기풍이 없으니, 천하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하찮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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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여름에 환관 후람侯覽이 죄가 있어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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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후람侯覽이 장락궁長樂宮의 태복太僕으로 있었는데, 권력을 독단하고 교만하고 사치한 죄에 걸려서 책서策書로 인수印綬를 거두니, 자살하였다.注+장락궁長樂宮의 태복太僕은 태후궁太后宮의 관원이다. 말 모는 것을 주관하였는데 환관을 시켰으니, 질秩이 이천석二千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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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6월에 홍수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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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황태후 두씨皇太后 竇氏가 붕崩하였다. 가을 7월에 환사황후桓思皇后(두태후竇太后)를 장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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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두태후竇太后의 어머니가 귀양 간 비경比景에서 별세하니注+비경比景은 현縣의 이름이니 일남군日南郡에 속하였다. 건녕建寧 원년(168)에 두무竇武의 가솔을 일남日南으로 귀양 보냈다., 태후太后가 근심하고 그리워하다가 병이 나서 운대雲臺에서 붕崩하였다.注+운대雲臺는 남궁南宮에 있다.
에 태후의 시신을 실어서 성城의 남쪽 시장 객사에 며칠 동안 두고, 조절曹節과 왕보王甫가 귀인貴人의 예禮로 빈소를 마련하고자 하였는데,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상喪을 발표하고 태후를 장례하는 예를 갖추었다.注+“성례成禮”는 예를 갖춤이니, 장례하는 예를 낮추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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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절曹節 등이 태후太后를 다른 곳에 장례하고 풍귀인馮貴人을 환제桓帝와 부묘祔廟하고자 하였는데注+부祔는 새로 죽은 사람의 신주를 먼저 죽은 자의 사당에 모셔 제사함을 이르니, 부인은 남편에 부祔하고,
, 황제가 조령詔令을 내려 공경公卿을 조정에 크게 모으고 중상시 조충中常侍 趙忠으로 하여금 의논을 감독하게 하였다.
태위 이함太尉 李咸이 이때 병病을 앓고 있었는데 억지로 부축을 받고 일어나서는 산초山椒를 찧어 몸에 지니고注+산초는 맛이 맵고 독이 있으니, 산초를 빻아 가루를 만들어서 몸에 지닌 것은 산초가루를 먹고서 숨이 막혀 죽으려 한 것이다. 처자식에게 이르기를 “만약 황태후皇太后가 환제桓帝와 배식配食하지 못하게 되면, 내 살아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의논할 적에 자리에 있는 자들이 중관中官(환관)들을 바라보면서 아무도 먼저 말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정위 진구廷尉 陳球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황태후皇太后는 덕이 훌륭한 양가집 처자로 국모가 되어 천하를 다스렸는데, 친정 집안이 좋지 못한 때를 만나서 성명聖明한 군주를 모셔 세웠습니다.注+조造는 이룸이니, ≪시경詩經≫ 〈주송 민여소자周頌 閔予小子〉에 “집안이 좋지 못한 때를 만났다.” 하였다.
그런데 큰 옥사獄事를 만남으로 인하여 비어 있던 궁宮으로 옮겨 거처하게 되었습니다. 친정 집안이 비록 죄를 얻었으나, 이 일은 태후太后가 한 것이 아닙니다.注+〈‘가수획죄家雖獲罪’의〉 가家는 태후의 집안을 이르니, 두무竇武이다.
지금 만약 태후를 다른 곳에 따로 장례한다면 진실로 천하 사람들이 실망할 것이요, 또 풍귀인馮貴人은 나라에 공功이 없으니, 어떻게 위로 지존至尊에 배합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함이 말하기를 “신臣은 본래 당연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이는 진실로 저의 뜻과 부합합니다.” 하니, 이에 공경公卿 이하가 모두 진구의 의논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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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그런데도 조절曹節과 왕보王甫가 여전히 논쟁을 하자, 이함李咸이 다시 다음과 같이 상소上疏하였다. “장덕황후章德皇后는 공회황후恭懷皇后를 잔혹하게 박해하였고, 안사황후安思皇后는 친정집에서 악역惡逆을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화제和帝가 장덕황후를 따로 장례한다는 의논을 하지 않았고, 순제順帝 때에도 안사황후를 폄하하는 글이 없었습니다.注+장덕章德은 장제章帝의 후后인 두씨竇氏이고, 공회恭懷는 화제和帝의 어머니인 양귀인梁貴人이고, 안사安思는 안제安帝의 황후皇后인 염씨閻氏이다.
에 “영평永平 2년(59) 11월에 처음 북궁北宮을 지었는데, 주작朱雀은 남쪽 사마문司馬門이니, 궁문宮門의 밖에 있었다.” 하였다. 하니, 조령詔令을 내려 사례교위 유맹司隷校尉 劉猛에게 〈글을 쓴 사람을〉 쫓아 체포하게 하였으나, 유맹은 그 말이 정직하다 하여 급히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조령을 내려 단경段熲으로 유맹을 대신하게 하니, 단경이 마침내 사방으로 나가 추포追捕하여 태학太學의 유학생으로서 옥에 갇힌 자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유맹을 아뢰어 논죄해서 좌교左校에서 노역하게 하였다.
왕보王甫를 통하여 나라를 되찾을 것을 요구하면서 사례로 5,000만 전錢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얼마 후, 환제桓帝가 유조遺詔를 내려 나라를 되돌려주니, 유회는 왕보의 공功이 아니라고 하여 사례하는 돈을 주지 않았다.
왕보는 중상시 정삽中常侍 鄭颯 등이 유회와 서로 내통했다 하여, 마침내 단경段熲으로 하여금 정삽 등을 체포하게 하고, 정삽 등이 유회를 맞이하여 황제로 세울 것을 도모했다고 아뢰었다.
이에 조령詔令을 내려 기주자사冀州刺史에게 유회를 체포해서 위협하여 자살하게 하였고, 비첩妃妾과 자녀子女와 부傅, 상相 이하 100여 명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왕보 등 12명은 공功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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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11월에 회계會稽의 요망한 도적인 허생許生이 황제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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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선비鮮卑가 병주幷州를 침략하였다.
역주
역주1제가……것입니다 :
墓祭는 秦 始皇이 墓 옆에 寢을 세우고 제사하였는데, 漢나라가 그대로 따라서 여러 陵寢에 그믐과 보름, 24절기, 三伏 등에 밥을 올린 것을 말한다. 天子는 정월에 原陵에 올라가 배알하였다. 光武帝의 아들 明帝가 백관을 거느리고 원릉에 배알할 때 정월 초하루에 조회하는 의식과 똑같이 하였다. 그러나 이 예는 宗廟에서 행하는 예와 뒤바뀐 것으로 蔡邕이 예법에 어긋난다고 보았지만 그 예를 막상 보니 명제의 효성이 절실하다고 여긴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9권 하 漢 明帝 永平 원년(58)에 보인다.
역주2산 자에……것이다 :
원문의 ‘致生之’는 죽은 자에게 살아 있는 자의 禮로 지극히 대하는 것이고, ‘致死之’는 살아 있는 자에게 죽은 자의 예로 지극히 대함을 이른다. ≪禮記≫ 〈檀弓 上〉에 “죽은 자를 보내면서 죽은 자의 禮로 지극히 대함은 仁하지 못한 것이어서 할 수 없고, 죽은 자를 보내면서 살아 있는 자의 예로 지극히 대함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어서 할 수 없다.[之死而致死之 不仁而不可爲也 之死而致生之 不知而不可爲也]”라고 한 孔子의 말씀이 보이는데, 陳澔의 ≪集說≫에 “죽은 자를 보내면서 죽은 자의 禮로 지극히 대하는 것은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仁하지 못함이 되므로 행할 수가 없고, 죽은 자를 보내면서 살아 있는 자의 예로 지극히 대함은 이치를 아는 밝음이 없어서 지혜롭지 못함이 되므로 또한 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여기서는 이것을 원용하여 죽은 자의 體魄을 모신 陵墓에 제사를 지극히 지내면 이는 이치에 어두워 지혜롭지 못한 것이고, 죽은 자의 靈魂을 모신 사당에 제사를 극진히 지내지 않으면 이는 조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仁하지 못한 것이라 한 것이다.
역주3(二)[三] :
저본에는 ‘二’로 되어 있으나 ≪後漢書≫에 의거하여 ‘三’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衣車 :
옛날 귀족의 부녀자가 타던 수레로, 전면에는 문이 있고 후면에는 휘장 등을 설치하여 가려 눕고 휴식할 수 있었으며 의복 등을 겸하여 실었다.
역주5祔해야……祔한다 :
妃妾은 신분이 미천하여 夫君의 사당에 祔할 수가 없으므로 죽은 妾祖姑(첩인 시할머니)에게 祔하고 없으면 다시 한 대를 건너 뛰어 妾高祖姑에게 祔한다. 祔廟한 神位는 제사 때에 配食한다.
역주7詔司隷校尉劉猛 論輸左校 :
“이때 朱雀闕에 글을 써서 曹節과 王甫가 太后를 유폐하여 죽였다고 말한 자가 있었는데, 司隷校尉 劉猛에게 詔令을 내려 글을 쓴 사람을 체포하게 하였으나, 유맹은 그 말이 정직하다 하여 급히 체포하지 않았다. 段熲이 아뢰어서 유맹을 論罪하여 左校에서 노역하게 하였는데, 곧바로 ‘詔’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오로지 靈帝를 나쁘게 여긴 것이다. 어찌하여 영제를 나쁘게 여겼는가. 사람들이 조절과 왕보가 태후를 유폐하여 죽였다고 말했는데, 조절과 왕보의 죄를 다스리지 않고 사예교위를 죄주었으니, 황제는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이것을 가지고 황제의 병통으로 여겼기 때문에 특별히 ‘詔’라고 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詔令을 내려 논죄하여 노역하게 했다.’라고 쓴 것은 2번으로 李膺과 劉猛인데, 모두 그 임금을 나쁘게 여긴 것이다.[於是有書朱雀闕 言曹節王甫幽殺太后者 詔司隷逮捕 猛以其言直 緩之 段熲奏猛論輸左校 則其直書詔 何 專病靈也 曷爲病之 人言節甫幽殺太后 不治節甫而罪司隷 帝誠何心哉 以是爲帝病 故特書詔 終綱目 書詔輸作二 李膺劉猛 皆病其上也]다” ≪書法≫
역주8古今註 :
晉나라 崔豹(?~?)가 撰한 것으로 모두 3권인바 服輿, 都邑, 音樂, 鳥獸 등에 대한 考證이다.
역주9처음에……되었었는데 :
桓帝 延熹 8년(165)에 渤海王 劉悝가 불법을 저지르고 끝내 반란을 도모했는데, 有司가 폐출할 것을 청하였다. 환제가 유회를 廮陶王으로 강등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