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綱】 한漢나라 현종 효명황제顯宗 孝明皇帝영평永平 10년이다. 봄 2월에 광릉왕 유형廣陵王 劉荆이 죄가 있어 자살하니, 나라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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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보다 앞서 광릉왕 유형廣陵王 劉荆이 다시 관상가를 불러 말하기를 “내 모습이 선제先帝(광무제光武帝)와 유사한데 선제는 30세에 천하를 얻었다. 나도 지금 30세가 되었으니, 군대를 일으킬 수 있는가?”注+광무제光武帝가 붕崩함에 유형劉荊이 익명의 글을 써서 동해왕 유강東海王 劉彊에게 말하기를 “내 여러 관상가들의 말을 들어보니, 동해왕東海王은 귀함이 천자가 될 상이라 합니다. 군주가 붕망崩亡하면 여염에 있는 무리들도 오히려 도적 떼가 되어서 자기들이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하는데, 더구나 왕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하였다. 유강이 이 글을 봉함하여 올리자, 황제는 유형을 내보내어 하남河南의 궁宮에 머물게 하였다. 이때에 서강西羌이 배반하였는데, 유형은 천하가 유강으로 인해 놀라 변고가 있기를 바라서 은밀히 점성술을 잘하는 자를 맞이하여 함께 모의한 것이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마침내 유형을 광릉왕廣陵王으로 옮겨 봉하여 그의 봉국封國으로 보냈는데, 그 뒤에 유형이 다시 관상가를 불러 본문과 같이 말한 것이다. 하였다.
관상가가 관리에게 나와 이 사실을 고발하니, 유형은 황공하여 스스로 옥에 갇혔다. 황제는 은혜를 베풀어 이 일을 끝까지 조사하지 않았고,
조령詔令을 내려 관리와 백성들을 신하로 복속시키지 못하게 하고 조세를 받는 것만 예전과 같게 하였으며注+〈“조부득신속리민 유식조여고詔不得臣屬吏民 唯食租如故”는〉 그가 다시 불궤不軌(반역)를 도모할까 두려워하였으므로 관리와 백성들을 신하로 복속시키지 못하게 하고 오직 자기 봉국封國의 조세만 먹게 한 것이다., 국상國相과 중위中尉로 하여금 삼가 숙위宿衛하게 하였다.注+사使(하여금)는 상성上聲이다. 상相은 그 나라의 정승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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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유형劉荆이 또다시 무당을 시켜서 제사를 지내고 황제를 저주하자, 황제는 장수교위 번조長水校尉 樊鯈(번조) 등에게 조령詔令을 내려 그 옥사를 여럿이 다스리게 하였는데, 조사하는 일이 끝나자 〈번조 등이〉 유형을 죽일 것을 주청하였다.注+장수교위長水校尉는 장수長水의 오랑캐 기병을 관장하였다. 번조樊鯈는 번굉樊宏의 아들이니, 조鯈는 음이 주紬이다.
황제가 노하여 말하기를 “여러 경卿들은 그가 나의 아우이기 때문에 죽이고자 하는 것이니, 만일 나의 아들이었다면 경卿들이 과연 이처럼 주장하겠는가?” 하였다.
번조가 대답하기를 “천하는 고제高帝의 천하天下요 폐하의 천하가 아닙니다. ≪춘추春秋≫의 의리에, 군주와 어버이에게는 장차 시해弑害하려는 마음이 없어야 하니, 장차 시해하려는 뜻을 품으면 반드시 죽입니다.注+〈“군친무장 장이필주君親無將 將而必誅”는〉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의 글이다. 장將은 장차 시역弑逆의 일을 하려는 것이다.
신臣 등은 유형이 상上의 동모제同母弟인 것에 의탁하여 폐하께서 유념하시어 측은해하시기 때문에 감히 청하는 것이니, 만일 폐하의 아들이라면 명령을 청하지 않고 마음대로 죽였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황제는 탄식하였다.注+전專은 황제에게 청하지 않음을 이른다. 이해 2월에 유형이 자살하니, 나라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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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여름 윤4월에 황제가 남양南陽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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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상上이 남양南陽에 행차해서 교관校官의 자제들을 불러 아악雅樂을 작곡하여 ≪시경詩經≫ 〈녹명鹿鳴〉을 연주하게 하고注+교校는 학교이다., 황제가 직접 질나발[훈塤]과 젓대[호箎]를 타서 가락을 맞추어 아름다운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注+훈塤(질나발)은 허원許元의 절切이고 지篪(젓대)는 음이 늪池이니, 훈塤과 지篪는 모두 악기이다. 흙으로 만든 것을 훈塤이라 하니, 크기가 거위 알만 하고 위가 뾰족하고 밑은 평평하며 생김새가 저울추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구멍이 6개이다. 대나무로 만든 것을 지篪라 하니, 길이가 1척尺 4촌寸이고 둘레가 3촌寸이며 구멍은 7개이고 한 구멍은 위로 올라와 있는바 지름이 2분分인데 모두 8개의 구멍이니, 가로로 분다. 화和(가락에 맞춤)는 거성去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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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겨울 12월에 환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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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정홍丁鴻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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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능양후 정침陵陽侯 丁綝(정침)이 졸卒하니注+능양陵陽은 현縣의 이름이니 단양군丹陽郡에 속하였다. 침綝은 축림丑林의 절切이다., 그의 아들 정홍丁鴻이 봉작封爵을 세습해야 하는데, 상서上書하여 병을 칭탁하고 봉국封國을 아우인 정성丁盛에게 사양하였으나 황제가 이에 답하지 않았다.
장례를 마친 다음 정홍은 상복을 무덤가의 여막에 걸어놓고 도망하였다. 친구인 구강九江의 포준鮑駿이 동해東海에서 정홍을 만나 꾸짖기를
“옛날에 백이伯夷와 오吳나라의 계찰季札은 난세를 만나 시의적절하게 권도權道로 변통하여 행하였으므로 자기의 뜻을 펼칠 수 있었다.注+백이伯夷는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이니, 나라를 그의 아우 숙제叔齊에게 사양하였다. 계찰季札은 오왕 수몽吳王 壽夢의 막내아들이니, 여러 형이 그에게 나라를 사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계찰은 마침내 자기의 집을 버리고 밭을 갈았다. 이는 모두 때를 저울질하여 권도權道를 행한 것이요, 떳떳한 도道가 아니다. 백이伯夷는 주왕紂王의 때를 당하였고 계찰季札은 주周나라 말기를 당하였으므로 난세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형제의 사사로운 은혜 때문에 불멸不滅의 기업基業을 끊고 있으니, 옳은 일인가?” 하였다.
정홍은 그의 말에 감동하여 깨닫고 눈물을 흘리고는 마침내 돌아와 봉국封國으로 나아갔다. 포준이 인하여 상서上書해서 정홍의 경학과 지극한 행실을 천거하자, 상上이 정홍을 불러 시중侍中을 삼았다.注+항行(행실)은 거성去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