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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동군태수東郡太守 적의翟義는 적방진翟方進의 아들인데, 누님의 아들(생질)인 진풍陳豐에게 다음과 같이 상의하였다.
“
신도후新都侯(
왕망王莽)가
천자天子의 지위를 대행하니, 반드시
注+① 번蕃은 번병蕃屛이다. 한漢나라를 대신할 것이다.
지금
종실宗室이 쇠약하고 밖에 강한
번병蕃屛이 없어서 천하가 머리를 숙여 복종해서 능히
국난國難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이가 없다.
注+② 항亢은 항抗과 같으니, “항한亢扞”은 항거하여 지킴을 말한다. 난難(난리)은 거성去聲이다.
우리 부자父子가 한漢나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으니, 의리상 마땅히 국가를 위하여 역적을 토벌해야 한다.
군대를 일으켜 서쪽으로 가서 섭정해서는 안 되는 자를 주벌하고 종실의 자손을 선발하여 보좌해서 세우고자 하니,
설령 천시天時와 천명天命이 맞지 아니하여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나라를 위해 죽어서 몸이 묻히더라도 이름이 난다면, 오히려 선제先帝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
너는 기꺼이 나를 따르겠는가.”
注+③ “매명埋名”은 몸이 매몰되어도 이름이 남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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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진풍陳豐은 나이가 18세였는데 용맹하고 건장하여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적의翟義는 마침내
도위都尉 유우劉宇와
엄향후嚴鄕侯 유신劉信과 유신의 아우
유황劉璜과 함께 계책을 세워
注+① 엄향국嚴鄕國은 동군東郡에 있었다. 유신劉信과 유황劉璜은 모두 동평양왕東平煬王 유운劉雲의 아들이다.,
자신의 거기車騎와 재관材官의 용사들을 무장하고 고을 안의 용감한 자들을 모집해서 장수를 배치하고 유신을 세워 천자天子로 삼았다.
적의가 스스로 대사마大司馬 주천대장군柱天大將軍이라 칭하고 군국郡國에 격문을 돌려
“왕망王莽이 효평황제孝平皇帝를 독살하고 천자天子의 지위를 섭행하여 한漢나라를 멸망시키고자 한다.
이제
천자天子가 이미 섰으니, 하늘의 주벌을 공경히 행하고자 하노라.” 하니
注+② 공共(공경하다)은 공恭으로 읽는다.,
이에 군국郡國에서 모두 진동하여 토벌군이 산양山陽에 이르렀을 무렵에, 병력이 십여만 명에 이르렀다.
왕망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밥을 먹지 못하였다.
태황태후太皇太后가 좌우의 측근들에게 이르기를 “사람의 마음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다.
注+③ 〈“인심人心 불상원야不相遠也”는〉 소견이 같음을 말한다. 내 비록 부인이나 왕망이 반드시 이 일 때문에 스스로 위태롭게 여길 줄을 안다.” 하였다.
왕망은 마침내
손건孫建 등 일곱 사람을
장군將軍으로 임명하여
注+④ “칠인七人”은 손건孫建‧왕읍王邑‧왕준王駿‧왕황王況‧유굉劉宏‧왕창王昌‧두황竇況이다. 무장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서둘러 출전하라는 명령을 발동하여 적의를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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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삼보三輔의 호걸인 조붕趙朋과 곽홍霍鴻 등은 적의翟義가 의병義兵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고는
관시官寺를 불태우고 도위都尉를 죽이고 서로 모의하기를
“여러 장수들의 정예병이 모두 동쪽으로 진출하여 경사京師가 텅 비었으니, 장안長安을 공격할 만하다.” 하니,
불 길이
미앙궁未央宮 앞 대궐에 보이자
注+① 견見(보이다)은 현편賢遍의 절切이다.,
왕망王莽은 다시 왕급王級을 장군將軍으로 임명하여 서쪽으로 조붕 등을 공격하게 하였다.
왕망은 날마다 유자孺子를 안고서 교사郊祀와 종묘宗廟에 기도하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말하기를
“옛날
주공周公이 섭정함에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이
녹보祿父(녹보)를 끼고 배반했었다.
注+② 부父는 보甫로 읽으니, 녹보祿父는 주왕紂王의 아들로 바로 무경武庚이다.
지금 적의 또한 유신劉信을 끼고 난亂을 일으키니, 예로부터 큰 성인聖人도 이를 두려워했는데, 하물며 재주가 부족한 나와 같은 자에 있어서이겠는가.”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이런 변고를 만나지 않았으면, 성덕聖德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왕망은 《
서경書經》 〈
주서周書〉를 따라
대고大誥를 지어서, 천하 사람들에게 반드시
천자天子의 지위를
유자孺子에게 돌려주겠다는 뜻을
고유告諭하였다.
注+③ 무왕武王이 붕崩함에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필하였는데, 왕망王莽이 자신을 주공周公에 견주었으므로 이 일을 모방한 것이다.
여러 장수들이 동쪽으로 진류陳留에 이르러 적의와 회전會戰하였는데,
적의는 패하여 죽고 유신은 끝내 잡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