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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9)

자치통감강목(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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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9)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梁天監十二年이요 魏延昌二年이라
春二月 梁鬱洲叛降魏어늘 梁討平之하다
鬱洲迫近魏境注+① 鬱洲, 即郁洲.이라 朐山之亂 或陰與之通이러니 朐山平 心不自安이어늘
而靑冀刺史張稷 不得志하여 政令寛弛하니 僚吏頗多侵漁
鬱洲民徐道角等 夜襲州城하여 殺稷降魏하니 魏遣兵赴之할새
於是 魏飢民餓死者數萬이라 游肇諫호되 以爲朐山濱海하여 卑濕難居하고 鬱洲又在海中하니 得之尤爲無用이요
其地於賊要近이요 去此閑遠注+② 要, 謂海道之要. 近, 謂南近江․淮. 魏圖東南, 其用兵必於淮․漢之間, 鬱洲介在海中, 又非兵衝, 故曰閑遠.하니 以閑遠之兵으로 攻要近之衆하니 不可敵也
方今 年飢民困하니 惟宜安靜이어늘 而復勞以軍旅하고 費以饋運하니 臣見其損이요 未見其益이로이다하니
魏主不從하고 遣兵未發이러니 梁北兗州刺史康絢 遣兵討平之注+③ 梁北兗州當治淮陰.하다
閏月 梁侍中沈約卒하다
梁主嘗與侍中建昌侯沈約으로 各疏栗事注+① 時豫州獻栗, 大徑寸半, 梁主奇之, 因問栗事多少, 與約各疏所憶.러니 約少上三事하여
出謂人曰 此公護前하니 不則羞死라하니 梁主聞之怒注+② 護前者, 自護其所短, 不欲人在己前也. 不, 讀曰否. 梁主每集文學之士, 策經史事, 群臣多引短推長, 梁主乃悅, 故約退有是言.하더라
梁主有憾於張稷하여 從容與約語及之한대 約曰 已往之事 何足復論이리오하니
梁主怒而起어늘 約懼不覺注+③ 通鑑 “約懼, 不覺上起, 猶坐如初.”이러니 及還 憑空頓於戶下注+④ 憑空, 失所依也. 頓, 僵仆也. 未至牀而坐空, 故頓於戶下.하여 因病이라
夢齊和帝以劍斷其舌注+⑤ 約嘗勸梁武除齊和帝.하니 乃呼道士하여 奏赤章於天할새 稱禪代之事 不由己出이라한대
梁主大怒하여 譴責數四하니 約益懼遂卒하다
有司諡曰文이라한대 梁主曰 情懐不盡曰隱이라하고 改諡隱侯하다
夏五月 魏壽陽大水하다
壽陽久雨하여 大水入城하여 廬舍皆没이라
魏揚州刺史李崇勒兵泊於城上하니 城不没者二板注+① 泊, 音薄, 止也.이라
將佐勸崇棄城保北山注+② 壽陽北山, 即八公山.한대 崇曰 淮南萬里繫于吾身하니 一旦動足이면 百姓瓦解 吾豈以愛身而取愧於王尊哉注+③ 漢王尊爲東郡太守, 河水盛溢, 泛浸瓠子金隄, 老弱奔走. 尊投沈白馬, 祀水神, 請以身塡金隄, 因止宿隄上, 吏民爭叩頭救止, 尊不肯去. 及水盛隄毁, 吏民皆奔走, 唯一主簿泣在尊旁立不動, 而水波稍却回還, 吏民咸壯尊之勇節.리오
但憐此士民 無辜同死하노니 可結筏隨高하여 人規自脫하라 吾必與此城俱没注+④ 規, 圖也.하리라하다
治中裴絢 叛降于梁注+① 絢, 叔業之兄孫也.이어늘 崇遣從弟神等討之하니
한대 絢曰 吾何面見李公乎아하고 乃投水死하다
崇表以水災求解한대 魏主不許注+② 求解, 引咎自責而求解刺史之任.하다
崇沈深寛厚有方略하여 得士心이라 在壽春十年 常養壯士數千人하여 寇來 無不摧破하니 隣敵謂之卧虎라하더라
梁主屢設反間以疑之호되 而魏主素知其忠篤하여 委信不疑하더라
六月 梁新作太廟하다
◑ 秋八月 하다
踰年不已하니 民覆壓死傷甚衆이러라
魏以崔光爲太子少傅하다
魏主幸東宮하여 以崔光爲太子少傅하고 命太子拜之한대 光辭不許하니
太子南面再拜어늘 光北面立不敢答하고 唯西面拜謝而出하다
魏太子尙幼 毎出入東宮 左右乳母而已 宮臣皆不之知하니
詹事楊昱上言호되 乞自今으로 召太子 必降手敇하여 令臣等翼從하소서하니 從之注+① 昱, 椿之子也.하다


梁나라 高祖 武帝 蕭衍 天監 12년이고, 北魏 世宗 宣武帝 元恪 延昌 2년이다.
【綱】 봄 2월에 梁나라 鬱洲가 배반하여 北魏에 투항하자, 양나라가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目】 鬱洲가 北魏의 경계에 매우 가까워注+① 鬱洲는 바로 郁洲이다. 가 일어났을 때, 어떤 사람은 몰래 북위와 내통하였는데, 구산의 난리가 평정되자 마음이 절로 불안하였다.
靑州ㆍ冀州刺史 張稷이 뜻을 얻지 못하여 政令이 해이해지니, 관리들도 대부분 백성들의 재산을 침탈하였다.
울주의 백성 徐道角 등이 밤에 울주성을 습격하여 장직을 죽이고 북위에 항복하자, 북위에서 군대를 보내어 그곳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이때에 북위에는 기근이 들어서 백성들 중에 굶어죽은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는데, 游肇가 간언하기를 “구산은 바닷가여서 지대가 낮고 습기가 많아 살기가 어렵고, 울주는 또 바다 가운데 있으니, 얻는다고 해도 더욱 쓸모가 없습니다.
그 지역은 적들의 요충지에 가깝고 이곳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데,注+② 要는 海路의 요충지를 말하고, 近은 남쪽으로 江水와 淮水와 가까움을 말한 것이다. 北魏가 동남쪽을 도모하려고 하면 군대를 움직일 때에 반드시 淮水와 漢水에서 해야 하는데, 鬱洲는 바다 가운데에 위치해 있고, 또 군사 요충지가 아니기 때문에 “閑遠”이라고 말한 것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군대로 요충지에서 가까이 있는 군대를 공격하려고 하니, 이는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올해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으니 오직 안정시켜야 마땅한데, 다시 군대를 피로하게 하고 군량을 수송하여 허비하려 하니, 臣은 손실만 보이고, 이익은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魏主(元恪)가 그 말을 따르지 않고, 파견할 군대가 아직 출발하기 전에 梁나라의 北兗州刺史 康絢이 군대를 보내어 공격하여 평정하였다.注+③ 梁나라의 北兗州는 治所를 淮陰에 두었다.
【綱】 윤3월에 梁나라 侍中 沈約이 卒하였다.
【目】 梁主(蕭衍)가 일찍이 侍中인 建昌侯 沈約과 함께 각각 밤[栗]에 관한 典故를 조목조목 쓰기로 하였는데,注+① 당시에 豫州에서 밤[栗]을 바쳤는데, 지름이 1촌 반 정도 되어 梁主(蕭衍)가 신기하게 여기고는 그로 인해 밤에 관한 여러 가지 典故를 물어 沈約과 각자 기억하고 있는 일을 조목조목 쓴 것이다. 심약이 쓴 것이 梁主보다 세 개가 적었다.
물러나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분은 남보다 앞서기를 좋아하니, 그렇지 않으면 부끄러워 죽고 싶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梁主가 그 말을 듣고는 분노하였다.注+② “護前”은 스스로 단점을 보호하여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앞서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不는 否로 읽는다. 梁主(蕭衍)가 늘 文學을 하는 관리들을 모아놓고 經史에 관한 일을 策問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단점을 가지고 장점으로 추켜올려주면 梁主가 그제야 기뻐하였다. 그러므로 沈約이 물러나와 이런 말을 한 것이다.
梁主가 張稷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 조용히 심약과 함께 말하다가 그에 대해서 언급하니, 심약이 말하기를 “이미 지난 일인데, 어찌 다시 거론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梁主가 분노하여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심약이 두려워서 梁主가 일어난 것도 깨닫지 못하였다.注+③ ≪資治通鑑≫에는 “沈約이 두려워하여 梁主(蕭衍)가 일어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처음처럼 앉아 있었다.”로 되어 있다. 돌아와서 몸이 의지할 곳을 잃어 방문 아래에서 넘어졌고注+④ “憑空”은 의지하던 곳을 잃는다는 뜻이다. 頓은 넘어진다는 뜻이다. 침상에 이르기 전에 허공에 앉았기 때문에 방문 아래에서 넘어진 것이다. 그로 인해 병이 났다.
꿈에 齊 和帝(蕭寶融)가 검으로 그의 혀를 자르자,注+⑤ 沈約이 일찍이 梁 武帝(蕭衍)에게 齊 和帝(萧宝融)를 제거하라고 권하였다. 심약이 道士를 불러서 하늘에 赤章(도교 기도문)을 아뢰도록 하여 말하기를 “禪讓하여 대신하게 한 일은 저로 인해 벌어진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梁主가 몹시 분노하여 여러 차례 견책을 하자, 심약은 더욱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卒하였다.
有司가 시호를 ‘文’으로 올리자 梁主가 말하기를 “마음속에 품은 것을 모두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隱’이라고 하라.”라고 하여 시호를 ‘隱侯’로 바꾸었다.
【綱】 여름 5월에 北魏의 壽陽에 홍수가 났다.
【目】 壽陽에 오랫동안 비가 내려서 홍수가 나서 성안으로 물이 들어오니 집들이 모두 침수되었다.
北魏의 揚州刺史 李崇이 군대를 지휘하여 성벽 위에 머물렀는데, 성에서 물에 잠기지 않은 부분은 2板(4尺)이었다.注+① 泊은 음이 薄이니, 머무름이다.
그의 장수와 보좌들이 이숭에게 성을 버리고 北山을 지키자고 권하자,注+② 壽陽의 北山은 바로 八公山이다. 이숭이 말하기를 “淮南 1만 리가 내 몸에 달려 있으니, 하루아침에 발을 움직이면 백성들이 와해될 것이다. 내가 어찌 한 몸을 아껴 王尊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야 되겠는가.注+③ 漢나라 王尊이 東郡太守가 되었을 때, 黃河가 범람하여 瓠子(제방 이름)와 金隄가 물에 잠기자, 노약자들이 달아났다. 왕존이 白馬를 강에 제물로 바쳐 水神에게 빌어 자신의 몸으로 金隄를 메꾸어 달라고 하고는 둑 위에 머무르면서 잠을 잤다. 관리와 백성들이 다투어 머리를 조아리며 그만두라고 말렸는데도 왕존은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물이 불어나 둑이 무너져 관리와 백성들은 모두 달아났으나, 主簿 한 명만이 울면서 왕존의 곁을 지키며 움직이지 않았다. 물이 점차 빠져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관리와 백성들이 모두 왕존의 용기와 절조를 칭송하였다.
다만 여기에 있는 관리와 백성들이 죄 없이 함께 죽는 것이 애처로우니, 뗏목을 연결하여 물을 따라 높은 곳으로 가도록 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벗어날 길을 도모하도록 하라. 나는 반드시 이 城과 함께 물에 잠길 것이다.”라고 하였다.注+④ 規는 도모함이다.
【目】 治中 裴絢이 배반하여 梁나라에 투항하자,注+① 裴絢은 裴叔業의 형의 손자이다. 李崇이 從弟인 李神 등을 보내어 그를 토벌하였다.
배현이 싸움에서 패하여 달아나자 〈마을 사람이〉 그를 잡았는데, 배현이 말하기를 “내가 무슨 면목으로 이공을 뵙겠는가.”라고 하고,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숭은 표문을 올려 홍수가 난 일로 인해 刺史의 직책에서 해임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魏主(元恪)가 허락하지 않았다.注+② “求解”는 허물을 자기에게 돌려 자책하여 刺史의 직임해서 해임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이숭은 마음이 깊고 관대하고 후덕하였으며 方略을 가지고 있어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다. 壽春에 있는 10년 동안에 항상 壯士 수천 명을 양성하여 도적들이 침입해오면 격파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웃에 있던 도적들은 그를 ‘누워 있는 호랑이[卧虎]’라고 하였다.
梁主(蕭衍)가 여러 차례 反間(이간책)을 보내어 북위 조정에 의심하게 하였으나 魏主는 평소부터 그의 충성과 독실함을 알고 있었기에 맡겨두고 믿으면서 의심하지 않았다.
【綱】 6월에 梁나라에서 새로 太廟를 만들었다.
【綱】 가을 8월에 北魏의 恒州와 肆州 2州에 지진이 나서 산이 울렸다.
【目】 해를 넘겨도 지진이 그치지 않으니 백성들 중에 깔려서 죽거나 부상을 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綱】 北魏에서 崔光을 太子少傅로 삼았다.
【目】 魏主(元恪)가 동궁에 행차하여 崔光을 太子少傅로 삼고 태자에게 명령하여 그에게 절하도록 하였는데, 최광이 사양하였으나 魏主가 허락하지 않았다.
태자가 남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자, 최광이 북쪽을 향하여 서 있다가 감히 答拜를 할 수 없어서 서쪽을 향하여 절을 하고 사례하고는 나갔다.
北魏의 태자가 여전히 어려서 늘 동궁을 출입할 적에 좌우에 유모가 있었을 뿐, 宮僚들을 모두 알지 못하였다.
詹事 楊昱이 아뢰기를 “지금부터 태자를 부르실 적에 반드시 황제께서 직접 쓴 칙서를 내려주시어 신들에게 보좌하여 따르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그의 말을 따랐다.注+① 楊昱은 楊椿의 아들이다.


역주
역주1 朐山의 난리 : 梁 武帝 天監10년(511)에 梁나라 군대가 朐山에서 北魏의 군대를 크게 격파한 일을 말한다.
역주2 絢敗走 執之 : 이 부분이 ≪資治通鑑≫에는 “絢走 爲村民所執(배현이 도주하다가 마을 사람에게 잡혔다.)”이라고 하였다.
역주3 魏恒肆二州地震山鳴 : “이에 해를 넘겨도 지진이 그치지 않아서 백성들 중에 깔려서 죽거나 부상을 당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큰 변고이다. 이는 北魏에 큰 어지러움의 징조가 나타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마칠 때까지 地震을 기록한 것은 101번인데 9월부터 11월까지 있었고(後漢 順帝 漢安 2년(143) 涼州) 이보다 오랜 것은 없었다. ◯ ‘산이 울렸다[山鳴]’라고 기록한 것은 여기서 시작되었다.[於是踰年不已 民覆壓死者甚衆 則大變也 魏大亂之徴見矣 終綱目書地震一百一 有自九月至十一月者矣(漢順帝漢安二涼州) 未有久於此者也 ◯ 書山鳴始此]” ≪書法≫
“땅은 고요함을 위주하는데 진동하고 산은 안정함이 마땅한데 울린 것이 심지어 해를 넘기도록 지진이 그치지 않아서 백성들 중에 깔려서 죽거나 부상을 당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이는 北魏가 어지러이 망할 징조인 것이다. 하물며 뒷날 爾朱氏(북위 肅宗의 황후)가 나라를 패망시킨 것도 恒州와 肆州 2州에서 시작된 것임에랴. ≪資治通鑑綱目≫에서 어찌 그 災異를 드러내어 기록하지 않겠는가.[地主靜而震 山宜安而鳴 甚至踰年不已 民覆壓死傷甚衆 此魏氏亂亡之兆也 況他時爾朱氏覆國 亦始於恒肆二州 綱目安得不著其異而志之乎]” ≪發明≫

자치통감강목(19) 책은 2022.11.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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