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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鬱洲가 北魏의 경계에 매우 가까워
注+① 鬱洲는 바로 郁洲이다. 가 일어났을 때, 어떤 사람은 몰래 북위와 내통하였는데, 구산의 난리가 평정되자 마음이 절로 불안하였다.
靑州ㆍ冀州刺史 張稷이 뜻을 얻지 못하여 政令이 해이해지니, 관리들도 대부분 백성들의 재산을 침탈하였다.
울주의 백성 徐道角 등이 밤에 울주성을 습격하여 장직을 죽이고 북위에 항복하자, 북위에서 군대를 보내어 그곳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이때에 북위에는 기근이 들어서 백성들 중에 굶어죽은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는데, 游肇가 간언하기를 “구산은 바닷가여서 지대가 낮고 습기가 많아 살기가 어렵고, 울주는 또 바다 가운데 있으니, 얻는다고 해도 더욱 쓸모가 없습니다.
그 지역은 적들의 요충지에 가깝고 이곳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데,
注+② 要는 海路의 요충지를 말하고, 近은 남쪽으로 江水와 淮水와 가까움을 말한 것이다. 北魏가 동남쪽을 도모하려고 하면 군대를 움직일 때에 반드시 淮水와 漢水에서 해야 하는데, 鬱洲는 바다 가운데에 위치해 있고, 또 군사 요충지가 아니기 때문에 “閑遠”이라고 말한 것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군대로 요충지에서 가까이 있는 군대를 공격하려고 하니, 이는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올해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으니 오직 안정시켜야 마땅한데, 다시 군대를 피로하게 하고 군량을 수송하여 허비하려 하니, 臣은 손실만 보이고, 이익은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魏主(元恪)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파견할 군대가 아직 출발하기 전에 梁나라의 北兗州刺史 康絢이 군대를 보내어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注+③ 梁나라의 北兗州는 治所를 淮陰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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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梁主(蕭衍)가 일찍이 侍中인 建昌侯 沈約과 함께 각각 밤[栗]에 관한 典故를 조목조목 쓰기로 하였는데,
注+① 당시에 豫州에서 밤[栗]을 바쳤는데, 지름이 1촌 반 정도 되어 梁主(蕭衍)가 신기하게 여기고는 그로 인해 밤에 관한 여러 가지 典故를 물어 沈約과 각자 기억하고 있는 일을 조목조목 쓴 것이다. 심약이 쓴 것이 梁主보다 세 개가 적었다.
물러나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분은 남보다 앞서기를 좋아하니, 그렇지 않으면 부끄러워 죽고 싶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梁主가 그 말을 듣고는 분노하였다.
注+② “護前”은 스스로 단점을 보호하여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앞서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不는 否로 읽는다. 梁主(蕭衍)가 늘 文學을 하는 관리들을 모아놓고 經史에 관한 일을 策問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단점을 가지고 장점으로 추켜올려주면 梁主가 그제야 기뻐하였다. 그러므로 沈約이 물러나와 이런 말을 한 것이다.
梁主가 張稷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 조용히 심약과 함께 말하다가 그에 대해서 언급하니, 심약이 말하기를 “이미 지난 일인데, 어찌 다시 거론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梁主가 분노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심약이 두려워서 梁主가 일어난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
注+③ ≪資治通鑑≫에는 “沈約이 두려워하여 梁主(蕭衍)가 일어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처음처럼 앉아 있었다.”로 되어 있다. 돌아와서 몸이 의지할 곳을 잃어 방문 아래에서 넘어졌고
注+④ “憑空”은 의지하던 곳을 잃는다는 뜻이다. 頓은 넘어진다는 뜻이다. 침상에 이르기 전에 허공에 앉았기 때문에 방문 아래에서 넘어진 것이다. 그로 인해 병이 났다.
꿈에 齊 和帝(蕭寶融)가 검으로 그의 혀를 자르자,
注+⑤ 沈約이 일찍이 梁 武帝(蕭衍)에게 齊 和帝(萧宝融)를 제거하라고 권하였다. 심약이 道士를 불러서 하늘에 赤章(도교 기도문)을 아뢰도록 하여 말하기를 “禪讓하여 대신하게 한 일은 저로 인해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梁主가 몹시 분노하여 여러 차례 견책을 하자, 심약은 더욱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卒하였다.
有司가 시호를 ‘文’으로 올리자 梁主가 말하기를 “마음속에 품은 것을 모두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隱’이라고 하라.”라고 하여 시호를 ‘隱侯’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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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治中 裴絢이 배반하여 梁나라에 투항하자,
注+① 裴絢은 裴叔業의 형의 손자이다. 李崇이 從弟인 李神 등을 보내어 그를 토벌하였다.
배현이 싸움에서 패하여 달아나자 〈마을 사람이〉 그를 잡았는데, 배현이 말하기를 “내가 무슨 면목으로 이공을 뵙겠는가.”라고 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숭은 표문을 올려 홍수가 난 일로 인해 刺史의 직책에서 해임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魏主(元恪)가 허락하지 않았다.
注+② “求解”는 허물을 자기에게 돌려 자책하여 刺史의 직임해서 해임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이숭은 마음이 깊고 관대하고 후덕하였으며 方略을 가지고 있어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다. 壽春에 있는 10년 동안에 항상 壯士 수천 명을 양성하여 도적들이 침입해오면 격파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웃에 있던 도적들은 그를 ‘누워 있는 호랑이[卧虎]’라고 하였다.
梁主(蕭衍)가 여러 차례 反間(이간책)을 보내어 북위 조정에 의심하게 하였으나 魏主는 평소부터 그의 충성과 독실함을 알고 있었기에 맡겨두고 믿으면서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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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魏主(元恪)가 동궁에 행차하여 崔光을 太子少傅로 삼고 태자에게 명령하여 그에게 절하도록 하였는데, 최광이 사양하였으나 魏主가 허락하지 않았다.
태자가 남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자, 최광이 북쪽을 향하여 서 있다가 감히 答拜를 할 수 없어서 서쪽을 향하여 절을 하고 사례하고는 나갔다.
北魏의 태자가 여전히 어려서 늘 동궁을 출입할 적에 좌우에 유모가 있었을 뿐, 宮僚들을 모두 알지 못하였다.
詹事 楊昱이 아뢰기를 “지금부터 태자를 부르실 적에 반드시 황제께서 직접 쓴 칙서를 내려주시어 신들에게 보좌하여 따르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그의 말을 따랐다.
注+① 楊昱은 楊椿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