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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20)

자치통감강목(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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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太淸元年이요 魏大統十三年이요 東魏武定五年이라
不盡如鉤러라
梁以湘東王繹으로 爲荆州刺史하다
繹爲荆州 有微過 廬陵王續代之하여 以狀聞注+① 案繹在荊州, 有宮人李桃兒者, 以才慧得進, 及還, 以李氏行. 時得營戶禁重, 續具狀以聞.이러니
至是續卒하니 繹聞之喜하여 入閤而躍할새 屧爲之破注+② 屧, 蘇協切, 屐也. 猶謝安屐齒之折也.러라 梁主復以繹刺荆州하다
歡性深密하여 終日儼然하니 人不能測하고 馭軍嚴肅하며 聽斷明察이라 雅尙儉素하여 刀劒鞍勒 無金玉之飾이러라
病篤 謂世子澄曰 侯景專制河南十四年矣 常有飛揚跋扈之志하니 顧我能畜養이나 非汝所能駕御也 今四方未定하니 勿遽發哀하라
庫狄干斛律金 竝性遒直하니 終不負汝注+① 遒, 玆秋切, 健也, 固也. 堪敵侯景者 唯有慕容紹宗이라 我故不貴之하여 留以遺汝하노라
又曰 段孝先 忠亮仁厚하고 智勇兼備하니 軍旅大事 宜共籌之注+② 孝先, 韶字.라하고 遂卒하니 澄秘不發喪이어늘 唯行臺丞陳元康知之러라
東魏大行臺侯景 以河南으로 降魏하다
景右足偏短하여 弓馬非其長이나 而多謀筭이라 諸將高敖曹彭樂等 皆勇冠一時호되 景常輕之러라
嘗言於高歡호되 願得兵三萬하여 横行天下하노니 要須濟江하여 縛取蕭衍老公하여 以爲太平寺主注+① 太平寺, 蓋在鄴.하노이다하니 歡使將兵十萬하여 專制河南하다
景素輕高澄이러니 嘗曰 高王在 吾不敢有異어니와 王没이면 吾不能與鮮卑小兒共事矣라하더니 及歡疾篤 澄詐爲歡書하여 以召景이라
先是 景與歡約曰 今握兵在遠하니 人易爲詐 所賜書背 請加微㸃하소서
至是하여 景得書無㸃이라 辭不至하고 又聞歡疾篤하여 用其行臺郎王偉計하여 擁兵自固러니 歡卒 遂以河南降魏어늘 魏以景爲太傅大行臺러라
景執豫襄廣州刺史하고 潛遣兵하여 襲西兗州어늘 刺史邢子才 掩捕獲之하고 因散檄東方諸州하여 各爲之備하니 高澄遣韓軌하여 督諸軍討之하다
二月 하다
魏詔自今應宮刑者 直没官勿刑하라하다
景又遣郎中丁和하여 奉表于梁하여 請擧河南十三州内附注+① 十三州, 豫․廣․潁․荊․襄․兗․南兗․濟․東豫․洛․陽․北荊․北揚也. 洛․陽, 二州名.어늘 梁主召群臣廷議한대
僕射謝擧等 皆曰 頃與魏和하여 邊境無事하니 不宜納其叛臣注+② 大同二年, 東魏請和, 自是交聘使命不絶.이니이다하니 梁主曰 機會難得이니 豈宜膠柱리오하다
先是正月乙卯 梁主夢中原牧守皆以地來降하고 但見朱异告之한대 异曰 此宇内混壹之兆也니이다하다
及丁和至 稱景定計 實以正月乙卯라한대 梁主愈神之호되
然意猶未决하여 嘗獨言호되 我國家如金甌하여 無一傷缺하니 今忽受景地 詎是事宜리오 脫致紛紜이면 悔之何及注+① 獨言者, 宴閑之時, 非因與侍臣問答, 獨言其事. 蓋梁主欲受景地, 念茲在茲, 而不能已於言也.
朱异揣知梁主意하고 對曰 今景分魏土之半以來하니 自非天誘其衷이면何以至此리오 若拒而不納이면 恐絶後來之望이니 願陛下無疑하소서하다
梁主乃以景爲大將軍하여 封河南王都督河南北諸軍事하고 遣司州刺史羊鴉仁 督兗州桓和 仁州湛海珍等하여 將兵三萬하여 趣懸瓠以應之注+① 通鑑 “督兗州刺史桓和仁州刺史湛海珍等”, 梁紀作 “州刺史桓和.” 五代志 “漢東郡土山縣, 梁曰龍巢, 置(士)[土]州及東西二永寧․眞陽三郡.” 魏收志 “梁置仁州, 治赤坎城, 帶臨淮郡領己吾․義城縣.”하다
平西諮議周弘正 善占候러니 前此謂人曰 國家數年後 當有兵起라하더니 及聞納景하고 曰 亂階在此矣라하더라
胡氏曰 夢固非一端이나 武帝之夢 想所生也
然國家大計 當以義理斷其可否어늘 豈有憑一夢而决者乎 帝旣不能自克하고 朱异又諂以成之하니 悲夫로다
且正月丙午 高歡卒하고 而侯景以辛亥降西魏하여 方圖豫襄廣兗等數州하니 乙卯距辛亥 纔四日이니 豈暇定南歸之計리오
丁和蓋已聞夢이어나 或朱异告之歟 帝曾不察而益神其事하니 蓋貪欲蔽心이라 故莫能見也니라
三月 하다
◑ 夏四月 하다
澄慮諸州有變하여 乃自出巡撫하고 因朝于鄴하니 東魏主與之宴할새 澄起舞하니 識者知其不終이러라
東魏高澄 遣將軍元柱等하여 將兵數萬하여 襲景大敗한대 景以梁羊鴉仁等軍猶未至라하여 乃退保潁川이어늘
東魏復遣韓軌等兵하여 圍之하니 景懼하여 割東荆北兗州魯陽長社四城하여 賂魏以求救注+① 東魏東荊州治北陽城, 荊州治魯陽, 潁州治長社. 時無北兗州, 唯北荊州治伊陽, 與西魏接境, 豈史家誤以荊爲兗耶.어늘
僕射于謹曰 景少習兵하여 姦詐難測하니 不如厚其爵位하여 以觀其變이니 未可遣兵이니이다
荆州刺史王思政 以爲不若因機進取라하고 卽引兵하여 自魯陽向陽翟注+② 陽翟縣, 漢屬潁川郡, 晉屬河南尹. 魏收志 “興和元年, 分置陽翟郡, 屬潁州.”이어늘
宇文泰聞之하고 遣太尉李弼 儀同趙貴하여 將兵赴潁川하다
景恐梁主責之하여 遣使奉啓曰 王旅未接 死亡交急하니 求援關中 自救目前이요 割棄四州 事非得已注+① 王旅未接, 謂羊鴉仁等軍未至也.
其豫州以東齊海以西 悉歸聖朝 事須迎納이라
願敕境上하여 各置重兵하여 與臣影響하여 不使差互하소서하니 梁主優詔報之注+② 影響, 言若影之隨形, 響之應聲, 彼此相應, 不失機會也.하다
韓軌等 聞魏師將至하고 引兵還鄴하니 景欲因會執弼與貴而奪其軍이러니
貴疑之不往하고 欲誘景入營而執之어늘 弼止之하다 羊鴉仁遣兵至汝水하니 弼等引兵還長安이어늘
王思政入據潁川하니 景引軍出屯懸瓠하고 復使乞兵於魏어늘 宇文泰使同軌防主韋法保等으로 將兵助之注+① 五代志 “河南宜陽縣, 後周分置熊耳縣․同軌郡. 周․齊以宜陽爲界, 以同軌名郡者, 言將自此出兵混壹東西, 使天下軍同軌也.” 防主, 官名.한대
左丞王悅 言於泰曰 彼旣能背德於高氏하니 豈肯盡節於朝廷이리오 今益之以勢하고 援之以兵하면 竊恐朝廷 貽笑將來也일까하노이다하니 泰乃召景入朝하다
景叛計未成이라 厚撫法保等이어늘 法保長史裴寬曰 侯景狡詐하니 必不入關하고 欲託款於公하니 恐未可信이라 若伏兵斬之 亦一時之功也어니와 不爾 卽應深爲之防이니라
法保然之하여 遂辭還鎭注+① 辭景而還同軌也.하니 王思政亦覺其詐하여 分布諸軍하여 據景七州十二鎭이러니
景果辭不入朝어늘 泰乃召諸軍還하고 以思政都督河南諸軍事하니
景遂决意降梁이어늘 鴉仁遂入懸瓠하다 高澄以書諭景使還하면 許以爲豫州刺史하고 而還其妻子호되 景不聽하다
梁主下詔하여 大擧伐東魏할새 欲以鄱陽王範으로 爲元帥注+① 範, 恢之子也.어늘
朱异曰 鄱陽雄豪蓋世하고 得人死力이나 然所至殘暴하니 非弔民之材 且陛下昔登北顧亭하여 謂江右有反氣하고 骨肉爲戎首라하시니 今宜詳擇注+② 登北顧亭, 謂幸京口時也. 大同十年, 梁主幸京口城北固樓, 更名北顧. 江․郢․揚․南徐之地爲江左, 豫․南豫․南兗之地爲江右.이니이다하니
梁主曰 會理何如注+③ 會理, 南康王名, 續之子也.오하니 對曰 陛下得之矣로소이다하다
遂以會理與貞陽侯淵明으로 分督諸將注+④ 淵明, 懿之子也.하니 會理庸懦驕倨하여 不禮淵明한대 淵明密告朱异하니 追還代之하다
東魏大將軍澄還晉陽하여 自爲都督中外諸軍錄尙書事勃海王하다
高澄將歸晉陽할새 以其弟洋으로 爲京畿大都督하여 留鄴하고 遂歸發喪하니
東魏主贈歡相國齊王하고 備九錫殊禮하다 以澄爲大丞相督中外錄尙書事한대 澄辭丞相하니 許之하다
澄虛葬齊獻武王於漳水之西하고 而潛鑿鼓山石窟佛頂之旁爲穴하여 納其柩而塞之하고 殺群匠注+① 魏收志 “魏郡臨漳縣有鼓山.”이러니 及齊亡 一匠之子知之하여 發石取金而逃하다
東魏主多力善射하고 好文學하니 時人以爲有孝文風烈이라하니 高澄 深忌之러라
始高歡 自病逐君之醜注+① 謂逐孝武帝使入關也.하여 事魏主 禮甚恭하고 事無大小 必以聞하여 可否聽旨하고 每侍宴 俯伏上壽러라
魏主設法會乘輦行香 歡執香爐歩從하여 鞠躬屏氣하여 承望顔色이러니 及澄當國 倨傲頓甚하여 使崔季舒 察魏主動靜이러라
澄嘗侍飲할새 擧大觴屬魏主注+② 屬, 之欲切.하니 魏主不勝忿曰 自古 無不亡之國하니 朕亦何用此生爲리오하다 澄怒罵하고 使季舒 拳毆魏主하고 奮衣而出하니
魏主不堪憂辱하여 詠謝靈運詩曰 韓亡子房奮이요 秦帝魯連恥라하다
侍讀荀濟知魏主意하고 乃與祠部郎中元瑾華山王大器等으로 謀誅澄注+① 大器, 鷙之子也.할새
於宮中作土山하여 開地道向北城하여 至千秋門하니 門者覺之하여 以告澄한대 澄勒兵入宮하여 見魏主不拜而坐曰 陛下何意反고하니
魏主正色曰 自古唯聞臣反君이요 不聞君反臣이라 王自欲反하니 何乃責我 必欲弑逆인댄 緩速在王이니라
澄乃下牀叩頭하고 大啼謝罪러니 居三日 幽魏主於含章堂하고 烹濟等於市하고 遂還晉陽注+② 含章堂, 蓋取坤卦含章可貞之義, 必在鄴宮之內殿左右.하다
濟少居江東하여 博學能文하여 與梁主有布衣之舊러니
知梁主有大志 然負氣不服하여 常謂人曰 會於盾鼻上 磨墨檄之라하니 梁主甚不平注+① 盾, 兵器也, 所以蔽身. 盾之有鼻, 蓋盾背有隆起處, 故謂之鼻, 言梁主若有非常之擧, 亦當起兵, 於盾鼻上磨墨作檄以聲其罪.이러라
及卽位 或薦之한대 梁主曰 亂俗好反하니 不可用也라하여늘
濟上書諫梁主崇信佛法塔寺奢費하니 梁主大怒하여 欲斬之어늘 朱异密告之한대 濟逃奔東魏하다
澄以爲侍讀이러니 及敗下 辨曰注+② 辨, 獄辭也. 自傷年紀摧頽功名不立이라 欲挾天子誅權臣이라하니
澄欲宥其死하여 親問之曰 荀公何意反고하니 濟曰 奉詔誅高澄하니 何謂反邪아하니 遂烹之하다
九月 하다 冬十一月 東魏行臺慕容紹宗擊敗之하고 獲蕭淵明하다
梁主命侍中羊侃하여 與淵明으로 堰泗水於寒山하여 以灌彭城호되 俟得彭城하여 乃進軍與侯景掎角이러니
堰成 東魏徐州刺史王則嬰城固守어늘 侃勸淵明乘水攻之한대 不從이라 諸將與議軍事 淵明不能對하여 但云 臨時制宜而已러라
東魏遣大都督高岳하여 救彭城할새 欲以潘樂爲副한대 陳元康曰 樂緩於機變하여 不如慕容紹宗하고 且先王之命也라하고 乃以紹宗으로 爲東南道行臺하여 與岳樂偕行이라
景聞紹宗來하고 叩鞍有懼色曰 誰教鮮卑兒解遣紹宗來 若然이면 高王定未死邪아하다
紹宗帥衆十萬하여 據橐駝峴注+① 橐駝峴, 山名.이러니 羊侃勸淵明乘其遠來擊之한대 不從이어늘
侃乃帥所領하여 出屯堰上注+② 侃知淵明必敗, 故出屯堰上, 欲全所領而退.하다 紹宗至하여 攻營이어늘 淵明醉不能起하고 諸將皆不敢出이라
兗州刺史胡貴孫 獨帥麾下與戰하여 斬首二百하니 東魏兵敗走하다
初景 常戒梁人曰 逐北不過二里라하더니
紹宗將戰할새 以梁人輕悍하니 恐其衆不能支하여 引將卒謂之曰 我當陽退하여 吳兒使前하리니 爾擊其背라하더니
至是하여 梁人不用景言하여 乘勝深入하니 東魏將卒 以紹宗之言으로 爲信하여 爭掩撃之하니 梁兵大敗 淵明貴孫 皆爲所虜하고 失亡士卒 數萬人이러라
羊侃結陣徐還하니 梁主聞之하고 驚駭하여 幾欲墜牀歎曰 吾得無復爲晉家乎注+① 謂爲夷狄所取也.아하다
高澄以杜弼 爲軍司하여 問以政要한대
弼曰 天下大務 莫過賞罰이라 賞一人하여 使天下之人喜하고 罰一人하여 使天下之人懼 二事不失이면 自然盡善이라한대 澄大悅이러니
至是하여 使弼作檄하여 移梁朝略曰 侯景以鄙俚之夫 遭風雲之會하여 位班三事하고 邑啓萬家로되 而離披不已하니 意亦可見注+① 三事, 三公也. 班三事, 謂職位在三公之班列. 離披, 分散不可收束之意.이어늘
彼乃授之以利器하고 誨之以慢藏하여 使其勢得容姦하고 時堪乘便注+② 老子曰 “國之利器, 不可以授人.” 易曰 “慢藏誨盜.” 藏, 徂浪切, 下府藏同.하면 終恐倔彊不掉하며 狼戾難馴하니 横使江淮士子 荆揚人物 死亡矢石之下하며 夭折霧露之中注+③ 倔, 通作屈. 掉搖動也. 左傳 “尾大不掉”, 狼性貪而暴戾, 凡言狼戾, 謂貪而戾也. 一說 “狼, 當作很.” 橫, 戶孟切.하노라
彼梁主者 輕險有素러니 老耄及之하여 用舍乖方하고 廢立失所注+① 用舍乖方, 謂免周捨責顧琛而用朱异也. 廢立失所, 謂銜昭明而不立世適孫, 乃立太子綱也.하며 矯情動俗하고 飾智驚愚하며 毒螫滿懷어늘 妄敦戒業하고 躁競盈胸이어늘 謬治淸靜하니
災異降於上하고 怨讟興於下 傳險躁之風俗하고 任輕薄之子孫하여 朋黨路開하며 兵權在外하니 必將禍生骨肉하며 釁起腹心하여
彊弩衝城하며 長戈指闕하여 徒探雀鷇하여 無救府藏之虛하리니 空請熊蹯 詎延晷刻之命이리오 外崩中潰 今實其時注+② 戰國趙故太子章作亂, 公子成李兌起兵距章, 章敗走主父, 成兌因圍主父宮, 獲章殺之, 乃遂圍主父. 主父欲出不得, 探雀鷇而食之, 三月餘, 餓死. 蹯, 音煩. 熊蹯, 熊掌也. 左傳 “文元年, 楚成王欲立王子職, 而黜太子商臣, 商臣以宮甲圍成王, 王請食熊蹯而死, 弗聽, 王遂縊.” 注 “熊蹯難熟, 冀久將有外救至也.”라하더니 其後 梁室禍敗 皆如弼言하다
胡氏曰 改過者 帝王之盛節이요 聖人之至教也 梁武雖納侯景遣將出師하나 旣敗於魏人하니 則懲創前非하여 猶可及止 豈至遽如西晉乎
又況杜弼檄文指陳闕失 雖涉詬詈 而事理可推
梁武若能虛心平氣하여 反躬自責하고 盡革弊政하며 修明軍紀하고 選授將帥하여 固江淮之險以堅守 則雖侯景前驅하고 高澄繼至라도 猶不足慮어늘 而智不及此하여 以至於亡하니 豈梁德告終하여 天實厭之歟 不然이면 何其迷也리오
十二月 梁立元貞하여 爲咸陽王하다
侯景遣王偉하여 說梁主曰 高澄 幽元善見於金墉하여 殺諸元六十餘人하니 河北物情 俱念其主하나니
請立元氏一人하여 以從人望하소서 如此則陛下 有繼絶之名하고 臣景有立功之效라한대
梁主然之하여 以太子舍人元貞으로 爲咸陽王하고 資以兵力하여 使還主魏호되 須度江卽位注+① 須, 待也.라하고 儀衛 以乘輿之副給之 樹之子也注+② 樹, 禧之子.
侯景敗東魏兵於渦陽하다
慕容紹宗 引軍擊侯景하니 景輜重數千兩이요 馬數千匹이요 士卒四萬人이라 退保渦陽이러니 紹宗士卒 十萬이라 旗甲耀日하여 鳴鼓長驅而進하니
景命戰士하여 皆被短甲하고 執短刀하여 入東魏陳하여 但低視斫人脛馬足하니 東魏兵遂敗
紹宗奔譙城하니 禆將斛律光張恃顯 尤之注+① 光, 金之子也.어늘 紹宗曰 吾戰多矣로되 未見如景之難克者也 君輩試犯之하라
光等 被甲將出이어늘 紹宗戒之曰 勿渡渦水하라하다
二人軍於水北하고 光輕騎射之하니 景謂光曰 爾求勲而來 我懼死而去하니 我汝之父友 何爲射我注+① 光父金, 與景同事爾朱․高歡, 故自謂父友. 汝豈自解不渡水南이리오 慕容紹宗 教汝也로다하다 光無以應이러라
景使其徒田遷으로 射光馬洞胸하니 光易馬隱樹어늘 又中之하니 退入於軍이라 景擒恃顯而捨之
光走入譙城이어늘 紹宗曰 今定何如而尤我也오하다 段韶潛於上風 縱火어늘 景帥騎入水하여 出而却走하니 草濕이라 火不復然이러라
魏以鄭穆爲京兆尹하다
魏岐州久經亂하니 刺史鄭穆初到 有戶三千이러니 穆撫循安集하니 數年 至四萬餘戶러라 考績爲諸州之最하니 宇文泰擢爲京兆尹하다


梁나라 高祖 武帝 蕭衍 太淸 원년이고, 西魏 文帝 元寶炬 大統 13년이고, 東魏 孝静帝 元善見 武定 5년이다.
【綱】 봄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目】 해가 다 먹히지 않은 것이 마치 갈고리 모양과 같았다.
【綱】 梁나라가 湘東王 蕭繹을 荆州刺史로 삼았다.
【目】 예전에 湘東王 蕭繹이 荆州刺史가 되어 작은 과실이 있었는데, 廬陵王 蕭續이 그와 교대하고서 狀啓를 올려 〈조정에〉 보고하였다.注+① 살펴보건대 蕭繹이 荊州에 있을 때, 李桃兒라는 宮人이 있어 재능으로 발탁되었는데, 소역이 돌아올 때에 李氏를 데리고 왔다. 당시에는 에는 禁令이 엄중하여 蕭續이 狀啓를 올려 보고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소속이 세상을 떠나니, 소역이 그 소식을 듣고 기뻐서 閤門으로 뛰어 들어가다가 그 때문에 나막신이 부러졌다.注+② 屧은 蘇協의 切로, 나막신이다. 〈‘屧爲之破’는〉 과 같은 것이다. 梁主(蕭衍)가 다시 소역을 형주자사로 삼았다.
【綱】 東魏의 大丞相 勃海王 高歡이 卒하였다.
【目】 高歡은 성품이 진중하고 세밀하여 하루 종일 엄숙하게 있으니, 사람들이 그 속을 헤아릴 수가 없었고, 군대를 지휘할 때에는 엄숙하였으며, 〈남의 의견을〉 듣고 판단할 때 밝게 살폈다. 평소에 검소한 것을 숭상하여 검이나 말안장과 말굴레를 금이나 옥으로 장식하지 않았다.
병이 위독해지자 世子 高澄에게 말하기를 “侯景이 河南을 전적으로 다스린 지가 14년이라 늘 펄펄 날뛰어 발호할 뜻을 지니고 있다. 돌아보건대 나는 잘 길러줄 수 있지만, 네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지금 사방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갑작스레 喪을 공표하지 말거라.
庫狄干과 斛律金은 모두 성품이 강직하니, 결코 너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며,注+① 遒(굳건하다)는 玆秋의 切이니, 굳건하다는 뜻이며 견고하다는 뜻이다. 후경을 대적하여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慕容紹宗뿐이다. 내가 일부러 그를 귀하게 대하지 않았으니 남겨서 너에게 물려준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段孝先은 충성스럽고 현명하고 인자하고 후덕한 데다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였으니, 군대의 큰일을 그와 함께 논의해야 한다.”라고 하고,注+② 孝先은 段韶의 字이다. 마침내 세상을 떠났다. 고징이 〈고환의〉 喪을 공표하지 않았는데, 오직 行臺丞 陳元康만 그 사실을 알았다.
【綱】 東魏의 大行臺 侯景이 河南을 가지고 西魏에 항복하였다.
侯景侯景
【目】 侯景은 오른쪽 다리 한쪽이 짧아서 말타기와 활쏘기는 잘하지 못했지만, 계책은 잘 내었다. 諸將인 高敖曹와 彭樂 등이 모두 용맹으로는 당시에 으뜸이었는데, 후경이 항상 그들을 경시하였다.
한번은 高歡에게 말하기를 “병력 3만을 얻어 천하를 횡행하기를 바라니, 반드시 강을 건너 蕭衍 노인을 사로잡아서 太平寺의 주지로 삼을 것입니다.”라고 하니,注+① 太平寺는 鄴城에 있다. 고환이 병력 10만을 거느리게 하여 河南을 전적으로 다스리게 하였다.
후경이 평소에 高澄을 경시하였는데, 한번은 말하기를 “高王(高歡)이 살아 있을 때에는 내가 감히 다른 뜻을 품을 수 없지만, 왕이 죽으면 나는 선비족의 작은 아이(高澄)와 함께 일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환의 병이 위독해지자, 고징이 거짓으로 고환의 편지를 만들어서 후경을 불렀다.
【目】 이에 앞서 侯景이 高歡과 약속하기를, “지금 군대를 장악하고 먼 지역에 있으니, 사람들이 쉽게 거짓말을 할 것입니다. 편지를 보내실 때에는 뒷면에 작은 점을 찍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후경은 자신이 받은 편지에 점이 없었기에 거절하고 가지 않았으며, 또 고환의 병이 위독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行臺郎 王偉의 계책을 써서 병력을 거느리고 스스로 굳게 지켰다. 고환이 세상을 떠나자 드디어 河南을 가지고 西魏에 항복하니, 서위에서는 후경을 太傅 大行臺로 삼았다.
후경이 豫州刺史, 襄州刺史, 廣州刺史를 사로잡고 몰래 군대를 보내어 西兗州를 습격하였는데, 刺史 邢子才가 갑자기 들이쳐서 그들을 사로잡고 그로 인해 東方에 있는 여러 州로 격문을 보내어 각기 대비하도록 하니, 高澄이 韓軌를 파견하여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후경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綱】 2월에 西魏에서 宮刑을 폐지하였다.
【目】 西魏에서 詔書를 내려 지금부터 宮刑에 해당하는 사람은 관직만 빼앗고 형벌을 집행하지 말라고 하였다.
【綱】 侯景이 다시 河南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켜 梁나라에 붙자, 양나라가 후경을 河南王에 봉하고 군대를 보내어 원조하였다.
【目】 侯景이 또 郎中 丁和를 보내어 梁나라에 表文을 올려서 河南의 13州를 가지고 歸附하겠다고 청하자,注+① 13州는 豫州, 廣州, 潁州, 荊州, 襄州, 兗州, 南兗州, 濟州, 東豫州, 洛州, 陽州, 北荊州, 北揚州이다. 洛과 陽은 2州의 이름이다. 梁主(蕭衍)가 여러 신하들을 불러 조정에서 논의를 하였다.
僕射 謝擧 등이 모두 말하기를 “근래에 東魏와 화친을 하여 변경에 사변이 없었는데, 지금 그곳에서 반란을 일으킨 신하를 받아들이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니,注+② 大同 2년(536)에 東魏에서 화친을 청하였고, 이때부터 使臣이 오가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 梁主가 말하기를 “이런 기회는 얻기가 어려우니, 어찌 융통성이 없이 대처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라고 하였다.
【目】 이에 앞서 정월 을묘일(17일)에 梁主(蕭衍)가 中原의 지방관들이 모두 자신의 땅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는 꿈을 꾸고서 다만 朱异를 만나 그 일을 말하였는데, 주이가 아뢰기를 “이는 천하가 하나로 통일되는 조짐입니다.”라고 하였다.
丁和가 도착하여 侯景이 실제 정월 을묘일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고 말하니, 梁主가 더욱 신기하게 여겼다.
그러나 속으로는 아직 결정하지 못하여 혼자서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마치 금 사발과 같아 한 곳도 흠이 없는데, 지금 갑자기 후경의 땅을 받는 것이 어찌 사리에 마땅한 일이겠는가. 혹여 분란이 생기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注+① ‘獨言’은 한가한 때에 侍臣과 묻고 답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그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이는 梁主가 侯景의 땅을 받고 싶어서 항상 생각이 거기에 있어 혼자 말을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이가 梁主의 마음을 헤아려 알고 대답하기를, “지금 후경이 東魏의 땅 절반을 떼어서 오려고 하니, 하늘이 그의 마음을 이끈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뒤에 歸附하려는 사람들의 희망을 끊어버리게 될까 두려우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目】 梁主(蕭衍)는 이에 侯景을 大將軍으로 삼아 河南王 都督河南北諸軍事에 봉하였고, 司州刺史 羊鴉仁, 督兗州 桓和, 仁州刺史 湛海珍 등을 보내어 군사 3만을 이끌고 懸瓠로 나아가 후경을 맞아들이도록 하였다.注+① 〈“督兗州桓和 仁州湛海珍等”이〉 ≪資治通鑑≫에는 “督兗州刺史桓和 仁州刺史湛海珍等”이라고 되어 있으며, ≪梁紀≫에는 “土州刺史桓和”라고 되어 있다. ≪五代志≫에 “漢나라 東郡 土山縣을 梁나라에서 ‘龍巢’라고 하였으며, 土州와 東永寧郡, 西永寧郡, 眞陽郡 3개의 郡을 두었다.”라고 하였다.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梁나라에서 仁州를 설치하고 赤坎城에 治所를 두었는데, 臨淮郡을 끼고 己吾縣과 義城縣을 관할하였다.”라고 하였다.
平西諮議 周弘正이 점을 잘 쳤는데, 이에 앞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몇 년 뒤에 나라에 응당 兵亂이 발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후경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말하기를 “난리가 일어나는 발단이 여기에 있다.”라고 하였다.
【目】 胡氏(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꿈이란 그 단서가 한 가지가 아니지만, 武帝(蕭衍)의 꿈은 평소의 생각이 잠결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큰 계책은 마땅히 의리에 근거하여 그 可否를 결정해야 하는데, 어찌하여 하나의 꿈에 의지하여 결정한단 말인가. 황제(蕭衍)가 이미 사심을 이겨내지 못하였고, 朱异가 또 아첨하여 일을 조성하였으니, 슬프도다.
또 정월 병오일(8일)에 高歡이 세상을 떠났고, 侯景이 신해일(13일)에 西魏에 항복하여 한창 豫州, 襄州, 廣州, 兗州 등 몇 개의 州를 도모하였으니, 을묘일(17일)과 신해일의 거리가 겨우 4일인데, 무슨 겨를에 남쪽으로 귀의하려는 계책을 결정했겠는가.
丁和가 아마도 꿈 이야기에 대해 이미 들었거나 혹여 주이가 그에게 말을 해준 것인가. 황제가 일찍 살피지 못하고 그 일을 더욱 신기하게 여겼으니, 아마도 탐욕이 마음을 가렸기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리라.”
【綱】 3월에 梁主(蕭衍)가 同泰寺에서 하였다.
【綱】 여름 4월에 東魏의 大將軍 高澄이 鄴城으로 갔다.
【目】 高澄이 여러 州에서 변란이 일어날까 걱정하여 이에 직접 나가서 순회하며 어루만졌고, 이로 인하여 鄴城에 들어가서 알현하니
【綱】 6월에 東魏에서 군대를 보내어 侯景을 토벌하자, 西魏에서 병력을 보내어 구원해주고 후경을 불러 들어와 조회하라고 하였는데, 후경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서위의 군대가 이에 돌아갔다.
【目】 東魏의 高澄이 將軍 元柱 등을 파견하여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서 侯景을 습격하였으나 대패하였다. 후경은 梁나라의 羊鴉仁 등의 군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여겨 마침내 潁川으로 물러나 지켰다.
東魏에서 다시 韓軌 등의 군대를 보내어 후경을 포위하니, 후경이 두려워하여 東荆州, 北兗州, 魯陽, 長社 네 곳의 城을 떼어 西魏에 뇌물로 주면서 구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注+① 東魏의 東荊州는 北陽城에 治所를 두고, 荊州는 魯陽에 치소를 두었으며, 潁州는 長社에 치소를 두었다. 당시에 北兗州는 없었고, 오직 北荊州는 伊陽에 치소를 두어 西魏와 접경을 이루었으니, 아마도 歷史家가 ‘荊’을 ‘兗’으로 잘못 기록한 것이리라.
僕射 于謹이 말하기를 “후경은 어려서부터 兵事에 익숙하여 간사한 속임수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높은 爵位를 내려 그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만 못하니, 아직 군대를 파견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荆州刺史 王思政이 말하기를 “기회를 틈타 나아가서 취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고, 곧바로 군대를 이끌고 노양에서 陽翟으로 향하였다.注+② 陽翟縣은 漢나라 때에는 潁川郡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河南尹에 속하였다.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는 “興和 원년(539)에 陽翟郡을 나누어 설치하여 潁州에 소속하였다.”라고 하였다.
宇文泰가 이 소식을 듣고, 太尉 李弼과 儀同 趙貴를 보내어 병력을 이끌고 潁川으로 나아가도록 하였다.
【目】 侯景은 梁主(蕭衍)가 자신을 책망할까 두려워 使臣을 보내어 啓文을 올려 아뢰기를 “폐하의 군대를 아직 만나지 못하였는데 죽음이 번갈아 닥쳤으니, 關中에 구원해주기를 요청한 것은 스스로 눈앞에 닥친 〈위급함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었고, 4州의 땅을 떼어 버린 것은 일이 부득이해서였습니다.注+① ‘王旅未接’은 羊鴉仁 등의 병력이 도착하지 않았음을 말한다.
豫州의 동쪽 지역과 齊海의 서쪽 지역을 모두 聖朝에 바칠 것이니, 이는 반드시 맞이하여 접수해야 할 일입니다.
바라건대 변경 지역에 칙령을 내리셔서 각기 重兵을 설치하고 臣과 서로 호응하여 서로 어긋나지 않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梁主가 넉넉한 詔書로 화답하였다.注+② ‘影響’은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고 메아리가 소리에 응하듯이 피차가 호응하여 기회를 잃지 않는 것을 말한다.
【目】 韓軌 등이 西魏의 군대가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력을 이끌어 鄴城으로 돌아가니, 侯景이 李弼과 趙貴를 만날 때를 이용하여 사로잡고 그들의 군대를 빼앗고자 하였다.
조귀가 이를 의심하여 가지 않고, 후경을 軍營으로 유인하여 사로잡고자 하였으나 이필이 저지하였다. 羊鴉仁이 군대를 거느리고 汝水에 이르니, 이필이 군대를 이끌고 長安으로 돌아갔다.
王思政이 潁川으로 들어가 점거하니, 후경은 군대를 이끌고 나가서 懸瓠에 주둔하였고, 다시 使臣을 보내어 서위에 병력을 요청하니, 宇文泰가 同軌의 防主(성을 방어하는 관직 이름)인 韋法保 등을 시켜서 군대를 이끌고 그를 돕게 하였다.注+① ≪五代志≫를 살펴보면 “河南 宜陽縣은 後周(北周) 때 나누어 熊耳縣과 同軌郡을 설치하였다. 北周와 北齊가 宜陽을 경계로 삼고 同軌를 郡의 이름으로 한 것은 장차 여기로부터 병력을 출동하여 東西를 통일시켜 천하의 군대로 하여금 궤적을 함께한다(천하 통일시키겠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防主는 관직의 명칭이다.
左丞 王悅이 우문태에게 말하기를 “후경이 이미 高氏의 은덕을 배반하였으니, 어찌 조정에 절개를 다 바치겠습니까. 지금 세력을 그에게 보태주고 군대로 그를 구원해준다면 조정이 앞으로 웃음거리가 될까 우려됩니다.”라고 하였다. 우문태가 이에 후경을 불러 조회하러 들어오게 하였다.
【目】 侯景은 반란을 일으키려는 계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韋法保 등을 잘 대해주었는데, 위법보의 長史 裴寬이 말하기를 “후경은 교활하고 속임수에 능하니, 반드시 關中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고 公에게 의탁하려 할 것이니, 믿을 수 없을까 걱정입니다. 만약 병사를 매복시켰다가 그의 목을 베면 역시 한때의 큰 공로가 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즉시 엄중하게 그를 방비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위법보는 그렇다고 여겨 〈후경을〉 떠나 드디어 鎭守하는 곳으로 돌아왔다.注+① 〈‘遂辭還鎭’은 韋法保가〉 侯景을 떠나 同軌로 돌아온 것이다. 왕사정 역시 후경이 속임수를 쓰고 있음을 깨달아서 여러 군대를 나누어 포진하여 후경의 7州와 12鎭을 점거하였다.
후경이 과연 거절하고 조회하러 들어오지 않자, 宇文泰가 이에 여러 군대를 불러 돌아오게 하고, 왕사정을 都督河南諸軍事에 임명하였다.
후경이 드디어 결심을 하여 梁나라에 항복하자, 洋鴉仁이 마침내 懸瓠로 들어갔다. 高澄이 후경에게 서신을 보내어 후경이 돌아오면 豫州刺史로 임명해주고 처자식을 돌려보내겠다고 회유하였지만 후경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綱】 가을 7월에 梁나라에서 貞陽侯 蕭淵明을 보내어 여러 장수를 감독하여 東魏를 침략하였다.
【目】 梁主(蕭衍)가 詔書를 내려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東魏를 정벌할 때에 鄱陽王 蕭範을 元帥로 삼고자 하였는데,注+① 蕭範은 蕭恢의 아들이다.
朱异가 말하기를 “파양왕은 영웅호걸로 기개가 세상을 뒤덮고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잔인하고 포악하게 행동하니, 백성들을 어루만질 재목은 아닙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예전에 北顧亭에 올라 말씀하시기를, ‘江右 지역에는 반란의 기운이 있고 골육지친이 군대의 우두머리가 되리라.’라고 하셨으니, 지금 신중히 선택하셔야 합니다.”라고 하였다.注+② ‘登北顧亭’은 京口에 행차했을 때를 말한다. 大同 10년(544)에 梁主가 京口城 北固樓에 올라 ‘北顧樓’라고 이름을 고쳤다. 江州, 郢州, 揚州, 南徐州는 江左 지역이고, 豫州, 南豫州, 南兗州는 江右 지역이다.
梁主가 말하기를 “蕭會理는 어떤가.”라고 하니,注+③ 蕭會理는 南康王의 이름으로, 蕭續의 아들이다. 주이가 대답하기를, “폐하께서는 적당한 인물을 얻으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소회리와 貞陽侯 蕭淵明에게 여러 장수를 나누어 감독하게 하니,注+④ 蕭淵明은 蕭懿의 아들이다. 소회리가 나약하고 교만하여 소연명에게 禮를 갖추지 않았는데, 소연명이 주이에게 이를 몰래 고하니, 〈조정에서 사람을 시켜〉 뒤쫓아가서 〈소회리를〉 돌아오게 하고 〈소연명으로〉 교체하였다.
【綱】 東魏의 大將軍 高澄이 晉陽으로 돌아와 스스로 都督中外諸軍 錄尙書事 勃海王이 되었다.
【目】 高澄이 晉陽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에 그의 동생 高洋을 京畿大都督으로 삼아서 鄴城에 남겨두고 드디어 진양으로 돌아가서 〈高歡의〉 喪事를 발표하였다.
東魏主(元善見)가 고환을 相國 齊王으로 추증하고 을 갖추어서 특별한 예우를 하였다. 고징을 大丞相 都督中外諸軍事 錄尙書事로 삼았는데, 고징이 승상을 사양하니 허락하였다.
고징은 漳水의 서쪽에 齊獻武王(高歡)을 虛葬하고, 몰래 鼓山에 있는 石窟의 佛頂 옆을 뚫어 墓穴을 만들어서 靈柩를 넣어 막고는 여러 匠人들을 죽였다.注+①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魏郡 臨漳縣에 鼓山이 있다.”라고 하였다. 北齊가 망하게 되자, 어떤 장인의 아들이 그 사실을 알고 석굴을 발굴하여 금을 가지고 달아났다.
【綱】 東魏의 大將軍 高澄이 鄴城으로 들어가서 임금(元善見)을 궁궐에 유폐시키고 侍讀 荀濟 등을 죽이고 돌아왔다.
【目】 東魏主(元善見)는 힘이 좋고 활을 잘 쏘았으며 文學을 좋아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에게 孝文帝(元宏)의 풍도가 있다고 하니, 高澄이 몹시 꺼려하였다.
예전에 高歡이 君主를 내쫓았던 추악함을 스스로 병통으로 여겨注+① 〈‘自病逐君之醜’는〉 孝武帝(元修)를 내쫓아 關中으로 들어가게 한 것을 말한다. 東魏主를 섬길 적에 禮를 갖추어서 아주 공경하고 일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반드시 보고하여 可否에 대한 그의 뜻을 따랐으며, 늘 모시고 잔치를 할 적에는 엎드려서 장수를 빌었다.
東魏主가 法會를 열어 輦을 타고 焚香을 하러 갈 적에 고환은 향로를 들고 걸어서 쫓아가 몸을 구부리고 숨을 죽인 채 東魏主의 안색을 우러러 보았다. 고징이 國政을 맡게 되자, 거만함이 갑자기 심해져서 崔季舒를 시켜서 東魏主의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다.
고징이 한번은 東魏主를 모시고 술을 마시다가 커다란 술잔을 들어서 東魏主에게 권하였는데,注+② 屬(권하다)은 之欲의 切이다. 東魏主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말하기를 “옛날부터 망하지 않은 국가가 없으니, 나 역시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고징이 화가 나서 최계서를 시켜서 東魏主를 주먹으로 치도록 하고 옷을 떨치며 나갔다.
東魏主는 근심과 치욕을 참을 수 없어서 謝靈運의 詩를 읊기를 “韓나라가 망하니 이 떨치며 일어났고, 秦나라가 황제를 칭하자 이 수치스러워하였네.”라고 하였다.
【目】 侍讀 荀濟가 東魏主(元善見)의 뜻을 알아차리고 이에 祠部郎中 元瑾과 華山王 元大器 등과 高澄을 죽이기로 모의하였다.注+① 元大器는 元鷙의 아들이다.
이에 궁중에 土山을 만들어서 성의 북쪽을 향하여 땅굴을 뚫어서 千秋門에 이르도록 하니, 문지기가 이것을 알아차리고 高澄에게 알렸다. 고징이 이에 병사들을 정돈하여 궁으로 들어가 東魏主를 보고도 절을 하지 않고 앉으면서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어찌 배반할 생각을 하십니까?”라고 하니,
東魏主가 정색을 하며 말하기를 “옛날부터 신하가 군주를 배반했다는 말은 들어도 군주가 신하를 배반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소. 왕이 스스로 배반하고자 하면서 어찌 나를 책망하는 것이오. 반드시 弑逆을 저지르고자 한다면 늦추든 재촉하든 왕에게 달려 있소.”라고 하였다.
고징이 평상에서 내려와 머리를 조아리며 크게 소리를 내어 울면서 사죄하였는데, 3일이 지난 뒤에 東魏主를 含章堂에 유폐하고 순제 등은 저자에서 烹刑에 처하고서 드디어 晉陽으로 돌아갔다.注+② 含章堂은 ≪周易≫ 坤卦의 “아름다움을 속에 품고 곧은 덕을 지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취하였으니, 필시 鄴宮의 內殿 곁에 있었을 것이다.
【目】 예전에 荀濟가 어려서 江東에 살면서 학문에 박식하고 문장을 잘 지어서 梁主(蕭衍)와 布衣 시절의 벗으로 지냈다.
梁主가 큰 뜻을 품고 있는 줄 알았지만 자신의 기개를 자부하여 복종하지 않으면서 늘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방패의 코 위에다 먹을 갈아 檄文을 쓸 일을 만나게 될 것이오.”라고 하니, 梁主가 매우 불편해하였다.注+① 방패는 병기이니, 몸을 가리는 것이다. 방패에 코가 있다는 것은 방패 뒷면에 솟아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코라고 한 것이니, 梁主가 만약 불시에 擧兵을 하면 자신 역시 병력을 일으켜 방패의 코 위에서 먹을 갈아 檄文을 써서 그의 죄를 聲討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梁主가〉 즉위하게 되자 어떤 사람이 순제를 梁主에게 천거하니, 梁主가 말하기를 “풍속을 어지럽히고 배반하기를 좋아하니, 등용할 수가 없소.”라고 하였다.
순제가 글을 올려 梁主가 佛法을 숭상하여 신봉하고 塔寺를 건립하는 데 사치하고 낭비하는 일에 대해 간언하니, 梁主가 크게 진노하여 그의 목을 베려고 하자, 朱异가 몰래 순제에게 알리니, 순제가 東魏로 달아났다.
高澄이 순제를 侍讀으로 삼았는데, 〈고징을 죽이려는 모의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 供招에,注+② 辨은 獄辭(供招)이다. “나이가 들어 쇠퇴해져도 공로와 이름을 세우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상심했기 때문에 天子를 옆에 끼고 權臣을 주살하고자 하였소.”라고 하였다.
고징이 그를 사형에서 면제해주려고 친히 묻기를 “荀公은 어찌하여 반역할 생각을 하였소.”라고 하니, 순제가 말하기를 “詔書를 받들어 고징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어찌 반역이라 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마침내 순제를 烹刑에 처하였다.
【綱】 9월에 梁나라에서 泗水에 둑을 쌓아 東魏의 彭城을 공격하였다. 겨울 11월에 東魏의 行臺 慕容紹宗이 梁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蕭淵明을 사로잡았다.
【目】 梁主(蕭衍)가 侍中 羊侃에게 명을 내려 蕭淵明과 함께 寒山에서 泗水에 둑을 쌓아 彭城 쪽으로 물을 대게 하되 팽성을 얻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진군하여 侯景과 掎角之勢를 이루게 하였다.
둑이 완성되자 東魏의 徐州刺史 王則이 농성하며 굳게 지켰는데, 양간이 소연명에게 물길을 타고 성을 공격하도록 권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諸將들이 소연명과 군대의 일을 논의하였으나 소연명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다만 “때가 되면 알맞게 처리할 뿐이오.”라고 하였다.
동위에서 大都督 高岳을 보내어 팽성을 구원하도록 할 적에 潘樂을 副都督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陳元康이 말하기를 “반락은 임기응변에 더뎌서 慕容紹宗만 못하고, 게다가 先王(高歡)의 遺命이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모용소종을 東南道行臺로 삼아 고악과 반락을 함께 가도록 하였다.
후경이 모용소종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말안장을 두드리며 두려운 기색으로 말하기를 “누가 선비족 아이(高澄)에게 모용소종을 풀어 보내어 오도록 하였는가. 만약 그렇다면 高王(高歡)이 정녕 아직 죽지 않은 것인가.”라고 하였다.
【目】 慕容紹宗이 군사 10만을 거느리고 橐駝峴(낙타현)을 점거하자,注+① 橐駝峴은 산 이름이다. 羊侃이 蕭淵明에게 그들이 먼 곳에서 온 틈을 타 공격하도록 권하였는데, 듣지 않았다.
양간이 이에 자신의 휘하에 있는 병력을 이끌고 나가 강둑 위에 주둔하였다.注+② 羊侃은 蕭淵明이 반드시 패배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나아가 둑 위에 주둔하여 거느리고 있던 병력을 온전히 하여 퇴각하려고 한 것이다. 모용소종이 도착하여 軍營을 공격하였는데, 소연명은 술에 취하여 일어날 수가 없었고, 諸將들은 모두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兗州刺史 胡貴孫이 홀로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전투를 벌여 200명의 목을 베니, 東魏의 군대가 패하여 달아났다.
【目】 예전에 侯景이 늘 梁나라 군사들에게 경계하기를, “패배한 적의 뒤를 추격해도 2리를 넘지 말라.”라고 하였다.
慕容紹宗이 전투를 벌이려고 할 적에 梁나라 군사들이 날래고 사나웠기에 자신의 병사들이 버틸 수 없을까 걱정하여 將卒을 이끌어 말하기를 “내가 퇴각하는 척하면서 들을 유인하여 앞으로 나오게 할 것이니, 너희들은 그들의 뒤편을 공격하라.”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梁나라 군사들이 후경의 말을 따르지 않고 승리한 틈을 타고 깊숙이 들어가니, 東魏의 將卒들이 모용소종의 말을 믿고 다투어 갑자기 공격하자 양나라 군사들이 대패하였다. 蕭淵明과 胡貴孫이 모두 사로잡혔고 실종되거나 죽은 병졸들이 수만 명이었다.
羊侃이 군대의 대열을 이룬 채 천천히 돌아가니, 梁主(蕭衍)가 그 소식을 듣고는 놀라서 거의 의자에서 떨어질 뻔하다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다시 晉家를 만들 수 없는 것인가.”라고 하였다.注+① 〈‘吾得無復爲晉家乎’는〉 오랑캐에게 〈中原을〉 빼앗긴 것을 말한다.
【目】 예전에 高澄이 杜弼을 軍司로 삼아서 정치의 요체를 물어보았는데,
두필이 말하기를 “천하의 큰일은 상을 주고 벌을 내리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한 사람에게 상을 주어 천하의 사람들을 기쁘게 만들고 한 사람에게 벌을 주어 천하의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니, 두 가지 일에 실수를 하지 않으면 저절로 다 좋아지게 됩니다.”라고 하니, 고징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두필을 시켜서 檄文을 짓게 하여 梁나라 조정에 보냈는데, 대략 이르기를, “侯景은 시골 출신의 사내로 지위는 三公의 반열에 있고 식읍은 1만 家인데도 분잡한 짓을 그치지 않으니, 역시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注+① ‘三事’는 三公이다. 三事의 반열에 있다는 것은 職位가 三公의 반열에 있음을 말한다. ‘離披’는 분산하여 수습하고 단속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대들이 후경에게 예리한 무기를 주고 재물의 보관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해주어 그 형세로 하여금 간악한 짓을 용납하도록 하고 그 시기로 하여금 편승할 수 있도록 한다면,注+② ≪老子≫에 이르기를 “나라의 利器는 남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周易≫에 이르기를 “재물을 허술하게 보관하는 것은 훔쳐가라고 가르쳐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藏(재물․창고)은 徂浪의 切이니, 아래의 ‘府藏’의 藏도 같다. 끝내 고집을 부려도 꺾을 수 없고 포악하게 굴어도 길들이기가 어려우니, 長江과 淮河의 선비들과 荊州와 揚州의 인물들을 마음대로 부려 화살과 돌 아래에서 죽고 안개와 이슬 속에서 요절하게 만들까 두렵습니다.注+③ 倔(고집스럽다)은 屈과 통용하니, 掉는 움직인다는 뜻이다. ≪春秋左氏傳≫ 昭公 11년을 살펴보면 “꼬리가 커서 흔들기 어렵다.”라고 하였는데, 이리는 성품이 탐욕스럽고 포악하니, 대체로 ‘狼戾’라고 하면 탐욕스럽고 포악함을 말한다. 일설에는 “‘狼’이 ‘很’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橫(방자하다)은 戶孟의 切이다.
【目】 그대들의 梁主(蕭衍)는 평소에 경박하고 음흉하였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사람을 등용하고 내칠 적에 도리에 어긋나게 하였고, 폐하고 세우는 데에 잘못이 있으며,注+① ‘用舍乖方’은 周捨를 면직하고 顧琛을 질책하고서 朱异를 등용한 것을 말한다. ‘廢立失所’는 을 말한다. 마음을 속이고 풍속을 어지럽게 하며, 지혜가 있는 것처럼 꾸며 어리석은 사람을 놀라게 하고, 독기를 속에 가득 품고서 망령되게 힘써 佛敎戒律을 지키며, 조급히 굴고 남과 경쟁하는 마음이 가슴속에 가득하면서도 맑고 깨끗하게 다스린다고 속입니다.
그리하여 재앙과 이변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원망하고 비방하는 소리가 아래에서 일어납니다. 음험하고 조급한 풍속을 퍼뜨리고 경박한 자손에게 일을 맡겨 朋黨의 길을 터놓았고 兵權이 밖에 있으니, 반드시 앞으로 골육지친의 사이에서 재앙이 발생할 것이고 심복들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강한 쇠뇌가 성벽에 부딪히고 긴 창이 대궐을 가리켜서 한갓 참새 새끼를 찾다가 텅 빈 창고에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신세가 될 것인데, 공연히 곰의 발바닥을 청한들 어찌 경각에 달린 목숨을 늘릴 수 있겠습니까. 밖에서 무너지고 안에서 붕괴되는 것은 지금이 실로 그때입니다.”라고 하였다.注+② 戰國時代에 趙나라 옛 太子 趙章이 난을 일으키자 公子 趙成과 李兌가 군대를 일으켜 조장과 대치하였는데, 조장이 패배하여 主父(武靈王)에게 달아나니, 조성과 이태가 주부의 궁궐을 포위하여 조장을 사로잡아 죽이고, 드디어 주부를 포위하였다. 주부가 나가려고 하였으나 나갈 수가 없어 참새를 찾아 잡아먹다가 3개월 남짓 있다가 굶어 죽었다. 蹯(발바닥)은 音이 煩이다. ‘熊蹯’은 곰의 발바닥이다. ≪春秋左氏傳≫을 살펴보면 “文公 원년에 楚 成王이 王子 芈職을 세우려고 太子 芈商臣을 내쳤는데, 미상신이 궁궐의 병사들로 成王을 포위하였다. 성왕이 곰의 발바닥을 먹은 뒤에 죽고 싶다고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으니, 성왕이 목을 매어 죽었다.”라고 하였다. 그 注에 “곰의 발바닥은 익히기가 어려우니, 시간을 끌다가 외부에서 구원병이 오기를 바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梁나라 황실이 재앙으로 무너져 모두 두필의 말처럼 되었다.
【目】 胡氏(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허물을 고치는 것은 帝王의 성대한 節操이고, 聖人의 지극한 가르침이다. 梁主(蕭衍)가 비록 侯景을 받아들여 장수들을 이끌고 출병하게 하였으나 이미 東魏의 군대에게 패배하였으니, 이전의 잘못을 징계하여 오히려 멈출 수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른 것인가.
또 더구나 杜弼이 檄文을 보내어 과오를 가리켜 말한 것이 비록 비난하는 내용과 연관되지만 일의 이치로 보면 짐작할 수 있다.
梁 武帝가 만약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편안히 하여 반성하여 자신을 질책하고 弊政을 다 개혁하며 군대의 기강을 단속하여 밝히고 장수를 선발하여 관직을 주어 험준한 長江과 淮河를 견고하게 하여 지켰다면 비록 侯景을 선봉으로 서게 하고 高澄이 뒤이어 도착하게 하였더라도 오히려 근심할 것이 없었을 터인데, 지혜가 여기에 미치지 못하여 패망에 이르렀으니, 아마도 梁나라의 덕이 끝났음을 알리자 하늘이 실로 버린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리도 우매한 것인가.”
【綱】 12월에 梁나라가 元貞을 세워 咸陽王으로 삼았다.
【目】 侯景이 王偉를 파견하여 梁主(蕭衍)에게 유세하기를 “高澄이 元善見을 金墉에 유폐시키고 元氏 60여 명을 죽였으니, 河北의 인심은 모두 그들의 主君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元氏 한 사람을 세워서 백성들의 바람을 따라주소서. 이와 같이 하면 폐하께서는 끊어진 〈王統을〉 이어주었다는 명성을 얻을 것이고, 臣 후경은 공적을 세운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梁主가 옳다고 여겨서 太子舍人 元貞을 咸陽王으로 삼아 병력을 주어 돌아가서 東魏의 임금이 되도록 하되, 장강을 건너기를 기다려 즉위하도록 하고,注+① 須는 기다린다는 뜻이다. 儀仗과 護衛를 乘輿(황제)에 버금가게 주었다. 元貞은 元樹의 아들이다.注+② 元樹는 元禧의 아들이다.
【綱】 侯景이 渦陽에서 東魏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目】 慕容紹宗이 군사를 이끌고 侯景을 공격하니, 후경은 이 수천 량이고, 말이 수천 필이며, 士卒이 4만 명이었는데 渦陽으로 물러나 지켰다. 모용소종은 士卒이 10만 명이어서 깃발과 갑옷을 번득이며 북을 두드리면서 계속해서 앞으로 진격하였다.
후경이 전투를 치르는 병사들에게 명을 내려 모두 짧은 갑옷을 입고, 짧은 칼을 잡고서 東魏의 진영으로 들어가 다만 몸을 숙이고 보다가 군사들의 정강이와 말의 다리를 찍도록 하니, 東魏의 군대가 마침내 패배하였다.
斛律光斛律光
모용소종이 譙城으로 달아나니, 禆將 斛律光과 張恃顯이 그를 탓하자,注+① 斛律光은 斛律金의 아들이다. 모용소종이 말하기를 “나는 많은 전투 경험이 있으나 후경과 같이 이기기 어려운 사람은 본 적이 없소. 그대들이 한번 그를 공격해보시오.”라고 하였다.
곡률광 등이 갑옷을 입고 출정하려는데, 모용소종이 그들에게 경계하기를 “渦水를 건너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目】 두 사람이 渦水의 북쪽에 진을 치고, 斛律光이 가볍게 무장한 말을 타고 활을 쏘니, 侯景이 곡률광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功勳을 세우려고 왔고, 나는 죽음이 두려워 도망을 치는 것이오. 나는 그대 아버지의 벗인데, 어찌 나에게 활을 쏘는 것이오.注+① 斛律光의 아버지 斛律金이 侯景과 함께 爾朱氏와 高歡을 섬겼기 때문에 스스로 아버지의 벗이라고 한 것이다. 그대가 어찌 스스로 渦水를 건너 남쪽으로 가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겠소! 모용소종이 그대에게 가르침을 준 것이구려.”라고 하니, 곡률광이 응답하지 않았다.
후경이 그의 무리인 田遷을 시켜서 곡률광의 말을 쏘도록 하여 말의 가슴을 맞히니 곡률광이 말을 바꿔 타고 숲에 숨었는데, 또 맞추자 퇴각하여 진지로 돌아갔다. 후경이 張恃顯을 사로잡았다가 풀어주었다.
곡률광이 譙城으로 달려 들어가자, 모용소종이 말하기를 “지금 과연 승부가 정해진 것이 어떠하오. 그런데 나를 탓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段韶가 몰래 바람을 따라 불을 놓자, 후경이 騎兵을 이끌고 물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뒤로 물러나 달아났는데, 풀이 축축해져서 불이 다시 타오르지 않았다.
【綱】 西魏가 鄭穆을 京兆尹으로 삼았다.
【目】 西魏의 岐州가 오랫동안 난리를 겪었는데, 刺史 鄭穆이 처음 부임하였을 때에는 戶口가 3천이었다가 정목이 어루만지고 편안하게 하자, 몇 년 사이에 4만여 戶에 이르렀다. 考課의 점수가 여러 州 가운데 가장 높으니, 宇文泰가 〈정목을〉 발탁하여 京兆尹으로 삼았다.


역주
역주1 春正月朔 日食 : “일식이 정월 초하루에 있었는데 다 먹히지 않아서 마치 갈고리 모양과 같았으니, 이는 아마 侯景이 반란하고 梁나라가 滅亡할 징조일 것이다. 글로 써 기록하였으니, 하늘의 경계를 조심하는 이는 살필 수 있을 것이다.[日食正旦 不盡如鉤 是殆侯景反叛 梁國滅亡之兆歟 書以志之 謹天戒者 可以觀矣]” ≪發明≫
역주2 營內(行宮)의 戶口 : 원문은 ‘營戶’인데 ≪南史≫ 〈廬陵威王列傳〉에는 ‘行宮戶’로 되어 있다.
역주3 謝安의……것 : 東晉의 謝安이 바둑을 두고 있을 때, 그의 조카 謝玄이 苻堅의 군대를 격파했다는 보고서를 접하고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바둑을 둔 뒤에 내실로 돌아와서 문지방을 넘다가 너무 기쁜 나머지 “나막신 굽이 부러지는 것도 몰랐다.[不覺屐齒之折]”라는 고사가 있다.(≪晉書≫ 권79 〈謝安列傳〉)
역주4 東魏大丞相勃海王高歡卒 : “賀善의 贊에 말하였다. ‘高歡이 군사를 일으킨 뒤로 「爾朱氏를 토벌했다.[討爾朱氏]」라고 기록하고, 이윽고 바로 「스스로 승상이 되었다.[自爲丞相]」, 「스스로 태사가 되었다.[自爲太師]」라고 기록하고, 「그 임금 元恭과 元朗을 폐위시켰다.[廢其主恭及朗]」, 「스스로 大丞相이 되었다.[自爲大丞相]」라고 기록하고, 爾朱氏가 도망간 뒤에는 바로 「마침내 진양을 점거하였다.[遂據晉陽]」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爾朱兆를 죽였으나, ≪資治通鑑綱目≫은 「주살했다[誅]」라고 기록하지 않고, 「죽였다[殺]」라고 기록하고, 그에 따라서 군사를 들어 반란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東魏가 건국되고 나자 첫 번째로 「스스로 相國이 되자, 黄鉞을 내리고 특별 예우를 가하였다.[自爲相國 假黄鉞 加殊禮]」라고 기록하고, 「世子 高澄을 鄴城으로 들여보내 정사를 돌보도록 하였다.[遣其世子澄入鄴輔政]」라고 기록하고, 그가 西魏를 대적하자 두 번이나 「宇文泰에게 패배했다.[爲泰所敗]」라고 기록하고, 두 번이나 「玉壁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였다[圍玉壁 不克]」라고 기록하였다. 고환이 이긴 것으로 기록된 것은 金墉을 빼앗은 것과 邙山에서 전투한 것일 뿐이다. ≪자치통감강목≫은 고환에게서 채택한 것이 없다.’[賀善贊曰 髙歡自起兵 書討爾朱氏 既而即書自爲丞相 自爲太師 書廢其主恭及朗 自爲大丞相 爾朱既走 即書遂據晉陽 故雖殺兆 綱目不書誅 書殺 而隨以舉兵反書矣 東魏既建 首書自爲相國 假黄鉞 加殊禮 書遣其世子澄入鄴輔政 其敵魏也 再書爲泰所敗 再書圍玉壁 不克 其以勝書者 拔金墉 戰邙山而已 綱目於髙歡 葢無取焉]” ≪書法≫
역주5 魏除宮刑 : “‘宮刑을 제거하였다.[除宮刑]’라고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權道를 인정해준 것이다. 肉刑(體刑)은 漢나라 文帝로부터 비로소 제거하였는데, 이때에 여전히 宮刑을 사용한 것은 西魏의 과실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宮刑을 제거하였다.[除宮刑]’라고 기록한 것은 꾸짖은 말이 없으니 인정해준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형벌을 신중히 행하는 정사에 ‘제거했다[除]’고 기록한 것은 10번이다.(漢 惠帝 4년(B.C. 191)에 자세하다.)[書除宮刑何 予權也 肉刑自漢文帝始除之矣 於是猶用宮刑 魏之過也 綱目書除宮刑 無貶辭 蓋予之矣 終綱目恤刑之政 書除十(詳漢惠帝四年)]” ≪書法≫
역주6 侯景復以河南……遣兵援之 : “앞에 ‘河南을 가지고 西魏에 항복하였다.[以河南降魏]’라고 기록하여 ‘반란[叛]’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여기서는 ‘반란[叛]’이라고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서위에 귀순한 것은 정상이다. 서위를 배반하고 梁나라에 귀부한 것은 비정상이므로 ‘반란[叛]’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西魏 후경[魏侯景]’이라고 기록하지 않았는가. 후경의 마음은 서위에 순수하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시 무엇을 가지고[復以]’라고 기록한 것은 ‘이미 서위에 항복하고서 다시 양나라에 귀부했다.[旣以降魏 復以附梁]’라고 한 것과 같다. 그의 반복무상함을 알 수 있는데도, 받아주고 봉해주었으니 이 때문에 서위는 후경을 大行臺로 삼았으나 기록하지 않았고, 양나라는 봉하여 河南王으로 삼았는데 기록하였으니 탐냄을 나무란 것이다.[前書以河南降魏 不書叛 此其書叛何 歸魏 正也 背魏附梁 則非正矣 故書叛 然則曷爲不書魏侯景 景之心不純乎魏也 故書復以 若曰旣以降魏 復以附梁 其反覆可見矣 而受之 而封之 是故魏以景爲大行臺不書 梁封爲河南王則書 譏貪也]” ≪書法≫“梁主가 반란자를 기쁘게 받아들인 것은 이욕의 마음이 가린 것이다. 그러므로 逆順과 是否를 모두 잘 살피지 못하여 마침내 재앙을 입었다. ≪資治通鑑綱目≫은 위에서 ‘侯景이 西魏에 항복하였다.[景降魏]’라고 기록하였으나 서위는 움직이지 않았고, 여기서는 ‘후경이 양나라에 귀부하자, 양나라가 즉시 후경을 王의 작위에 봉하고 군대를 보내어 원조하였다.[景附梁 梁卽封以王爵 遣兵援之]’라고 기록하고, 아래에서는 ‘서위가 후경을 불러서 들어와 조회하라고 하였는데, 후경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서위의 군대가 이에 돌아갔다.[下書魏召景入朝 景不受命 魏師乃還]’라고 기록하였으니, 여기에서 양나라와 서위의 국가를 위해 방책을 꾀하는 득실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어찌 옛 주인에게 배반하고서 새 임금에게 배반하지 않을 수 있는 자가 있겠는가. 후세에 ≪資治通鑑綱目≫의 기록을 살펴보면 양나라의 覆轍(실패의 교훈)을 증험할 뿐만 아니라, 또한 반란한 신하를 불러들이는 자들의 경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梁主喜納叛人 蓋利心蔽之 故逆順是否 皆不能察 卒受其禍 綱目上書景降魏 而魏不爲動 此書景附梁 梁卽封以王爵 遣兵援之 下書魏召景入朝 景不受命 魏師乃還 於此可見梁魏謀國得失之分 豈有能叛其故主 而不能叛其新君者哉 後世卽綱目之所書 驗梁氏之覆轍 亦可爲招納叛臣者之戒也]” ≪發明≫
역주7 (白)[自] : 저본에는 ‘白’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自’로 바로잡았다.
역주8 (士)[土] : 저본에는 ‘士’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土’로 바로잡았다.
역주9 捨身 : 속세를 떠나 佛門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역주10 梁主捨身於同泰寺 : “梁主가 捨身한 것은 ≪資治通鑑綱目≫에서 모두 3번 책에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 몸이 여전히 있어 끝내 버리지 못했으니 부처에게 버리자 부처가 받지 않았다. 얼마 뒤에 마침내 侯景에게 버렸는데 그 몸만 버렸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子孫, 국가까지도 아울러 버렸으니 슬퍼할 만하구나.[梁主捨身 綱目凡三書于冊 然其身猶在 卒莫之捨 捨於佛而佛不受 未幾 遂捨於侯景 不惟捨其身 且併其子孫家國捨之 可哀也哉]” ≪書法≫
역주11 東魏大將軍澄如鄴 : “鄴은 무엇인가. 東魏가 도읍한 곳이다. 晉陽에는 ‘가다[如]’라고 기록하는 것이 괜찮으나 여기서 ‘가다[如]’라고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高澄이 신하 노릇을 안 한 것이다. 그러므로 竇憲이 신하 노릇을 안 한 것에는 ‘조회하다[朝]’라고 기록하지 않고 ‘회합하다[會]’라고 기록하고(漢 和帝 永元 3년(91)), 고징이 신하 노릇을 안 한 것에는 ‘조회하다[朝]’라고 기록하지 않고 ‘가다[如]’라고 기록하였다.(이해(547)) ≪資治通鑑綱目≫은 1字의 筆削이 엄하다.[鄴者何 東魏所都也 晉陽書如 可也 此其書如何 澄不臣也 是故竇憲不臣 則不書朝 書會(漢和帝永元三年) 高澄不臣 則不書朝 書如(是年) 綱目一字之筆削嚴矣]” ≪書法≫
역주12 東魏主(元善見)가……알았다 : 高澄의 부친인 高觀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고징이 술잔치를 벌이고 춤추는 것을 보고 識者들이 그가 제명에 죽지 못할 것을 안 것이다.
역주13 東魏遣兵討侯景……魏師乃還 : “侯景은 이전에 西魏에 항복했는데 ‘반란[叛]’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東魏에 河南을 부여해주지 않아서이다. 여기서 ‘토벌[討]’이라고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西魏에 귀순한 것은 정상이지만 다시 배반하고 梁나라에 귀부하였다면 후경을 진실로 토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東魏에게 ‘토벌[討]’이라고 기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해주다[救之]’라고 기록한 것은 나무란 것이 아닌가. 후경이 이미 다시 양나라에 귀부했는데 서위는 구원해주었으나 부르고 나자 오지 않으니 그 후에 〈서위의〉 군대가 마침내 되돌아왔다. ≪資治通鑑綱目≫은 말이 번잡해도 줄이지 않았으니 서위를 병통으로 여기고 후경을 미워한 것이다. 만일 동위가 토벌하였기[討] 때문에 서위가 구원하였다[求] 기록한 것이 서위를 꾸짖은 것으로 여긴다면 본래의 뜻을 그르치는 것이다.[景前降魏 不書叛 不與東魏以河南也 此其書討 何 降魏 正也 復叛附梁 則景固可討矣 故東魏得書討 然則書救之 非譏歟 景旣復附于梁 魏方救之 旣徵不至 然後乃還 綱目辭繁不殺 所以病魏而惡景也 若謂以討書救爲譏魏 則失其旨矣]” ≪書法≫
역주14 梁遣貞陽侯淵明……侵東魏 : “梁나라에 대해서는 일찍이 ‘東魏를 정벌하였다.[伐東魏].’라고 기록하였다. 여기서는 어째서 ‘침략[侵]’이라고 기록하였는가. 반란자를 받아들였으니 진실로 남을 정벌하기에 부족한 것이다.[梁嘗書伐東魏矣 此則曷爲以侵書 受其叛人 則固不足以伐人矣]” ≪書法≫“무릇 군대에 대해서는 죄를 선포하고 토벌하는 것을 ‘伐’이라 하고, 군대를 은밀히 출동하여 적의 국경으로 쳐들어가는 것을 ‘侵’이라 한다. 지금 分注(目)에서 ‘梁主(蕭衍)가 詔書를 내려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東魏를 정벌하였다.[梁主下詔大擧伐東魏]’라고 기재하였는데, ≪資治通鑑綱目≫(綱)에서는 ‘침략[侵]’이라고 기록하고 또 ‘貞陽侯 蕭淵明에게 여러 장수를 위에서 감독하게 하였다.[貞陽侯督諸將于上]’라고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藩侯(諸侯)로 大軍을 총괄 감독하게 한 것은 군대를 은밀히 출동하여 적의 국경으로 쳐들어간 것이 아님이 명백한데도 書法이 이와 같으니 무슨 이유가 있는가. 일찍이 ≪周易≫을 살펴보건대, 師卦 六五爻는 師卦(䷆)의 主爻인데 그 爻辭에 ‘밭에 짐승이 있으면 〈토죄 정벌의〉 말을 받들어 토벌함이 이로우니, 허물이 없으리라.[田有禽 利執言 无咎]’라고 하였으니, 이른바 ‘밭에 짐승이 있다[田有禽]’는 것은 만약 짐승이 밭에 들어와서 곡식을 해치면 마땅히 사냥하여 잡을 뿐이다. ‘말을 받들어 토벌함이 이롭다[利執言]’에 있어서는 이로움이 임금의 말을 받들어 가서 토벌함에 있으니, 그 죄를 명백하게 하여 토벌하므로 허물이 없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말을 집행하는 뜻이다. 지금 侯景이 나라를 背叛하고 西魏로 귀부하자 서위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니 마침내 다시 땅을 들어서 梁나라에 귀부하였다. 이는 진실로 저들의 叛臣賊子인데 저들에게 있어서는 국토를 잃은 것이 마치 밭에 짐승이 있는 것과 같아 마땅히 토벌해야 할 것이지만, 양나라에 있어서는 애당초 집행할 만한 말이 없는 것이다. 지금 도리어 〈양나라에서〉 크게 군사를 일으켜서 나아가서 東魏를 정벌하였으니 이 군사를 일러 무슨 군사라 하겠는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남의 나라를 정벌하면서 명분이 없으니 그 士氣는 이미 쓸쓸하게 결핍된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은 명분을 따라 실질을 구하여 ‘크게 군사를 일으켰다.[大擧]’고 分注의 아래에 기재하고 ‘서위를 침략했다[侵魏]’고 ≪자치통감강목≫(綱)의 위에 기록하였으니 이른바 샘을 맑게 하고 뿌리를 바로잡는 것이어서 돌이켜 나에게 있는 것을 구하여 나에게 결함이 없은 뒤에 남을 비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비루하구나, 梁 武帝여. 어찌 이것을 알겠는가.[凡兵 聲罪致討曰伐 潜師入境曰侵 今分注載梁主下詔大擧伐東魏 而綱目則以侵書之 且又書貞陽侯督諸將于上 何哉 夫以藩侯而摠督大軍 則非潜師入境明矣 書法如此 豈有說邪 嘗觀於易 師之六五 爲一卦之主 其爻辭有曰 田有禽 利執言 无咎 所謂田有禽者 若禽獸入于田中 侵害禾稼 則宜獵取之爾 至於利執言者 利在奉辭往伐 明其罪以致討 故得无咎 此則執言之義也 今侯景背叛其國 歸魏而魏不納 遂復挈地以附於梁 是固彼之叛臣賊子 在彼則失其境土 若田之有禽 所當致討 而在梁則初無言可執 今反大擧而往伐之 斯師也 其諸謂之何師哉 大擧以伐人之國 而乃無名 則是其氣已索然餒矣 綱目循名責實 以大擧載於分注之下 而以侵魏書於綱目之上 所謂澄源正本 反求在我 無諸己而後 可以非諸人之義也 陋哉梁武 何足以知此]” ≪發明≫
역주15 九錫 : 천자가 공로가 있는 제후나 대신을 예우하여 내려주는 기물로, 車馬, 衣服, 樂器, 朱戶, 納陛, 虎賁, 弓矢, 秬鬯을 말한다.
역주16 東魏大將軍澄入鄴……殺侍讀荀濟等而還 : “‘들어갔다[入]’는 미워하는 말이다. ‘들어갔다[入]’라고 기록하고, ‘임금(元善見)을 유폐했다.[幽其主]’라고 기록하고, ‘아무개 등을 죽이고 돌아왔다.[殺某等而還]’라고 기록하였으니 高澄의 흉포함을 알 수 있다.[入 惡辭也 書入 書幽其主 書殺某等而還 澄之凶燄可見矣]” ≪書法≫“高歡이 임금을 축출하고는 죽을 때까지 北面(신하 노릇 함)하여 임금을 섬기기에 禮를 다하였으니 바로 그 추악함을 덮으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軍國의 大權이 고환의 손아귀에 있었으니 비록 거짓 꾸밈을 했더라도 섬기는 데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앞에서는 사관이 기록하기를 ‘高歡은 몸을 구부리고 숨을 죽인 채 향로를 들고 東魏主를 걸어서 쫓아갔다.[其鞠躬屏氣 執香歩從魏主]’라고 기재하여 고환이 임금을 섬기는 데에 공손함을 보였으니, 어찌 〈≪春秋左氏傳≫ 襄公 26년의〉 ‘國政은 寗氏가 主宰하고 寡人은 祭祀만을 主宰할 것이다.[政由寗氏 祭則寡人]’라는 것을 알겠는가. 이는 바로 姦雄 중에 가장 나쁜 놈일 뿐이다. 한 번 전하여 아들이 마침내 狂悖를 드러냈는데 임금을 힐책한 것을 살펴보면 도리어 ‘〈임금님께서〉 어찌 배반할 생각을 하십니까?’라고 하였으니, 君臣의 분수가 뒤집히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이것은 아마 부친의 훈계를 받아서 그러한 것일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은 ‘고징이 鄴城으로 들어가서 임금을 궁궐에 유폐시켰다.[澄入鄴 幽其主於宮中]’라고 기록하였으니 그 미워함은 또한 曹操ㆍ司馬懿보다 큰 것이다. 荀濟가 처음에 고징을 주살하려고 계획하였는데, ‘死節’로 기록되지 못한 것은 도모함이 정상적 도리를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만 ‘殺’이라고만 기록하고 그 관직을 제거하지 않았으니 또한 인정해주면서도 완전히 인정해준 것은 아니다. 그 뜻이 은미하다.[高歡逐君 終身北面 事君盡禮 正將以蓋其醜也 然軍國大權 在其掌握 雖有虛文 何補於事 前史載其鞠躬屏氣 執香歩從魏主 以見其事上之恭 豈知政由寗氏 祭則寡人 此正姦雄之尤者爾 一傳而子遂著狂悖 觀其詰責乃主 顧謂何意而反 君臣之分 倒置如此 是豈得於過庭之訓而然乎 綱目書澄入鄴 幽其主於宮中 其惡又浮於曹馬矣 荀濟始謀誅澄 而不得以死節書者 謀之不得其道 故止書殺 而不去其官 亦予之而不盡予者也 其旨微矣]” ≪發明≫
역주17 子房 : 漢 高祖 劉邦의 신하 張良의 字이다. 戰國時代 韓나라에서 누대에 걸쳐 재상을 배출한 가문 출신으로 韓나라가 망하자 유방의 策士가 되어 漢나라 창업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史記≫ 권55 〈留侯世家〉)
역주18 魯連 : 魯仲連을 가리킨다. 전국시대 齊나라 사람으로, 秦나라를 황제로 높이자는 新垣衍의 제안을 받고 “내가 동해에 몸을 던져 죽을지언정 진나라의 백성이 될 수는 없다. [連有蹈東海而死耳, 吾不忍爲之民也.]”라고 하였다.(≪史記≫ 권83 〈魯仲連列傳〉)
역주19 梁堰泗水 以攻東魏之彭城 : “공격에는 方略을 기록한 것이 없었는데, 秦나라에는 ‘河溝를 터서 공격하였다.[决河溝]’라고 기록한 것(丙子年(B.C. 225))은, 황하 틈을 거듭 열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泗水인데 기록한 것은 무엇인가. 梁나라를 병통으로 여긴 것이다. 양나라는 일찍이 淮水에 둑을 쌓아 壽陽을 공격하였으나 얻은 것이 잃은 것을 보상하지 못하였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梁나라가 3번 둑을 쌓은 것을 삭제하여 기록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사람을 보내 彭城을 공격하면서 계책에 다시 이 둑 쌓는 일을 내었으나 마침내 이로운 바가 없으므로 특별히 기록하여 나무란 것이다.[攻未有書方略者 秦書决河溝(丙子年) 重開河隙也 此泗水耳 其書 何 病梁也 梁嘗堰淮以攻壽陽矣 得不償失 綱目於其三築 削之不書 於是遣攻彭城 計復出此 而竟無所益 故特書譏之]” ≪書法≫
역주20 吳의 어린애 : 南朝의 梁나라가 있던 지역이 옛날 吳나라 땅이므로, 梁나라의 군사를 얕잡아 보고 한 말이다.
역주21 (誤)[誘] : 저본에는 ‘誤’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誘’로 바로잡았다.
역주22 바람과……만나 : 한 시대에 聖君과 賢臣이 서로 만나는 것을 말한다. ≪周易≫ 乾卦 〈文言傳〉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雲從龍 風從虎]”라고 한 데서 유래하였다.
역주23 昭明太子(蕭統)의 일을……것 : 昭明太子가 咀呪의 사건에 휘말려 울분으로 죽자 梁主(蕭衍)가 소명태자의 長子 華容公 蕭歡을 계승자로 삼으려 하다가 유예하여 끝내 세우지 않고 아들 蕭綱을 太子로 삼은 일을 말한다.(본서 辛亥年(531) 참조)
역주24 갑자기……데 : 佛敎에 의해 국가가 피폐해짐을 말한다. ≪續資治通鑑長編≫ 116권 〈仁宗〉에 “만약 불교를 다스리지 않으면 풍속을 파괴시켜서 西晉처럼 될 것이다.[茍釋不治 則敗亂風俗 將如西晉之季]”라고 하였다.
역주25 輜重 : 군대의 여러 가지 군수 물품을 통틀어 말한다.

자치통감강목(20) 책은 2022.11.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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