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이 끝내 재물을 내어 현관縣官(국가)을 돕지 않았는데, 이때에 양가楊可가 민전緡錢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은 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사람을 풀어놓아 고발하게 하였다.注+양楊은 성姓이고 가可는 이름이다. 한漢나라에 고민령告緡令이 있었으니, 양가楊可가 이를 주관하였다. 무릇 상고商賈의 거적居積(저축)과 기교技巧로 물건을 만드는 집으로서 농사짓고 누에 쳐서 생산한 것이 아닌 것을 일러 민緡이라 하였다. 종縱은 풀어놓음이니, 납부해야 할 민전緡錢이 보통보다 많은 사람 중에 돈을 내지 않는 자가 있으면, 사람을 풀어놓아 서로 고발하게 한 것이다.
양가가 민전緡錢을 고발하도록 한 자들이 천하에 두루 널려 있어서 중가中家(중등中等의 가호家戶) 이상이 대부분 모두 고발을 당하니, 두주杜周가 이것을 다스렸으나 옥사獄事를 뒤집은 경우가 적었다.注+“중가中家”는 가난하고 부유한 중간에 위치한 자를 이르고, “이상以上”은 부유한 집을 이른다. “우고遇告”는 고발을 당한 것이다. 번反(뒤집다)은 음이 번幡이니, 죄인의 옥사를 뒤집어 가벼운 죄를 따르게 하는 것이다. 민전緡錢을 숨긴 죄를 다스릴 적에 옥사를 뒤집은 경우가 적음을 말한 것이다.
어사御史와 정위廷尉의 정正, 감監을 나누어 군국郡國에 보내어 군국郡國의 민전緡錢의 죄를 다스려서 백성들의 재물과 노비奴婢를 얻은 것이 억만으로 계산되었고 전택田宅도 이와 같았다.注+정위廷尉에는 정正이 있고 좌감左監과 우감右監이 있었다. “즉치卽治”는 있는 곳(소재지)에 나아가 죄를 다스리는 것이다.
이에 상고商賈의 중가中家 이상이 모두 파산하였고 백성들은 구차히 호의호식하기만 하여 저축하는 산업을 일삼지 않았다.注+투婾는 투偸와 통하니, 구차함이다. “축업畜業”은 저축하는 산업이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스스로 생업을 보전하지 못하여, 모두 구차히 호의호식하면서 당장 사는 것에만 급급하고, 다시 장구한 계책을 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내사內史의종義縱이 말하기를 “이것은 백성들을 어지럽히는 행위이다.” 하였고, 부하 관리가 양가의 사자使者를 체포하였다.注+부部는 통솔과 같다. “위가사자爲可使者”는 양가楊可의 사자使者가 된 자를 이른다.
이에 상上은 ‘의종이 조령을 폐지하고 일을 저해했다.’ 하여 의종을 기시棄市하였다.注+격格은 각閣으로 읽으니 저지함이요, 저沮는 파괴(저해)함이다. 황제가 양가楊可로 하여금 고민령告緡令을 주관하여 재물을 적몰하게 하였는데, 의종義縱이 도리어 양가의 사자를 체포하였으니, 이는 조령을 폐지하고 일을 저해하여 실패하게 한 것이다.
綱
[綱] 여름 4월에 종묘宗廟에서 책명策命하여 아들 유굉劉閎을 제왕齊王으로 세우고 유단劉旦을 연왕燕王으로 삼고 유서劉胥를 광릉왕廣陵王으로 삼았으며, 처음으로 고책誥策을 만들어 왕들을 고명誥命(훈계)하였다.注+묘廟는 종묘宗廟 안에서 왕王으로 세워 책명策命한 것이다. 왕王에게 고칙誥勅을 내리기를
안이가 대답하기를 “지금 왕王‧후侯가 조하朝賀할 적에 푸른 벽옥璧玉을 사용하되 값이 수천 전錢인데, 그 가죽의 깔개가 도리어 40만 전이어서 본本과 말末이 서로 걸맞지 않습니다.” 하니, 상上이 좋아하지 않았다.注+당시에 왕王‧후侯가 조하朝賀할 적에 피폐皮幣를 가지고 벽옥璧玉 밑에 깔았으므로 “피천皮薦(가죽 깔개)”이라 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안이를 다른 일로 고발하였으므로 장탕張湯에게 회부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안이가 어떤 손님과 말할 적에, 손님이 ‘처음 명령이 내려졌을 적에 불편한 점이 있다.’注+《한서漢書》 〈식화지食貨志〉에 “안이顔異가 손님과 말할 적에, 손님이 조령詔令이 처음 내려졌을 적에 불편한 부분이 있음을 말하였다.” 하였다.고 하였으나, 안이는 대꾸하지 않고 입술을 약간 삐죽이 내보였다.注+〈“미반순微反脣(입술을 삐죽이 내보이다)”은〉 조령詔令을 비난한 것이다.
장탕이 안이의 해당하는 죄를 아뢰기를, ‘안이는 명령이 불편함을 보고서 들어와 말하지 않고 뱃속으로 비난했다.’ 하여 죽을죄로 논하니, 이 뒤로부터 뱃속으로 비방하는 법률의 조례가 생겨서 공公, 경卿, 대부大夫로서 윗사람에게 아첨하여 환심을 얻어서 일신의 편안함을 구하는 자가 많았다.注+비比는 법률의 조례이다.
역주
역주1卜式을 높였으나 :
卜式을 中郞으로 삼고 左庶長을 하사한 것이 본서 133쪽에 보인다.
역주2廟立 :
“‘廟에서 王으로 세웠다.[廟立]’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처음 시작함을 기록한 것이다. 이로부터 〈廟立이라고〉 쓴 것이 없는 것은 생략한 것이다.[書廟立 何 志始也 自是無書者 略之也]” 《書法》
역주3尙書의 여러 誥命 :
尙書는 《書經》을 가리키며, 誥命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太子나 신하에게 告하는 것으로 仲虺之誥와 湯誥ㆍ大誥ㆍ康誥ㆍ酒誥 등의 글을 이른다.
역주5大司馬票騎大將軍冠軍侯霍去病 :
“丞相 灌嬰으로부터 시작하여 승상이 卒하였을 적에 官爵과 姓을 쓰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大司馬 票騎大將軍 冠軍侯 霍去病’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功이 있는 자를 높인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兩漢의 여러 신하가 卒했을 적에 관작과 姓을 갖추어 쓴 것은 美稱이고, 姓을 쓰지 않은 것은 일반적인 말이고, 관작을 쓰지 않은 것은 죄가 있다고 여긴 것이다. 兩漢의 여러 신하가 卒했을 적에 관작을 쓰고 姓을 쓴 자가 37명인데, 그중에 官爵과 姓을 모두 갖추어 쓴 자가 16명이다.[自丞相嬰始 丞相卒 不書爵姓矣 此其書大司馬票騎大將軍冠軍侯霍去病 何 尊有功也 綱目於兩漢諸臣卒 具官爵姓者 美稱也 不書姓者 恒稱也 惟不書官者 爲罪之 兩漢諸臣卒 書官爵書姓者三十七 而官爵姓皆具者 十有六]” 《書法》
역주6殺大農令顔異 :
“顔異의 죽음은 다만 皮幣의 폐해를 대답하였다가 황제의 뜻에 거슬렸기 때문인데, 張湯이 ‘마음속으로 비방했다.’고 논죄하였으니, 秦나라에서 政事에 대한 비방과 두 사람 이상의 대화를 금한 것에 비해도 거의 더 심한 듯하다. 죄로써 죽지 않았기 때문에 ‘殺’이라 쓰고 그 관직을 제거하지 않은 것이다.[顔異之死 特因對皮幣忤旨 而張湯論以腹誹 其視秦禁誹謗偶語 殆又甚之 死不以罪 故書殺而不去其官]” 《發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