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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9)

자치통감강목(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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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乙酉梁武帝天監四年 魏宣武帝正始二年하여 盡乙巳梁武帝普通六年 魏孝明帝孝昌元年이니 凡二十一年이라
梁天監四年이요 魏正始二年이라
梁主雅好儒術이라 以東晉宋齊雖置國學而無講授之實이라하여
乃下詔曰 二漢登賢 莫非經術이라 服膺雅道하여 名立行成이러니 魏晉浮蕩하여 儒教淪歇하니 風節罔樹 抑此之由注+① 歇, 休息也. 樹, 立也.
其置五經博士하고 廣開館宇하여 招内後進하여 給其餼廪하고 其射策通明者 即除爲吏注+② 餼, 饋生肉也. 廩, 給芻米也. 射策者, 謂難問疑義書之於策, 列置案上, 不使彰顯, 有欲射者, 隨其所取得而釋之, 以知優劣. 射之言投也.하라
又選學生하여 往雲門山하여 從何胤受業하고 命胤選經明行修者以聞注+③ 雲門山在會稽南, 胤時隱雲門山.하라하고 分遣博士祭酒하여 巡州郡立學하다
梁漢中太守夏侯道遷 以郡叛하여 降于魏이어늘 魏遣將軍邢巒入漢中하여 遂取梁州하다
梁夏侯道遷 從裴叔業鎭壽陽이라가 與叔業有隙하여 單騎奔魏한대 魏王肅 使守合肥러라
肅卒 道遷 奔梁하니 梁以爲漢中太守러니 復叛降魏어늘
魏以邢巒으로 爲鎭西將軍하여 將兵赴之할새 巒至漢中하여 所向摧破하니 魏以巒으로 爲梁秦二州刺史러라
楊集起集義聞魏克漢中而懼하여 帥群氐叛之어늘 巒擊破之注+① 集起․集義, 皆紹先叔父.하다
梁遣將軍孔陵等拒魏어늘 邢巒遣統軍王足하여 擊破之하여 遂入劍閣하니
陵等 退保梓潼이어늘 足又進擊破之하니 梁州十四郡地東西七百里南北千里 皆入于魏하다
益州刺史當陽侯鄧元起乞歸어늘 詔以西昌侯淵藻 代之注+① 淵藻, 懿之子也.한대
元起營還裝 糧儲器械 取之無遺하니 淵藻恨之注+② 營還裝元起傳作頗營還裝.하고 又求其良馬不得이라
遂因醉殺之而誣以反하니 梁主疑焉이러니 元起故吏羅研 詣闕訟之한대 梁主曰 果如我所量也로다하고
使讓淵藻曰 元起爲汝報讐어늘 汝爲讐報讐하니 忠孝之道如何注+③ 蕭懿死於東昏之手, 元起從梁主誅東昏, 是報淵藻父讐也.오하고 貶號爲冠軍將軍하고 贈元起征西將軍하고 諡曰忠侯라하다
李延壽論曰注+① 延壽, 唐太宗時人, 撰南․北史. 元起勤乃胥附하고 功惟闢土어늘 勞之不圖하고 禍機先陷이라
冠軍之貶 於罰已輕하니 梁之政刑 於斯爲失하니 年之不永 不亦宜乎注+② 胥, 相也. 謂擧義兵相附從也. 功惟壁土, 謂開梁․益之土也.
◑ 益州民焦僧護作亂이어늘 蕭淵藻年未弱冠이나 議自擊之한대 或陳不可라하니
淵藻斬之하고 乃乘肩輿하여 巡行賊壘하니 賊弓亂射하여 矢下如雨
從者擧楯禦矢러니 淵藻命去之하니 由是 人心大安이라 擊僧護等皆平之하다
六月 하다
梁將軍王景胤等 與魏王足으로 戰屢敗러니 七月 足進逼涪城하니 八月 秦梁刺史魯方達等十五將 戰敗皆死하고 景胤等二十四將 又敗亦死하다
侍中崔光上表曰
氣蒸成菌이라 生於墟落濕穢之地 不當生於殿堂高華之處어늘 今忽有之하니 誠足異也注+① 菌, 巨隕切, 地蕈也. 墟, 大丘也. 落, 院落也.
夫野木生朝하고 野鳥入廟 古人皆以爲敗亡之象이라 故太戊中宗 懼災修德하여 殷道以昌하니 所謂家利而怪先이요 國興而妖豫者也注+② 商王太戊之時, 亳有祥桑穀共生于朝, 一暮大拱. 太戊懼而修德, 祥桑枯死, 殷道復興. 祥, 妖怪也. 高宗祭成湯, 明日有飛雉升鼎耳而雊, 高宗懼而修德, 殷道復興. 中宗當作高宗.
今西南二方 兵革未息하고 郊甸之内 大旱踰時하니 民勞物悴 莫此之甚이라
承天育民者 所宜矜恤이니 願陛下 側躬聳意하여 惟新聖道하사 節夜飲之樂하고 養方富之年하면 則魏祚可以永隆이요 皇壽等於山岳矣리이다
於是 魏主好宴樂이라 故光言及之하다
冬十月 注+① 宏, 梁主之弟. 惔, 忱之兄也. 水經注 “洛澗北逕泰虛, 下注淮, 謂之洛口.”하다
◑ 武興氐王楊紹先 叛魏하다
楊集起集義 立楊紹先爲帝어늘 魏遣楊椿討之注+① 紹先, 集始之子也.하다
十一月 魏王足 奔梁하다
足圍涪城한대 蜀人震恐하여 益州城戍降者 什二三이요 民自上名籍者 五萬餘戶러라
邢巒 表於魏主曰 建康成都 相去萬里 陸行旣絶하여 而水軍非周年不達하니 一可圖也注+① 自襄陽西行遵陸可以至蜀, 梁州旣入于魏, 則陸路斷矣.
頃經劉季連鄧元起之亂하여 資儲空竭하고 吏民 無復固守之志하니 二可圖也注+② 頃, 近也.
淵藻 裠屐少年이라 未洽治務하고 宿昔名將 多見囚戮하고 所任 皆左右少年하니 三可圖也注+③ 裠音群, 與裙通, 下裳也. 屐, 竭戟切, 履也. 言其服飾之美, 猶言衣冠子弟也.
蜀之所恃 唯在劍閣이어늘 今已奪其險하여 方軌無礙하니 四可圖也注+④ 諸葛孔明相蜀, 以大劍․小劍有隘束之路, 故曰劍門. 以閣道三十里至險, 乃有閣尉. 姜維拒鍾會於此. 晉以其地入梓潼郡. 桓溫入蜀, 於晉壽置劍閣縣, 屬梁州.
淵藻 是衍至親하니 必無死理 若克涪城하면 必將逃走 蜀卒驚怯하고 弓矢寡弱하니 五可圖也
今若不取 後圖便難 況益州殷實하여 戶口十萬이라 比之壽春義陽 其利三倍注+⑤ 魏先此, 已得壽春․義陽故云然.하니 若欲進取 時不可失이라하니 不從하다
巒又表曰 昔鄧艾鍾會帥十八萬衆하여 傾中國資儲하여 僅能平蜀하니 所以然者 鬪實力也
況臣才非古人이니 何宜以二萬之衆而希平蜀이리오
所以敢者 正以據得要險하고 士民慕義 任力而行이면 理有可克耳어니와
臣誠知戰伐危事 未易可爲 自度劍閣以來 鬢髪中白이라
故欲先取涪城하여 以漸而進注+① 中, 去聲.하니 若得涪城이면 則中分益州之地하여 斷水陸之衝注+② 魏已得劍閣, 進取成都, 涪當其衝. 梁兵由內水而上救成都, 涪亦當其衝.이니 彼外無援軍하여 孤城自守 何能復持久哉리오
臣今欲使軍軍相次하여 聲勢連接하여 先爲萬全之計然後 圖功하니 得之則大利 不得則自全이니이다
又巴西南鄭 相距千里 昔以統綰勢難으로 曾立巴州하여 以鎭夷獠러니 梁州藉利하여 因而表罷注+③ 綰, 鳥板切, 繫也. 藉, 慈夜切.하니
彼土民望嚴蒲何楊豪右甚多하여 文學風流 亦爲不少注+④ 嚴․蒲․何․楊, 四姓也.로되 但以去州旣遠하여 不獲仕進하니 是以鬱怏하여 多生異圖
比道遷建義之始 嚴玄思自號巴州刺史하여 克城以來 仍使行事注+⑤ 比, 近也.하니
巴西 廣袤千里 戸餘四萬하니 若於彼立州하여 鎭攝華獠하면 大帖民情이니 從墊江已還 不勞征伐하여 自爲國有리이다하니 魏主亦不從注+⑥ 巴西之地, 華人與獠雜居, 故云華獠. 帖, 靜也, 安也, 伏也.하다
先是 魏主以王足으로 行益州刺史러니 旣而 更以羊祉 代之한대 足聞之不悅하여 輒引兵還하여 遂不能定蜀이러라 久之 奔梁하다
巴西 叛魏降梁하다
邢巒 在梁州 接豪右以禮하고 撫小民以惠하니 州人悅之러니 使軍主李仲遷으로 守巴西한대 仲遷 溺於酒色하여 費散兵儲하니 城人斬之하고 以城降梁하다
米斛三十錢이러라


≪資治通鑑綱目≫ 제30권은 乙酉年(505) 梁나라 武帝 天監 4년, 北魏 宣武帝 正始 2년부터 乙巳年(525) 梁나라 武帝 普通 6년, 北魏 孝明帝 孝昌 원년까지이니, 모두 21년이다.
梁나라 高祖 武帝 蕭衍 天監 4년이고, 北魏 世宗 宣武帝 元恪 正始 2년이다.
【綱】 봄 정월에 梁나라가 五經博士를 설치하고 州와 郡에 학교를 세웠다.
【目】 梁主(蕭衍)가 평소에 儒術을 좋아하였는데, 東晉ㆍ宋나라ㆍ齊나라가 비록 國學을 설치하였지만 실제 講學과 수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조서를 내리기를 “ 때에 등용한 인재는 經術家가 아닌 사람이 없었기에 올바른 道에 마음을 쏟아 명예가 서고 행실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魏나라(曹魏)ㆍ晉나라 때에는 들뜨고 방탕하여 儒教가 침체하였으니, 風氣와 절개가 수립되지 않은 것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注+① 歇은 그침이다. 樹는 세움이다.
五經博士를 두고 學校와 館舍를 널리 설치하여 後進을 불러들여 급료를 주고 射策(석책)에 통달하여 밝은 사람은 즉시 벼슬을 주어 관리에 임명하라.注+② 餼는 생고기를 주는 것이고, 廩은 꼴과 쌀을 지급하는 것이다. 射策은 논난할 질문과 의심이 드는 부분을 죽간에다 써서 책상 위에 늘어놓아 보이지 않도록 한 다음에 시험에 응시하려는 자가 자신이 취한 질문지에 따라 풀이하도록 하여 우열을 알아내는 것을 말한다. 射는 投合의 뜻이다.
또 학생을 선발하여 雲門山으로 가서 何胤에게 수업을 받게 하고, 하윤에게 명을 내려 경서에 밝고 덕행이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여 보고하게 하라.”라고 하고,注+③ 雲門山은 會稽의 남쪽에 있는데, 何胤은 당시에 雲門山에 은거하고 있었다. 博士와 祭酒를 나누어 파견하여 州와 郡을 순회하고 학교를 세우도록 하였다.
【綱】 梁나라 漢中太守 夏侯道遷이 고을을 가지고 배반하여 北魏에 투항하자, 북위가 장군 邢巒을 보내 漢中으로 들어가게 하여 드디어 梁州를 취하였다.
【目】 예전에 梁나라 夏侯道遷이 裴叔業을 따라 壽陽을 지키다가 배숙업과 사이가 벌어져 말 한 필을 타고 北魏로 달아났는데, 북위의 王肅이 그에게 合肥를 지키게 하였다.
왕숙이 卒하자 하후도천이 양나라로 달아나니 양나라에서 漢中太守로 삼았는데, 다시 반란을 일으켜 북위로 투항하였다.
북위가 邢巒을 鎭西將軍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게 하였는데, 형만이 漢中에 이르러 가는 곳마다 격파하자,注+① 楊集起와 楊集義는 모두 楊紹先의 숙부이다. 북위는 형만을 梁․秦二州刺史에 임명하였다.
楊集起와 楊集義는 북위의 군대가 漢中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두려워하여 여러 氐族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형만이 그들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梁나라가 장군 孔陵 등을 보내어 북위에 대항하자, 형만이 統軍 王足을 보내어 공격해서 격파하여 드디어 劍閣으로 들어갔다.
孔陵 등이 후퇴하여 梓潼을 지켰는데 왕족이 또 진격하여 격파하니, 梁州 14개 郡의 지역의 동서 700리 남북 1,000리가 모두 북위의 영토로 넘어갔다.
【綱】 여름 4월에 梁州ㆍ益州刺史 蕭淵藻가 전임 刺史인 鄧元起를 죽였는데, 고을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소연조가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目】 처음에 益州刺史인 當陽侯 鄧元起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하자, 조서를 내려 西昌侯 蕭淵藻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注+① 蕭淵藻는 蕭懿의 아들이다.
등원기가 돌아갈 행장을 꾸리면서 저장해둔 양식과 器械를 모조리 챙기고 하나도 남겨두지 않으니, 소연조가 그를 원망하였고,注+② “營還裝”이 ≪梁書≫ 〈登元起傳〉에는 “頗營還裝(돌아갈 행장을 심하게 꾸렸다.)”으로 되어 있다. 또 좋은 말을 요구하였는데 얻지 못하였다.
드디어 등원기가 술에 취한 것을 틈타서 죽이고는 모반을 꾀하였다고 무고를 하니, 梁主(蕭衍)가 의심하였다. 등원기의 故吏인 羅研이 대궐로 가서 그 일을 하소연하자, 梁主가 말하기를 “과연 내 생각대로였구나.”라고 하고는,
소연조에게 使者를 보내어 질책하기를 “등원기가 그대를 위해 원수를 갚아주었는데, 그대는 원수를 위해 원수를 갚았으니, 충효의 도리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였다.注+③ 蕭懿가 東昏侯(蕭寶卷)의 손에 죽었는데, 登元起가 梁主(蕭衍)와 함께 동혼후를 죽였으니, 이는 蕭淵藻의 아비의 원수를 갚아준 것이다. 소연조의 호칭을 冠軍將軍으로 깎아내리고, 등원기를 征西將軍으로 追增하고 諡號를 ‘忠侯’라고 하였다.
【目】 李延壽가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注+① 李延壽는 唐 太宗 때 사람으로, ≪南史≫ㆍ≪北史≫를 저술하였다. “등원기가 근면하여 〈의병을 일으켰을 때〉 병사들이 서로 잘 따랐고, 공적은 〈梁州와 益州 지역을〉 개척하였는데, 공로에는 보상을 해주지 않고 재앙의 덫에 먼저 빠지게 되었다.
蕭淵藻를 冠軍將軍으로 깎아내린 처벌은 형벌로 보면 너무 가벼운 것으로, 梁나라의 정치와 형벌은 여기에서 잘못되었으니, 國運이 길지 못한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注+② 胥는 서로라는 뜻이니, 〈“胥附”는〉 義兵을 일으켰을 때에 병사들이 서로 잘 따랐다는 말이다. “功惟壁土”는 梁州와 益州 지역을 개척했다는 말이다.
【目】 益州의 백성 焦僧護가 난을 일으키자, 소연조가 弱冠이 되지 않은 나이에도 직접 그들을 공격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안 된다고 하였다.
소연조가 그의 목을 베고는 肩輿를 타고서 적들의 진영을 순행하였는데, 적들이 활을 어지럽게 쏘아대어 화살이 비가 내리듯 하였다.
수행하던 자들이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았는데, 소연조가 치우라고 명을 내리니 이로 말미암아 민심이 크게 안정되어 초승호 등을 공격하여 모두 평정하였다.
【綱】 6월에 梁나라에서 처음으로 孔子의 祠堂을 세웠다.
【綱】 가을 7월에 北魏의 統軍 王足이 涪城을 공격하여 8월에 梁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장수 魯方達 등 39명을 죽였다.
【目】 梁나라 장군 王景胤 등이 北魏의 王足과 전투를 치러 여러 차례 패배하였다. 7월에 왕족이 진격하여 涪城을 핍박하니, 8월에 秦州․梁州의 刺史인 魯方達 등 15명의 장수가 전투에서 패배하여 모두 전사하고, 왕경윤 등 24명의 장수가 또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綱】 北魏의 太極殿에서 靈芝가 자랐다.
【目】 侍中 崔光이 다음과 같이 표문을 올렸다.
“증기로 인해 菌(버섯)이 생장하므로, 큰 언덕이나 깊은 뜰 안처럼 습기가 있고 더러운 곳에서 자라나지, 높고 화려한 궁전에서 자라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이런 일이 있으니, 참으로 기이합니다.注+① 菌(버섯)은 巨隕의 切이니, 地蕈이다. 墟는 큰 언덕이다. 落은 깊은 뜰 안이다.
들판의 나무가 朝堂에서 자라고 들판의 새가 宗廟로 들어오는 것을 옛사람들이 모두 나라가 망할 징조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太戊와 中宗이 재앙이 닥칠까 두려워하여 덕을 닦아 殷나라의 道가 번창하였으니, 이른바 ‘집안이 잘되려면 괴이한 징조가 먼저 나타나고 나라가 흥하려면 요상한 징조가 미리 나타난다.’는 것입니다.注+② 商王 太戊 시절에 亳 땅에 요상한 뽕나무와 곡식이 朝堂에 함께 자라나서 하룻밤에 아름드리가 되었다. 그러자 太戊가 두려워하여 덕을 닦으니, 요상한 뽕나무가 말라 죽었고, 殷나라의 道가 부흥하였다. 祥은 괴이함이다. 高宗이 成湯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다음 날 꿩이 날아와 솥귀에 올라가서 울었다. 그러자 고종이 두려워 덕을 닦으니, 殷나라의 道가 부흥하였다. 中宗은 마땅히 高宗이 되어야 한다.
지금 서쪽과 남쪽 두 지역에서 전쟁이 그치지 않고, 수도와 가까운 교외 지역에는 큰 가뭄이 오래 지속되고 있으니, 백성의 수고로움과 사물의 피폐함이 이보다 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을 기르는 사람이 마땅히 구휼해야 하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두려워하고 유념하시어 성스러운 道를 새롭게 하시어 밤에 술을 마시는 즐거움을 절제하시고 한창인 나이를 잘 보양하시면 北魏의 국운은 영원히 융성할 것이며, 황제께서는 큰 산악처럼 오래 장수하실 것입니다.”
이때에 魏主(元恪)가 연회와 유흥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최광이 이런 말을 하였다.
【綱】 겨울 10월에 梁나라에서 臨川王 蕭宏과 僕射 柳惔을 파견하여 군사를 이끌고 北魏를 정벌하게 하면서 洛口에 주둔하게 하였다.注+① 蕭宏은 梁主(蕭衍)의 아우이고, 柳惔은 柳忱의 형이다. ≪水經注≫에 “洛澗은 북쪽으로 泰虛를 경유하여 하류로 흘러 淮水로 유입되는데, 그곳을 洛口라고 한다.” 하였다.
【綱】 武興氐王 楊紹先이 北魏를 배반하였다.
【目】 楊集起와 楊集義가 楊紹先을 황제로 세우자 北魏에서 楊椿을 보내어 토벌하였다.注+① 楊紹先은 楊集始의 아들이다.
【綱】 11월에 北魏의 王足이 梁나라로 달아났다.
【目】 王足이 涪城을 포위하자, 蜀人들이 두려움에 떨어 益州에서 성벽을 지키다가 항복한 사람이 열에 두세 명이었고, 백성들 중에 스스로 호적장부를 바친 민가가 5만여 戶였다.
邢巒이 魏主(元恪)에게 表文을 올리기를 “建康과 成都의 거리가 1만 리이고, 육지로 통하는 길이 이미 끊어져서 水軍은 일 년의 기간이 아니면 도달하지 못하니, 도모할 만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注+① 襄陽에서 서쪽으로 육지를 따라가면 蜀에 도달할 수 있는데, 梁州가 이미 北魏에게 넘어갔으니, 육로는 끊어졌다.
근래에 劉季連과 鄧元起의 난리를 겪어 저장된 물자가 고갈되었고, 관리와 백성들이 다시 굳게 지킬 뜻이 없으니, 도모할 만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注+② 頃은 근래라는 뜻이다.
蕭淵藻는 귀한 집안의 자제로 정무에 미흡하고, 예전에 이름난 장수들은 대부분 갇히거나 죽임을 당하였고,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은 모두 가까이에 있는 젊은이들이니, 도모할 만한 세 번째 이유입니다.注+③ 裠(치마)의 음은 群으로, 裙과 통용하니, 치마이다. 屐은 竭戟의 切이니, 나막신이다. 〈“裠屐”은〉 아름다운 복식을 말한 것이니, ‘衣冠子弟(문벌이 좋은 집안의 자제)’라는 말과 같다.
蜀에서 믿는 것은 劍閣 지역뿐인데, 지금 이미 그 험준한 지형을 빼앗아 수레를 나란히 하여 지나가는데 장애물이 없으니, 도모할 만한 네 번째 이유입니다.注+④ 諸葛孔明이 蜀漢의 丞相을 지낼 적에 大劍山과 小劍山 사이에 좁은 길이 있었기 때문에 劍門이라고 하였다. 30리의 閣道가 아주 험준하여 閣尉를 두었다. 姜維가 이곳에서 鍾會를 막았다. 晉나라는 그 지역을 梓潼郡에 소속시켰다. 桓溫이 蜀으로 들어가서는 晉壽에 劍閣縣을 두고 梁州에 소속시켰다.
소연조는 蕭衍의 골육지친이니 필시 죽을 리가 없습니다. 만약 涪城을 함락하면 반드시 도주할 것이며, 蜀의 군사는 겁이 많고 활과 화살도 적고 약하니, 도모할 만한 다섯 번째 이유입니다.
지금 만약 그곳을 탈취하지 않으면, 뒤에 도모하기는 어렵습니다. 더구나 益州는 넉넉하고 풍족하여 戶口가 10만이라, 壽春과 義陽에 비하면 그 이로움이 세 배이니,注+⑤ 北魏가 이에 앞서 이미 壽春과 義陽을 점령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만약 진격하여 탈취하려면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目】 邢巒이 또 표문을 올리기를 “예전에 鄧艾와 鍾會는 18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中原의 비축된 물자를 모두 징발하여 겨우 蜀을 평정할 수 있었으니, 그 이유는 실제 전투력으로 싸웠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臣의 재주는 옛사람만 못하니, 어찌 2만의 군사로 蜀을 평정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럼에도 감히 그렇게 하려는 것은 바로 험준한 요충지를 점거하였고, 병사와 백성들이 의리를 사모하니, 역량에 따라 맡겨서 거행하면 이치상 이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臣은 정벌이 위험한 일이라 쉽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劍閣을 건넌 뒤로 귀밑머리의 절반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涪城을 빼앗고 점차 전진하려는 것이니,注+① 中(반쯤)은 去聲이다. 만약 부성을 얻는다면 益州의 땅을 절반으로 나누어 수로와 육로의 요충지를 차단하게 됩니다.注+② 北魏가 劍閣을 얻고 나서 진격하여 成都를 취하려고 하였는데, 涪城이 그 요충지에 해당하였고, 梁나라 군대가 內水에서 올라와 성도를 구원하려고 하였는데, 부성이 역시 그 요충지에 해당하였다. 그렇게 되면 저들은 외부에 지원군이 없어 외로운 성을 홀로 지키게 되리니, 어찌 다시 오랫동안 버틸 수 있겠습니까.
臣은 지금 군대들마다 서로 진을 쳐서 聲勢를 서로 잇게 하여 먼저 만전을 기하는 계책을 세운 뒤에 공로를 이루려고 하니, 계획대로 되면 큰 이익을 보게 될 것이고, 실패해도 스스로 온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巴西와 南鄭의 거리가 1천여 리나 되기에 옛날에 다스리기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에 巴州를 세워서 夷族과 獠族을 다스렸었는데, 梁州가 여기에서 이득을 탐하여 그로 인해 표문을 올려 巴州를 철폐하였습니다.注+③ 綰(얽매다)은 鳥板의 切이니, 얽맴이다. 藉(의뢰하다)는 慈夜의 切이다.
저들 토착민들이게 명망이 있는 嚴氏ㆍ蒲氏ㆍ何氏ㆍ楊氏 집안에는 富豪家族들이 아주 많아 문학과 풍류 역시 적지 않으나,注+④ 嚴․蒲․何․楊은 네 가지 성씨이다. 다만 州와의 거리가 이미 멀어서 벼슬에 진출할 기회를 얻지 못하니, 이로 인해 우울해하고 불만을 품어 반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많이 싹트게 됩니다.
근래에 夏侯道遷이 대의를 들어 거병한 초기에 嚴玄思가 스스로 巴州刺史라 칭하며 성을 함락한 이후로 그대로 자사의 일을 대행하도록 시켰습니다.注+⑤ 比는 근래라는 뜻이다.
巴西는 면적이 1천 리이고, 戶口는 대략 4만입니다. 만약 그곳에 州를 세워 漢族과 獠族을 진압하여 다스리면 백성의 마음을 크게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니, 墊江 이후 지역은 수고롭게 정벌하지 않아도 절로 우리나라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魏主(元恪)가 역시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注+⑥ 巴西 지역에 漢族과 獠族이 섞여 살았기 때문에 華獠라고 말한 것이다. 帖은 조용함이며, 편안함이며, 복종함이다.
이에 앞서 魏主가 王足으로 益州刺史를 대행하게 하였는데, 얼마 뒤에 다시 羊祉로 그 임무를 대신하게 하니, 왕족이 그 소식을 듣고는 기뻐하지 않아 갑자기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서 결국 蜀을 평정할 수 없었다. 오랜 시일이 지난 뒤에 〈왕족이〉 梁나라로 달아났다.
【綱】 巴西가 北魏를 배반하고 梁나라에 투항하였다.
【目】 邢巒이 梁州에 있으면서 호족을 예우하고 백성들을 은혜로 어루만지니 州의 사람들이 기뻐하였는데, 軍主 李仲遷에게 巴西를 지키게 하니, 이중천이 술과 여색에 빠져 군대에 필요한 물자를 낭비하자 城에 있던 사람들이 그의 목을 베고 城을 가지고 梁나라에 투항하였다.
【綱】 梁나라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目】 쌀 1곡에 30전이었다.


역주
역주1 梁置五經博士 立州郡學 : “晉나라 篇부터 ‘魏나라가 博士를 설치했다.[魏置博士]’라고 기록하고 宋나라ㆍ齊나라를 지나도록 기록한 것이 없다가 이때에 와서 다시 기록하였으니 經典을 높인 것을 가상하게 여긴 것이다. 梁나라 정치는 여기에서 더욱 기록할 만한 것이 있다. ≪資治通鑑綱目≫이 마칠 때까지 ‘五經博士를 설치했다.’라고 기록한 것은 3번이니(漢 武帝 建元 5년(B.C. 136)에 자세하다.) 이를 제외하고는 기록한 것이 없다.[自晉之篇 書魏置博士 歴宋齊未有書者 至是復書 嘉尊經也 梁政於是益有可書者 終綱目書置經博士三(詳漢武帝建元五年) 舍是無書者矣]” ≪書法≫
역주2 二漢 : 東漢과 西漢을 말한다.
역주3 梁益州刺史蕭淵藻……淵藻討平之 : “蕭淵藻가 전임 刺史를 죽였으니, 어찌 그가 독단하여 주벌한 것을 바로잡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梁主는 겨우 장군의 호칭만 깎아내렸기 때문에 ≪資治通鑑綱目≫에서도 삭제하여 기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梁主가 너무 관용을 베푼 잘못은 晩年까지 살펴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총명했던 초기에 이미 드러났으니 자제들이 서로 난동을 부린 것이 마땅하다.[淵藻殺前刺史 盍正其專殺之誅 而梁主僅貶其號 故綱目亦削而不書 然則梁主寛縱之失 不待見之晩年 蓋於其精明之初 已見之矣 宜乎子弟之交亂也]” ≪發明≫
역주4 梁初立孔子廟 : “‘처음 세웠다.[初立]’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시작을 기록한 것이다. 宋나라가 일찍이 魯 지역의 孔子의 사당을 수리한 적이 있었으나, 이때에 淮南이 모두 北魏 지역이 되어 공자의 사당으로 가는 길이 끊어졌다. 梁主가 처음으로 〈江南에 공자의 사당을〉 창립하니 존경할 대상을 알았다고 말할 만하다. 기록하기를 ‘처음 세웠다[初立]’라고 하였으니 매우 가상히 여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을 마칠 때까지 ‘공자의 사당[孔子廟]’이라고 기록한 것은 3번이니(晉 孝武帝 太元 17년(392)에 자세하다.) 이를 제외하고는 기록한 것이 없다.[初立 何 記始也 宋嘗修魯孔子廟矣 於是淮南皆爲魏境 孔廟隔絕 梁主始創立之 可謂知所尊矣 書曰初立 深嘉之也 終綱目書孔子廟三(詳晉孝武帝太元十七年) 舍是無書者矣]” ≪書法≫
“孔子의 사당을 세운 것은 옳다. 그러나 ‘처음 세운 것[初立]’을 기록하였으니 이보다 앞서서는 세운 적이 없음을 보인 것이다. 江左(南朝)의 여러 조정에서 숭상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拓跋氏에게 부끄러움이 많다.[立孔子廟 是也 然書初立 則見前此未嘗立也 江左累朝崇尙如此 其有愧於拓跋氏多矣]” ≪發明≫
역주5 魏統軍王足……三十九人 : “≪資治通鑑綱目≫에서 ‘장군을 죽였다.[殺将]’라고 기록한 것은 이보다 많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특별히 몇 명이라고 기록한 것이다.[綱目書殺将 未有多於此者矣 故特書若干人]” ≪書法≫
역주6 魏有芝生於太極殿 : “‘지초[芝]’를 기록한 것은 2번인데(漢 武帝 元朔 2년(B.C. 127), 安帝 元初 2년(115)) 모두 나무란 것이다. 여기서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강직한 신하를 드러낸 것이다. 崔光은 용감하게 말했다고 할 만하다. ≪資治通鑑綱目≫이 마칠 때까지 지초가 생장한 것을 기록한 것은 3번이니 이를 제외하고는 기록한 것이 없다.[書芝再矣(漢武帝元朔二年 安帝元初六年) 皆譏也 此其書 何 著直臣也 崔光可謂敢言矣 終綱目書芝生三 舍是無書者矣]” ≪書法≫
“芝는 풀인데 田野에서 생장하지 않고 殿堂에서 생장하여 거의 뽕나무ㆍ곡식과 같을 뿐이다. 北魏는 孝文帝 이후로 정치가 날로 쇠퇴하였는데 지금 또 이 요망한 물건이 있게 되었는데도 그 임금이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하면 되겠는가. 기록한 것은 찬미한 것이 아니라 괴이함을 기록한 것이다.[芝 草也 不生於田野 而生於殿堂 殆與桑穀等爾 魏自孝文以後 政治日衰 今又有此妖物 其主猶不知寤 可乎 書非美之 蓋紀異也]” ≪發明≫
역주7 梁遣臨川王……次于洛口 : “北魏가 梁나라를 압박하였는데 ‘정벌했다[伐]’라고 기록하고, 여기서 또 ‘정벌했다[伐]’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북위가 배반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梁나라 장군 39명을 죽이는 데에 이르렀으면 이 전쟁은 명분이 없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에 특별히 ‘정벌했다[伐]’라고 기록한 것이다. 그렇지만 정벌하면서 머물게 하였으니[次] 나무란 것이다. 蕭宏은 겁을 먹은 것이 심하므로 뒤에 ‘도망해 귀순하였다.[逃歸]’라고 기록하였으니, 이로부터 梁나라의 성이 北魏로 귀순한 것을 비로소 ‘배반[叛]’이라고 기록하였다.[魏加梁 書伐 此其亦書伐 何 魏納叛人也 至殺梁將三十九 則斯師也 不爲無名矣 於是特書伐 伐而次 譏也 蕭宏怯懦甚矣 故後書逃歸 自是梁城歸魏 始書叛]” ≪書法≫
역주8 梁大有年 : “漢나라 明帝로부터 ‘크게 풍년이 들었다.[大有年]’(永平 9년(66))를 기록하여 여기에 거듭 보이니 모두 태평한 시대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大有年’을 기록한 것이 4번이고(永平 9년, 이해(505), 唐 太宗 貞觀 4년(630), 玄宗 開元 13년(725)), ‘풍년이 들었다.[有年]’를 기록한 것이 2번이고(後唐 丁亥年(927), 己丑年(929)), ‘곡식이 크게 익었다.[大熟]’를 기록한 것이 1번이고, ‘큰 풍작이 들었다.[大稔]’는 4번이고, ‘보리가 익었다.[麥稔]’가 1번이다(永平 9년에 자세하다.).[自漢明帝書大有年(永平九年) 於是再見 皆盛時也 終綱目書大有年四(永平九年 是年 唐太宗貞觀四年 玄宗開元十三年) 書有年二(後唐丁亥年 己丑年) 書大熟一 大稔四 麥稔一(詳永平九年)]” ≪書法≫
“≪資治通鑑綱目≫에서 漢나라 顯宗 永平 9년(66)부터 ‘크게 풍년이 들었다.[大有年]’라고 기록한 이후로 苻堅이 晉나라를 침략하기 1년 전에 ‘秦나라(前秦)가 크게 풍작이 들었다.[秦大熟]’라고 기록한 적이 있고 지금에 와서 또 몇 년이 지나서 겨우 이해에 기록하였다. 永平 시대부터 지금까지 440년 사이에 2번 ‘大有’라고 기록하고, 1번 ‘大熟’이라고 기록하였으니 다른 해에는 흉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梁 武帝의 초기 정치가 淸明하여 전쟁이 그치고 부역이 줄었으므로 그 효과가 이와 같았다. ≪자치통감강목≫은 일에 의거하여 기록한 것은 後人들에게 백성의 일을 유념하게 하여 만일 불행하게 천하가 분할되는 시대를 만나더라도 한쪽 지역에서 의기가 저상하지 않게 한다면 또한 거의 옳은 것이니 이것이 書法의 뜻이다.[綱目自漢顯宗永平九年 書大有年之後 至苻堅寇晉之前一年 甞書秦大熟 迨今又幾閲歲矣 僅有是年之書 夫自永平至此 上下四百四十年間 凡兩書大有 一書大熟 則他歲之歉爲可知 是時 梁武初政淸明 息兵省役 故其效若此 綱目據事書之 蓋欲使後人留意民事 萬一不幸當壤地瓜分之世 毋徒以偏方自沮 則亦庶乎其可也 此書法之意也]” ≪發明≫

자치통감강목(19) 책은 2022.11.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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