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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8)

자치통감강목(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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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酉年(85)
을유년乙酉年(85)
二年이라 春正月 하다
나라 숙종 효장황제肅宗 孝章皇帝 원화元和 2년이다. 봄 정월에 조령詔令을 내려 백성들에게 태양곡胎養穀을 하사하고 이 내용을 명시하여 법령으로 삼았다.
詔曰 諸懷姙者 賜胎養穀人三斛하고 復其夫하여 勿算一歲하여 著爲令注+姙, 音壬, 孕也.하라
】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렸다. “임신한 여자들에게 1인당 태양곡胎養穀 3을 하사하고 남편의 부역을 면제하여 1년 동안 를 내지 말게 하며, 이 내용을 드러내어 법령으로 삼으라.”注+은 음이 이니 잉태함이다.
詔戒俗吏矯飾者하다
조령詔令을 내려 속된 관리로서 겉모습을 거짓으로 꾸미는 자를 경계하였다.
詔曰 俗吏矯飾外貌하여 似是而非하니 朕甚饜之하고 甚苦之注+饜, 通作厭.하노라
】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렸다. “속된 관리들이 겉모습을 잘 꾸며서 옳은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르니, 은 이를 매우 싫어하고 근심스럽게 여기노라.注+(싫어하다)은 과 통한다.
安靜之吏 悃愊無華하여 日計不足이나 月計有餘注+悃愊, 至誠也. 無華, 不事文采也. 日計不足, 月計有餘, 謂以日計功, 若不足者, 然而計之, 則民安其生, 家給人足, 固有餘矣.하나니
안정되고 진중한 관리는 지성스러우나 외면의 화려함이 없어서 을 날로 계산하면 부족하나 달로 계산하면 유여하다.注+곤핍悃愊”은 지성至誠이다. “무화無華”는 문채文采를 일삼지 않는 것이다. “일계부족 월계유여日計不足 月計有餘”는 날로 공을 계산하면 부족한 듯하나, 오랫동안 계산해보면 백성들이 그 생업을 편안히 하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해서 진실로 유여함을 이른다.
如襄城令劉方 吏民同聲하여 謂之不煩이라하니 雖未有它異 斯亦殆近之矣注+襄城縣, 屬潁川郡.
예컨대 양성령 유방襄城令 劉方 같은 자는 관리와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번거롭지 않다고 말하니, 비록 별다른 특이점이 있지 않으나 이 또한 거의 안정되고 진중한 관리에 가깝다고 하겠다.注+양성현襄城縣영천군潁川郡에 속하였다.
夫以苛爲察하고 以刻爲明하고 以輕爲德하고 以重爲威하여 四者或興이면 則下有怨心이라
까다로움을 살핌으로 여기고 각박함을 밝음으로 여기고 가볍게 용서함을 으로 여기고 무겁게 형벌함을 위엄으로 여기는 것, 이 네 가지가 혹 일어나면 아래 백성들이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
吾詔書數下하여 冠蓋接道로되 而吏不加治하고 民或失職하니 其咎安在 勉思舊令하여 稱朕意焉注+冠蓋接道, 謂奉詔出使者, 相接於道也. 舊令, 謂故府之籍所疏載者.하라
내가 조서詔書를 여러 번 내려서 사자使者가 길에 이어졌으나 관리들은 더 잘 다스려지지 않고 백성들은 혹 직업을 잃으니, 그 잘못이 어디에 있는가. 힘써 옛 법령을 생각하여 의 뜻에 걸맞게 하라.”注+관개접도冠蓋接道”는 조서詔書를 받들고 나간 사자使者가 길에 이어짐을 말한 것이다. “구령舊令”은 옛 전적典籍에 실려 있는 법령을 이른다.
二月 行四分曆하다
】 2월에 을 시행하였다.
太初曆 施行百有餘年 曆稍後天注+謂七曜之行, 在曆家所推步躔次之前, 晦․朔․弦․望, 不合也.이라 命編訢等하여 綜校하여 作四分曆하여 施行之注+編訢, 姓名. 綜校, 謂錯綜而校正之.하다
태초력太初曆이 시행된 지 100여 년에 책력이 점차 하늘의 도수度數보다 늦어졌다.注+〈“역초후천曆稍後天”은〉 칠요七曜(, 오성五星)의 운행이 역가曆家가 그 운행을 추산한 것보다 앞에 있어서 그믐과 초하루, 상현上弦(7~8일경)과 하현下弦(22~23일경), 보름이 부합하지 않음을 이른다. 편흔編訢(편흔) 등에게 명해서 종합하고 교정하여 사분력四分曆을 만들어 시행하게 하였다.注+편흔編訢은 사람의 성명이다. “종교綜校”는 종합하여 교정함을 이른다.
帝東巡하다
】 황제가 동쪽 지역으로 순행하였다.
帝之爲太子也 受書於汝南張酺러니 至是東巡할새 酺爲東郡太守
】 황제가 태자太子였을 적에 여남汝南 사람 장포張酺(장포)에게 ≪상서尙書≫를 배웠다. 이때에 동쪽 지역을 순행할 적에, 장포가 동군東郡태수太守로 있었는데,
帝幸東郡하여 引酺及門生掾史하여 會庭中注+東郡庭也.호되 先備弟子之儀하여 使酺講尙書一篇然後 修君臣之禮하다
황제는 동군에 행차하여 장포와 그의 문생門生연사掾史들을 인도해서 뜰 가운데에 모아놓고서注+〈“정중庭中”은〉 동군東郡의 뜰이다. 먼저 제자의 예의를 갖추어 장포로 하여금 ≪상서尙書≫ 한 하게 한 다음 군신君臣 간의 예를 행하였다.
行過任城할새 幸鄭均舍하여 賜尙書祿以終其身하니 時人 號爲白衣尙書注+元年, 分東平爲任城.라하니라
임성任城을 지날 적에는 정균鄭均의 집에 행차하여 상서尙書의 녹봉을 하사하여 종신토록 누리게 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라고 하였다.注+원년元年동평東平을 나누어 임성任城으로 만들었다.
耕於定陶하고 柴告岱宗하고 宗祀明堂하고 三月 至魯하여 祠孔子注+明堂, 武帝所作, 在奉高縣西南四里.하다
】 황제가 정도定陶에서 친경親耕를 행하고, 대종岱宗(태산泰山)에서 섶을 태워 하늘에 제사하여 〈태산泰山에 이르렀음을〉 고하고, 명당明堂에서 〈오제五帝를〉 높여 제사하고, 3월에 지역에 가서 공자孔子에게 제사하였다.注+명당明堂”은 무제武帝가 지은 것이니, 봉고현奉高縣 서남쪽 4리 지점에 있다.
帝祠孔子及七十二弟子於闕里하고 作六代之樂하여 大會孔氏男子六十二人注+續漢志 “魯縣古曲阜, 有闕里, 孔子所居.” 六代之樂, 黃帝曰雲門, 堯曰咸池, 舜曰大, 禹曰大夏, 湯曰大濩, 周曰大武.하다
】 황제가 공자孔子와 72명의 제자를 궐리闕里에서 제사하고 육대六代의 풍악을 일으켜서 공씨孔氏의 남자 62명을 크게 모이게 하였다.注+속한지續漢志≫에 “노현魯縣의 옛 곡부曲阜궐리闕里가 있으니, 공자孔子가 사셨던 곳이다.” 하였다. “육대지악六代之樂”은 황제黃帝운문雲門, 임금은 함지咸池, 임금은 대소大韶, 우왕禹王대하大夏, 탕왕湯王대호大濩, 나라는 대무大武이다.
帝謂孔僖曰 今日之會 寧於卿宗 有光榮乎 對曰 臣聞明王聖主 莫不尊師貴道라하니
황제가 공희孔僖에게 이르기를 “오늘의 모임은 어찌 의 집안에 영광이 되지 않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은 듣건대, 현명한 왕과 성스러운 군주는 스승을 높이고 를 귀하게 여기지 않은 분이 없다 하였습니다.
今陛下親屈萬乘하사 辱臨敝里하시니 此乃崇禮先師하여 增輝聖德이요 非臣家之私榮也注+先師, 謂孔子.니이다
지금 폐하께서 몸소 만승萬乘의 존귀함을 굽히시어 저의 마을에 욕되게 왕림하셨으니, 이는 바로 선사先師를 높여 예우해서 성덕聖德에 광채를 더하는 것이요, 의 집안의 사사로운 영화가 아닙니다.”注+선사先師”는 공자孔子를 이른다. 하였다.
帝大笑曰 非聖者子孫이면 焉有斯言乎아하고 拜僖郞中하다
황제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자손이 아니면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공희를 낭중郞中에 임명하였다.
至東平하여 祠獻王陵하다
동평東平에 이르러 헌왕獻王(유창劉蒼)의 에 제사하였다.
帝至東平하여 追念獻王하여 謂其諸子曰 思其人하여 至其鄉이나 其處在 其人亡이라하고 因泣下沾襟하고
】 황제가 동평東平에 이르러 헌왕獻王을 추념해서 그의 여러 아들에게 이르기를 “이분을 사모하여 이 지방에 왔으나 살던 곳만 남아 있고 이분은 안 계시다.” 하고는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고,
遂幸獻王陵하여 祠以太牢하고 親拜祠坐하고 哭泣盡哀注+賢曰 “陵, 在今鄆州東峗山南.” 坐, 徂卧切. 峗, 魚委切.하다
마침내 헌왕의 에 행차하여 태뢰太牢로써 제사하고 친히 사당의 위패에 절하고 곡읍哭泣하여 슬픔을 다하였다.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헌왕獻王의〉 은 지금 운주鄆州의 동쪽, 위산峗山(위산) 남쪽에 있다.” 하였다. (자리)는 조와徂卧이다. 어위魚委이다.
獻王之歸國也 驃騎府吏丁牧, 周栩 以王愛賢下士라하여 不忍去하고 遂爲王家大夫數十年하여 事祖及孫注+明帝以蒼爲驃騎將軍, 置長史․掾史員四十人. 祖及孫, 謂獻王及子懷王忠及今王敞.이러니
헌왕이 봉국封國으로 돌아갈 적에 표기부驃騎府의 관원인 정목丁牧주허周栩(주후)는 헌왕이 어진 이를 사랑하고 선비에게 낮춘다 하여 차마 떠나가지 못하고 왕가王家대부大夫로 수십 년을 지내면서 할아버지(유창劉蒼)와 손자(유창劉敞)를 섬겼는데注+명제明帝유창劉蒼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삼아 장사長史연사掾史 40명을 배치하였다. “조급손祖及孫”은 헌왕獻王과 그의 아들 회왕 유충懷王 劉忠과 지금의 왕 유창劉敞을 이른다.,
帝聞之하고 皆引見하고 擢爲議郎注+見, 賢遍切.하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모두 인견引見하여 발탁하여 의랑議郎으로 삼았다.注+(알현하다)은 현편賢遍이다.
夏四月 注+假, 通作格. 古者君將出, 必告于祖禰, 歸又至其廟而告之, 孝子不忍死其親, 出告反面之義也.하다
】 여름 4월에 황제가 환궁하여 선조의 사당과 아버지(명제明帝)의 사당에 나아갔다.注+과 통한다. 옛날에 군주가 장차 나가려고 하면 반드시 선조와 아버지의 사당에 고유하고 돌아오면 또 그 사당에 나아가 고유하였으니, 이는 효자가 차마 그 어버이를 죽은 것으로 여기지 못해서 나갈 때에 아뢰고 돌아오면 얼굴을 뵙는 뜻이다.
◑秋七月 詔定律하여 毋以十一, 十二月報囚하다
】 가을 7월에 조령詔令을 내려 형률刑律을 정해서 11월과 12월에는 죄를 논하여 판결하지 말게 하였다.
詔曰 春秋 重三正하고 愼三微注+春秋, 於春, 每月書王, 或書王正月, 或書王二月, 或書王三月. 三正者, 天地人之正. 所以有三者, 由有三微之月. 三微者, 三正之始, 萬物皆微, 物色不同, 故王者取法焉. 十一月, 陽氣始施於黃泉之下, 色皆赤, 赤者陽氣, 故周爲天正, 色尙赤. 十二月, 萬物始芽而色白, 白者陰氣, 故殷爲地正, 色尙白. 正月, 萬物莩甲而出, 其色皆黑, 人得加功展業, 故夏爲人正, 色尙黑. 必以三微之月爲正者, 當爾之時, 物皆尙微, 王者受命, 當扶微理弱, 奉成之義也.하니 其定律하여 無以十一月, 十二月報囚하고 止用冬初十月而已하라
】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렸다.
“≪춘추春秋≫에는 삼정三正을 중히 여기고 삼미三微를 삼갔으니注+춘추春秋≫에 봄에는 매월 ‘’을 써서 혹 “왕정월王正月”, 혹 “왕이월王二月”, 혹 “왕삼월王三月”이라 썼다.
셋이 있게 된 이유는 삼미三微의 달이 있기 때문이다. 삼미三微삼정三正의 시초에 만물이 모두 작아서 물건의 색깔이 똑같지 않기 때문에 왕자王者가 취하여 법으로 삼은 것이다. 11월은 양기陽氣가 땅속 깊은 곳에서 처음으로 베풀어져서 색깔이 모두 붉으니, 붉은 것은 양기陽氣이므로 나라는 동짓달(11월)을 천정天正으로 삼아 적색을 숭상하였고, 12월은 만물이 처음 싹터서 색깔이 희니, 흰색은 음기陰氣이므로 나라는 12월을 지정地正으로 삼아 흰색을 숭상하였고, 정월은 만물이 껍질을 뚫고 나와서 색깔이 모두 검으니, 사람이 공력을 가하고 사업을 펼 수 있으므로 나라는 정월을 인정人正으로 삼아 흑색을 숭상하였다. 반드시 삼미三微의 달을 가지고 정월로 삼은 것은, 이러한 때에는 모든 물건이 아직 작으니, 왕자가 천명을 받을 적에 마땅히 작은 것을 붙들고 약한 것을 다스리니, 이는 도와서 이루어주는 뜻이다., 형률을 정해서 11월과 12월에는 죄를 논하여 판결하지 말고, 다만 초겨울 10월에 죄를 논하여 판결하게 하라.”
】 겨울에 남선우南單于북선우北單于와 싸워서 격파하였다.
北匈奴衰耗하여 黨衆 離畔이라 南部攻其前하고 丁零寇其後하고 鮮卑擊其左하고 西域侵其右하니
북흉노北匈奴가 세력이 쇠약해지고 무리가 이반하였다. 남부南部(남흉노南匈奴)는 북흉노의 전방을 공격하고 정령丁零은 후미를 기습하고 선비鮮卑는 왼편을 공격하고 서역西域은 오른편을 치니,
不復自立하여 乃遠引而去러니 至是하여 南單于與戰於涿邪山하여 斬獲而還하다
북흉노가 다시는 자립할 수가 없어서 마침내 멀리 무리를 이끌고 떠나갔었다. 이때에 이르러 남선우南單于탁야산涿邪山에서 북흉노와 전투해서 북흉노의 무리를 참수하고 사로잡아 돌아가자,
武威太守孟雲 上言호되 北虜前旣和親이어늘 而南部復往抄掠하니 北單于謂漢欺之라하여 謀欲犯塞하니
무위태수 맹운武威太守 孟雲상언上言하기를 “북흉노가 예전에 이미 우리 나라와 화친을 했는데 남부南部가 다시 가서 노략질을 하니, 북선우北單于나라에서 자신들을 속였다 하고 모의하여 변방을 침입하고자 합니다.
謂宜還南所掠하여 以慰安之니이다 詔百官議한대 鄭弘, 第五倫等 以爲不可라하고
생각건대 마땅히 남부南部에서 노략질한 것들을 돌려주어 북선우를 위로해야 합니다.” 하였다. 백관百官에게 조령詔令을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정홍鄭弘제오륜第五倫 등은 불가하다 하고,
桓虞, 袁安等 以爲當與之라하여 虞廷斥弘하니 倫亦變色이러라
환우桓虞원안袁安 등은 마땅히 돌려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제오륜 역시 얼굴빛이 변하였다.
司隷擧奏한대 弘等 皆免冠謝어늘 詔報曰 事以議從이요 策由衆定이니
사례교위司隷校尉상주上奏하여 정홍鄭弘 등을 탄핵하자, 정홍 등이 모두 을 벗고 사죄하니, 황제가 조서詔書를 내려 답하기를 “일은 의논하여 따르고 계책은 여러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해지는 것이다.
誾誾侃侃 得禮之容이요 寑默抑心 非朝廷福이니 君何尤而深謝 其各冠履注+誾誾, 和悅而諍也. 侃侃, 剛直也. 寑, 息也.하라
온화하고 강직함이 예의에 맞는 용모이고, 침묵하여 마음을 억누르는 것은 조정의 복이 아닌데, 그대들이 어찌 허물하여 깊이 사죄하는가. 각각 과 신을 착용하도록 하라.”注+은은誾誾”은 화열하면서 간쟁하는 것이고, “간간侃侃”은 강직함이다. 은 그침이다. 하였다.
帝乃下詔曰 江海所以能長百川者 以其下之也注+長, 知兩切. 老子曰 “江海所以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也.” 今與匈奴 君臣分定하여 貢獻累至어늘
황제가 마침내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렸다. “강과 바다가 백천百川에 으뜸이 되는 이유는 자신을 낮추기 때문이다.注+(우두머리)은 지량知兩이다. ≪도덕경道德經≫에 “강과 바다가 백곡百谷의 왕이 된 이유는 잘 낮추기 때문이다.” 하였다. 지금 우리 나라는 흉노匈奴군신君臣의 신분이 정해져서 공물이 여러 번 왔는데,
豈宜違信하여 自受其曲이리오 其勅度遼及中郎將하여 倍雇南部所得生口하여 以還北虜注+時, 鄧鴻爲度遼將軍, 龐奮爲領中郞將. 倍, 加也. 雇, 賞報也.하고
어찌 신의를 어겨서 스스로 그 잘못을 받겠는가. 도료장군度遼將軍중낭장中郎將에게 칙령을 내려서 남부南部에서 사로잡은 포로를 곱절로 보상하여 북흉노에게 돌려주고注+이때에 등홍鄧鴻도료장군度遼將軍, 방분龐奮영중랑장領中郞將으로 있었다. 는 곱절로 더함이다. 는 보상하여 갚는 것이다.,
其南部斬首獲生 計功受賞 如常科하라
남부南部에서 참수하고 사로잡은 것은 을 계산하여 상을 주기를 평상시의 등급과 같게 하라.”
역주
역주1 詔賜民胎養穀 著爲令 : “漢나라 초기에 ‘아들을 낳은 백성들에게 〈2년 동안〉 부역을 면제하여 일을 시키지 말라.’고 쓴 것은 仁政을 기록한 것이다. 이때 다시 보이니, 황제는 진실로 長者이다.[漢初 書令民産子復 勿事 志仁政也 於是復見 帝誠長者矣]다” ≪書法≫
역주2 算賦 : 漢나라 때에 成年에게 징수했던 일종의 人頭稅로, 漢 高祖 4년(B.C.203)에 詔令을 내려 15세부터 56세까지 1인당 120錢을 세금으로 내도록 정하였다. 後漢 때에는 ‘口算’이라고도 하였다.
역주3 (冬)[久] : 저본에는 ‘冬’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久’로 바로잡았다.
역주4 四分曆 : 曆法의 이름이다. 漢 武帝 太初 원년(B.C.104)에 처음으로 三統曆을 사용하다가 백여 년이 지난 이때 四分曆으로 고쳐 시행하였는바, 1년을 365일과 또 4분의 1로 하여 四分曆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4분의 1이란 하루를 넷으로 나누었을 때에 이 가운데 하나란 뜻으로 지금 시간으로 6시간이 된다. 예전에는 曆法이 간략하여 하늘(별자리)의 度數와 잘 맞지 않았는데, 이러한 細分法을 둠으로써 통일성이 있었으나 초하루에는 300년마다 하루의 오차가 있고 계절에는 400년마다 3일의 오차가 있었다 한다. 또 ≪後漢書≫ 〈律曆志 中〉에는 “四分曆은 본래 圖讖說에 기인하였는데 가장 그 바름을 얻었다.[四分曆 本起圖讖 最得其正]” 하였다.
역주5 白衣尙書 : 鄭均이 尙書 벼슬을 하다가 면직하고 돌아왔다. 벼슬을 하는 관리는 모두 수놓은 관복을 입지만 평민(일반 백성)은 흰옷을 입으니, 당시 정균이 면직하여 白衣를 입고 있었는데 尙書의 녹봉을 받았으므로 ‘白衣尙書’라고 부른 것이다.
역주6 (詔)[韶] : 저본에는 ‘詔’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韶’로 바로잡았다.
역주7 還宮 假于祖禰 : “≪資治通鑑綱目≫에 ‘巡’을 쓴 것이 29번인데, 秦 始皇帝가 5번, 漢 武帝가 7번, 隋 煬帝가 3번이며, 황제(章帝) 또한 3번 썼는바, 글을 상세하게 쓴 것이 이 네 군주보다 더한 경우가 없다. 그러나 始皇과 武帝는 功德을 과시하고 신선을 구하였으며, 煬帝는 儀衛를 성대히 하고 먼 오랑캐를 복종시킨 것을 자랑하였으니, 모두 사치를 부리려는 욕심에서 나온 것이다. 오직 황제는 옛 법을 거행하고 先聖을 높여서 文治가 찬란하니, 세 군주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현격하다. 그러므로 환궁했을 때에 ‘선조의 사당과 아버지의 사당에 나아갔다.’라고 쓴 경우가 있지 않았는데, 이때에 자세히 쓴 것이다.[綱目書巡二十九 始皇五 武帝七 煬帝三 帝亦三書焉 而書辭之詳 亦莫如四君者 然始皇武帝 誇功德 求神僊 煬帝盛儀衛 矜服遠 皆奢欲之所發也 唯帝則擧古典 崇先聖 文治彬彬 視三君 天淵矣 故還宮 未有書假于祖禰者 於是備書之]다” ≪書法≫
역주8 春秋에는……하라 : 옛날에는 겨울에만 刑을 집행하고 生氣가 돋아나는 봄철에는 형을 집행하지 않았다. 漢나라는 建寅月을 正月로 하는 夏正을 사용하였는바, 이때 초겨울인 10월에는 죄를 논하여 판결하게 하고 建子月인 11월과 建丑月인 12월은 三微의 달에 해당하므로 하지 못하게 한 것으로 이는 仁慈한 마음을 베풀기 위해서였다.
역주9 三正은……정월이니 : ‘三正’은 夏正, 殷正, 周正으로, 곧 夏, 殷, 周 三代의 正朔인 三統을 가리킨다. 夏나라는 寅月인 음력 1월을 정월로 삼아 人統이 되고, 殷나라는 丑月인 음력 12월을 정월로 삼아 地統이 되며, 周나라는 子月인 음력 11월을 정월로 삼아 天統이 된다.
역주10 南單于……破之 : “오랑캐들이 서로 공격하는 것은 쓰지 않았는데,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썼는가. 싸움에 승리하여 漢나라의 상을 받았기 때문이다.[蠻夷相攻不書 此何以書 戰勝 受漢賞也]다” ≪書法≫
역주11 환우가……꾸짖으니 : ≪資治通鑑≫ 章帝 元和 2년(85) 조를 살펴보면, “정홍이 큰 소리로 과격하고 사납게 환우에게 말하기를 ‘포로들을 북흉노로 돌려보내야 마땅하다고 말하는 신하들은 모두 충성스럽지 못하다.’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언사 때문에 정홍은 환우의 책망과 司隷校尉의 탄핵을 당하였다.

자치통감강목(8)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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