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魏賀拔岳이 將討曹泥할새 使都督趙貴로 至夏州하여 與宇文泰謀之한대 泰가 曰 曹泥는 孤城阻遠이라 未足憂나 侯莫陳悅은 貪而無信하니 宜先圖之라하되 不聽하고 召悅하여 會於髙平하여 與共討泥할새
悅이 既得翟嵩之言이라 乃謀取岳이러라 岳이 數與悅宴語어늘 長史雷紹가 諫하되 不聽이러니 悅이 果誘岳斬之하니
岳衆
이 皆不敢動
하되 而悅
이 心猶豫
하여 不即撫納
하고 還屯水洛城
하니 岳衆
이 散還平涼
하여 未有所屬
注+① 九域志 “水洛城, 在德順軍西南一百里.”이러라
趙貴가 曰 宇文夏州가 英略冠世하여 遠近歸心하고 賞罰嚴明하여 士卒用命하니 若迎而奉之하면 大事濟矣리라하다
都督杜朔周
가 請輕騎告哀且迎之
注+② 朔周本姓赫連, 曾祖庫多汗避難改焉, 宇文泰命復其舊姓, 名之曰達.러니
既至
에 泰
가 與將佐賓客
으로 議去留
한대 前太中大夫韓褒
가 曰 此天授也
니 又何疑乎
아 悅
은 井中蛙耳
라 使君往
하면 必擒之
注+③ 後漢馬援往觀公孫述, 歸謂隗囂曰 “子陽, 井底蛙耳.”리라하고
衆이 以爲悅이 已有賀拔之衆하여 圖之實難하니 願且留以觀變이라한대
泰가 曰 悅이 既害元帥어든 自應乗勢直據平涼이어늘 而退屯水洛하니 吾知其無能爲也라 夫難得易失者는 時也니 若不早赴하면 衆心將離라하고
時에 民間이 惶懼하여 逃散者多라 軍士가 欲掠之어늘 朔周가 曰 宇文公이 方伐罪弔民이어늘 奈何助賊爲虐乎아하고 撫而遣之하니 遠近이 悅附하고 泰가 聞而嘉之하다
目
歡이 使侯景으로 招撫岳衆이러니 泰가 至安定遇之하여 謂曰 賀拔公이 雖死나 宇文泰가 尙存하니 卿은 何爲者오하니 景이 遂還하다
泰가 至平涼하여 哭岳哀慟하니 將士가 悲喜러라 歡이 復使侯景張華原王基로 勞泰한대 泰가 不受하고 欲刼留之하니 華原이 不屈이어늘 乃遣之하다
基가 還言泰는 雄傑이니 請及其未定하여 擊滅之라하니 歡이 曰 卿은 不見賀拔侯莫陳悅乎아 吾當以計拱手取之하리라하다
魏主가 遣元毗하여 慰勞岳軍하여 召還洛陽하고 并召侯莫陳悅하니 悅이 附髙歡이라 不肯應召어늘
泰因毗上表曰 臣岳
이 忽罹非命
하여 都督冦洛等
이 令臣權掌軍事
러니 今髙歡之衆
이 已至河東
하고 侯莫陳悅
이 猶在水洛
하며 士卒
이 多西人
이라 顧戀鄉邑
하니 乞少停緩
하여 徐就東引
注+① 河東, 亦謂五原河之東.하소서하다
岳之死也에 都督李虎가 奔荆州하여 説賀拔勝하여 使収岳衆한대 勝이 不從하여 而還이라가 爲歡别將所獲하여 送洛陽하니
魏主가 方謀取關中이라 得虎甚喜하여 拜衛將軍하여 使就泰하다 虎는 歆之玄孫也라
泰
가 與悅書
에 責之曰 君
이 黨附國賊
하여 共危宗廟
하니 吾已發兵
하여 爲賀拔公報讐
하노니 指日相見
注+② 言進兵討悅也. 左傳曰 “詰朝相見.”이리라하다
目
宇文泰
가 引兵上隴
할새 軍令嚴肅
하여 秋毫無犯
하니 百姓大悅
이러라 水洛
이 降
이어늘 悅
이 退保上邽
하여 召南秦刺史李弼
하여 與之拒泰
注+① 泰州治上邽城. 弼妻, 悅之姨也.러니 弼
이 擧城降
하니 悅
이 軍潰縊死
어늘 泰
가
入上邽하여 散府庫하여 以賞士卒하다 左右가 竊一銀甕以歸어늘 泰가 知而罪之하고 剖賜將士하다
悅黨孫定兒
가 不下
하고 有衆數萬
注+② 定兒時爲豳州刺史.이러니 泰
가 遣劉亮襲之
한대 亮
이 先豎纛於近城髙嶺
注+③ 竪, 立也.하고 自將二十騎
하여 馳入城
하니
定兒가 方置酒어늘 亮이 麾兵斬之하고 遙指城外纛하여 命二騎曰 出召大軍하라하니 城中이 皆懾服하여 莫敢動이러라
先是에 故氐王楊紹先이 乗魏亂하여 逃歸武興하여 復稱王하니 氐羌吐谷渾이 所在蜂起하여 自南岐로 至瓜鄯히 跨州據郡者가 不可勝數러라
泰
가 令弼
로 鎭原州
하고 拔也惡蚝
로 鎭南秦州
하고 可朱渾道元
으로 鎭渭州
하고 趙貴
로 行秦州事
하여 徵豳涇東秦岐之粟
하여 以給軍
하니 楊紹先
이 懼
하여 稱藩送質
注+④ 拔也, 虜複姓. 蚝, 七吏切. 惡蚝, 名也. 可朱渾, 虜三字姓, 道元其字, 名元.이러라
長史于謹이 言於泰曰 明公이 據關中險固之地하여 將士驍勇하고 土地膏腴하니 今天子가 在洛하여 迫於群凶하니 若陳公懇誠하여 請都關右하여 挾天子以令諸侯하고 奉王命以討暴亂하면 此桓文之業이요 千載一時也라하니 泰가 善之하다
髙歡이 復遣使하여 甘言厚禮로 以結泰하되 泰가 不受하고 封其書以聞하니 魏主가 命泰하여 引軍而東이어늘
泰가 使雍州刺史梁禦로 入據長安하니 魏主가 以泰爲關西大都督略陽縣公하고 承制封拜하다
目
王思政이 言於魏主曰 髙歡之心을 昭然可知니 洛陽은 非用武之地라 宇文泰가 乃心王室하니 今往就之하여 還復舊京하면 何慮不克이리잇가
魏主가 深然之하여 遣侍郎柳慶하여 見泰於髙平이어늘 泰가 請奉迎輿駕한대
魏主
가 復私謂慶曰 朕欲向荆州
하노니 何如
注+① 時賀拔勝爲荆州刺史.오 慶
이 曰 關中
은 形勝
이요 宇文泰
는 才略可依
어니와 荆州
는 地非要害
요 南逼梁冦
하니 臣愚未見其可
케이다
時에 東郡太守裴俠이 帥兵詣洛이어늘 王思政이 問以西巡之計한대 俠이 曰 宇文泰가 已操戈矛어늘 寧肯授人以柄이리오 雖欲投之나 恐無異避湯入火也로라
思政이 曰 然則何如而可오 俠이 曰 圖歡에 有立至之憂하고 西巡에 有將來之慮하니 且至關右하여 徐思其宜耳로라
思政이 然之하여 乃進俠於魏主하여 授左中郎將하다
初
에 歡
이 欲遷都於鄴
커늘 魏主不可
러니 至是
하여 復謀遷都
하여 遣騎鎭建興
하고 益河東及濟州兵
하고 擁諸州和糴粟
하여 悉入鄴
注+② 慕容永分上黨置建興郡, 魏爲建州.이러라
魏主
가 又以敕喻歡
하여 令歸兵罷戍
하고 送相州之粟
하고 使蔡儁受代
하고 邸珍出徐
한대 歡
이 不奉詔
注+③ 相州治鄴城.러라
魏主
가 以廣寧太守任祥
으로 兼僕射
한대 祥
이 棄官走渡河
하여 據郡待歡
注+④ 五代志 “建州沁水縣, 舊置廣寧郡.”이러라 魏主
가 乃下制書
하여 數歡罪惡
하고 召賀拔勝
하여 赴行在所
어늘
勝
이 以問掾盧柔
한대 柔
가 曰 髙歡
이 悖逆
하니 公
이 席卷赴都
하여 與决勝負
하여 死生以之
가 上策也
요 北阻魯陽
하고 南并舊楚
하고 東連兗豫
하고 西引關中
이 中策也
注+⑤ 江陵, 舊楚之郢都, 在其界內.요 擧三荆之地
하여 庇身於梁
하면 功名皆去
리니 下策也
라하니 勝
이 笑而不應
注+⑥ 三荊, 荊州․東荊州․南荊州也.이러라
魏主가 以宇文泰로 爲關西大行臺하고 令遣騎奉迎한대 歡이 遂勒兵南出하여 以誅斛斯椿爲名하고 以髙敖曹爲前鋒이어늘 宇文泰도 亦移檄州郡하여 數歡罪惡하고 自將大軍하여 發髙平하여 前軍이 屯弘農하다
目
七月
에 魏主
가 親勒兵十餘萬
하여 屯河橋
하고 以斛斯椿
으로 爲前驅
하여 陳於
山之北
하니 椿
이 請帥精騎二千
하여 夜渡河
하여 掩其勞弊
어늘 魏主
가 然之
러니
侍郎楊寛이 曰 假兵於人이면 恐生他變이니 椿이 若有功이면 是滅一髙歡하고 生一髙歡矣니이다
魏主
가 敕椿停行
하니 椿
이 歎曰 頃
에 熒惑
이 入南斗
러니 今上
이 信左右間構
하여 不用吾計
하니 豈天道乎
注+① 晉天文志曰 “南斗六星, 天廟也, 將有天子之事, 占於斗. 熒惑, 罰星, 入之, 天子不安其位, 後所謂天子下殿走是也.”아하다
宇文泰가 聞之하고 謂左右曰 髙歡이 數日에 行八九百里하니 此는 兵家所忌라 當乗便撃之로되 而主上이 以萬乗之重으로 不能度河决戰하여 方緣津據守하고 且長河萬里가 扞禦爲難이니 若一處得度하며 大事去矣라하고
即以趙貴
로 自蒲坂濟
하여 趣并州
하고 遣李賢
하여 將精騎一千
하여 赴洛陽
注+② 赴洛陽, 以迎魏主也.이어늘
魏主
가 使斛斯椿
으로 與潁川王斌之鎭虎牢
하고 賈顯智
로 鎭滑臺
注+③ 斌之, 鑒之弟也.러니 顯智
가 陰約降於歡
이어늘
軍司元玄
이 覺之
하고 馳還請益師
하니 遣大都督侯幾紹赴之
하여 戰於滑臺東
이러니 顯智
가 以軍降
하고 紹
가 戰死
注+④ 侯幾, 虜複姓.하며 歡
이 引軍度河
러라
斌之가 與椿爭權하여 還紿魏主云 歡兵이 已至라한대 魏主가 即召椿還하여 與南陽王寳炬淸河王亶廣陽王湛으로 以五千騎宿於瀍西하니
衆
이 知魏主將西
하고 亡者過半
이요 亶湛
도 亦逃歸
注+⑤ 亶, 擇之子. 湛, 深之子也. 瀍西, 瀍水之西, 在河南.러라
將軍獨孤信
이 單騎追魏主
注+⑥ 獨孤部與魏俱起, 三十六大姓之一也.어늘 魏主
가 歎曰 將軍辭父母捐妻子而來
하니 世亂識忠臣
이 豈虗言也
아하다
明日에 西奔長安이어늘 歡이 遂入洛陽하여 遣婁昭髙敖曹하여 帥勁騎하여 追魏主나 不及이러라
魏主
가 糗漿乏絶
하여 唯飲澗水
러니 至稠桑
하여 都督毛鴻賓
이 迎獻酒食
하여 始解飢渴
注+⑦ 弘農郡湖城縣有稠桑驛.이러라
歡이 集百官하여 責以處不諫諍出不陪從之罪하여 殺僕射辛雄以下數人하고 推淸河王亶爲大司馬하여 承制决事하다
目
東魏
가 既取荆州
러니 魏
가 以獨孤信
으로 爲刺史
하여 招懷之
하다 蠻酋樊五能
이 攻破淅陽郡
하여 以應魏
어늘 東魏刺史辛纂
이 欲討之
注+① 纂, 雄之從父兄也.한대
郎中李廣이 曰 淅陽이 深險하고 表裏群蠻하니 今少遣兵하면 不能制賊이요 多遣이면 則根本虗弱이니 脫不如意인댄 州城難保라
聞臺軍
이 不久應至
注+② 臺軍, 謂東魏所遣軍也.라하니 公但約勒屬城
하여 使完壘撫民以待之
하라 雖失淅陽
이라도 不足惜也
로라하되 纂
이 不從
이라가 而敗
하다
城民이 召獨孤信이러니 東魏가 遣田八能拒之하고 又遣張齊民하여 出信後어늘
信
이 謂其衆曰 今士卒
이 不滿千人
이요 首尾受敵
注+③ 謂田八能拒其前, 張齊民出其後也.하니 若還撃齊民
하면 士民
이 謂我退走
라하여 必來邀我
注+④ 士民, 謂淅陽之民.리니 不如進擊八能破之
하면 齊民自潰矣
라하고 遂擊破八能
하고 乗勝襲穰城
하니
辛纂이 出戰이라가 大敗하여 還趣城할새 門未及闔이어늘 信前驅武川楊忠이 叱門者曰 大軍이 已至하고 城中에 有應하니 爾等이 求生인댄 何不避走오하니 門者가 皆散이러라
忠이 帥衆入城하여 斬纂以徇하니 城中이 懾服이러라
信이 分兵定三荆이러니 居半歳에 東魏髙敖曹侯景이 將兵奄至城下하니 信이 兵少不敵하여 與楊忠皆犇梁하다
目
【目】 北魏 賀拔岳이 曹泥를 정벌하려 할 때, 도독 趙貴를 夏州로 보내 宇文泰와 함께 일을 도모하게 했다. 우문태가 말하기를, “조니는 외딴 城에 막혀 멀리 있으므로 걱정할 것이 못되지만 侯莫陳悅은 탐욕스럽고 신뢰가 없으니 먼저 도모해야 합니다.”라고 했지만, 따르지 않고 후막진열을 高平으로 불러 함께 조니를 토벌했다.
후막진열이 이미 翟嵩의 말을 들었던 터라 하발악을 해치려고 도모했다. 하발악이 여러 차례 후막진열과 만나며 연회를 열어 이야기를 나누자 長史 雷紹가 조심하라고 간언을 올렸지만 따르지 않았더니 결국 후막진열이 하발악을 유인해 죽였다.
하발악의 무리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했는데 후막진열이 마음에 주저하며 즉시 받아들이지 않고 水洛城으로 되돌아가 주둔하자, 하발악의 무리들이 흩어져 平涼으로 달아나서 누구에게도 귀속되지 않았다.
注+① ≪九域志≫에 의하면, “水洛城은 德順軍 서남쪽 100리 쯤에 있다.”고 하였다.
조귀가 말하기를, “夏州刺史 우문태는 재략이 세상의 으뜸이어서 원근 사람들이 귀의하고 상과 벌이 엄정하고 공평하여 병사들이 그 명령을 따르니 만일 그를 맞이해서 받들면 큰일을 이룰 것입니다.”라고 했다.
都督 杜朔周가 輕騎를 타고 우문태 쪽에 가서 喪事를 고하고 그를 맞이해 오겠다고 했다.
注+② 杜朔周의 본래 성은 赫連이고 曾祖 庫多汗이 난리를 피해 고친 것인데, 宇文泰가 명하여 원래의 성으로 복구하도록 하고 이름을 達이라 했다.
두삭주가 이르자 우문태가 장군, 막료, 빈객들과 함께 가야할 지 여부에 대해 논할 때 前 太中大夫 韓褒가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인데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후막진열은 우물 안 개구리입니다. 使君께서 가게 되면 반드시 생포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注+③ 後漢의 馬援이 公孫述을 만나본 뒤 돌아와 隗囂에게 이르기를, “子陽(公孫述)은 우물 안 개구리이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후막진열이 이미 하발악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있어 그를 도모하는 것이 실로 어려우니 우선 이곳에 머물러 그 변화를 살펴야 합니다.”라고 하자,
우문태가 말하기를, “후막진열이 이미 元帥 하발악을 살해했다면 응당 승세를 타고 곧장 平涼을 점거해야 하는데 水洛城으로 물러나 주둔하고 있으니 나는 그가 무능하다고 생각한다. 얻기 어렵고 잃기 쉬운 것은 기회이니 만일 일찍 가지 않으면 사람들의 마음이 떠날 것이다.”라고 하고,
이어서 諸將들과 盟約을 맺어 후막진열을 공격하기로 하고 輕騎를 타고 평량으로 달려갔다.
당시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뿔뿔이 도망가는 자들이 많았는데 우문태의 군사들이 그들을 노략질하려 하자, 두삭주가 말하기를, “宇文公께서 지금 죄 있는 자를 치고 백성들을 위로하려 하는데 어찌하여 적을 도와 학대를 일삼는가.”라고 하고, 백성들을 잘 보살펴 돌려보내니 원근 사람들이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귀의했다. 우문태가 이 소식을 듣고 가상하게 여겼다.
目
【目】 高歡이 侯景에게 賀拔岳의 무리를 불러 잘 보살피도록 했는데, 우문태가 安定에서 후경을 만나 말하기를, “賀拔公이 죽었지만 우문태가 여전히 생존해 있는데 卿은 뭘 하는 사람인가!”라고 하자, 후경이 결국 되돌아갔다.
우문태가 平涼에 이르러 하발악의 죽음에 곡하여 애통해하자 장사들이 슬픔과 함께 기쁨을 나타냈다. 고환이 또다시 후경과 張華原, 王基를 보내 우문태를 위로했으나 우문태가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겁주어 그곳에 머물게 하려 했는데, 장화원이 굽히지 않자, 우문태가 돌려보냈다.
왕기가 돌아와 말하기를, “우문태는 영웅호걸이니 그가 안정을 찾기 전에 격멸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고환이 말하기를 “卿은 賀拔岳과 侯莫陳悅을 보지 못했는가. 나는 계책을 써서 힘들이지 않고 그를 취할 것이다.”라고 했다.
魏主(元脩)가 元毗를 보내 하발악의 군사들을 위로하여 그들을 洛陽으로 불러들이게 하고, 아울러 후막진열을 부르니 후막진열이 고환에게 귀의한 터라 부름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우문태가 원비를 통해 表文을 올리기를, “臣 하발악이 갑자기 환란을 당하여 비명에 세상을 떠나서 都督 寇洛 등이 신에게 임시로 軍務를 관장하도록 했습니다. 지금 고환의 무리들이 이미 河東에 도착하고 후막진열이 여전히 水洛城에 있으며 병사들은 대부분 서쪽 지역 사람들이어서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부디 잠시 멈추었다 서서히 동쪽으로 이끌고 가게 하소서.”라고 했다.
注+① 河東은 또한 五原河의 동쪽을 말한다.
魏主가 우문태를 大都督으로 삼아 즉시 하발악의 군사를 통솔하게 했다.
하발악이 죽자 都督 李虎가 荊州로 달아나 賀拔勝에게 권유하여 하발악의 무리들을 거두도록 했으나 하발승이 따르지 않자 이호가 되돌아가다가 고환의 別將에게 붙잡혀 洛陽으로 보내졌다.
魏主가 마침 關中의 탈취를 도모하고 있던 터이라, 이호를 얻고 나서 대단히 기뻐하여 그를 衛將軍에 임명하여 우문태에게 가게 했다. 이호는 李歆의 玄孫이다.
우문태가 후막진열에게 보낸 편지에서 꾸짖기를, “그대가 국가의 적에게 달라붙어 함께 宗廟를 위태롭게 했다. 내가 이미 병사를 출동시켜 賀拔公을 위해 원수를 갚을 터이니 머지않아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注+② 〈‘指日相見’은〉 병사를 진격시켜 侯莫陳悅을 토벌한 것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僖公 28년에 이르기를, “아침에 서로 만나자.”라고 하였다.
目
【目】 宇文泰가 병사를 이끌고 隴으로 올라갈 적에 군령이 엄숙하여 털끝 하나도 범하는 일이 없자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다. 水洛城이 항복하자 侯莫陳悅이 上邽로 물러나 지키며 南秦刺史 李弼을 불러 함께 우문태를 막았다.
注+① 泰州는 치소가 上邽城에 있다. 李弼의 처는 侯莫陳悅의 이모이다. 그런데 이필이 성 전체를 이끌고 항복하자 후막진열의 군사들이 붕괴되고 후막진열은 목매달아 죽었다.
우문태가 상규에 들어와 관청의 곳간을 열어 병사들에게 상을 주었는데 측근이 銀甕 하나를 훔쳐 돌아오자 우문태가 인지하여 벌을 가하고 銀甕을 쪼개어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눠주었다.
후막진열에 속한 孫定兒가 항복하지 않은 채 수만의 무리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注+② 孫定兒는 당시에 豳州刺史였다. 우문태가 劉亮을 보내 습격하게 했다. 유량이 먼저 성 부근 높은 산 위에 큰 깃발을 세우고
注+③ 竪는 세운다는 뜻이다. 자신은 기마병 20기를 거느려서 달려 성안으로 쳐들어갔다.
손정아가 마침 주연을 베풀고 있었는데 유량이 병사를 지휘하여 그를 죽이고 두 명의 騎兵에게 멀리 성 밖에 있는 깃발을 가리키면서 명하기를, “大軍을 불러 들어오게 하라.”고 하니 성안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감히 움직이는 자가 없었다.
이에 앞서 옛 氐族王 楊紹先이 北魏의 혼란을 틈타 武興으로 도망해 돌아가서 다시 王이라 칭하였다. 氐族과 羌族, 吐谷渾族이 곳곳에서 반란을 일으켜 南岐에서부터 瓜, 鄯까지 州와 郡을 차지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우문태가 이필에게 原州를, 拔也惡蚝에게 南秦州를, 可朱渾道元에게 渭州를 수비하게 하고, 趙貴에게 秦州를 임시 관할하게 하여, 豳, 涇, 東秦, 岐 등의 곡식을 징수하여 군량미를 보급하게 하니 양소선이 무서워하여 藩屬이라 칭하며 人質을 보냈다.
注+④ 拔也는 오랑캐의 複姓이다. 蚝는 七吏의 切이니 惡蚝는 이름이다. 可朱渾은 오랑캐의 3자 姓이고 道元은 字이며 이름은 元이다.
長史 于謹이 우문태에게 말하기를, “明公께서 關中의 요새를 점거하여, 장수와 병사가 용맹스럽고 토지가 비옥합니다. 지금 天子(元脩)께서 洛陽에 계시어 흉악한 무리들에게 압박을 받고 있으니 만일 公의 진심을 진술하여 關右로 遷都를 요청해서 天子를 끼고서 諸侯를 호령하고 황제의 명을 받들어 포악한 무리들을 정벌한다면 이것은 齊 桓公과 晉 文公과 같은 대업이고 천재일우의 기회입니다.”라고 하자, 우문태가 훌륭하게 여겼다.
高歡이 다시 사신을 보내 달콤한 말과 후한 예우로 우문태와 교류를 맺으려 했으나 우문태가 받아들이지 않고 그 내용을 봉함하여 魏主에게 전하자, 魏主가 우문태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게 하였다.
우문태가 雍州刺史 梁禦에게 長安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점령하게 했다. 魏主가 우문태를 關西大都督 略陽縣公으로 삼고 承制(황제의 권한으로 일을 처결함)하여 관작을 임명하게 하였다.
目
【目】 王思政이 魏主에게 말하기를, “高歡의 마음을 훤히 알 수 있습니다. 洛陽은 무공을 펼칠 곳이 아닙니다. 宇文泰가 왕실에 충심을 다하고 있으니 지금 그곳으로 가서, 다시 옛 서울로 복귀한다면 어찌 성공하지 못할 우려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魏主가 적극 동의하여, 侍郎 柳慶을 보내, 高平에서 우문태를 만났는데 우문태가 직접 御駕를 맞이하겠다고 했다.
魏主가 다시 조용히 유경에게 말하기를, “짐이 荊州로 가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니,
注+① 당시 賀拔勝이 荆州刺史였다. 유경이 “관중은 지세가 뛰어나고 우문태의 지략이 의지할 만하지만 荊州는 要害地가 아닐뿐더러 남쪽으로 梁나라 도적과 가까우니 신은 그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했다.
당시 東郡太守 裴俠이 병사를 이끌고 洛陽으로 오자, 왕사정이 서쪽으로 巡行할 계책을 묻자, 배협이 말하기를, “우문태가 이미 무기를 갖고 있는데 어찌 남에게 그 자루를 내주려 하겠습니까. 비록 그에게 의지하고 싶다 해도 끓는 물을 피하려다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을까 우려됩니다.”라고 하니
왕사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라고 하자, 배협이 말하기를, “고환을 도모하게 되면 곧장 다가올 우환이 있고 서쪽으로 巡行하게 되면 장래의 염려가 있으니 우선 關右로 가서 가만히 적당한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사정이 동의하여 배협을 魏主에게 추천해서, 左中郞將에 임명했다.
예전에 고환이 鄴城으로 천도하려 하자, 魏主가 안 된다고 했었는데, 이때 다시 遷都를 도모하여 기병을 보내 建興을 지키게 하고 河東과 濟州에 병사를 증파하고, 각 州의
한 곡식을 모아 모두 업성으로 들여오게 했다.
注+② 〈西燕의〉 慕容永이 上黨을 나눠 建興郡을 설치했는데 北魏 때에 建州로 삼았다.
魏主가 고환에게 勅書를 다시 보내어 병사들을 철회하고 수비를 중지하고 相州의 곡식을 보내고 蔡儁에게 代任을 받도록 하고 邸珍에게 徐州를 나가게 하라고 했지만, 고환이 그 조칙을 받들지 않았다.
注+③ 相州의 치소는 鄴城이다.
魏主가 廣寧太守 任祥에게 僕射를 겸직하게 하자, 임상이 관직을 버리고 黃河를 건너가 郡을 점거한 채 고환을 기다렸다.
注+④ ≪五代志≫를 살펴보면 “建州 沁水縣은 과거에 廣寧郡을 설치했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칙서를 내려 고환의 죄악을 낱낱이 거론하고 賀拔勝을 불러 行在所로 달려오게 했는데,
하발승이 掾吏 盧柔에게 의견을 묻자, 노유가 말하기를, “고환이 명령을 어기고 거역하니 公께서 모든 군사를 이끌고 都城으로 가서 목숨을 걸고 그와 승부를 겨루어 생사를 여기에 거는 것이 上策이고, 북쪽으로 魯陽을 막고, 남쪽으로 옛 楚나라 땅을 병합하고, 동쪽으로 兗州ㆍ豫州와 연계하고, 서쪽으로 關中을 끌어들이는 것이 中策이고,
注+⑤ 江陵은 옛 楚나라의 郢都로, 그 경계 안에 있다. 三荊의 땅을 전부 주어 梁나라에 보호를 청하게 되면 공로와 명성이 모두 사라질 것이니 下策입니다.”라고 하니, 하발승이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注+⑥ 三荊은 荊州, 東荊州, 南荊州이다.
魏主가 우문태를 關西大行臺로 삼고 기병을 보내 그를 맞이하게 했다. 고환이 마침내 병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나가서, 斛斯椿을 처벌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고 髙敖曹를 선봉으로 삼자, 우문태 또한 각 州와 郡에 檄文을 보내, 고환의 죄악을 낱낱이 거론하고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高平을 출발하여, 그 선발대가 弘農에 주둔했다.
目
【目】 7월에 魏主가 직접 십여만의 병사를 이끌고 河橋에 주둔하고 斛斯椿을 선봉으로 삼아 邙山 북쪽에 진지를 구축했다. 곡사춘이 정예 기병 2천을 이끌고 밤에 黃河를 건너 피로한 적들을 엄습하겠다고 하니, 魏主가 동의하였다.
侍郎 楊寛이 말하기를, “다른 사람에게 병마를 내어주면 다른 변고가 발생될까 우려됩니다. 곡사춘이 만일 공을 세우게 되면, 이는 하나의 高歡을 멸망시키고 또 다른 고환을 발생시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魏主가 곡사춘에게 칙서를 내려 발길을 멈추라고 하자, 곡사춘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요사이 熒惑이 南斗로 들어갔는데 지금 皇上이 근신의 이간질하는 말을 믿고 나의 계책을 쓰지 않으니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
注+① ≪晉書≫ 〈天文志〉를 살펴보면 “南斗의 6개 별이 天廟인데 天子의 일이 있게 되면 南斗로 점을 친다. 熒惑은 罰星인데 이곳으로 들어오면 天子의 자리가 불안하다. 훗날 이른바 ‘天子가 전각을 내려와 달아났다.’가 그것이다.”라고 하였다.
宇文泰가 이 말을 듣고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고환이 며칠 사이에 8, 9백 리를 행군했으니 이는 병법에서 꺼리는 일이다. 마땅히 이 기회를 틈타 공격해야 하나, 主上이 萬乘의 중하신 몸으로 황하를 건너 결전을 벌일 수 없어 나루를 따라 굳게 지키고 계시고, 또 만 리의 황하는 적들을 방어하기 어려운데 만일 한 곳이라도 건너오게 되면 大事는 끝장이다.”라고 하고,
즉시 趙貴에게 蒲坂에서 황하를 건너 幷州로 가게 하고 李賢에게 정예 기병 1천을 거느리고 洛陽으로 가게 했다.
注+② 洛陽으로 가서 魏主를 맞이하는 것이다.
魏主가 곡사춘에게 潁川王 元斌之와 함께 虎牢를 지키게 하고 賈顯智에게 滑臺를 지키게 했는데,
注+③ 元斌之는 元鑒의 아우이다. 가현지가 남몰래 고환에게 항복하겠다고 약속했다.
軍司 元玄이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돌아와 병사의 증파를 요청하자, 魏主는 大都督 侯幾紹를 보내 滑臺 동쪽에서 싸움이 벌어졌는데 가현지가 군사를 이끌고서 항복하고, 후기소는 전사했으며,
注+④ 侯幾는 오랑캐의 複姓이다. 고환이 병사를 이끌고 黃河를 건넜다.
원빈지가 곡사춘과 권력을 다툰 터여서, 돌아와서 魏主를 속여, “고환의 병사가 이미 도착했습니다.”라고 하자, 魏主가 곧장 곡사춘을 불러들여 南陽王 元寳炬, 淸河王 元亶, 廣陽王 元湛과 함께 5천의 騎兵을 이끌고 瀍水 서쪽에 야영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魏主가 서쪽으로 갈 것이라 짐작하고 도망가는 자들이 절반이 넘고 이때 원단, 원담도 도망해 돌아갔다.
注+⑤ 王亶은 王擇의 아들이고 王湛은 王深의 아들이다. ‘瀍西’는 瀍水의 서쪽이며 河南에 있다.
장군 獨孤信이 單騎로 魏主를 뒤따르자
注+⑥ 獨孤部는 北魏와 함께 일어났는데, 〈북위의〉 서른여섯 大姓 가운데 하나이다. 魏主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장군이 부모를 떠나고 처자를 버린 채 따라왔으니 세상이 혼란할 때 충신을 알아본다는 말이 어찌 빈말이겠는가.”라고 했다.
이튿날 魏主는 서쪽 長安으로 달려갔는데, 고환이 결국 洛陽으로 들어온 뒤 婁昭와 髙敖曹를 보내 날랜 기병을 이끌고 魏主를 추격하게 했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魏主가 곡식과 마실 거리가 다 떨어져 시냇물만 마셨는데 稠桑에 이르자 都督 毛鴻賓이 맞이하여 술과 음식을 올리면서 비로소 굶주림과 목마름이 해소되었다.
注+⑦ 弘農郡 湖城縣에 稠桑驛이 있다.
고환이 백관을 모아서, 皇上이 조정에 있을 때 간언하지 않고 밖에 나갈 때 따르지 않은 죄를 물어 僕射 辛雄 이하 몇몇 사람들을 처형한 뒤 淸河王 원단을 大司馬로 삼아 承制하여 일을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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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宇文泰가 趙貴와 梁禦에게 기병을 이끌고 魏主(元脩)를 맞이하여 黃河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갈 때 魏主가 양어 등에게 말하기를, “이 물은 동쪽으로 흐르는데 짐은 서쪽으로 올라가니 만일 다시 洛陽을 보게 되어 皇陵과 宗廟를 친히 拜謁하게 되면 이는 卿들의 공이다.”라고 하고, 魏主와 좌우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우문태가 儀仗과 護衛를 갖춰 魏主를 맞이하고 東陽驛에서 알현하며 冠을 벗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신이 도적의 포학을 막지 못하여 御駕를 播遷하게 했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라고 하자,
注+① ≪水經注≫를 살펴보면 “渭水가 長安城 북쪽을 지난 뒤 또 동쪽으로 新豊을 지나고 동쪽으로 西陽水와 합류한 뒤 또다시 동쪽으로 東陽水와 합류한다. 두 강물은 모두 남쪽으로 廣鄉原으로 나간다.”고 하였다. 魏主가 말하기를, “짐이 부덕하여 도적의 침략을 불러왔다. 지금 社稷을 공에게 맡기노니, 公은 힘쓰도록 하라.”고 했다.
마침내 長安으로 들어와서 우문태를 大將軍 雍州刺史 兼尙書令으로 삼아 軍事와 國政을 모두 결정하여 처리하도록 하고, 尙書 두 자리를 별도로 설치하여 機務를 나누어 관장하게 하였는데 毛遐와 周惠達에게 맡도록 했다. 당시 軍國 사무가 막 시작한 즈음이라, 두 사람이 양식을 저장하고 무기를 제조하고 병사와 병마를 선발하여, 北魏의 조정이 이들에게 의뢰했다.
이에 앞서 熒惑이 南斗에 들어와 나갔다가 다시 되돌아와 60일을 머물렀는데 梁主(蕭衍)가, 속담에 ‘형혹이 남두에 들어오면 천자가 전각을 내려와 달아난다.’라고 하여, 맨발로 전각을 내려가 재앙의 소멸을 기도했었는데, 魏主가 서쪽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말하기를, “오랑캐들도 天象에 호응하는 것인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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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高歡이 직접 뒤쫓아서 魏主(元脩)를 맞이해 오려 하여 弘農에 이르고 마침내 潼關을 공격하여 무찌르고 華陰으로 전진하여 주둔했다. 賀拔勝이 부대를 이끌고 서쪽 關中을 향하다가 淅陽에 이르러 고환이 이미 화음에 주둔했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가려 하자
注+① 淅은 思曆의 切이다. 漢나라 때에는 析縣은 弘農郡에 속하였고, 宋나라 ≪永初志≫에는 順陽郡에 속하였고,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의거하면 析陽郡은 析州에 속하였고, ≪五代志≫에 의거하면 과거에 析州 內鄕縣에 淅陽郡을 설치했었다.
行臺左丞 崔謙이 말하기를, “지금 황실이 전복되어 主上이 蒙塵하고 있으니 公께서는 의당 이틀에 갈 길을 하루에 달려가 行在所에서 主上을 뵌 뒤 宇文行臺(宇文泰)와 함께 힘을 합쳐서 大義를 소리쳐 거행한다면 천하가 어찌 멀리서 감지하고 소리 울림처럼 호응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를 버리고 물러난다면 저마다 뿔뿔이 흩어지지 않을까 우려되니, 기회를 한 번 잃으면 후회해도 다시 되돌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으나, 따르지 않고 결국 돌아갔다.
고환이 晉陽을 출발할 때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40차례의 表文을 올렸지만 魏主가 답하지 않자, 이내 되돌아가 侯景 등을 荊州로 향하게 하였다. 하발승이 도착하자, 후경이 이를 맞아 공격하니, 하발승이 패하여 梁나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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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東魏가 이미 荊州를 탈취했는데 西魏가 獨孤信을 荊州刺史로 삼아 그를 달랬다. 蠻族의 추장 樊五能이 淅陽郡을 격파하여 西魏에 호응하자 東魏의 荊州刺史 辛纂이 그를 공격하려 하였는데,
注+① 辛纂은 辛雄의 從父兄이다.
郎中 李廣이 말하기를, “석양은 지세가 깊으며 험난하고 안팎에 수많은 蠻族들이 있으니, 지금 병력을 조금 파견하면 적을 제압할 수 없고 병력을 많이 파견하면 뿌리가 허약해질 것입니다. 만일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땐 州城을 보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臺軍(朝廷의 군대)이 머지않아 도착할 것이라 하니,
注+② 臺軍은 東魏가 파견한 군사를 말한다. 公은 荊州 소속 성들과 굳게 약속하여 그들로 하여금 성벽을 굳게 갖추고 백성들을 돌보며 기회를 기다리게 해야 합니다. 설령 석양을 잃는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지만 신찬이 따르지 않았다가 패하였다.
성안의 백성들이 獨孤信을 부르자 東魏가 田八能을 보내 이를 가로막고, 또 張齊民을 보내 독고신의 후미로 출격하게 하자,
독고신이 무리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병사들이 1천 명이 안 되고 앞뒤로 공격을 받고 있으니
注+③ 〈‘首尾受敵’은〉 田八能이 그 앞을 막고 張齊民이 그 뒤를 공격한 것을 말한다. 만약 뒤돌아 장제민을 공격하게 되면 土民들이 우리가 후퇴하는 것이라 하여 반드시 와서 우리를 요격할 것이다.
注+④ 士民은 淅陽의 백성을 말한다. 그러니 진격해 전팔능을 공격하면 장제민이 저절로 붕괴될 것이니 이렇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고 결국 전팔능을 공격하고 승세를 틈타 穰城을 습격했다.
신찬이 나와 싸우다가 대패하여 성안으로 되돌아갔는데, 성문이 미처 닫히기 전에 독고신의 선봉장 武川 출신 楊忠이 문지기에게 소리쳐 꾸짖기를, “대군이 이미 도착했고 성안에 호응하는 사람이 있는데 너희들이 살려고 한다면 어찌 피해 달아나지 않는가.”라고 하니, 문지기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양충이 무리들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와서 신찬을 참수해서 뭇사람들에게 내보이니 성안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굴복했다.
독고신이 병사를 나눠 三荊을 평정했는데 그로부터 반년 뒤에 東魏 髙敖曹와 侯景이 병사들을 이끌고 갑자기 성 아래로 이르자, 독고신이 병사의 부족으로 대적하지 못하여 양충과 함께 모두 梁나라로 도망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