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9)

자치통감강목(9)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9)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壬子年(172)
임자년壬子年(172)
熹平元年이라 春正月 帝謁原陵하다
蔡邕蔡邕
나라 효령황제 희평孝靈皇帝 熹平 원년이다. 봄 정월에 황제가 원릉原陵(광무제光武帝의 능)에 배알하였다.
司徒掾蔡邕曰 吾聞古不墓祭라하니이다 朝廷 有上陵之禮하니 始謂可損이러니
今見威儀하고 察其本意하니 乃知孝明皇帝 至孝惻隱 不易奪也注+據禮儀志, 西都舊有上陵, 至東都, 則其儀文愈備. 禮有煩而不可省者하니 此之謂也니이다
그런데 이제 그 위의威儀를 보고 그 본의本意를 살펴보니, 비로소 효명황제孝明皇帝의 지극히 효성스럽고 측은히 여기신(인자한) 마음을 쉽게 빼앗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注+후한서後漢書≫ 〈예의지禮儀志〉를 근거해보면 서도西都(전한前漢)에는 예전에 에 올라가는 의식이 있었는데, 동도東都(후한後漢)에 이르러서는 그 예의와 형식이 더욱 구비되었다. 에는 번거로워도 줄일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胡氏曰 墓藏體魄而致生之 是不智也 廟以宅神而致死之 是不仁也
聖人制禮 專於廟享而不祭於墓하니 其於理義 精矣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예를 제정할 적에 사당에 제향하는 것만을 오로지하고 에는 제사하지 않았으니, 그 의리에 있어서 정밀하다.
明帝之擧 蔡邕之議 豈其不考於此而失之與인저
명제明帝거조擧措채옹蔡邕의 의논은 아마도 이것을 상고하지 못하여 잘못되었는가 보다.”
三月 太傳胡廣하다
】 3월에 태전 호광太傳 胡廣하였다.
周流四公三十餘年注+本傳 “凡一履司空, 再作司徒, 登太尉, 又爲太傅.” 歷事六帝하니 禮任極優注+六帝, 安․順․沖․質․桓․靈.하고 所辟 多天下名士 練達故事하고 明解朝章注+解, 曉也.이라
호광胡廣은 30여 년 동안에 사공四公(사공司空, 사도司徒, 태위太尉, 태부太傅)을 두루 거치면서注+후한서後漢書≫ 〈호광전胡廣傳〉에 “무릇 한 번 사공司空을 거치고, 두 번 사도司徒가 되고, 세 번 태위太尉에 오르고, 또 태부太傅가 되었다.” 하였다. 여섯 황제를 차례로 섬겼는데, 황제들의 예우와 신임이 매우 융성하였다.注+여섯 황제는 안제安帝, 순제順帝, 충제沖帝, 질제質帝, 환제桓帝, 영제靈帝이다. 그가 천거하여 임용한 사람들은 대부분 천하의 명사名士로서 고사故事에 숙달하고 조정의 법을 잘 알았다.注+는 밝게 앎이다.
京師諺曰 萬事不理 問伯始 天下中庸 有胡公注+伯始, 廣字.이라하니라
그리하여 경사京師의 속담에 이르기를 “만사萬事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을 때에는 백시伯始에게 물어보라, 천하의 중용中庸호공胡公에게 있다네.”注+백시伯始호광胡廣이다. 하였다.
이나 溫柔謹慤하여 常遜言恭色하여 以取媚於時하고 無忠直之風하니 天下以此薄之러라
그러나 성품이 온화하고 유순하고 삼가서 항상 말을 겸손히 하고 얼굴빛을 공손히 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뿐 충직한 기풍이 없으니, 천하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하찮게 보았다.
宦者侯覽 有罪自殺하다
】 여름에 환관 후람侯覽이 죄가 있어 자살하였다.
爲長樂太僕이러니 坐專權驕奢하여 策收印綬하니 自殺注+長樂太僕, 太后宮官也. 主馭, 宦者爲之, 秩二千石.하다
후람侯覽장락궁長樂宮태복太僕으로 있었는데, 권력을 독단하고 교만하고 사치한 죄에 걸려서 책서策書인수印綬를 거두니, 자살하였다.注+장락궁長樂宮태복太僕태후궁太后宮의 관원이다. 말 모는 것을 주관하였는데 환관을 시켰으니, 이천석二千石이다.
六月 大水하다
】 6월에 홍수가 졌다.
◑皇太后竇氏崩하다 秋七月 葬桓思皇后하다
황태후 두씨皇太后 竇氏하였다. 가을 7월에 환사황후桓思皇后(두태후竇太后)를 장례하였다.
竇太后母 卒於比景注+比景, 縣名, 屬日南郡. 建寧元年, 徙竇武家屬於日南.하니 太后憂思感疾하여 崩於雲臺注+臺在南宮.하다
두태후竇太后의 어머니가 귀양 간 비경比景에서 별세하니注+비경比景의 이름이니 일남군日南郡에 속하였다. 건녕建寧 원년(168)에 두무竇武의 가솔을 일남日南으로 귀양 보냈다., 태후太后가 근심하고 그리워하다가 병이 나서 운대雲臺에서 하였다.注+운대雲臺남궁南宮에 있다.
宦者積怨竇氏 以衣車載其尸하여 置城南市舍數日하고 曹節, 王甫 欲用貴人禮殯이어늘 帝不可하니 於是 發喪成禮注+成禮, 具禮也, 言不降其葬禮.하다
환관들은 두씨竇氏에게 원한이 쌓였으므로 에 태후의 시신을 실어서 의 남쪽 시장 객사에 며칠 동안 두고, 조절曹節왕보王甫귀인貴人로 빈소를 마련하고자 하였는데,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을 발표하고 태후를 장례하는 예를 갖추었다.注+성례成禮”는 예를 갖춤이니, 장례하는 예를 낮추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節等 欲別葬太后而以馮貴人配祔注+祔, 謂新死之主, 祔於先死者之廟, 婦祔於其夫, 所祔之妃妾, 祔於妾祖姑也.어늘 詔公卿하여 大會朝堂하고 令中常侍趙忠으로 監議하다
조절曹節 등이 태후太后를 다른 곳에 장례하고 풍귀인馮貴人환제桓帝부묘祔廟하고자 하였는데注+는 새로 죽은 사람의 신주를 먼저 죽은 자의 사당에 모셔 제사함을 이르니, 부인은 남편에 하고, , 황제가 조령詔令을 내려 공경公卿을 조정에 크게 모으고 중상시 조충中常侍 趙忠으로 하여금 의논을 감독하게 하였다.
太尉李咸 時病이러니 扶輿而起하여 擣椒自隨注+椒, 味辛有毒, 擣椒爲末, 以自隨者, 欲以椒塞口而死也.하고 謂妻子曰 若皇太后不得配食桓帝 吾不生還矣라하다
태위 이함太尉 李咸이 이때 을 앓고 있었는데 억지로 부축을 받고 일어나서는 산초山椒를 찧어 몸에 지니고注+산초는 맛이 맵고 독이 있으니, 산초를 빻아 가루를 만들어서 몸에 지닌 것은 산초가루를 먹고서 숨이 막혀 죽으려 한 것이다. 처자식에게 이르기를 “만약 황태후皇太后환제桓帝배식配食하지 못하게 되면, 내 살아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旣議 坐者瞻望中官하여 莫肯先言이어늘 廷尉陳球曰 皇太后以盛德良家 母臨天下러니 遭時不造하여 援立聖明注+造, 成也, 詩 “遭家不造.”하시니이다
의논할 적에 자리에 있는 자들이 중관中官(환관)들을 바라보면서 아무도 먼저 말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정위 진구廷尉 陳球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황태후皇太后는 덕이 훌륭한 양가집 처자로 국모가 되어 천하를 다스렸는데, 친정 집안이 좋지 못한 때를 만나서 성명聖明한 군주를 모셔 세웠습니다.注+는 이룸이니, ≪시경詩經≫ 〈주송 민여소자周頌 閔予小子〉에 “집안이 좋지 못한 때를 만났다.” 하였다.
因遇大獄하여 遷居空宮하니 家雖獲罪 事非太后注+家, 謂其家, 竇武也.
그런데 큰 옥사獄事를 만남으로 인하여 비어 있던 으로 옮겨 거처하게 되었습니다. 친정 집안이 비록 죄를 얻었으나, 이 일은 태후太后가 한 것이 아닙니다.注+〈‘가수획죄家雖獲罪’의〉 는 태후의 집안을 이르니, 두무竇武이다.
今若別葬이면 誠失天下之望이요 且馮貴人 無功於國하니 何宜上配至尊이리오
지금 만약 태후를 다른 곳에 따로 장례한다면 진실로 천하 사람들이 실망할 것이요, 또 풍귀인馮貴人은 나라에 이 없으니, 어떻게 위로 지존至尊에 배합이 될 수 있겠습니까.”
李咸曰 臣 本謂宜爾러니 誠與意合이라한대 於是 公卿以下 皆從球議하다
이함이 말하기를 “은 본래 당연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이는 진실로 저의 뜻과 부합합니다.” 하니, 이에 공경公卿 이하가 모두 진구의 의논을 따랐다.
節, 甫猶爭之어늘 復上疏曰 章德 虐害恭懷하고 安思家犯惡逆이로되 而和帝無異葬之議하고 順朝無貶降之文注+章德, 章帝后竇氏. 恭懷, 和帝母梁貴人. 安思, 安帝后閻氏.하니이다
】 그런데도 조절曹節왕보王甫가 여전히 논쟁을 하자, 이함李咸이 다시 다음과 같이 상소上疏하였다. “장덕황후章德皇后공회황후恭懷皇后를 잔혹하게 박해하였고, 안사황후安思皇后는 친정집에서 악역惡逆을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화제和帝가 장덕황후를 따로 장례한다는 의논을 하지 않았고, 순제順帝 때에도 안사황후를 폄하하는 글이 없었습니다.注+장덕章德장제章帝두씨竇氏이고, 공회恭懷화제和帝의 어머니인 양귀인梁貴人이고, 안사安思안제安帝황후皇后염씨閻氏이다.
今長樂 尊號在身하고 親嘗稱制하며 援立聖明하여 光隆皇祚하니 太后以陛下爲子어늘 陛下豈得不以太后爲母리오
지금 은 황태후의 존호尊號가 몸에 있었고 일찍이 직접 칭제稱制(대리청정代理聽政)를 하였으며, 성명聖明한 군주를 모셔다가 세워서 황제皇帝의 국통을 빛나게 하고 높였습니다. 태후太后폐하陛下를 아드님으로 삼으셨는데, 폐하께서 어찌 태후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子無黜母 臣無貶君이니 宜合葬宣陵하여 一如舊制니이다 帝從之하다
아들은 어머니를 내치지 않고 신하는 군주를 폄하하지 않으니, 마땅히 선릉宣陵(환제의 릉)에 합장合葬하여 한결같이 옛 제도와 같이 하여야 합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조령詔令을 내려 사례교위 유맹司隷校尉 劉猛을 논죄해서 좌교左校에서 노역하게 하였다.
有人 書朱雀闕하여 言曹節, 王甫 幽殺太后注+古今註 “永平二年十一月, 初作北宮. 朱雀, 南司馬門闕, 在宮門之外.”라하니 詔司隷劉猛하여 逐捕한대 以其言直이라하여 不肯急捕
】 어떤 사람이 주작궐朱雀闕(낙양 북궁雒陽 北宮의 남문)에 글을 써서 말하기를 “조절曹節왕보王甫태후太后를 유폐하여 죽였다.”注+에 “영평永平 2년(59) 11월에 처음 북궁北宮을 지었는데, 주작朱雀은 남쪽 사마문司馬門이니, 궁문宮門의 밖에 있었다.” 하였다. 하니, 조령詔令을 내려 사례교위 유맹司隷校尉 劉猛에게 〈글을 쓴 사람을〉 쫓아 체포하게 하였으나, 유맹은 그 말이 정직하다 하여 급히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
詔以段熲代猛하니 乃四出逐捕하여 及太學游生繫者千餘人이러라 奏猛論輸左校하다
이에 조령을 내려 단경段熲으로 유맹을 대신하게 하니, 단경이 마침내 사방으로 나가 추포追捕하여 태학太學의 유학생으로서 옥에 갇힌 자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유맹을 아뢰어 논죄해서 좌교左校에서 노역하게 하였다.
冬十月 殺渤海王悝하다
】 겨울 10월에 발해왕 유회渤海王 劉悝(유회)를 죽였다.
渤海王悝 以不道 貶爲廮陶王注+悝, 桓帝弟, 桓帝建和元年, 封渤海王, 延熹八年, 貶爲廮陶王. 廮, 於逞切. 廮陶縣, 屬鉅鹿郡.이러니 因王甫하여 求復國하여 許謝錢五千萬하다
처음에 발해왕 유회渤海王 劉悝가 대역무도한 죄로 폄출貶黜되어 영도왕廮陶王(영도왕)이 되었었는데注+유회劉悝환제桓帝의 아우이니, 환제 건화桓帝 建和 원년(147)에 발해왕渤海王에 봉해졌다가 연희延熹 8년(165)에 폄출되어 영도왕廮陶王이 되었다. 어령於逞이니, 영도현廮陶縣거록군鉅鹿郡에 속하였다.,
왕보王甫를 통하여 나라를 되찾을 것을 요구하면서 사례로 5,000만 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旣而 桓帝遺詔復之하니 悝以非甫功이라하여 不與한대
얼마 후, 환제桓帝유조遺詔를 내려 나라를 되돌려주니, 유회는 왕보의 이 아니라고 하여 사례하는 돈을 주지 않았다.
甫以中常侍鄭颯等 與悝交通이라하여 乃使段熲으로 收颯等하고 而奏颯等 謀迎立悝라하니
왕보는 중상시 정삽中常侍 鄭颯 등이 유회와 서로 내통했다 하여, 마침내 단경段熲으로 하여금 정삽 등을 체포하게 하고, 정삽 등이 유회를 맞이하여 황제로 세울 것을 도모했다고 아뢰었다.
詔冀州刺史收悝하여 迫令自殺하고 妃妾子女傅相以下百餘人 皆被誅하다 甫等十二人 以功封列侯하다
이에 조령詔令을 내려 기주자사冀州刺史에게 유회를 체포해서 위협하여 자살하게 하였고, 비첩妃妾자녀子女, 이하 100여 명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왕보 등 12명은 으로 열후列侯에 봉해졌다.
十一月 會稽妖賊許生 稱帝하다
】 11월에 회계會稽의 요망한 도적인 허생許生이 황제를 칭하였다.
◑鮮卑寇幷州하다
선비鮮卑병주幷州를 침략하였다.
역주
역주1 제가……것입니다 : 墓祭는 秦 始皇이 墓 옆에 寢을 세우고 제사하였는데, 漢나라가 그대로 따라서 여러 陵寢에 그믐과 보름, 24절기, 三伏 등에 밥을 올린 것을 말한다. 天子는 정월에 原陵에 올라가 배알하였다. 光武帝의 아들 明帝가 백관을 거느리고 원릉에 배알할 때 정월 초하루에 조회하는 의식과 똑같이 하였다. 그러나 이 예는 宗廟에서 행하는 예와 뒤바뀐 것으로 蔡邕이 예법에 어긋난다고 보았지만 그 예를 막상 보니 명제의 효성이 절실하다고 여긴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9권 하 漢 明帝 永平 원년(58)에 보인다.
역주2 산 자에……것이다 : 원문의 ‘致生之’는 죽은 자에게 살아 있는 자의 禮로 지극히 대하는 것이고, ‘致死之’는 살아 있는 자에게 죽은 자의 예로 지극히 대함을 이른다. ≪禮記≫ 〈檀弓 上〉에 “죽은 자를 보내면서 죽은 자의 禮로 지극히 대함은 仁하지 못한 것이어서 할 수 없고, 죽은 자를 보내면서 살아 있는 자의 예로 지극히 대함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어서 할 수 없다.[之死而致死之 不仁而不可爲也 之死而致生之 不知而不可爲也]”라고 한 孔子의 말씀이 보이는데, 陳澔의 ≪集說≫에 “죽은 자를 보내면서 죽은 자의 禮로 지극히 대하는 것은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 仁하지 못함이 되므로 행할 수가 없고, 죽은 자를 보내면서 살아 있는 자의 예로 지극히 대함은 이치를 아는 밝음이 없어서 지혜롭지 못함이 되므로 또한 행할 수가 없는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여기서는 이것을 원용하여 죽은 자의 體魄을 모신 陵墓에 제사를 지극히 지내면 이는 이치에 어두워 지혜롭지 못한 것이고, 죽은 자의 靈魂을 모신 사당에 제사를 극진히 지내지 않으면 이는 조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 仁하지 못한 것이라 한 것이다.
역주3 (二)[三] : 저본에는 ‘二’로 되어 있으나 ≪後漢書≫에 의거하여 ‘三’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衣車 : 옛날 귀족의 부녀자가 타던 수레로, 전면에는 문이 있고 후면에는 휘장 등을 설치하여 가려 눕고 휴식할 수 있었으며 의복 등을 겸하여 실었다.
역주5 祔해야……祔한다 : 妃妾은 신분이 미천하여 夫君의 사당에 祔할 수가 없으므로 죽은 妾祖姑(첩인 시할머니)에게 祔하고 없으면 다시 한 대를 건너 뛰어 妾高祖姑에게 祔한다. 祔廟한 神位는 제사 때에 配食한다.
역주6 長樂宮 : 漢나라 때 天子의 母親을 칭하던 말로, 여기서는 竇太后를 가리킨 것이다.
역주7 詔司隷校尉劉猛 論輸左校 : “이때 朱雀闕에 글을 써서 曹節과 王甫가 太后를 유폐하여 죽였다고 말한 자가 있었는데, 司隷校尉 劉猛에게 詔令을 내려 글을 쓴 사람을 체포하게 하였으나, 유맹은 그 말이 정직하다 하여 급히 체포하지 않았다. 段熲이 아뢰어서 유맹을 論罪하여 左校에서 노역하게 하였는데, 곧바로 ‘詔’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오로지 靈帝를 나쁘게 여긴 것이다. 어찌하여 영제를 나쁘게 여겼는가. 사람들이 조절과 왕보가 태후를 유폐하여 죽였다고 말했는데, 조절과 왕보의 죄를 다스리지 않고 사예교위를 죄주었으니, 황제는 진실로 무슨 마음인가. 이것을 가지고 황제의 병통으로 여겼기 때문에 특별히 ‘詔’라고 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詔令을 내려 논죄하여 노역하게 했다.’라고 쓴 것은 2번으로 李膺과 劉猛인데, 모두 그 임금을 나쁘게 여긴 것이다.[於是有書朱雀闕 言曹節王甫幽殺太后者 詔司隷逮捕 猛以其言直 緩之 段熲奏猛論輸左校 則其直書詔 何 專病靈也 曷爲病之 人言節甫幽殺太后 不治節甫而罪司隷 帝誠何心哉 以是爲帝病 故特書詔 終綱目 書詔輸作二 李膺劉猛 皆病其上也]다” ≪書法≫
역주8 古今註 : 晉나라 崔豹(?~?)가 撰한 것으로 모두 3권인바 服輿, 都邑, 音樂, 鳥獸 등에 대한 考證이다.
역주9 처음에……되었었는데 : 桓帝 延熹 8년(165)에 渤海王 劉悝가 불법을 저지르고 끝내 반란을 도모했는데, 有司가 폐출할 것을 청하였다. 환제가 유회를 廮陶王으로 강등시켰다.

자치통감강목(9)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