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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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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五年이라
秦太初五 燕建興五 後秦建初五 魏登國五年이라
春正月 西燕主永 冦洛陽이어늘 朱序擊走之하고 還擊翟遼하여 하다
西燕主永 引兵向洛陽이어늘 朱序自河陰北濟河하여 擊敗之하니 走還上黨이라
序追至白水注+① 水經註 “白水, 出上黨高都縣故城西, 東流歷天井關.”러니 翟遼謀向洛陽이라
序乃引兵還하여 擊走之하고 留將軍朱黨하여 守石門하고 使其子略으로 督護洛陽하고 身還襄陽하다
二月 以王恭으로 都督青兗等州軍事하다
琅邪王道子 恃寵驕恣하니 帝浸不能平하여 欲選時望爲藩鎭以潛制之하여
問於太子左衛率王雅曰 吾欲用王恭, 殷仲堪하노니 何如注+① 仲堪, 融之孫也.
雅曰 恭 風神簡貴하며 志氣方嚴하고 仲堪 謹於細行하고 以文義著稱이라 然皆峻狹自是하고 幹略不長하니 天下無事 足以守職이어니와 若其有事 必爲亂階矣리이다
帝不從하고 使恭鎭京口하니 蘊之子也
夏四月 秦將軍魏揭飛 攻後秦之杏城하니 雷惡地應之어늘 後秦主萇 擊斬揭飛하니 惡地降하다
秦將軍魏揭飛 帥氐胡하여 攻後秦將姚當成於杏城하니 將軍雷惡地 應之하여 攻李潤注+① 李潤, 地名, 在邢望南. 李延壽曰 “馮翊東, 有李潤鎭.”이어늘
後秦主萇 欲自擊之한대 群臣曰 陛下不憂六十里符登하시고 乃憂六百里魏揭飛 何也注+② 時, 登趣長安, 據新豐之千戶固.잇고
萇曰 登 非可猝滅이요 吾城亦非登所能猝拔이어니와 惡地 智略 非常하니 若南引掲飛하고 東結董成하여 得杏城李潤而據之하면 長安東北 非吾有也注+③ 董成, 屠各種也, 時據北地.리라 乃潛引精兵一千六百赴之하다
掲飛惡地 有衆數萬하니 氐胡赴之者 首尾不絶이라
見後秦兵少하고 悉衆攻之어늘 固壘不戰하여 示之以弱하고 潛遣騎出其後하니 揭飛兵 擾亂이라
縱兵擊之하여 斬掲飛及其將士萬餘級하니 惡地請降이어늘 待之如初하다
命姚當成하여 於所營之地 每柵孔中樹一木하여 以旌戰功注+① 掘地作孔, 竪木以爲柵. 故有柵孔.하고 歲餘 問之한대 當成曰 營地太小 已廣之矣로이다
萇曰 吾自結髪以來 與人戰 未嘗如此之快 以千餘兵으로 破三萬之衆하니 營地 惟小爲奇 豈以大爲貴哉리오
起兵廣鄉注+① 魏收地形志 “鄭縣, 有廣鄕原.” 鄭縣, 時屬京兆.하여 移檄三輔曰 姚萇 凶虐하여 毒被神人이라 吾屬 世蒙先帝之仁注+② 先帝, 謂秦主堅.하여 非常伯, 納言之子 卽卿校, 牧守之孫也注+③ 常伯, 侍中也. 納言, 尙書也. 與其含恥而存으론 孰若蹈道而死
於是 三輔壁壘 皆應之호되 獨鄭縣人苟曜 不從하고 聚衆數千하여 附於後秦하여 擊質하니 走洛陽注+④ 陳濟曰 “郭質起兵應符秦, 獨苟曜不從, 故附於後秦而擊質.”하다
八月 劉牢之 擊翟遼敗之하니 張願 來降하다
◑ 九月 以王國寶爲中書令하고 王珣爲尙書僕射하다


【綱】 晉나라(東晉) 孝武皇帝 太元 15년이다.
【目】 秦나라(前秦) 符登 太初 5년이고, 燕나라(後燕) 世祖 慕容垂 建興 5년이고, 後秦 太祖 姚萇 建初 5년이고, 魏나라(北魏) 太祖 道武帝 拓跋珪 登國 5년이다.
【綱】 봄 정월에 西燕主 慕容永이 洛陽을 침략하자, 〈晉나라(東晉)의〉 朱序가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돌아와 翟遼를 공격하여 또다시 패주시켰다.
【目】 西燕主 慕容永이 군대를 이끌고 洛陽을 향하였는데 朱序가 河陰의 북쪽에서 河水를 건너 공격하여 패퇴시키니, 모용영이 달아나 上黨으로 돌아갔다.
주서가 추격하여 白水에 이르렀는데,注+① ≪水經註≫에 “白水는 上黨 高都縣 옛 성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흘러 天井關을 지난다.”라고 하였다. 마침 翟遼가 낙양을 향할 것을 도모하였다.
주서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 적요를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장군 朱黨을 남겨두어 石門을 지키게 하고 자기 아들 朱略으로 하여금 낙양을 감독하여 지키게 하고 자신은 襄陽으로 돌아갔다.
【綱】 2월에 〈晉나라(東晉)가〉 王恭을 都督青․兗等州軍事로 삼았다.
【目】 琅邪王 司馬道子가 황제(孝武帝)의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니, 황제가 점점 불평이 쌓여 당시 명망 있는 자를 뽑아 藩鎭을 삼아서 은근히 제재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太子左衛率 王雅에게 묻기를 “내 王恭과 殷仲堪을 중용하려 하는데, 어떻겠는가?” 하니,注+① 殷仲堪은 殷融의 손자이다.
왕아가 대답하기를 “왕공은 풍채가 소탈하고 고귀하며 志氣가 방정하고 엄하며, 은중감은 작은 행실을 삼가고 문장으로 이름이 났습니다. 그러나 모두 성격이 준엄하고 좁아서 자기가 옳다 하며 재간과 지략이 뛰어나지 못하니, 천하에 일이 없을 때에는 충분히 직책을 맡길 만하지만 만약 일이 있으면 반드시 환란의 단서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왕공으로 하여금 京口에 진주하게 하니, 왕공은 王蘊의 아들이다.
【綱】 여름 4월에 秦나라(前秦) 장군 魏揭飛가 後秦의 杏城을 공격하니, 雷惡地가 秦나라에 호응하므로 後秦主 姚萇이 공격하여 위게비를 참수하니, 뇌악지가 항복하였다.
【目】 秦나라 장군 魏揭飛가 氐族과 胡族을 거느리고서 後秦의 장수 姚當成을 杏城에서 공격하니, 장군 雷惡地가 秦나라에 호응하여 李潤을 공격하였다.注+① 李潤은 지명이니, 邢望의 남쪽에 있다. 李延壽가 말하기를 “馮翊의 동쪽에 李潤鎭이 있다.”라고 하였다.
後秦主 姚萇이 직접 공격하려고 하자, 신하들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60리 안에 있는 符登을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600리에 있는 위게비를 근심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라고 하니,注+② 이때 符登이 長安으로 달려가서 新豐의 千戶固를 점령하였다.
요장이 말하기를 “부등은 갑자기 멸망시킬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우리의 城(長安) 또한 부등이 쉽게 함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뇌악지는 지략이 비상하니, 만약 남쪽으로 위게비를 끌어들이고 동쪽으로 董成과 결탁하여 행성과 이윤을 얻어 점거하면 장안의 동북쪽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다.”라고 하였다.注+③ 董成은 屠各의 종족이니, 이때 北地를 점령하였다. 요장은 마침내 은밀히 정병 1600명을 데리고 달려갔다.
【目】 魏揭飛와 雷惡地가 수만의 병력을 보유하니, 그들에게 달려가는 氐族과 胡族의 대열이 끊이지 않았다.
後秦의 군대가 적은 것을 보고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공격하자, 姚萇은 보루를 굳게 지키고 싸우지 아니하여 약함을 보여주면서 은밀히 그들의 후미로 기병을 내보내니, 위게비의 군대가 소란하였다.
요장이 군대를 풀어 공격하여 위계비와 그의 장병 만여 명의 수급을 베니, 뇌악지가 항복을 청하므로, 요장은 그를 처음과 같이 대우하였다.
【目】 姚萇은 姚當成에게 명하여 營地의 안에 목책의 구멍 가운데마다 한 개의 나무를 세워서 戰功을 표시하게 하였는데,注+① 땅을 파 구멍을 만들고 나무를 세워 목책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목책의 구멍이 있는 것이다. 1년이 지난 뒤에 요당성에게 묻자, 요당성이 말하기를 “영지가 너무 작아서 이미 넓혔습니다.”라고 하였다.
요장이 말하기를 “내 한 이래로 적과 싸우면서 일찍이 이처럼 통쾌한 전쟁은 없었으니, 1천여 명의 병력으로 3만 명의 적군을 격파하였다. 영지는 다만 적은 것이 좋다. 어찌 큰 것을 귀하게 여기겠는가.”라고 하였다.
【綱】 가을 7월에 馮翊 사람 郭質이 군대를 일으켜 秦나라(前秦)에 호응하였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目】 郭質이 廣鄉에서 군대를 일으키고서注+①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鄭縣에 廣鄕原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鄭縣은 이때 京兆에 속하였다. 三輔 지역에 격문을 돌리기를 “姚萇이 흉악하고 포학해서 해독이 神과 사람에게 끼친다. 우리들은 대대로 先帝의 인자함을 입어서注+② 先帝는 秦主 符堅을 이른다. 常伯과 納言의 자식이 아니면 바로 卿校(九卿․校尉)와 牧守의 후손이니,注+③ 常伯은 侍中이고 納言은 尙書이다. 그 치욕을 참고 생존하기보다는 어찌 道를 따르다가 죽는 것만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삼보 지역의 壁壘들이 모두 호응하였는데, 오직 鄭縣 사람 苟曜가 따르지 않고 수천 명의 무리를 모아 後秦에게 붙어서 곽질을 공격하니, 곽질이 洛陽으로 달아났다.注+④ 陳濟가 말하기를 “郭質이 군대를 일으켜 符秦에 호응했으나 홀로 苟曜가 따르지 않았으므로 後秦에 붙어서 곽질을 공격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綱】 8월에 〈晉나라(東晉)의〉 劉牢之가 翟遼를 공격하여 패배시키니, 張願이 秦나라(前秦)에 와서 항복하였다.
【綱】 9월에 〈晉나라(東晉)가〉 王國寶를 中書令으로 삼고 王珣을 尙書僕射로 삼았다.


역주
역주1 又走之 : “‘又走之’라고 쓴 것은 朱序를 거듭 가상히 여긴 것이다.[書又走之 重嘉序也]” ≪書法≫
역주2 結髮 : 처음 冠禮를 하여 성년이 되었을 적에 곧바로 戰陣에 있었음을 말한다.(≪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4권 下)
역주3 馮翊人……不克 : “보통 사람일 뿐이고 또 이기지 못하였는데 어찌하여 썼는가. 의리를 인정한 것이다. 진실로 의리에 맞으면 비록 보통 사람이라도 반드시 썼다. 그러므로 漢나라에는 析 사람을 썼고,(帝玄 更始 원년(23)이다.) 秦나라는 馮翊 사람을 썼고,(이해(390)이다.) 唐나라는 虢州 사람을 쓴 것이다.(中宗 嗣聖 4년(687)이다.)[人耳 且不克 何以書 予義也 苟義也 雖人必書 故漢書析人(帝玄更始元年) 秦書馮翊人(是年) 唐書虢州人(中宗嗣聖四年)]” ≪書法≫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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