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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6)

자치통감강목(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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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寅年(B.C.7)
갑인년(B.C.7)
二年이라 春二月 하다
[] 나라 효성황제孝成皇帝 수화綏和 2년이다. 봄 2월에 승상丞相 적방진翟方進하였다.
熒惑 守心注+心爲明堂, 熒惑守心, 王者惡之. 火曰熒惑星, 熒惑, 天子理也. 雖有明天子, 必視熒惑所在.이어늘 丞相府議曹李尋 奏記方進하여注+議曹, 職在論議, 自公府至州郡, 皆有之.호되
[] 이때에 형혹성熒惑星(형혹성)이 심성心星의 별자리에 머물고 있었는데注+심성心星명당明堂이 되니, 왕자王者형혹성熒惑星심성心星의 별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싫어한다. 화성火星을 형혹성이라 하니, 형혹은 천자天子가 다스려야 할 것이다. 비록 현명賢明천자天子라도 반드시 형혹성이 있는 곳을 살펴본다., 승상부丞相府의조議曹이심李尋적방진翟方進에게 주기奏記하여 말하기를注+의조議曹는 직책이 일을 의논함에 있으니, 공부公府(삼공三公관부官府)로부터 주군州郡에 이르기까지 모두 있었다.
災變迫切하여 大責日加하니 闔府三百餘人이라 唯君侯 擇其中與盡節轉凶注+三百餘人, 謂丞相之官屬也.하라하니
재변災變이 절박하여 큰 견책이 날로 더해갑니다. 승상부丞相府의 관원이 3백여 명이니, 부디 군후君侯께서는 이 중에서 함께 충절忠節을 다하여 흉함을 돌려 길하게 만들 사람을 선택하십시오.” 하니注+③ “삼백여인三百餘人”은 승상丞相관속官屬을 이른다.,
方進 憂之하여 不知所出이러라
적방진이 이것을 근심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郞賁麗 善爲星하여 言大臣宜當之注+郞, 官稱也. 賁, 音肥. 賁麗, 姓名. 善爲星, 謂善能推占星曆.라한대
마침 낭관郞官비려賁麗(비려)가 점성술占星術을 잘하여, 대신大臣이 마땅히 이 재앙을 감당해야 한다고 말하니注+관명官名이다. 는 음이 이니 비려賁麗는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선위성善爲星”은 별과 책력冊曆을 미루어 점을 잘 치는 것을 이른다.,
乃召見方進하여 賜冊責讓하고 使尙書令으로 賜上尊酒十石, 養牛一注+冊, 卽策書. 策書者, 編簡也. 其制長二尺, 短者半之, 篆書起年月日, 稱皇帝, 以命諸侯王公. 以罪免, 亦賜策書而以隷書, 凡一木兩行, 唯此爲異也. 律 “稻米一斗得酒一斗爲上尊, 稷米一斗得酒一斗爲中尊, 粟米一斗得酒一斗爲下尊.” 一說 “稷, 卽粟也. 中尊者, 宜爲黍米, 不當言稷.” 且作酒, 自有澆醇之異, 爲上中下耳, 非必繫之米. 養牛, 牢養之牛, 肥牛也.하니 方進 卽日自殺하다
은 마침내 적방진을 불러 보고는 책서策書를 내려 책망하고, 상서령尙書令으로 하여금 상준上尊(준)의 술 열 섬과 살진 소 한 마리를 하사하니注+은 바로 책서策書이니 책서策書란 죽간을 엮은 것이다. 그 제도制度에 긴 것은 2이고 짧은 것은 절반인데, 전서篆書을 쓰고 황제皇帝를 칭하여 제후諸侯왕공王公에 명한다. 죄로 면직免職할 적에도 책서策書를 하사하되, 예서隷書로 쓰고 한 목판에 두 줄을 쓰니, 이 점만이 다르다. 법률法律에 “백미白米 한 말에서 술 한 말을 얻는 것을 상준上尊(준)이라 하고 직미稷米(맵쌀) 한 말에서 술 한 말을 얻는 것을 중존中尊이라 하고, 좁쌀 한 말에서 술 한 말을 얻는 것을 하준下尊이라 한다.” 하였다. 일설에 “은 바로 조이니, 중존中尊은 마땅히 기장쌀로 빚은 술이 되어야 하고 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또 술을 만들 적에는 본래 옅고 진한 차이가 있어서 상준上尊중존中尊하준下尊이 될 뿐이니, 반드시 쌀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양우養牛”는 〈국가에서 희생을 기르는〉 우리에서 기른 소이니, 살진 소이다., 적방진은 당일에 자살하였다.
秘之하고 遣九卿하여 冊贈印綬하고 賜乘輿秘器하고 親臨弔者數注+印綬, 丞相高陵侯印綬也. 秘器, 梓棺, 以凶器, 故秘之. 數, 音朔.이요 至禮賜하여도 異於他相故事注+漢舊儀 “丞相薨, 車駕往吊, 賜棺斂具, 賜錢葬地, 葬日, 公卿已下會葬焉.”하니라
은 이것을 숨기고 구경九卿을 보내 책서策書인수印綬를 내려주고 수레와 궁중의 비기秘器를 하사하고, 직접 몇 차례 가서 조문하였으며注+⑥ “인수印綬”는 승상丞相 고릉후高陵侯의 인수이다. “비기秘器”는 가래나무 이니, 흉한 기물器物이므로 라 한 것이다. (자주)은 음이 이다., 예우와 하사한 것이 다른 재상의 고사故事보다 특별하였다.注+⑦ 《한구의漢舊儀》에 “승상丞相이 죽으면 황제의 거가車駕가 가서 조문하고 관곽棺椁염습斂襲할 도구를 하사하고 금전金錢장지葬地를 하사하며, 장례하는 날에 공경公卿 이하가 회장會葬했다.” 하였다.
司馬公曰
[] 사마공司馬公(사마광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晏嬰 有言호되 天命不慆하여 不貳其命注+慆, 他刀切, 疑也, 慢也.이라하니
안영晏嬰이 ‘천명天命은 의심스럽지 않아서 그 을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注+타도他刀이니, 의심함이요 함부로 함이다.,
禍福之至 安可移乎 藉其可移라도 楚昭, 宋景 猶不肯爲어든 況不可乎注+藉之爲言, 借也, 假也. 設爲之言, 以發所欲言之意. 左傳哀六年 “有雲如衆赤烏, 夾日以飛三日. 楚子使問於周太史, 周太史曰 ‘其當王身乎. 若禜之, 可移於令尹‧司馬.’ 王曰 ‘除腹心之疾而寘諸股肱, 何益.’ 遂弗禜.” 史記 “宋景公時, 熒惑守心, 景公憂之, 司星子韋曰 ‘可移於相.’ 公曰 ‘相, 吾之股肱.’ 曰 ‘可移於民.’ 公曰 ‘君者, 待民.’ 曰 ‘可移於歲.’ 公曰 ‘歲饑民困, 吾誰爲君.’ 子韋曰 ‘天高聽卑. 君有仁人之言三, 熒惑宜有動.’ 候之, 果徙三度.” 禜, 音詠, 祭名. 心, 宋之分野.
오는 화복禍福을 어찌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겠는가. 가령 옮길 수 있더라도 나라 소왕昭王나라 경공景公도 행하려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옮길 수 없는 것이겠는가.注+라는 말은 빌림이요 가령이다. 가설하는 말로써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애공哀公 6년에 “붉은 까마귀 떼와 같은 구름이 해를 끼고 3일 동안 날아다니자, 나라 소왕昭王이 사신을 보내 나라 태사太史에게 물었다. 나라 태사가 말하기를 ‘이 재앙이 아마도 의 몸에 당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사[(영)]를 지내면 영윤令尹사마司馬에게 옮길 수 있습니다.’ 하니, 소왕은 ‘자신의 심복心腹의 병을 제거하여 여러 고굉股肱대신大臣에게 준다면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하였다. 《사기史記》에 “나라 경공景公 때에 형혹성熒惑星심성心星의 별자리에 머물러 있으니, 경공景公이 이를 걱정하였다. 사성司星자위子韋가 ‘이 를 정승에게 옮길 수 있습니다.’ 하니, 은 ‘정승은 나의 고굉股肱이다.’ 하였다. 또다시 말하기를 ‘백성에게 옮길 수 있습니다.’ 하니, 은 ‘군주는 백성이 있어야 군주 노릇 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다시 말하기를 ‘연사年事(그 해의 농사)에 옮길 수 있습니다.’ 하니, 은 ‘농사가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하면 내 누구에게 군주 노릇을 하겠는가.’ 하였다. 자위가 말하기를 ‘하늘은 높은 곳에 있지만 낮은 곳의 말을 다 듣습니다. 군주께서 인인仁人의 말씀을 세 번 하셨으니, 형혹성이 마땅히 움직여 옮겨갈 것입니다.’ 하였는데, 살펴보니 과연 3를 옮겨갔다.” 하였다. 은 음이 이니 제사의 이름이다. 심성心星나라의 분야分野이다.
方進 罪不至死而誅之하여 以當大變하니 誣天也 隱其誅而厚其葬하니 誣人也
적방진翟方進의 죄가 죽을죄에 이르지 않았는데 그를 죽여서 큰 변고變故를 감당하게 하였으니 이는 하늘을 속인 것이요, 그의 죽음을 숨기고 장례를 후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을 속인 것이다.
孝成 欲誣天人이로되 而卒無所益하니 可謂不知命矣로다
三月 帝崩注+壽四十六.하다
[] 3월에 황제皇帝하였다.注+① 향년이 46세였다.
帝素彊하여 無疾病注+自彊, 以爲無疾病也.이라
[] 황제皇帝는 평소에 강건强健하여 질병이 없다고 여겼다.注+① 스스로 강건하여 질병이 없다고 여긴 것이다.
楚王, 梁王 來朝하여 明旦當辭去注+楚王, 名衍, 孝王囂之子.하고 又欲拜孔光爲丞相하여 已刻侯印書贊注+贊, 謂延拜之文, 贊, 進也. 延進而拜之也. 書贊者, 書贊辭於策也.하다
그런데 이때에 초왕楚王양왕梁王이 조회 와서 다음 날 아침에 하직하고 떠나기로 하였고注+초왕楚王은 이름이 (연)이니, 효왕孝王 유효劉囂의 아들이다., 또 공광孔光승상丞相으로 제수하고자 하여 이미 을 새겨놓고 을 써놓았었다.注+은 벼슬을 승진시켜 제수除授하는 글을 이른다. 은 올림이니, 승진시켜 제수한다는 뜻이다. 서찬書贊하는 글을 쓴 것이다.
昏夜平善이러니 鄕晨 欲起라가 不能言而崩注+鄕, 讀曰嚮.하니 民間讙譁하여 咸歸罪趙昭儀
초저녁에도 평안하고 좋았는데, 새벽녘에 일어나려고 하다가 말도 하지 못하고 하니注+(향하다)은 으로 읽는다., 민간에서 큰소리로 떠들면서 죄를 모두 조소의趙昭儀에게 돌렸다.
皇太后詔大司馬莽하여 雜治問皇帝起居發病狀하니 趙昭儀自殺注+雜治, 通鑑 作‘雜與御史‧丞相‧廷尉治.’하다
황태후皇太后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에게 조령詔令을 내려 여러 사람들과 함께 황제皇帝의 동정과 병이 난 상황을 다스려 묻게 하니, 조소의가 자살하였다.注+⑤ “잡치雜治”는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어사御史승상丞相정위廷尉가 함께 다스렸다.’라고 되어 있다.
班彪曰
[] 반표班彪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成帝善修容儀하고 臨朝淵默하여 尊嚴若神하니 可謂有穆穆天子之容者矣
성제成帝용의容儀를 잘 꾸미고 조정에 임할 적에 깊이 생각하고 침묵하여 존엄尊嚴함이 신명神明과 같았으니, 가 있는 자라고 이를 만하였다.
이나 湛乎酒色하여 趙氏亂內하고 外家擅朝하니 言之 可謂於邑注+於‧邑, 竝如字. 於, 或音烏. 邑, 又烏合切. 短氣貌.이라
그러나 주색酒色에 빠져서 조씨趙氏궁내宮內를 어지럽히고 외가外家가 조정의 정사를 독점하였으니, 이것을 말하면 참으로 한심스럽다.注+은 모두 본음本音대로 읽는다. 는 혹 음이 이고, 은 또 오합烏合이니, 〈“어읍於邑”은〉 기운이 부족한 모양이다.
建始以來 王氏始執國命하고 哀平短祚하여 莽遂簒位하니 蓋其威福所由來者 漸矣注+言王氏之禍, 始於成帝.니라
건시建始 연간(B.C.32~B.C.29) 이래로 왕씨王氏가 처음으로 나라의 정권을 잡았고 애제哀帝평제平帝가 단명하여 왕망王莽이 마침내 천자天子의 지위를 찬탈하였으니, 그 위엄과 을 독단해온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注+② 〈“개기위복소유래자蓋其威福所由來者 점의漸矣”는〉 왕씨王氏성제成帝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 공광孔光승상丞相으로 삼았다.
於大行前 拜受丞相博山侯印綬注+恩澤侯表 “博山侯, 國於南陽順陽.”하다
[] 공광孔光 앞에서 승상丞相박산후博山侯인수印綬를 절하고 받았다.注+① 《한서漢書》 〈외척은택후표外戚恩澤侯表〉에 “박산후博山侯남양군南陽郡 순양順陽국도國都로 했다.” 하였다.
太后 詔罷泰畤, 汾陰祠하고 復南北郊注+永始三年, 以久無嗣, 太后詔復甘泉等祠, 以卒不得其祐, 故詔南北郊長安, 如故.하다
[] 태후太后조령詔令을 내려 태치泰畤분음汾陰의 제사를 파하고 남교南郊북교北郊를 회복하였다.注+영시永始 3년(B.C.14)에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 하여 태후太后조령詔令을 내려 감천甘泉 등의 제사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 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조령을 내려 예전과 같이 장안長安남교南郊북교北郊를 둔 것이다.
◑夏四月 하다
[] 여름 4월에 태자太子 유흔劉欣이 즉위하였다.
哀帝初立하여 躬行儉約하여 省減諸用하고 政事由己出하니 朝廷 翕然望至治焉注+翕, 音吸, 合也.이러라
[] 애제哀帝가 처음 즉위하여 몸소 검약儉約을 행하여 모든 비용을 줄이고 정사政事를 직접 담당하니, 조정朝廷이 모두 한결같이 지극한 정치를 바랐다.注+(흡)은 음이 이니, 합함이다.
尊皇太后曰太皇太后라하고 皇后曰皇太后라하다
[] 황태후皇太后를 높여 태황태후太皇太后라 하고 황후皇后황태후皇太后라 하였다.
◑葬延陵하다
[] 연릉延陵장례葬禮하였다.
[] 정도공왕定陶共王을 추존하여 정도공황定陶共皇이라 하였다.
太皇太后 令傅太后, 丁姬 十日 一至未央宮이러니
[] 태황태후太皇太后부태후傅太后정희丁姬로 하여금 열흘에 한 번 미앙궁未央宮에 오게 하였는데,
有詔問丞相, 大司空호되 定陶太后 宜何居
조령詔令을 내려 승상丞相대사공大司空에게 “정도태후定陶太后가 어디에 거처하는 것이 마땅한가? ” 물었다.
孔光 素聞傅太后剛暴하고 長於權謀 恐其與政事注+與, 讀曰豫.하여 不欲與帝旦夕相近하여
공광孔光은 평소 부태후傅太后가 성품이 억세고 사나우며 권모權謀에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으므로, 그녀가 정사에 관여할까 두려워한 나머지注+(참여하다)는 로 읽는다. 황제皇帝와 아침저녁으로 서로 가까이 있지 못하게 하기 위해
卽議以爲宜改築宮이라하고 何武曰 可居北宮이라한대 從武言하다
즉시 의논하기를 “마땅히 개축改築하여야 합니다.” 하였고, 하무何武는 “북궁北宮에 거처하여야 합니다.” 하니, 은 하무의 말을 따랐다.
北宮 有紫房複道하여 通未央宮이라
북궁北宮에는 자방紫房복도複道가 있어서 미앙궁未央宮과 통하였다.
傅太后果從複道하여 朝夕至帝所하여 求欲稱號하고 貴寵其親屬하여 使上不得由直道行注+求欲稱號, 謂欲爲太皇太后也. 直道, 正直之道也. 小宗不得間宗, 藩后不得位匹長樂, 私戚不得妄干恩澤, 所謂正道也.이러라
부태후傅太后는 과연 이 복도複道를 따라 아침저녁으로 황제皇帝의 처소에 와서 자신의 칭호를 높여줄 것을 요구하고 자신의 친속들을 총애하게 하여, 으로 하여금 올바른 를 따라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注+② “구욕칭호求欲稱號”는 태황태후太皇太后가 되고자 함을 말한 것이다. “직도直道”는 올바른 이다. 소종小宗대종大宗을 범할 수 없고 제후왕諸侯王장락궁長樂宮에 있는 태후太后의 자리에 짝할 수 없고 사사로운 외척은 함부로 은택恩澤을 요구할 수 없는 것이 이른바 올바른 이다.
高昌侯董宏 希指言注+宏, 高昌侯董忠子也. 功臣表 “高昌侯, 國於千乘.”호되 秦莊襄王母 本夏氏러니 而爲華陽夫人所子라가 及卽位後 俱稱太后하니 宜立定陶太后爲帝太后니이다
[] 고창후高昌侯 동굉董宏부태후傅太后의 뜻에 영합하여注+동굉董宏고창후高昌侯 동충董忠의 아들이다. 《한서漢書》 〈공신표功臣表〉에 “고창후高昌侯천승千乘국도國都로 했다.” 하였다.나라 장양왕莊襄王의 어머니는 본래 하씨夏氏였는데, 〈장양왕이〉 화양부인華陽夫人양자養子가 되었다가 즉위한 뒤에는 하씨와 화양부인을 모두 태후太后라 칭하였으니, 마땅히 정도태후定陶太后를 세워 제태후帝太后로 삼아야 합니다.” 하였다.
事下有司하니 王莽, 師丹 劾奏호되 知皇太后至尊之號 天下一統이어늘 而稱引亡秦하여 詿誤聖朝하니 非所宜言이니 大不道라하여
이 일을 유사有司에게 회부하여 의논하게 하니, 왕망王莽사단師丹이 탄핵하여 아뢰기를 “동굉董宏황태후皇太后지존至尊의 칭호여서 천하天下가 한 분의 칭호로 통일되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멸망한 나라를 함부로 끌어다가 말하여 성조聖朝를 그르치고 있으니, 마땅히 말해야 할 바가 아니니 크게 무도無道합니다.” 하였다.
免宏爲庶人하다
이에 동굉을 면직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傅太后大怒하여 要上欲必稱尊號어늘
부태후가 크게 노하여 에게 반드시 존호尊號를 칭하게 해달라고 요구하자,
乃白太皇太后하여 令下詔하여 尊定陶共王爲共皇하다
은 마침내 태황태후太皇太后에게 아뢰어서 태황태후로 하여금 조령詔令을 내려 정도공왕定陶共王을 높여 정도공황定陶共皇이라 칭하게 하였다.
五月 하다
[] 5월에 황후皇后 부씨傅氏를 세웠다.
傅太后從弟晏之子也
[] 부태후傅太后종제從弟부안傅晏의 딸이다.
尊定陶太后傅氏曰定陶共皇太后라하고 丁姬曰定陶共皇后라하고 封丁明, 傅晏하여 皆爲列侯注+明, 丁后兄, 爲陽安侯. 晏爲孔鄕侯.하다
[] 정도태후定陶太后 부씨傅氏를 높여 정도공황태후定陶共皇太后라 하고 정희丁姬정도공황후定陶共皇后라 하고, 정명丁明부안傅晏을 봉하여 모두 열후列侯로 삼았다.注+정명丁明정후丁后의 오라비인데 양안후陽安侯로 삼았고, 부안傅晏공향후孔鄕侯로 삼았다.
◑六月 罷樂府官하다
[] 6월에 악부樂府의 관원을 파하였다.
成帝之世 鄭聲尤甚하여 黃門名倡 富顯於世하고 貴戚 至與人主爭女樂注+貴戚, 蓋王氏五侯, 淳于長之屬也.하니
[] 성제成帝 때에 이 더욱 성행하여 황문黃門(궁중)의 명창名倡이 세상에 많이 유명하였고, 심지어 귀척貴戚들이 미녀 악사들을 군주와 다투기까지 하였다.注+귀척貴戚왕씨王氏오후五侯순우장淳于長의 등속이다.
帝自爲王時 疾之하고 又性不好音이라
황제皇帝정도왕定陶王으로 있을 때부터 이것을 싫어하였고 또 성품이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至是 詔罷樂府官注+立樂府, 見武帝元狩三年.하고 郊祭樂及古兵法武樂在經이요 非鄭衛之樂者 條奏하여 別屬他官注+在經, 謂著在禮經.하니 凡所罷省 過半이러라
이때에 명하여 악부樂府의 관원을 파하고注+악부樂府를 세운 일은 무제武帝 원수元狩 3년(B.C.120)에 보인다., 교제郊祭의 음악과 병법兵法무악武樂 중에 《예경禮經》에 나와 있고 나라와 이 아닌 것을 조목조목 아뢰게 하여 별도로 다른 관원에 소속시켰으니注+③ “재경在經”은 《예경禮經》에 나와 있음을 이른다., 무릇 파하고 줄인 것이 태반이었다.
이나 百姓漸漬日久하고 又不制雅樂有以相變하니 豪富吏民 湛沔自若注+湛沔, 與沈湎通. 自若, 言自如故也.이러라
그러나 백성들이 옛 음악에 물든 지가 오래되었고 또 아악雅樂을 만들어 서로 변통하지 못하니, 부호富豪한 관리와 백성들이 옛 음악에 그대로 빠져 있었다.注+④ “담면湛沔(빠지다)”은 침면沈湎과 통한다. “자약自若”은 예전과 똑같음을 말한 것이다.
詔劉秀하여 典領五經하다
[] 유수劉秀에게 명하여 오경五經을 맡아 주관하게 하였다.
王莽 薦劉歆爲侍中하여 貴幸하니 更名秀注+更, 工衡切. 歆改名秀, 冀以應圖讖.하다
[] 왕망王莽유흠劉歆을 천거하여 시중侍中으로 삼았는데, 유흠은 신분이 귀해지고 총애를 받게 되자, 이름을 로 바꾸었다.注+(고치다)은 공형工衡이다. 유흠劉歆이 이름을 유수劉秀로 고친 것은
復令典領五經하여 卒父前業注+秀父向, 先受成帝詔, 領校秘書經傳, 向死, 帝令秀卒終此事.한대
은 다시 유수劉秀로 하여금 오경五經을 맡아 주관하게 하여 아버지 유향劉向이 예전에 하던 일을 끝마치게 하였다.注+유수劉秀의 아버지 유향劉向이 먼저 성제成帝조령詔令을 받아 비서각秘書閣경전經傳을 총괄하여 교정하였는데, 유향이 죽자 황제皇帝가 유수로 하여금 이 일을 끝마치게 한 것이다.
秀於是 總群書而奏其七略하니 有輯略, 六藝略, 諸子略, 詩賦略, 兵書略, 術數略, 方技略注+輯略, 謂群書之總要. 輯, 與集同. 六藝, 六經也. 諸子, 卽下九流是也. 詩賦, 則自屈原荀卿至揚雄等所作也. 兵書, 則權謀‧技巧‧形勢‧陰陽之書也. 術數, 則天文‧歷譜‧五行‧蓍龜‧雜占‧形法之書也. 方技, 則醫經‧經方‧房中‧神仙之書也.이요
유수는 이에 여러 책을 총괄하여 《칠략七略》을 아뢰니 〈집략輯略〉, 〈육예략六藝略〉, 〈제자략諸子略〉, 〈시부략詩賦略〉, 〈병서략兵書略〉, 〈술수략術數略〉, 〈방기략方技略〉이 있었고注+집략輯略은 여러 책의 총요總要를 이른다. (모으다)은 과 같다. 육예六藝이고 제자諸子는 바로 아래에 보이는 구류九流가 이것이다. 시부詩賦굴원屈原순경荀卿으로부터 양웅揚雄 등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지은 글이고, 병서兵書권모權謀기교技巧형세形勢음양陰陽의 책이고, ,
其敍諸子하여 分爲九流하니 曰儒, 曰道, 曰陰陽, 曰法, 曰名, 曰墨, 曰縱橫, 曰雜, 曰農注+流, 輩也. 儒家者流, 蓋出於司徒之官, 祖述堯舜, 憲章文武, 宗師仲尼, 以重其言, 於道最爲高. 然惑者旣失精微, 而僻者違離道本, 苟以譁衆取寵. 道家者流, 蓋出於史官, 歷記成敗古今之道, 乘要執本, 淸虛以自守, 此其所長也, 及放者爲之, 則欲絶去禮學, 兼棄仁義. 陰陽家者流, 蓋出於羲和之官, 曆象日月星辰, 敬授民時, 此其所長也, 及拘者爲之, 則牽於禁忌, 泥於小數, 舍人事而任鬼神. 法家者流, 蓋出於理官, 信賞必罰, 以輔禮制, 及刻者爲之, 則至於殘害至親, 傷恩薄厚. 名家者流, 蓋出於禮官, 古者名位不同, 禮亦異數, 及譥者爲之, 則苟鉤釽析亂而已. 譥, 工鉤切, 訐也. 釽, 普革‧普狄二切, 破也. 墨家者流, 蓋出於淸廟之守, 茅屋采椽. 是以貴儉兼愛, 及蔽者爲之, 見儉之利, 因以非禮推兼愛之意, 而不知別親疎. 縱橫家者流, 蓋出於行人之官, 言其當權事制宜, 受命而不受辭, 及邪人爲之, 則上詐諼而棄其信. 雜家者流, 蓋出於議官, 兼儒墨, 合名法, 及盪者爲之, 則漫羡而無所歸心. 農家者流, 蓋出於農稷之官, 播百穀, 勸耕桑, 以足衣食, 及鄙者爲之, 欲使君臣竝耕, 誖上下之序.이러라
제자諸子들을 차례로 서열하여 나누어 구류九流를 만드니, 유가자류儒家者類, 도가자류道家者類, 음양가자류陰陽家者類, 법가자류法家者類, 명가자류名家者類, 묵가자류墨家者類, 종횡가자류縱橫家者類, 잡가자류雜家者類, 농가자류農家者類이다.注+는 무리이다. 유가자류儒家者流사도司徒의 관원에서 나왔는바, 을 받들어 계승하고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법도를 드러내 밝히며 중니仲尼종사宗師로 삼아 그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니, 도리道理 중에 가장 높다. 그러나 미혹된 자는 이미 정미精微한 뜻을 잃고 편벽된 자는 의 근본을 위배하여서 구차히 여러 사람들에게 떠들어대어 다른 사람의 칭찬을 구한다. 도가자류道家者流사관史官에게서 나왔는바, 역대의 성공하고 실패한 고금古今를 차례로 기록하여 요점을 찾고 근본을 지키며 청허淸虛로써 스스로 지키니 이것이 그 장점이지만, 방탕한 자가 이것을 하게 되면 예학禮學을 끊어버리고 인의仁義마저 겸하여 버리고자 한다. 음양가자류陰陽家者流희씨羲氏화씨和氏의 관원에서 나왔는바, 해와 달과 별의 운행을 헤아려 책력冊曆에 기록하고 천문天文기상氣象을 살피며 백성들에게 농사철을 조심스럽게 일러주니 이것이 그 장점이지만, 고집스러워 변통할 줄을 모르는 자가 이것을 하게 되면 금기禁忌에 얽매이고 작은 술수術數에 빠져서 인간의 일을 버리고 귀신鬼神에 맡기게 된다. 법가자류法家者流법관法官에서 나왔는바, 신상필벌信賞必罰하여 제도制度를 돕지만, 각박한 자가 이것을 하게 되면 지친至親을 해롭게 하여 은혜를 해치고 후하게 대해야 할 곳을 박하게 대한다. 명가자류名家者流예관禮官에서 나왔는바, 옛날에 명칭과 지위가 똑같지 않고 또한 예수禮數가 달랐는데, 고자질하는 자[교자譥者]가 이것을 하게 되면 구차히 남의 잘못을 끄집어내어 분석하여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공구工鉤이니 고자질함이요, (벽)은 보혁普革보적普狄의 두 가지 이니 쪼개어 나눔이다. 묵가자류墨家者流청묘淸廟의 지킴에서 나왔는바, 띠풀(모초茅草)로 지붕을 하고 떡갈나무로 서까래를 만들기 때문에 검소함을 귀하게 여기고 겸애兼愛(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함)하지만, 가리어진 자가 이것을 하게 되면 검소함의 이로움만 보고 인하여 가 아닌 것으로 겸애兼愛의 뜻을 미루어서 친소親疎를 구별할 줄 모른다. 종횡가자류縱橫家者流사신使臣의 관원에서 나왔는바, 권도權道의 일을 당하면 마땅하게 대응해야 함을 말하여 을 받고 사양하지 않으나, 간사한 사람이 이것을 하게 되면 속임수를 숭상하고 신의를 버리게 된다. 잡가자류雜家者流의관議官에서 나왔는바, 유가儒家묵가墨家를 겸하고 명가名家법가法家를 합하였으나, 방탕放蕩한 자가 이것을 하게 되면 너무 흩어져서 마음을 붙일 곳이 없게 된다. 농가자류農家者流신농神農후직后稷의 관원에서 나왔는바, 백곡百穀을 파종하고 밭갈이와 누에치기를 권장하여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하지만, 비루한 자가 이것을 하게 되면 군주와 신하가 함께 농사짓고자 하여 상하上下질서秩序를 어지럽게 한다.
以爲九家皆起於王道旣微 하여 時君世主 好惡殊方이라
[] 유수劉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구가九家는, 왕도王道가 이미 쇠하자 제후諸侯들이 무력으로 정벌하여 당시 세상의 군주들이 좋아하고 싫어함이 다를 때에 모두 일어났다.
是以 九家之術 蠭出竝作하여 各引一端하여 崇其所善하니 雖有蔽短이나 合其要歸하면 亦六經之支與流裔注+其於六經, 如水之下流, 衣之末裔. 裔, 衣末也.
이 때문에 구가九家의 학술이 벌떼처럼 함께 일어나서 각각 한 학설을 끌어내어 자기가 좋아하는 바를 높였으니, 비록 병폐가 있었으나 그 요지를 합하여 보면 육경六經지류支流이고 끝자락이다.注+① 〈“구가지술九家之術……역육경지지여류예亦六經之支與流裔”는〉 그것(구가九家의 학술)은 육경六經에 비하면 물의 하류下流와 같고 옷의 말예末裔와 같으니, 는 옷의 끝이란 뜻이다.
使其人 遭明王聖主하여 得其所折中이면 皆股肱之材已注+折, 斷也. 中, 去聲. 折中, 猶折斷其物而用之, 與度相中當也. 已, 語終辭.
만약 구가九家의 사람들이 현명한 군왕君王과 성스러운 군주를 만나서 그 절중折中한 바를 얻는다면, 모두 군주의 고굉股肱이 될 수 있는 재목이다.注+은 절단함이요 거성去聲이니, 절중折中은 그 물건을 절단하여 사용해서 자[]의 치수와 서로 맞게 하는 것과 같다. 는 말을 끝내는 말(조사)이다.
仲尼有言禮失而求諸野注+言都邑失禮, 則於外野求之, 亦將有獲.라하시니
중니仲尼가 말씀하시기를 ‘〈도읍都邑에서〉 를 잃으면 야외野外에서 구한다.’ 하셨는데注+도읍都邑에서 를 잃으면 야외野外에서 구해야 하니, 이 또한 장차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方今 去聖久遠하여 道術缺廢하여 無所更索이니 彼九家者 不猶愈於野乎
지금 성인聖人과의 거리가 아득히 멀어서 도학道學이 망가지고 무너져서 다시 찾을 곳이 없으니, 저 구가九家의 사람들이 그래도 야외野外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若能修六藝之術하고 而觀此九家之言하여 舍短取長이면 則可以通萬方之略矣注+舍, 廢也.리라
만약 육예六藝의 학술을 닦고 이 구가九家의 말을 살펴서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할 수 있다면 만방萬方의 대략을 통할 수 있을 것이다.”注+는 버린다는 뜻이다.
胡氏曰
[]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法家 慘刻하고 名家 苛繞注+繞, 管見, 作撓.하고 墨氏 二本이요 而縱橫者 妾婦之道 是皆六經之棄也注+人物之生, 必各本於父母而無二, 今墨子兼愛, 視其父母, 無異於路人, 是二本矣. 若六經 則固儒者之所修也어늘
법가法家는 너무 참혹하고 각박하며 명가名家는 까다롭고 요란하며注+에는 (동요하다, 요란하다)로 되어 있다. 묵씨墨氏는 근본이 둘이고 이는 모두 육경六經에서 버리는 것이요注+② 사람과 동물이 태어날 적에 반드시 각각 부모父母에 근본하여 둘이 없는데, 지금 묵자墨子겸애兼愛하여 자기의 부모父母를 길 가는 사람과 똑같이 보니, 이는 근본이 둘인 것이다., 육경六經으로 말하면 진실로 유자儒者들이 닦아야 하는 도리이다.
今列儒於九家하고 而曰修六藝之術하고 以觀九家之言이라하니
그런데 지금 유가儒家구가九家에 나열하고, ‘육예六藝학술學術을 닦고 구가九家의 말을 살펴본다.’ 하였으니,
則修六藝者 爲誰氏邪 歆之言多舛 如此하니 方之董相컨대 豈直什百之相遠哉注+方之董相, 謂方比董仲舒也. 仲舒推明孔氏, 抑出百家, 其所著皆明經術之意.리오
육예六藝를 닦는 자는 어느 인가. 유흠劉歆의 말이 이와 같이 어긋남이 많으니, 동상董相(동중서董仲舒)에 비하면 서로의 차이가 어찌 다만 10배나 100배뿐이겠는가.”注+③ “방지동상方之董相”은 동중서董仲舒에게 비교함을 이른다. 동중서董仲舒공씨孔氏(공자孔子)를 미루어 밝히고 백가百家를 억제하고 내쳤으니, 그의 저서는 모두 경학經學의 뜻을 밝혔다.
益封河間王良萬戶하다
[] 하간왕河間王 유량劉良에게 만호萬戶를 더 봉해주었다.
河間惠王良 能修獻王之行注+良, 獻王德六世孫.하여 母太后薨 服喪如禮하니 詔益封萬戶하여 以爲宗室儀表注+有儀可象謂之儀, 四外望之以取正謂之表.하다
[] 하간혜왕河間惠王 유량劉良헌왕獻王의 행실을 잘 닦아서注+유량劉良헌왕獻王 유덕劉德의 6세손이다. 모태후母太后하자 에 따라 상복을 입으니, 조령詔令을 내려 만호萬戶를 더 봉해주어서 종실宗室의표儀表로 삼게 하였다.注+② 본받을 만한 훌륭한 행실이 있는 것을 라 이르고, 사방에서 바라보고 바름을 취하는 것을 라 이른다.
詔限民名田이러니 不果行하다
[] 명하여 백성들의 명전名田(개인 명의로 점유한 토지)을 제한하게 하였는데, 끝내 결행하지 못하였다.
董仲舒說武帝호되
[] 처음에 동중서董仲舒무제武帝를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以秦除井田한대 民得賣買하여 富者 田連阡陌하고 貧者 無立錐之地하니 小民 安得不困이리오
나라가 정전법井田法을 없애자 백성들이 토지土地매매賣買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부유한 자는 밭두둑의 경계가 연결되고 빈곤한 자는 송곳을 꽂을 땅도 없으니, 백성들이 어찌 곤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古井田法 雖難卒行注+卒, 讀曰猝.이나 宜少近古하여
옛날의 정전법井田法을 갑자기 시행하기는 어려우나注+(갑자기)은 로 읽는다. 마땅히 다소나마 옛날의 제도에 가깝게 해야 합니다.
限民名田하여 以贍不足하며 塞幷兼之路하고 去奴婢除專殺之威하고 薄賦斂, 省繇役하여 以寬民力이니 然後 可善治也注+名田, 占田也. 各爲立限, 不使富者過制, 則可使貧弱之家足也. 除專殺之威, 謂不得專殺奴婢也.리이다
백성들의 명전名田을 제한하여 부족한 자들을 풍족하게 해주며, 겸병하는 길을 막고, 노비奴婢를 없앨 적에 주인이 마음대로 죽이는 위엄을 제거하고, 세금을 적게 거두고 부역을 줄여서 백성들의 힘을 여유롭게 해주어야 하니, 그렇게 한 뒤에야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注+명전名田점유占有전지田地이니, 각각 한계를 세워서 부유한 자로 하여금 제한을 넘지 못하게 하면 가난하고 약한 집안들을 풍족하게 할 수 있다. “제전살지위除專殺之威”는 노비奴婢를 마음대로 죽일 수 없게 하는 것을 이른다.
至是 師丹 復建言호되 今累世承平하여 豪富吏民 貲數鉅萬이로되 而貧弱愈困하니 宜略爲限이니이다
[] 이때에 사단師丹이 다시 건의하기를 “지금 몇 대 동안 태평하여 세력이 있고 돈이 있는 관리와 백성들은 재산이 거만鉅萬으로 헤아려지는데 가난하고 약한 자들은 더욱 곤궁하니, 마땅히 다소 제한을 두어야 합니다.” 하였다.
天子下其議하니 丞相, 大司空 奏請호되 自諸侯王, 列侯, 公主名田 各有限하고 關內侯, 吏民名田 皆毋過三十頃하고 奴婢毋過三十人注+據哀帝紀, 有司條奏 “諸侯王‧列侯, 得名田國中. 列侯在長安及公主, 得名田縣道. 關內侯‧吏民名田, 皆毋得過三十頃. 諸侯王奴婢二百人. 列侯‧公主百人. 關內侯‧吏民三十人.” 與此小異.호되 期盡三年하여 犯者 沒入官이니이다
천자天子가 이 의논을 회부하니, 승상丞相대사공大司空주청奏請하기를 “제후왕諸侯王열후列侯공주公主명전名田에 각각 제한을 두고, 관내후關內侯와 관리와 백성들의 명전名田은 모두 30을 넘지 못하게 하며, 노비는 30명을 넘지 못하게 하되注+① 《한서漢書》 〈애제기哀帝紀〉를 근거해보면 유사有司가 조목조목 아뢰기를 “제후왕諸侯王열후列侯봉국封國에서 명전名田을 얻고, 장안長安에 있는 열후列侯공주公主들은 현도縣道에서 명전名田을 얻고, 관내후關內侯와 관리와 백성들의 명전名田은 모두 30을 넘지 못하게 하며, 제후왕諸侯王은 노비를 200명으로 제한하고 열후와 공주는 100명으로 제한하고 관내후와 관리와 백성들은 30명으로 제한한다.” 하였으니, 이와는 조금 다르다. 기한을 3년으로 하며, 범하는 자는 적몰해서 모두 관청으로 잡아들여야 합니다.” 하였다.
田宅奴婢賈爲減賤하니 貴戚近習 皆不便也注+賈, 讀曰價. 近習, 謂佞幸親近小人也.
이 때에 전택田宅과 노비의 값이 내려가니, 귀척貴戚근습近習들이 모두 불편해하였다.注+(값)는 로 읽는다. “근습近習”은 군주의 총애를 받으며 가까이 모시는 소인小人(환관)을 이른다.
詔書且須後러니 遂寢不行注+須, 待也.하니라
이에 조서를 내려 우선 훗날을 기다리게 하였는데, 마침내 중지하고 시행하지 못하였다.注+는 기다림이다.
罷官織綺繡하고 除任子令, 誹謗詆欺法하고 出宮人하고 免官奴婢하고 益小吏俸注+任子令者, 漢儀注 “吏二千石以上, 視事滿三年, 得任同産若子一人爲郞, 不以德選, 故除之.” 通鑑 “掖庭宮人年三十以下, 出嫁之, 官奴婢五十以上, 免爲庶人, 益吏三百石以下俸.”하다
[] 에서 채색 비단과 자수 놓은 비단을 짜는 것을 파하고, 임자령任子令과 남을 비방하거나 모함하여 속이는 말을 하는 자를 처벌하는 법을 없애고, 궁녀宮女들을 내보내고 관노비官奴婢를 면제해주고 낮은 관리들의 녹봉을 올려주었다.注+임자령任子令은 《한의주漢儀注》에 “관리官吏로서 이천석二千石 이상은 사무를 본 지 만 3년이 되면 동복형제와 자식 한 사람을 보장하여 낭관郞官으로 삼게 하였으니, 으로 선발하지 않기 때문에 없앤 것이다.” 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액정掖庭궁녀宮女들은 나이 30세 이하인 자는 내보내 시집보내고, 관노비官奴婢로서 50세 이상은 면제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삼백석三百石 이하의 관리는 녹봉祿俸을 올려주었다.” 하였다.
◑秋七月 罷大司馬莽하여 就第하고 以師丹爲大司馬하다
[] 가을 7월에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을 파직하여 집에 나아가게 하고, 사단師丹대사마大司馬로 삼았다.
太皇太后詔大司馬莽就第하여 避帝外家한대
[] 처음에 태황태후太皇太后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에게 조령詔令을 내려 집으로 나아가 황제皇帝외가外家를 피하게 하자,
卽上疏乞骸骨이어늘 帝遣尙書令하여 詔起之하고
왕망은 즉시 상소하여 물러날 것을 청하였는데, 황제가 상서령尙書令을 보내어 조령을 내려 조정에 나와 일을 보도록 하고,
又遣孔光等하여 白太皇太后하니 太皇太后乃復令莽視事하다
또다시 공광孔光 등을 보내어 태황태후에게 아뢰니, 태황태후가 마침내 왕망으로 하여금 다시 정사를 보게 하였다.
至是 置酒未央宮할새 內者令 爲傅太后張幄하여 坐於太皇太后坐旁注+內者令, 屬少府, 以宦者爲之, 掌宮中布張諸褻物. 爲, 去聲, 下爲國同. 坐, 竝材臥切, 下同.이어늘
[] 이때에 미앙궁未央宮에 술자리를 베풀 적에, 내자령內者令부태후傅太后를 위하여 장막을 설치해서 태황태후太皇太后의 옆에 자리를 마련하였다.注+내자령內者令소부少府에 속하니 환관宦官으로 제수하였는바, 궁중宮中에서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들을 펼치는 것을 관장하였다. (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니, 아래의 “위국爲國”도 같다. (자리)는 모두 재와材臥이니, 아래도 같다.
按行이라가 責內者令曰 定陶太后 藩妾이니 何以得與至尊竝이리오하고 徹去하고 更設坐注+藩, 謂諸侯.하니 傅太后大怒하여 不肯會注+會, 謂至置酒所也.
왕망王莽순행巡行하다가 이것을 보고 내자령을 책망하기를 “정도태후定陶太后제후왕諸侯王인데, 어찌 지존至尊이신 태황태후와 함께 앉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그녀의 자리를 철거하고 다시 자리를 설치하니注+제후諸侯를 이른다., 부태후가 크게 하여 술자리에 오려 하지 않았다.注+는 술자리를 베푼 곳에 나옴을 이른다.
乞骸骨하여 罷就第하니 公卿大夫多稱之者
왕망이 물러갈 것을 청하므로 파직하여 집으로 나아가게 하니, 공경公卿대부大夫 중에 왕망을 칭찬하는 자가 많았다.
乃加恩寵하여 置中黃門하여 爲莽家給使하고 以爲特進給事中하여 朝朔望注+禁門曰黃闥, 以中人主之, 故號爲中黃門. 給使, 謂使黃門在其家中, 爲使令.하다
은 이에 은총을 더하여 중황문中黃門을 왕망의 집의 급사給使로 두었으며, 왕망을 특진特進급사중給事中을 삼아서 초하루와 보름에 조회에 참석하게 하였다.注+금문禁門황달黃闥이라 하는데 환관宦官이 주관하였으므로 중황문中黃門이라 칭하였다. 급사給使황문黃門으로 하여금 그 집안에 있으면서 사령使令 노릇을 하게 함을 이른다.
傅太后 從弟右將軍喜 好學問하고 有志行이러니 王莽 旣罷 衆庶歸望於喜
[] 부태후傅太后종제從弟우장군右將軍 부희傅喜학문學問을 좋아하고 지조志操와 훌륭한 행실이 있었는데, 왕망王莽이 파직되자 여러 사람들의 인망人望이 부희에게 돌아갔다.
上之官爵外親也 喜獨執謙稱疾하고 傅太后始與政事 數諫之注+與, 讀曰豫.하니
처음에 외척外戚들을 벼슬 시킬 적에 부희는 홀로 겸손함을 지키고 병을 칭탁하였으며, 부태후가 처음 정사政事에 관여할 적에 여러 번 간하였다.注+(참여하다)는 로 읽는다.
由是 傅太后不欲令喜輔政하여 乃以師丹爲大司馬하고 而賜喜黃金百斤하여 以光祿大夫 養病하다
이 때문에 부태후가 부희로 하여금 정사政事를 보필하게 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여 마침내 사단師丹대사마大司馬로 삼고, 부희에게 황금黃金 100을 주어 광록대부光祿大夫로서 병을 요양하게 하였다.
何武, 唐林 皆上書言호되
[] 하무何武당림唐林이 모두 상서上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喜行義修潔하고 忠誠憂國이어늘 今以寢病으로 一旦遣歸하니
부희傅喜는 품행이 고상하고 깨끗하며 충성忠誠으로 국가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병환을 이유로 하루아침에 내보내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니,
衆庶失望하여 皆曰 傅氏賢子以議論不合於定陶太后故 退라하고 百僚莫不爲國恨之니이다
여러 사람들이 실망하여 모두 말하기를 ‘부씨傅氏의 어진 자제가 정도태후定陶太后와 의논이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물러갔다.’ 하고, 백관百官 중에 국가를 위하여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忠臣 社稷之衛
충신忠臣사직社稷보위保衛합니다.
百萬之衆 不如一賢이니 喜立於朝하면 陛下之光輝 傅氏之廢興也注+傅喜顯, 則傅氏興, 其廢亦如之. 一說 “用喜, 於陛下有光明, 而傅氏之廢, 復得興也.”니이다
백만 명의 무리가 한 명의 현자賢者만 못하니, 부희傅喜가 조정에 서게 되면 폐하陛下광명光明이 되고, 부씨傅氏흥폐興廢 또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注+① 〈“희립어조喜立於朝……부씨지폐흥야傅氏之廢興也”는〉 부희傅喜현달顯達하면 부씨傅氏가 일어나고, 부희가 버려지면 부씨 또한 그와 같게 되는 것이다. 일설에 “부희를 등용하면 폐하에게 광명함이 있고 침체한 부씨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하였다.
上亦自重之 尋復進用焉하니라
또한 본래 그를 소중히 여겼으므로 얼마 후에 다시 등용하였다.
[] 곡양후曲陽侯 왕근王根을 보내 봉국으로 나아가게 하고, 성도후成都侯 왕황王況을 면직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帝少而聞知王氏驕盛하고 心不能善호되 以初立故 且優之러니
[] 황제皇帝는 어려서부터 왕씨王氏가 교만하고 포악하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마음속으로 좋게 여기지 않았으나, 처음 즉위하였으므로 우선 우대하였다.
後月餘 司隷校尉解光호되
한 달여가 지나자, 사례교위司隷校尉 해광解光이 아뢰기를
先帝山陵未成이어늘 而曲陽侯根 成都侯況 公聘取故掖庭女樂하여 置酒歌舞하니 無人臣禮 大不敬不道注+況, 商子也. 取, 讀曰娶, 公聘取, 言公然聘娶, 無忌憚也.니이다
선제先帝산릉山陵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곡양후曲陽侯 왕근王根성도후成都侯 왕황王況이 공공연하게 옛날 액정掖庭여자女子 악사樂師를 데려와서 술자리를 베풀고 노래하고 춤을 췄으니, 인신人臣가 없습니다. 크게 불경스럽고 부도덕합니다.” 하였다.注+왕황王況왕상王商의 아들이다. (장가들다)는 로 읽으니, “공빙취公聘取”는 기탄함이 없이 공공연하게 여인을 맞이하여 장가듦을 말한다.
上以根嘗建社稷之策이라하여 遣就國하고 而免況爲庶人注+社稷之策, 謂立帝爲嗣也.하다
은 왕근이 일찍이 사직社稷의 계책을 세웠다 하여 그를 봉국封國으로 내보내고, 왕황을 면직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注+② “사직지책社稷之策”은 황제皇帝후사後嗣로 세운 것을 이른다.
역주
역주1 丞相翟方進 卒 : “이때에 熒惑星이 心星에 머물러 있었는데, 皇帝가 翟方進을 불러 策書를 내려 꾸짖자, 적방진이 당일에 자살하였다. 上은 이것을 숨기고 예우하고 하사하는 것을 다른 정승보다 특별하게 하였다. 여기에서 ‘自殺’이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漢나라를 나쁘게 여긴 것이다. 나쁘게 여겼다면 어찌하여 ‘卒’이라고 썼는가. 大臣의 죽음을 가지고 하늘의 변고에 응하는 것은 옛날의 法이 아니요, 이미 또 이것을 숨기고 따라서 ‘卒’이라고 쓴 것은 이것이 속임수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目에서는 황제의 행적을 드러내고 綱에서는 그의 마음을 드러내어서 후세에 고찰할 바가 있게 하였다.[於是 熒惑守心 帝召方進 賜冊責讓 方進卽日自殺 上秘之 禮賜異於他相 其不書自殺 何 病漢也 病之 則曷爲書卒 以大臣應天變 非古也 旣又諱焉 因而卒之 所以明其誣也 目著其跡 綱著其心 而後世有所考矣]” 《書法》
역주2 上은……자살하였다 : 옛날 熒惑星이 心星의 별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王者에게 큰 재난이 있다 하여 꺼려하였다. 이 때문에 황제는 자신에게 닥쳐올 재난을 翟方進이 대신 감당하여 죽게 한 것이다. 丞相府의 議曹인 李尋 역시 적방진이 황제를 대신하여 禍를 당한 것을 우려해서 승상부 관원 300명 중에 승상 적방진을 위해 대신 죽어서 흉함을 돌려 길하게 만들 사람을 선택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짐은 결국 황제가 죽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다.
역주3 (棺)[椁] : 저본에는 ‘棺’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椁’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孝成皇帝가……없었으니 : 다음 해에 成帝가 崩하였으므로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역주5 穆穆한……용모 : 穆穆은 온화하고 공경하는 모습이다. 《禮記》 〈曲禮 下〉에 “天子는 穆穆하고 諸侯는 皇皇하다.[天子穆穆 諸侯皇皇]”라고 보인다.
역주6 以孔光爲丞相 : “泰畤와 汾陰의 제사를 파하였을 적에는 ‘太后詔(太后가 詔令을 내렸다.)’라고 썼는데, 여기에서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皇帝가 생전에 한 유언[治命]이기 때문이다.[罷泰畤汾陰祠 則書太后詔 此其不書 何 帝治命也]” 《書法》
역주7 大行皇帝 : 막 세상을 떠난 황제의 敬稱이다.
역주8 太子欣 卽位 : “3월에 ‘황제가 崩하였다.’라고 썼고 4월에 ‘太子 劉欣이 卽位하였다.’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이는 한 달이 넘도록 군주가 없었던 것이다. 옛 史書를 살펴보면 丙戌日로부터 丙午日에 이르기까지 또한 20일이 지났다. 더구나 지난봄에 이미 太子의 자리를 바로잡아서 中外가 편안하였으니, 또 창졸간에 後嗣가 없는 상황에 비교할 바가 아닌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지체하였는가. 짐작컨대 王氏가 조정을 제멋대로 하여 정권이 이들에게 소속되었으니, 이 때문에 명하여 泰畤를 파하고 南郊와 北郊를 회복한 일을 《資治通鑑綱目》에서 특별히 太后를 들어 이 가운데에 써서 권세가 있는 곳을 드러낸 것이리라. 禮는 제사보다 더 중한 것이 없고 제사는 郊祭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국가의 後嗣를 아직 세우지 않았는데, 太后가 일개 婦人으로서 국가의 典禮를 거행함에 군주를 세우는 일을 시급하게 여기지 않고 제사 지내는 것을 급하게 여겼으니, 이렇게 하고도 근본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漢나라가 이때에 이르러 이미 망하였고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뿐이니, 어찌 新나라의 王莽이 찬탈함을 기다린 뒤에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겠는가. 아! 슬프다.[三月書帝崩 四月書太子欣卽位 則是曠月無君也 考之前史 自丙戌至丙午 蓋亦再閱旬矣 況去春 已正儲極 中外晏安 又非倉卒無嗣之比 奚爲淹留若此 意者 王氏擅朝 政柄有屬 是以詔罷泰畤 復南北郊 綱目 特揭太后 書之于中 以見權之所在爾 夫禮莫重於祭 祭莫重於郊 國嗣未立 而太后以一婦人 擧行其典 不急於置君 而急於祠祀 是尙得爲知本乎 漢室至是 蓋已亡而未滅爾 又何待於新莽之簒而後見哉 噫]” 《發明》
역주9 追尊定陶共王 爲定陶共皇 : “宣帝가 悼考를 추존하여 皇考라 한 뒤로부터 처음으로 이러한 단서를 열어놓았다. 이에 定陶를 皇이라 칭하였으니, 올바른 칭호가 아니다. 皇帝(哀帝)가 共王을 皇이라 한 것은 祖母인 傅太后를 皇이라 하고 生母인 丁后를 皇이라 칭하기 위한 것이다.[自宣帝追尊悼考爲皇考 始開端矣 於是而定陶稱皇 非稱也 帝之皇共王 所以皇傅太后皇丁后也]” 《書法》
역주10 (太)[大] : 저본에는 ‘太’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大’로 바로잡았다.
역주11 立皇后傅氏 : “‘某氏를 세워 皇后를 삼았다.’고 쓰는 것이 떳떳한 준례인데, 여기에서 ‘皇后 傅氏’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傅氏는 傅晏의 딸이요 傅晏은 共皇太后의 친정 아우이니, 〈內外從의 傅太后는 哀帝의 진외가의 고모뻘이 되므로〉 차례가 또한 다소 어긋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글을 달리하였으니, 그 글을 달리한 것은 그 일을 괴이하게 여긴 것이다.[書立某氏爲皇后 恒也 此其書皇后傅氏 何 傅氏 晏女也 晏 共皇太后弟也 倫序亦少乖矣 故異其文 異其文者 異其事也]” 《書法》
역주12 鄭나라의 음악 : 춘추시대 鄭나라 지역에 성행한 음탕한 음악을 이른다. 《論語》 〈衛靈公〉에 顔淵이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孔子가 이에 답하면서 “鄭나라 음악을 추방하고 말 잘하는 사람을 멀리하라. 鄭나라 음악은 음탕하고 말 잘하는 사람은 위태롭다.[放鄭聲 遠佞人 鄭聲淫 佞人殆]” 하였는데, 이후로 鄭나라의 음악은 음탕한 음악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역주13 衛나라의 음악 : 《禮記》 〈樂記〉에 “鄭나라와 衛나라의 음악은 난세의 음악이다.[鄭衛之音 亂世之音也]” 하여, 衛나라 음악 역시 음탕한 음악으로 알려져 있다.
역주14 圖讖說에……바라서였다 : 당시 圖讖說에 劉秀가 天子가 되어 漢나라를 中興한다는 說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劉歆은 劉秀로 改名하였으나 결국 王莽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光武帝 劉秀가 나와 漢나라를 중흥하였다.
역주15 六經 : 원래 《易經》‧《書經》‧《詩經》‧《禮經》‧《樂經》‧《春秋》 등 6개의 유교 경전을 말하는데, 유수는 〈六藝略〉에서 여기에 《論語》‧《孝經》‧《小學》을 더한 9개의 유가의 경전과 그에 대한 주석의 목록을 분류해놓았다.
역주16 術數는……책이고 : 天文은 하늘의 日月星辰을 보고 吉凶을 점치는 것이고, 歷譜는 책력을 만드는 기록이고, 五行은 陰陽五行說에 입각하여 길흉을 점치는 것이고, 蓍龜는 시초 50개를 가지고 《周易》으로 점치는 것과 거북 껍질을 불에 태워 갈라진 형태를 보고 점치는 것이고, 雜占은 시구 이외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점치는 것이고, 形法은 형체를 보아 점치는 것으로 九州의 地勢를 보아 城郭과 宮室을 세우고 六畜의 뼈나 기물의 형태를 보고 점치는 방법이다.
역주17 方技는……책이다 : 醫經은 醫藥 전반에 관한 서책이고, 經方은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방법이고, 房中은 남녀간의 房中術이고, 神仙은 不老長生하는 神仙術이다.
역주18 仲尼가……하셨는데 : 이 내용은 《漢書》 〈藝文志〉에 보이는바, 도읍지(서울)에서 禮가 없어지면 먼 시골에서 찾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역주19 諸侯力政 : 政은 征과 통하는바, 力征은 무력으로 정벌함을 이른다. 《墨子》 〈節葬 下〉에 “聖王이 별세하자, 천하가 義를 잃어 제후들이 무력으로 정벌한다.[聖王旣沒 天下失義 諸侯力政]”라고 보인다.
역주20 縱橫家는……道이니 : 縱橫家는 전국시대 合縱을 주장한 蘇秦과 連橫을 주장한 張儀 등을 이르며, 妾婦의 道는 군주에게 직언을 하지 못하고 군주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孟子》 〈滕文公 下〉에 “景春이 ‘公孫衍과 張儀는 어찌 진실로 大丈夫가 아니겠습니까. 한 번 노여워하면 諸侯들이 두려워하고, 편안히 있으면 天下가 조용합니다.’라고 말하자, 孟子는 ‘이들을 어떻게 大丈夫라 할 수 있겠는가.……순종함을 正道로 삼는 것은 妾婦의 道이다.’라 하였다.”라고 보인다. 공손연 역시 당시의 辯士로, 이들은 노하면 제후들을 설득하여 서로 공격하게 하였으므로 제후들이 두려워한 것이다.
역주21 管見 : 胡寅(1098~1156)의 《讀史管見》을 가리킨다.
역주22 遣曲陽侯王根……爲庶人 : “王根과 王況이 모두 國喪 중에 人臣의 禮가 없다고 탄핵을 당했으니, 그렇다면 어찌하여 죄가 없는 경우의 말로 썼는가. 丁氏와 傅氏가 등용되자, 王氏가 폐출되어서 비록 조금만 죄가 있더라도 파면당하였다. 그런데도 綱에서 죄가 없는 경우의 말로 쓴 것은, 이는 皇帝의 뜻이라고 여긴 것이다.[根況皆以國哀無人臣禮被劾 則曷爲以無罪之辭書之 丁傅用而王氏廢 雖微有罪 亦罷免矣 以無罪之辭書之 以爲是帝意也]” 《書法》 綱에서 ‘某爵某免爲庶人’과 ‘遣某人就國’은 죄가 없을 때 쓰는 표현이다. “哀帝가 처음 정사할 적에 분연히 王氏를 파면하고 축출해서 혹은 자기의 집으로 나아가게 하고 혹은 자기의 봉국으로 나아가게 하고 혹은 퇴출하여 면직시켰다. 그런데도 정사에 유익함이 없었던 것은, 행한 바가 도리에 맞지 않았고 등용된 사람이 王氏보다 낫지 못했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에 쓴 것을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哀帝初政 奮然罷逐王氏 或就第 或就國 或黜免 然而無益於事者 所行不得其道 而所用之人 無以愈於王氏故也 觀之綱目所書 則可見矣]” 《發明》

자치통감강목(6) 책은 2019.03.1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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