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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0)

자치통감강목(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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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卯年(199)
기묘년己卯年(199)
四年이라 春三月 自焚死하다
나라 효헌황제 건안孝獻皇帝 建安 4년이다. 봄 3월에 공손찬公孫瓚이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
黒山帥張燕 率兵救瓚注+張燕, 卽褚飛燕.하니 密使人齎書하여 使起火爲應하고 欲自內出戰이러니
흑산黒山에 있는 도적의 우두머리인 장연張燕이 군대를 거느려 공손찬公孫瓚을 구원하였다.注+장연張燕은 바로 저비연褚飛燕이다. 공손찬이 은밀하게 사람을 시켜 장연에게 편지를 보내어서 불을 지르는 것을 호응하는 신호로 삼게 하고, 공손찬이 성안에서 나가 싸우고자 하였다.
紹候得其書하고 如期擧火하다 遂出戰이어늘 紹設伏擊之하니 大敗하여 復還自守어늘
그런데 원소袁紹척후斥候가 그 편지를 얻자, 〈이에 원소는 편지에 적혀 있는〉 기약대로 불을 질렀다. 공손찬이 마침내 나가서 싸우자, 원소가 복병을 설치하여 공격하니, 공손찬이 크게 패하여 다시 성으로 돌아와 스스로 지켰다.
紹爲地道하여 하니 樓輒傾倒 稍至京中注+先是, 瓚築京高十丈以居, 京中, 卽其中也.하니 乃悉縊其姊妹妻子然後 引火自焚하다
원소의 군대가 지도地道(지하 통로, 땅굴)를 파서 성루城樓 아래를 뚫고서 〈나무 기둥을 세워 땅굴의 길이가 성루의 절반에 도달하자 바로 나무 기둥에〉 불을 지르니, 성루가 곧 기울어 쓰러졌다. 원소의 군대가 이런 방법으로 차츰 공손찬이 있는 경중京中(공손찬의 거처)까지 도달하자注+이보다 앞서 공손찬公孫瓚이 높이 10(높은 구릉)을 축조하여 거처하였는바, 경중京中은 바로 그 의 가운데이다., 공손찬이 마침내 그의 자매와 처자식들을 모두 목을 졸라 죽인 다음 몸에 불을 붙여 스스로 타 죽었다.
詔漁陽太守鮮于輔하여 都督幽州하다
어양태수 선우보漁陽太守 鮮于輔에게 조령詔令을 내려서 유주幽州도독都督하게 하였다.
漁陽田豫 說太守鮮于輔曰注+輔旣斬鄒丹, 遂領漁陽太守. 曹氏奉天子하여 以令諸侯하니 終能定天下 宜早從之라한대
어양漁陽 사람 전예田豫태수 선우보太守 鮮于輔를 설득하기를注+선우보鮮于輔가 이미 추단鄒丹을 참살하고, 마침내 어양태수漁陽太守의 직무를 대행하였다.조씨曹氏(조조曹操)가 천자를 받들어서 제후를 호령하니, 결국에는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속히 그를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輔乃率其衆하여 以奉王命이어늘 詔以輔爲建忠將軍하여 都督幽州六郡하다
선우보가 마침내 그의 군대를 거느려서 왕명王命을 받들었는데, 조령을 내려서 선우보를 건충장군建忠將軍으로 삼아 유주幽州의 여섯 도독都督하게 하였다.
袁紹承制하여 以烏桓蹋頓爲單于하다
원소袁紹가 황제의 제명制命으로 오환왕 답돈烏桓王 蹋頓(답돈)을 선우單于(선우)로 삼았다.
烏桓王丘力居死 子樓班 年少 從子蹋頓 有武略하여 代立이러니 袁紹攻公孫瓚할새 蹋頓助之하니
】 처음에 오환왕 구력거烏桓王 丘力居가 죽었는데 그의 아들 누반樓班이 나이가 어렸다. 이에 구력거의 조카 답돈蹋頓이 무용과 지략이 있어서 대신 왕으로 즉위하였는데, 원소袁紹공손찬公孫瓚을 공격할 적에 답돈이 원소를 도왔다.
紹承制하여 皆賜以單于印綬注+通鑑 “皆賜蹋頓․難樓․蘇僕延․烏延等單于印綬.”하다 又以閻柔得烏桓心이라하여 因加寵慰하여 以安北邊이러니
원소가 황제의 제명制命으로 답돈 등에게 모두 선우의 인수印綬를 하사하였다.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답돈蹋頓난루難樓소복연蘇僕延오연烏延 등에게 모두 선우單于인수印綬를 하사하였다.”라고 되어 있다.염유閻柔오환烏桓의 인심을 얻었다고 하여 이로 말미암아 은총과 위무를 가하여서 북쪽 변경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其後 諸部奉樓班爲單于하고 以蹋頓爲王이나 然蹋頓 猶秉計策이러라
그 뒤에 오환烏桓의 각 누반樓班을 받들어 선우로 삼고 답돈을 왕으로 삼았지만 답돈이 여전히 오환의 계책을 꾀하는 권력을 쥐고 있었다.
以董承爲車騎將軍하다
동승董承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았다.
◑夏 袁術 北走어늘 하니 還走死하다
】 여름에 원술袁術이 북쪽으로 달아나자 유비劉備에게 조령詔令을 내려서 군대를 거느려 요격邀擊하게 하니, 원술이 다시 패주하여 죽었다.
術旣稱帝 淫侈滋甚하여 媵御數百 無不兼羅紈, 厭粱肉하고 自下飢困 莫之收卹이러니
원술袁術이 이미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는 황음荒淫과 사치가 더욱 심해져서 희첩姬妾 수백 명이 모두 능라 주단으로 옷을 해 입고 쌀밥에 고기반찬을 실컷 먹었으나, 그 아랫사람들이 굶주리고 곤궁한 것은 거두어 구제하지 않았다.
旣而 資實空盡하여 不能自立이라 乃燒宮室하고 犇其部曲陳簡이라가 復爲簡所拒하여 士卒散走하니 不知所爲
이윽고 비축한 물자를 모두 탕진하여 스스로 존립할 수 없게 되자, 이에 궁실宮室을 불태우고 그 부곡部曲(부장部將) 진간陳簡에게 가서 의탁하였으나 다시 진간에게 거절을 당하여 사졸들이 흩어져 달아나니, 원술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乃遣使歸帝號於紹하니 袁譚 迎術할새 欲從下邳北過어늘 曹操遣劉備邀之하니 復走壽春하다
이에 원소袁紹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에게 황제의 칭호를 돌려주었다. 원담袁譚이 원술을 영접할 적에 원술이 하비下邳로부터 북쪽으로 지나가려고 하였는데 조조曹操유비劉備를 보내어 요격하자, 다시 수춘壽春으로 달아났다.
六月 至江亭하여 坐簀牀而嘆曰 袁術 乃至此乎아하고 因憤慨歐血死注+簀, 也, 謂無茵席也.하니
6월에 원술이 강정江亭에 이르러 대자리만 펴놓은 평상에 앉아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 원술이 결국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하고, 이로 인하여 분개하여 피를 토하고서 죽었다.注+은 대자리이니, 인석茵席(자리, 방석)이 없음을 이른다.
術從弟胤 率其部曲하고 奉術柩及妻子하여 犇廬江太守劉勳於皖城注+皖縣, 屬廬江郡.하니 故廣陵太守徐璆得傳國璽하여 獻之注+璆, 渠幽切.하다
원술의 종제 원윤從弟 袁胤이 그 부곡部曲을 거느리고 원술의 영구靈柩 및 처자식을 호송하여 환성皖城(환성)에서 여강태수 유훈廬江太守 劉勳에게 의탁하였다.注+환현皖縣여강군廬江郡에 속하였다. 전 광릉태수前 廣陵太守 서구徐璆(서규)가 전국새傳國璽를 얻어서 조정에 바쳤다.注+거유渠幽이다.
秋八月 曹操進軍黎陽이러니 九月 還許하고 分兵守官渡하다
】 가을 8월에 조조曹操여양黎陽으로 진군하였는데, 9월에 허도許都로 돌아오고서 군대를 나누어 관도官渡를 수비하였다.
袁紹益驕하여 貢御稀簡하고 簡精兵十萬, 騎萬匹하여 欲以攻許어늘 沮授諫曰
원소袁紹가 더욱 교만하여 조정에 공물을 바치는 횟수와 수량이 점차 드물고 간략해졌다. 원소가 정예 병력 10만 명과 기마騎馬 1만 필을 선발하여 허도許都를 공격하려고 하자, 저수沮授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近師出歴年 百姓疲敝하고 倉庫無積하니 未可動也注+通鑑, 近下有討公孫瓚四字. 宜務農息民하고 遣使獻捷이니
“근래 여러 해 동안 군대를 동원하여 백성들은 지쳐 쇠약해지고 창고에는 저축이 없으니, 군대를 동원할 수 없습니다.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자 아래에 “토공손찬討公孫瓚(공손찬公孫瓚을 토벌하고자)” 네 자가 있다. 농사에 힘써서 백성들을 편안히 휴식시키고 조정에 사자를 보내어 〈공손찬公孫瓚을 멸하였다는〉 첩보捷報를 천자께 올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若不得通이어든 乃表曹操隔我王路注+王路, 謂尊王之路也.然後 進屯黎陽하여 漸營河南하고 益作舟船하고
만약 첩보를 천자께 상달할 수 없으면 곧 표문表文을 올려서 ‘우리가 천자를 높이는 길을 조조曹操가 막는다.’注+왕로王路”는 (천자天子)을 높이는 길을 이른다.라고 아뢴 뒤에 진군하여 여양黎陽에 주둔하고서 점점 황하黃河 이남 지역을 경영하고, 이와 동시에 선박을 더욱 건조하고 무기를 잘 정비하며,
繕修器械하고 分遣精騎하여 抄其邊鄙하여 令彼不得安이요 我取其逸이니 如此 可坐定也니이다
정예 기병을 나누어 보내어 조조의 변경을 침략하여 저들로 하여금 편안히 쉬지 못하게 하고 우리는 편안히 쉬면서 힘을 비축해야 하니, 이와 같이 하면 가만히 앉아서도 조조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郭圖, 審配曰 以明公之神武 引彊衆以伐曹操 易如覆手 何必乃爾리오
곽도郭圖심배審配가 말하기를 “명공明公신무神武함으로 강한 군대를 이끌고서 조조曹操를 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매우 쉬운 일이니, 어째서 굳이 이와 같이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하자
授曰 夫救亂誅暴 謂之義兵이요 恃衆憑彊 謂之驕兵이니 義者 無敵이요 驕者 先滅하나니
저수沮授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을 구원하고 포악한 자를 주벌하는 것을 의병義兵(의로운 군대)이라 이르고, 수효가 많음을 믿고 힘이 강함에 의지하는 것을 교병驕兵이라 이르니, 의로운 자는 이 없고 교만한 자는 먼저 멸망합니다.
曹操奉天子하여 以令天下어늘 今擧師南向 於義則違 且廟勝之策 不在強弱注+定策於廟堂之上, 而決勝於千里之外, 是之謂廟勝.이라
조조가 천자를 받들고서 천하를 호령하는데, 지금 군대를 일으켜 남쪽으로 향하는 것은 군신간의 대의大義에 어긋납니다. 또한 묘당廟堂에서 계책을 정하여 승리를 결단하는 것은 힘의 강약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注+묘당廟堂(조정朝廷)의 위에서 계책을 정하여 천 리의 밖에서 승리를 결단하는 것이니, 이를 일러 “묘승廟勝”이라 한다.
曹操法令旣行하여 士卒精練하니 非公孫瓚坐而受攻者也 今棄萬安之術하고 而興無名之師하니 竊爲公懼之注+前漢 “董公曰 ‘兵出無名, 事故不成.’”하노이다
조조의 법령이 이미 잘 시행되어 사졸들은 훈련이 잘되어 있으니, 이는 공손찬公孫瓚처럼 가만히 앉아서 공격당할 자가 아닙니다. 지금 만전을 기하는 계책을 버리고 명분 없는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삼가 을 위하여 두려워하는 바입니다.”注+한서漢書≫에 하였다.
圖, 配曰 武王伐紂 不爲不義 況兵加曹操而云無名 且以公今日之彊으로 將士思奮하니
그러자 곽도와 심배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 무왕武王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한 것이 의롭지 못한 일이 아닌데, 하물며 군대를 동원하여 조조를 치는 데에 명분이 없다고 말한단 말입니까. 또한 의 오늘날의 강함으로 장수와 병사들이 전장에서 분투할 것을 생각하니,
不及時以定大業이면 所謂天與不取인댄 反受其咎 監軍之計 在於持牢 而非見時知幾之變也注+紹以授爲奮武將軍, 使監護諸將, 故稱爲監軍. 持牢, 猶南人言把穩也.니이다
때맞추어 대업大業을 정하지 않으면 이는 이른바 ‘하늘이 주는데도 받지 않으면 도리어 재앙을 받는다.’라고 한 것입니다. 감군監軍 저수의 계책은 굳게 잡아 지키는 데에만 있고 시운의 추이를 보고서 기미를 아는 응변應變의 계책이 아닙니다.”注+원소袁紹저수沮授분무장군奮武將軍으로 삼아 장수들을 감독하여 관할하게 하였기 때문에 감군監軍이라 칭한 것이다. “지뢰持牢”는 남쪽 지역 사람들이 파온把穩(확실하게 잡다, 단단히 잡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紹納圖言하니 圖等 因是譖授曰 授監統內外하여 威震三軍이라한대 紹乃分授所統하여 使與郭圖, 淳于瓊으로 各典一軍하다
원소가 곽도의 말을 받아들이자, 곽도 등이 이 기회를 틈타서 저수를 참소하기를 “저수가 안팎 전체를 감독하고 통솔하여 그 위세가 삼군三軍을 진동합니다.” 하였다. 원소가 이에 저수가 통솔하는 군대를 나누어서 곽도와 순우경淳于瓊과 함께 각각 일군一軍씩 맡도록 하였다.
許下諸將 聞紹南兵하고 皆懼어늘 曹操曰 吾知紹之爲人하노니 志大而智小하고 色厲而膽薄하며
허하許下(허도許都)의 장수들이 원소袁紹가 남쪽으로 진군한다는 것을 듣고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조조曹操가 말하기를 “나는 원소의 사람됨을 안다. 그는 뜻은 크지만 지혜가 부족하고 얼굴빛은 근엄하지만 담력이 작으며,
忌克而少威하고 兵多而分畫不明하며 將驕而政令不一하니 土地雖廣하고 糧食雖豐이나 適足以爲吾奉也니라
시기하고 각박하지만 위엄이 부족하고 병력이 많지만 배치함이 분명하지 못하며, 장수가 교만하고 정령政令이 한결같지 못하니, 영토가 비록 넓고 양식이 비록 풍족하나 다만 나의 봉양으로 삼을 만할 뿐이다.” 하였다.
孔融 謂荀彧曰 紹土廣兵強하고 田豐, 許攸 智士也 爲之謀하고
공융孔融순욱荀彧에게 이르기를 “원소는 영토가 넓고 병력이 강한데 전풍田豐허유許攸지사智士로 계책을 세우고,
審配, (逄)[逢]紀 忠臣也 任其事하고 顔良, 文醜 勇將也 統其兵하니 殆難克乎인저
심배審配봉기逢紀충신忠臣으로 그의 일을 맡고, 안량顔良문추文醜용장勇將으로 그의 군대를 통솔하니, 아마도 싸워서 이기기 어려울 것이다.” 하자,
彧曰 紹兵雖多而法不整하고 剛而犯上하고 貪而不治하고 專而無謀하고 果而自用하니
순욱荀彧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소의 병력이 비록 많지만 법도와 기율이 정비되지 않았고, 전풍은 강직하지만 윗사람을 범하고, 허유는 탐욕스러워 정무를 잘 다스리지 못하고, 심배는 천단擅斷하지만 지모가 없고 봉기는 과감하지만 자신만이 옳다고 여긴다.
此數人者 勢不相容이라 必生內變이요 顔良, 文醜 一夫之勇耳 可一戰而禽也니라
이 몇 사람들은 형편상 서로 용납되지 못하므로 반드시 내부의 변고가 발생할 것이다. 안량과 문추는 한 지아비의 용맹일 뿐이니, 한 번 싸워서 사로잡을 수 있다.”
八月 操進軍黎陽하여 使臧霸等入靑州하고 于禁屯河上注+河上, 黃河南岸地.이러니 九月 操還許하여 分兵守官渡注+裴松之北征記曰 “中牟臺下臨汴水, 是爲官渡.”하다
】 8월에 조조曹操가 진군하여 여양黎陽에 주둔하고서 장패臧霸 등에게 청주靑州에 들어가게 하고 우금于禁에게 하상河上에 주둔하게 하였다.注+하상河上황하黃河 남쪽 기슭의 땅이다. 9월에 조조가 허도許都로 돌아와 군대를 나누어 관도官渡를 지키게 하였다.注+배송지裴松之의 ≪북정기北征記≫에 “중모대中牟臺가 아래로 변수汴水에 임하였으니, 이것이 관도官渡이다.” 하였다.
冬十一月 張繡來降하다
】 겨울 11월에 장수張繡조조曹操에게 와서 항복하였다.
袁紹遣人招張繡하고 幷與賈詡書結好하니 繡欲許之러니 詡於繡坐上 顯謂紹使曰
원소袁紹가 사람을 보내어 장수張繡를 부르고, 아울러 장수의 모사謀士가후賈詡에게 편지를 주어 그와 우호를 맺고자 하였다. 장수가 이를 허락하려고 하였는데, 가후는 장수가 있는 자리에서 원소의 사자에게 드러내놓고 이르기를
歸謝袁本初하라 兄弟不能相容이어늘 而能容天下國士乎注+顯者, 明言之於稠人中也. 不能相容, 謂與袁術有隙, 各結黨與以相圖也. 繡謂詡曰 若此 當何歸
“그대는 돌아가 원본초袁本初(원소袁紹)에게 사절하라. 형제끼리도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데 천하의 국사國士를 용납할 수 있겠는가.”注+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불능상용不能相容”은 〈원소袁紹가〉 원술袁術과 틈이 생겨서 각각 당여黨與를 결성하여 서로 도모한 것을 이른다. 하였다. 장수가 가후에게 이르기를 “이와 같다면 마땅히 어디로 귀의해야 하겠는가?” 하자,
詡曰 不如從曹公이니이다 繡曰 袁彊曹弱하고 又先與曹爲讐하니 從之如何注+與曹爲讐, 謂淯水之戰, 殺其子也.
가후가 말하기를 “조공曹公을 따르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장수가 말하기를 “원소는 강하고 조조曹操는 약하며, 또 앞서 내가 조조와 원수가 되었으니, 어떻게 그를 따르겠는가.”注+여조위수與曹爲讐”는 육수淯水의 전투에서 장수張繡조조曹操의 아들 조앙曹昂을 죽인 것을 이른다. 하자
詡曰 此乃所以宜從也니이다 夫曹公 奉天子以令天下하니 其宜從 一也
가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것이 바로 마땅히 조공을 따라야 하는 이유입니다. 조공이 천자를 받들어 천하를 호령하니, 이것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强盛하니 我以少衆從之 必不以我爲重이어니와 曹公 衆弱하니 其得我 必喜하리니 其宜從 二也
원소는 강성하므로 우리가 적은 수의 군대로 그를 따르면 반드시 우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지만 조공은 병력이 약하므로 우리를 얻으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니, 이것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夫有霸王之志 固將釋私怨하여 以明德於四海하리니 其宜從 三也 願將軍 無疑하라
패업霸業왕업王業을 이루려는 뜻을 품었으면 진실로 사사로운 원한을 버려서 온 천하에 덕을 밝힐 것이니, 이것이 마땅히 따라야 하는 세 번째 이유입니다. 장군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十一月 繡率衆降하니 操執手歡宴하고 拜揚武將軍하고 表詡爲執金吾注+揚武將軍, 始於建始之初.하다
11월에 장수가 군대를 거느려 항복하였는데 조조가 그의 손을 잡고 환영하는 잔치 자리를 마련해주고 양무장군揚武將軍에 임명하였으며, 표문表文을 올려서 가후를 집금오執金吾로 삼도록 하였다.注+양무장군揚武將軍건시建始 연간 초기에 처음 설치되었다.
復置鹽官하고 徙司隷校尉治弘農注+河東安邑鹽池, 舊有鹽官. 時以鍾繇爲司隷校尉, 據魏略及三國志, 繇實治洛陽, 蓋暫治弘農, 以招撫關中也.하다
염관鹽官을 다시 설치하고, 사례교위司隷校尉치소治所홍농弘農으로 옮겼다.注+하동 안읍河東 安邑염지鹽池에 본래 염관鹽官이 있었다. 당시 종요鍾繇사례교위司隷校尉로 삼았는데 ≪위략魏略≫과 ≪삼국지三國志≫에 근거하면 종요가 실제 낙양洛陽치소治所로 삼았으니, 이는 아마도 잠시 홍농弘農치소治所로로 삼아서 관중關中 지역을 초무招撫한 것인 듯하다.
關中諸將 以袁, 曹方爭이라하여 皆中立顧望이라 涼州牧韋端 使從事楊阜詣許러니 阜還 諸將 問袁, 曹勝敗한대
관중關中의 장수들이 원소袁紹조조曹操가 한창 싸운다 하여 모두 중립하여 지켜만 보고 있었다. 양주목 위단涼州牧 韋端종사 양부從事 楊阜허도許都에 보내었는데, 양부가 돌아오자 장수들이 원소와 조조의 승패에 대해서 물으니,
阜曰 袁公 寬而不斷하고 好謀而少決하니 不斷則無威 少決則後事 今雖强이나 終不能成大業이요
양부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공袁公은 관대하지만 과단하지 못하고 계획하기를 좋아하지만 결단력이 부족하니, 과단하지 못하면 위엄이 없고 결단력이 부족하면 일의 시기를 놓치게 된다. 지금 비록 원공이 강하지만 끝내 대업大業을 이룰 수 없다.
曹公 有雄才遠略하여 決機無疑하고 法一而兵精하고 能用度外之人하여 所任 各盡其力하니 必能濟大事者라하니라
조공曹公은 출중한 재주와 원대한 지략이 있어서 기회를 결정함에 의심함이 없고 법령이 통일되고 병사들이 정예로우며 법도 밖의 사람을 능히 등용하여 임용한 자들이 각각 그 힘을 다하니, 반드시 큰일을 이룰 수 있다.”
操使御史衛覬 鎮撫關中하다 時四方 大有還民이러니 諸將 多引爲部曲이어늘
조조曹操어사 위기御史 衛覬에게 관중關中 지역을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당시 사방에 유망流亡하였다가 돌아온 백성들이 많이 있었는데, 관중의 장수들이 대부분 이들을 꾀어다가 자신의 부곡部曲으로 삼았다.
覬書與荀彧曰 關中 膏腴之地로되 頃遭荒亂하여 人民流入荊州者 十萬餘家러니 今歸者 無以自業이라
이에 위기가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써서 순욱荀彧에게 보냈다. “관중은 비옥한 땅인데, 지난번에 기근과 전란을 만나서 백성들이 유망하여 형주荊州로 들어간 것이 10만여 가호였는데, 지금 돌아온 자들이 스스로 생계를 도모할 길이 없습니다.
諸將 各競招懷以爲部曲호되 郡縣貧弱하여 不能與爭하니 遂彊하여 一旦變動이면 必有後憂리라
그래서 장수들이 각각 다투어 이들을 불러 회유하여 자신의 부곡으로 삼는데 이 빈약하여 그들과 다툴 수 없으니, 장수들이 마침내 강성해져서 하루아침에 변고가 발생하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夫鹽 國之大寳也 亂來放散하니 宜如舊置使者監賣하여 以其直益으로 市犂牛하여
소금은 나라의 귀중한 보물인데, 전란이 일어난 이래로 방치하고 관리하지 않으니, 마땅히 옛날과 같이 사자使者(담당관)를 두어 소금의 판매를 감독해서 그 수입으로 밭 가는 소를 사서
若有歸民이어든 以供給之하여 勤耕積粟하여 以豐殖關中이면 遠民聞之하고 必日夜競還注+殖, 多也.이라
만약 돌아온 백성이 있으면 이것을 공급하여 힘써 경작하고 곡식을 모아서 관중의 재화를 풍족하게 하면, 먼 곳에 있는 백성들이 이것을 듣고는 반드시 밤낮으로 다투어 돌아올 것입니다.注+은 많음이다.
又使司隷留治關中하여 以爲之主 則諸將日削하고 官民日盛하리니 此强本弱敵之利也니라
사례司隷에게 관중에 머무르며 다스려서 일을 주관하게 하면 장수들의 세력은 날로 약해지고 관부와 백성들은 날로 성하게 될 것이니, 이것이 근본을 강하게 하고 적을 약하게 하는 이로운 방법입니다.”
以白한대 操從之하니 關中 由是服從하니라
순욱이 이것을 아뢰자 조조가 이를 따르니, 관중 지역이 이로 말미암아 복종하였다.
유표劉表종사중랑 한숭從事中郞 韓嵩허도許都에 보내었다.
袁紹使人求助於劉表한대 表許之而竟不至하고 亦不援曹操하니
원소袁紹가 사람을 보내 유표劉表에게 도와줄 것을 청하자, 유표가 허락하였으나 끝내 구원병이 원소에게 이르지 않았고, 또한 조조曹操도 원조하지 않았다.
從事中郞韓嵩曰注+漢制, 惟司隷校尉有從事中郞. 至漢末, 則州牧亦有從事中郞矣. 今兩雄相持 天下之重 在於將軍하니 若欲有爲인댄 起乘其敝 可也
이에 종사중랑 한숭從事中郞 韓嵩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나라 제도에 오직 사례교위司隷校尉만이 종사중랑從事中郞을 두었는데, 나라 말엽에 이르면 주목州牧 역시 종사중랑從事中郞을 두었다. “지금 두 영웅이 서로 대립함에 천하의 무게 중심이 장군에게 달려 있습니다. 만약 큰일을 하고자 하면 〈두 사람이 서로 싸워 모두〉 피폐한 때를 틈타 군대를 일으키는 것이 좋을 것이요,
如其不然인댄 固將擇所宜從이라 曹操善用兵하고 賢俊多歸之하니 其勢必擧袁紹
만약 이와 같이 하지 못하면 진실로 마땅히 따라야 할 바를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조조는 용병用兵을 잘하고 현준賢俊한 인재들이 그에게 많이 귀의하였으니, 형세상 반드시 원소를 이길 것입니다.
然後 移兵以向江漢이면 恐將軍 不能禦也로니 今莫若擧荊州以附曹操 操必重德將軍하여 長享福祚리니 此萬全之策也니이다
그러한 뒤에 그가 군대를 옮겨서 장강長江한수漢水 일대로 향하면 아마도 장군이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가장 좋은 방법은 형주荊州를 가지고 조조에게 귀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조가 반드시 장군에게 깊이 감사하여 장군이 길이 복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만전을 기하는 계책입니다.”
表狐疑不斷하여 乃遣嵩詣許하고 曰 君爲我觀其釁하라 嵩曰 聖 達節하고 守節하나니 守節者也
유표劉表가 의심하여 결단하지 못하고 이에 한숭韓嵩을 보내어 허도許都로 가게 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나를 위하여 그 틈을 살펴보라.” 하니, 한숭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하였으니, 저 한숭은 분의를 지키는 자입니다.
夫君臣名定 以死守之어늘 今策名委質하니 唯將軍所命이라 雖赴湯蹈火라도 死無辭也
군주와 신하라는 명분이 정해지면 죽음으로써 이를 지켜야 합니다. 지금 저는 간책簡策에 이름을 올리고서 몸을 바쳐 장군의 신하가 되었으니, 오직 장군이 명하는 바를 따라서 끓는 물속에 나아가고 불속으로 뛰어들어가 죽더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將軍 能上順天子하고 下歸曹公이면 使嵩可也어니와 如其猶豫인댄 嵩至京師 天子假嵩一職하여
장군이 위로는 천자에게 순종하고 아래로는 조공曹公에게 귀의할 수 있으면 저를 허도許都에 사신 보내도 괜찮지만, 만일 이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면 제가 경사京師에 이르렀을 적에 천자께서 저에게 한 관직을 내려주시실 경우
不獲辭命이면 則成天子之臣이요 將軍之故吏耳 在君爲君이면 則嵩守天子之命하여 義不得復爲將軍死也리니
이것을 사양할 수 없으면 저는 천자의 신하가 되고, 다만 장군에게는 옛 부하일 뿐입니다. 군주의 곁에 신하로 있으면 군주를 위해야 하니, 그렇다면 저는 천자의 명을 지켜서 의리상 다시 장군을 위하여 죽을 수가 없습니다.
惟加重思하여 無爲負嵩하라 表強之注+重, 除切. 重思, 猶言三思也. 強之, 謂強之使行也.러니 至許 詔拜嵩侍中, 零陵太守하다
부디 거듭 생각하시어 저의 충정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그러나 유표가 억지로 한숭을 보내었는데注+(거듭)은 제용除用이니, “중사重思”는 삼사三思(여러 번 생각함)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강지強之”는 강요하여 가게 함을 이른다., 한숭이 허도許都에 이르자 조령詔令을 내려서 한숭을 시중侍中영릉태수零陵太守에 임명하였다.
及還 盛稱朝廷之德하고 勸表遣子入侍하니 表大怒하여 以爲懷貳라하여 大會陳兵將斬之러니
한숭이 형주荊州로 돌아와 조정朝廷을 대단히 칭찬하고, 유표에게 그 자식을 보내어 입시入侍하게 할 것을 권하였다. 이에 유표가 크게 노하여 한숭이 두 마음을 품었다고 하여, 사람들을 크게 모으고 병사들을 진열하고서 그를 참살하려고 하였다.
不爲動하고 徐曰 將軍負嵩이요 嵩不負將軍이라하고 具陳前言하니 表乃囚之하다
그러나 한숭은 여기에 동요되지 않고 천천히 말하기를 “이는 장군이 저를 저버린 것이요, 제가 장군을 저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고는 예전에 했던 말들을 빠짐없이 갖추어 진술하자, 유표가 마침내 그를 가두었다.
孫策 襲廬江하여 取之하고 徇豫章하니 太守華歆하다
손책孫策여강廬江을 습격하여 점령하고 예장豫章을 순행하자 예장태수 화흠豫章太守 華歆이 항복하였다.
廬江太守劉勳 以袁術部曲衆多하여 不能贍이라 遣從弟偕하여 求米於上繚諸宗帥로되 不能滿數注+謂不滿其所求之數也.하니 偕召勳하여 使襲之하다
여강태수 유훈廬江太守 劉勳원술袁術부곡部曲의 수가 많아서 군량이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에 종제 유헤從弟 劉偕를 보내어 상료上繚종수宗帥(종부宗部의 우두머리)들에게 쌀을 구하였는데 그 수량을 채울 수 없자注+〈‘‘불능만수不能滿數”는〉 그 요구한 바의 수량을 채우지 못함을 이른다., 유해가 유훈을 불러서 그들을 습격하게 하였다.
孫策 惡勳兵强하여 僞卑辭以事勳하고 請出兵以爲外援한대 劉瞱曰注+曄, 出於漢之宗室.
손책孫策이 유훈의 군대가 강성함을 싫어하여 거짓으로 언사言辭를 낮추어 유훈을 섬기고, 군대를 출동하여 외원外援이 되기를 청하자, 유엽劉瞱이 유훈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유엽劉曄나라의 종실宗室에서 나왔다.
上繚雖小 城堅池深하여 攻難守易 不可旬日而擧也 兵疲於外而國內虛어든 乘虛襲我 則後不能獨守리니
상료上繚가 비록 작지만 성이 견고하고 해자가 깊어서 공격은 어렵고 수비는 쉬우니, 10일 내로 함락할 수가 없습니다. 군대가 밖에서 피로하고 국내가 텅 비었을 적에 손책이 빈 틈을 타고 우리를 습격하면 후방을 홀로 수비할 수가 없으니,
是將軍 進屈於敵이요 退無所歸 若軍必出이면 禍今至矣리이다 不聽하고 遂伐上繚하여 至海昏하여 宗帥皆逃하니 了無所得이러라
이는 장군이 나아가자니 에게 굽히고 물러나자니 돌아갈 데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군대를 반드시 출동시킨다면 화난禍難이 지금 당장 이를 것입니다.” 유훈이 이 말을 듣지 않고 마침내 상료上繚를 공격하였는데, 군대가 해혼海昏에 이르자 종수宗帥들이 모두 달아나서 얻은 바가 전혀 없었다.
時策 引兵西擊黄祖러니 行及石城注+石城縣, 屬丹郡.하여 聞勳在海昏하고
】 이때 손책孫策이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황조黄祖를 공격하였는데, 군대가 석성현石城縣에 이르렀을 적에注+석성현石城縣단양군丹陽郡에 속하였다. 유훈劉勳해혼海昏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乃與周瑜 襲皖城克之하여 得術, 勳妻子하여 撫視之하고 及其部曲三萬餘人하다
손책이 이에 주유周瑜와 함께 환성皖城(환성)을 습격해 함락하여 원술袁術과 유훈의 처자식들을 붙잡아서 위무慰撫하여 돌보고, 아울러 그 부곡部曲 3만여 명을 얻었다.
攻勳破之하니 北歸許어늘 收其餘兵하여 得二千餘人 及船千艘하여 遂進擊祖하니
손책이 유훈을 공격하여 격파하자 유훈이 북쪽으로 가서 허도許都조조曹操에게 귀의하였는데, 손책이 유훈의 남은 병력을 거두어 병사 2천여 명과 배 천 척을 노획한 다음 마침내 진군하여 황조黄祖를 공격하였다.
劉表遣將來救어늘 與戰大破之하고 獲船六千艘하다
유표劉表가 장수를 보내와 황조를 구원하였는데, 손책이 유표의 군대와 싸워서 크게 격파하고 배 6천 척을 노획하였다.
盛兵將徇豫章하여 屯于椒丘注+椒丘, 去豫章南昌縣數十里.하고 謂虞翻曰 華子魚自有名字 然非吾敵也注+自有名字, 言其名聞當時也.
손책孫策이 많은 병력으로 예장豫章을 순행하려고 하여 초구椒丘에 주둔하고注+초구椒丘예장군 남창현豫章郡 南昌縣과 수십 리 거리에 있다., 우번虞翻에게 이르기를 “화자어華子魚(화흠華歆)가 본래 명성이 있지만 그러나 나의 적수가 아니다.注+자유명자自有名字”는 그 이름이 당시에 알려진 것을 말한다.
若不開門讓城이면 金鼓一震 不得無所傷害 卿便在前하여 具宣孤意하라
만약 문을 열어 성을 양보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금고金鼓가 한번 진동함에 상해傷害를 당하는 바가 없을 수 없으니, 이 곧 그의 앞에서 나의 뜻을 자세히 말해주어라.” 하였다.
乃往見華歆하고 曰 竊聞明府與鄙郡故王府君으로 齊名中州호니 常懷瞻仰注+翻, 會稽人, 自謙稱其郡曰鄙郡也. 故王府君, 謂前會稽太守王朗也.이로라 歆曰 孤不如王會稽也니라
우번이 이에 가서 화흠華歆을 만나보고 말하기를 “제가 삼가 듣건대, 명부明府께서는 저희 전 왕부군前 王府君(왕랑王朗)과 함께 그 명성이 중주中州(중원中原)에서 나란하다고 하시니, 저는 항상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注+우번虞翻회계會稽 사람이니, 스스로 그 을 겸칭하여 “비군鄙郡”이라 한 것이다. “고왕부군故王府君”은 전 회계태수前 會稽太守 왕랑王朗을 이른다. 하니, 화흠이 말하기를 “내가 왕회계王會稽(왕랑王朗)만 못하다.” 하였다.
復曰 不審豫章資糧器仗 士民勇果 孰與鄙郡 歆曰 大不如也니라
우번이 다시 말하기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예장군豫章郡의 물자와 양식 및 무기, 그리고 병사와 백성들의 용맹함과 과감함이 저희 회계군會稽郡에 비해 어떻습니까?” 하니, 화흠이 말하기를 “크게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翻曰 明府言不如王會稽 謙光之譚耳注+易曰 “謙尊而光.” 譚, 與談通.어니와 精兵不如會稽 實如尊敎
이에 우번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명부께서 왕회계만 못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겸양謙讓의 말씀일 뿐입니다.注+주역周易겸괘謙卦단전彖傳〉에 하였다. 과 통한다. 그러나 정예 병력이 회계군만 못한 것은 사실 명부의 말씀대로입니다.
孫討逆 智略超世하고 用兵如神하여 前定劉揚州 君所親見이요 南定鄙郡 亦君所聞也注+劉揚州, 謂劉繇也.
손토역孫討逆(손책孫策)은 지모와 책략이 출중하고 용병술이 귀신같아서 예전에 유양주劉揚州(유요劉繇)를 평정한 일은 명부께서 직접 보신 바이고, 남쪽으로 가서 저희 회계군을 평정한 것도 명부께서 들으신 바입니다.注+유양주劉揚州유요劉繇를 이른다.
今守孤城 資糧不足하니 不早爲計 悔無及也 今大軍 已次椒丘하니 明日日中 迎檄不至者 與君辭矣리라
이제 명부께서 외딴 성을 지키는데 물자와 양식이 부족하시니, 빨리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다시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손장군의 대군이 이미 초구椒丘에 주둔하였으니, 내일 정오까지 손장군을 영접하는 격문檄文이 이르지 않으면 저는 명부와 다시 만나볼 수 없을 것입니다.”
乃夜作檄하여 明旦 遣吏齎迎이어늘 便進軍하니 葛巾迎策注+葛, 絺綌草也, 可以爲布. 後書 “郭泰行遇雨, 巾一角墊, 時人乃故折巾一角, 號曰林宗巾.” 注 “巾, 以葛爲之, 其形如帢, 居士野人所服.”이라
화흠華歆이 이에 그날 밤 격문檄文을 짓고 다음 날 아침에 이속吏屬을 보내어 격문을 가지고 가서 손책孫策을 영접하게 하였다. 손책이 곧 진군하니, 화흠이 갈건葛巾 차림으로 손책을 영접하였다.注+치격絺綌(갈포葛布)의 풀이니, 이것으로 를 만들 수 있다. ≪후한서後漢書≫ 〈곽태열전郭泰列傳〉에 “곽태郭泰가 길을 가다가 비를 만나 두건頭巾의 한 모서리가 푹 꺼졌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에 일부러 두건의 한 모서리를 꺾어서 ‘림종건林宗巾’이라고 불렀다.” 하였다. 이에 대한 이현李賢의 주에 “로 만드니, 그 형상이 과 같은바 거사居士야인野人이 착용하는 것이다.” 하였다.
策曰 府君年德名望 遠近所歸 策年幼稚하니 宜修子弟之禮라하고 便向歆拜하고 禮爲上賓하고 收載劉繇喪하여 善遇其家하다
손책이 말하기를 “부군府君의 연치와 덕망과 명성은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귀의하는 바이고 저는 나이가 어리니, 자제子弟를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는 곧 화흠을 향하여 절하고 그를 예우하여 상빈上賓으로 삼았다. 또 유요劉繇의 시신을 거두어 수레에 실어서 장사를 지내게 하고 그 가족들을 잘 대우하였다.
孫盛曰注+盛, 晉太原中都人, 撰魏武春秋. 旣無夷, 皓韜邈之風注+夷, 謂伯夷. 皓, 謂四皓. 言無此輩韜光隱晦之遺風.하고 又失王臣匪躬之節注+易 “王臣蹇蹇, 匪躬之故.”하여 撓心交臂하고 位奪節墮하니 咎孰大焉注+撓心交臂, 通鑑作“撓心於邪儒之說, 交臂於陵肆之徒.” 交臂, 猶言手相接也. 言歆爲虞翻所說, 枉撓其心, 而與孫策相見相接也. 墮, 讀曰隳.이리오
손성孫盛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注+손성孫盛나라 태원 중도太原 中都 사람이니, ≪위무춘추魏武春秋≫를 지었다.화흠華歆이 이미 백이伯夷처럼 물러나 은둔하여 멀리 피하는 유풍이 없었고注+백이伯夷를 이르고 사호四皓를 이르니, 〈“흠 기무이歆 旣無夷 호도막지풍皓韜邈之風”은 화흠華歆에게는〉 재능을 감추고 행적을 숨겨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던 이들의 유풍遺風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또 의 신하가 자기 한 몸을 돌보지 않는 절개를 잃어서注+주역周易건괘 육이효사蹇卦 六二爻辭에 “왕의 신하가 어려운 일을 감당하는 것은 자기 한 몸을 돌보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바르지 못한 유자儒者의 말에 마음을 굽히고 잘난 체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는 무리와 서로 친해서 지위를 빼앗기고 절개를 무너뜨렸으니, 허물 중에 무엇이 이보다 더 크겠는가.”注+뇨심교비撓心交臂”는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바르지 못한 유자儒者의 말에 마음을 굽히고 잘난 체하여 제멋대로 행동하는 무리와 서로 접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교비交臂”는 손을 서로 마주 잡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뇨심교비撓心交臂”는〉 화흠華歆우번虞翻에게 설득당하여 그 마음(지조志操)을 굽혀서 손책孫策과 만나고 접함을 말한 것이다. (무너지다)는 로 읽는다.
◑功曹魏騰 忤策意하니 將殺之러니 策母吳夫人 倚大井하여 謂曰 汝新造江南하여 其事未集하니 方當優賢禮士하고 捨過錄功이라
공조 위등功曹 魏騰손책孫策의 뜻을 거스르자 손책이 그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손책의 모친인 오부인吳夫人이 큰 우물의 난간에 기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네가 이제 막 강남江南에 와서 기업을 세웠는데 그 일이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어진 이를 우대하고 선비를 예우하여 잘못은 버려두고 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魏功曹在公盡規어늘 汝今日殺之 則明日 人皆叛汝하리니 吾不忍見禍之及이라 當先投此井中耳리라 大驚하여 釋之하다
위공조魏功曹는 공무를 행함에 있어 힘을 다하여 계책을 도모하였는데, 네가 오늘 그를 죽이면 내일 사람들이 모두 너를 배반할 것이다. 나는 화난禍難이 닥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으니, 마땅히 먼저 이 우물 안에 몸을 던져야겠다.” 이에 손책이 크게 놀라 위등을 풀어주었다.
曹操復屯官渡하다
조조曹操가 다시 관도官渡에 주둔하였다.
하니 操遣兵擊之하다
유비劉備서주徐州에서 군대를 일으켜 조조曹操를 토벌하자, 조조가 군대를 보내어 유비를 공격하였다.
董承 稱受帝衣帶中密詔하고 與劉備謀誅曹操러니 操從容謂備曰 今天下英雄 惟使君與操耳 本初之徒 不足數也니라
】 처음에 동승董承헌제獻帝의대衣帶 속에 있는 밀조密詔를 받았다고 일컫고 유비劉備와 함께 조조曹操를 주살할 것을 모의하였다.
曹操가 劉備와 영웅을 논하다曹操가 劉備와 영웅을 논하다
하루는 조조가 차분하고 여유롭게 유비에게 이르기를 “지금 천하의 영웅은 오직 사군使君과 나 두 사람뿐이니, 원본초袁本初(원소袁紹)와 같은 부류는 여기에 넣을 만하지 못하오.” 하였다.
備方食이라가 失匕箸하고 值雷震 備因曰 聖人云迅雷風烈 必變이라하니 良有以也注+匕, 匙也. 箸, 梜也. 備以操知其英雄, 懼將圖己, 故驚失匕筯也.로다
유비는 막 음식을 먹다가 짐짓 놀라서 수저를 놓쳤는데, 때마침 천둥이 치자 유비가 이를 기회 삼아 말하기를 “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이유가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다.”注+는 숟가락이고 는 젓가락이다. 유비劉備가 자신이 영웅인 것을 조조曹操가 알아보고 장차 자기를 도모할까 두려워하여 짐짓 놀라서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친 체한 것이다. 하였다.
遂與承及种輯等同謀러니 會操遣備하여 邀袁術한대 備遂殺徐州刺史하고 留關羽하여 守下邳하고 身還小沛하니
유비가 마침내 동승 및 충집种輯(충집) 등과 함께 조조를 주살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이때 마침 조조가 유비를 보내어 원술袁術을 요격하게 하자 유비가 마침내 서주자사徐州刺史를 죽이고 관우關羽를 남겨두어 하비下邳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소패小沛로 돌아가니,
郡縣 多叛操爲備 備衆 數萬人이라 遣使하여 與袁紹連和러니 操遣長史劉岱擊之 不克이라
이 대부분 조조를 배반하고 유비에게 호응하였다. 유비의 군대가 수만 명이었는데, 사자를 보내어 원소袁紹와 연합하니, 조조가 장사 유대長史 劉岱를 보내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備謂曰 使汝百人來라도 無如我何 曹公自來라도 未可知耳니라
유비가 유대에게 이르기를 “너 같은 사람 백 명이 오더라도 나를 어찌할 수 없고, 조공曹公이 직접 오더라도 그 승부를 알 수 없다.” 하였다.
역주
역주1 穿其樓下 燒之 : ≪資治通鑑≫에는 “穿其樓下 施木柱之 度足達半 便燒之”로 되어 있어 이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역주2 詔劉備將兵邀之 : “조령[詔]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上(황제)의 命이다. 劉備가 許都로 돌아갔을 적에는 ≪資治通鑑≫은 ‘曹操가 유비를 후하게 대우하고서 豫州牧으로 삼았다.’ 하였는데 ≪資治通鑑綱目≫은 ‘조령을 내려서 예주목으로 삼았다.[詔以爲豫州牧]’라고 썼다. 유비가 조조를 따라 呂布를 공격하다가 돌아갔을 적에는 ≪자치통감≫은 ‘조조가 表文을 올려서 유비를 左將軍으로 삼도록 하였다.’ 하였는데 ≪자치통감강목≫은 다만 ‘유비를 左將軍으로 삼았다.[以劉備爲左將軍]’라고 썼다. 유비가 袁術을 요격하였을 때에는 ≪자치통감≫은 ‘조조가 유비를 보냈다.[曹操遣劉備]’라고 하였는데 ≪자치통감강목≫은 ‘유비에게 조령을 내렸다.[詔劉備]’라고 썼다. 이렇게 쓴 것은 유비를 조조와 다르게 여긴 것이다. 유비를 조조와 다르게 여긴 것은 유비를 온전하게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자치통감강목≫은 유비에 대해서 용서해주는 말[恕辭]이 많다.’라고 한 것이다.[詔者 何 上命也 備之歸許也 史稱操厚遇之 以爲豫州牧 綱目則書詔以 其從操擊布而歸也 史稱操表爲左將軍 綱目則止書以 其邀袁術也 史稱操遣備 綱目則書詔 所以殊備於操也 殊備於操者 全備也 故曰 綱目於劉備多恕辭]” ≪書法≫
역주3 (第)[笫] : 저본에는 ‘第’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笫’로 바로잡았다.
역주4 董公이……못한다 : 董公은 ‘三老董公’으로, 漢나라 때 지방의 長老로서 그 지방의 교육을 맡아 가르친 자이다. 이는 漢 高祖가 남쪽으로 平陰 나루를 건너 洛陽의 新城에 이르렀을 때에 三老의 한 사람인 董公이 고조에게 한 말이다.(≪漢書≫ 권1 〈高帝本紀〉)
역주5 兵家 : 일반적으로는 전술가, 병법가를 가리키는바 여기서는 장수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역주6 劉表遣從事中郞韓嵩 詣許 : “‘許都에 보내었다.[詣許]’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朝貢이 아니기 때문이다. 劉表에 대해서는 ≪資治通鑑綱目≫에서 겨우 1, 2번 썼으니, 그 은혜로운 명령과 學校를 세우고 雅樂을 만든 것을 썼을 뿐 勤王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지금 韓嵩을 보낸 것은 다만 그로 하여금 朝廷(황제)을 엿보게 한 것일 뿐이니, ‘한숭을 허도에 보내었다.’라고 쓴 것은 유표를 책한 것이다. 그러나 한숭이 돌아옴에 조정을 대단히 칭찬하고, 유표에게 자식을 보내어 入侍하게 할 것을 권하였으니, 大義를 아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므로 특별히 관직을 쓴 것이다.[書詣許 何 非朝貢也 表於綱目 僅一再書 書其恩命及立學校作雅樂而已 不聞其有勤王之擧也 今者遣嵩 徒使窺朝廷耳 書曰遣詣許 罪表也 然嵩之歸也 盛稱朝廷 勸遣侍子 可謂知大義者矣 故特書官]” ≪書法≫ “이때 袁紹와 曹操가 한창 서로 힘을 겨루며 버텨서 결판이 나지 않았는데, 鑾駕(天子)가 許都에 있었다. 劉表는 병력이 강하고 영토가 넓었으니, 마땅히 따라야 할 바를 선택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朝宗(황제에게 조회)하는 의리를 분명히 알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 이에 대해 ‘韓嵩을 보내 입조하게 하였다.’라고 쓰지 않았으니 유표가 군주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고, ‘한숭을 許都에 보내었다.’라고 썼으니, 멀리서 바라보며 틈을 관찰하려는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유표의 죄를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는가. 한숭에 대해서 그 관직을 특별히 쓴 것은 한숭이 使者의 직분을 다하고 君臣의 의리를 알아서 官守를 잃지 않음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요, 이것으로 유표를 인정한 것이 아니니, 아아! 은미하도다.[是時袁曹方相持未決 而鑾駕在許 表兵强地廣 非惟不能擇所宜從 且昧於朝宗之義 故綱目於此 不書遣嵩入朝 則見其有無君之心 而書遣嵩詣許 則見其有顧望觀釁之意 然則表之罪 可勝誅哉 若夫韓嵩特書其官者 蓋美嵩能盡使人之職 知君臣之義 不失官守 而非以是予表也 鳴呼 微矣]” ≪發明≫
역주7 聖人은……지킨다 : 이는 ≪春秋左氏傳≫ 成公 15년(B.C.576) 조에 子臧이 한 말이다. 자장은 춘추시대 曹宣公의 公子 欣時의 字이다. 선공의 사후에 즉위한 군주가 의롭지 못하다고 하여 제후들이 자장을 周王에게 謁見시키고서 曹나라의 군주로 세우려고 하였는데, 자장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옛 기록에 ‘聖人은 分義를 통달하고, 그 다음인 賢人은 분의를 지키고, 下愚는 분의를 잃는다.’ 하였으니, 군주가 되는 것은 나의 분의가 아니다. 비록 성인에게는 미칠 수 없다 하더라도 감히 지킬 바를 잃겠는가.[前志有之曰 聖達節 次守節 下失節 爲君非吾節也 雖不能聖 敢失守乎]” 하고서 도망하여 宋나라로 달아났다. ‘분의를 통달한다[達節]’는 것은 일정한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때에 맞게 대처함을 이른다.
역주8 (相)[用] : 저본에는 ‘相’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用’으로 바로잡았다.
역주9 (楊)[陽] : 저본에는 ‘楊’으로 되어 있으나, ≪後漢書≫ 〈郡國志〉에 의거하여 ‘陽’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0 謙은 높고 빛난다 : 이는 謙卦의 〈彖傳〉에 보이는 말이다. 이에 대해 孔穎達의 疏에는 “높은 자가 겸손함이 있으면 더욱 광명함이 성대하다.[尊者有謙而更光明盛大]”라고 해석하였고, 程頤의 ≪易傳≫에는 “그 道가 존대하고 광현하다.[其道尊大而光顯]”라고 해석하였고, 朱熹의 ≪易本義≫에는 “사람이 겸손하면 높은 곳에 처한 자는 그 德이 더욱 빛난다.[人能謙則其居尊者其德愈光]”라고 해석하였다. 일설에는 ‘尊’이 ‘撙’과 통용된다고 하여 退讓의 뜻으로 보기도 한다.
역주11 商山四皓 : 秦나라 말기에 난세를 피하여 商山에 은거하였던 네 명의 隱士로, 東園公 唐宣明과 甪里先生(녹리선생) 周術과 邯鄲公 綺里季와 夏黃公 崔黃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여든이 넘은 나이에 수염과 눈썹이 희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四皓’라고 불렀다. 漢 高祖가 이들을 여러 차례 불렀으나 거절하고 은거하였는데, 高祖가 만년에 太子를 폐하고 戚夫人의 소생인 趙王 如意를 세우려고 하자, 呂后가 呂澤으로 하여금 張良에게 계책을 내도록 강요하게 하여 장량의 계책에 따라 태자로 하여금 정중히 서신을 갖추어 겸손한 언사와 安車로써 사호를 초빙하였다. 이에 사호가 入朝하여 태자를 지성으로 보호하고 섬겨서 마침내 태자를 폐하지 않게 되었다.(≪史記≫ 권55 〈留侯世家〉)
역주12 劉備起兵徐州 討曹操 : “袁紹가 일찍이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향하였는데 이를 쓰지 않았고, 曹操가 進軍한 것을 쓴 것과 원소가 진군하여 黎陽에 주둔한 것을 쓸 적에는 ‘攻’이라고 쓰고 ‘討’를 쓰지 않았다. 역적을 토벌하는 의리가 중하니, ≪資治通鑑綱目≫은 이것으로 사람을 인정하는 것을 신중히 하였다. 반드시 劉備와 같은 뒤에야 ‘討’를 쓸 수 있는 것이다.[紹嘗南兵矣 不書 書曹操進軍 及書紹進軍黎陽 則書攻不書討 討賊義重 綱目重以予人也 必若劉備 然後可以書討矣]” ≪書法≫ “曹操가 天子를 위협하여 遷都한 이래로 천하가 이미 漢나라의 소유가 아니었다. 董承이 元舅(國舅)의 높은 신분으로 직접 密詔를 받들어 昭烈(劉備)과 함께 조조를 죽일 것을 모의하였으나 결행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소열이 徐州에 있으면서 인하여 마침내 군대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史書에는 소열이 조조를 토벌한 내용을 쓴 것이 없고, 다만 范曄의 ≪後漢書≫에만 동승 등이 密詔를 받고 조조를 주벌하려 했다고 기재하여 義를 세움이 자못 정밀하였다. 그러나 소열이 조조를 토벌한 일은 말하지 않았다. 陳壽의 ≪三國志≫에 魏나라의 일을 기록함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동승 등이 반란을 도모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고 말하였으니, 잘못되고 망령되어 이치에 맞지 않음이 이보다 더 심함이 없었다. 그런데 蜀漢의 일을 기록함에 이르러서는 처음으로 소열이 漢中王을 칭한 내용 아래에 동승 등과 함께 조조를 죽일 것을 모의했다는 말을 기록하였으니, 이는 실제 사실을 없애기가 어려워서 하는 수 없이 돌려서 말한 것이다. 지금 朱子의 ≪資治通鑑綱目≫은 이에 대하여 특별히 기록하여 義例(의리를 밝히는 사례)를 세우고, ‘徐州에서 군대를 일으켜 조조를 토벌했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바로 三綱을 扶持하고 人極(사람의 도리)을 세워서 亂臣賊子를 천백 년 뒤에 토벌하여 古今의 大義로 하여금 어느 때이고 밝혀지지 않을 때가 없어서 요컨대 逆臣과 亂臣의 무리로 하여금 끝내 천하에 설 수 없게 한 것이니, 세상에 가르침을 드리움이 크다. 그러므로 ‘≪자치통감강목≫이 만들어짐에 亂臣賊子가 두려워했다.’고 말하는 것이다.[自曹操刼遷天子以來 天下已非漢有 董承以元舅之尊 親承密詔 與昭烈謀誅操而不克 故昭烈在徐 因遂起兵 然前史未有書其討操者 獨范史載董承等受密詔誅操 其立義頗精 然不言昭烈討操之擧 至陳壽志魏 反謂董承等謀反伏誅 其謬妄無理 莫甚於此 及其志蜀 始於昭烈稱漢中王之下 錄其與董承等同謀誅操之語 此則實事難泯 不可得而曲說者也 綱目於此 特筆起義 其曰起兵徐州討曹操者 正所以扶三綱 立人極 誅亂臣賊子於千百載之下 使古今大義無時而不明 要使逆亂之徒 終無以自立於天下 其垂世敎也大矣 故曰 綱目修而亂臣賊子懼]” ≪發明≫
역주13 聖人께서는……변하셨다 : 聖人은 孔子를 가리킨다. 이는 ≪論語≫ 〈鄕黨〉에 보이는 내용으로, 공자의 용모 변화에 대해서 기록한 것인데, 鄭玄과 朱熹의 주에 의하면 그 이유는 ‘하늘의 노여움을 공경한 것[敬天之怒]’이라고 한다.

자치통감강목(10)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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