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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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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元嘉二十四年이요 魏太平眞君八年이라
春三月 하다
魏師之克敦煌也 沮渠牧犍 使人斫開府庫하여 取金玉及寶器注+敦煌當作姑臧.러니
至是하여 守藏者告之하고 且言曰 牧犍蓄毒藥潛殺人 前後以百數 姊妹皆學左道注+謂學曇無讖之術也.라한대
有司索其家하여 果得所匿物하니 魏主大怒하여 賜沮渠昭儀死하고 幷誅其宗族注+上十年, 牧犍送其妹興平公主于魏, 拜右昭儀.하다
又有告牧犍 猶與故臣民交通謀反者어늘 乃詔賜死하다
宋鑄大錢하다
宋主以貨重物輕으로 改鑄四銖錢하니 民多翦鑿古錢하여 取銅盜鑄어늘 江夏王義恭 建議하여 請以大錢一當兩한대 右僕射何尙之議호되
泉貝之興 以估貨爲本이니 事存交易이라 豈假多鑄注+錢本名泉, 言貨之流, 如泉也. 貝, 海介蟲也. 估, 音古, 直也.리오 數少則幣重이요 數多則物重이니 多少雖異 濟用不殊
況復以一當兩하여 徒崇虛價者邪 若今制遂行하면 富人之貲自倍 貧者彌增其困이니 懼非所以使之均一也니이다하니 宋主卒從義恭議하다
宋衡陽王義季卒하다
義季自義康之貶으로 遂縱酒不事事하여 以至成疾而終하다
冬十月 宋胡誕世據豫章反이어늘 討平之하다
胡藩之子誕世 殺豫章太守하고 據郡反하여 欲奉前彭城王義康爲主注+藩家于豫章.어늘 前交州刺史檀和之去官歸하여 過豫章이라가 擊斬之하다
楊文德據葭蘆하니 五郡氐皆應之注+魏取仇池, 置武都․天水․漢陽․武階․仇池五郡.하다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24년이고, 北魏 世祖 太武帝 拓跋燾 太平眞君 8년이다.
[綱] 봄 3월에 北魏가 沮渠牧犍을 죽였다.
[目] 注+① 敦煌은 마땅히 姑臧으로 써야 한다. 점령하였을 때 沮渠牧犍이 사람을 시켜 창고를 열어서 金玉과 寶器를 취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창고를 지키던 사람이 그 사실을 고발하고 또 말하기를 “저거목건이 독약을 쌓아두고서 몰래 죽인 사람이 전후로 백 명이요, 자매가 모두 左道를 배웠습니다.”注+② 〈“學左道”는〉 의 술법을 배운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有司가 집을 수색하여 과연 숨겨놓은 물건을 찾아내자, 魏主가 크게 노하여 沮渠昭儀(興平公主)를注+③ 위의 元嘉 10년(433)에 沮渠牧犍이 그 누이 興平公主를 北魏로 보냈는데, 에 제수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賜死하고 아울러 그의 종족을 주살하였다.
또 저거목건이 여전히 옛날 신하와 백성들과 내통하여 반역을 모의한다고 밀고한 자가 있었는데, 魏主가 마침내 詔書를 내려 賜死하였다.
[綱] 宋나라가 大錢을 주조하였다.
[目] 예전에 宋主가 화폐의 가치는 높고 물건의 가격이 낮은 것으로 인해 을 주조하였는데, 백성들이 대부분 옛날의 銅錢을 깎아내서 구리를 얻어 사사로이 동전을 주조하였다. 江夏王 劉義恭이 건의하여 大錢 1개로 1兩(24銖)에 해당하도록 하자고 요청하였는데, 右僕射 何尙之가 논의하였다.
“泉貝(화폐)가 만들어진 것은 물건 값을 계산하여 교역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은 것이니注+① 錢의 본래 명칭은 泉으로, 재화의 흐름을 말한 것이니, 샘과 같다. 貝는 바다에서 나는 갑각류이다. 估의 음은 古이니, 값이라는 뜻이다., 그 기능은 교역에 있는데 어찌 많은 화폐를 주조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화폐의 수량이 적으면 화폐의 가치는 높아지며, 화폐의 수량이 많으면 물건이 비싸지니, 화폐의 많고 적음이 비록 다르지만 그 용도는 다르지 않습니다.
하물며 다시 동전 하나로 1兩에 해당시켜서 가치만을 헛되이 높이려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지금의 제도를 시행한다면 부자들의 재화는 절로 갑절이 될 것이며, 가난한 사람들은 그 곤궁함이 더욱 증대될 것이니, 빈부를 균등하게 하는 방법이 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宋主가 결국 유의공의 의견을 따랐다.
[綱] 宋나라 衡陽王 劉義季가 卒하였다.
[目] 劉義季는 劉義康이 쫓겨나면서부터 마침내 술에 빠져 일을 하지 않다가 병에 걸려서 죽었다.
[綱] 겨울 10월에 宋나라 胡誕世가 豫章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目] 胡藩의 아들 胡誕世가 豫章太守를 죽이고 豫章郡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켜서注+① 胡藩은 豫章에 살았다. 前 彭城王 劉義康을 받들어 군주로 삼고자 하였다. 前 交州刺史 檀和之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豫章을 지나다가 그를 공격하여 목을 베었다.
[綱] 楊文德이 葭蘆를 점거하니 5郡의注+① 北魏가 仇池를 취하여 武都, 天水, 漢陽, 武階, 仇池 5郡을 설치하였다. 氐族이 모두 호응하였다.


역주
역주1 魏殺沮渠牧犍 : “北魏가 赫連定을 죽였을 때 ‘故夏主(前 夏나라 군주)’라고 기록했으나 沮渠牧犍은 ‘故涼王(前 北涼王)’인데 어찌하여 기록하지 않았는가. 이미 항복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姚泓(後秦)도 기록하지 않았고, 저거목건도 기록하지 않았으니, 모두 이미 항복했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의 기록하고 삭제함이 엄격하다.[魏殺赫連定 書故夏主 牧犍 故涼王也 則何以不書 已降也 是故姚泓不書 牧犍不書 皆已降也 綱目之筆削嚴矣]” ≪書法≫ 姚泓은 後秦의 마지막 임금이니 자세한 내용은 ≪자치통감강목≫ 제24권 상 羲熙 13년(417)에 보인다.
역주2 北魏……때 : 元嘉 16년(439) 9월에 姑臧城이 함락되자 沮渠牧犍이 문무 신료 5천 명을 거느리고 魏主 拓拔燾에게 항복한 일을 말한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208쪽에 보인다.
역주3 曇無讖 : 중인도 바라문 출신의 승려로, 達摩耶舍의 제자가 되어 小乘을 배우고 후에는 大乘에 전념하였다. 412년에 甘肅省 姑臧에 들어가 北涼王 沮渠蒙遜의 우대를 받으며 佛經을 번역하였다.
역주4 右昭儀 : 妃嬪의 칭호이다. 左昭儀와 右昭儀가 있었는데 지위는 皇后의 아래였다.(≪資治通鑑新注≫)
역주5 四銖錢 : 본서 138쪽에 보인다.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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