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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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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年이라
趙永寧二 魏永興二年이라
◯秦主苻健皇始元年이라
◯是歲 趙亡하니 舊大國一이요 涼, 代, 燕小國三이요 新大國一이니 凡五僭國이라
春正月 日食하다
◑鮮卑段龕 以青州來降하다
段蘭 死於令支어늘 領其衆하고 因石氏之亂하여 南徙廣固注+龕, 蘭之子也. 廣固城, 曹嶷所築. 有大澗甚廣, 因曰廣固, 在靑州益都縣西四里, 實慕容超所都處.러니 至是來降이어늘 以爲鎮北將軍하여 封齊公하다
苻健 自稱秦天王하다
健左長史賈玄碩等 請依劉備稱漢中王故事하여 表健爲都督關中諸軍事, 大單于, 秦王注+玄碩, 欲表言之於晉朝.한대
怒曰 吾豈堪爲秦王邪 且晉使未返하니 我之官爵 非汝曹所知也니라
既而 密使梁安諷玄碩等하여 上尊號하고 遂即天王大單于位하고 國號大秦이라하다
二月 魏主閔 圍趙主祗於襄國하니 姚弋仲及燕王儁 遣兵救之하다
魏主閔 攻襄國百餘日하니 趙主祗危急하여 乃去帝號하고 稱王하고 遣太尉張舉하여 乞師於燕할새 許送傳國璽하다
將軍張春 乞師於姚弋仲하니 弋仲 遣其子襄하여 救之할새 誡襄曰
冉閔 棄仁背義하여 屠滅石氏 我受人厚遇하니 當爲復讐로되 老病하여 不能自行注+厚遇, 謂石虎遇之厚也. 爲, 去聲.이라 汝才十倍於閔하니 若不梟擒이면 不必復見我也니라
燕王儁 遣悦綰하여 將兵往會之注+悅, 姓也.하다
遣中郎常煒하여 使於燕이어늘 使封裕 詰璽所在한대 煒曰 在鄴이니라
裕曰 張舉言在襄國 何也 煒曰 彼求救者 爲妄誕之辭耳니라
乃積柴其旁하고 使裕 以其私誘之호되 煒辭不變이라
左右請殺之한대 儁曰 彼不憚殺身以徇其主하니 忠臣也라하고 使出就館하고
使其鄉人往勞之하고 且曰 君何以不實言하여 欲處君於遼, 碣之表하시니 奈何注+遼海及碣石, 爲遼․碣. 杜佑曰 “盧龍, 漢肥如縣, 有碣石山, 碣然而立在海旁. 秦築長城, 所起自碣石, 在今高麗舊界, 非此碣石也.”
煒曰 吾結髪以來 尙不欺布衣어든 況人主乎 曲意茍合 性所不能이라 直情盡言하여 雖沈東海라도 不敢避也라하고 遂臥向壁하여 不復言이어늘
乃囚之於龍城이러니 後知張舉之妄하고 乃殺舉而釋煒之囚하다
三月 魏主閔 及趙, 燕, 姚襄之兵戰하여 敗績하다
姚襄及趙石琨 各引兵東救襄國하니 魏主閔 遣將軍胡睦하여 拒襄於長蘆하고 孫威拒琨於黄丘라가 皆敗還注+水經注 “漳水, 過堂陽縣西, 分爲二水, 其右水東北注出石門, 謂之長蘆水. 長蘆水, 西逕堂陽縣故城南, 又東逕九門陂, 又東逕扶都縣.” 五代志 “隋置長蘆縣, 屬河間郡.” 魏收地形志 “鉅鹿郡郻縣, 有黃丘.” 郻, 苦幺切.하다
欲自出擊之한대 衛將軍王泰諫曰 今襄國未下 外救雲集하니
若我出戰이면 必腹背受敵하리니 此危道也 不若固壘以挫其鋭하고 徐觀其釁而撃之니이다
道士法饒進曰 太白入昴하니 當殺胡王이라 百戰百克이니 不可失也注+晉天文志 “昴七星, 爲旄頭, 胡星也.”니이다
攘袂大言曰 吾戰决矣로니 敢沮衆者하리라하고 乃悉衆出하여 與襄, 琨戰이러니
悦綰 適以燕兵至하여 去魏兵數里 疏布騎卒하고 曳柴揚塵注+疏, 讀與疎同.하니 魏人 望之恟懼어늘
襄, 琨, 綰 三面擊之하고 趙王祗自後衝之하니 魏兵 大敗 閔與十餘騎 走還鄴하니 將士死者十萬餘人이러라
姚襄 還灄頭하니 姚弋仲 怒其不擒閔하여 杖之一百하다
閔之爲趙相也 所徙青, 雍, 幽, 荆之民 及氐, 羌, 胡, 蠻數百萬口러니 以趙法禁不行이라하여 各還本土하니
道路交錯하여 互相殺掠하여 其能逹者什有二三이라 中原 大亂하고 因以饑疫하여 人相食하여 無復耕者注+石虎破曹嶷, 徙靑州之民, 破劉胤․石生, 再徙雍州之民, 破段匹磾及爲燕所敗, 徙幽州之民, 石勒南掠江․漢, 徙荊州之民.러라
趙遣其將劉顯하여 伐魏로되 不克하다
趙王祗使其將劉顯攻鄴한대 悉衆出戰하여 大敗顯軍하고 斬首三萬餘級하니
하여 密使請降하고 求殺祗以自效한대 乃引歸하다
遣使하여 問民疾苦하다
秦王健 分遣使者하여 問民疾苦하고 搜羅儁異하며 寛重斂之税하고 弛離宮之禁하며 罷無用之器하고 去侈靡之服하여
凡趙之苛政不便於民者 皆除之하다
杜洪 遣使하여 召梁州刺史司馬勲한대 帥歩騎三萬하고 赴之러니 秦王健 禦之於五丈原하니 屢戰皆敗하고 退歸南鄭하다
健以賈玄碩 始者不上尊號라하여 衘之하여 使人告玄碩與勲通이라하고 殺之하다
趙劉顯 弑其主祗而自立하다
◑秋八月 魏徐, 兗, 荆, 豫, 洛州來降하다
◑燕慕容恪 取中山하다
入中山하여 遷其將帥土豪數千家하여 詣薊하고 餘皆安堵하며 軍令嚴明하여 秋毫不犯注+數千, 通鑑作數十.이러라
姚弋仲 遣使來降하다
詔以弋仲爲車騎大將軍六夷大都督하고 子襄爲平北將軍하여 督并州하다
桓溫 請經略中原이로되 事久不報하니 知朝廷杖殷浩以抗己하고 甚忿之 然素知浩之爲人하여 亦不之憚이요 以國無它釁이라하여 遂得相持彌年하니
雖有君臣之跡이나 羈縻而已 八州士衆資調 殆不爲國家用이러라 屢求北伐호되 不聽注+永和元年, 溫都督荊․司․雍․益․梁․寧六州. 五年遣滕畯, 帥交․廣之兵, 伐林邑. 蓋是時, 已加督交․廣二州矣. 資, 財也, 調, 賦也.이러니
至是하여 拜表輙行하여 帥衆四五萬하고 順流而下하여 軍于武昌하니 朝廷 大懼러라
浩欲去位以避溫하고 又欲以騶虞幡駐溫軍이어늘 吏部尙書王彪之 言於會稽王昱曰注+彪之, 彬之子也. 若浩去職이면 人情離駭하여 必有任其責者리니 非殿下而誰乎잇가
又謂浩曰 彼若抗表問罪하면 卿爲之首리니 欲作匹夫 豈有全地邪 且當静以待之하여 令相王手書하여 爲陳成敗하면 彼必旋師注+相, 式亮切. 相王, 謂會稽王昱也.
若不從이면 則遣中詔하고 又不從이면 乃當以正義相裁注+謂正溫擧兵向闕之罪. 奈何無故怱怱하여 先自猖蹶乎注+怱怱, 速也.잇가
浩曰 决大事正自難이라 頃日來欲使人悶이러니 聞卿此謀하니 意始得了注+了, 决也.라하다
撫軍司馬高崧 爲昱草書曰注+昱爲撫軍大將軍, 以崧爲司馬.
宼難宜平이요 時會宜接注+謂是時中原豪傑, 相繼來降, 有恢復之會, 宜應接之也.이니 此實爲國遠圖 經略大筭이라 能弘斯會 非足下而誰
이나 異常之舉 衆之所駭 遊聲噂𠴲 想足下亦少聞之注+噂, 玆損切. 𠴲, 徒合切. 噂𠴲, 聚語也.리이다 茍或望風振擾하여 一時崩散이면 則望實竝喪하여 社稷之事去矣注+望實, 外望與事實也.리이다
吾與足下 雖職有內外 安社稷, 保家國 其致一也 當先思寧國而後 圖其外하라 區區誠懐 豈可顧嫌而不盡哉잇가
即上疏하여 惶恐致謝하고 囘軍還鎮하다
◑朝廷 將行郊祀러니 問於彪之曰 應有赦否
彪之曰 自中興以來 郊祀 往往有赦 愚謂非宜 凶愚之人 必將生心於徼倖矣리이다 從之하다


[] 나라(동진東晉) 효종孝宗 목황제穆皇帝 영화永和 7년이다.
[] 조주趙主(후조後趙) 석지石祗 영녕永寧 2년이고 위주魏主(염위冉魏) 염민冉閔 영흥永興 2년이다.
진주秦主(전진前秦) 부건苻健 황시皇始 원년이다.
이해에 나라(후조後趙)가 망하니, 옛날의 큰 나라(염위冉魏)가 하나이고, 작은 나라가 나라(전량前涼)․나라․나라(전연前燕) 셋이고, 새로 생긴 큰 나라(전진前秦)가 하나이니, 합하여 참국僭國이 다섯이다.
[] 봄 정월에 일식이 있었다.
[] 선비鮮卑단감段龕(단감)이 청주青州를 가지고 〈나라(동진東晉)에〉 와서 항복하였다.
[] 처음에 단란段蘭영지令支에서 죽자, 단감段龕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석씨石氏의 난리를 인하여 남쪽의 광고廣固로 옮겼는데,注+① 段龕은 段蘭의 아들이다. 廣固城은 曹嶷이 축조한 것인데, 매우 넓은 큰 시냇물이 있으므로 인하여 廣固라고 하였으니, 靑州 益都縣 서쪽 4리 지점에 있는바, 실로 慕容超가 도읍하였던 곳이다. 이때 와서 항복하자 단감을 진북장군鎮北將軍으로 삼아서 제공齊公에 봉하였다.
[] 부건苻健이 스스로 나라(전진前秦) 천왕天王을 칭하였다.
[] 부건苻健좌장사左長史 가현석賈玄碩 등이 유비劉備한중왕漢中王을 칭한 고사를 따라 〈나라(동진東晉)에〉 표문을 올려 부건을 도독관중제군사都督關中諸軍事 대선우大單于 진왕秦王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注+① 賈玄碩이 표문을 올려 晉나라 조정에 말하고자 한 것이다.
부건이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 진왕秦王이 되는 것을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또 이 돌아오지 않았으니, 나의 관작官爵은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이윽고 은밀히 양안梁安을 시켜 가현석 등에게 넌지시 말해서 존호尊號를 올리게 하고는 마침내 천왕天王 대선우大單于에 즉위하고 국호國號대진大秦이라 하였다.
[] 2월에 위주魏主 염민冉閔조주趙主 석지石祗양국襄國에서 포위하니, 요익중姚弋仲연왕燕王 모용준慕容儁이 군대를 보내어 석지를 구원하였다.
[] 위주魏主 염민冉閔양국襄國을 100여 일 동안 공격하니, 조주趙主 석지石祗가 위급하여 마침내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왕이라 칭하였다. 그러고는 태위太尉 장거張舉를 보내어 나라(전연前燕)에게 구원병을 요청할 적에 전국새傳國璽를 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장군 장춘張春요익중姚弋仲에게 군대를 청하니, 요익중이 아들 요양姚襄을 보내어 구원할 적에 요양에게 경계하기를
“염민이 을 버리고 를 배반하여 석씨石氏를 도륙해서 멸망시켰다. 나는 남의 두터운 대우를 받았으니 마땅히 복수해야 하는데,注+① “厚遇”는 石虎가 후대함을 말한 것이다.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내가 늙고 병들어서 직접 갈 수가 없다. 너의 재주가 염민보다 10배나 나으니, 만약 염민을 사로잡아 효수梟首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나를 볼 필요가 없다.” 하였다.
연왕燕王 모용준慕容儁열관悦綰注+② 悅은 姓이다.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회합하게 하였다.
[] 염민冉閔중랑中郎 상의常煒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니, 연왕燕王 모용준慕容儁봉유封裕로 하여금 옥새가 있는 곳을 묻게 하자, 상위가 말하기를 “업성鄴城에 있습니다.” 하였다.
봉유가 말하기를 “장거張舉양국襄國에 있다고 말함은 어째서인가.” 하니, 상위가 말하기를 “저 구원을 청하는 자가 허망하고 허탄한 말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모용준이 그 옆에 나무섶을 쌓아놓고 봉유로 하여금 은밀히 유인하게 하였으나, 상위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좌우 신하들이 그를 죽일 것을 청하자, 모용준이 말하기를 “저 사람이 자기 몸을 죽이는 것을 꺼리지 않고 그 군주를 위하니, 충신이다.” 하고는 하여금 내보내 관사에 나아가게 하였다.
밤에 그의 고향 사람을 보내어 가서 위로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그대는 어찌하여 사실대로 말하지 않습니까. 연왕燕王이 노하여 그대를 요해遼海갈석碣石注+① 遼海와 碣石을 遼․碣이라 한 것이다. 杜佑가 말하기를 “盧龍은 漢나라 肥如縣인데, 碣石山이 우뚝이 바닷가에 서 있다. 秦나라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갈석에서 시작하였다. 지금의 고구려의 옛 경계에 있는 갈석은 이 갈석이 아니다.” 하였다. 밖으로 귀양 보내고자 하니, 어쩌겠습니까.” 하니,
상위가 말하기를 “내가 머리를 묶어 상투한 이래로 아직 포의布衣도 속이지 않았는데, 더구나 군주이겠는가. 뜻을 굽혀 구차히 영합함은 내 성격에 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정을 곧바로 다 말하여 비록 동해에 빠져 죽더라도 감히 피하지 않겠다.” 하고는 마침내 벽을 바라보고 누워서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모용준은 마침내 그를 용성龍城에 가두어두었는데, 뒤에 장거가 거짓말한 것을 알고는 마침내 장거를 죽이고 갇혀 있던 상위를 석방하였다.
[] 3월에 위주魏主 염민冉閔나라(후조後趙)․나라(전연前燕)와 요양姚襄의 군대와 싸워서 크게 패하였다.
[] 요양姚襄나라 석곤石琨이 각각 군대를 인솔하고 동쪽의 양국襄國을 구원하니, 위주魏主 염민冉閔이 장군 호목胡睦을 보내어 요양을 장로長蘆에서 막게 하고 손위孫威에게는 석곤을 황구黄丘에서 막게 하였으나,注+① ≪水經註≫에 “漳水는 堂陽縣 서쪽을 지나 나누어 두 물이 되어서 오른쪽 물은 東北으로 흘러 石門으로 나가니, 이것을 長蘆水라 한다. 장로수는 서쪽으로 堂陽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九門陂를 지나고 또 동쪽으로 扶都縣을 지난다.” 하였다. ≪五代志≫에 “隋나라가 長蘆縣을 설치하고 河間郡에 소속시켰다.” 하였다.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鉅鹿郡 郻縣(교현)에 黃丘가 있다.” 하였다. 郻는 苦幺의 切이다. 모두 패하고 돌아왔다.
염민이 직접 나가 공격하려고 하자, 위장군衛將軍 왕태王泰하기를 “지금 양국이 아직 함락되지 않은 상황에서 구원병이 밖에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나가 싸우면 반드시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을 것이니, 이는 위태로운 방법입니다. 보루를 굳게 지켜서 적의 예봉을 꺾고 서서히 그 틈을 보아 출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도사道士 법요法饒가 나와서 말하기를 “태백성太白星묘수昴宿注+② ≪晉書≫ 〈天文志〉에 “昴宿 7星을 旄頭라 하니, 바로 胡星(오랑캐의 별)이다.” 하였다. 들어갔으니, 마땅히 오랑캐 왕을 죽일 것입니다. 백 번 싸우면 백 번 이길 것이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 염민冉閔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싸우기로 결정하였으니, 감히 여러 사람을 저상沮喪하게 하는 자는 참수하겠다.” 하고는 마침내 병력을 총동원하여 나와서 요양姚襄, 석곤石琨과 싸웠는데,
열관悦綰이 때마침 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나라(염위冉魏) 군대와 몇 리 떨어진 곳에 기병을 듬성듬성注+① 疏는 疎(드물다)와 같이 읽는다. 펼쳐놓고 나뭇단을 끌어 먼지를 일으키니, 나라 사람들이 바라보고 〈적병이 많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하였다.
요양과 석곤, 열관이 삼면으로 나라를 공격하고 조왕趙王 석지石祗가 뒤에서 충돌하니, 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 염민은 10여 명의 기병과 달아나 업성鄴城으로 돌아오니, 장병 중에 죽은 자가 10여만 명이었다.
요양이 섭두灄頭(섭두)로 돌아오니, 요익중姚弋仲은 요양이 염민을 사로잡지 못한 것을 노여워하여 곤장 100대를 쳤다.
[] 염민冉閔나라(후조後趙) 정승이 되었을 적에 옮겼던 청주靑州옹주雍州, 유주幽州, 형주荊州의 백성과 저족氐族강족羌族, 호족胡族, 만족蠻族이 수백만 명이었는데, 나라의 법령이 제대로 행해지지 못한다 하여 각기 본토로 돌아갔다.
이때 도로에 사람들이 서로 교차함으로 인하여 서로 죽이고 노략질하니, 능히 본토에 도달한 자가 10명 중에 두서너 명밖에 되지 않았다. 중원이 크게 혼란하였고, 이로 인하여 기근이 들고 염병이 들어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으니, 더 이상 농사짓는 자가 없었다.注+① 石虎가 曹嶷을 격파하고 靑州의 백성을 옮겼으며 劉胤과 石生을 격파하고 다시 雍州의 백성을 옮겼다. 段匹磾를 격파했을 때와 燕나라(前燕)에게 패하였을 때에 幽州의 백성을 옮겼으며, 石勒이 남쪽으로 江․漢 지방을 노략질하고 荊州의 백성을 옮겼다.
[] 나라(후조後趙)가 장수 유현劉顯을 보내어 나라(염위冉魏)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 조왕趙王 석지石祗가 그의 장수 유현劉顯을 보내어 업성鄴城을 공격하였는데, 염민冉閔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나와 싸워서 유현의 군대를 대파하고 3만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
유현이 두려워하여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고 석지를 죽여 자기의 충성忠誠을 드러낼 것을 청하자, 염민이 마침내 병력을 이끌고 돌아갔다.
[] 나라(전진前秦)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백성들의 고통을 물었다.
[] 진왕秦王 부건苻健이 사자를 나누어 보내어서 백성들의 고통을 묻고 준걸하고 특출한 사람을 망라하여 등용하였다. 무겁게 거두는 세금을 경감시켰고 이궁離宮의 금지 구역을 풀어주었다. 쓸모없는 기물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사치하고 화려한 의복을 제거하였다.
그리하여 백성들을 불편하게 하였던 나라(후조後趙)의 가혹한 정사를 모두 제거하였다.
[] 여름 4월에 사마훈司馬勲두홍杜洪 등의 군대와 회합하여 나라(전진前秦)를 공격하다가 패하여 돌아왔다.
[] 두홍杜洪사신使臣을 보내어 양주자사梁州刺史 사마훈司馬勲을 부르자 사마훈이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고 달려갔는데, 진왕秦王 부건苻健이 이들을 오장원五丈原에서 막으니, 사마훈이 여러 번 싸워 모두 패하고 후퇴하여 남정南鄭으로 돌아왔다.
부건은 가현석賈玄碩이 처음에 자신에게 존호를 올리지 않았다 하여 그를 원망해서 사람을 시켜 가현석이 사마훈과 내통했다고 무고하게 하고 그를 죽였다.
[] 나라(후조後趙) 유현劉顯이 그의 군주 석지石祗를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였다.
[] 가을 8월에 나라(염위冉魏)의 서주徐州, 연주兗州, 형주荊州, 예주豫州, 낙주洛州가 와서 항복하였다.
[] 나라(전연前燕) 모용각慕容恪중산中山을 점령하였다.
[] 모용각慕容恪중산中山에 들어가서 그 장수와 토호土豪 수천注+① “數千”은 ≪資治通鑑≫에는 “數十”으로 되어 있다. 가호家戶를 옮겨 계성薊城으로 나아가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안도安堵하게 하였다. 〈모용각의 부대는〉 군령이 엄숙하고 분명하여 군령을 추호도 범하지 않았다.
[] 요익중姚弋仲이 사신을 보내어 와서 항복하였다.
[] 조령을 내려 요익중姚弋仲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육이대도독六夷大都督으로 삼고 아들 요양姚襄평북장군平北將軍으로 삼아 병주并州를 도독하게 하였다.
[] 겨울 12월에 환온桓温이 군대를 옮겨 무창武昌에 주둔하였다가 얼마 후에 다시 으로 돌아갔다.
[] 처음에 환온桓溫이 중원을 경략經略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 일에 대해 오랫동안 응답이 없으니, 조정이 은호殷浩를 의지하여 자기에게 저항하는 것임을 알고는 매우 분노하였다. 그러나 환온은 평소 은호의 사람됨을 알아 또한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나라에 다른 문제가 없다 하여 마침내 서로 대치한 상태로 한 해를 보냈다.
비록 군신간의 처신을 하고는 있지만 기미羈縻(형식적으로 매여 있음)에 지나지 않아 8의 군대와 물자와 부세賦稅注+① 〈“八州”는〉 永和 원년(345)에 桓溫이 荊州, 司州, 雍州, 益州, 梁州, 寧州 여섯 주를 도독하였고, 5년에 滕畯을 보내어 交州와 廣州의 군대를 거느리고 林邑을 공격하였다. 아마도 이때 交州와 廣州 두 주를 더 도독한 듯하다. 資는 재물이고, 調는 賦稅이다. 거의 국가의 쓰임이 되지 못하였다. 환온이 여러 번 북쪽을 공격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에서 들어주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표문을 올리고 곧장 출발하여 4, 5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물길을 따라 내려가서 군대를 무창武昌에 주둔하니, 조정에서는 크게 두려워하였다.
[] 은호殷浩가 지위를 내놓고 떠나가 환온桓溫을 피하고자 하였고 또 추우번騶虞幡이라는 것만으로 환온의 군대를 멈추고자 하였는데, 이부상서吏部尙書 왕표지王彪之注+① 王彪之는 王彬의 아들이다. 회계왕會稽王 사마욱司馬昱에게 말하기를 “만약 은호가 관직을 떠나면 사람들 마음이 이반離叛되고 놀라서 반드시 책임을 지을 자가 있어야 할 것이니, 책임을 져야 할 자가 전하殿下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하였고,
또 은호에게 이르기를 “저 환온이 만약 표문을 올려 죄를 문책한다면 이 첫 번째로 문책 받을 것이니, 〈지위를 내놓고〉 필부匹夫가 되고자 하나 어찌 몸이 온전히 보전할 땅이 있겠습니까. 우선 마땅히 고요히 기다리면서 상왕相王으로注+② 相(재상)은 式亮의 切이니, 相王은 會稽王 司馬昱을 이른다. 하여금 직접 편지를 써서 환온에게 성패成敗를 말하게 하면 그가 반드시 군대를 돌릴 것입니다.
만약 환온이 이것을 따르지 않으면 황제의 조서를 보내고, 또 따르지 않으면 마침내 마땅히 올바른 의리로 재단裁斷하여야 하니,注+③ 〈“乃當以正義相裁”는〉 桓溫이 군대를 일으켜 대궐로 향한 죄를 바로잡음을 이른다. 어찌 아무런 연고緣故 없이 서둘러注+④ “怱怱”은 급함이다. 먼저 일을 일으키려 하십니까.” 하였다.
은호가 말하기를 “대사를 결정하는 것은 참으로 내가 스스로 하기 어려웠다. 지난 며칠 동안 나로 하여금 고민하게 하였는데, 경의 이 계책을 듣고 나니 뜻이 비로소 결정되었다.”注+⑤ 了는 결단함이다. 하였다.
[] 무군사마撫軍司馬 고숭高崧注+① 司馬昱이 撫軍大將軍이 되었을 때에 高崧을 司馬로 삼았다. 사마욱司馬昱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편지를 하여 〈환온桓溫에게 보내었다.〉
“오랑캐의 난은 마땅히 평정해야 하고 이런 기회에 마땅히 호응해야 하니,注+② 〈“時會宜接”은〉 이때 중원의 호걸들이 서로 계속하여 晉나라에 와서 항복하여 中原을 恢復할 기회가 있었으니, 마땅히 이에 호응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이는 실로 나라를 위한 큰 계책이요 경략經略하는 큰 방법입니다. 능히 이 기회를 잘 이용할 사람이 족하足下가 아니고 누구이겠습니까.
그러나 평상平常과 다른 조처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니, 모여서 근거 없는 말을 하는 것을注+③ 噂은 玆損의 切이고, 𠴲은 徒合의 切이니, “噂𠴲”은 모여 말함이다. 족하께서도 또한 다소 들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혹시라도 풍문을 듣고 사람들이 소요하여 일시에 무너지고 흩어지면 외부의 기대와 일의 실제를注+④ “望實”은 외부의 기대와 일의 실제이다. 모두 잃어서 사직社稷의 일이 잘못될 것입니다.
저는 족하와 비록 직책상 내직內職외직外職의 차이가 있으나, 사직을 편안히 하고 나라와 집안을 보존함은 그 이치가 똑같으니, 마땅히 나라를 편안히 할 것을 생각한 뒤에 그 밖의 나머지를 도모해야 합니다. 구구한 저의 정성과 소회를 어찌 혐의를 돌아보아 다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환온은 〈그의 편지를 보고는〉 즉시 상소하여 황공하다고 사죄하고 군대를 돌려 으로 돌아갔다.
[] 조정朝廷이 장차 교사郊祀를 행하려 하였는데, 사마욱司馬昱왕표지王彪之에게 묻기를 “응당 사면赦免이 있어야 하는가.” 하니,
왕표지가 말하기를 “중흥中興 이래로 교사에 왕왕 사면이 있었으나, 저는 생각하건대 시의적절한 일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흉악하고 어리석은 자가 반드시 장차 〈사면의〉 요행을 바라서 나쁜 짓을 하는 데 마음을 품을 것입니다.” 하니, 사마욱이 그 말을 따랐다.


역주
역주1 晉나라로 간 使臣 : 永和 6년(350) 11월에 苻健이 參軍 杜山伯을 東晉에 보낸 일을 말한다.
역주2 司馬勲……敗還 : “晉나라가 秦나라(前秦)의 군대에 공격을 가할 때에는 ‘伐’이라고 썼는데, 여기에서 ‘擊’이라고 씀은 어째서인가. 杜洪과 회합하였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은 義를 바로잡고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다.[晉加秦兵書伐 此其書擊 何 會杜洪也 綱目 正誼不謀利]” ≪書法≫
역주3 桓温……尋復還鎮 : “군대를 옮겼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桓溫을 죄준 것이다. 뒤이어 얼마 후 다시 鎮으로 돌아갔다고 써서 환온의 실정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이 편수됨에 난신적자가 두려워했다.’ 한 것이다.[書移軍 何 罪溫也 繼書尋復還鎮 而桓溫之情得矣 故曰綱目修而亂臣賊子懼]” ≪書法≫
“桓溫이 跋扈하여 신하 노릇 하지 않았는바, ≪資治通鑑綱目≫에 앞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漢나라(成漢)를 정벌했다고 썼을 적에 이미 이것을 논하였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군대를 옮겨 武昌에 주둔했다가 얼마 후 다시 鎭으로 돌아갔다고 썼으니, 그렇다면 그가 번번이 제멋대로 행동하여 오직 하고 싶은 대로 한 것이니, 그 죄를 더욱 가릴 수 없다. 그러나 晉나라 조정에서 비록 그의 잘못을 알았으나, 끝내 또한 어찌할 수가 없어서 겨우 편지를 보내어 타일렀을 뿐이었는데, ≪자치통감강목≫에서 直筆로 이것을 썼으니, 환온과 조정 모두를 비난한 것이다.[桓溫跋扈不臣 綱目 前書帥師伐漢 已論之矣 今此書移軍武昌 尋復還鎮 則其專輙自如 惟意所欲 其罪尤不可掩 然晉朝雖知其非 卒亦無如之何 僅能致書諭之而已 直筆書之 交譏之也]” ≪發明≫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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