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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이에 앞서 江東에서는 建康과 三吳ㆍ荆州ㆍ郢州ㆍ江州ㆍ湘州ㆍ梁州ㆍ益州에서만 錢을 사용하였고, 그 나머지 州와 郡에서는 곡식과 비단을 섞어서 사용하였으며, 交州ㆍ廣州에서는 오로지 금과 은을 화폐로 사용하였다.
梁나라가 五銖錢과 女錢을 주조하면서부터 두 종류를 함께 통용하도록 하고, 여러 가지 옛날 錢은 쓰지 못하게 하였다.
注+① 杜佑가 말하기를, “梁 武帝가 錢을 주조하였는데, 동전에 구멍[好]을 뚫고 둘레[肉]를 만들고 구멍과 둘레에 테두리[周郭]를 만들어 ‘五銖’의 문양을 새겼다. 무게는 2銖 3絫 2黍이며, 100文은 무게가 1근 2냥이다. 또 따로 주조한 錢은 둘레의 테두리를 제거하여 ‘公式女錢’이라 하였으니, 지름이 1寸이고 ‘五銖’의 문양을 새겼다. 무게는 새로 주조한 五銖錢과 같았으며, 두 가지 錢을 함께 통용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또 兩柱錢을 만들었다. 연간에 다시 鐵錢을 주조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사적으로 錢을 주조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물가가 급등하여 교역을 하는 사람들은 심지어 수레에 錢을 실어 다시 숫자를 계산하지 않았다.
또 어떤 지역에서는 80文을 100文으로 치기도 하였고, 어떤 지역에서는 70文을 100文으로 치기도 하였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90文을 100文으로 치기도 하였다.
梁主(蕭衍)가 이를 근심하여 詔書를 내렸으나 사람들이 따르지 않으므로, 錢陌(돈을 세는 단위)이 더욱 줄어들어 말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35文을 100文으로 쳤다.
注+② ≪漢書≫ 〈食貨志〉를 살펴보면 ‘仟佰之得’의 註에 “仟은 千錢을 말하고, 佰은 百錢을 말한다. 지금 풍속에 百錢을 ‘一佰’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佰은〉 ‘陌’과 통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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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李賁이 다시 무리를 이끌고 獠族 지역에서 나와 典澈湖에 주둔하니, 많은 병사들이 꺼려하여 호수 입구에 머무르면서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注+① 典澈湖는 新昌郡의 경계에 있을 것이다.
陳霸先이 말하기를, “우리 군대는 출병한 지가 오래이며 원조도 없으니, 남의 뱃속에 들어온 것과 같아 만약 전투를 하여 승리하지 못하면 어찌 온전히 살기를 바라겠는가.
지금 저들이 여러 차례 도망친 덕에 사람들의 마음이 굳건하지 않으니, 바로 함께 나아가 백 번이라도 죽음을 무릅쓰고 온 힘을 다해 빼앗아야 하는데, 아무런 까닭 없이 머물러 있으니, 제때에 해야 할 일을 놓치게 된다.”라고 하였으나, 諸將이 모두 호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밤 강물이 갑자기 7丈이나 불어나 호수 안으로 쏟아지자, 진패선이 자신의 휘하 병력을 이끌고 물길을 타고 앞서 나가고, 많은 군대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함께 앞으로 나가니, 이분의 무리들이 크게 무너져 다시 獠族 지역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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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蕭綽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검소하여 항상 喪亂이 평정되지 않은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겼고, 어진 사람과 능력 있는 사람을 추천하고 선발하여 여러 가지 政務에 기강이 바로 섰는데, 宇文泰가 마음을 미루어 그를 신임하였다.
우문태가 외부로 나갈 일이 있을 때면 항상 미리 서명한 빈 종이를 소작에게 주어서 처분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일에 따라 집행하도록 하였다.
소작이 항상 말하기를, “나라를 위하는 길은 마땅히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사람들을 사랑하고, 엄격한 스승처럼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注+① 嘗은 ≪資治通鑑≫에 ‘常’으로 되어 있다.
늘 公卿들과 논의할 때면 낮부터 밤까지 일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처럼 쉽게 처리하였는데, 피로가 누적되어 병이 나서 죽었다.
우문태가 매우 애통해하면서 公卿에게 말하기를, “蕭尙書는 평생토록 청렴하고 사양하였는데 내가 그의 평소 뜻을 온전히 해주려고 하니, 보통 사람들이 다 이해하지 못할까 우려되오. 만일 후하게 諡號를 내리면 또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마음에 어긋남이 있을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소?”라고 하였다.
注+② ≪列子≫ 〈楊朱〉篇을 살펴보면, “老子가 말하기를, ‘명성은 실질의 손님인데, 悠悠한 사람은 명성을 쫓으면서 그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하였는데, 그 注에 “悠悠한 사람은 헛된 명성을 구하는 데 전념하면서 그칠 줄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令史 麻瑶가 순서를 뛰어넘어 나아가 말하기를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는 것이 그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注+③ ≪唐六典≫에 이르기를 “魏晉時代 이후로 令史의 직임에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늘 경시되었으며, 齊ㆍ梁ㆍ後魏(北魏)ㆍ北齊에서 비록 품계에 들었으나, 더욱 미미해졌다.”라고 하였다. 우문태가 그의 말을 따라 베로 싼 수레 한 대에 싣게 하고서 武功에 돌아가 장사 지내도록 하였다.
注+④ 蕭綽은 武功 사람이니, 향리로 돌려보내 장사 지내게 한 것이다.
우문태와 여러 公들이 걸어서 전송하면서 땅에 술을 부으며 말하기를,
注+⑤ 酹(붓다)는 盧對의 切이니, 제사를 마치고 술을 땅에 붓는 것이다. “그대는 나의 마음을 알아주었고 나는 그대의 뜻을 알아주어 함께 천하를 평정하려고 하였는데, 갑자기 나를 버리고 가니 어찌한단 말인가.”라고 하고, 이어서 소리를 내어 슬피 울다가 손에서 술잔이 떨어지는 줄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