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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의 長史魏蘭根이 説崇曰 昔에 緣邊初置諸鎭하니 地廣人稀라 或徴發中原彊宗子弟와 或國之肺腑하여 寄以爪牙러니
中年以來로 有司號爲府户하여 役同厮養하여 官婚班齒에 致失清流나
而本來族類는 各居榮顯하니 顧瞻彼此하면 理當憤怨이라
宜改鎭立州하고 分置郡縣하여 凡是府户는 悉免爲民하고 入仕次敍를 一準其舊하여 文武兼用하고 威恩竝施니
此計若行이면 國家庶無北顧之慮矣리이다 崇爲之奏聞이러니 事寢不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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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柔然에 큰 기근이 들자 郁久閭阿那瓌가 무리들을 이끌고 北魏의 경계 지역으로 들어가 구휼해달라고 하자, 북위가 左丞 元孚를 行臺로 삼아 부절을 가지고 가서 그들을 돌봐주도록 하였다.
注+① 元孚는 元譚의 손자이다. 北魏 孝昌 원년(525)에 元譚이 幽州都督이 되었으니, 이로부터 3년 후이다. ≪魏書≫를 살펴보건대 원담은 太武帝(拓跋燾)의 아들이니, 아마도 北魏의 宗室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출발할 적에 표문을 올려 편의에 맞는 방도를 아뢰기를 “蠕蠕이 오래도록 강성하였는데, 지금 스스로 어지럽게 되어 망하게 되었으니, 마땅히 이때를 이용하여 장기적인 계책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옛날에 漢 宣帝 때에 呼韓邪單于가 변방으로 와서 우호를 청하자, 漢나라에서 董忠과 韓昌을 보내어 邊郡의 군사와 말을 통솔하여 호한야선우를 朔方에 호송하고 그대로 머물러서 지키게 하였으며, 光武帝 때에는 역시 中郎將 段郴을 시켜서 安集掾史를 설치하여 單于가 있는 곳을 따라 동정을 살피게 하였습니다.
지금 마땅히 대략 옛일에 의거하여 한적한 땅을 빌려주어 그들이 농사짓고 방목하게 해주고 대략 官屬을 두어 그들을 慰撫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변방의 군대에게 엄중히 경계하여 명령에 따라 방어하고 감시하여 그들로 하여금 친밀할 때에 거짓을 꾸미지 않게 하고, 소원할 적에 배반을 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책입니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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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北魏의 元孚가 白虎幡을 가지고 가서 郁久閭阿那瓌를 柔玄鎭과 懷荒鎭 사이에서 위로하였는데,
注+① 懷荒鎭은 柔玄鎭의 동쪽과 禦夷鎭의 서쪽에 있다. 아나괴의 무리가 30만 명이라고 칭하고 몰래 반역의 뜻을 품고 드디어 원부를 拘留하고 군대를 이끌어 남하하면서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을 하였고 平城에 이르러서 마침내 원부가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有司는 원부가 命을 욕되게 하였으니 처벌해야 한다고 주청하였고, 尙書令 李崇과 僕射 元纂을 보내어 기병 10만 명을 인솔하고 柔然을 공격하게 하였다.
아나괴가 이 소식을 듣고 백성을 몰아서 북쪽으로 달아났는데, 이숭이 그들을 추격하여 3천여 리를 갔지만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원찬은 參軍 于謹을 시켜서 유연을 추격하게 하여 郁對原에 이르렀는데, 전후로 17차례 싸워서 여러 차례 그들을 격파하였다.
注+② 于謹은 于忠의 從曾孫이다.
우근은 성품이 깊고 침착하고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經史를 섭렵하였다. 젊었을 때에는 閭里에 묻혀 살면서 벼슬에 나아가기를 구하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벼슬에 나아가기를 권하니,
우근이 말하기를 “
은 옛날 사람들이 비루하게 여겼고,
는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오.”라고 하였다. 원찬이 그의 명성을 듣고 불러들였다.
注+③ 後漢의 梁竦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났으면 살아서는 마땅히 諸侯에 봉해지고, 죽어서는 종묘에서 제사를 받아야 한다. 州와 郡의 직책은 그저 사람을 피곤하게 할 뿐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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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李崇의 長史인 魏蘭根이 이숭을 설득하기를 “옛날에 변경에 처음으로 여러 鎭을 설치하였는데,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서 혹은 中原의 강성한 종족의 자제나 국가의 宗親을 징발하여 爪牙(장군)의 임무를 맡겼습니다.
中期에 와서는 有司들이 그들을 府戶라고 부르며 하인처럼 부려서, 관직ㆍ혼인ㆍ반차ㆍ서열에 있어서 淸流(상등 부류)의 지위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래의 가문은 각기 영달한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쪽과 이쪽의 지위를 비교해보면 이치상 마땅히 분노하고 원망할 것입니다.
마땅히 鎭을 고쳐서 州를 설치하고, 郡과 縣을 나누어 두어서 이 府戶는 모두 〈그 천한 신분을〉 면하여 평민으로 삼고, 入仕의 순서를 한결같이 옛것을 따라서 文人과 武人을 똑같이 등용하고 위엄과 은혜가 똑같이 시행해야 합니다.
이 계책이 만약 시행되면 국가에서 북쪽을 돌아보는 염려는 거의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숭이 그를 위하여 상주하였으나, 이 일은 덮어두고 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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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崔光은 너그럽고 온화하며 선행을 좋아하고 하루 종일 온화한 얼굴빛을 하고 화를 낸 적이 없었다.
于忠과 元叉가 조정에서 권력을 잡았을 때에 모두 그를 존경하여 일의 대부분을 그에게 물어서 결정하였으나 裴植, 郭祚, 淸河王의 죽음은 구원할 수 없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張禹와 胡廣에 비유하였다.
注+① 于忠이 조정에서 권력을 잡았을 때 裴植과 郭祚가 모두 죄 없이 죽임을 당했고, 元叉가 조정에서 권력을 잡았을 때 清河王 元懌이 모반을 꾀한 죄로 함부로 죽임을 당하였다. 張禹와 胡廣은 모두 後漢의 太尉인데, 두 사람이 비록 성품이 독실하고 두터웠으나 직언을 하는 풍모가 없었다.
최광이 죽을 때에 賈思伯을 천거하여 侍講으로 삼았는데, 황제(元詡)는 가사백에게 ≪春秋≫를 배웠다.
가사백이 몸을 굽혀 선비들을 예우하자, 어떤 사람이 가사백에게 묻기를 “공은 어찌하여 교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가사백이 말하기를 “노쇠한 나이에 이르면 교만해지니, 어찌 늘 유지할 수 있겠소.”라고 하니, 당시 사람들이 아름다운 말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