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郭圖, 審配曰 以明公之神武로 引彊衆以伐曹操는 易如覆手니 何必乃爾리오
授曰 夫救亂誅暴를 謂之義兵이요 恃衆憑彊을 謂之驕兵이니 義者는 無敵이요 驕者는 先滅하나니
曹操奉天子
하여 以令天下
어늘 今擧師南向
은 於義則違
요 且廟勝之策
이 不在強弱
注+定策於廟堂之上, 而決勝於千里之外, 是之謂廟勝.이라
曹操法令旣行
하여 士卒精練
하니 非公孫瓚坐而受攻者也
라 今棄萬安之術
하고 而興無名之師
하니 竊爲公懼之
注+前漢 “董公曰 ‘兵出無名, 事故不成.’”하노이다
圖, 配曰 武王伐紂 不爲不義라 況兵加曹操而云無名고 且以公今日之彊으로 將士思奮하니
不及時以定大業
이면 所謂天與不取
인댄 反受其咎
라 監軍之計
는 在於持牢
요 而非見時知幾之變也
注+紹以授爲奮武將軍, 使監護諸將, 故稱爲監軍. 持牢, 猶南人言把穩也.니이다
紹納圖言하니 圖等이 因是譖授曰 授監統內外하여 威震三軍이라한대 紹乃分授所統하여 使與郭圖, 淳于瓊으로 各典一軍하다
目
許下諸將이 聞紹南兵하고 皆懼어늘 曹操曰 吾知紹之爲人하노니 志大而智小하고 色厲而膽薄하며
忌克而少威하고 兵多而分畫不明하며 將驕而政令不一하니 土地雖廣하고 糧食雖豐이나 適足以爲吾奉也니라
孔融이 謂荀彧曰 紹土廣兵強하고 田豐, 許攸는 智士也라 爲之謀하고
審配, (逄)[逢]紀는 忠臣也라 任其事하고 顔良, 文醜는 勇將也라 統其兵하니 殆難克乎인저
彧曰 紹兵雖多而法不整하고 豐은 剛而犯上하고 攸는 貪而不治하고 配는 專而無謀하고 紀는 果而自用하니
此數人者 勢不相容이라 必生內變이요 顔良, 文醜는 一夫之勇耳라 可一戰而禽也니라
目
操使御史衛覬로 鎮撫關中하다 時四方에 大有還民이러니 諸將이 多引爲部曲이어늘
覬書與荀彧曰 關中은 膏腴之地로되 頃遭荒亂하여 人民流入荊州者 十萬餘家러니 今歸者 無以自業이라
諸將
이 各競招懷以爲部曲
호되 郡縣貧弱
하여 不能與爭
하니 遂彊
하여 一旦變動
이면 必有後憂
리라
夫鹽은 國之大寳也라 亂來放散하니 宜如舊置使者監賣하여 以其直益으로 市犂牛하여
若有歸民
이어든 以供給之
하여 勤耕積粟
하여 以豐殖關中
이면 遠民聞之
하고 必日夜競還
注+殖, 多也.이라
又使司隷留治關中하여 以爲之主면 則諸將日削하고 官民日盛하리니 此强本弱敵之利也니라
彧이 以白한대 操從之하니 關中이 由是服從하니라
目
表狐疑不斷하여 乃遣嵩詣許하고 曰 君爲我觀其釁하라 嵩曰 聖은 達節하고 次는 守節하나니 嵩은 守節者也라
夫君臣名定에 以死守之어늘 今策名委質하니 唯將軍所命이라 雖赴湯蹈火라도 死無辭也라
將軍이 能上順天子하고 下歸曹公이면 使嵩可也어니와 如其猶豫인댄 嵩至京師에 天子假嵩一職하여
不獲辭命이면 則成天子之臣이요 將軍之故吏耳라 在君爲君이면 則嵩守天子之命하여 義不得復爲將軍死也리니
惟加重思
하여 無爲負嵩
하라 表強之
注+重, 除切. 重思, 猶言三思也. 強之, 謂強之使行也.러니 至許
에 詔拜嵩侍中, 零陵太守
하다
及還에 盛稱朝廷之德하고 勸表遣子入侍하니 表大怒하여 以爲懷貳라하여 大會陳兵將斬之러니
嵩이 不爲動하고 徐曰 將軍負嵩이요 嵩不負將軍이라하고 具陳前言하니 表乃囚之하다
目
【목目】 원술袁術이 이미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는 황음荒淫과 사치가 더욱 심해져서 희첩姬妾 수백 명이 모두 능라 주단으로 옷을 해 입고 쌀밥에 고기반찬을 실컷 먹었으나, 그 아랫사람들이 굶주리고 곤궁한 것은 거두어 구제하지 않았다.
이윽고 비축한 물자를 모두 탕진하여 스스로 존립할 수 없게 되자, 이에 궁실宮室을 불태우고 그 부곡部曲(부장部將) 진간陳簡에게 가서 의탁하였으나 다시 진간에게 거절을 당하여 사졸들이 흩어져 달아나니, 원술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에 원소袁紹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에게 황제의 칭호를 돌려주었다. 원담袁譚이 원술을 영접할 적에 원술이 하비下邳로부터 북쪽으로 지나가려고 하였는데 조조曹操가 유비劉備를 보내어 요격하자, 다시 수춘壽春으로 달아났다.
6월에 원술이
강정江亭에 이르러 대자리만 펴놓은 평상에 앉아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 원술이 결국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하고, 이로 인하여 분개하여 피를 토하고서 죽었다.
注+책簀은 대자리이니, 인석茵席(자리, 방석)이 없음을 이른다.
원술의
종제 원윤從弟 袁胤이 그
부곡部曲을 거느리고 원술의
영구靈柩 및 처자식을 호송하여
환성皖城(환성)에서
여강태수 유훈廬江太守 劉勳에게 의탁하였다.
注+환현皖縣은 여강군廬江郡에 속하였다. 전 광릉태수前 廣陵太守 서구徐璆(서규)가
전국새傳國璽를 얻어서 조정에 바쳤다.
注+구璆는 거유渠幽의 절切이다.
目
【목目】 곽도郭圖와 심배審配가 말하기를 “명공明公의 신무神武함으로 강한 군대를 이끌고서 조조曹操를 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매우 쉬운 일이니, 어째서 굳이 이와 같이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하자
저수沮授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난亂을 구원하고 포악한 자를 주벌하는 것을 의병義兵(의로운 군대)이라 이르고, 수효가 많음을 믿고 힘이 강함에 의지하는 것을 교병驕兵이라 이르니, 의로운 자는 적敵이 없고 교만한 자는 먼저 멸망합니다.
조조가 천자를 받들고서 천하를 호령하는데, 지금 군대를 일으켜 남쪽으로 향하는 것은 군신간의
대의大義에 어긋납니다. 또한
묘당廟堂에서 계책을 정하여 승리를 결단하는 것은 힘의 강약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注+묘당廟堂(조정朝廷)의 위에서 계책을 정하여 천 리의 밖에서 승리를 결단하는 것이니, 이를 일러 “묘승廟勝”이라 한다.
조조의 법령이 이미 잘 시행되어 사졸들은 훈련이 잘되어 있으니, 이는
공손찬公孫瓚처럼 가만히 앉아서 공격당할 자가 아닙니다. 지금 만전을 기하는 계책을 버리고 명분 없는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삼가
공公을 위하여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注+≪한서漢書≫에 하였다.
그러자 곽도와 심배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한 것이 의롭지 못한 일이 아닌데, 하물며 군대를 동원하여 조조를 치는 데에 명분이 없다고 말한단 말입니까. 또한 공公의 오늘날의 강함으로 장수와 병사들이 전장에서 분투할 것을 생각하니,
때맞추어
대업大業을 정하지 않으면 이는 이른바 ‘하늘이 주는데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라고 한 것입니다.
감군監軍 저수의 계책은 굳게 잡아 지키는 데에만 있고 시운의 추이를 보고서 기미를 아는
응변應變의 계책이 아닙니다.”
注+원소袁紹가 저수沮授를 분무장군奮武將軍으로 삼아 장수들을 감독하여 관할하게 하였기 때문에 감군監軍이라 칭한 것이다. “지뢰持牢”는 남쪽 지역 사람들이 파온把穩(확실하게 잡다, 단단히 잡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원소가 곽도의 말을 받아들이자, 곽도 등이 이 기회를 틈타서 저수를 참소하기를 “저수가 안팎 전체를 감독하고 통솔하여 그 위세가 삼군三軍을 진동합니다.” 하였다. 원소가 이에 저수가 통솔하는 군대를 나누어서 곽도와 순우경淳于瓊과 함께 각각 일군一軍씩 맡도록 하였다.
目
【목目】 허하許下(허도許都)의 장수들이 원소袁紹가 남쪽으로 진군한다는 것을 듣고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조조曹操가 말하기를 “나는 원소의 사람됨을 안다. 그는 뜻은 크지만 지혜가 부족하고 얼굴빛은 근엄하지만 담력이 작으며,
시기하고 각박하지만 위엄이 부족하고 병력이 많지만 배치함이 분명하지 못하며, 장수가 교만하고 정령政令이 한결같지 못하니, 영토가 비록 넓고 양식이 비록 풍족하나 다만 나의 봉양으로 삼을 만할 뿐이다.” 하였다.
공융孔融이 순욱荀彧에게 이르기를 “원소는 영토가 넓고 병력이 강한데 전풍田豐과 허유許攸는 지사智士로 계책을 세우고,
심배審配와 봉기逢紀는 충신忠臣으로 그의 일을 맡고, 안량顔良과 문추文醜는 용장勇將으로 그의 군대를 통솔하니, 아마도 싸워서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하자,
순욱荀彧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소의 병력이 비록 많지만 법도와 기율이 정비되지 않았고, 전풍은 강직하지만 윗사람을 범하고, 허유는 탐욕스러워 정무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 심배는 천단擅斷하지만 지모가 없고 봉기는 과감하지만 자신만이 옳다고 여긴다.
이 몇 사람들은 형편상 서로 용납되지 못하므로 반드시 내부의 변고가 발생할 것이다. 안량과 문추는 한 지아비의 용맹일 뿐이니, 한 번 싸워서 사로잡을 수 있다.”
目
【목目】 원소袁紹가 사람을 보내어 장수張繡를 부르고, 아울러 장수의 모사謀士인 가후賈詡에게 편지를 주어 그와 우호를 맺고자 하였다. 장수가 이를 허락하려고 하였는데, 가후는 장수가 있는 자리에서 원소의 사자에게 드러내놓고 이르기를
“그대는 돌아가
원본초袁本初(
원소袁紹)에게 사절하라. 형제끼리도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데 천하의
국사國士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
注+현顯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불능상용不能相容”은 〈원소袁紹가〉 원술袁術과 틈이 생겨서 각각 당여黨與를 결성하여 서로 도모한 것을 이른다. 하였다. 장수가 가후에게 이르기를 “이와 같다면 마땅히 어디로 귀의해야 하겠는가?” 하자,
가후가 말하기를 “
조공曹公을 따르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장수가 말하기를 “원소는 강하고
조조曹操는 약하며, 또 앞서 내가 조조와 원수가 되었으니, 어떻게 그를 따르겠는가.”
注+“여조위수與曹爲讐”는 육수淯水의 전투에서 장수張繡가 조조曹操의 아들 조앙曹昂을 죽인 것을 이른다. 하자
가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마땅히 조공을 따라야 하는 이유입니다. 조공이 천자를 받들어 천하를 호령하니, 이것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원소는 강성하므로 우리가 적은 수의 군대로 그를 따르면 반드시 우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지만 조공은 병력이 약하므로 우리를 얻으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니, 이것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패업霸業과 왕업王業을 이루려는 뜻을 품었으면 진실로 사사로운 원한을 버려서 온 천하에 덕을 밝힐 것이니, 이것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장군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11월에 장수가 군대를 거느려 항복하였는데 조조가 그의 손을 잡고 환영하는 잔치 자리를 마련해주고
양무장군揚武將軍에 임명하였으며,
표문表文을 올려서 가후를
집금오執金吾로 삼도록 하였다.
注+양무장군揚武將軍은 건시建始 연간 초기에 처음 설치되었다.
目
【목目】 관중關中의 장수들이 원소袁紹와 조조曹操가 한창 싸운다 하여 모두 중립하여 지켜만 보고 있었다. 양주목 위단涼州牧 韋端이 종사 양부從事 楊阜를 허도許都에 보내었는데, 양부가 돌아오자 장수들이 원소와 조조의 승패에 대해서 물으니,
양부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공袁公은 관대하지만 과단하지 못하고 계획하기를 좋아하지만 결단력이 부족하니, 과단하지 못하면 위엄이 없고 결단력이 부족하면 일의 시기를 놓치게 된다. 지금 비록 원공이 강하지만 끝내 대업大業을 이룰 수 없다.
조공曹公은 출중한 재주와 원대한 지략이 있어서 기회를 결정함에 의심함이 없고 법령이 통일되고 병사들이 정예로우며 법도 밖의 사람을 능히 등용하여 임용한 자들이 각각 그 힘을 다하니, 반드시 큰일을 이룰 수 있다.”
目
【목目】 조조曹操가 어사 위기御史 衛覬에게 관중關中 지역을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당시 사방에 유망流亡하였다가 돌아온 백성들이 많이 있었는데, 관중의 장수들이 대부분 이들을 꾀어다가 자신의 부곡部曲으로 삼았다.
이에 위기가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써서 순욱荀彧에게 보냈다. “관중은 비옥한 땅인데, 지난번에 기근과 전란을 만나서 백성들이 유망하여 형주荊州로 들어간 것이 10만여 가호였는데, 지금 돌아온 자들이 스스로 생계를 도모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장수들이 각각 다투어 이들을 불러 회유하여 자신의 부곡으로 삼는데 군郡과 현縣이 빈약하여 그들과 다툴 수 없으니, 장수들이 마침내 강성해져서 하루아침에 변고가 발생하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소금은 나라의 귀중한 보물인데, 전란이 일어난 이래로 방치하고 관리하지 않으니, 마땅히 옛날과 같이 사자使者(담당관)를 두어 소금의 판매를 감독해서 그 수입으로 밭 가는 소를 사서
만약 돌아온 백성이 있으면 이것을 공급하여 힘써 경작하고 곡식을 모아서 관중의 재화를 풍족하게 하면, 먼 곳에 있는 백성들이 이것을 듣고는 반드시 밤낮으로 다투어 돌아올 것입니다.
注+식殖은 많음이다.
또 사예司隷에게 관중에 머무르며 다스려서 일을 주관하게 하면 장수들의 세력은 날로 약해지고 관부와 백성들은 날로 성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근본을 강하게 하고 적을 약하게 하는 이로운 방법입니다.”
순욱이 이것을 아뢰자 조조가 이를 따르니, 관중 지역이 이로 말미암아 복종하였다.
目
【목目】 원소袁紹가 사람을 보내 유표劉表에게 도와줄 것을 청하자, 유표가 허락하였으나 끝내 구원병이 원소에게 이르지 않았고, 또한 조조曹操도 원조하지 않았다.
이에
종사중랑 한숭從事中郞 韓嵩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注+한漢나라 제도에 오직 사예교위司隷校尉만이 종사중랑從事中郞을 두었는데, 한漢나라 말엽에 이르면 주목州牧 역시 종사중랑從事中郞을 두었다. “지금 두 영웅이 서로 대립함에 천하의 무게 중심이 장군에게 달려 있습니다. 만약 큰일을 하고자 하면 〈두 사람이 서로 싸워 모두〉 피폐한 때를 틈타 군대를 일으키는 것이 좋을 것이요,
만약 이와 같이 하지 못하면 진실로 마땅히 따라야 할 바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조조는 용병用兵을 잘하고 현준賢俊한 인재들이 그에게 많이 귀의하였으니, 형세상 반드시 원소를 이길 것입니다.
그러한 뒤에 그가 군대를 옮겨서 장강長江과 한수漢水 일대로 향하면 아마도 장군이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가장 좋은 방법은 형주荊州를 가지고 조조에게 귀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조가 반드시 장군에게 깊이 감사하여 장군이 길이 복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만전을 기하는 계책입니다.”
目
【
목目】
유표劉表가 의심하여 결단하지 못하고 이에
한숭韓嵩을 보내어
허도許都로 가게 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나를 위하여 그 틈을 살펴보라.” 하니, 한숭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하였으니, 저 한숭은 분의를 지키는 자입니다.
군주와 신하라는 명분이 정해지면 죽음으로써 이를 지켜야 합니다. 지금 저는 간책簡策에 이름을 올리고서 몸을 바쳐 장군의 신하가 되었으니, 오직 장군이 명하는 바를 따라서 끓는 물속에 나아가고 불속으로 뛰어들어가 죽더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장군이 위로는 천자에게 순종하고 아래로는 조공曹公에게 귀의할 수 있으면 저를 허도許都에 사신 보내도 괜찮지만, 만일 이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면 제가 경사京師에 이르렀을 적에 천자께서 저에게 한 관직을 내려주시실 경우
이것을 사양할 수 없으면 저는 천자의 신하가 되고, 다만 장군에게는 옛 부하일 뿐입니다. 군주의 곁에 신하로 있으면 군주를 위해야 하니, 그렇다면 저는 천자의 명을 지켜서 의리상 다시 장군을 위하여 죽을 수가 없습니다.
부디 거듭 생각하시어 저의 충정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그러나 유표가 억지로 한숭을 보내었는데
注+중重(거듭)은 제용除用의 절切이니, “중사重思”는 삼사三思(여러 번 생각함)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강지強之”는 강요하여 가게 함을 이른다., 한숭이
허도許都에 이르자
조령詔令을 내려서 한숭을
시중侍中과
영릉태수零陵太守에 임명하였다.
한숭이 형주荊州로 돌아와 조정朝廷의 덕德을 대단히 칭찬하고, 유표에게 그 자식을 보내어 입시入侍하게 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유표가 크게 노하여 한숭이 두 마음을 품었다고 하여, 사람들을 크게 모으고 병사들을 진열하고서 그를 참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숭은 여기에 동요되지 않고 천천히 말하기를 “이는 장군이 저를 저버린 것이요, 제가 장군을 저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고는 예전에 했던 말들을 빠짐없이 갖추어 진술하자, 유표가 마침내 그를 가두었다.
目
【
목目】 이때
손책孫策이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황조黄祖를 공격하였는데, 군대가
석성현石城縣에 이르렀을 적에
注+석성현石城縣은 단양군丹陽郡에 속하였다. 유훈劉勳이
해혼海昏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손책이 이에 주유周瑜와 함께 환성皖城(환성)을 습격해 함락하여 원술袁術과 유훈의 처자식들을 붙잡아서 위무慰撫하여 돌보고, 아울러 그 부곡部曲 3만여 명을 얻었다.
손책이 유훈을 공격하여 격파하자 유훈이 북쪽으로 가서 허도許都의 조조曹操에게 귀의하였는데, 손책이 유훈의 남은 병력을 거두어 병사 2천여 명과 배 천 척을 노획한 다음 마침내 진군하여 황조黄祖를 공격하였다.
유표劉表가 장수를 보내와 황조를 구원하였는데, 손책이 유표의 군대와 싸워서 크게 격파하고 배 6천 척을 노획하였다.
目
【
목目】
손책孫策이 많은 병력으로
예장豫章을 순행하려고 하여
초구椒丘에 주둔하고
注+초구椒丘는 예장군 남창현豫章郡 南昌縣과 수십 리 거리에 있다.,
우번虞翻에게 이르기를 “
화자어華子魚(
화흠華歆)가 본래 명성이 있지만 그러나 나의 적수가 아니다.
注+“자유명자自有名字”는 그 이름이 당시에 알려진 것을 말한다.
만약 문을 열어 성을 양보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금고金鼓가 한번 진동함에 상해傷害를 당하는 바가 없을 수 없으니, 경卿이 곧 그의 앞에서 나의 뜻을 자세히 말해주어라.” 하였다.
우번이 이에 가서
화흠華歆을 만나보고 말하기를 “제가 삼가 듣건대,
명부明府께서는 저희
군郡의
전 왕부군前 王府君(
왕랑王朗)과 함께 그 명성이
중주中州(
중원中原)에서 나란하다고 하시니, 저는 항상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注+우번虞翻은 회계會稽 사람이니, 스스로 그 군郡을 겸칭하여 “비군鄙郡”이라 한 것이다. “고왕부군故王府君”은 전 회계태수前 會稽太守 왕랑王朗을 이른다. 하니, 화흠이 말하기를 “내가
왕회계王會稽(
왕랑王朗)만 못하다.” 하였다.
우번이 다시 말하기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장군豫章郡의 물자와 양식 및 무기, 그리고 병사와 백성들의 용맹함과 과감함이 저희 회계군會稽郡에 비해 어떻습니까?” 하니, 화흠이 말하기를 “크게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이에 우번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명부께서 왕회계만 못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겸양謙讓의 말씀일 뿐입니다.
注+≪주역周易≫ 겸괘謙卦 〈단전彖傳〉에 하였다. 담譚은 담談과 통한다. 그러나 정예 병력이 회계군만 못한 것은 사실 명부의 말씀대로입니다.
손토역孫討逆(
손책孫策)은 지모와 책략이 출중하고 용병술이 귀신같아서 예전에
유양주劉揚州(
유요劉繇)를 평정한 일은 명부께서 직접 보신 바이고, 남쪽으로 가서 저희 회계군을 평정한 것도 명부께서 들으신 바입니다.
注+유양주劉揚州는 유요劉繇를 이른다.
이제 명부께서 외딴 성을 지키는데 물자와 양식이 부족하시니, 빨리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다시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손장군의 대군이 이미 초구椒丘에 주둔하였으니, 내일 정오까지 손장군을 영접하는 격문檄文이 이르지 않으면 저는 명부와 다시 만나볼 수 없을 것입니다.”
目
【목目】 공조 위등功曹 魏騰이 손책孫策의 뜻을 거스르자 손책이 그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손책의 모친인 오부인吳夫人이 큰 우물의 난간에 기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네가 이제 막 강남江南에 와서 기업을 세웠는데 그 일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어진 이를 우대하고 선비를 예우하여 잘못은 버려두고 공功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위공조魏功曹는 공무를 행함에 있어 힘을 다하여 계책을 도모하였는데, 네가 오늘 그를 죽이면 내일 사람들이 모두 너를 배반할 것이다. 나는 화난禍難이 닥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으니, 마땅히 먼저 이 우물 안에 몸을 던져야겠다.” 이에 손책이 크게 놀라 위등을 풀어주었다.
目
【
목目】 처음에
동승董承이
헌제獻帝의
의대衣帶 속에 있는
밀조密詔를 받았다고 일컫고
유비劉備와 함께
조조曹操를 주살할 것을 모의하였다.
曹操가 劉備와 영웅을 논하다 하루는 조조가 차분하고 여유롭게 유비에게 이르기를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직
사군使君과 나 두 사람뿐이니,
원본초袁本初(
원소袁紹)와 같은 부류는 여기에 넣을 만하지 못하오.” 하였다.
유비는 막 음식을 먹다가 짐짓 놀라서 수저를 놓쳤는데, 때마침 천둥이 치자 유비가 이를 기회 삼아 말하기를 “
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이유가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注+비匕는 숟가락이고 저箸는 젓가락이다. 유비劉備가 자신이 영웅인 것을 조조曹操가 알아보고 장차 자기를 도모할까 두려워하여 짐짓 놀라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친 체한 것이다. 하였다.
유비가 마침내 동승 및 충집种輯(충집) 등과 함께 조조를 주살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이때 마침 조조가 유비를 보내어 원술袁術을 요격하게 하자 유비가 마침내 서주자사徐州刺史를 죽이고 관우關羽를 남겨두어 하비下邳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소패小沛로 돌아가니,
군郡과 현縣이 대부분 조조를 배반하고 유비에게 호응하였다. 유비의 군대가 수만 명이었는데, 사자를 보내어 원소袁紹와 연합하니, 조조가 장사 유대長史 劉岱를 보내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유비가 유대에게 이르기를 “너 같은 사람 백 명이 오더라도 나를 어찌할 수 없고, 조공曹公이 직접 오더라도 그 승부를 알 수 없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