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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9)

자치통감강목(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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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年(164)
七年이라 春二月 邟鄕侯黃瓊注+邟, 音亢. 邟鄕, 城名, 在陽翟縣, 後改爲邟縣, 屬川郡.
黃瓊黃瓊
하다
諡曰忠이라하다 四方名士會其葬者 六七千人이러라
敎授於家할새 徐穉從之하여 咨訪大義러니 及瓊貴 穉絶不復交라가
至是 往弔進酹하고 哀哭而去하니 人莫知者러라 諸名士曰 必徐孺子也注+孺子, 穉字.라하다
於是 選能言者陳留茅容하여 輕騎追及이러니 爲沽酒市肉하니 穉爲飮食注+爲, 幷去聲, 下而爲․欲爲․爲制․爲陳同. 飮食, 如字讀.이라
問國家事한대 穉不答하고 更問稼穡한대 穉乃答之하여 以語諸人한대
或曰 可與言而不與言하니 孺子其失人乎인저 太原郭泰曰 不然하다 孺子之爲人 淸潔高廉하여
飢不可得食 寒不可得衣注+食, 讀曰飼, 下食母同. 衣, 去聲.어늘 而爲季偉飮食하니 此爲已知季偉之賢故也注+
郭泰郭泰
季偉, 容字.
所以不答國事者 是其智可及이요 其愚不可及也니라
泰博學하여 善談論이러니 初游雒陽 時人 莫識이어늘 陳留符融 一見嗟異하고 因以介於河南尹李膺하니 與爲友注+符, 姓也. 古者, 主有儐, 客有介. 介者, 因也, 言因人以相接見也.
後歸鄕里 諸儒送至河上하니 車數千兩이라 唯與泰同舟而濟注+自雒陽歸太原, 渡河而西北.러라
泰性明知人하여 好獎訓士類注+獎, 勸也. 茅容 年四十餘 耕於野하여 與等輩 避雨樹下할새 衆皆夷踞어늘 獨危坐注+夷, 平也. 踞, 蹲也. 危坐, 謂正襟盡前而坐.하니
泰見而異之하여 因請寓宿하다 旦日 殺鷄食母호되 餘半庋置하고 自以草蔬 與客同飯注+庋, 擧綺切, 板爲閣, 以藏物也. 謂以所餘半鷄, 置之於庋. 草, 粗也. 飯, 餐也.이어늘
泰曰 卿賢哉遠矣注+旣言賢哉, 又言遠矣, 言其賢去常人, 甚遠. 郭林宗 猶減三牲之具하여 以供賓旅어늘 而卿如此하니 乃我友也注+林宗, 泰字. 三牲之具, 謂養親之具也.라하고하여 對之揖하고 勸令從學하니라
鉅鹿孟敏 荷甑墮地어늘 不顧而去注+荷, 負也. 甑, 子孕切.한대 泰見問之하니 對曰 甑已破矣 視之何益이리오 泰以爲有分決이라하여 亦勸令遊學하니라
陳留申屠蟠 爲漆工하고 鄢陵庾乘 爲門士注+蟠, 薄官切. 鄢陵縣, 屬潁川郡. 乘, 石證切. 門士, 卽門卒.어늘 泰奇之러니 後皆爲名士하고
自餘 或出於屠沽卒伍로되 因泰獎進하여 成名者 甚衆이러라
問范滂曰 郭林宗 何如人 滂曰 隱不違親하고 貞不絶俗하여 天子不得臣이요 諸侯不得友하니 吾不知其他注+隱不違親, 介之推之類. 左傳僖公二十四年, 晉文公賞從亡者. 介之推不言祿, 祿亦弗及. 其母曰 “亦使知之 若何.” 對曰 “言, 身之文也. 身將隱, 焉用文之. 是求顯也.” 其母曰 “能如是乎, 與女偕隱.” 遂隱而死. 註曰 母子俱隱, 至死不出, 所謂不違親也. 貞不絶俗, 柳下惠之類. 柳下惠曰 “爾爲爾, 我爲我, 雖袒裼裸裎於我側, 爾焉能浼我哉.” 故由由然與之偕, 而不自失焉, 援而止之而止, 此正不絶俗之事.로라
泰擧有道로되 不就하니 勸之仕한대 泰曰 吾夜觀乾象하고 晝察人事하니 天之所廢 不可支也 吾將優游卒歲而已注+支, 猶持也.라하니라
이나 猶周旋京師하여 誨誘不息하니 徐穉以書戒之曰 夫大木將顚 非一繩所維 何爲栖栖不遑寧處注+顚, 仆也. 維, 繫也. 喩時將衰季, 非一人所能救也. 栖栖, 猶依依也.리오
泰感悟曰 謹拜斯言하여 以爲師表호리라
濟陰黃允 以雋才知名注+雋, 子悛切, 智過千人曰雋.이러니 泰見而謂曰 卿 高才絶人하니 足成偉器어니와 然當深自匡持 不然이면 將失之矣리라
司徒袁隗 欲爲從女求姻注+隗, 安之曾孫也. 從, 才用切.이러니 見允하고 歎曰 得壻如是足矣로라
聞而黜遣其妻注+允妻夏侯氏, 允黜其妻, 欲婿于袁也.러니 妻請大會宗親하고 數允隱慝而去하니 由是廢注+數, 上聲. 慝, 惡也.하다
與漢中晉文經으로 恃其才智하여 徵辟不就하고 託言療病京師하여 不通賓客하니
公卿大夫 遣門生問疾하고 郞吏雜坐其門이라 三公辟召 輒以訪之注+通鑑 “郞吏雜坐其門, 猶不得見. 三公所辟召者, 輒以詢訪之, 隨所臧否, 以爲與奪.”하니
符融 謂李膺曰 二子行業無聞이어늘 以豪傑自置하여 遂使公卿問疾하고 王臣坐門注+行, 去聲, 下至行同.하니
恐其小道破義하고 空譽違實하노니 特宜察焉이니라 然之러니 幷以罪廢하다
陳留仇香 至行純嘿하니 鄕黨 無知者러니 年四十 爲蒲亭長注+仇, 姓也. 蒲亭, 在陳留郡考城縣.하여 勸人生業하고 爲制科令하고 令子弟就學하고 賑䘏窮寡하니
朞年 大化 民有陳元 獨與母居러니 母詣香하여 告元不孝한대
驚曰 吾近日過元舍 廬落整頓하고 耕耘以時하니 此非惡人이요 當是敎化未至耳로다
母守寡養孤하여 苦身投老하니 奈何以一旦之忿으로 棄歷年之勤乎
且母養人遺孤하여 不能成濟하니 若死者有知 百歲之後 當何以見亡者 母涕泣而起어늘
乃親到元家하여 爲陳人倫하고 譬以禍福한대 感悟하여 卒爲孝子하니라
考城令王奐 署香主簿하고 謂之曰 聞在蒲亭 陳元不罰而化라하니 得無少鷹鸇之志邪注+左傳 “見無禮於君者誅之, 如鷹鸇之逐鳥雀也.”
香曰 以爲鷹鸇不若鸞鳳이라 不爲也로이다
奐曰 枳棘 非鸞鳳所集이요 百里 非大賢之路注+枳, 掌氏切, 木似橘. 棘, 小棗叢生者. 時奐爲縣令, 故自稱百里也.라하고 乃以一月奉資香하여 使入太學注+奉, 讀曰俸.하다
與符融比宇러니 融賓客盈室호되 常自守注+比宇, 屋邊聯比也.하니 謂之曰 今英雄四集하니 志士交結之秋니라
正色曰 天子設太學 豈但使人遊談其中耶아하고 高揖而去하다
以告郭泰한대 因就房謁之하고 泰嗟歎起하여 拜牀下曰 君 泰之師 非泰之友也로이다
雖宴居 必正衣服하고 妻子事之 若嚴君注+宴居, 閑暇無事之時.이러니 妻子有過어든 免冠自責하니
妻子庭謝思過하여 香冠이라야 妻子乃敢升堂하니 終不見其喜怒聲色之異러라 不應徵辟하고 卒於家하다
三月
隕石于鄠注+鄠縣, 屬扶風.
하다
◑夏五月 雨雹하다
◑荊州刺史度尙 擊桂陽艾縣賊하여 平之하다
度尙 募諸蠻夷하여 擊艾縣賊하여 大破之하니 降者數萬注+度, 姓也.이라
桂陽宿賊卜陽, 潘鴻等 逃入深山注+宿賊, 言積久爲賊者.이어늘 破其三屯하여 多獲珍寶
欲遂擊之로되 而士卒驕富하여 莫有鬪志 乃宣言 兵少하여 未可進이니 當須諸郡所發悉至하여 乃幷力攻之라하고
申令軍中하여 恣聽射獵注+申, 重也. 申令者, 旣下令而申言之.하니 兵喜皆出하다 乃密使人焚其營하니 獵者來還 莫不泣涕
人人慰勞하고 深自咎責注+以失火, 自咎責也.하고 因曰 陽等財寶 足富數世 諸卿 但不幷力耳 所亡少少하니 何足介意리오하니
衆咸憤踊이라 勅令秣馬蓐食하고 明旦 徑赴賊屯하니
陽等 自以深固라하여 不復設備 吏士乘銳하여 遂破平之하다 出兵三年 群寇悉定하니 封右鄕侯하다
冬十月 帝如章陵하다
公卿貴戚車騎萬計 徵求費役 不可勝極이라
護駕從事胡騰注+護駕從事, 蓋荊州刺史所遣護車駕者也.호되 天子 無外하여 乘輿所幸 卽爲京師注+公羊傳曰 “王者無外.”하니 臣請以荊州刺史 比司隷校尉하소서
自同都官從事호이다 帝從之하니 自是 肅然하여 莫敢干擾注+都官從事, 主察擧百官犯法者. 荊州刺史, 得察擧所部郡縣, 而不可得察擧扈從之臣, 若比司隷校尉, 則得察擧其姦, 故肅然也.러라
詔書多除人爲郞이어늘 太尉楊秉 上疏曰 太微積星 名爲郞位
入奉宿衛하고 出牧百姓注+積, 聚也. 天官書曰 五帝座後, 聚一十五星曰郞位.하나니 宜割不忍之恩하여 以斷求欲之路니이다 於是 乃止하다
段熲 擊當煎羌하여 破之하다
◑十二月 還宮하다


갑진년甲辰年(164)
나라 효환황제 연희孝桓皇帝 延熹 7년이다. 봄 2월에 항향후邟鄕侯(강향후) 황경黃瓊하였다.注+이니, 항향邟鄕의 이름으로 양적현陽翟縣에 있다. 뒤에 항현邟縣으로 이름을 고쳐 영천군潁川郡에 소속시켰다.
황경黃瓊이 죽자 시호를 이라 하였다. 사방의 명사名士 중에 그의 장례에 모인 자가 6, 7천 명이었다.
처음에, 황경이 집에서 생도들을 가르칠 적에 서치徐穉가 그에게 배우면서 대의大義를 물었는데, 황경의 신분이 귀해지자, 서치는 그와의 왕래를 끊고 다시는 사귀지 않았다.
서치가 이때에 이르러 가서 조문하고 술잔을 올리고는 슬피 하고 떠나가니, 아무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여러 명사名士들이 말하기를 “반드시 서유자徐孺子일 것이다.”注+유자孺子서치徐穉이다. 하였다.
】 이에 말을 잘하는 자인 진류陳留 사람 모용茅容을 뽑아서 경무장한 기병으로 쫓아가게 하였다. 모용이 서치徐穉를 위해 술을 받아주고 고기를 사주니, 서치가 그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다.注+(위하다)는 모두 거성去聲이니, 아래 ‘이위而爲’와 ‘욕위欲爲’, ‘위제爲制’, ‘위진爲陳’의 도 똑같다. 음식飮食은 본음대로 읽는다.
모용이 국가의 일을 묻자 서치는 대답하지 않았고, 다시 농사일을 묻자 서치가 그제야 대답하였다. 모용이 돌아와서 이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자,
혹자가 말하기를 하였다. 그러나 태원太原 사람 곽태郭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유자孺子의 사람됨은 청렴하고 고결하여
굶주려도 그에게 밥을 먹게 할 수 없고 추워도 그에게 옷을 입게 할 수가 없는데注+(밥)는 로 읽으니 아래 ‘식모食母’의 도 같다. (입히다)는 거성去聲이다., 계위季偉를 위해서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었으니, 이는 이미 계위의 어짊을 알았기 때문이다.注+계위季偉모용茅容이다.
곽태郭泰박학博學하여 담론談論을 잘하였다. 처음 낙양雒陽에서 유학遊學할 적에 당시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는데, 진류陳留 사람 부융符融이 한 번 보고는 감탄하여 기이하게 여기고 인하여 하남윤 이응河南尹 李膺에게 소개하니, 이응이 그와 더불어 벗이 되었다.注+이다. 옛날 주인에게는 돕는 이 있고, 에게는 돕는 가 있었다. 는 인함이니, 남의 도움으로 서로 접견接見함을 말한다.
곽태가 뒤에 향리鄕里로 돌아갈 적에 여러 선비들이 황하黃河 가까지 전송하였는데 수레가 수천 대였다. 이응은 오직 곽태와 한 배를 타고 건너갔다.注+낙양雒陽에서 태원太原으로 돌아가려면 황하를 건너 서북쪽으로 가야 한다.
곽태郭泰는 성품이 사람을 잘 알아보아서 선비들을 권장하여 가르치기를 좋아하였다.注+은 권함이다. 모용茅容은 40세가 넘어 들에서 밭을 갈다가 여러 사람들과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할 적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두 다리를 뻗고 걸터앉았는데, 모용은 홀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注+는 평평함이다. 는 걸터앉음이다. “위좌危坐”는 옷깃을 반듯하게 하고 앞으로 바싹 다가가 앉음(무릎 꿇음)을 이른다.
곽태가 이 모습을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서 인하여 그의 집에 우숙寓宿할 것을 청하였다. 아침에 모용이 닭을 잡아 어머니에게 올려 드시게 하고 나머지 반을 찬장에 두고는, 자신은 거친 채소를 가지고 손님과 함께 밥을 먹었다.注+거기擧綺이니, 판자로 (찬장)을 만들어 물건을 보관하는 것이다. 〈“여반기치餘半庋置”는〉 남은 반 마리의 닭을 찬장에 둠을 이른다. 는 거칢이다. 은 먹음이다.
곽태가 말하기를 “그대는 다른 사람보다 크게 어질다.注+현재賢哉’라고 말하고 또 ‘원의遠矣’라고 말했으니, 보통 사람보다 크게 어짊을 말한 것이다.곽림종郭林宗은 오히려 어버이에게 드릴 을 줄여서 손님과 나그네에게 대접하는데, 그대는 이와 같이 하니, 바로 나의 벗이다.”注+임종林宗곽태郭泰이다. “삼생지구三牲之具”는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한 음식(성찬)을 이른다. 하고는 일어나서 그와 마주하여 읍하고 학문에 종사할 것을 권하였다.
    茅容 茅容
거록鉅鹿 사람 맹민孟敏이 시루를 메고 가다가 땅에 떨어뜨렸는데 돌아보지 않고 가니注+는 짊어짐이다. (시루)은 자잉子孕이다., 곽태郭泰가 보고 물었다. 맹민은 대답하기를 “시루가 이미 깨졌습니다. 돌아본다고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하니, 곽태는 그가 결단력이 있다고 여겨 그에게도 경사京師에서 유학遊學할 것을 권하였다.
진류陳留 사람 신도반申屠蟠(신도반)은 옻칠하는 공인이었고, 언릉鄢陵 사람 유승庾乘(유승)은 문을 지키는 군사였는데注+박관薄官이다. 언릉현鄢陵縣영천군潁川郡하였다. 석증石證이다. “문사門士”는 바로 문을 지키는 병사이다., 곽태郭泰가 그들을 기이하게 여겼는바, 뒤에 모두 명사名士가 되었다.
그 나머지는 혹 가축을 도살하거나 술을 팔거나 군대의 졸병 출신이었으나, 곽태의 장려로 인하여 명성을 이룬 자가 매우 많았다.
혹자가 범방范滂에게 묻기를 “곽림종郭林宗은 어떠한 사람인가?” 하니, 범방이 대답하기를 “은둔하면서도 어버이를 떠나지 않고 바르면서도 세속을 끊지 않아서, 천자天子가 신하로 삼을 수 없고 제후諸侯가 벗으로 삼을 수 없으니, 나는 그 나머지는 알지 못한다.”注+은불위친隱不違親”은 개지추介之推(개자추介子推)의 무리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僖公 24년에 진 문공晉 文公이 자기를 따라 망명했던 자들에게 상을 줄 적에, 개자추가 녹봉祿俸을 말하지 않았고 녹봉이 또한 그에게 미치지 않았다.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군주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말은 몸의 문채입니다. 이 몸이 장차 은둔하려 하는데, 문채를 내는 것이 어찌 필요하겠습니까. 이는 이름이 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내 너와 함께 은둔하겠다.” 하고는 마침내 은둔하다가 죽었다. 에 말하였다.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은둔하여 죽음에 이르러도 나오지 않은 것은, 이른바 어버이를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부절속貞不絶俗”은 유하혜柳下惠의 무리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유유由由(유유悠悠)하게 그들과 함께 있어도 스스로 바름을 잃지 않아서 〈떠나가려 하다가도〉 남이 잡아당겨서 떠나가지 못하게 하면 떠나가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르면서도 세속을 끊지 않은 일이다. 하였다.
곽태郭泰가 있는 사람으로 천거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으니, 혹자가 출사出仕할 것을 권하였다. 곽태가 말하기를 “내 밤에 하늘의 (천문)을 보고 낮에 사람의 일을 살펴보니, 하늘이 폐기廢棄하는 바는 지탱할 수가 없다. 내 장차 한가로이 노닐면서 해를 마칠 뿐이다.”注+(지탱하다)는 와 같다.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경사京師를 오가며 사람들을 가르치고 유도하기를 그치지 않으니, 서치徐穉가 편지로 경계하기를 “큰 나무가 장차 쓰러지려 할 때에는 끈 하나로 동여맬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 세상을 연연하여 편안히 거처할 겨를이 없습니까.”注+은 넘어짐이고, 는 동여맴이다. 〈“대목장전 비일승소유大木將顚 非一繩所維”는〉 세상이 장차 말세가 되어서 한 사람이 능히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비유한 것이다. 서서栖栖(연연하다)는 의의依依와 같다. 하였다.
곽태가 감동하여 깨닫고 말하기를 “삼가 이 말에 절하여 사표師表로 삼겠다.” 하였다.
제음濟陰 사람 황윤黃允은 준걸스러운 재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는데注+자전子悛이니, 지혜가 1,000명을 뛰어넘는 것을 이라 한다., 곽태郭泰가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높은 재주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니 충분히 큰 그릇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마땅히 스스로 몸을 바르게 지켜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장차 잃게 될 것이다.” 하였다.
뒤에 사도 원외司徒 袁隗(원외)가 종녀從女(조카딸)를 위하여 혼처를 구하고자 하였는데注+원외袁隗원안袁安증손曾孫이다. (혈통은 같으나 직계直系가 다른 친족)은 재용才用이다., 황윤을 보고 감탄하기를 “이와 같은 사위를 얻으면 충분하다.” 하였다.
황윤이 이 말을 듣고 자기 아내를 내쳐 보냈는데注+황윤黃允하후씨夏侯氏였는데, 황윤이 아내를 내치고 원씨袁氏 집안의 사위가 되고자 한 것이다., 아내가 청하여 종친宗親들을 크게 모아놓고는 황윤의 숨겨진 악행을 열거하고 떠나갔다. 황윤은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 버려져 등용되지 못하였다.注+(하나하나 열거하다)는 상성上聲이다. 이다.
】 처음에 황윤黃允한중漢中 사람 진문경晉文經과 함께 자신의 재주와 지혜를 믿고서 에 나아가지 않고, 경사京師에서 병을 치료한다고 칭탁하고는 빈객賓客을 접견하지 않았다.
이에 공경公卿대부大夫문생門生을 보내어 문병을 하였고, 의 관리가 그 문 앞에 뒤섞여 앉아 있었다. 또 삼공三公이 선비를 불러 관직을 제수할 때마다 번번이 이들을 방문하여 자문을 구하였다.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의 관리가 그의 문 앞에 뒤섞여 앉아 있어도 그들을 만날 수가 없었으며, 삼공三公이 선비를 불러 벽소辟召할 때마다 번번이 이들을 방문하여 자문을 구해서 이들이 포폄하는 말을 따라 인정해주기도 하고 인정해주지 않기도 했다.” 하였다.
부융符融이응李膺에게 이르기를 “이들 두 사람은 조행操行공업功業이 알려진 것이 없는데도 호걸豪傑로 자처하여, 마침내 공경公卿으로 하여금 문병하게 하고 왕의 신하로 하여금 문에 앉아있게 한다.注+(행실)은 거성去聲이니, 아래 ‘지행至行’의 도 같다.
나는 이들이 작은 를 파하고 헛된 명성이 실제와 어긋날까 두려우니, 특별히 살피시오.” 하니, 이응이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뒤에 두 사람 모두 로 버려져 등용되지 못하였다.
진류陳留 사람 구향仇香이 지극한 행실(효행)이 있으나 순수하고 침묵하니, 향당鄕黨에 그를 알아주는 자가 없었다. 40세에 포정蒲亭이 되어注+이다. 포정蒲亭진류군 고성현陳留郡 考城縣에 있다. 백성들에게 생업生業을 권장하고, 백성들을 위하여 과령科令(법령)을 만들고 자제子弟들로 하여금 취학就學하게 하였으며 곤궁한 자들을 구휼하니,
1년 만에 크게 교화가 되었다. 백성 중에 진원陳元이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구향에게 찾아와서 진원의 불효를 고발하였다.
구향이 놀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근일近日 진원의 집을 방문했을 적에, 거처하는 집이 정돈되었고 제때에 밭을 갈고 김을 매었으니,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요 마땅히 교화敎化가 지극하지 못해서일 것입니다.
어머니가 과부로 절개를 지키면서 어린 아들을 기르느라 고생하며 늙으셨는데, 어찌 하루아침의 분노로 여러 해의 수고를 버린단 말입니까.
또 어머니가 남편이 남겨둔 어린 고아를 제대로 길러서 성취시키지 못했으니, 만약 죽은 남편이 이것을 안다면 백세百歲의 뒤에 마땅히 어떻게 죽은 남편을 만나겠습니까.” 어머니가 이 말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일어났다.
구향이 마침내 직접 진원의 집에 찾아가서 진원을 위하여 인륜人倫을 말해주고 화복禍福으로 타이르니, 진원이 감동하고 깨달아서 끝내 효자孝子가 되었다.
고성현령 왕환考城縣令 王奐구향仇香주부主簿로 임용하고, 그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포정蒲亭에 있을 적에 진원陳元에게 형벌을 가하지 않고 교화시켰다 하니, 매와 새매의 뜻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注+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문공文公 18년에 “군주에게 무례無禮한 자를 보면 주벌하기를 매와 새매가 새와 참새를 쫓듯이 한다.” 하였다. 하였다.
구향이 말하기를 “매와 새매가 난새와 봉황만 못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였다.
왕환이 말하기를 “탱자나무와 가시나무는 난새와 봉황이 앉을 곳이 아니요, 100리는 대현大賢이 갈 길이 아니다.”注+(탱자나무)는 장씨掌氏이니, 나무가 귤나무와 유사하다. 은 작은 대추나무로 총생叢生한다. 이때 왕환王奐현령縣令이었으므로 자신을 라 칭하였다. 하고는, 마침내 한 달 봉급을 구향에게 주어서 태학太學에 들어가게 하였다.注+(봉급)은 으로 읽는다.
구향仇香부융符融과 집이 나란히 있었는데, 부융은 손님들이 방에 가득하였으나 구향은 항상 자신의 몸가짐을 지켰다.注+비우比宇”는 집이 나란히 이어져 있는 것이다. 부융이 그에게 이르기를 “지금 영웅이 사방에서 모이니, 뜻 있는 선비와 교제하여 긴밀한 관계를 맺을 시기입니다.” 하자,
구향이 정색하며 말하기를 “천자天子태학太學을 설치한 것이 어찌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놀고 이야기하게 하려는 것이겠습니까.” 하고는, 〈두 손을 모아〉 높이 읍하고 떠나갔다.
부융이 이 사실을 곽태郭泰에게 말하자, 곽태가 부융의 소개로 구향의 에 찾아가서 그를 만나보고는, 감탄하고 일어나 아래에서 절하며 말하기를 “은 나의 스승이지, 나의 벗이 아닙니다.” 하였다.
구향은 비록 편안히 거처할 때에도 반드시 의복을 정제整齊하였고, 처자妻子는 그를 섬기기를 엄군嚴君(아버지)과 같이 하였다.注+연거宴居”는 한가閑暇하여 일이 없는 때이다. 처자에게 잘못이 있으면 을 벗고 자책하니,
처자는 뜰에서 사죄하며 자신들의 잘못을 생각하다가 구향이 을 써야 비로소 에 올랐는데, 끝내 기뻐하고 노여워하여 목소리와 얼굴빛이 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구향은 조정과 경대부卿大夫들의 징벽徵辟에 응하지 않고 집에서 별세하였다.
】 3월에 호현鄠縣(호현)에 운석이 떨어졌다.注+호현鄠縣부풍扶風에 속하였다.
】 여름 5월에 우박이 내렸다.
형주자사 도상荊州刺史 度尙계양桂陽애현艾縣에 있는 을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도상度尙이 여러 만이蠻夷들을 모집하여 애현艾縣의 도적을 공격해서 대파하니, 항복한 자가 수만 명이었다.注+이다,
예전부터 있던 계양桂陽의 도적인 복양卜陽반홍潘鴻 등이 도망하여 깊은 산으로 들어가자注+숙적宿賊”은 오랫동안 도적질을 한 자를 이른다., 도상이 그들의 주둔지 세 곳을 격파하여 진귀한 보물을 많이 얻었다.
도상은 끝까지 이들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사졸士卒들은 교만하고 부유하여 싸울 뜻이 없었다. 도상은 마침내 선언하기를 “병력이 적어서 전진할 수가 없다. 마땅히 여러 에서 징발한 군대가 모두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힘을 합하여 공격해야 한다.” 하고는,
군중軍中에 거듭 명령하여 마음대로 활을 쏘고 사냥하게 하니注+은 거듭함이니, “신령申令”은 이미 명령을 내리고 거듭 말한 것이다., 병사들이 기뻐하여 모두 사냥하러 나갔다. 도상이 이에 은밀히 사람을 시켜서 자신의 진영에 불을 지르니, 사냥을 갔던 자들이 돌아와서 〈창고와 막사가 불에 탄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도상은 한 사람 한 사람 위로하고 자신이 잘못하여 불을 냈다고 깊이 자책하고는注+〈“심자구책深自咎責”은〉 불이 난 것을 스스로 허물하고 책망한 것이다., 이어서 말하기를 “복양 등의 재화와 보물은 충분히 그대들을 몇 대 동안 부유하게 할 수 있는데, 그대들이 다만 힘을 합하여 싸우지 않을 뿐이다. 이번에 화재로 잃은 것이 그리 많지 않으니, 어찌 개의할 것이 있는가.” 하니,
군사들이 모두 분발하여 기세가 등등하였다. 도상은 명령을 내려서 말에게 먹이를 먹이고 새벽밥을 먹고는, 다음 날 아침 곧바로 적의 주둔지로 달려갔다.
복양 등은 스스로 성벽이 깊고 견고하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대비책을 세우지 않고 있었는데, 관병官兵예기銳氣를 타고서 마침내 격파하여 평정하였다. 도상이 출병出兵한 지 3년 만에 여러 도적이 모두 평정되니, 도상에게 우향후右鄕侯를 봉하였다.
】 겨울 10월에 황제가 장릉章陵에 행차하였다.
】 이때 공경公卿귀척貴戚들의 수레와 기병騎兵으로 헤아려졌고, 백성들에게 경비와 노역을 징수하고 요구한 것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호가종사護駕從事호등胡騰이 아뢰기를注+호가종사護駕從事형주자사荊州刺史거가車駕를 호위하라고 보낸 자이다.천자天子는 밖이 없어서 승여乘輿가 행차하는 곳이 바로 경사京師가 되니注+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왕자王者는 밖이 없다.” 하였다., 은 원컨대 형주자사荊州刺史사례교위司隷校尉에 견주어주소서.
그리하면 이 스스로 도관종사都官從事와 똑같이 처리하겠습니다.” 하니,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이로부터 〈호종扈從하는 신하들이〉 숙연肅然해져서 백성들을 소요하게 하는 일이 없었다.注+도관종사都官從事백관百官 중에 법을 범한 자를 살피고 탄핵하는 일을 주관한다. 형주자사荊州刺史는 자기 부내部內군현郡縣을 살피고 탄핵할 수 있으나 호종扈從하는 신하를 살피고 탄핵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약 사례교위司隷校尉에 견주면 호종하는 신하들의 간악함을 살피고 탄핵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호종하는 신하들이〉 숙연해진 것이다.
조서詔書를 내려 낭관郞官으로 제수한 사람이 많았는데, 태위 양병太尉 楊秉상소上疏하기를 “
낭관郎官은 들어와서는 숙위宿衛를 받들고 나가서는 백성을 다스리니注+은 모임이다.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에 “오제좌五帝座 뒤에 15개의 별이 모여 있는 것을 낭위郞位라 한다.” 하였다., 마땅히 차마 하지 못하는(연연해하는) 은혜를 잘라내어 구하고 바라는 길을 끊어야 합니다.” 하니, 이에 마침내 낭관郎官의 제수를 중지하였다.
단경段熲당전강當煎羌을 격파하였다.
】 12월에 황제가 환궁還宮하였다.


역주
역주1 (穎)[潁] : 저본에는 ‘穎’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潁’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 더불어……잃었구나 : 이 내용은 ≪論語≫ 〈衛靈公〉의 “더불어 말할 만한데 더불어 말하지 않는다면 사람을 잃고,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않은데 더불어 말한다면 말을 잃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람도 잃지 않고 또한 말도 잃지 않는다.[可與言而不與之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知者 不失人 亦不失言]”라고 한 孔子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다.
역주3 그의 지혜로움은……것 : 이 내용은 ≪論語≫ 〈公冶長〉의 “〈甯武子는〉 나라에 道가 있으면 지혜로웠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어리석었으니, 그의 지혜로움은 미칠 수 있지만 그의 어리석음은 미칠 수 없다.[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也 其愚不可及也]”라고 한 孔子의 말씀으로, 이는 그의 지혜로움은 크게 높지 아니하여 다른 사람들이 따라갈 수 있지만 그의 어리석음은 경지가 매우 높아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음을 말씀한 것인바, 어리석음은 진짜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다고 여김을 이른 것이다.
역주4 세 희생 : 원문의 ‘三牲’은 세 가지 가축으로 소와 羊, 돼지를 이르는데, 옛날 이 세 가지를 제사의 희생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三牲’이라 한 것이다.
역주5 유하혜가……있겠는가 : ≪孟子≫ 〈萬章 下〉에 보인다.
역주6 조정과……徵辟 : 徵辟은 布衣를 불러 出仕하게 하는 것인데, 조정에서 부르는 것을 徵, 三公 이하가 부르는 것을 辟(辟召)이라 한다.
역주7 百里 : 한 縣의 관할 범위가 百里였으므로, 百里는 縣의 대칭으로 쓰였다.
역주8 隕石于鄠 : “≪資治通鑑綱目≫에 隕石이 떨어졌다고 쓴 것이 12번이니, 이를 제외하고 쓴 적이 없는 것은 史官이 빠뜨린 것이다.[綱目書隕石十有二 舍是無書者矣 史失之也]다” ≪書法≫
역주9 太微宮에……합니다 : 황제 주위의 要職인 郎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太微宮은 北斗星의 남쪽에 있는 10개의 별로 황제의 거처를, 郞位는 太微宮 五帝座 뒤에 모여 있는 15개의 별로 낭관을 이른다.

자치통감강목(9)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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