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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9)

자치통감강목(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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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戌年(182)
五年이라 春正月 하다
太尉許戫 司空張濟 承望內官하여 受取貨賂注+戫, 許六切.하니 其宦者子弟, 賓客 貪穢 皆不敢問하고
而虛糾邊遠小郡淸修有惠化者二十六人한대 吏民 詣闕陳訴
司徒陳耽 上言호되 公卿所擧 率黨其私하니 所謂放鴟鴞而囚鸞鳳이로이다
帝以讓戫, 濟하고 諸坐徵者 悉拜議郞하다
二月 大疫하다
◑夏四月하다
◑秋七月 有星孛于太微하다
◑板楯蠻 寇巴郡이어늘 以曹謙爲太守하여 降之하다
板楯蠻 寇亂巴郡하니 連年討之호되 不能克이라 帝欲大發兵하여 以問益州計吏程包한대
對曰 板楯七姓 自秦世立功하여 復其租賦하니 其人 勇猛善戰注+板楯七姓, 羅․朴․督․鄂․度․夕․龔, 皆渠帥也. 秦昭襄王時, 有一白虎常從群虎, 數游秦蜀․巴․漢之境, 傷害千餘人. 昭王乃重募國中有能殺虎者, 賞邑萬家, 金百鎰. 時有巴郡閬中夷人, 能作白竹之弩, 乃登樓射殺白虎, 昭王嘉之, 而以其夷人, 不欲加封, 乃刻石盟要, 復夷人頃田不租, 十妻不算, 傷人者論, 殺人者得以倓錢贖死. 盟曰 “秦犯夷, 輸黃龍一雙, 夷犯秦, 輸淸酒一鍾.” 夷人安之. 倓, 徒濫切, 蠻夷贖罪貨也.이라
永初, 建和 羌虜入寇 皆賴板楯하여 連摧破之注+永初, 安帝年號. 建和, 桓帝年號.하고 馮緄 南征 倚以成功注+通鑑 “南征武陵.”하고 益州郡亂이어늘 以板楯討而平之하니이다
忠功 如此하고 本無惡心이러니 長吏, 鄕亭 更賦至重하고 僕役箠楚 過於奴虜注+更, 工衡切.하니
亦有嫁妻賣子하고 或乃至自剄割하여 陳寃州郡호되 不爲通理하고 闕庭悠遠하여 不能自聞注+爲, 去聲.이라
邑落相聚하여 以至叛戾하니 非有謀主僭號하여 以圖不軌
今但選明能牧守하면 自然安集이니 不煩征伐也니이다 帝從其言하여 選用太守曹謙하고 遣宣詔赦之하니 卽時皆降하다
八月 起四百尺觀하다
◑冬 하다
爲御史하니 宦官 畏之注+典, 榮之玄孫也.러라 常乘驄馬하니 京師爲之語曰 行行且止하여 避驄馬御史注+靑白雜毛曰驄.라하니라


임술년壬戌年(182)
나라 효령황제 광화孝靈皇帝 光和 5년이다. 봄 정월에 조령詔令을 내려 공경公卿에게 자사刺史이천석二千石(태수太守국상國相) 중에 백성들의 폐해가 되는 자를 들어 탄핵하게 하였다.
태위 허역太尉 許戫(허욱)과 사공 장제司空 張濟가 환관의 뜻에 영합하여 뇌물을 받으니注+허륙許六이다., 환관들의 자제子弟빈객賓客들의 탐욕스럽고 부정한 행위를 모두 감히 묻지 못하고,
도리어 변방 작은 의 품행이 깨끗하고 은혜로운 교화가 있는 관원 26명을 근거도 없이 고발하자, 의 관리와 백성들이 대궐에 나와 하소연하였다.
사도 진탐司徒 陳耽(진탐)이 상언上言하기를 “공경公卿들의 거조擧措가 대부분 자신의 사당私黨을 비호하니, 이른바 솔개와 올빼미를 놓아주고 난새와 봉황새를 가둔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황제가 허욱과 장제를 꾸짖고는, 변방 고을에서 불려와 책망을 받은 자들을 모두 의랑議郞에 제수하였다.
】 2월에 역병이 크게 유행하였다.
】 여름 4월에 가뭄이 들었다.
】 가을 7월에 패성孛星태미성太微星에 나타났다.
판순만板楯蠻파군巴郡을 침략하였는데, 조겸曹謙태수太守로 삼아서 항복시켰다.
판순만板楯蠻파군巴郡을 침략하여 어지럽혔는데, 해를 연이어 토벌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황제가 군대를 크게 징발하고자 하여 익주益州계리計吏정포程包에게 묻자,
정포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판순板楯의 일곱 나라 때부터 을 세워서 조세租稅부역賦役을 면제받았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용맹하여 전투를 잘합니다.注+판순板楯의 일곱 나씨羅氏, 박씨朴氏, 독씨督氏, 악씨鄂氏(악씨), 도씨度氏, 석씨夕氏, 공씨龔氏이니, 모두 거수渠帥(지역의 추장들)이다. 진 소양왕秦 昭襄王 때, 백호白虎 한 마리가 항상 여러 호랑이를 거느리고 나라의 한중漢中의 경내를 자주 돌아다니며 1,000여 명의 사람을 해쳤다. 소양왕昭襄王은 마침내 만가萬家백일百鎰의 상금을 내걸고 국중國中에서 이 호랑이를 죽일 수 있는 자를 모집하였다. 이때 파군巴郡낭중閬中에 사는 오랑캐 한 사람이 능히 백죽白竹으로 쇠뇌를 만들어서 마침내 누대에 올라가 백호白虎를 쏘아 죽였다. 소양왕昭襄王은 가상히 여겼으나, 그가 오랑캐 사람이므로 봉작을 내리지 않고자 하여, 마침내 오랑캐 사람들의 전지田地에서 조세를 거두지 않고, 10명의 아내에게서 구산전口算錢(사람에게서 징수하는 인두세人頭稅)을 거두지 않으며, 사람을 상해傷害한 자는 법에 따라 죄를 논하고, 사람을 죽인 자는 담전倓錢(담전)으로 사형을 속죄할 것을 돌에 새겨 맹약하였다. 또 맹세하기를 “나라가 오랑캐를 침범하면 한 쌍을 바치고, 오랑캐가 나라를 침범하면 청주淸酒(동이)을 바친다.” 하니, 오랑캐 사람들이 편안해하였다. 도람徒濫이니, 만이蠻夷의 속죄하는 돈이다.
영초永初건화建和 연간에 강족羌族이 침입하여 도둑질할 적에 모두 판순板楯에게 힘입어 연달아 이들을 격파하였고注+영초永初안제安帝의 연호이고, 건화建和환제桓帝의 연호이다., 풍곤馮緄이 남쪽을 정벌할 때에도 이들에게 의지하여 성공하였으며注+〈“남정南征”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남쪽으로 무릉武陵을 정벌했다.”로 되어 있다., 근래 익주군益州郡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판순을 거느리고 토벌하여 평정시켰습니다.
충성忠誠이 이와 같고 본래 나쁜 마음이 없었는데, 장리長吏를 지극히 무겁게 거두고, 부역을 시키고 때리기를 노예나 포로보다도 더 심하게 하니注+(번갈아)은 공형工衡이다.,
〈판순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아내를 시집보내고 자식을 팔아먹는 경우도 있고, 혹 심지어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고 자해自害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군州郡에 억울함을 아뢰어도 그들을 위해 해결해주지 않고, 대궐은 아득히 멀어서 스스로 보고할 수가 없습니다.注+(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이 때문에 취락聚落의 오랑캐가 서로 모여서 배반하게 되었으니, 모주謀主가 있어서 참람하게 제왕帝王을 칭하고 불궤不軌를 도모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다만 현명하고 유능한 주목州牧군수郡守를 선발해 보내시면 자연히 편안해질 것이니, 번거롭게 정벌할 필요가 없습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라 태수 조겸太守 曹謙을 선발하여 등용하고 그를 보내 조령詔令을 내려 죄를 사면하니, 즉시 모두 항복하였다.
】 8월에 400누관樓觀을 일으켰다.
】 겨울에 황제가 상림원上林苑에서 교렵校獵을 하였다.
환전桓典시어사侍御史로 삼았다.
환전桓典시어사侍御史가 되니 환관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注+환전桓典환영桓榮현손玄孫이다. 환전이 항상 총마驄馬를 타고 다니니, 경사京師에서 말하기를 “길을 가다가 우선 멈추어서 총마驄馬를 탄 어사御史를 피하라.”注+청색靑色백색白色의 털이 섞인 말을 이라 한다. 하였다.


역주
역주1 詔公卿 擧刺史二千石爲民害者 : “이때 刺史와 二千石이 豺狼과 호랑이와 같이 탐욕스러워서 도처에서 횡포를 부렸는데, 마침 詔令을 내려 公卿들에게 백성들의 폐해가 되는 자를 들어 탄핵하게 한 것은 어째서인가. 이것을 책에 썼으니, 千古의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是時 刺史二千石 貪如豺虎 所在縱橫 方且詔公卿擧爲民害者 何哉 書之於冊 足以發千古之一笑耳]” ≪發明≫
역주2 鄕亭의 관원 : 鄕과 亭은 漢代에 있었던 지방 구획의 이름으로 10리를 향, 10향을 정이라 하였는바, 정에는 長이 있었고 향에는 三老가 있었다.
역주3 更賦 : 漢나라 때 변방에 戍자리 살아야 하는 更役을 대신하여 돈으로 바치던 賦稅를 이른다.
역주4 黃龍 : 黃銅으로 주조하여 만든 龍으로, 옛날 盟約할 때 信標로 삼았다.
역주5 帝校獵上林苑 : “校獵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禽荒(사냥하는 재미에 빠짐)을 비난한 것이다. 이 행차에 황제가 돌아와서 太學에 간 것은 쓰지 않았으니, 삭제한 것이다.[書校獵 何 譏禽荒也 是行也 還幸太學 不書 削之也]다” ≪書法≫
역주6 以桓典爲侍御史 : “侍御史를 설치한 지 오래되었으나 쓴 적이 있지 않았는데 처음으로 桓典을 썼으니, 환전이 직책을 잘 수행함을 가상하게 여긴 것이다.[侍御史之設久矣 未有書者 始書桓典 嘉擧職也]다” ≪書法≫

자치통감강목(9)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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