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4)

자치통감강목(4)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戊辰年(B.C. 113)
무진년(B.C. 113)
四年이라
[綱] 나라 세종世宗 효무황제孝武皇帝 원정元鼎 4년이다.
冬十一月 立后土祠於汾陰하여 親祠之하고 始巡郡國하여陽而還注+(睢)[脽], 音誰, 脽者, 河之東岸特堆崛, 長四五里, 廣二里餘, 高十餘丈. 以其形高起, 如人之尻脽, 故以名. 尻, 丘刀切, 脊梁盡處. 一說 “此臨汾水之上. 地本名鄈, 音與葵同, 彼鄕人呼葵音如誰, 故轉而爲脽字耳.”하다
겨울 11월에 후토사后土祠분음汾陰의 언덕 위에 세우고서 황제가 친히 제사하고, 처음으로 군국郡國을 순행하여 형양滎陽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注+는 음이 이다. 황하黃河의 동쪽 언덕인 특퇴굴特堆崛로, 길이가 4, 5리이며 넓이가 2리가 넘고 높이가 10여 길이다. 그 모습이 높이 솟아서 사람의 꽁무니[고수尻脽]와 같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구도丘刀이니, 척추의 등뼈가 다하는 곳이다. 일설에 “이곳은 분수汾水의 위에서 내려 보고 있다. 이곳의 지명은 본래 였는데, 음이 와 같은바, 이 지방 사람들은 의 음을 와 같이 발음하므로 바뀌어 자가 되었다.” 하였다.
◑ 封周後姬嘉하여子南君注+姬嘉, 姓名. 子南, 其封邑之號. 恩澤侯表 “周子南君, 食邑於潁川長社.”하다
[綱] 나라 후손인 희가姬嘉주자남군周子南君으로 봉하였다.注+희가姬嘉는 사람의 성명이고 자남子南은 그 봉읍의 칭호이다. 《은택후표恩澤侯表》에 “주자남군周子南君영천潁川장사長社식읍食邑으로 하였다.” 하였다.
◑ 春 以方士欒大 爲五利將軍하여 하다
[綱] 봄에 방사方士 난대欒大오리장군五利將軍으로 삼아서 공주公主에게 장가들게 하였다.
方士欒大 敢爲大言하여 處之不疑러니 見上言曰
[目] 방사方士 난대欒大가 과감히 큰소리를 치면서 주저하지 않고 신선神仙으로 자처하였는데, 을 뵙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常往來海上하여 見安期, 羨門之屬하니 曰 黃金可成而河決可塞이요 不死之藥 可得이며僊人 可致也라하더이다
이 일찍이 해상海上을 왕래하면서 신선인 안기생安期生선문자羨門子(연문자)의 등속을 만나보니, 말하기를 ‘황금黃金을 만들 수 있고 황하黃河가 터지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불사약不死藥을 얻을 수 있고 신선을 초치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이나 臣師 非有求人이요 人者求之 陛下必欲致之신댄 則貴其使者하여 令爲親屬하고 以客禮待之라야 乃可使通言也리이다
그러나 신의 스승은 사람들에게 구함이 없고 사람들이 그를 구하니, 폐하께서 반드시 이분들을 초치하고자 하신다면, 사자使者(난대欒大 자신)의 신분을 귀하게 하여 황제의 친척으로 삼고 손님의 로 우대하여야 비로소 말을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
乃拜大爲五利將軍하여 封樂通侯하고 食邑, 賜甲第注+恩澤侯表 “樂通侯, 食邑於安定郡高平縣.”하고 以衛長公主妻之할새 齎金十萬斤注+公主, 衛太子姊也.이러라
이에 난대를 오리장군五利將軍으로 제수하여 악통후樂通侯를 봉하고 식읍食邑과 가장 좋은 집을 하사하였으며,注+은택후표恩澤侯表》에 “악통후樂通侯안정군安定郡 고평현高平縣식읍食邑으로 하였다.” 하였다.위장공주衛長公主를 그에게 시집보내면서 황금 10만 근을 주어 보냈다.注+공주公主위태자衛太子(여태자戾太子)의 누이이다.
親幸其第하니 貴震天下
이 직접 그의 집에 가니 난대의 귀함이 천하에 진동하였다.
於是 海上燕齊之間 莫不搤腕하여 自言有禁方, 能神僊矣러라
이에 바닷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금방禁方이 있고 신선술이 있다고 스스로 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夏六月 汾陰 得大鼎하다
[綱] 여름 6월에 분음汾陰에서 큰 솥을 얻었다.
迎至甘泉하여 薦之郊廟하니 群臣 皆賀하니라
[目] 큰 솥을 감천궁甘泉宮으로 맞이해와서 교묘郊廟에 올리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以兒寬爲左內史하다
[綱] 아관兒寬(예관)을 좌내사左內史로 삼았다.
周亞夫爲丞相 趙禹爲史하니 府中 皆稱其廉平이라
[目] 이전에 주아부周亞夫승상丞相이 되었을 적에 조우趙禹승상부丞相府가 되었는데, 승상부 안에서는 모두 그의 청렴하고 공평함을 칭찬하였다.
이나 亞夫弗任하여 曰 極知禹無害어니와이나 文深하여 不可以居大府注+無害, 謂無所枉害也. 一說 “若言無比也.” 又害, 勝也, 言無能勝害之者. 大府, 丞相ㆍ御史府.라하다
그러나 주아부는 조우를 신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조우가 해로움이 없음[무해無害]을 내 분명히 알고 있으나, 법조문을 너무 까다롭게 적용하여 큰 에 머물 수 없다.”注+무해無害”는 억울하게 일을 처리하여 로운 바가 없음을 이른다. 일설에 “무비無比(견줄 사람이 없음)라는 말과 같다.” 하였다. 또 는 이김이니, 능히 그를 이길 자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대부大府승상부丞相府어사부御史府이다. 하였다.
及禹爲少府 酷急이러니 至晩節하여 吏務爲嚴峻하여 而禹更名寬平하고
조우가 소부少府가 되자 혹독하고 엄격하였는데, 말년에 옥리獄吏들이 준엄함을 힘쓰니, 조우는 도리어 너그럽고 공평함으로 이름났다.
尹齊素以敢斬伐著名이러니 及爲中尉 坐不勝任抵罪하다
윤제尹齊는 평소 과감하게 죄인을 목 베는 것으로 이름났었는데, 중위中尉가 되자 〈너무 나약하여〉 임무를 감당하지 못한다 하여 죄를 받았다.
是時 吏治皆以慘刻相尙호되 獨左內史兒寬 勸農業하고 緩刑罰하고 理獄訟하여 務在得人心하고 擇用仁厚士하며 推情與下하고 不求名聲하니 吏民 大信愛之러라
[目] 이때 지방 관리들이 고을을 다스림에 모두 참혹하고 각박함을 서로 숭상하였으나, 유독 좌내사左內史 예관兒寬(예관)은 농업을 권장하고 형벌을 너그럽게 하고 옥송獄訟을 잘 다스려서 인심을 얻는 데 힘썼고, 인자하고 후덕한 선비를 뽑아 등용하였으며 진정眞情을 미루어 아랫사람을 대하고 명성을 바라지 않으니, 관리와 백성들이 크게 믿고 사랑하였다.
收租稅할새 時裁闊狹하여 與民相假貸하니 以故 租多不入注+闊, 謂征斂稍寬, 禁防疎闊之時. 狹, 謂督促迫急之時. 闊時不急征收, 假貸與民, 使營生業.이라
조세를 거둘 적에 시기에 맞게 너그럽고 급박함[활협闊狹]을 재량해서 백성들에게 빌려주니, 이 때문에 조세가 들어오지 않은 것이 많았다.注+은 세금을 거두기를 다소 너그럽게 하고 금방禁防(금령禁令)을 다소 늦출 때를 이르며, 은 독촉하고 급박하게 할 때를 이르니, 너그럽게 할 때에는 세금 거두는 것을 급박하게 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빌려주어서 생업生業을 경영하게 한 것이다.
後有軍發 左內史以負租課殿當免注+課, 試也. 殿, 丁練切, 上功曰最, 下功曰殿. 師古曰 “凡言殿最者, 殿, 後也, 謂課居後也. 最者, 凡要之首, 言課居先也.”이러니 民聞當免하고 皆恐失之하여 大家 牛車 小家 擔負하여 輸租繈屬不絶하니 課更以最注+繈, 擧兩切, 索也. 屬, 之欲切, 聯也. 言輸者接連, 不絶於道, 若繩索之相屬也.
뒤에 군대를 징발하자, 좌내사左內史가 조세를 징수하지 못해서 최하의 고과考課를 받아 면직하게 되었는데,注+는 시험(고과)이다. 殿정련丁練이니, 이 높은 것을 라 하고 이 낮은 것을 殿이라 한다.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무릇 전최殿最를 말함에 있어, 殿은 뒤이니 고과가 뒤에 있음을 말한 것이요, 범요凡要(문서)의 첫머리이니 고과가 앞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백성들이 그가 면직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그를 놓칠까 두려워해서, 큰 집(부잣집)에서는 소달구지를 동원하고 작은 집(가난한 집)에서는 짐을 지고 가서 조세를 바치는 행렬이 새끼줄처럼 이어져 끊어지지 않으니, 고과가 다시 최고가 되었다.注+거량擧兩이니 새끼줄이고, 지욕之欲이니 이어짐이다. 〈“수조강촉부절輸租繈屬不絶”은〉 곡식을 수송하는 자들이 이어져서 길에 끊이지 않는 것이 새끼줄이 서로 이어진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由此愈奇寬이러라
은 이로 말미암아 예관을 더욱 소중하게 여겼다.
遣使하여 하다
[綱] 사자使者를 보내 남월南越에게 들어와 조회하도록 타일렀다.
南越文王胡 遣其子嬰齊하여 入宿衛하니 在長安하여 取樛氏女하여 生子興注+取, 讀曰娶. 樛, 音鳩, 姓也.하다
[目] 처음에 남월南越문왕文王 조호趙胡가 아들 조영제趙嬰齊를 보내서 들어와 숙위宿衛하게 하니, 조영제는 장안長安에 있으면서 구씨樛氏(구씨)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조흥趙興을 낳았다.注+(장가들다)는 로 읽는다. 는 음이 이니, 이다.
文王薨 嬰齊立하여 乃藏其先武帝璽注+謂去其僭號也. 趙佗自號南越武帝.하고 立樛氏爲后하고 爲嗣하니 漢數使使者하여 風諭嬰齊入朝호되 嬰齊尙樂하고 擅殺生自恣하며 固稱病不見注+樂, 音洛. 尙樂, 謂好尙逸樂也. 見, 賢遍切.이러니 諡曰明王이라하다
문왕文王이 죽자, 조영제가 즉위하여 그 선조인 무제武帝(조타趙佗)의 옥새玉璽를 감추고는注+〈“장기선무제새藏其先武帝璽(무제武帝옥새玉璽를 감춘 것)”는〉 참람한 칭호를 제거한 것이다. 조타趙佗는 스스로 남월南越 무제武帝라 칭하였다. 구씨를 황후皇后로 세우고 조흥을 후사後嗣로 삼으니, 나라가 여러 번 사자使者를 보내 조영제에게 들어와 조회할 것을 넌지시 타일렀으나, 조영제는 향락을 좋아하고 살생을 자행하며 스스로 방종하여 한사코 병을 칭탁하고 들어와 뵙지 않았는데,注+(향락)은 음이 이니, “상락尙樂”은 일락逸樂을 좋아하고 숭상함을 이른다. (뵙다)은 현편賢遍이다. 조영제가 죽자 시호를 명왕明王이라 하였다.
代立하고 其母爲太后하니 太后嘗與霸陵人安國少季通注+安國, 複姓. 少季, 名. 一云 “少季字.”하다
조흥이 대를 이어 즉위하고 그 어미인 구씨가 태후太后가 되니, 태후는 일찍이 패릉霸陵 사람 안국소계安國少季와 간통하였다.注+안국安國복성複姓이고 소계少季는 이름이다. 일설에 “소계少季이다.” 하였다.
是歲 使少季往하여 諭王及太后以入朝하여 比內諸侯하니 年少하고 太后 中國人이요 少季往 復與私通하여 國人 不附太后
[目] 이해에 안국소계安國少季로 하여금 가서 태후太后에게 들어와 조회하도록 타일러서 국내國內제후諸侯에 견주게 하니, 왕은 이때 나이가 어리고 태후는 중국 사람이며, 안국소계가 가서 또 그녀와 간통하여 남월南越의 사람들이 태후를 따르지 않았다.
太后因使者上書하여 請比內諸侯하여 三歲一朝하고 除邊關한대 天子許之하고 賜其丞相呂嘉銀印하니 使者留塡撫之하다
태후가 사자使者를 통해 글을 올려서 국내의 제후에 견주어 3년에 한 번 조회하고 변방의 관문을 없앨 것을 청하자, 천자天子가 이를 허락하고 그의 승상丞相여가呂嘉에게 은인銀印을 하사하니, 사자가 이곳에 머물며 진무鎭撫하였다.
以方士公孫卿爲郞하다
[綱] 방사方士공손경公孫卿낭관郞官으로 삼았다.
幸雍하여 且郊할새 或曰 五帝 泰一之佐也 宜立太一而上親郊라하여늘
[目] 땅에 행차하여 장차 교제郊祭를 지내려 할 적에 혹자가 말하기를 “태일신泰一神의 보좌이니, 마땅히 태일太一(태일泰一)의 사당을 세우고 이 직접 교제를 지내야 합니다.” 하였다.
疑未定이러니 齊人公孫卿曰 漢興 復當黃帝之時하고 寶鼎出而與神通注+通鑑 “公孫卿曰 ‘今年得寶鼎, 其冬辛巳朔旦冬至, 與黃帝時等.’ 卿有札書曰 ‘黃帝得寶鼎, 是歲己酉朔旦冬至, 凡三百八十年. 黃帝僊登于天.’”이라
이 주저하며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라 사람 공손경公孫卿이 말하기를 “나라가 일어남이 다시 황제黃帝의 때를 당하였고 보정寶鼎이 나와 과 통합니다.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 “공손경公孫卿이 말하기를 ‘금년에 보정寶鼎을 얻었는데, 이해 겨울 신사일辛巳日 초하루 아침에 동지冬至가 들어 황제黃帝 때와 똑같다.’ 하였으며, 공손경公孫卿에게 편지글이 있었는데, 말하기를 ‘황제黃帝보정寶鼎을 얻었는데, 이해 겨울 기유일己酉日 초하루 아침 동지冬至까지 모두 380년이다. 이해에 황제黃帝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하였다.
黃帝接萬靈明庭하니 明庭者 甘泉也注+萬靈, 衆神明也.
황제黃帝가 밝은 조정[명정明庭]에서 여러 신령들과 접하였으니, 밝은 조정은 감천궁甘泉宮입니다.注+만령萬靈은 여러 신명神明이다.
黃帝採首山銅하여 鑄鼎於荊山下注+班志 “河東蒲阪縣, 有首山, 馮翊懷德縣, 有荊山.”러니 鼎旣成 有龍垂胡髥下迎注+胡, 謂頷下垂肉也. 髥, 人占切, 頰須也.이어늘 黃帝上騎龍하고 與群臣後宮七十餘人으로 俱登天하니이다
황제黃帝수산首山을 채취하여 형산荊山 아래에서 솥을 주조하였는데,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하동군河東郡 포판현蒲阪縣수산首山이 있고, 풍익군馮翊郡 회덕현懷德縣형산荊山이 있다.” 하였다. 솥이 이루어지자 이 턱밑의 살과 수염을 늘어뜨리고 내려와 황제黃帝를 맞이하니,注+는 턱 아래에 늘어진 살을 이른다. 인점人占이니, 볼에 난 구레나룻이다. 황제黃帝는 용에 올라타고 여러 신하와 후궁後宮 70여 명과 함께 〈신선神仙이 되어〉 모두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하였다.
於是 上曰 嗟乎
이에 이 말하기를 “아!
誠得如黃帝 吾視去妻子 如脫屣耳라하고 拜卿爲郞注+屣, 山爾切, 小履也. 脫屣者, 言其便易, 無所顧也.하다
황제黃帝처럼 신선만 될 수 있다면 내 처자식을 버리기를 헌신짝을 벗는 것과 같이 하겠다.” 하고, 공손경을 낭관郞官으로 제수하였다.注+산이山爾이니, 작은 신이다. ‘헌신짝을 벗는다.’는 것은 편하고 쉬워서 돌아보는 바가 없음을 말한다.
역주
역주1 (睢)[脽] : 저본에는 ‘睢’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脽’로 바로잡았으며 訓義 역시 함께 바로잡았다.
역주2 (榮)[滎](형) : 저본에는 ‘榮’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滎’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 [周] : 저본에는 ‘周’가 없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4 尙公主 : “《資治通鑑綱目》에 들어와서 ‘公主에게 장가들다.[尙主]’라고 쓴 경우가 있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쓴 것은 어째서인가? 비판한 것이다. 方士로서 공주에게 장가들었으니, 武帝의 미혹됨이 심하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공주를 下嫁했다.’라고 쓴 것이 14번인데, ‘尙’이라고 쓴 것은 세 번이다.[入綱目 尙主未有書者 書此 何 譏也 以方士尙公主 帝之惑甚矣 終綱目 書公主下嫁十四 其書尙者三]” 《書法》
“方士로서 공주에게 장가든 것은 똑같은 부류끼리 혼인한 것이 아니다. 무릇 列侯가 공주에게 장가든 것을 모두 쓰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특별히 쓴 것은 武帝의 잘못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일에는 貶黜할 필요 없이 일에 근거하여 곧바로 쓰면 惡이 저절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으니, 바로 이러한 따위이다.[以方士而尙公主 則非其類矣 凡列侯尙主 皆不書 而此特書之者 所以著其失也 事有不待貶黜 據事直書 而惡自見者 此類是也]” 《發明》
역주5 喩南越入朝 : “‘들어와 조회하도록 타일렀다.’고 쓴 것은 비판한 것이니, 덕을 사모하여 와서 신하 노릇 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뒤에 呂嘉가 배반했을 적에 路博德의 군대가 〈토벌했다고 쓰지 않고〉 다만 ‘공격했다.[擊]’고 쓴 것이다.[書喩入朝 譏也 非慕德而來臣矣 故呂嘉之反 路博德止書擊]” 《書法》
역주6 五帝 : 五行을 주관하는 神으로, 東方과 봄의 木을 주관하는 蒼帝의 靈威仰, 南方과 여름의 火를 주관하는 赤帝의 赤熛怒, 中央의 土를 주관하는 黃帝의 含樞紐, 西方과 가을의 金을 주관하는 白帝의 白招拒, 北方과 겨울의 水를 주관하는 黑帝의 汁光紀라 한다.

자치통감강목(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