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4)

자치통감강목(4)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庚申年(B.C. 121)
二年이라
春三月 丞相弘커늘 以李蔡爲丞相하고 張湯爲御史大夫하다
◑ 以霍去病爲票騎將軍하여 擊匈奴러니 敗之하고
霍去病 爲票騎將軍注+去病, 前爲票姚校尉, 尙取其義, 票騎將軍始此.하여 將萬騎하고 出隴西하여 擊匈奴할새 轉戰六日 過焉支山千餘里注+轉戰, 轉相戰鬪也. 焉, 音煙. 括地志 “焉支山, 一名刪丹山, 在甘州刪丹縣東南五十里.”하여 斬首虜獲 甚衆하고 收休屠王祭天金人注+休, 許虯切. 屠, 音儲. 休屠, 匈奴所封王地. 後降漢, 帝開置縣, 屬武威郡. 祭天金人, 作金人, 以爲天神之像而祭之, 後之佛像, 是其遺法也.하다
復與公孫敖 將數萬騎하여 俱出北地하고 張騫, 李廣 俱出右北平이러니 去病 深入二千餘里하여 踰居延하고 過小月氏하여 至祁連山하여 斬首三萬하고 虜獲尤多어늘 益封五千戶注+居延, 匈奴中水名, 卽古流沙. 帝開置縣, 屬張掖郡.하다
是時 諸宿將所將兵 皆不如去病注+宿, 舊也.이요 去病所將 常選注+謂常選取驍銳.이라
이나 亦敢深入하여 常與壯騎 先其大軍注+先, 悉薦切.하고
軍亦有天幸하여 未嘗困絶也하며 而諸宿將 常留落不偶注+留, 謂遲留. 落, 謂墜落. 故不諧耦而無功也.하니 由此 去病 日以親貴하여 比大將軍矣러라
匈奴渾邪王이어늘 置五屬國하여 以處其衆하다
匈奴單于怒渾邪, 休屠王 爲漢所殺虜數萬人하여 欲召誅之注+渾, 下昆切. 邪, 時遮切. 渾邪, 匈奴之屬爲王者.하니
渾邪王與休屠王하여 謀降漢이러니 休屠王 後悔한대 渾邪王 殺之하고 幷其衆以降하다
發車二萬乘하여 迎之하니 縣官無錢하여 從民貰馬호되 民或匿馬하여 馬不具注+貰, 音世, 貸也. 不具, 不能備也.
하여 欲斬長安令한대 右內史汲黯曰 長安令 無罪하니 獨斬臣黯이라야 民乃肯出馬하리이다
且匈奴畔其主而降漢하니 徐以縣次傳之注+徐, 緩也. 傳, 遞送也.어늘 何至令天下騷動하여罷敝中國하여 而以事夷狄之人乎잇가
默然이러라
及渾邪至 賈人與市者 坐當死五百餘人이라
請間하여
夫匈奴攻當路塞하고 絶和親이어늘 中國 興兵誅之하여 死傷者不可勝計 而費以巨萬百數注+巨萬百數, 卽數百鉅萬也.니이다
臣愚 以陛下得胡人이면 皆以爲奴婢하여 以賜從軍死事者家러니
今反虛府庫賞賜하고 發良民侍養하여 譬若奉驕子注+養, 去聲.하시니
愚民 安知市買長安中物이완대 而文吏繩以爲闌出財物于邊關乎注+闌, 妄也. 律 “胡市, 吏民不得持兵器及錢出關, 雖於京師市買, 其法一也.”잇가
陛下縱不能得匈奴之資以謝天下 又以微文으로 殺無知者五百餘人注+文, 法也.하시니 是所謂庇其葉而傷其枝者
竊爲陛下不取也하노이다
默然不許하고注+不許, 謂不許有司所奏. 吾久不聞汲黯之言하여 今又復妄發矣로라
居頃之 乃分徙降者邊五郡故塞外하고 因其故俗하여 爲五屬國注+邊, 近也. 五郡, 謂隴西ㆍ北地ㆍ上郡ㆍ朔方ㆍ雲中也. 故塞, 謂秦之先, 與匈奴所關之塞也. 正義曰 “以來降之民, 徙置五郡, 各依本國之俗而屬於漢, 故曰屬國.”하니
而金城河西 西竝南山至鹽澤 空無匈奴注+句.하여 時有候者到而希矣注+河水, 出金城河關縣西南塞外積石山, 東流逕金城郡界, 自允吾以西, 通謂之金城河, 渡河而西, 則武威等四郡之地. 然金城郡, 昭帝於元始六年方置, 史追書也. 南山, 卽連終南山, 從京南而西, 連接至蔥嶺萬餘里, 故云竝南山也. 空, 猶言絶也.러라
休屠王太子日磾 沒入官하여 輸黃門養馬注+磾, 丁奚切. 黃門, 屬少府, 職任親近, 以供天子, 百物在焉.러니 帝遊宴見馬할새 後宮滿側이라
日磾等數十人 牽馬過殿下라가 莫不竊視호되 至日磾하여는 獨不敢注+游宴見馬, 言方於游宴之時, 而召閱諸馬. 視, 視宮人也.하다
日磾長八尺二寸이요 容貌甚嚴하고 馬又肥好注+長, 直亮切.하니 奇焉하여 卽日 賜湯沐, 衣冠하여 拜爲馬監이라가 遷侍中, 駙馬都尉, 光祿大夫하여 甚信愛之注+黃門, 有馬監‧狗監. 駙馬都尉, 帝所置, 駙, 副馬也. 非正駕車, 皆爲副馬. 一曰 “駙, 近也, 疾也.” 光祿大夫, 本中大夫, 帝改其名.
貴戚 多竊怨曰 陛下妄得一胡兒하여 反貴重之라호대 愈厚焉하고 以休屠作金人하여 爲祭天主 賜日磾姓金氏하다


경신년(B.C. 121)
[綱] 나라 세종世宗 효무황제孝武皇帝 원수元狩 2년이다.
봄 3월에 승상丞相 공손홍公孫弘하였으므로 이채李蔡승상丞相으로 삼고 장탕張湯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았다.
[綱] 곽거병霍去病표기장군票騎將軍으로 삼아 흉노匈奴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흉노匈奴를 패퇴시키고 언지焉支(연지)를 지나 기련산祁連山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目] 곽거병霍去病표기장군票騎將軍이 되어注+곽거병霍去病이 예전에 표요교위票姚校尉를 지냈는데 여전히 표요票姚라는 뜻을 취한 것이니, 표기장군票騎將軍이라는 이름이 이때 시작되었다. 1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농서隴西로 출동하여 흉노匈奴를 공격할 적에, 이동하면서 전투한 지 6일 만에 언지산焉支山(연지산) 천여 리를 지나가서注+전전轉戰”은 계속 이동하면서 서로 전투하는 것이다. 은 음이 이니, 《괄지지括地志》에 “언지산焉支山은 일명 산단산刪丹山인데, 감주甘州 산단현刪丹縣 동남쪽 50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수급을 베고 노획虜獲한 것이 매우 많았으며, 휴도왕休屠王(휴저왕)이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儀式을 받는 금인金人을 거두어 왔다.注+허규許虯이고, 는 음이 이니, “휴도休屠”는 흉노匈奴가 봉한 제후왕의 땅이다. 뒤에 나라에 항복하니, 황제가 을 처음 설치하여 무위군武威郡에 속하게 하였다. ‘제천금인祭天金人’은 금인金人을 만들어 천신天神으로 삼아 제사한 것이니, 후일 불상佛像이 바로 그 남은 법이다.
여름에 곽거병은 다시 공손오公孫敖와 함께 수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북지北地에서 출격하였고, 장건張騫이광李廣은 함께 우북평右北平에서 출격하였는데, 곽거병은 2천여 리를 깊이 쳐들어가서 거연居延을 넘어 를 지나 기련산祁連山에 이르러서 3만 명의 수급을 베고 노획한 것이 더욱 많았으므로, 5천 호를 더 봉해주었다.注+거연居延흉노匈奴 지역에 있는 물 이름이니, 바로 옛 유사流沙이다. 황제(무제武帝)가 을 처음 설치하여 장액군張掖郡에 속하게 하였다.
이때에 여러 노장老將들이 거느린 병력(전공戰功)이 모두 곽거병만 못하였고,注+宿은 나이가 많음이다. 곽거병이 거느린 병력은 항상 정예병을 선발하였다.注+상선常選”은 항상 날쌔고 정예로운 병사를 선발함을 이른다.
그러나 또한 용감하게 깊숙이 쳐들어가서 항상 건장한 기병들과 함께 대군大軍에 앞서 출동하였다.注+(앞장서다)은 실천悉薦이다.
군대 또한 천행天幸이 있어서 일찍이 곤궁에 처하거나 보급품이 끊인 적이 없었으며, 여러 노장들은 항상 머뭇거리고 뒤쳐져 좋은 기회를 만나지 못하니,注+는 머뭇거림을 이르고 은 뒤떨어짐을 이른다. 그러므로 좋은 기회를 만나지 못하여 전공戰功이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곽거병이 날로 더욱 황제로부터 친애받고 귀하게 여겨져서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에게 비견되었다.
[綱] 가을에 흉노匈奴혼사왕渾邪王이 항복하므로 다섯 속국을 설치하여 그의 무리를 거처하게 하였다.
[目] 흉노匈奴선우單于혼사왕渾邪王휴도왕休屠王이 패전하여 병사들이 나라 군대에게 죽임을 당하고 포로로 잡힌 자가 수만 명인 것에 노하여 이들을 불러 죽이고자 하였다.注+하곤下昆이고 시차時遮이니, 혼사渾邪흉노匈奴의 등속으로 이 된 자이다.
혼사왕과 휴저왕은 두려워하여 나라에 항복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휴저왕이 후회하자, 혼사왕은 그를 죽이고 병력을 합하여 항복하였다.
나라에서는 수레 2만 대를 징발하여 이들을 맞이하였는데, 현관縣官(국가)에 돈이 없어서 백성들에게 말[]을 세냈으나, 백성들이 간혹 말을 숨겨서 말이 구비되지 못하였다.注+는 음이 이니, 빌린다는 뜻이다. “불구不具”는 능히 구비하지 못한 것이다.
이 노하여 장안령長安令을 목 베려 하자, 우내사右內史 급암汲黯이 아뢰기를 “장안령은 죄가 없으니, 오직 급암을 참형에 처해야 백성들이 비로소 기꺼이 말을 내놓을 것입니다.
또 흉노가 자기 군주를 배반하고 나라에 항복하였으니, 나라에서는 서서히 으로 하여금 차례로 파발마로 오게 하면 되는데,注+는 서서히이다. 은 파발마로 보내는 것이다. 어찌 천하 사람들을 소동하게 하여 중국을 피폐하게 해서 오랑캐 사람들을 섬긴단 말입니까.”라고 하였다.
은 묵묵히 있었다.
[目] 혼사왕渾邪王이 도착하자, 나라의 장사꾼으로서 그들과 물건을 매매한 자 중에 죄에 걸려 사형에 처하게 된 자가 5백여 명이었다.
급암汲黯은 조용한 틈을 청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흉노匈奴가 요로의 변방을 공격하고 화친을 끊었으므로 중국이 군대를 일으켜 이들을 주벌해서, 사상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발생하였고, 비용이 백거만百鉅萬(100억)으로 헤아려집니다.注+거만백수巨萬百數”는 바로 백거만百鉅萬(100억)으로 헤아려지는 것이다.
어리석은 신은 폐하께서 오랑캐 사람들을 얻으면 모두 노비로 삼아서 종군하다가 죽은 자들의 집안에 하사하실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부고府庫를 텅 비워 오랑캐에게 을 내리고 양민을 징발하여 오랑캐들을 모시고 봉양하여, 마치 교만한 자식을 받들 듯이 하십니다.注+(봉양하다)은 거성去聲이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장안長安 가운데의 물건을 교역하는 것이 죄가 됨을 어찌 알기에,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이 죄를 다스리기를 ‘함부로 재물을 변방 관문으로 내보낸 것’과 똑같이 적용한단 말입니까.注+은 함부로라는 뜻이다. 법률에 “오랑캐 시장에서는 나라의 관리와 백성들이 병기兵器나 돈을 가지고 관문을 나갈 수 없으며, 비록 경사京師(장안長安)에서 매매하더라도 법의 적용이 똑같다.” 하였다.
폐하께서 비록 흉노의 물자를 얻어 천하에 사례하지는 못할지언정 또다시 번잡하고 사소한 법조문을 가지고 무지한 백성 5백여 명을 죽이려 하시니,注+법조문法條文이다. 이는 이른바 ‘그 잎을 비호하느라 그 가지를 해친다.’는 것입니다.
신은 삼가 폐하를 위하여 찬성하지 않습니다.”
은 묵묵히 있다가 유사有司의 〈법을 범한 자들에 대한 처벌을 주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注+불허不許”는 유사有司가 주청한 바를 허락하지 않음을 이른다. “내가 오랫동안 급암의 말을 듣지 못해서 지금 또다시 망발을 하였다.” 하였다.
얼마 있다가 마침내 항복해온 자들을 나누어 가까운 다섯 고을의 옛 변방 밖으로 이주시키고, 본국의 옛 풍속을 따르게 하여 다섯 속국으로 삼았다.注+은 가까움이다. “오군五郡(다섯 )”은 농서군隴西郡, 북지군北地郡, 상군군上郡郡, 삭방군朔方郡, 운중군雲中郡을 이른다. “고새故塞”는 나라 이전에 흉노匈奴와 교통하던 변방의 가까운 지역을 이른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나라로 와서 항복한 흉노匈奴의 백성들을 옮겨 다섯 에 두어서 각각 본국의 풍속을 따르게 하고 나라에 소속시켰으므로 속국屬國이라 하였다.” 하였다.
금성金城하서河西는 서쪽으로 남산南山(곤륜산맥崑崙山脈)곁을 따라 염택鹽澤에 이르기까지, 지역이 텅 비어 흉노가 없어서注+여기서 를 뗀다. 때로 정탐하는 자가 왔으나 매우 드물었다.注+하수河水(황하黃河)는 금성군金城郡 하관현河關縣 서남쪽 변방 밖 적석산積石山에서 발원發源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금성군金城郡 경계를 지나가는데, 윤오允吾 서쪽을 통틀어 금성하金城河라 이른다. 하수河水를 건너 서쪽으로 가면 무위武威 등 네 의 땅이다. 그러나 금성군金城郡소제昭帝원시元始 6년(B.C. 81)에 처음으로 설치하였으니, 사관史官이 추후에 〈금성金城이라〉 쓴 것이다. 남산南山은 바로 종남산終南山과 연결된 것이니, 경사京師 남쪽을 따라 서쪽으로 연접하여 총령蔥嶺(파미르 고원)에 이르는데, 거리가 1만여 리이므로, ‘남산南山 곁을 따라[병남산竝南山]’라고 한 것이다. (텅 비다)은 (사람이 살지 않아 인적이 끊김)이란 말과 같다.
[目] 휴도왕休屠王태자太子일제日磾적몰籍沒되어 관청에 들어와서 황문黃門으로 실려와 말을 길렀는데,注+정해丁奚이다. 황문黃門소부少府에 속하였으니, 직임이 천자天子 가까이에 있으면서 천자에게 물건을 공급하였으므로 온갖 물건이 다 있었다. 황제가 유연遊宴(놀러 다니고 잔치함)하면서 말[]을 사열査閱할 적에 후궁後宮들이 곁에 가득하였다.
일제 등 수십 명은 말을 끌고 궁전 아래를 지나다가 궁녀들을 훔쳐보지 않는 자가 없었으나, 일제만은 홀로 감히 궁녀들을 훔쳐보지 않았다.注+유연견마遊宴見馬(유연游宴하면서 말[]을 보았다.)’는 한창 놀고 잔치할 적에 여러 말을 불러 사열査閱함을 말한 것이다. 궁인宮人을 살펴보는 것이다.
일제는 신장이 8 2이고 용모가 매우 엄숙하였으며, 그가 기르는 말들이 또 살지고 아름다우니,注+(길이)은 직량直亮이다.은 기특히 여겨서 당일에 탕목읍湯沐邑의관衣冠을 하사하고 마감馬監을 제수하였다가 시중侍中부마도위駙馬都尉,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승진시켜, 그를 매우 신임하고 사랑하였다.注+황문黃門마감馬監구감狗監이 있었다. 부마도위駙馬都尉는 황제(무제武帝)가 설치한 것이니, 부마副馬이다. 정식으로 수레에 멍에 하는 말이 아닌 것을 모두 부마副馬라 한다. 일설에 “는 가까움이요 빠름이다.” 하였다. 광록대부光祿大夫는 본래 중대부中大夫였는데, 황제가 그 이름을 고쳤다.
이에 귀척貴戚들이 대부분 속으로 원망하기를 “폐하께서 망령되이 한 오랑캐 아이를 얻어서 도리어 그를 귀중하게 여긴다.”라고 하였으나, 은 더욱 그를 친애하였고, 휴도국休屠國에서는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하는 의식을 받는 주체로 삼는다 하여 일제에게 김씨金氏 을 하사하였다.


역주
역주1 過焉支 至祁連山而還 : “군대가 이른 곳을 쓴 적이 없는데, 여기에서 이른 곳을 쓴 것은 어째서인가? 깊이 쳐들어감을 비판한 것이다. 이 때문에 ‘祁連山에 이르렀다.’고 썼으니, 이는 霍去病이 깊이 적지에 쳐들어갔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요, 宋나라 때 ‘涿邪山에 이르렀다.’고 쓴 것은 魏主가 멀리까지 나가 전투하였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요, 唐나라 玄宗 때 ‘靑海에 이르렀다.’고 쓴 것은 王君㚟(왕군착)이 끝까지 적을 추격하였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는 ‘祁連山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고 쓰고, 뒤에는 ‘狼居胥山에서 封禪하고 돌아왔다.’고 썼으니, 앞에서(文帝 14년(B.C. 166)) ‘匈奴가 변방을 나가자 돌아왔다.’고 쓴 것과 똑같게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兵未有書所至者 書所至 何 譏深入也 是故書至祁連山 所以志去病之深入 書至涿邪山 所以志魏主之遠鬪 書至靑海 所以志君㚟之窮追 此書至祁連山而還 後書封狼居胥山而還 與書出塞而還者 不可同日語矣]” 《書法》
역주2 小月氏(소월지) : 月氏는 원래 중국 감숙성 서부 지역에 거주하였다. 이후 匈奴 冒頓單于(묵특선우)의 침입을 받아 서방으로 쫓겨 갔는데 이들을 大月氏라고 하며, 월지의 일부가 잔존하여 羌族과 잡거하였는데 이들을 小月氏라 한다.

자치통감강목(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