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目】 초왕 유영楚王 劉英이 단양丹陽에 이르러 자살하니, 조령詔令을 내려 제후왕의 예禮로 경현涇縣에 장례하게 하고, 연광燕廣을 봉하여 절간후折姦侯로 삼았다. 이때에 초왕楚王의 옥사를 끝까지 다스리느라 결국 여러 해가 지나니,
죄상을 자백하는 말이 서로 연관되어서 경사京師에 있는 친척親戚과 제후諸侯, 주군州郡의 호걸豪傑로부터 옥사를 조사한 관리에 이르기까지 아부한 죄에 연좌되어 죽거나 귀양 간 자들이 천 명으로 헤아려졌고, 감옥에 갇혀 있는 자가 또한 수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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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유영은 은밀히 천하의 명사名士들을 조목조목 기록해 상上이 그 기록을 얻어서 보니, 오군태수 윤흥吳郡太守 尹興의 이름이 적혀 있으므로 마침내 윤흥과 연사掾史 500여 명을 불러서 정위廷尉에게 나와 조사를 받게 하였다.
오군吳郡의 여러 관리들 중에 고문을 이기지 못해서 죽은 자가 태반이었는데, 오직 문하연 육속門下掾 陸續과 주부 양굉主簿 梁宏, 공조사 사훈功曹史 駟勳이 다섯 가지 혹형酷刑을 골고루 받아서 살이 모두 문드러졌으나 끝내 다른 말이 없었다.注+문하연門下掾은 군郡의 문하에 있으니 여러 일을 총괄하여 기록하고, 공조사功曹史는 공로에 따라 선발하여 등용하는 일을 주관한다. “오독五毒”은 사지와 몸통에 골고루 혹형酷刑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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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육속陸續의 어미가 오군吳郡에서 낙양雒陽으로 와서 밥을 지어 옥獄으로 들여보냈다. 육속은 조사를 받으면서도 일찍이 말투와 얼굴빛이 변한 적이 없었는데, 밥상을 대하자 슬픔을 참지 못하고 슬피 울었다.
옥사를 다스리는 자가 그 이유를 묻자, 육속이 대답하기를 “어머니가 오셨는데, 뵐 수가 없으므로 슬퍼하는 것이다.” 하였다. 옥리가 “어떻게 어머니가 오신 줄 아는가?” 하고 물으니,
육속이 대답하기를 “어머니는 고기를 자를 적에 일찍이 방정方正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파를 자를 적에 한 촌寸(치)을 기준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하였다. 사자使者가 이 내용을 보고하자, 상上은 마침내 윤흥尹興 등을 사면하였는데 종신토록 금고禁錮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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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안충顔忠과 왕평王平은 수향후 경건隧鄉侯 耿建, 낭릉후 장신朗陵侯 臧信, 확택후 등리濩澤侯 鄧鯉, 곡성후 유건曲成侯 劉建이 연루되었다고 말하였으나注+경순耿純의 아우 경숙耿宿이 수향후隧鄕侯에 봉해졌으니, 경건耿建은 아마도 경숙耿宿을 뒤이어 봉해진 자일 것이다. 낭릉朗陵은 현縣의 이름이니 여남군汝南郡에 속하였다. 장신臧信은 장궁臧宮의 아들이다. 등리鄧鯉와 유건劉建은 모두 상고할 만한 것이 없다. 호濩은 호맥胡陌의 절切이다. 확택후濩澤侯의 나라는 하동군河東郡에 속하고 곡성후曲成侯의 나라는 동래군東萊郡에 속하였다., 경건 등은 일찍이 안충과 왕평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이에 상上이 몹시 노하니, 관리들이 모두 황공해하여 연좌된 자들을 일체 법망에 빠뜨려 넣어서 감히 정상情狀에 따라 용서한 자가 없었다.
시어사 한랑侍御史 寒朗이 그들의 억울함을 가슴 아파하여注+시어사侍御史는 불법을 살펴 들춰내고 공경公卿과 군郡의 관리가 일을 아뢰는 것을 접수할 적에 잘못이 있으면 들어 탄핵하였다. 한寒은 성姓이다. 시험 삼아 경건 등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홀로 안충과 왕평에게 묻자, 두 사람이 창졸간에 놀라 대답하지 못하였다.注+“물색物色”은 모습을 그린 것을 이른다. 조錯은 칠고七故의 절切이고, 악愕은 회㦍과 통하며 오고五故의 절切이니, “착악錯愕”는 창졸倉卒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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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한랑寒朗은 이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상언上言하기를 “경건耿建 등은 잘못한 것이 없고 안충顔忠과 왕평王平에게 모함을 당한 것뿐이니, 아마도 천하에 죄가 없는 자들이 이처럼 죄에 걸려든 경우가 많을 듯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묻기를 “만일 이와 같다면 안충과 왕평이 무슨 연고로 이들을 끌어들였는가?” 하니, 한랑이 대답하기를 “안충과 왕평이 자신들이 범한 죄가 부도덕함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거짓으로 사람들을 많이 끌어들여서 자신들이 부도덕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려 한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만약 이와 같다면 그대가 어찌 일찍 아뢰지 않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臣은 해내海內에 그들의 죄를 적발하는 자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노하여 말하기를 “이 관리가 결단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하고는, 곧장 끌어내 곤장을 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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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좌우가 막 한랑寒朗을 끌고 가려 하였는데, 한랑이 말하기를 “한 말씀 올리고 죽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황제가 묻기를 “누구와 이 글을 지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신臣이 홀로 지었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삼부三府와 상의하지 않았는가?”注+삼부三府는 태위부太尉府, 사도부司徒府, 사공부司空府이다. 하니, 대답하기를 “신臣은 마땅히 멸족을 당할 줄을 알아서 감히 사람을 많이 연루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말하기를 “무슨 연고로 멸족을 당한단 말인가?” 하니, 한랑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신臣이 옥사를 조사한 지 1년에 간악한 내용을 다 밝혀내지 못하고 도리어 죄인들을 위해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있으니, 마땅히 멸족을 당할 줄을 아는 것입니다.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니, 아래의 “위제爲帝”도 같다.
그러나 신臣이 이것을 말씀드리는 이유는 진실로 폐하께서 크게 깨닫기를 바라서일 뿐입니다. 신臣이 이 일에 연좌된 죄수들을 조사하는 자들을 보니,
모두 함께 말하기를 ‘요망한 악인과 나라의 큰 죄수는 신자臣子가 응당 함께 미워해야 할 바이니, 지금 이들을 내보내는 것은 죄망에 집어넣는 것만 못하다. 이렇게 하여야 후일의 책망이 없을 것이다.’注+고故는 일이요 죄수이다. “출지불여입지出之不如入之”는 〈죄인에게〉 죄를 면제해주는 것이 죄에 들여 넣는 것만 못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한 사람을 조사하면 열 사람이 연루되고 열 사람을 조사하면 백 사람이 연루되는 것입니다. 또 공경公卿들이 조회할 적에 폐하께서 정치의 득실을 물으시면 모두 오랫동안 무릎 꿇고 말하기를
‘옛 제도에 큰 죄는 화가 구족九族에 미쳤는데, 지금은 폐하의 큰 은혜로 겨우 죄인 자신에게만 화가 그치니, 천하에 매우 다행입니다.’注+재裁(겨우)는 재纔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서는, 비록 입을 닫고 말하지 않으나 지붕을 쳐다보며 속으로 한탄하면서 억울한 옥사가 많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폐하의 말씀을 거스르지 못하는 것입니다.注+오牾는 오고五故의 절切로 거스름이니, 혹 오忤로도 쓴다.
신臣이 지금 이 말씀을 아뢰었으니, 진실로 죽어도 후회가 없습니다.” 황제의 마음이 풀려서 명하여 한랑을 내보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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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틀 뒤에 거가車駕(황제)가 직접 낙양洛陽의 옥獄에 행차하여 갇혀 있는 죄수들을 살펴 기록해서 천여 명을 조사하여 내보냈는데, 이때 날이 가물다가 즉시 비가 내렸다.注+“녹수도錄囚徒”는 살펴 기록해서 그 정상에 억울한지의 여부가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마후馬后 또한 초왕楚王의 옥사에 억울한 자가 많다고 하여 틈을 타서 황제에게 말하니, 황제가 측연惻然히 감동하여 깨닫고는 밤중에 일어나 방안을 배회하였다. 이로 인해 죄를 감하여 사면해준 자가 많았다.注+“방황彷徨”은 스스로 편안하지 못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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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임성령 원안任城令 袁安이 초군태수楚郡太守로 승진하였는데注+임任은 음이 임壬이니, 임성현任城縣은 동평국東平國에 속하였다., 군郡에 부임하자 관사[부府]에 들어가지 않고 먼저 가서 초왕 유영楚王 劉英의 옥사獄事를 조사하여 분명한 증거가 없는 자들을 다스려서 조목별로 올리고 내보냈다.
부승府丞과 연사掾史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간쟁하기를 “배반한 역적에게 아부하는 것은 법률에 의하면 똑같이 죄를 받게 되어 있으니, 불가합니다.” 하였다.
원안이 말하기를 “만약 합당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태수太守인 내가 마땅히 죄를 받을 것이요, 그대들에게 죄가 미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죄인들을 분별하여 자세히 아뢰었다.
袁安(≪古聖賢像傳略≫)
황제가 감동하여 깨닫고 즉시 허락하는 답을 내리니, 출옥한 자가 400여 집안이었다.
綱
【강綱】 처음으로 수릉壽陵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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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 수릉壽陵을 만들 적에 다음과 같이 제령制令을 내렸다. “겨우 물이 흘러가게 하여 봉분을 크게 일으키지 말라. 그리고 내가 죽은 뒤에 땅을 쓸고 제사할 적에는 한 사발의 물과 포와 말린 밥만 올리도록 하라.注+우杅는 음이 우于로 본래 우盂로 쓰니, 마시는 그릇이다. ≪방언方言≫에 “완盌(사발)을 우盂라 한다.” 하였다.
죽은 지 100일이 지나면 사시四時에만 제수를 올리고 관리와 병졸 몇 사람만을 능에 배치해두어서 청소하게 하라. 감히 크게 공사를 일으키는 자가 있으면 멋대로 종묘宗廟의 일을 의논한 법으로 처리하도록 하라.”注+≪한서漢書≫에 “종묘宗廟의 일을 멋대로 의논한 자는 기시형棄市刑에 처한다.” 하였다.
역주
역주1藩戚 :
천자의 친척 중 侯王에 봉해지거나 외지로 나가 한 구역의 重責을 맡은 사람을 이른다.
역주2故楚王英自殺 :
“劉英이 이미 폐위가 되었는데도 작위를 쓴 것은 전에 이미 그의 죄가 있음을 써서 단죄한 것이 이미 분명하기 때문이다.[英已廢矣 而猶書爵 蓋前旣書其有罪 所斷已明故也]” ≪發明≫
역주4(愕)[㦍] :
저본에는 ‘愕’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㦍’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含)[舍] :
저본에는 ‘含’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舍’로 바로잡았다.
역주6初作壽陵 :
“‘初作’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늦다는 말이니, 황제가 이때 즉위한 지 14년이 되었으므로 ‘初’라고 쓴 것이다. 兩漢 시대에 陵을 만들 적에 ‘初’라고 쓴 것이 3번이니, 모두 오랜 뒤에야 만든 경우이다.[初作 何 緩辭也 帝於是卽位十四年矣 故書初 兩漢作陵 書初三 皆久而後作者也]” ≪書法≫ 壽陵은 임금이 생전에 자신의 陵寢을 미리 만드는 것을 말한다. 임금이 아직 죽지 않아서 능침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으므로, 이 무덤에 들어갈 대상이 오래 살라는 의미로 壽陵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