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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主命侍中羊侃하여 與淵明으로 堰泗水於寒山하여 以灌彭城호되 俟得彭城하여 乃進軍與侯景掎角이러니
堰成에 東魏徐州刺史王則嬰城固守어늘 侃勸淵明乘水攻之한대 不從이라 諸將與議軍事에 淵明不能對하여 但云 臨時制宜而已러라
東魏遣大都督高岳하여 救彭城할새 欲以潘樂爲副한대 陳元康曰 樂緩於機變하여 不如慕容紹宗하고 且先王之命也라하고 乃以紹宗으로 爲東南道行臺하여 與岳樂偕行이라
景聞紹宗來하고 叩鞍有懼色曰 誰教鮮卑兒解遣紹宗來오 若然이면 高王定未死邪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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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高歡은 성품이 진중하고 세밀하여 하루 종일 엄숙하게 있으니, 사람들이 그 속을 헤아릴 수가 없었고, 군대를 지휘할 때에는 엄숙하였으며, 〈남의 의견을〉 듣고 판단할 때 밝게 살폈다. 평소에 검소한 것을 숭상하여 검이나 말안장과 말굴레를 금이나 옥으로 장식하지 않았다.
병이 위독해지자 世子 高澄에게 말하기를 “侯景이 河南을 전적으로 다스린 지가 14년이라 늘 펄펄 날뛰어 발호할 뜻을 지니고 있다. 돌아보건대 나는 잘 길러줄 수 있지만, 네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지금 사방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갑작스레 喪을 공표하지 말거라.
庫狄干과 斛律金은 모두 성품이 강직하니, 결코 너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며,
注+① 遒(굳건하다)는 玆秋의 切이니, 굳건하다는 뜻이며 견고하다는 뜻이다. 후경을 대적하여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慕容紹宗뿐이다. 내가 일부러 그를 귀하게 대하지 않았으니 남겨서 너에게 물려준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段孝先은 충성스럽고 현명하고 인자하고 후덕한 데다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였으니, 군대의 큰일을 그와 함께 논의해야 한다.”라고 하고,
注+② 孝先은 段韶의 字이다.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고징이 〈고환의〉 喪을 공표하지 않았는데, 오직 行臺丞 陳元康만 그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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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侯景은 오른쪽 다리 한쪽이 짧아서 말타기와 활쏘기는 잘하지 못했지만, 계책은 잘 내었다. 諸將인 高敖曹와 彭樂 등이 모두 용맹으로는 당시에 으뜸이었는데, 후경이 항상 그들을 경시하였다.
한번은 高歡에게 말하기를 “병력 3만을 얻어 천하를 횡행하기를 바라니, 반드시 강을 건너 蕭衍 노인을 사로잡아서 太平寺의 주지로 삼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注+① 太平寺는 鄴城에 있다. 고환이 병력 10만을 거느리게 하여 河南을 전적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후경이 평소에 高澄을 경시하였는데, 한번은 말하기를 “高王(高歡)이 살아 있을 때에는 내가 감히 다른 뜻을 품을 수 없지만, 왕이 죽으면 나는 선비족의 작은 아이(高澄)와 함께 일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환의 병이 위독해지자, 고징이 거짓으로 고환의 편지를 만들어서 후경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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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이에 앞서 侯景이 高歡과 약속하기를, “지금 군대를 장악하고 먼 지역에 있으니, 사람들이 쉽게 거짓말을 할 것입니다. 편지를 보내실 때에는 뒷면에 작은 점을 찍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후경은 자신이 받은 편지에 점이 없었기에 거절하고 가지 않았으며, 또 고환의 병이 위독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行臺郎 王偉의 계책을 써서 병력을 거느리고 스스로 굳게 지켰다. 고환이 세상을 떠나자 드디어 河南을 가지고 西魏에 항복하니, 서위에서는 후경을 太傅 大行臺로 삼았다.
후경이 豫州刺史, 襄州刺史, 廣州刺史를 사로잡고 몰래 군대를 보내어 西兗州를 습격하였는데, 刺史 邢子才가 갑자기 들이쳐서 그들을 사로잡고 그로 인해 東方에 있는 여러 州로 격문을 보내어 각기 대비하도록 하니, 高澄이 韓軌를 파견하여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후경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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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이에 앞서 정월 을묘일(17일)에 梁主(蕭衍)가 中原의 지방관들이 모두 자신의 땅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는 꿈을 꾸고서 다만 朱异를 만나 그 일을 말하였는데, 주이가 아뢰기를 “이는 천하가 하나로 통일되는 조짐입니다.”라고 하였다.
丁和가 도착하여 侯景이 실제 정월 을묘일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고 말하니, 梁主가 더욱 신기하게 여겼다.
그러나 속으로는 아직 결정하지 못하여 혼자서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마치 금 사발과 같아 한 곳도 흠이 없는데, 지금 갑자기 후경의 땅을 받는 것이 어찌 사리에 마땅한 일이겠는가. 혹여 분란이 생기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注+① ‘獨言’은 한가한 때에 侍臣과 묻고 답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그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는 梁主가 侯景의 땅을 받고 싶어서 항상 생각이 거기에 있어 혼자 말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이가 梁主의 마음을 헤아려 알고 대답하기를, “지금 후경이 東魏의 땅 절반을 떼어서 오려고 하니, 하늘이 그의 마음을 이끈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뒤에 歸附하려는 사람들의 희망을 끊어버리게 될까 두려우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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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胡氏(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꿈이란 그 단서가 한 가지가 아니지만, 武帝(蕭衍)의 꿈은 평소의 생각이 잠결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큰 계책은 마땅히 의리에 근거하여 그 可否를 결정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하나의 꿈에 의지하여 결정한단 말인가. 황제(蕭衍)가 이미 사심을 이겨내지 못하였고, 朱异가 또 아첨하여 일을 조성하였으니, 슬프도다.
또 정월 병오일(8일)에 高歡이 세상을 떠났고, 侯景이 신해일(13일)에 西魏에 항복하여 한창 豫州, 襄州, 廣州, 兗州 등 몇 개의 州를 도모하였으니, 을묘일(17일)과 신해일의 거리가 겨우 4일인데, 무슨 겨를에 남쪽으로 귀의하려는 계책을 결정했겠는가.
丁和가 아마도 꿈 이야기에 대해 이미 들었거나 혹여 주이가 그에게 말을 해준 것인가. 황제가 일찍 살피지 못하고 그 일을 더욱 신기하게 여겼으니, 아마도 탐욕이 마음을 가렸기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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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東魏의 高澄이 將軍 元柱 등을 파견하여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서 侯景을 습격하였으나 대패하였다. 후경은 梁나라의 羊鴉仁 등의 군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여겨 마침내 潁川으로 물러나 지켰다.
東魏에서 다시 韓軌 등의 군대를 보내어 후경을 포위하니, 후경이 두려워하여 東荆州, 北兗州, 魯陽, 長社 네 곳의 城을 떼어 西魏에 뇌물로 주면서 구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注+① 東魏의 東荊州는 北陽城에 治所를 두고, 荊州는 魯陽에 치소를 두었으며, 潁州는 長社에 치소를 두었다. 당시에 北兗州는 없었고, 오직 北荊州는 伊陽에 치소를 두어 西魏와 접경을 이루었으니, 아마도 歷史家가 ‘荊’을 ‘兗’으로 잘못 기록한 것이리라.
僕射 于謹이 말하기를 “후경은 어려서부터 兵事에 익숙하여 간사한 속임수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높은 爵位를 내려 그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만 못하니, 아직 군대를 파견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荆州刺史 王思政이 말하기를 “기회를 틈타 나아가서 취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고,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노양에서 陽翟으로 향하였다.
注+② 陽翟縣은 漢나라 때에는 潁川郡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河南尹에 속하였다.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는 “興和 원년(539)에 陽翟郡을 나누어 설치하여 潁州에 소속하였다.”라고 하였다.
宇文泰가 이 소식을 듣고, 太尉 李弼과 儀同 趙貴를 보내어 병력을 이끌고 潁川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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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韓軌 등이 西魏의 군대가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력을 이끌어 鄴城으로 돌아가니, 侯景이 李弼과 趙貴를 만날 때를 이용하여 사로잡고 그들의 군대를 빼앗고자 하였다.
조귀가 이를 의심하여 가지 않고, 후경을 軍營으로 유인하여 사로잡고자 하였으나 이필이 저지하였다. 羊鴉仁이 군대를 거느리고 汝水에 이르니, 이필이 군대를 이끌고 長安으로 돌아갔다.
王思政이 潁川으로 들어가 점거하니, 후경은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懸瓠에 주둔하였고, 다시 使臣을 보내어 서위에 병력을 요청하니, 宇文泰가 同軌의 防主(성을 방어하는 관직 이름)인 韋法保 등을 시켜서 군대를 이끌고 그를 돕게 하였다.
注+① ≪五代志≫를 살펴보면 “河南 宜陽縣은 後周(北周) 때 나누어 熊耳縣과 同軌郡을 설치하였다. 北周와 北齊가 宜陽을 경계로 삼고 同軌를 郡의 이름으로 한 것은 장차 여기로부터 병력을 출동하여 東西를 통일시켜 천하의 군대로 하여금 궤적을 함께한다(천하 통일시키겠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防主는 관직의 명칭이다.
左丞 王悅이 우문태에게 말하기를 “후경이 이미 高氏의 은덕을 배반하였으니, 어찌 조정에 절개를 다 바치겠습니까. 지금 세력을 그에게 보태주고 군대로 그를 구원해준다면 조정이 앞으로 웃음거리가 될까 우려됩니다.”라고 하였다. 우문태가 이에 후경을 불러 조회하러 들어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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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侯景은 반란을 일으키려는 계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韋法保 등을 잘 대해주었는데, 위법보의 長史 裴寬이 말하기를 “후경은 교활하고 속임수에 능하니, 반드시 關中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公에게 의탁하려 할 것이니, 믿을 수 없을까 걱정입니다. 만약 병사를 매복시켰다가 그의 목을 베면 역시 한때의 큰 공로가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즉시 엄중하게 그를 방비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위법보는 그렇다고 여겨 〈후경을〉 떠나 드디어 鎭守하는 곳으로 돌아왔다.
注+① 〈‘遂辭還鎭’은 韋法保가〉 侯景을 떠나 同軌로 돌아온 것이다. 왕사정 역시 후경이 속임수를 쓰고 있음을 깨달아서 여러 군대를 나누어 포진하여 후경의 7州와 12鎭을 점거하였다.
후경이 과연 거절하고 조회하러 들어오지 않자, 宇文泰가 이에 여러 군대를 불러 돌아오게 하고, 왕사정을 都督河南諸軍事에 임명하였다.
후경이 드디어 결심을 하여 梁나라에 항복하자, 洋鴉仁이 마침내 懸瓠로 들어갔다. 高澄이 후경에게 서신을 보내어 후경이 돌아오면 豫州刺史로 임명해주고 처자식을 돌려보내겠다고 회유하였지만 후경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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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예전에 荀濟가 어려서 江東에 살면서 학문에 박식하고 문장을 잘 지어서 梁主(蕭衍)와 布衣 시절의 벗으로 지냈다.
梁主가 큰 뜻을 품고 있는 줄 알았지만 자신의 기개를 자부하여 복종하지 않으면서 늘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방패의 코 위에다 먹을 갈아 檄文을 쓸 일을 만나게 될 것이오.”라고 하니, 梁主가 매우 불편해하였다.
注+① 방패는 병기이니, 몸을 가리는 것이다. 방패에 코가 있다는 것은 방패 뒷면에 솟아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코라고 한 것이니, 梁主가 만약 불시에 擧兵을 하면 자신 역시 병력을 일으켜 방패의 코 위에서 먹을 갈아 檄文을 써서 그의 죄를 聲討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梁主가〉 즉위하게 되자 어떤 사람이 순제를 梁主에게 천거하니, 梁主가 말하기를 “풍속을 어지럽히고 배반하기를 좋아하니, 등용할 수가 없소.”라고 하였다.
순제가 글을 올려 梁主가 佛法을 숭상하여 신봉하고 塔寺를 건립하는 데 사치하고 낭비하는 일에 대해 간언하니, 梁主가 크게 진노하여 그의 목을 베려고 하자, 朱异가 몰래 순제에게 알리니, 순제가 東魏로 달아났다.
高澄이 순제를 侍讀으로 삼았는데, 〈고징을 죽이려는 모의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 供招에,
注+② 辨은 獄辭(供招)이다. “나이가 들어 쇠퇴해져도 공로와 이름을 세우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상심했기 때문에 天子를 옆에 끼고 權臣을 주살하고자 하였소.”라고 하였다.
고징이 그를 사형에서 면제해주려고 친히 묻기를 “荀公은 어찌하여 반역할 생각을 하였소.”라고 하니, 순제가 말하기를 “詔書를 받들어 고징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어찌 반역이라 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마침내 순제를 烹刑에 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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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梁主(蕭衍)가 侍中 羊侃에게 명을 내려 蕭淵明과 함께 寒山에서 泗水에 둑을 쌓아 彭城 쪽으로 물을 대게 하되 팽성을 얻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진군하여 侯景과 掎角之勢를 이루게 하였다.
둑이 완성되자 東魏의 徐州刺史 王則이 농성하며 굳게 지켰는데, 양간이 소연명에게 물길을 타고 성을 공격하도록 권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諸將들이 소연명과 군대의 일을 논의하였으나 소연명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다만 “때가 되면 알맞게 처리할 뿐이오.”라고 하였다.
동위에서 大都督 高岳을 보내어 팽성을 구원하도록 할 적에 潘樂을 副都督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陳元康이 말하기를 “반락은 임기응변에 더뎌서 慕容紹宗만 못하고, 게다가 先王(高歡)의 遺命이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모용소종을 東南道行臺로 삼아 고악과 반락을 함께 가도록 하였다.
후경이 모용소종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말안장을 두드리며 두려운 기색으로 말하기를 “누가 선비족 아이(高澄)에게 모용소종을 풀어 보내어 오도록 하였는가. 만약 그렇다면 高王(高歡)이 정녕 아직 죽지 않은 것인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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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두 사람이 渦水의 북쪽에 진을 치고, 斛律光이 가볍게 무장한 말을 타고 활을 쏘니, 侯景이 곡률광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功勳을 세우려고 왔고, 나는 죽음이 두려워 도망을 치는 것이오. 나는 그대 아버지의 벗인데, 어찌 나에게 활을 쏘는 것이오.
注+① 斛律光의 아버지 斛律金이 侯景과 함께 爾朱氏와 高歡을 섬겼기 때문에 스스로 아버지의 벗이라고 한 것이다. 그대가 어찌 스스로 渦水를 건너 남쪽으로 가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겠소! 모용소종이 그대에게 가르침을 준 것이구려.”라고 하니, 곡률광이 응답하지 않았다.
후경이 그의 무리인 田遷을 시켜서 곡률광의 말을 쏘도록 하여 말의 가슴을 맞히니 곡률광이 말을 바꿔 타고 숲에 숨었는데, 또 맞추자 퇴각하여 진지로 돌아갔다. 후경이 張恃顯을 사로잡았다가 풀어주었다.
곡률광이 譙城으로 달려 들어가자, 모용소종이 말하기를 “지금 과연 승부가 정해진 것이 어떠하오. 그런데 나를 탓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段韶가 몰래 바람을 따라 불을 놓자, 후경이 騎兵을 이끌고 물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뒤로 물러나 달아났는데, 풀이 축축해져서 불이 다시 타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