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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0)

자치통감강목(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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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午年(190)
경오년庚午年(190)
나라 효헌황제 초평孝獻皇帝 初平 원년元年이다. 봄 정월에 관동關東(함곡관 이동函谷關 以東)의 각 주군州郡이 군사를 일으켜 동탁董卓을 토벌할 적에 원소袁紹를 추대하여 맹주盟主로 삼았다.
紹自號車騎將軍하여 與河內太守王匡으로 屯河內하고 韓馥留鄴하여 給軍糧하고 孔伷 屯潁川하고
원소袁紹가 스스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이라 칭하여 하내태수 왕광河內太守 王匡과 함께 하내河內에 주둔하고 한복韓馥업현鄴縣에 머물러 군량을 공급하고 공주孔伷영천潁川에 주둔하고
劉岱, 張邈 邈弟廣陵太守超 山陽太守袁遺 濟北相鮑信 與橋瑁, 曹操 俱屯酸棗하고 袁術 屯魯陽하니 衆各數萬注+遺, 紹之從弟.이라
유대劉岱장막張邈과 장막의 아우 광릉태수 장초廣陵太守 張超산양태수 원유山陽太守 袁遺제북상 포신濟北相 鮑信교모橋瑁조조曹操와 함께 산조酸棗에 주둔하고 원술袁術노양魯陽에 주둔하니, 병력이 각각 수만 명이었다.注+원유袁遺원소袁紹종제從弟이다.
豪傑 多歸心袁紹者로되 鮑信 獨謂操曰 君略 不世出하니 殆天之所啓乎인저
호걸들 중에 원소에게 진심으로 귀부歸附하는 자가 많았으나 포신만은 홀로 조조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지략은 세상에 좀처럼 나오지 않는 것이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열어준 바일 것이다.” 하였다.
동탁董卓홍농왕弘農王(유변劉辯)을 시해하였다.
동탁董卓이 아뢰어 태위 황완太尉 黃琬사도 양표司徒 楊彪를 면직시키고는 왕윤王允사도司徒로 삼고, 성문교위 오경城門校尉 伍瓊상서 주비尙書 周毖를 죽였다.
議大發兵以討山東한대 尙書鄭泰曰 夫政 在德이요 不在衆也니라
동탁董卓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산동山東 지방을 토벌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상서 정태尙書 鄭泰가 말하기를 “정사는 에 달려 있고 병력의 많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였다.
不悦曰 如卿此言이면 兵爲無用邪 泰曰 非謂其然也 以爲山東不足加大兵耳
이에 동탁이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방금 이 말한 것과 같다면 군사는 쓸모없다는 것인가.” 하자, 정태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러하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산동山東 지방은 굳이 큰 병력을 동원하여 토벌할 것이 못 된다고 이른 것일 뿐입니다.
明公 出自西州하여 少爲將帥하여 閑習軍事 袁本初 公卿子弟 生長京師注+本初, 紹字.하고
명공明公서주西州에서 나와서 연소할 적에 장수가 되어 군대의 일에 익숙하지만 원본초袁本初(원소袁紹)는 공경公卿의 자제로 경사京師에서 생장하였고注+본초本初원소袁紹이다.,
張孟卓 東平長者 坐不闚堂注+孟卓, 邈字. 坐不闚堂, 言愛惜身命也. 堂高遠地, 闚視恐墜墮, 卽坐不垂堂之意.하고 孔公緒 清談高論으로 噓枯吹生注+公緖, 伷字. 枯者噓之使生, 生者吹之使枯, 言談論有所揚也.이라
장맹탁張孟卓(장막張邈)은 동평군東平郡후중厚重장자長者로서 에 단정히 앉아 함부로 위험한 곳을 엿보지 않았고注+맹탁孟卓장막張邈이다. “좌불규당坐不闚堂”은 몸과 목숨을 아낌을 말한 것이다. 이 높으면 그 귀퉁이(처마)가 지면地面과 멀어서 엿봄에 떨어질까 두려우니, 이는 바로 의 뜻이다., 공공서孔公緒(공주孔伷)는 청담清談고론高論에 능한 자로서 건조한 것은 입김을 불어넣어 생기 있게 하기도 하고, 생기가 있는 것은 숨을 불어서 건조하게 하기도 합니다.注+공서公緖공주孔伷이다. 〈“허고취생噓枯吹生”은〉 건조한 것에 입김을 불어넣어 생기가 나게 하기도 하고 생기가 나는 것을 불어서 건조하게 하기도 하는 것이니, 이는 담론에 억양하는 바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竝無軍旅之才하니 臨鋒決敵 非公之儔也注+臨鋒決敵, 謂臨兵鋒而與敵人決勝負也. 況王爵不加하여 尊卑無序하여 不肯同心共膽하여 與齊進退
그러나 세 사람 모두 군사軍事에 관한 재주가 전혀 없으니, 칼 끝에 임하여 적과 승부를 결단하는 것은 과 대등한 자가 아닙니다.注+임봉결적臨鋒決敵”은 병봉兵鋒(병기의 뾰족하고 예리한 부분)에 임하여 적과 승부를 결단함을 이른다. 더구나 저들은 조정의 관작을 받지 않아 존비尊卑에 차서가 없어서 심지心志담력膽力을 합하여 진퇴進退를 함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且山東 承平日久하여 民不習戰하니 天下所畏者 無若幷涼之人與羌胡義從이어늘 而明公 擁之以爲爪牙하니
또한 산동山東 지방은 태평한 지가 오래되어서 백성들이 전쟁에 익숙하지 못하니, 천하가 두려워하는 바는 병주幷州양주涼州의 병사와 강족羌族호족胡族의종義從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명공明公이 이들을 보유하여 조아爪牙로 삼고 있으니,
譬猶驅虎兕以赴犬羊이요 鼓烈風以掃枯葉이니 誰敢禦之注+兕, 序姊切. 似牛, 一角而靑色, 身重千斤, 角重百斤.리오
비유하자면 범과 무소를 몰아서 개와 양에게 달려가게 하고 열풍烈風을 일으켜서 마른 잎을 쓸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감히 이를 막겠습니까.注+(무소)는 서자序姊이다. 소와 비슷한데 뿔이 하나이고 가죽은 푸른색이며, 몸의 무게는 1,000근이고 뿔의 무게는 100근이다.
無事徵兵以驚天下하고 使患役之民으로 相聚爲非하여 棄德恃衆 自虧威重也니라 乃悦이러라
아무런 일도 없는데 군대를 징발하여 천하를 놀라게 하고 부역을 근심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모여 나쁜 짓을 하게 하여, 을 버리고 병력의 많음을 믿는 것은 스스로 위엄과 권세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동탁이 이에 기뻐하였다.
旣而 又以山東兵盛이라하여 欲遷都以避之할새 表河南尹朱儁爲己副하다
】 이윽고 동탁董卓은 또 산동 지방의 군대가 강성하다고 해서 천도遷都하여 이들을 피하고자 하였는데, 표문表文을 올려 하남윤 주준河南尹 朱儁을 자기의 부관副官으로 삼았다.
使者召拜한대 辭不受하고 因曰 國家西遷이면 必孤天下之望하여 以成山東之釁하리니 臣不知其可也注+孤, 負也.로라
사자使者가 주준을 불러 관직을 임명하자, 주준이 사양하여 받지 않고 인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국가가 서쪽(장안長安)으로 천도하면 반드시 천하 사람들의 바람을 저버려서 산동 지방과 틈이 생기게 될 것이니, 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습니다.”注+는 저버림이다.
大會公卿議之하니 楊彪曰 關中殘破하여 都雒已久어늘 今無故捐宗廟, 棄園陵하면 恐百姓驚動하여 必有糜沸之亂注+糜沸, 如糜粥之沸也. 詩 “如沸如羹”.이라
동탁이 공경公卿들을 크게 모아 이를 의논하였는데, 양표楊彪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중關中(장안長安)이 잔파殘破되어 낙양雒陽에 도읍을 정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이제 아무런 까닭 없이 종묘宗廟원릉園陵을 버리면 아마도 백성들이 크게 놀라고 동요하여 반드시 죽이 끓는 것처럼 소란하여 난리가 발생할 것입니다.注+미비糜沸’는 죽이 끓는 듯한 것이다. ≪시경詩經≫ 〈대아 탕大雅 蕩〉에 “끓는 물과 같고 끓는 국과 같다.” 하였다.
天下 動之至易하고 安之甚難하니 惟明公 慮焉하라 作色曰 公 欲沮國計邪
천하를 동요시키기는 지극히 쉽지만 안정시키기는 매우 어려우니, 부디 명공明公께서는 이 점을 생각하십시오.” 이에 동탁이 낯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이 국가의 대계를 저지하고자 하는가.” 하자,
黃琬曰 此 國之大事 楊公之言 得無可思아하니 不答하고 以災異 奏免琬, 彪等하고 以王允爲司徒하다
황완黃琬이 말하기를 “이는 국가의 대사입니다. 어찌 양공楊公의 말씀에 생각할 만한 점이 없겠습니까.” 하니 동탁이 대답하지 않고 재이災異가 있음을 구실로 삼아 상주上奏하여 황완과 양표 등을 면직시키고 왕윤王允사도司徒로 삼았다.
伍瓊, 周毖固諫遷都한대 大怒曰 卓 初入朝 二公 勸用善士 相從이어늘 而諸君到官 擧兵相圖하니
오경伍瓊주비周毖가 천도에 대해서 한사코 간하자, 동탁董卓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처음 조정에 들어왔을 적에 두 이 선량한 선비를 등용할 것을 권하였으므로 내가 그 말을 따랐는데, 이 사람들이 관직에 부임하자 군사를 일으켜 나를 제거할 것을 도모하였다.
二君 賣卓이니 何用相負오하고 收斬之하니 彪, 琬 惶恐謝罪하니라
이는 그대 두 사람이 나를 배반한 것이지, 내가 어찌 그대들을 저버린 것이겠는가.” 하고는 이들을 체포하여 참형에 처하였다. 이에 양표楊彪황완黃琬이 몹시 두려워하여 동탁에게 사죄하였다.
동탁董卓개훈蓋勳(갑훈)을 불러 의랑議郞으로 삼고 황보숭皇甫嵩성문교위城門校尉로 삼았다.
蓋勳 爲京兆尹하고 左將軍皇甫嵩 將兵三萬하여 屯扶風하다
개훈蓋勳경조윤京兆尹이 되고 좌장군 황보숭左將軍 皇甫嵩이 3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서 부풍扶風에 주둔하였다.
密與嵩으로 謀討卓이러니 素怨嵩하여 徵爲城門校尉하여 欲因殺之하다
갑훈이 은밀히 황보숭과 함께 동탁董卓을 토벌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동탁은 평소 황보숭을 원망하여 그를 불러 성문교위城門校尉를 삼고 이를 빌미로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將行 長史梁衍 說嵩曰 卓 寇掠京邑하고 廢立從意하니 今徵將軍 大則危禍 小則困辱이라
황보숭이 장차 길을 떠나려고 할 적에 장사 양연長史 梁衍이 황보숭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동탁이 경사京師를 범하여 노략질을 자행하고 제멋대로 황제를 폐위시키고 옹립하였는데, 그가 지금 이제 장군을 부르니, 크게는 위험과 가 있을 것이고 작게는 곤욕을 당할 것입니다.
今卓 在雒陽하고 天子來西하시니 以將軍之衆으로 迎接至尊하여 奉令討逆하여 袁氏逼其東하고 將軍迫其西하면 此成禽也리라
지금 동탁이 낙양에 있고 천자가 서쪽(장안長安)에 오시니, 장군의 많은 병력으로 지존至尊(천자)을 영접하고 명령을 받들어 역적을 토벌해서 원씨袁氏가 그 동쪽을 압박하고 장군이 그 서쪽을 압박하면 이는 바로 동탁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不從而就徵하니 以衆弱不能獨立이라하여 亦還京師하다
그러나 황보숭은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부름에 나아가니, 갑훈은 병력이 약하기 때문에 독립할 수 없다고 하여 또한 경사京師로 돌아갔다.
】 3월에 동탁董卓장안長安으로 천도遷都하고 낙양洛陽의 궁궐과 사당을 불태우고 황제들의 을 파내었다. 거가車駕(황제皇帝)가 서쪽으로 옮겨갔다.
董卓 收諸富室하여 以罪惡誅之하고 没入其財物하니 死者不可勝計
동탁董卓이 낙양성 안의 부호富豪들을 잡아들여 그들에게 죄악罪惡을 뒤집어씌워 주살하고 그 재물들을 몰수하니, 이에 죽은 자들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悉驅徙其餘民數百萬口於長安할새 歩騎驅蹙하여 更相蹈藉하고 飢餓宼掠하여 積屍盈路러라
그리고 남은 백성 수백만 명을 모두 몰아서 장안長安으로 옮길 적에 보병과 기병이 백성을 몰아 핍박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서로 밟히고 깔리며, 굶주리고 노략질을 당하여 백성들의 시신이 길에 가득하였다.
自留屯罼圭苑中하고 悉燒宮廟, 官府, 居家하니 二百里內 無復鷄犬注+居家, 居民之家也.이러라
동탁은 스스로 필규원罼圭苑(필규원) 가운데에 주둔해 있으면서 궁궐과 사당과 관부, 거주하는 백성들의 집을 모두 불태우니, 200리 안에는 닭과 개조차도 없었다.注+거가居家”는 거주하는 백성들의 집이다.
又使呂布 發諸帝陵及公卿冢墓하여 收其珍寳하다
여포呂布로 하여금 황제들의 능과 공경公卿들의 무덤을 파내어 그 속에 있던 진귀한 보물들을 거두어들이게 하였다.
三月 帝至長安하니 董卓 未至 朝政大小 皆委之王允하다
】 3월에 황제가 장안에 이르렀는데 동탁董卓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정의 크고 작은 정사를 모두 왕윤王允에게 위임하였는데,
外相彌縫하고 內謀王室하여 甚有大臣之度하니 自天子及朝中 皆倚允하고 屈意承卓하니 亦雅信焉이러라
왕윤이 밖으로는 조정의 부족하거나 빠뜨린 부분을 보완하고 안으로는 황실을 위해 도모해서 자못 대신大臣풍도風度가 있으니, 천자로부터 조정 안의 신하들까지 모두 왕윤을 의지하였다. 그리고 왕윤이 뜻을 굽혀 동탁을 받드니, 동탁 또한 평소 그를 신임하였다.
殺太傅袁隗하고 滅其家하다
동탁董卓태부 원외太傅 袁隗를 죽이고 그 집안을 멸족하였다.
◑長沙太守孫堅 擧兵討卓하니 하여 表堅領豫州刺史하다
장사태수 손견長沙太守 孫堅이 군사를 일으켜 동탁을 토벌하니, 장군 원술將軍 袁術남양南陽을 점거하고서 표문表文을 올려 손견으로 예주자사豫州刺史를 겸하게 하였다.
孫堅 起兵하여 殺荆州刺史王叡하고 前至南陽하니 已數萬人이라
손견孫堅이 군사를 일으켜 형주자사 왕예荆州刺史 王叡(왕예)를 죽이고 전진하여 남양南陽에 이르니, 병력이 이미 수만 명이었다.
殺太守張咨하고 至魯陽하여 與袁術合兵하니 由是 得據南陽하여 表堅行破虜將軍, 領豫州刺史하다
태수 장자太守 張咨를 죽이고 노양魯陽에 이르러 원술袁術과 병력을 연합하니, 원술이 이로 말미암아 남양南陽을 점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표문表文을 올려 손견을 행파로장군行破虜將軍으로서 예주자사豫州刺史를 겸하게 하였다.
與官屬으로 會飲於魯陽城東이러니 董卓歩騎數萬 卒至하니 方行酒談笑하고 整頓部曲하여 無得妄動케하다
손견이 관속들과 노양성 동쪽에서 모여 술을 마셨는데, 동탁董卓의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이 갑자기 몰려오니, 손견은 막 술잔을 돌리며 담소하고 부곡部曲(부대)를 정돈하여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後騎漸益이어늘 徐罷坐하고 導引入城하여 乃曰 向堅所以不卽起者 恐兵相蹈藉하여 諸君 不得入耳니라
뒤에서 몰려오는 기병이 점점 더 많아지자, 손견이 서서히 술자리를 파하고 사람들을 인도하여 성으로 들어가서 마침내 말하기를 “방금 전 내가 즉시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군사들이 동요해 서로 밟히고 깔려 여러분이 성 안으로 들어올 수 없을까 염려하였을 뿐이었다.” 하였다.
卓兵 見其整하고 不敢攻而還하다
동탁의 군대는 손견의 부대가 정돈된 것을 보고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유표劉表형주자사荆州刺史로 삼았다.
寇賊縱横하여 道路梗塞하니 表單馬入宜城注+宜城縣, 屬南郡, 本鄢, 惠帝三年改名宜城.하여 請南郡名士蒯良, 蒯越하여 與之謀曰
】 당시에 도적이 도처에서 횡행하여 도로가 막히니, 유표劉表가 필마로 의성宜城에 들어가서注+의성현宜城縣남군南郡에 속하니, 본래 (언) 땅이었는데, 전한 혜제前漢 惠帝 3년(B.C.192)에 의성宜城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남군南郡명사名士괴량蒯良(괴량)과 괴월蒯越을 청하여 함께 상의하기를
今江南宗賊 甚盛하여 各擁衆不附注+宗賊, 謂宗黨共爲賊.하니 若袁術因之 禍必至矣 吾欲徵兵호되 恐不能集하노니 其策焉出
“지금 강남江南종적宗賊(종족끼리 패거리 지은 도적)이 매우 강성하여 각각 병력을 보유하고서 귀부歸附하지 않으니注+종적宗賊종당宗黨이 함께 도적이 된 것을 이른다., 만약 원술袁術이 이들을 이용한다면 가 반드시 당장 닥쳐올 것이다. 내가 군사를 징발하고자 하나 모을 수 없을까 두려우니,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 하는가?” 하자,
越曰 袁術 驕而無謀하고 宗賊帥多貪暴하여 爲下所患하니 若使人示之以利 必以衆來
괴월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술은 교만하고 무모하며 종적宗賊의 우두머리들은 대부분 탐욕스럽고 포학하여 아랫사람들의 근심거리가 되니, 만약 사람을 시켜서 이익으로 보여주면 반드시 무리를 데리고 올 것입니다.
使君 誅其無道하고 撫而用之하면 一州之人 有樂存之心하여 聞君威德하고 必襁負而至矣리라
사군使君께서 그중에 무도한 자를 주살하고 어루만져서 쓰면 한 의 모든 사람들이 살아남은 것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어서 의 위엄과 덕망을 듣고는 반드시 강보襁褓(강보)로 아이를 싸서 등에 업고 올 것입니다.
兵集衆附어든 南據江陵하고 北守襄陽이면 荆州八郡 可傳檄而定이니 公路雖至 無能爲也注+郡國志, 荊州部南陽ㆍ南郡ㆍ江夏ㆍ零陵ㆍ桂陽ㆍ長沙ㆍ武陵七郡. 漢官儀, 以章陵足爲八郡. 公路, 袁術字.리라
군사가 모이고 무리가 귀부歸附하거든 남쪽으로 강릉江陵을 점거하고 북쪽으로 양양襄陽을 지키면 형주荆州의 여덟 격문檄文만 돌리고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니, 원공로袁公路(원술袁術)가 비록 쳐들어오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注+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는 형주荊州부속部屬(소속된 고을)은 남양南陽, 남군南郡, 강하江夏, 영릉零陵, 계양桂陽, 장사長沙, 무릉武陵 등 일곱 인데, ≪한관의漢官儀≫에는 장릉章陵을 넣어서 여덟 으로 만들었다. 공로公路원술袁術이다.
表曰 善타하고 乃使越 誘宗賊帥하니 至者十五人이어늘 皆斬之而取其衆하고 遂徙治襄陽注+荊州刺史, 本治武陵漢壽. 襄陽縣, 屬南郡.하여 鎮撫郡縣하니 江南 悉平注+荊部在江南者, 長沙ㆍ武陵ㆍ零陵ㆍ桂陽四郡也.하다
이에 유표가 “좋다.” 하고 마침내 괴월로 하여금 종적宗賊의 우두머리들을 유인하게 하였는데, 이른 자가 55명이었다. 이들을 모두 죽이고서 그 무리를 빼앗고 마침내 치소治所양양襄陽으로 옮겨서注+형주자사荊州刺史는 본래 무릉武陵한수漢壽치소治所로 삼았다. 양양현襄陽縣남군南郡에 속하였다. 군현郡縣을 진무하니, 강남江南이 모두 평정되었다.注+형주荊州부속部屬으로 강남江南에 있는 것은 장사長沙, 무릉武陵, 영릉零陵, 계양桂陽 등 네 이다.
曹操與卓兵으로 戰于滎陽이라가 不克하여 還屯河內하다
조조曹操동탁董卓의 군대와 형양滎陽(형양)에서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여 하내河內로 돌아가 주둔하였다.
袁紹等諸軍 畏董卓之彊하여 莫敢先進이어늘 曹操曰 擧義兵以誅暴亂하여 大衆已合하니 諸君何疑
원소袁紹 등의 제군諸軍동탁董卓의 강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진격하는 이가 없자, 조조曹操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의병義兵을 일으켜 포학한 자와 난을 일으킨 자들을 주벌하려 해서 큰 병력이 이미 모였으니, 여러분은 무엇을 의심하는가.
向使董卓 倚王室하고 據舊京하여 東向以臨天下 雖以無道行之라도 猶足爲患이어니와
만약 동탁董卓이 황실의 권위에 의지하고 옛 경사京師인 낙양을 점거하여 동쪽으로 향해서 천하에 임하였더라면 비록 무도한 짓을 행하더라도 오히려 큰 근심거리가 될 수 있지만,
今焚燒宮室하고 劫遷天子하여 海內하여 不知所歸하니 此天亡之時也 一戰而天下定矣라하고
지금 궁실을 불태우고 천자를 겁박하여 도읍을 서쪽으로 옮겨서 온 천하 사람들이 이 때문에 크게 놀라 동요하여 누구에게 귀의해야 할지를 알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하늘이 동탁을 멸망시키는 시기인 것이다. 한 번 싸우면 곧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
遂引兵西하여 將據成皐할새 至滎陽하여 遇卓將徐榮하여 與戰이라가 操兵敗하여 爲流矢所中하고 馬亦被創이라
조조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장차 성고成皐를 점거하려고 하였는데, 형양滎陽에 이르러 동탁의 장수 서영徐榮을 만나 그와 싸우다가 조조의 군대가 패하여 조조가 유시流矢에 맞고 말 또한 창상創傷을 입었다.
從弟洪 以馬與操曰 天下 可無洪이어니와 不可無君이라하더라
종제 조홍從弟 曹洪이 자기가 타던 말을 조조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천하에 저 조홍은 없어도 괜찮지만 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遂夜遁還酸棗하니 諸軍十餘萬 日置酒高會하고 不圖進取어늘
조조曹操가 마침내 밤중에 달아나 산조酸棗로 돌아오니, 제군諸軍 십여만 명이 날마다 술자리를 베풀고 크게 모여 잔치하고 나아가 동탁董卓을 취할 것을 도모하지 않았다.
操責讓之하고 因爲謀曰注+爲, 去聲. 下竊爲同. 諸君 聴吾計하여 使勃海 引河內之衆하여 臨孟津注+勃海, 謂袁紹也. 先與王匡屯兵於河內.하고
조조가 이들을 꾸짖고 인하여 이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계책을 제시하였다.注+(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니, 아래에 “절위竊爲”의 도 똑같다. “그대들이 나의 계책을 따라서 발해태수 원소勃海太守 袁紹로 하여금 하내河內의 병력을 인솔하여 맹진孟津에 임하게 하고注+발해勃海원소袁紹를 이른다. 원소袁紹가 먼저 왕광王匡과 함께 하내河內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酸棗諸將 守成皐, 據敖倉하며 塞轘轅, 大谷하여 全制其險注+大, 音泰. 括地志, 太原郡大谷縣, 有大谷山.하고
산조酸棗에 주둔해 있는 장수들이 성고成皐를 지키고 오창敖倉을 점거하며 환원轘轅(환원)과 대곡大谷(태곡)을 봉쇄하여 그 험요險要한 지역을 완전히 공제控制하고注+이다. ≪괄지지括地志≫에 “태원군 대곡현太原郡 大谷縣대곡산大谷山이 있다.” 하였다.,
使袁將軍으로 率南陽之軍하여 軍丹, 析하고 入武關하여 以震三輔注+此謂袁術也. 丹水及析縣, 皆屬弘農郡.호되
원장군袁將軍(원술袁術)으로 하여금 남양南陽의 군대를 거느려 단수현丹水縣석현析縣에 주둔하고 무관武關에 들어가서 장안長安삼보三輔 지방을 진동하게 하되注+원장군袁將軍”은 원술袁術을 이른다. 단수현丹水縣석현析縣은 모두 홍농군弘農郡에 속하였다.
皆高壘深壁하여 勿與戰하고 益爲疑兵하여 示天下形勢하여 以順誅逆이면 可立定也리라
모두 보루와 성벽을 높이 쌓고서 적들과 싸우지 말고 의병疑兵을 더욱 만들어 천하의 의로운 군대가 크게 모인 형세를 드러내 보여서 순리順理로 반역하는 자를 주벌하면 즉시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이다.
今兵以義動이어늘 持疑不進하여 失天下望하니 竊爲諸君恥之하노라
지금 군대가 대의명분으로 출동하였는데 주저하고 의심하며 진격하지 아니하여 천하 사람들을 실망시키니, 나는 그대들을 위하여 부끄러워하는 바이다.”
邈等 不能用하니 操乃還屯河內注+從袁紹也.러니 頃之 酸棗食盡衆散하니 劉岱殺橋瑁하다
그러나 장막張邈 등은 조조의 계책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러자 조조는 마침내 하내河內로 돌아와 주둔하였는데注+〈“조내환둔하내操乃還屯河內”는 조조曹操가〉 원소袁紹를 따라간 것이다. 그 뒤에 오래지 않아 산조酸棗의 식량이 다하여 무리가 흩어지니, 유대劉岱교모橋瑁를 죽였다.
원소袁紹장홍臧洪으로 청주자사靑州刺史를 겸하게 하였다.
靑州刺史焦和 亦起兵하여 務及諸將西行注+務進兵與酸棗諸將相及也.호되 不爲民人保障하여 兵始濟河 黃巾 已入其境이라
청주자사 초화靑州刺史 焦和 또한 군대를 일으켜 제장諸將과 함께 서쪽으로 가려고 힘썼으나注+〈“무급제장서행務及諸將西行”은〉 군대를 전진시켜 산조酸棗제장諸將과 서로 만나려고 힘쓴 것이다. 백성들의 보장保障(바람막이)이 되지 못하여, 군대가 처음으로 황하黃河를 건너자 황건적黃巾賊이 이미 그 경내에 들어와 있었다.
靑州 財富兵盛호되 和每望寇奔北하고 好卜筮, 信鬼神이라
청주靑州는 재화가 풍부하고 병력이 강성했는데 초화는 항상 구적寇賊을 멀리서 바라만 보고 도망쳤고, 복서卜筮를 좋아하고 귀신鬼神을 믿었다.
入見其人이면 清談干雲이로되 出觀其政이면 賞罰淆亂하니 州遂蕭條하여 悉爲丘墟러라
그리하여 사람들이 관부官府에 들어가 그 사람(초화)을 보면 청담淸談이 구름에 닿을 정도로 고상하였으나 나와서 그 정사를 살펴보면 상과 벌을 시행함이 뒤섞이고 어지러우니 〈그가 다스리는〉 경상景狀이 마침내 쓸쓸하여 모두 빈 터가 되었다.
頃之 病卒이어늘 袁紹使廣陵功曹臧洪으로 領靑州以撫之하다
초화가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으니, 원소袁紹광릉군廣陵郡 장홍臧洪으로 하여금 청주자사靑州刺史를 겸하게 하여 백성을 진무鎭撫하게 하였다.
】 여름 4월에 유우劉虞태부太傅로 삼았다.
先是 幽部應接荒外하여 資費甚廣注+荒外, 言荒服之外也.하니 歲常割靑冀賦調二億有餘以足之注+賦, 謂賦斂. 調, 謂調發.러니 處處斷絶하여 委輸不至로되
】 이보다 앞서 유주幽州황복荒服(먼 지역)의 밖에 있는 나라들을 응접하여 비용이 매우 많아注+황외荒外”는 황복荒服의 밖을 말한다. 해마다 항상 청주靑州기주冀州부조賦調(부세賦稅) 2억 남짓을 떼어 보조하게 하였는데注+부렴賦斂을 이르고, 調조발調發을 이른다., 이때에 곳곳마다 도로가 단절되어서 전운轉運이 이르지 못하였다.
而虞敝衣繩屨하고 食無兼肉하며 務存寛政하고 勸督農桑하며
그러나 유주목 유우幽州牧 劉虞는 해진 옷을 입고 짚신을 신으며 식사에 두 가지의 고기반찬이 없었고, 힘써 관대한 정사를 보존하고 농업과 잠업을 권장 독려하였으며,
開上谷胡市之利하고 通漁陽鹽鐡之饒注+上谷, 舊有關市, 與胡人貿易. 漁陽, 舊有鹽官ㆍ鐵官.하니 民悦年登하여 穀石三十이라
상곡上谷에서 호시胡市를 열고 어양漁陽의 풍부한 소금과 철을 유통하게 하니注+상곡上谷에는 옛적에 관시關市가 있어서 호인胡人과 무역을 하였다. 어양漁陽에는 옛적에 염관鹽官철관鐵官이 있었다., 백성들이 기뻐하고 풍년이 들어 곡식이 풍부하여 매 마다 곡식의 값이 30일 뿐이었다.
靑徐士庶 避難歸虞者 百餘萬口어늘 虞皆收視溫恤하고 爲安立生業하니 流民 皆忘其遷徙焉注+爲, 去聲.이러니
청주靑州서주徐州사인士人과 백성들이 피난하여 유우에게 돌아가 의지한 자가 백여만 명에 달하였는데, 유우가 모두 거두어 보살피고 따뜻하게 구휼하였으며 그들을 위하여 생업을 안정시키고 확립시켜주니, 유민流民이 모두 자신들이 타향으로 옮겨와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되었다.注+(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至是 拜太傅로되 而道路壅塞하여 命不得通하다
이때에 이르러 태부太傅에 임명되었으나 도로가 막혀서 조정의 명령이 통하지 못하였다.
司空荀爽하다
사공 순상司空 荀爽하였다.
見卓忍暴滋甚하여 必危社稷하고 其所擧辟 皆取才略之士하여 將共圖之하고
순상荀爽동탁董卓의 잔인하고 포학함이 더욱 심하여 반드시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할 것을 예견하고, 사람을 조정에 천거하여 등용할 적에 모두 재주와 지략이 있는 선비를 취하여 장차 이들과 함께 동탁을 제거할 것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며,
亦與王允及卓長史何顒等으로 爲內謀러니 病薨하다
또한 왕윤王允 및 동탁의 장사 하옹長史 何顒(하옹) 등과 함께 은밀히 동탁을 제거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이때 마침 병으로 하였다.
동탁董卓오수전五銖錢을 폐기하고 다시 소전小錢을 주조하였다.
悉取雒陽及長安銅人, 鍾虡, 飛廉, 銅馬之屬하여 以鑄하니 由是 貨賤物貴하여 穀石至數萬錢이러라
낙양雒陽장안長安에 있는 , , , 의 따위를 모두 가져다가 을 주조하니, 이 때문에 의 값어치는 떨어지고 물건값은 올라서 곡식 한 섬의 값이 수만 에 이르렀다.
省孝和以下廟號하다
효화황제孝和皇帝 이하 황제들의 묘호廟號를 제거하였다.
孝和廟號穆宗이요 孝安號恭宗이요 孝順號敬宗이요 孝桓號威宗이러니 至是 蔡邕 議以爲宜皆省去라한대 從之注+禮, 祖有功而宗有德, 和帝以下無德可宗, 故去之.하다
】 처음에 효화황제孝和皇帝묘호廟號목종穆宗이고 효안황제孝安皇帝의 묘호는 공종恭宗이고 효순황제孝順皇帝의 묘호는 경종敬宗이고 효환황제孝桓皇帝의 묘호는 위종威宗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채옹蔡邕이 건의하여 마땅히 묘호를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하자, 황제가 채옹의 의견을 따랐다.注+에 “〈묘호를 정함에 있어서〉 ” 하였는데, 화제和帝 이하의 황제들은 이라고 칭할 만한 이 없었기 때문에 묘호를 제거한 것이다.
以公孫度爲遼東太守하다
공손탁公孫度요동태수遼東太守로 삼았다.
度到官하여 以法誅滅郡中名豪大姓百餘家하니 郡中 震慄이라
공손탁公孫度관사官司에 부임하여 법률로 안에 있는 유명한 호족과 대성大姓 백여 주멸誅滅하니, 온 의 사람들이 크게 놀라 매우 두려워하였다.
乃東伐高句驪하고 西擊烏桓하고 分遼東하여 爲遼西, 中遼郡하여 各置太守하고
이에 동쪽으로 고구려高句驪를 정벌하고 서쪽으로 오환烏桓을 공격하고, 요동遼東을 나누어 요서군遼西郡중료군中遼郡을 만들어 각각 태수太守를 두고,
越海收東萊諸縣하여 置營州刺史하고 自立爲遼東侯, 平州牧하여 立漢二祖廟하고
바다를 건너 동래東萊의 여러 을 점령하여 영주자사營州刺史를 두었으며, 스스로 서서 요동후 평주목遼東侯 平州牧이 되어 나라의 고조高祖(유방劉邦)와 세조世祖(유수劉秀)의 사당을 세우고,
承制하여 郊祀天地하고 籍田하고 乘鸞路하고 設旄頭, 羽騎注+羽騎, 羽林騎也.하다
하여 교외郊外에서 천지天地에 제사를 지내고 를 거행하였고 를 타고 우기羽騎를 두어 호위하게 하였다.注+우기羽騎우림군羽林軍의 기병이다.
역주
역주1 孝獻皇帝初平元年……推袁紹爲盟主 : “이는 특별히 쓴 것이니, ‘추대하여 맹주로 삼았다.’라고 쓴 것은 장차 袁紹를 깊이 책망하려고 한 것이다.[特筆也 書推爲盟主 將以深責紹也]다” ≪書法≫
역주2 卓弑弘農王 : “군주를 폐위함에 ‘시해’라고 쓴 것이 董卓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군주를 폐위함에 시해라고 쓴 것이 20번이다. 弘農王과 南朝 宋나라의 零陵王(司馬德文), 營陽王(劉義符)과 南朝 齊나라의 汝陰王(劉準), 海陵王(蕭昭文), 涪陵王(蕭寶卷)과 南朝 梁나라의 巴陵王(蕭寶融)과 北魏의 王 元恭, 安定王(元朗), 東海王(元曄)과 北齊의 中山王(元善見), 南朝 梁나라의 군주 蕭綱, 西魏의 군주 元欽, 北周 宋公(元廓), 南朝 陳나라의 江陰王(蕭方智), 北齊의 濟南王(高殷), 隋나라의 介公(宇文闡), 後梁의 濟陰王(李柷), 後唐의 鄂王(李從厚), 後漢의 湘陰公(劉贇)이다.[廢君書弑 自董卓始 終綱目 廢君而弑之者 二十 弘農王 宋零陵王 營陽王 齊汝陰王 海陵王 涪陵王 梁巴陵王 魏王恭 安定王 東海王 齊中山王 梁主綱 魏主欽 周宋公 陳江陰王 齊濟南王 隋介公 後梁濟陰王 後唐鄂王 漢湘陰公]” ≪書法≫ “弘農王이 폐위되어 군주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이전의 史書는 모두 ‘殺’이라고 썼는데 ≪資治通鑑綱目≫에 이르러서 비로소 명칭을 바로잡아 ‘시해하였다’라고 썼는바, 이것은 그가 미미한 존재라 하여 君臣의 의리를 폐하지 않은 것이니, 그렇다면 역적 董卓의 죄가 더욱 드러난 것이다.[弘農旣廢 已不成乎君 前史皆以殺爲文 至綱目 始正名書弑者 不以其微而廢君臣之義 則逆賊之罪益著矣]” ≪發明≫
역주3 卓奏免太尉琬司徒彪……殺城門校尉伍瓊尙書周毖 : “면직할 적에 그 연유를 쓴 적이 있지 않았는데 ‘董卓이 아뢰었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동탁이 전횡한 것이다. 이 때문에 〈前漢 말기〉 王鳳이 전횡하였을 적에는 陳湯을 從事中郞으로 삼은 것에 대하여 ‘왕봉이 아뢰었다.’라고 썼고, 동탁이 전횡하였을 적에는 太尉 黃琬과 司徒 楊彪를 면직한 것에 대하여 ‘동탁이 아뢰었다.’라고 쓴 것이다. 伍瓊과 周毖를 죽인 자는 동탁이고 王允으로 사도를 삼은 자 또한 동탁이니, ‘以’자를 쓴 것은 왕윤을 비난한 것이 아닌가? 왕윤이 동탁에게 등용되었으나 끝내 동탁을 주살하였으니, ‘以’자를 쓴 것은 왕윤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灌嬰이 齊나라와 연합하자 ‘呂産이 시켰다.’라고 쓴 것은 바로 관영을 인정한 것이고, 왕윤이 呂布로 하여금 동탁을 주살하게 하자 ‘卓以(동탁이 왕윤을 사도로 삼았다.)’라고 쓴 것은 바로 왕윤을 인정한 것이다.[免未有書所自者 書卓奏 何 專也 是故王鳳專 則以陳湯爲從事中郞 書鳳奏 董卓專 則免太尉琬司徒彪 則書卓奏 殺伍周者卓也 則以王允者 亦卓也 書以 非譏允歟 允爲卓所以而卒能誅卓 書以 所以予允也 故灌嬰能與齊連和 則書産使者 乃所以予嬰 王允能使布誅卓 則書卓以者 乃所以予允也]” ≪書法≫
역주4 (簾)[廉] : 저본에는 ‘簾’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集覽正誤≫에 의거하여 ‘廉’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 (枯)[抑] : 저본에는 ‘枯’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抑’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堂에……않는다[坐不垂堂] : 이는 ≪史記≫ 권117 〈司馬相如列傳〉에 보이는 말로 이에 대해 司馬貞의 ≪索隱≫에는 “처마의 기와가 떨어져서 사람을 맞힐까 두려워해서이다.[畏簷瓦墮中人]”와 “垂는 가장자리이니, 堂에서 떨어질까 두려워해서이다.[垂 邊也 恐墮墜之也]”라고 한두 가지 해설이 실려 있다. 또 ≪漢書≫ 권49 〈袁盎傳〉의 ‘千金之子不垂堂’에 대한 顔師古의 注에 “이는 부유한 사람의 자식은 자기 몸을 스스로 아낌을 말한 것이다. 垂堂은 堂의 바깥쪽 가장자리에 앉음을 이르니,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은 堂에서 떨어질까 두려워해서이다.[言富人之子則自愛也 垂堂 謂坐堂外邊 恐墜墮也]”라고 하였다.
역주7 卓徵蓋勳爲議郞 皇甫嵩爲城門校尉 : “蓋勳과 皇甫嵩 두 사람은 忠賢인데 어찌하여 ‘董卓이 불렀다.’라고 썼는가. ‘동탁이 불렀다.’라고 쓴 것은 두 사람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긴 것이다.[二子忠賢也 則曷爲書卓徵 書卓徵 爲二子惜也]” ≪書法≫ “皇甫嵩은 功名이 평소 드러나서 몸이 上將이 되어 손아귀에 강성한 군대를 쥐고 있었는데, 皇室이 傾覆되고 역적이 흉포한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하여 大義를 천하에 창도하지 못하고 마침내 손을 묶고 부름에 나아가서 역적을 섬기는 것을 마음에 달갑게 여겼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范曄의 의논에 ‘그가 하늘을 감동시킬 만한 큰 사업을 버리고 匹夫의 작은 신의를 지키려다가 끝내 위태로운 지경에서 낭패하여 智士의 웃음거리가 되었다.’라고 한 평이 훌륭하다. 더구나 이때에 蓋勳이 모의를 올리고 梁衍이 계책을 바쳤는데도 황보숭이 모두 버리고서 돌아보지 않고는 후일에 이르러 마침내 헛된 말과 强辯으로 역적과 맞섰으니, 이것은 또한 너무 늦지 않은가. ≪資治通鑑綱目≫에서 ‘董卓이 황보숭을 불러 城門校尉로 삼았다.’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황보숭이 몸을 굽혀 역적에게 나아간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資治通鑑≫에서는 다음해(192) 5월에 ‘황보숭을 車騎將軍으로 삼았다.’라고 쓰고, 8월에 ‘황보숭을 태위로 삼았다.’라고 쓰고, 12월에 ‘태위 황보숭이 면직되었다.’라고 썼는데,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이를 모두 삭제하여 기록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를 비루하게 여긴 것이다.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면 말할 만한 것이 못 되니, 그렇다면 志士와 仁人이 去就를 정할 때에 어찌 또한 대처할 바를 알지 않을 수 있겠는가.[皇甫嵩功名素著 身爲上將 手握強兵 坐視帝室傾覆 逆賊鴟張 不能唱大義於天下 乃束手就召 甘心事賊 何哉 善乎范曄之論 謂其舍格天之大業 就匹夫之小諒 卒狼狽虎口 爲智士笑者也 況是時蓋勳進謀 梁衍獻策 嵩皆棄之不顧 至他日 乃以虗詞强辯 與逆賊抗 不亦晚乎 綱目書卓徵嵩爲城門校尉 則嵩屈身就賊之恥 不可掩矣 是以通鑑明年五月 書以嵩爲車騎將軍 八月書以嵩爲太尉 十二月書太尉嵩免 綱目皆棄而不錄 蓋鄙之也 鄙之則不足言矣 然則志士仁人 其於去就之際 盍亦知所處哉]” ≪發明≫
역주8 卓遷都長安……車駕西(還)[遷] : “李傕(이각)과 曹操에 대해 모두 ‘황제를 某處로 옮겼다.’라고 쓴 것은 핍박하여 옮긴 것인데,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황제가 스스로 옮긴 것으로 썼는가. 위에서 ‘董卓이 천도하고 궁궐과 사당을 불태우고 황제들의 陵을 파내었다.’라고 쓴 뒤에 ‘車駕(獻帝)가 서쪽으로 옮겨갔다.’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황제가 그의 핍박과 위협을 받아 처량한 情狀이 저절로 나타난다. ‘董卓이 천도하였다.’라고 쓴 것은 전횡을 나타낸 말이고, ‘車駕가 서쪽으로 옮겨갔다.’라고 쓴 것은 옮겨가지 않을 수 없음을 나타낸 말이다.[李傕曹操 皆書遷帝于某 逼遷也 此則曷爲以自遷書 其上書卓遷都 燒宮廟 發諸陵 然後書車駕西遷 則其逼脅凄涼之狀自見矣 書卓遷都 專辭也 書車駕西遷 不得不遷之辭也]” ≪書法≫ “孟子가 말씀하시기를 ‘백성이 가장 귀하고 社稷이 그 다음이고 군주는 가벼운 존재이다.’라고 하셨는데, 지금 董卓이 백성을 노략질하고 수백만의 인구를 강제로 몰아 옮겨서 죽은 자들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資治通鑑綱目≫에서 다만 궁궐과 사당, 황제들의 陵 및 車駕에 대해서만 쓰고 백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春秋≫의 法은 군주가 직접 장수가 되었을 적에는 ‘군대를 거느렸다.’라고 쓰지 않고, 군주가 사로잡혔을 적에는 ‘군대가 大敗하였다.’라고 쓰지 않으니, 이는 군주가 군사들보다 더 중하기 때문이다. ≪禮記≫ 〈檀弓 下〉에 ‘그 先人의 집(사당)에 불이 났을 경우 사흘 동안 곡을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당에 불이 나면 반드시 곡을 하니, 이는 神主가 봉안된 곳이기 때문이다. 맹자의 말씀은 당시의 군주가 소와 양처럼 함부로 사람(백성)을 쓰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을 가장 중한 것으로 삼고 군주와 社稷이 그 다음이라고 말씀하셔서 장차 백성들이 피와 살이 터지고 깨지는 한 때의 禍를 구제하고자 하신 것이다. ≪춘추≫의 글과 禮經의 법으로 말하면 명칭을 바루고 분수를 정하여 만세의 법이 되었다. 그러므로 반드시 군주와 종묘를 중한 것으로 삼고 백성이 그 다음이 되니, 이는 세상을 다스리는 크고 떳떳한 법도로 고금에 걸쳐 바꿀 수 없는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은 이에 대하여 ≪춘추≫와 예경의 뜻을 깊이 얻었다. 그러므로 그 書法이 이와 같은 것이다. 오직 이 의리가 행해지지 못한 뒤에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에 가탁하여 군주와 사직을 가볍게 버리고 돌아보지 않으면서 그 배반한 사실을 스스로 文飾(美化)하는 경우가 있으니, 오랑캐에게 항복하고 역적에게 항복하면서 城을 온전하게 보존한 것으로 명분을 삼는 자와 같은 경우이다. 군자가 있지 않으면 어느 누가 이것을 바로잡겠는가. 아, 슬프다.[孟子曰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今董卓虜掠人民 驅徙數百萬口 死者不可勝計 然綱目止書宮廟諸陵及車駕而不及民 何哉 春秋之法 君將 不言帥師 君獲 不言師敗績 以君重於師也 禮稱有焚其先人之室 則三日哭 故廟災則必哭之 以神主之所安也 蓋孟子之言 爲時君牛羊用人而莫之恤 故以民爲貴 君社稷次之 將以救一時糜爛之禍 若夫春秋之書 禮經之典 正名定分 爲萬世法 故必以君宗廟爲重 而民次之 此則經世之大常 亘古今而不可易者也 綱目於此 深得春秋禮經之旨 故其書法如此 惟此義不行 然後有託以爲民之故 輕棄君親社稷而不顧 以自文其背畔之實 如降虜降賊以全城爲名者 不有君子 誰能正之 噫]” ≪發明≫
역주9 (還)[遷] : 저본에는 ‘還’으로 되어 있으나, ≪御批資治通鑑綱目≫에 의거하여 ‘遷’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0 將軍袁術 據南陽 : “‘袁術이 南陽을 점거하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원술이 전횡함을 죄준 것이다.[書據 何 罪專也]” ≪書法≫
역주11 以劉表爲荆州刺史 : “董卓이 황제를 시해한 이후로는 사람들을 불러서 관직을 임명할 적에 모두 ‘卓以’라고 썼는데, 여기에서 ‘卓以’를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동탁이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自卓弑以來 徵拜皆書卓以 此其不書卓以 何 卓在外也]다” ≪書法≫
역주12 [五] : 저본에는 ‘五’자가 없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3 (襄)[震] : 저본에는 ‘襄’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震’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4 袁紹以臧洪領靑州 : “‘紹以’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袁紹가 전횡하였기 때문이다.[書紹以 何 專也]다” ≪書法≫
역주15 功曹 : 漢代 지방 屬吏로 郡과 縣에 모두 존재하였다. 이는 太守와 縣令이 辟召를 통해 직접 임명한다. 특히 군현에는 役職에 따라 曹를 두었는데, 戶曹, 田曹, 倉曹, 法曹, 兵曹 등 諸曹를 가리킨다. 이 諸曹 이외에 특별한 직책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功曹이다. 공조는 여러 屬吏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속리 중 지위가 가장 높으며 군현의 내외를 관장하는 속리에 대한 인사권을 가졌다. 특히 後漢 후기에는 太守나 縣令이 공조에게 주요 정무를 맡기는 경향이 많았다.(安作璋․熊鐵基, ≪秦漢官制史稿≫, 齊魯書社, 1984)
역주16 夏四月 以劉虞爲太傅 : “이때에 도로가 막혀서 조정의 명령이 통하지 못하였는데 어찌하여 이것을 썼는가. 劉虞를 인정한 것이다. 이 때문에 진실로 인정할 만하면 비록 관직을 제수하는 군주의 명령이 도달하지 않았더라도 쓰는 것이다.[於是道路壅塞 命不得通 何以書 予虞也 是故苟可予也 雖君命未達 書之]다” ≪書法≫
역주17 卓壊五銖錢 更鑄小錢 : “光武帝 建武 15년(39)에 ‘다시 五銖錢을 유통시켰다.’라고 쓴 뒤로부터 이때까지 153년 동안 이것을 고친 적이 있지 않았는데, 董卓이 처음으로 폐기하였다. 여기에서 ‘동탁이 오수전을 폐기하였다.’라고 썼으니, 이것은 동탁을 죄준 것이다.[自建武十五年書復行五銖 至是一百五十三年 未之有改也 卓始壊之 書曰卓壊五銖錢 罪卓也]다” ≪書法≫
역주18 銅人 : 金人, 金狄, 銅狄이라고도 하는바, 구리로 주조한 인형이다. ≪史記≫ 권6 〈秦始皇本紀〉에 “온 천하의 병기를 거두어서 함양에 모으고 이것을 녹여 종틀과 금인 12개를 만들었는데, 무게가 각각 천 石이었다. 이것을 궁정 가운데에 두었다.[收天下兵 聚之咸陽 銷以爲鍾鐻金人十二 重各千石 置廷宮中]” 하였다.
역주19 鍾虡(종틀) : ≪資治通鑑≫에 대한 胡三省의 注에 “종거는 동으로 만든다.[鍾虡 以銅爲之]”라고 하였고, 또 “虡는 사슴의 머리에 용의 몸이니 神獸이다. ≪說文解字≫에 말하였다. ‘종과 북의 받침은 맹수의 형상으로 장식을 한다.’[虡 鹿頭龍身 神獸也 說文 鍾鼓之跗 以猛獸爲飾也]”라고 설명하였다.
역주20 飛廉 : 본래 동물의 명칭으로 여기에서는 飛廉觀에 있던 비렴의 동상을 가리킨다. ≪三輔黄圖≫ 권5 〈觀〉에 “비렴관은 上林에 있었는바, 武帝 元封 2년(B.C.109)에 만들었다. 비렴은 神禽으로 바람을 부를 수 있는 동물이다. 몸은 사슴과 비슷하고, 머리는 참새와 같으며, 뿔이 있고 뱀의 꼬리에 무늬는 표범과 같다. 무제가 명하여 구리로 그 형상을 주조하여 관의 위에 두고 인하여 관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飛廉觀在上林 武帝元封二年作 飛廉 神禽 能致風氣者 身似鹿 頭如雀 有角而蛇尾 文如豹 武帝命以銅鑄置觀上 因以爲名]”라고 하였다.
역주21 銅馬 : ≪後漢書≫ 〈董卓列傳〉에 대한 李賢의 注에 “明帝 永平 5년(62)에 長安에서 飛廉과 銅馬를 맞이해서 上西門 밖에 두고 平樂館이라고 명명하였다. 동마는 東門京이 만든 것으로 金馬門 밖으로 가져온 것이다.[明帝永平五年 長安迎取飛廉及銅馬 置上西門外 名平樂館 銅馬則東門京所作 致於金馬門外者也]”라고 하였다. 동문경은 무제 때에 말을 잘 알아본 사람이다. ≪後漢書≫ 〈馬援列傳〉에 “孝武皇帝 때에 말을 잘 알아보는 동문경이라는 자가 銅馬를 주조하는 법을 바쳤는데, 詔書를 내려 魯班門 밖에 이 말을 세우고 노반문의 이름을 금마문으로 바꾸었다.[孝武皇帝時 善相馬者東門京 鑄作銅馬法獻之 有詔立馬於魯班門外 則更名魯班門曰金馬門]”라고 하였다. 동마법은 말의 골격에 맞추어 구리로 주조한 모형인바, 바로 동마이다.
역주22 功이……칭한다 : 이 내용은 ≪史記≫ 〈孝文本紀〉에 보이는바, 裴駰의 ≪史記集解≫에 인용한 應劭의 말에 “처음으로 천하를 취한 분을 祖라 하니 高帝를 高祖라고 칭한 경우가 바로 이것이고, 처음으로 천하를 다스린 분을 宗이라 하니 文帝를 太宗이라 칭한 경우가 바로 이것이다.[始取天下者爲祖 髙帝稱髙祖是也 始治天下者爲宗 文帝稱太宗是也]” 하였다.
역주23 承制 : ‘制’는 황제의 명령인바, 이는 본래 ‘황제의 뜻을 받들어 행한다’는 뜻인데, 후대에는 引伸하여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편의대로 일을 시행하거나 황제를 대신하여 명령을 내리는 것을 가리키나, 여기서는 황제의 名義를 빌려 자기 마음대로 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역주24 籍田 : 藉田으로도 쓰는바, 백성에게 농업을 장려하고 宗廟에 쓰는 粢盛을 마련하기 위하여 군주가 직접 나아가 경작하는 親耕田으로 천자는 1,000畝, 제후는 100畝이다. ≪詩經≫ 〈周頌 載芟〉의 序에 대한 鄭玄의 箋에 “籍이란 말은 빌림이니, 백성의 힘을 빌려서 田地를 다스리기 때문에 이를 籍田이라고 한다.[籍之言借也 借民力治之 故謂之籍田]”라고 설명하였다.
역주25 鸞輅 : 고대에 천자가 타는 수레를 가리킨다. ≪呂氏春秋≫ 권1 〈孟春紀〉에 “천자는 鸞輅를 타고 蒼龍에 멍에를 맨다.[乗鸞輅 駕蒼龍]”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高誘의 注에 “輅는 수레이다. 鸞鳥는 衡에 있고 和는 軾에 있어서 鸞과 和의 울리는 소리가 서로 응하여 조화로웠다. 후세에는 다시 이것을 가져올 수 없어서 銅(구리)으로 주조하여 만들고 金으로 장식하였으니, 이를 일러 鸞輅라 한다.[輅 車也 鸞鳥在衡 和在軾 鳴相應和 後世不能復致 鑄銅爲之 飾以金 謂之鸞輅也]”라고 설명하였다. 衡은 수레 끌채 앞부분의 가로대이고, 軾은 수레 몸통의 앞부분에 있는 가로대인데 수레를 탄 사람이 잡아서 의지할 수 있도록 설치한 나무이다. 鸞과 和는 모두 수레에 다는 방울로 그 소리를 통해 수레의 운행을 절제하는 것이다. 鸞은 鑾으로도 쓰는바 그 소리가 鸞鳥와 비슷하다고 하여 鸞을 鸞鳥라 칭하기도 한다.
역주26 旄頭 : 旄騎라고도 하는바, 古代에 皇帝의 儀仗 중에 先驅를 담당한 일종의 騎兵이다.

자치통감강목(10)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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