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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에 梁夏侯道遷이 從裴叔業鎭壽陽이라가 與叔業有隙하여 單騎奔魏한대 魏王肅이 使守合肥러라
肅卒에 道遷이 奔梁하니 梁以爲漢中太守러니 復叛降魏어늘
魏以邢巒으로 爲鎭西將軍하여 將兵赴之할새 巒至漢中하여 所向摧破하니 魏以巒으로 爲梁秦二州刺史러라
楊集起集義聞魏克漢中而懼
하여 帥群氐叛之
어늘 巒擊破之
注+① 集起․集義, 皆紹先叔父.하다
梁遣將軍孔陵等拒魏어늘 邢巒遣統軍王足하여 擊破之하여 遂入劍閣하니
陵等이 退保梓潼이어늘 足又進擊破之하니 梁州十四郡地東西七百里南北千里가 皆入于魏하다
目
巒又表曰 昔鄧艾鍾會帥十八萬衆하여 傾中國資儲하여 僅能平蜀하니 所以然者는 鬪實力也니
所以敢者는 正以據得要險하고 士民慕義니 任力而行이면 理有可克耳어니와
臣誠知戰伐危事라 未易可爲니 自度劍閣以來로 鬢髪中白이라
故欲先取涪城
하여 以漸而進
注+① 中, 去聲.하니 若得涪城
이면 則中分益州之地
하여 斷水陸之衝
注+② 魏已得劍閣, 進取成都, 涪當其衝. 梁兵由內水而上救成都, 涪亦當其衝.이니 彼外無援軍
하여 孤城自守
니 何能復持久哉
리오
臣今欲使軍軍相次하여 聲勢連接하여 先爲萬全之計然後에 圖功하니 得之則大利요 不得則自全이니이다
又巴西南鄭
이 相距千里
라 昔以統綰勢難
으로 曾立巴州
하여 以鎭夷獠
러니 梁州藉利
하여 因而表罷
注+③ 綰, 鳥板切, 繫也. 藉, 慈夜切.하니
彼土民望嚴蒲何楊豪右甚多
하여 文學風流
가 亦爲不少
注+④ 嚴․蒲․何․楊, 四姓也.로되 但以去州旣遠
하여 不獲仕進
하니 是以鬱怏
하여 多生異圖
라
比道遷建義之始
에 嚴玄思自號巴州刺史
하여 克城以來
로 仍使行事
注+⑤ 比, 近也.하니
巴西
는 廣袤千里
요 戸餘四萬
하니 若於彼立州
하여 鎭攝華獠
하면 大帖民情
이니 從墊江已還
은 不勞征伐
하여 自爲國有
리이다하니 魏主亦不從
注+⑥ 巴西之地, 華人與獠雜居, 故云華獠. 帖, 靜也, 安也, 伏也.하다
先是에 魏主以王足으로 行益州刺史러니 旣而요 更以羊祉로 代之한대 足聞之不悅하여 輒引兵還하여 遂不能定蜀이러라 久之요 奔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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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예전에 梁나라 夏侯道遷이 裴叔業을 따라 壽陽을 지키다가 배숙업과 사이가 벌어져 말 한 필을 타고 北魏로 달아났는데, 북위의 王肅이 그에게 合肥를 지키게 하였다.
왕숙이 卒하자 하후도천이 양나라로 달아나니 양나라에서 漢中太守로 삼았는데, 다시 반란을 일으켜 북위로 투항하였다.
북위가 邢巒을 鎭西將軍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게 하였는데, 형만이 漢中에 이르러 가는 곳마다 격파하자,
注+① 楊集起와 楊集義는 모두 楊紹先의 숙부이다. 북위는 형만을 梁․秦二州刺史에 임명하였다.
楊集起와 楊集義는 북위의 군대가 漢中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두려워하여 여러 氐族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형만이 그들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梁나라가 장군 孔陵 등을 보내어 북위에 대항하자, 형만이 統軍 王足을 보내어 공격해서 격파하여 드디어 劍閣으로 들어갔다.
孔陵 등이 후퇴하여 梓潼을 지켰는데 왕족이 또 진격하여 격파하니, 梁州 14개 郡의 지역의 동서 700리 남북 1,000리가 모두 북위의 영토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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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益州의 백성 焦僧護가 난을 일으키자, 소연조가 弱冠이 되지 않은 나이에도 직접 그들을 공격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안 된다고 하였다.
소연조가 그의 목을 베고는 肩輿를 타고서 적들의 진영을 순행하였는데, 적들이 활을 어지럽게 쏘아대어 화살이 비가 내리듯 하였다.
수행하던 자들이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았는데, 소연조가 치우라고 명을 내리니 이로 말미암아 민심이 크게 안정되어 초승호 등을 공격하여 모두 평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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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侍中 崔光이 다음과 같이 표문을 올렸다.
“증기로 인해 菌(버섯)이 생장하므로, 큰 언덕이나 깊은 뜰 안처럼 습기가 있고 더러운 곳에서 자라나지, 높고 화려한 궁전에서 자라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이런 일이 있으니, 참으로 기이합니다.
注+① 菌(버섯)은 巨隕의 切이니, 地蕈이다. 墟는 큰 언덕이다. 落은 깊은 뜰 안이다.
들판의 나무가 朝堂에서 자라고 들판의 새가 宗廟로 들어오는 것을 옛사람들이 모두 나라가 망할 징조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太戊와 中宗이 재앙이 닥칠까 두려워하여 덕을 닦아 殷나라의 道가 번창하였으니, 이른바 ‘집안이 잘되려면 괴이한 징조가 먼저 나타나고 나라가 흥하려면 요상한 징조가 미리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注+② 商王 太戊 시절에 亳 땅에 요상한 뽕나무와 곡식이 朝堂에 함께 자라나서 하룻밤에 아름드리가 되었다. 그러자 太戊가 두려워하여 덕을 닦으니, 요상한 뽕나무가 말라 죽었고, 殷나라의 道가 부흥하였다. 祥은 괴이함이다. 高宗이 成湯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다음 날 꿩이 날아와 솥귀에 올라가서 울었다. 그러자 고종이 두려워 덕을 닦으니, 殷나라의 道가 부흥하였다. 中宗은 마땅히 高宗이 되어야 한다.
지금 서쪽과 남쪽 두 지역에서 전쟁이 그치지 않고, 수도와 가까운 교외 지역에는 큰 가뭄이 오래 지속되고 있으니, 백성의 수고로움과 사물의 피폐함이 이보다 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들을 기르는 사람이 마땅히 구휼해야 하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두려워하고 유념하시어 성스러운 道를 새롭게 하시어 밤에 술을 마시는 즐거움을 절제하시고 한창인 나이를 잘 보양하시면 北魏의 국운은 영원히 융성할 것이며, 황제께서는 큰 산악처럼 오래 장수하실 것입니다.”
이때에 魏主(元恪)가 연회와 유흥을 좋아하였기 때문에 최광이 이런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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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邢巒이 또 표문을 올리기를 “예전에 鄧艾와 鍾會는 18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中原의 비축된 물자를 모두 징발하여 겨우 蜀을 평정할 수 있었으니, 그 이유는 실제 전투력으로 싸웠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臣의 재주는 옛사람만 못하니, 어찌 2만의 군사로 蜀을 평정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럼에도 감히 그렇게 하려는 것은 바로 험준한 요충지를 점거하였고, 병사와 백성들이 의리를 사모하니, 역량에 따라 맡겨서 거행하면 이치상 이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臣은 정벌이 위험한 일이라 쉽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劍閣을 건넌 뒤로 귀밑머리의 절반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涪城을 빼앗고 점차 전진하려는 것이니,
注+① 中(반쯤)은 去聲이다. 만약 부성을 얻는다면 益州의 땅을 절반으로 나누어 수로와 육로의 요충지를 차단하게 됩니다.
注+② 北魏가 劍閣을 얻고 나서 진격하여 成都를 취하려고 하였는데, 涪城이 그 요충지에 해당하였고, 梁나라 군대가 內水에서 올라와 성도를 구원하려고 하였는데, 부성이 역시 그 요충지에 해당하였다. 그렇게 되면 저들은 외부에 지원군이 없어 외로운 성을 홀로 지키게 되리니, 어찌 다시 오랫동안 버틸 수 있겠습니까.
臣은 지금 군대들마다 서로 진을 쳐서 聲勢를 서로 잇게 하여 먼저 만전을 기하는 계책을 세운 뒤에 공로를 이루려고 하니, 계획대로 되면 큰 이익을 보게 될 것이고, 실패해도 스스로 온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巴西와 南鄭의 거리가 1천여 리나 되기에 옛날에 다스리기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에 巴州를 세워서 夷族과 獠族을 다스렸었는데, 梁州가 여기에서 이득을 탐하여 그로 인해 표문을 올려 巴州를 철폐하였습니다.
注+③ 綰(얽매다)은 鳥板의 切이니, 얽맴이다. 藉(의뢰하다)는 慈夜의 切이다.
저들 토착민들이게 명망이 있는 嚴氏ㆍ蒲氏ㆍ何氏ㆍ楊氏 집안에는 富豪家族들이 아주 많아 문학과 풍류 역시 적지 않으나,
注+④ 嚴․蒲․何․楊은 네 가지 성씨이다. 다만 州와의 거리가 이미 멀어서 벼슬에 진출할 기회를 얻지 못하니, 이로 인해 우울해하고 불만을 품어 반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많이 싹트게 됩니다.
근래에 夏侯道遷이 대의를 들어 거병한 초기에 嚴玄思가 스스로 巴州刺史라 칭하며 성을 함락한 이후로 그대로 자사의 일을 대행하도록 시켰습니다.
注+⑤ 比는 근래라는 뜻이다.
巴西는 면적이 1천 리이고, 戶口는 대략 4만입니다. 만약 그곳에 州를 세워 漢族과 獠族을 진압하여 다스리면 백성의 마음을 크게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니, 墊江 이후 지역은 수고롭게 정벌하지 않아도 절로 우리나라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魏主(元恪)가 역시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注+⑥ 巴西 지역에 漢族과 獠族이 섞여 살았기 때문에 華獠라고 말한 것이다. 帖은 조용함이며, 편안함이며, 복종함이다.
이에 앞서 魏主가 王足으로 益州刺史를 대행하게 하였는데, 얼마 뒤에 다시 羊祉로 그 임무를 대신하게 하니, 왕족이 그 소식을 듣고는 기뻐하지 않아 갑자기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서 결국 蜀을 평정할 수 없었다. 오랜 시일이 지난 뒤에 〈왕족이〉 梁나라로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