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魏太尉咸陽王禧가 不親政務하고 驕奢貪淫커늘 魏主惡之하니
禧遣奴就領軍于烈하여 求羽林虎賁한대 烈이 以無詔拒之러니
禧가 復遣謂曰 我는 天子叔父요 身爲元輔니 有所求須면 與詔何異리요
烈이 厲色曰 烈非不知王之貴也나 奈何使私奴索天子羽林가 烈頭는 可得이나 羽林은 不可得이로다
禧
가 怒
하여 以烈爲恒州刺史
하니 烈
이 遂稱疾不出
注+① 臥私第不出也.하다
北海王詳이 密以禧過惡白帝하고 且言彭城王勰이 大得人情하니 不宜久輔政이라한대
帝然之
하여 詔勰以王歸第
하고 禧
는 進位太保
注+② 進其位而奪之權.하고 詳
은 爲大將軍錄尙書事
하고 復以于烈爲領軍
하여 軍國大事
를 皆得參焉
하다
魏主時年十六이라 不能親决庶務하고 委之左右러니 於是에 倖臣茹皓ㆍ趙脩와 及外戚高肇等이 始用事하여 魏政浸衰러라
脩尤親幸하여 旬月間에 累遷至光祿卿하고 每遷官에 魏主가 親至其宅設宴하고 王公이 皆從하다
目
崔慧景之死也에 其少子偃이 逃潜得免이러니 及西臺建하여 以偃爲寧朔將軍하니
偃
이 上書曰 臣
은 惟高宗之孝子忠臣
이요 而昏主之賊臣亂子者
는 江夏王與陛下
와 先臣與鎭軍是也
注+① 先臣, 謂其父慧景. 鎭軍, 指蕭穎冑.니 雖成敗異術
이나 而所由同方
이니이다
陛下初登至尊하여 與天合符할새 天下纎芥之屈을 尙望陛下申之어든 況先帝之子요 陛下之兄이며 所行之道가 即陛下所由哉잇가
此尙弗恤
이면 其餘何冀
리잇가 豈可幸小民之無識而罔之
注+② 以非道欺人謂之罔.리오
若使曉然知其情節하여 相帥而逃하면 陛下將何以應之哉잇가 事寢不報하다
偃又上疏曰 近冒陳江夏之寃은 非敢以父子之親으로 而傷至公之義라 誠不曉聖朝所以然之意니이다
若以狂主雖狂이나 而實是天子요 江夏雖賢이나 而實是人臣이니
先臣이 奉臣逆君을 爲不可라하면 未審今之嚴兵勁卒이 方指象魏者는 其故何哉오
臣謹按鎭軍將軍臣穎冑
와 中領軍臣詳
은 皆社稷之臣也
라 同知先臣
이 股肱江夏
하고 匡濟王室
이라가 天命未遂
하여 主亡與亡
이나 而不爲陛下瞥然一言
注+③ 爲, 去聲. 瞥, 普滅切. 瞥然, 暫見也.이니이다
知而不言은 不忠이요 不知而不言은 不智니 臣言畢矣라 乞就湯鑊이니이다
然先臣之忠
은 有識所知
요 南董之筆
은 千載可期
니 亦何待陛下屈申
하여 而爲褒貶
이리잇가 顧小臣惓惓之愚
가 爲陛下計耳
注+④ 南․董, 謂齊南史․晉董狐也. 崔杼弒齊莊公, 太史書曰 “崔杼弒其君.” 崔子殺之. 其弟嗣書, 而死者二人, 其弟又書, 乃舍之. 南史氏聞太史盡死, 執簡以往, 聞旣書矣, 乃還. 晉趙盾弟穿弒靈公, 董狐以盾不討賊, 書曰 “趙盾弒其君.” 以示於朝. 孔子曰 “董狐古之良史也, 書法不隱.”니이다
目
初에 齊涪陵王寶巻이 遣陳伯之하여 鎭江州하여 以爲吳子陽等聲援이러니
子陽等이 旣敗에 蕭衍이 曰 用兵은 未必須實力이며 所聽은 威聲耳라 今陳虎牙가 狼狽犇歸하니 尋陽人情理當恟懼라 可傳檄而定也라하고
乃命搜囚俘
하여 得伯之幢主蘇隆之
하여 厚加賜與
하고 使説伯之
호되 許
하면 即用爲江州
注+① 리라하니
隆之가 返命호되 雖許歸附나 而云大軍이 未須遽下라하니
衍이 曰 伯之意가 首鼠니 及其猶豫하여 急往逼之하면 勢不得不降이라하고 乃引兵下至尋陽하니 伯之束甲請罪하다
初
에 巴東之亂
에 司馬席恭祖
가 不從見殺
注+② 席恭祖, 上二十八卷齊永明八年作席恭穆.이러니 至是
하여 其子謙
이 爲新蔡太守
하여 從伯之鎭尋陽
이라가
聞衍東下
하고 曰 我家世忠貞
하니 有隕不二
라한대 伯之殺之
注+③ 蕭子顯齊志 “江州有南新蔡郡, 豫州有北新蔡郡.”하다
衍이 以伯之로 爲江州刺史하고 虎牙로 爲徐州刺史하다
目
衍이 旣克江郢에 涪陵王寶巻이 遊騁如故러니 聞至近道하고 乃聚兵爲固守之計라
衍
이 遣曹景宗等
하여 進頓江寧
注+① 沈約曰 “晉武帝太康元年, 分秣陵立臨江縣. 二年, 更名江寧, 其治所蓋臨江濱.”하니 李居士
가 自新亭選精騎薄之
注+② 是年八月, 東昏侯以太子左率李居士摠督西討諸軍事, 屯新亭. 金陵覽古云 “新亭, 去江寧十里.”어늘
景宗이 奮擊破之하고 因乘勝而前하니 新亭城主江道林이 引兵出戰이라가 被擒하다
衍
이 至新林
하여 遣呂僧珍
하여 據白板橋
注+③ 據陶弘景書, 板橋, 時屬江寧縣界.러니 李居士
가 帥銳卒萬人
하여 直來薄壘
어늘
僧珍이 曰 吾衆이 少하여 不可逆戰이니 可勿遙射하고 須至塹裏하여 當併力破之라호라
俄而皆越塹拔柵커늘 僧珍이 分人上城하여 矢石俱發하고 自帥馬步三百人하여 出其後하고
城上人이 復踰城而下하여 内外奮擊하니 居士敗走러라
目
衍이 與雲有舊라 即留參帷幄하고 亮은 在朝에 以依違取容이러니 衍이 至新林에 百僚가 皆間道送欵호되 亮은 獨不遣이러라
城中出者가 多被刼剝하니 楊公則이 獨帥麾下하여 親衛送之러라
衍이 使張弘策으로 先入清宫하여 封府庫圖籍하니 時에 城内珍寶가 委積호되 弘策이 禁勒部曲하여 秋毫無犯하고 收潘妃及法珍蟲兒咺之等四十一人하여 皆以屬吏하고
以宣德太后令
으로 追廢寶卷
하여 爲東昏侯
하고 以衍爲大司馬錄尚書事
하고 依晉武陵王遵承制故事
하여 百僚
가 致敬
하고 以王亮爲長史
注+① 晉安帝元興三年, 桓玄敗, 逼帝西上, 劉裕稱受密詔, 以武陵王遵承制, 揔百官行事.하다
衍
이 入屯閱武堂
하여 下令大赦
하고 凡昏制謬賦淫刑濫役
을 悉皆除盪
注+② 閱武堂, 在建康子城北.하다
潘妃有國色하여 衍欲留之하여 以問領軍王茂한대 茂曰 亡齊者此物이니 留之하면 恐貽外議라커늘 乃并法珍等誅之하고 以宫女二千으로 分賚將士하다
目
及建康平에 衍이 使豫州刺史李元履로 巡撫東土하여 勅曰 袁昻은 道素之門이요 世有忠節이라
天下須共容之
니 勿以兵威陵辱
注+① 道素, 有道義而潔白也.하라 元履
가 至
하여 宣衍旨
호되 昻
이 亦不請降
하고 開門撤備而已
러라
仙琕이 聞臺城不守하고 號泣謂將士曰 我受人任寄어든 義不容降이나 君等은 皆有父母하니 我爲忠臣하고 君爲孝子가 不亦可乎아하고 乃悉遣兵出降이나 餘壯士數十이 閉門獨守러니
俄而兵入에 仙琕이 令士皆持滿하니 兵不敢近이러라
日暮에 仙琕이 乃投弓曰 諸軍은 但來見取하라 我義不降이로다
乃檻送石頭하니 衍이 釋之하고 使待袁昻至하여 俱入에 曰 令天下로 見二義士라하고 皆厚遇之하다
目
僧粲이 自稱湘州刺史하고 引兵襲長沙하여 去城百餘里할새 長沙人이 皆欲走어늘 行事劉坦이 悉聚其舟焚之하고 遣軍拒僧粲이나 數戰不利러라
前鎭軍鍾玄紹가 刻日翻城應僧粲이러니 坦聞其謀하고 陽爲不知하여 因理訟至夜하고 而城門遂不閉以疑之하니 玄紹未發하다
明旦에 詣어늘 坦問其故하다 坦久留與語하고 密遣親兵하여 収其家書하여 具得本末하고 於坐斬之하고 焚其文書라 餘黨無所問하니 州郡이 遂安하다
建康平이어늘 楊公則이 還州하니 僧粲等散走하다 公則이 克己廉愼하고 輕刑薄賦하니 頃之에 湘州户口가 幾復其舊러라
目
【目】 北魏 太尉 咸陽王 元禧가 정무를 직접 처리하지 않고 교만하고 사치하고 탐욕하고 음탕하자, 魏主(元恪)가 싫어하였다.
원희가 집안 노복을 보내 領軍 于烈에게 가서 羽林軍과 虎賁軍의 병사를 달라고 하자, 우렬이 詔勅이 없다며 거절하였다.
원희가 다시 사람을 보내 이르기를 “나는 천자의 숙부이고 정승[元輔]의 신분이니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조칙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하자,
우렬이 정색하며 말하기를 “왕이 귀한 존재임을 내가 모르진 않으나, 어떻게 私奴를 시켜서 천자의 우림군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머리는 얻을 수 있어도 우림군은 얻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원희가 노하여 우렬을 恒州刺史로 좌천시키자, 우렬이 병을 핑계로 들며 결국 나가지 않았다.
注+① 〈“稱疾不出”은〉 사저에 머물며 나가지 않은 것이다.
北海王 元詳이 몰래 원희의 과오를 황제에게 보고하고, 또 彭城王 元勰이 민심을 크게 얻고 있으므로 輔政하는 자리에 오랫동안 있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자,
황제가 이를 받아들여 원협에게 조칙을 내려 王爵을 가진 채 사저에 돌아가게 하고, 원희는 太保로 진급시키고,
注+② 〈“進位太保”는〉 작위만 올려주고 권한은 빼앗은 것이다. 원상은 大將軍 錄尙書事로 삼고, 우렬은 다시 領軍으로 삼아 軍國의 주요 업무를 모두 관여하게 하였다.
魏主는 이때 열여섯 살이어서 여러 정무를 직접 결정하지 못하고 좌우 신하들에게 맡겼는데, 이를 틈타 측근인 茹皓와 趙脩, 외척 高肇 등이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여 북위의 정사가 점차 쇠락하였다.
조수가 임금에게 더욱 총애를 받아서 한 달 사이에 승진을 거듭해 光祿卿에 이르렀다. 승진이 있을 때마다 魏主가 직접 그의 집에 가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에 王과 公이 모두 황제를 따라 참석하였다.
目
【目】 齊나라 蕭衍이 竟陵에 도착해 王茂와 曹景宗을 前軍으로 삼아 漢口에 도착하였다. 諸將들이 군사를 합쳐서 郢城을 포위하고 병사를 나누어 西陽과 武昌을 습격하는 것을 논의하였는데,
소연이 말하기를 “한구는 水面의 폭이 채 1리도 안 돼서, 화살을 쏘면 가는 배에 이르고 房僧寄가 강한 병력을 거느리고 굳게 지켜서 영성과 掎角之勢를 이루고 있다.
注+① “箭道交至”는 배가 강 가운데서 물결을 타고 내려갈 때 적들이 강안의 양쪽에서 화살을 쏴 화살이 빗발치듯 닿는다는 말이다. 만약 모든 군사를 이끌고 전진하게 되면 방승기가 반드시 우리 군의 후미를 끊을 것이다.
따라서 왕무와 조경종에게 江水를 건너 荊州軍과 합쳐 영성을 압박하고, 나는 직접 魯山을 포위해 沔水ㆍ漢水의 운송로를 통하게 하여 鄖城과 竟陵의 곡식을 뱃길로 내려오게 하고 江陵과 湘中의 병사들이 연이어 이르게 해서, 병사가 많고 군량이 충분하게 하는 것만 못하니, 그렇게 하면 두 성을 함락시키지 않은 것을 어찌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천하의 일을 쉽게 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注+② 沔水는 곧 漢水로, 하나의 물이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이다. 鄖의 음은 云이다. 杜預가 말하기를 “江夏 雲杜縣 동남쪽에 鄖城이 있다.”라고 하였다. 方은 뗏목[泭]이고, 舟는 배이니 ≪詩經≫ 〈邶風 谷風〉에 “깊은 곳으로 나갈 때, 뗏목도 타고 배도 탄다.”라고 하였다. 泭는 음이 桴이다. 일설에 “方舟란 두 척의 배를 나란히 하여 가는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왕무 등에게 강수를 건너가게 하였는데 張沖이 병사를 보내 맞아 싸우자 왕무 등이 격파하니, 장충이 직접 성에 올라 지켰다.
조경종이 마침내 石橋浦를 점거하자 군사들이 연합하여 이어져 加湖까지 이르렀다.
注+③ 加湖는 江夏 灄陽縣 경계에 있으며, 湖水 북남으로 江水에 흘러든다. 郢城과의 거리가 30리이다. 소연이 한구에 城을 축조하여 魯山을 막고, 楊公則이 湘州의 군대를 이끌고 夏口에서 모이자, 蕭穎冑가 荆州의 諸軍에게 명하여 모두 양공칙의 지휘를 받도록 하고, 劉坦을 行湘州事로 삼았다.
유탄이 일찍이 상주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은혜를 입은 사람이 많아, 그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길가에 이어졌다.
注+④ ≪梁書≫ 〈劉坦傳〉에 의거하건대 일찍이 湘州에 있었다고 한 것은 객으로 지냈던 것이다.
임지에 도착한 뒤에 관리를 선발해 관할 10개의 郡으로 보내서 백성을 징발하여 30여만 斛의 租米를 운송해 荊州와 雍州의 군대를 도우니, 이로 인해 군량이 부족하지 않았다.
注+⑤ 湘州는 長沙, 桂陽, 零陵, 衡陽, 營陽, 湘東, 邵陵, 始興, 臨賀, 始安 10개 군을 관할하였다.
3월에 장충이 병으로 卒하자 장군 薛元嗣가 장충의 아들 張孜, 内史 程茂 등과 함께 영성을 지켰다.
目
【目】 魏主(元恪)가 정사를 직접 관장하고 나서 측근들이 권력을 전횡하자, 元禧가 내심 불안해하여 왕비의 오라버니 李伯尙, 氐王 楊集始 등과 반란을 모의하였다.
마침 魏主가 성을 나가 北邙山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는데, 원희가 병사를 출동시키려 하다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晡時(오후 3시~5시) 무렵에 결국 해산하였다.
양집시가 나오고 나서 즉시 북망산으로 달려가 이를 고발하니, 魏主가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左中郎將 于忠이 말하기를 “신의 부친이 서울에서 지키고 있으니 굳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우충을 보내 서둘러 살펴보게 하였는데, 于烈이 이미 병사를 나누어 빈틈없이 대비하고 있었고, 우충에게 돌아가 아뢰게 하기를 “이들 무리가 미쳐 날뛴다 한들 염려할 것이 못 되니, 폐하께서는 辟除하시며 서서히 돌아오셔서 민심을 안정시키소서.”라고 하니, 魏主가 마침내 돌아왔다.
注+① 천자가 길을 나설 때면 ‘警’이라 일컫는데, 조심하고 엄숙히 할 것을 알리는 것이고, 들어올 때면 ‘蹕’이라 말하는데 행인들을 멈추게 하고 길을 정리하는 것이다.
우렬이 直閤將軍 叔孫侯를 보내 원희를 체포한 뒤 집에서 자살하도록 하고, 모든 가산을 高肇ㆍ趙脩의 집안과 중외의 백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魏主는 원희가 까닭 없이 모반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宗室들을 더욱 멀리하고 꺼렸다.
目
【目】 齊나라 涪陵王 蕭寶卷이 郢州를 구원하기 위해 軍主 吳子陽과 陳虎牙 등을 파견하였는데, 巴口에 주둔하였다.
注+① 陳虎牙는 陳伯之의 아들이다. ≪水經注≫에 “巴水는 廬江 雩婁縣 下靈山에서 발원하니, 또는 巴山이라 한다. 남쪽으로 흘러 江水로 유입되는데 이곳을 巴口라 한다.” 하였다.
6월에 西臺(蕭寶融)가 席闡文을 보내 蕭衍의 군사를 위로하고, 蕭穎冑 등의 의견을 전하여 소연에게 말하기를 “지금 長江의 양쪽 연안에 병사를 주둔하고, 군대를 합쳐 郢城을 포위하여 西陽과 武昌을 평정시켜 江州를 탈취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기회를 잃는 것이다. 차라리 北魏에게 구원병을 요청하느니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注+② 강릉이 서쪽에 있으므로 西臺라 말한 것이다.
소연이 말하기를 “漢口는 荆州ㆍ雍州와 길이 통하여 秦州ㆍ梁州를 제압할 수 있는 지역이어서 군량을 운반하고 물자를 저장하는 것이 마치 여기에 의지해 숨을 쉬는 것과 같으니, 병사를 동원해 漢口를 제압해서 여러 州와 연결시키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注+③ 漢水를 거슬러 올라가 漢中에 이르니, 秦州와 梁州 두 州의 刺史가 관할하는 곳이므로 제압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병사를 합쳐서 영성을 포위하고 다시 병사를 나누어 전진하게 되면 魯山의 적군이 반드시 沔水의 길을 끊어 우리의 목을 억누를 것이니, 이로 인해 양식을 운반하는 길이 막히면 군사들이 자연히 흩어질 터인데 어떻게 오래 버틸 수 있겠는가.
鄧元起가 3천의 병사를 이끌고 尋陽으로 쳐들어가려 하는데, 적들이 사세의 추이를 안다면 설득을 잘하는 선비 한 사람만 보내도 충분하겠지만,
注+④ 說(설득하다)는 음이 稅이다 만약 저들이 王師(西臺의 군사)에 저항한다면 3천 명의 병사가 함락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진하고 후퇴하는 데 모두 근거를 잃게 될 것이니, 그것이 옳은 일인지 잘 모르겠다.
注+⑤ 脫은 ‘혹시’이니, 脫이란 단언할 수 없다는 말이다. 距는 拒와 통용하여 쓰니, 저지한다는 뜻이다.
西陽과 武昌은 공격해서 바로 취할 수 있지만 취하고 나서 그곳을 지키려면 최소 1만 명 이상의 병사가 필요하고, 양식과 물자 또한 이에 걸맞아야 하는데 이것은 갑자기 마련할 수가 없다.
注+⑥ 稱(걸맞다)은 尺證의 切이다. 卒(갑자기)은 猝로 읽는다.
만약 東軍(蕭寶卷의 군사)이 서쪽으로 올라가서 만 명 정도로 성 하나를 공격하게 되면 두 성이 형세로 보아 서로 구원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군사를 나누어 구원하게 되면 머리와 꼬리가 모두 허약해질 것이고, 그렇다고 군사를 파견하지 않으면 고립무원의 성은 반드시 함락될 것이다. 한 성이 함락되면 흙이 무너지듯 차례로 무너져 대사를 그르칠 것이다.
만약 우리가 郢州를 함락시키고 강물을 따라 석권해 나가면 서양과 무창은 자연스레 무너질 것이다. 장부가 대사를 일으키는 것은 國運을 정돈하려 함이니,
注+⑦ “天步”는 天路(國運)이니, ≪詩經≫ 〈小雅 白華〉에서 “천운이 몹시 어렵구나.”라고 하였다. 몇 州의 병사를 가지고 하찮은 무리를 주벌하는 일은 강물을 쏟아 불을 끄는 격이니, 어찌 저들을 멸하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어찌 北面하여 오랑케(北魏)에게 구원병을 요청하여 천하에 나약한 모습을 보이려 하는가.
경은 우리를 위해 鎭軍將軍(소영주)께 보고하기를 ‘전진하여 공격하는 일은 오로지 우리에게 맡기고, 오로지 진군장군의 명성만 빌려 국면을 진정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라.”라고 하였다.
注+⑧ 蕭穎冑가 당시에 西臺의 尙書令이었는데 거기에 鎭軍將軍의 호칭을 더한 것이다.
오자양 등이 加湖에 진군하여 성으로부터 30리 떨어진 지점에 성루를 쌓아 견고하게 지켰다. 房僧寄가 병으로 죽자 무리들이 軍主 孫樂祖(손악조)를 추대하여 魯山을 대신 지키게 하였다.
目
【目】 齊나라 蕭衍이 王茂와 曹仲宗 등에게 물이 불어난 틈을 타서 加湖를 습격하게 하니, 가호에 있던 적군이 궤멸되었다. 그리하여 이를 바라보고 있던 郢城과 魯山 두 성의 기세가 꺾였다.
노산에 양식이 떨어져 夏口로 달아나려 할 때 소연이 그 도주로를 차단하자, 孫樂祖가 성을 가지고 항복하고, 程茂와 薛元嗣도 영성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영성이 처음 포위됐을 때에 士民 男女가 십만에 가까웠는데, 2백여 일 동안 성문을 닫고 지내느라 전염병이 유행하고 浮腫에 걸려 죽은 자가 열에 일고여덟에 달하였다.
注+① “流腫”은 독기가 퍼져 부어오른 것을 말한다.
정무와 설원사가 항복에 대해 논하며 張孜에게 글을 지어 소연에게 전하도록 하자, 張沖의 故吏인 房長瑜가 말하기를 “前任 使君(장충)의 충성이 하늘을 꿰뚫었으니 郎君(張孜)은 의당 한결같은 마음으로 굳게 지켜 아버지가 이룬 일을 이어야 하고,
注+② 前 使君은 張沖을 말한다. “畫一”은 ≪漢書≫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니, 蕭何가 法을 시행할 때 마치 하나의 획을 그은 듯 명확하였는데, 曹參이 그의 뒤를 잇고서 그대로 지켜 실추시키지 않으니, 여기서는 그대로 지켜서 실추시키지 않은 의미를 취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昭公 7년에 “그의 아버지가 장작을 쪼개놓았는데, 그 아들이 능히 짐 지지 못한다.”라고 했으니 房長瑜의 뜻은, 張孜가 마땅히 아버지가 이루어놓은 일을 지켜, 쪼개 놓은 장작을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天運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관복을 벗어〉 백성의 의복을 입고 천명을 기다렸다가 使君의 뒤를 따라 죽어야 합니다.
注+③ “下從”은 죽음을 말한다.
지금 여러 사람들의 계책을 따라 항복하게 되면 높은 산처럼 바라보는 郢州 백성들의 기대를 저버릴 뿐만 아니라 저들(蕭衍)도 받아들이지 않을까 우려됩니다.”라고 했지만 장자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注+④ ≪詩經≫ 〈小雅 車舝〉에 “높은 산을 우러러본다.” 하고, 그 주석에 “고상한 덕이 있으면 사모하여 우러러본다.” 하였다. 彼는 蕭衍을 말한다.
소연이 韋叡를 行郢府事로 삼아 죽은 자를 수습하고 살아 있는 자를 어루만져주자 영주 사람들이 마침내 안정을 되찾았다. 諸將들이 夏口에 주둔하려 하자, 소연이 승세를 타서 곧장 建康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張弘策과 庾域 역시 그에 동의하였다.
소연이 군사들에게 곧장 출발할 것을 명령해서, 장강을 따라 건강을 향해 갔는데, 장홍책이 연도의
, 포구, 촌락과 행군 중에 야영을 할 곳과 잠시 머물 곳을 미리 그려놓았는데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자세하였다.
目
【目】 崔慧景이 죽을 적에 그의 어린 아들 崔偃이 달아나 숨어서 죽음을 모면했는데,
의 정권이 세워지자 최언을 寧朔將軍으로 삼았다.
최언이 글을 올리기를 “신은 생각건대 高宗의 효자 충신이면서 昏主(蕭寶卷)의 亂臣 賊子는 江夏王(蕭寶玄)과 폐하, 그리고 先君(崔慧景)과 鎭軍將軍(蕭穎冑)입니다.
注+① 先臣은 崔偃의 아버지 崔慧景을 말한다. 鎭軍은 蕭穎冑를 가리킨다. 비록 성패의 결과는 달랐지만 추구한 목적은 같았습니다.
폐하께서 처음 지존의 자리에 오르셔서 하늘의 뜻에 부합하실 적에 천하 백성들의 억울함을 폐하께서 풀어주시리라 기대했습니다. 더구나 〈강하왕은〉 先帝의 아드님이고 폐하의 형이며, 그분이 지났던 길이 바로 폐하께서 그 길을 따름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어찌 백성들이 무식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 그들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注+② 옳지 않은 방법으로 남을 속이는 것을 罔이라 이른다.
그들이 만일 그 정황을 소상히 알게 되어 서로 이끌고 도망간다면 폐하께서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라고 했지만 이 일을 덮어두고 답이 없었다.
최언이 또다시 상소하기를 “근래에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강하왕의 억울함을 말씀드린 것은 감히 아버지와 자식의 친함으로 지극히 공평한 대의를 손상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성스러운 조정에서 그렇게 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미치광이 군주(蕭寶卷)가 아무리 미쳤다 해도 실제는 천자이고 강하왕이 아무리 어질다 해도 실제는 신하입니다.
先臣(최혜경)이 신하(강하왕)를 받들어 임금(소보권)을 거역한 것이 옳지 않다고 한다면 지금 정예 병사와 강한 군사들이
로 향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鎭軍將軍 臣 蕭穎冑와 中領軍 臣 夏侯詳은 모두 사직을 지키는 신하들로서, 그들 모두 先臣이 강하왕의 최측근이 되고서 왕실을 바로잡으려다 천명이 호응하지 않아 임금이 죽자 함께 죽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폐하를 위해 잠시의 틈을 내어 말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注+③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瞥(잠시)은 普滅의 切이니, “瞥然”은 잠시 보는 것이다.
알고도 말하지 않은 것은 충성하지 않은 것이고 몰라서 말하지 못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신의 말은 여기까지이니, 끓는 솥에 나아가 죽게 되기를 청합니다.
하지만 先臣의 충성은 식자들이 다 알고 있고 南史와 董狐 같은 史官의 직필은 천년을 기약할 수 있으니 어찌 폐하의 뜻을 기다려서 이들을 포폄할 것이 있겠습니까. 다만 소신의 간절한 마음은 폐하를 위해 고려한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자,
注+④ 南․董은 齊나라 南史와 晉나라 董狐를 말한다. 崔杼가 齊 莊公을 시해한 것을 두고 太史가 기술하기를 “崔杼가 자신의 군주를 시해하였다.”라고 기록하자 최저가 그를 죽였다. 그의 동생들이 이어서 기술하였다가 죽은 자가 2명이 되었고, 다른 동생이 또다시 기술하자 그제야 내버려두었다. 南史氏는 태사가 모두 죽었다는 말을 듣고 기술할 竹簡을 가지고 갔다가 사관이 이미 기술했다는 말을 듣고 이내 돌아갔다. 晉나라 趙盾(조돈)의 아우 趙穿이 晉나라 靈公을 시해했는데, 董狐는 조돈이 역적을 성토하지 않은 이유를 들어, “조돈이 임금을 시해하였다.”라고 적어 조정에 알렸다. 孔子가 말하기를 “동호는 옛날의 훌륭한 사관이며 그의 書法은 사실을 숨기는 법이 없었다.” 하였다.
齊主(蕭寶融)가 예우하는 조서로 답하였는데, 얼마 후 잡아들여 옥에 가둬 그를 죽였다.
目
【目】 예전에 齊나라 涪陵王 蕭寶巻이 陳伯之를 파견하여 江州에 진주하게 해서 吳子陽 등의 응원으로 삼았는데,
오자양 등이 패한 뒤에 蕭衍이 말하기를 “用兵은 반드시 실력에만 의지할 것은 없고 따라야 할 것은 위세와 명성이다. 지금 陳虎牙가 낭패를 당한 채 尋陽으로 도망가서 심양 사람들이 정리상 두려움에 처해 있을 것이므로 檄文을 전하는 것으로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이에 명하여 구속한 포로들을 수색해서 진백지의
蘇隆之를 찾아 그에게 후한 상을 주고, 그에게 진백지를 설득하게 하였는데, 그가 말을 들으면 사신을 보내 현지에서 江州刺史에 등용하겠다고 하였다.
注+① 卽은 나아감이다.
소융지가 돌아와 復命하였는데, 그가 비록 歸附를 허락하였으나 “대군이 갑자기 동쪽으로 내려와선 안 된다.”라고 하였다 하니,
소연이 말하기를 “진백지가 갈팡질팡하고 있으니 그가 미적거리는 틈을 타서 급히 진격해 압박하면 형세상 항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심양에 이르니, 진백지가
죄를 청하였다.
예전에 巴東에서 반란이 발생할 때 司馬 席恭祖가 동참하지 않음으로써 죽임을 당했는데,
注+② 席恭祖는 앞의 28권 齊나라 永明 8년(490)에서 席恭穆으로 썼다. 이때에 와서 그의 아들 席謙이 新蔡太守가 돼서 진백지를 따라 심양을 지키고 있다가
소연이 동쪽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르기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충정을 지켰으니, 죽음을 당할지언정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자, 진백지가 그를 죽였다.
注+③ 蕭子顯의 ≪南齊書≫ 〈州群志〉에 “江州에는 南新蔡郡이 있고 豫州에는 北新蔡郡이 있다.” 하였다.
소연이 진백지를 江州刺史로 삼고 진호아를 徐州刺史로 삼았다.
目
【目】 蕭衍이 江州와 郢州를 함락시킨 뒤에도 涪陵王 蕭寶巻이 예전처럼 말달리며 유희를 즐기고 있었는데, 소연의 군사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들을 모아 견고하게 지킬 계책을 세웠다.
소연이 曹景宗 등을 보내 江寧으로 나아가 주둔하게 하니,
注+① 沈約이 말하기를 “晉나라 武帝 太康 원년(280)에 秣陵을 나누어 臨江縣을 설치하고, 2년(281)에 江寧으로 이름을 바꿨으니 治所가 강가에 임한 것이다.” 하였다. 李居士가 新亭에서 정예 기병을 선발해 압박해왔다.
注+② 이해(501) 8월에 東昏侯가 太子 左率 李居士에게 摠督西討諸軍事로 삼아 新亭에 주둔하게 하였다. ≪金陵覽古≫에 “新亭은 江寧으로부터 10리 거리에 있다.” 하였다.
조경종이 힘껏 싸워 격파하고서 그대로 승세를 타고 전진하니 新亭城主 江道林이 병사를 이끌고 나와 싸우다가 생포당하였다.
소연이 新林에 도착하고서 呂僧珍을 보내 白板橋를 점거하였는데,
注+③ 陶弘景의 글에 의하면, 板橋는 당시 江寧縣의 경계에 속하였다. 이거사가 정예병 만 명을 이끌고 곧장 쳐들어와서 陣壘를 압박하였다.
그러자 여승진이 말하기를 “우리는 숫자가 적어 맞이해 싸울 수 없으니 활을 멀리 쏘지 말고 참호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힘을 합쳐 격파하자.”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이거사의 군사들이 모두 참호를 뛰어넘고 목책을 뽑으며 쳐들어오자 여승진이 병사를 나누어 성 위로 올라가 화살과 돌을 함께 발사하게 하고 자신은 기마병과 보병 3백 명을 이끌고 적의 배후로 출격하였다.
이때 성 위의 병사들도 또한 성벽을 넘어 내려와 안팎에서 협공하자 이거사가 패하여 도망갔다.
소연의 아우들은 모두 建康에서 몸을 빼서 도망 나와 소연의 군대에 나아갔다.
目
【目】 蕭穎冑는 蕭璝와 蔡道恭이 서로 대치한 채 결판나지 않는다고 하여 걱정과 울분 속에 卒하였다.
注+① 蕭穎冑는 蕭衍이 동쪽을 정벌하여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는데, 자신은 南康王(蕭寶融)을 도와 江陵에 머물며 가까이는 蕭璝를 제어하지 못한 채, 밖으로는 姦雄(소연)에게 굴복할 마음이 없고 안으로는 가까이 외적을 두고 있으니, 이것이 걱정과 울분을 낳아 병으로 발전한 이유이다. 夏侯詳이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雍州에서 병사를 징발하자 蕭憺이 병사를 이끌고 갔다.
蕭璝 등도 建康이 이미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리들이 두려워 뿔뿔이 흩어지자 魯休烈과 함께 모두 투항하였다.
하우상이 소영주의 죽음을 공표한 뒤 丞相으로 追贈하고 獻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에 뭇사람들의 기대가 모두 蕭衍에게 모아졌다.
하우상이 소담과 함께 국가의 주요 업무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하자, 조칙을 내려 하우상을 尙書僕射 荆州刺史로, 소담을 行府州事로 삼았다.
目
【目】 齊나라 崔慧景이 建康을 압박했을 때 涪陵王 蕭寶卷이 蔣子文神을 鍾山王으로 삼았었는데, 소연이 도착할 무렵에 다시 靈帝로 높인 뒤에 後堂으로 맞아들여 무당을 시켜서 기도하고 제사 지내게 하고 군사와 관련된 일을 모두 王珍國에게 맡겼다.
당시 성안의 무장한 병사들이 여전히 7만 명 정도였는데, 소보권이 언제나 궁전 안에서 말을 타고 출입하고, 금과 은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孔雀과 翡翠의 깃털로 장식하였으며, 낮에 자고 밤에 일어나기를 일상처럼 하였다.
注+① 孔․翠는 孔雀과 翡翠이다.
적군의 포위망이 완성된 뒤, 여러 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금전을 더욱 아껴 상을 주려 하지 않고 궁 안의 조각한 금은 장식과 갖가지 보물들을 일상보다 갑절이나 더 마련토록 재촉하니, 민심이 원망하고 나태해져 모두 빨리 도망가기를 바랐지만 누구도 감히 먼저 행하지 못하였다.
茹法珍과 梅蟲兒가 소보권에게 권유하기를 “대신들이 마음을 쓰지 않아 포위를 풀지 않게 하고 있으니 모두 처단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진국과 그의 부장 張稷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소보권을 시해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後閤舍人 錢彊에게 밤에 雲龍門을 열게 하고서
注+② 張稷은 張瓌의 아우이다. 後閤舍人은 江左에서 설치한 관직으로, 宮殿의 後閤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왕진국과 장직이 병사를 이끌고 전각 안으로 들어가니, 御刀를 맡는 시종인 豐勇之가 안에서 호응하였다.
注+③ 豊은 姓이다.
이때 소보권이 含德殿에 머물면서 생황으로 연주하는 노래를 짓고 있었는데 병사가 들어와 참수하였고, 장직이 尙書僕射 王亮 등을 불러 백관들에게 문서에 서명하게 하고 黄油布로 소보권의 머리를 감싼 뒤 國子博士 范雲 등을 시켜 石頭城으로 보냈다.
注+④ 王亮은 王瑩의 從弟이다. 黃絹에 기름을 칠하면 빗물을 막을 수 있으니 이를 黃油라 한다. 황유로 물건을 감싸면 겉에서 속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소연이 쉽게 살펴볼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右衛將軍 王志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라고 하고 마당의 나뭇잎을 따서 손으로 비벼 먹은 뒤 혼미함을 가장하여 서명하지 않으니
注+⑤ 挼는 奴禾의 切이니 두 손으로 비비는 것이다. 소연이 서명한 종이에 왕지의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가상하게 여겼다.
目
【目】 蕭衍이 范雲과 친분이 있으므로 바로 그를 머물려두어 막료로 삼았다. 王亮이 조정에 있을 때 애매모호함으로 〈蕭寶卷의〉 용납을 받았는데, 소연이 新林에 이르자 백관들이 사잇길로 사람을 보내 환영의 뜻을 보냈으나 왕량만 홀로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
성안에서 나오는 이들이 대부분 겁박을 당하였는데, 楊公則이 직접 부하들을 이끌고 나와 〈관료와 백성들을〉 친히 호송하였다.
소연이 張弘策을 시켜서 먼저 들어가 궁중을 정돈하고 府庫와 圖籍들을 봉인하게 하였다. 당시 성안에 갖가지 보물들이 쌓여 있었지만 장홍책이 부하들을 엄격히 다스려 털끝만큼도 침범하는 일이 없게 하고 潘妃와 茹法珍ㆍ梅蟲兒ㆍ王咺之 등 41명을 체포하여 모두 관리에게 넘겼다.
潘妃玉兒
그리고 宣德太后의 조칙으로 소보권을 追廢하여 東昏侯로 삼고 소연을 大司馬 錄尚書事로 삼고 晉나라 武陵王 司馬遵이 承制한 故事를 따라서, 백관들이 경하를 표했고 왕량을 長史로 삼았다.
注+① 晉나라 安帝 元興 3년(404)에 桓玄이 패하자, 황제를 핍박해 서쪽으로 올라가게 한 뒤에 劉裕가 密詔를 받았다고 칭하고 武陵王 司馬遵의 예에 따라 承制하고 백관을 거느리고 일을 처리하였다.
소연이 閱武堂으로 들어와 주둔하고서 대사면령을 내리고 〈소보권이 제정한〉 혼란을 야기하는 제도와 어긋난 세금과 지나친 형벌과 과도한 徭役을 모두 폐지하도록 하였다.
注+② 閱武堂은 建康子城 북쪽에 있다.
반비는 國色이어서 소연이 그를 남겨두려 하여 領軍將軍 王茂에게 자문을 구하자, 왕무가 말하기를 “齊나라를 멸망시킬 자는 이 사람이니 그대로 두면 바깥에서 말이 날까 우려됩니다.”라고 하니 여법진과 함께 죽이고 궁녀 2,000명은 장사들에게 나눠 주었다.
目
【目】 建康이 평정된 뒤 蕭衍이 豫州刺史 李元履에게 동쪽 지역을 순시하고 위로하게 하고서 분부하기를 “袁昻은 도덕과 청렴을 갖춘 집안으로 대대로 충절한 사람이 배출되었다.
천하 사람들이 반드시 모두 그를 용납해야 할 것이니 군대의 위세로 능욕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注+① “道素”는 道義가 있으면서 결백한 것이다. 이원리가 도착하여 소연의 뜻을 알렸으나 원앙이 또한 항복을 청하지 않고 문을 연 채 수비군을 철수시켰다.
馬仙琕이 臺城을 지키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고 울면서 장수와 군사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았기에 의리상 항복할 수 없지만 그대들은 모두 부모가 있으니 나는 충신이 되고 그대들은 효자가 되는 것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병사들을 모두 보내 항복하게 했지만 나머지 군사 수십 명이 남아 문을 걸어 잠근 채 굳게 지켰다.
이윽고 적병이 쳐들어오자 마선변이 사졸들에게 활시위를 가득 당겨 대응하게 하니 적병들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해가 저물 무렵에 마선변이 활을 내던지며 말하기를 “여러 군사들은 다만 와서 나를 체포해가라. 난 의리상 항복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군사들이 그를 체포한 뒤〉 檻車에 태워 石頭城으로 보내니 소연이 그를 풀어주고, 원앙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함께 들어오게 한 뒤 이르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두 義士를 보인다.”라고 하고서 그들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目
【目】 王僧粲이 湘州刺史라 자칭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長沙를 습격하여 長沙城으로부터 1백여 리쯤 떨어진 곳에 이르렀을 때 長沙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려 하자 行事 劉坦이 배들을 모두 모아 불사르고 군사들을 보내 왕승찬을 막았으나 여러 번의 싸움에서 불리함에 처하였다.
前 湘州鎭軍 鍾玄紹가 날짜를 정해 성곽을 넘어 왕승찬에게 호응하려 하였는데, 유탄이 그 계책을 미리 듣고 일부러 모른 채 하며 밤늦게까지 송사 일을 보고 성문도 닫지 않음으로써 의혹하게 만들자 종현소가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튿날 새벽 종현소가 찾아오자 유탄이 그 까닭을 물었다. 유탄이 오랫동안 머물게 하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비밀리에 친위병사를 보내 그의 집 안에 있는 서신을 압수하여 일의 전말을 밝혀낸 뒤 그 자리에서 참수하고 문서를 불태웠다.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추궁하지 않으니 州와 郡들이 마침내 안정을 찾았다.
建康이 평정되고 楊公則이 湘州로 돌아오자 왕승찬 등이 흩어져 달아났다. 양공칙이 몸가짐을 반듯하게 하고 청렴하고 신중하며 형벌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적게 부과하자 얼마 뒤에 상주의 인구가 거의 그 예전으로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