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다음입니다. 만약 그에게 정사를 맡기면 국가가 편안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秦나라(前秦)와 晉나라(東晉)가 반드시 우리나라를 엿볼 계책을 가질 것입니다.” 하였다. 모용각은 말을 마치고 곧 죽었다.
綱
【綱】 匈奴의 曹轂이 사신을 燕나라(前燕)에 보내었다.
目
【目】 秦王 符堅은 慕容恪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은밀히 燕나라를 도모할 계획이 있어서 曹轂에게 명하여 사신을 보내어 연나라에 가게 하였는데, 西戎主簿 郭辯을 副使로 삼으니,注+① 晉나라 武帝가 西戎校尉를 長安에 설치하니, 秦나라가 이것을 인습하였다. 主簿는 그 관속이다. 이때 연나라 司空인 皇甫眞의 형 皇甫腆, 조카인 皇甫奮, 皇甫覆이 모두 秦나라(前秦)에서 벼슬하였다.注+② 皇甫眞은 본래 安定 사람이었는데, 燕나라에서 벼슬하였다. 皇甫奮과 皇甫覆은 두 사람의 이름이다.
곽변이 연나라에 이르러 황보진에게 이르기를 “나는 본래 진나라 사람이었는데, 집안이 진나라에 주살을 당하였으므로 曹王(曹轂)에게 목숨을 의탁하고 있으니,注+③ 曹王은 바로 曹轂이니, 조곡이 匈奴의 右賢王이 되었다. 貴兄인 常侍 황보전 및 황보분, 황보복 형제가 모두 나와 교유하며 오랜 친분이 있다.” 하였다.注+④ 皇甫腆은 散騎常侍가 되었다.
황보진이 노하여 말하기를 “신하는 국경 밖의 사람과 교유함이 없으니, 이 말이 어찌하여 나에게 이르는가. 그대는 간사한 사람인 듯하니, 이를 인연 삼아 假託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慕容暐에게 아뢰어 끝까지 조사하여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太傅 慕容評이 허락하지 않았다.
目
【目】 郭辯이 돌아와서 符堅에게 말하기를 “燕나라(前燕) 정사가 기강이 없으니 도모할 수 있으나, 機微를 감식하고 변화를 아는 자로는 오직 皇甫眞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였다.
부견은 말하기를 “6州의 무리를 가지고 어찌 지혜로운 선비 한 사람을 소유하게 하지 못하겠는가.” 하였다.注+① 6州는 幽州, 幷州, 冀州, 司州, 兗州, 豫州이다.
曹轂이 얼마 후 卒하자, 秦나라(前秦)는 그의 부락을 나누어 둘로 만들어서 그의 두 아들로 하여금 나누어 통솔하게 하고 東曹, 西曹라고 이름하였다.注+② 符堅이 曹轂의 부락을 나누어 貳城의 서쪽 2만여 부락은 조곡의 長子 曹璽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고, 貳城의 동쪽 2만여 부락은 조곡의 작은 아들 曹寅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다.
綱
【綱】 〈晉나라(東晉)〉 桓豁이 〈燕나라(前燕)의〉 宛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는 趙盤을 사로잡았다.
綱
【綱】 가을 9월에 〈晉나라(東晉)가〉 郗愔(치음)을 都督徐․兗等州軍事로 삼았다.
綱
【綱】 겨울 10월에 秦나라(前秦) 符柳와 符雙, 符廋(부수), 符武가 군대를 일으켜 배반하자, 진나라가 군대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目
【目】 秦나라의 晉公 符柳와 趙公 符雙이 魏公 符廋와 燕公 符武와 함께 모의하여 亂을 일으켰다.注+① 符雙은 符堅의 同母弟이고, 符廋와 符武는 모두 符健의 아들이다.
符堅이 이 말을 듣고 그들을 불러 長安으로 오게 하니, 부류는 蒲坂을 점거하고 부쌍은 上邽를 점거하고 부수는 陝城을 점거하고 부무는 安定을 점거하고 배반하였다.
부견은 사자를 보내어 군대를 해산하고 지위를 편안하게 하라고 타이르고 각각 배를 깨물어 신표로 삼게 하였는데, 모두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注+② 배는 살이 연하여 깨물면 들어가기가 쉬우니, 이것을 가지고 친척이 이반하면 國力이 취약해져서 장차 적에게 이용당함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배를 깨물어 使者에게 주어서 符柳 등에게 하사하여 신표로 삼은 것이다.
綱
【綱】 代王 拓跋什翼犍이 匈奴의 劉衛辰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目
【目】 拓跋什翼犍이 劉衛辰을 공격할 적에 河水의 얼음들이 아직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 장수들에게 명하여 갈대 끈으로 흘러가는 얼음 조각을 묶게 하니, 잠시 후 얼음이 모여 연결되었으나注+① 葦는 갈대이다. 絙은 居登의 切이니, 큰 끈이다. 흐르는 얼음을 ‘澌’라 한다. 代나라에서 朔方을 공격하려면 서쪽으로 大河를 건너가야 하는데, 그 나루터를 ‘君子津’이라 한다. 아직 그리 견고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 위에 갈대를 흩뿌리게 하니, 얼음과 갈대가 서로 엉겨 붙어 浮橋와 같았다.
병사들이 이것을 타고 하수를 건너가자, 적병이 뜻밖에 갑자기 이르니, 유위신은 마침내 서쪽으로 달아났다.
탁발십익건이 그의 부락 10개 중에 6, 7개를 거두어 돌아가니, 유위신은 秦나라(前秦)로 달아났다. 진나라에서는 그를 朔方으로 소환하고 군대를 보내어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역주
역주1燕太宰慕容恪卒 :
“慕容恪이 卒하자 燕나라를 엿보는 자가 이르렀는데, 이것을 ≪資治通鑑綱目≫에 연달아 쓴 것은 경계한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에서 僭國의 신하에게 ‘卒’이라고 쓴 것이 21명인데,(晉나라 懷帝 永嘉 2년(308)에 자세히 보인다.) 모용각의 죽음을 더욱 크게 애석히 여긴 것이다.[恪卒而闚國者至矣 綱目聨書之 所以戒也 綱目卒僭國臣二十一(詳晉懷帝永嘉二年) 於恪卒 尤深惜之]” ≪書法≫
역주2管仲과 蕭何 :
관중은 이름이 夷吾, 字가 仲으로, 춘추시대 齊나라의 桓公을 도와 霸業을 이루게 한 인물이다. 소하는 沛縣 사람으로 劉邦을 도와 漢나라를 건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