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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9)

자치통감강목(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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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申年(156)
二年이라 春三月 蜀郡屬國夷反注+安帝延光二年, 以蜀郡西部都尉爲屬國都尉.하다
◑秋 鮮卑檀石槐 寇雲中이어늘 以李膺爲度遼將軍하다
鮮卑檀石槐 勇健有智略하니 部落 畏服이라 施法禁하고 平曲直하니 無敢犯者하여 遂推以爲大人하다
立庭於彈汗山하니 去高柳北三百餘里 東西部大人 皆歸焉하니
因南抄緣邊하고 北拒하고 東郤夫餘하고 西擊烏孫하여 盡據匈奴故地하여 東西萬四千餘里
至是하여 入寇어늘 以故烏桓校尉李膺으로 爲度遼將軍하니 到邊 羌, 胡皆望風畏服하여 先所掠男女 悉詣塞下送還之러라
以韓韶爲하다
公孫擧等 聚衆至三萬人하여 寇靑, 兗, 徐州어늘 討之連年호되 不克이라
尙書選能治劇者하여 以韶爲嬴長注+劇, 竭戟切, 艱也, 尤甚也. , 音盈, 字或作嬴. 嬴縣, 屬泰山郡.하니 聞其賢하고 相戒不入境하니라
流民萬餘戶 入縣界어늘 韶開倉賑之한대 主者爭不可注+主者, 主倉粟之吏也.라하니 韶曰 長 活溝壑之人이라가 而以此伏罪 含笑入地矣리라
韶與同郡荀淑, 鍾皓, 陳寔으로 皆嘗爲縣長하여 以德政稱하니 時人 謂之潁川四長注+謂荀淑爲當塗長, 韓韶爲嬴長, 陳寔爲大丘長, 鍾皓爲林慮長也.이라하니라
遣中郞將段熲하여 擊泰山琅邪群盜하여 平之하다
鮮卑寇遼東이어늘 屬國都尉段熲 率所領馳赴之注+熲, 古逈切.하다 旣而 恐賊驚去하여 乃使驛騎 詐齎璽書詔熲하고 僞退設伏이러니
虜反追어늘 因大縱兵하여 悉斬獲之하다 至是하여 詔選將帥有文武材者한대 司徒尹頌 薦熲이어늘 拜中郞將하여
擊二郡賊하여 大破之하고 斬其帥公孫擧, 東郭竇하고 獲首萬餘級하니 餘黨이어늘 封熲爲列侯하다
冬十二月 地震하다


병신년丙申年(156)
나라 효환황제 영수孝桓皇帝 永壽 2년이다. 봄 3월에 촉군속국蜀郡屬國의 오랑캐가 배반하였다.注+안제 연광安帝 延光 2년(123)에 촉군서부도위蜀郡西部都尉속국도위屬國都尉로 삼았다.
】 가을에 선비鮮卑단석괴檀石槐운중雲中을 침략하자, 이응李膺으로 삼았다.
】 처음에 선비鮮卑단석괴檀石槐가 용맹하고 건장하고 지략智略이 있으니, 부락部落(부족)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였다. 그가 법금法禁을 시행하고 곡직曲直(잘잘못)을 공평하게 처리하자, 감히 하는 자가 없어 마침내 대인大人으로 추대하였다.
단석괴가 탄한산彈汗山에 조정을 세우니 고류高柳 북쪽과의 거리가 300여 리였는데, 동부東部서부西部대인大人이 모두 그에게 귀의하였다.
이에 남쪽으로 변방을 노략질하고, 북쪽으로 정령丁零을 막고, 동쪽으로 부여夫餘를 물리치고, 서쪽으로 오손烏孫을 공격하여 흉노匈奴의 옛 땅을 모두 점거해서 동서로 14,000여 리에 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단석괴가 운중雲中을 침입하자, 이전의 오환교위 이응烏桓校尉 李膺도료장군度遼將軍으로 삼았다. 이응이 변경에 이르자, 강족羌族호족胡族들이 모두 그의 기세를 보고 두려워 복종해서, 예전에 노략했던 남자와 여자를 모두 변방 아래로 데리고 와서 송환送還하였다.
한소韓韶영장嬴長(현장縣長)으로 삼았다.
공손거公孫擧 등이 3만 명에 달하는 무리를 모아 청주靑州, 연주兗州, 서주徐州를 침략하였는데, 몇 년 동안 토벌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상서尙書에서는 어려운 일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를 선발하여 한소韓韶영장嬴長으로 삼으니注+갈극竭戟이니, 어려움이요 더욱 심함이다. 은 음이 으로 글자를 혹 영현嬴縣태산군泰山郡하였다., 도적들은 그가 어질다는 말을 듣고 서로 경계하여 의 경내로 들어오지 않았다.
유민流民 1만여 가 현의 경내로 들어오자 한소가 창고를 열어 구휼하니, 창고를 주관하는 자가 불가不可하다고 간쟁하였다.注+주자主者”는 창고의 곡식을 주관하는 관리이다. 한소가 말하기를 “현장縣長인 내가, 굶어 죽어 시신이 골짜기에 들어갈 사람들을 살리다가 이로써 죄를 받는다면, 웃음을 머금고 지하로 들어가겠다.” 하였다.
한소는 같은 순숙荀淑, 종호鍾皓, 진식陳寔과 모두 일찍이 현장縣長이 되어서 덕정德政을 베푼 것으로 알려지니, 당시 사람들이 ‘영천潁川의 네 분 현장縣長’이라고 하였다.注+순숙荀淑당도장當塗長이 되고, 한소韓韶영장嬴長이 되고, 진식陳寔태구장太丘長이 되고, 종호鍾皓임려장林慮長이 된 것을 이른다.
중랑장 단경中郞將 段熲(단경)을 보내 태산泰山낭야琅邪의 여러 도적 떼를 공격해서 평정하였다.
】 처음에, 선비鮮卑요동遼東을 침략하자, 속국도위 단경屬國都尉 段熲이 휘하의 병력을 거느리고 달려갔다.注+고형古逈이다. 이윽고 단경은 들이 놀라 떠나갈까 염려해서 마침내 역기驛騎(파발마의 기병)로 하여금 거짓으로 황제의 친서를 보내 단경에게 조령詔令을 내리게 하니, 단경이 거짓으로 후퇴하면서 매복을 설치하였다.
오랑캐들이 되돌아와서 추격하자, 단경이 인하여 크게 군대를 풀어 모두 참수하거나 생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조령을 내려 장수 중에 문무文武의 재질이 있는 자를 선발하게 하자, 사도 윤송司徒 尹頌이 단경을 천거하니, 중랑장中郞將을 제수하였다.
그리하여 태산泰山낭야琅邪의 적을 공격해서 대파大破하고 그 우두머리인 공손거公孫擧동곽두東郭竇를 참수하고 1만여 명의 수급首級을 얻으니, 잔당들이 항복하였다. 이에 단경을 하여 열후列侯로 삼았다.
】 겨울 12월에 지진이 있었다.


역주
역주1 度遼將軍 : 漢 明帝 永平 8년(65)에 大司農 耿國의 上言에 따라 설치한 것으로 五原에 주둔하면서 南匈奴를 감시하는 직책이다.
역주2 丁零 : 史書에는 丁令, 釘靈, 丁靈 등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바이칼호 일대에서 유목활동을 하였다. 이는 후대 튀르크계 유목족인 鐵勒의 선조로 보는 설이 있다.(≪後漢書 外國傳 譯註≫)
역주3 嬴長 : “邑長일 뿐인데 어찌하여 썼는가. 어짊을 기록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 縣長을 쓴 것이 4번(岑彭, 虞詡, 韓韶, 陳寔)이니, 모두 어짊을 기록한 것이다.[邑長耳 何以書 錄賢也 綱目書長四(岑彭 虞詡 韓韶 陳寔) 皆錄賢也]다” ≪書法≫
역주4 嬴은……쓰니 :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嬴’을 잘못 ‘’으로 표기하였다. 이 때문에 ≪訓義≫에 ‘’을 혹 ‘嬴’으로 쓴다고 표기한 것이다. 현재 통용자는 ‘嬴’이므로 “ 音盈 字或作嬴”을 제외하고 다른 곳은 통용자인 ‘嬴’으로 썼다.

자치통감강목(9)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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