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魏旣遷洛陽에 北邊荒遠하고 因以饑饉하니 百姓困弊라
乃加僕射源懷行臺
하여 使持節巡行北邊
注+① 魏道武置行臺之官於鄴․中山, 今置於北邊.하여 賑貧乏
하고 考殿最
하여 事之得失
을 先決後聞
한대 懷通濟有無
하니 飢民賴之
러라
沃野鎭將于祚
는 后之世父
라 與懷通婚
注+② 沃野, 漢朔方郡之屬縣也. 魏平赫連, 與統萬同置鎭, 不在六鎭之數. 世父, 伯父承世嫡者. 按本傳, 后乃于勁之女, 勁嫡兄烈, 乃祚之父. 推此而言, 祚乃后之兄也. 以于烈傳前有烈爲后世父之文故誤也.이러니 時
에 于勁方用事
하여 勢傾朝野
라 祚頗有受納
이러니
懷將入鎭에 祚郊迎道左호되 懷不與語하고 即劾奏免官하다
懷朔鎭將元尼須는 與懷舊交어늘 貪穢狼籍러니 置酒謂懷曰 命之長短이 繫卿之口니라
懷曰 今日源懷與故人飲酒之坐는 非鞫獄之所也요 明日公庭이 始爲使者檢鎭將罪狀之處耳라하고 竟案抵罪하다
懷又奏邊鎭事少나 而置官猥多하여 沃野一鎭에 自將以下가 八百餘人이니 請一切五分損二하노이다하니 魏主從之하다
目
【目】 成都城 안에는 식량이 다 떨어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는데, 劉季連에게 다른 계책이 없었다. 梁主(蕭衍)가 主書를 파견하여 詔書를 전하여 유계련의 항복을 받아내었는데, 유계련이 웃옷을 벗어서 몸통을 드러내고 죄를 청하였다.
鄧元起가 유계련을 성 밖으로 옮기게 하고 얼마 뒤에 그곳으로 가서 그를 예우하니, 유계련이 사죄하기를 “이렇게 될 줄 진작 알았더라면 어찌 이전과 같은 일이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등원기가 유계련을 호송하여 建康에 이르렀는데, 東掖門에 들어가서는 몇 걸음에 한 번씩 이마를 땅에 대고 절을 하자
梁主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卿은 劉備를 흠모하려고 하였으나, 일찍이 公孫述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니, 臥龍과 같은 신하가 어찌 없어서였겠는가.”라고 하고는 사면하여 평민으로 강등하였다.
注+① 後漢 光武帝 초기에 公孫述이 蜀을 차지하여 황제라고 자칭하였다. 어떤 이가 투항하라고 권하자, 공손술이 말하기를 “예부터 어찌 투항한 천자가 있단 말인가.” 하였다. 臥龍은 諸葛亮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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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范雲은 마음을 다하여 군주(蕭衍)를 섬겨서 아는 것은 시행하지 않은 일이 없었고, 번잡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노력하였다.
그가 卒하자 신료들은 沈約이 樞管을 담당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注+① “樞管”은 중요한 政務를 담당한다는 뜻이다. 上(蕭衍)은 심약이 경솔하여 尙書左丞 徐勉만 못하다고 여겨 마침내 서면과 右衛將軍 周捨를 함께 국정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주사는 아량이 서면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깨끗하고 간결함이 그보다 뛰어났으니, 두 사람은 모두 어진 재상으로 칭송받았다.
서면은 늘 表文을 올려 아뢸 때마다 초고를 불태웠고, 주사는 20여 년 동안 機密에 참여하여 國史ㆍ詔誥ㆍ儀禮ㆍ法律 및 軍事에 관한 전략을 모두 관장하면서 사람들과 하루 종일 농담을 하면서도 끝내 기밀 사항을 누설하지 않았으니, 관리들이 더욱 승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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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謝朏가 일 년 남짓 도망쳐 숨어 살다가 하루아침에 가벼운 배를 타고 스스로 대궐로 나아가자, 〈梁主(蕭衍)가〉 그를 司徒 尙書令으로 삼았다.
사비가 다리에 병이 있어 배알할 수 없다고 말하고는 角巾 차림에 흰 수레를 타고 雲龍門으로 가서 謝恩하였는데, 〈梁主가 사비에게〉 조서를 내려 작은 수레를 타고서 자리로 나아가게 하였다.
注+① “白輿”는 ≪資治通鑑≫에 ‘自輿’로 되어 있다.
다음 날 아침에 梁主가 사비의 집으로 행차하여 잔치를 열고 담소를 나누며 무척 기뻐하니, 사비가 자신의 본래 마음을 굳게 아뢰었으나 〈梁主가〉 허락하지 않았다.
사비는 평소 번잡한 일을 싫어하여 직무를 살피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무척 실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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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梁나라 司州刺史 蔡道恭이 北魏의 군대가 공격해올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장군 楊由를 파견하여 성 밖에 거주하던 백성들을 인솔하여 賢首山을 지키게 하고, 세 개의 木柵을 만들도록 하였다.
元英이 군대를 이끌고 목책을 포위하니, 목책 안에 있던 백성들이 양유의 목을 베어 북위에 항복하였다.
任城王 元澄이 統軍 党法宗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나누어 東關을 공격하게 하여 關要ㆍ潁川ㆍ大峴의 세 성을 함락하니, 白塔ㆍ牽城ㆍ淸溪가 모두 무너졌다.
注+① 党은 底朗의 切이니, 姓이다.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霍州에 北潁川郡이 있는데, 潁川 등 세 곳의 縣을 관할한다.” 하였다. 당법종 등이 진격하여 焦城을 함락하고 淮陵을 격파하였다.
注+② 淮陵은 마땅히 睢陵이 되어야 한다. 齊나라는 鍾離에 徐州를 두었고, 또 鍾離郡의 경계에 濟陰郡 睢陵縣을 僑置하였다. ≪五代志≫에 “鍾離郡 化明縣은 옛날에 睢陵이라 하였는데, 濟陰郡을 설치하였다. 化明은 唐나라 濠州의 招義縣이다.”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宋志≫에 ‘南徐州는 淮陵郡을 관할하는데, 睢陵과 淮陵은 모두 漢徐部에 속한다.’고 하였다. 이때에 이미 鍾離에 徐州를 두었으니, 그렇다면 역시 鍾離의 경계에 淮陵을 둔 것이다.” 하였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
이보다 앞서 양나라가 馮道根을 파견하여 阜陵을 수비하도록 하였는데, 처음에 도착하여 성과 해자를 보수하고 척후를 멀리 보내어 마치 적이 쳐들어올 것처럼 대비하니,
注+③ ≪梁書≫ 〈馮道根傳〉에 “南梁太守로 阜陵의 수비를 관할하였다.” 하였다. 사람들이 크게 비웃었다.
풍도근이 말하기를 “방어할 때는 겁을 내는 듯하지만, 전투에 임해서는 용감히 싸운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注+④ 방어할 때는 겁을 내는 듯하지만, 전투에 임해서는 용감히 싸운다는 것이다. 성이 완전히 방비 태세를 갖추기 전에 당법종 등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얼굴빛이 변하였다.
풍도근은 명을 내려 성문을 활짝 열게 하고는 옷을 느슨히 풀고 성에 올라 정예병을 내보내어 전투를 치러 그들을 격파하였다. 북위의 군대가 풍도근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고, 전투를 치렀으나 또 패배하자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물러갔다.
양나라가 이에 풍도근을 豫州刺史로 삼았다.
注+⑤ 이때에 梁나라의 豫州는 晉熙에 治所를 두었으니, 馮道根이 여전히 阜陵을 방비하였기에 특별히 刺史의 직함을 준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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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北魏가 洛陽으로 천도하고 나서 북쪽의 변경은 황량하며 거리가 멀고 이어서 기근까지 들자, 백성들은 곤궁하여 피폐해졌다.
이에 僕射 源懷에게
의 직임을 더하여 符節을 가지고 북방 변경을 순행하여
注+① 北魏의 道武帝(拓跋珪)가 行臺를 鄴城과 中山에 두었는데, 지금에는 北邊에 둔 것이다.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휼하고 관리들의 고과를 살펴 일의 득실을 살펴 먼저 처결하고 나중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원회가 백성들에게 있고 없는 것을 서로 유통하여 구제하도록 하니, 굶주린 백성들이 도움을 받았다.
沃野鎭將 于祚는 황후의 世父인데 원회와는 혼인으로 맺어진 인척관계였다.
注+② 沃野는 漢나라 朔方郡에 소속된 縣이다. 北魏가 赫連을 평정하고 統萬과 동일하게 鎭을 설치하였으나 六鎭의 수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世父는 대대로 적통을 이은 伯父이다. 〈于烈傳〉을 살펴보면, 황후는 바로 于勁의 딸로, 于勁의 맏형 우렬은 바로 于祚의 부친이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자면 우조는 바로 황후의 오빠이다. 〈于烈傳〉에 앞서 우렬이 황후의 世父가 된다는 문장이 있었기 때문에 잘못 알았던 것이다. 당시에 于勁이 정권을 잡아 세력이 朝野에 권세를 떨쳐 우조는 제법 많은 뇌물을 받았다.
원회가 鎭으로 들어갈 적에 우조가 교외의 길가에서 맞이하였으나 원회는 그와 대화를 하지 않고 즉시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서 그를 면직시켰다.
懷朔鎭將 元尼須는 원회와 오랜 친구 사이였으나, 뇌물을 탐하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술자리를 마련하여 원회에게 말하기를 “내 목숨의 길고 짧음은 卿의 말 한마디에 달려 있네.”라고 하니,
원회가 말하기를 “오늘은 내가 옛 친구와 술을 마시는 자리이지 국문하는 곳이 아니네. 내일 法庭이 비로소 使者가 鎭將의 죄상을 조사하는 곳이 될 것이네.”라 하고, 결국 그의 죄상을 조사하여 처벌하였다.
원회가 또 상주하기를 “변방의 鎭에는 일이 적은데, 관원의 정원이 너무 많습니다. 沃野는 하나의 鎭인데, 장수 이하 관원이 800여 명이니, 전체 관원의 5분의 2를 덜어내십시오.”라고 하니, 魏主(元恪)가 그의 말을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