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綱] 3월에 北魏가 沙門으로 나이 50세 이하인 자는 환속시켰다.注+① 〈“沙門五十以下者”는〉 힘이 세고 건장하기 때문에 그들을 그만두게 하여 백성으로 만들어 征役에 종사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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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高句麗가 前 北燕王 馮弘을 죽였다.
目
[目] 예전에 北燕王 馮弘이 遼東에 도착하자, 高句麗王 高璉(長壽王)이 사신을 보내 노고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龍城王注+① 北燕王은 龍城에 都邑하였으므로 龍城王이라 불렀다. 馮君께서 이렇게 들판에 와서 머물고 있으니, 군사와 말이 얼마나 피로합니까.”라고 하니, 풍홍이 부끄러워하면서도 분노하여 조서를 내려 고구려왕을 꾸짖었다.
高句麗는 풍홍을 平郭에 있도록 하였다가 얼마 후에 다시 北豐으로 옮겼다. 풍홍은 본래 고구려를 업신여겨서, 정령과 형벌을 시행하고 상과 벌을 줄 때 자기 나라에 있을 때처럼 하였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마침내 풍홍의 시종을 빼앗고, 풍홍의 太子 馮王仁을 데려가서 볼모로 삼았다.
풍홍이 고구려를 원망하여 宋나라에 사신을 보내 자신을 영접해줄 것을 요청하니, 宋主가 사신을 보내 맞이하였다. 고구려는 결국 풍홍을 죽이고 풍홍의 자손 10여 명을 아울러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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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가을 7월에 北魏가 柔然을 정벌하였으나 오랑캐를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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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이때 漠北에 큰 가뭄이 들어서 물과 풀이 없으니, 사람과 말이 많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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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겨울 11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雷次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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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宋나라가 四學을 설립하고 雷次宗에게 給事中을 제수였는데,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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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豫章 사람 雷次宗이 학문을 좋아하여 廬山에注+① 廬山은 尋陽에 있다. 隱居하였다. 일찍이 불러서 散騎侍郎을 삼았는데 취임하지 않았다.
이해에 處士 신분으로 建康에 초빙되어 와서 그를 위하여 雞籠山에 學館을 열어注+② 爲(위하여)는 去聲이다. 雞籠山은 臺城 北郊에 있다. 學徒들을 모아 敎授하도록 하였다.
宋主가 여러 번 뇌차종의 학관에 행차하여 뇌차종을 시켜서 巾褠(선비는 두건과 홑옷을 착용하여 盛服한다.) 차림으로注+④ 巾은 巾幘을 말하고, 褠는 單衣를 말한다. 江南 人士들은 교제할 때에 盛服을 차려 입는데, 대개 朝服 다음으로 입는 옷이다. 侍講하게 하고 물자 공급도 매우 후하게 주었고 또 給事中으로 임명하였는데 취임하지 않았다. 오랜 뒤에 廬山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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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司馬溫公(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역사는 儒學의 일부분이며 문학은 유학의 나머지 일이나, 老莊의 虛無에 이르러서는 진실로 가르침으로 삼을 것이 아니다. 무릇 학문은 道를 탐구하는 방도이니 천하에 두 개의 道가 없는 것이다. 어찌 四學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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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宋主는 성품이 인자하고 후덕하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政事에 부지런하여 법을 지키면서 준엄하지 않고 남을 포용하면서 해이하지 않았다. 百官이 모두 오랫동안 직위에 있었고 지방관들은 6년을 임기로 결정하니, 관리는 구차하게 면직되지 않았고 백성들은 의탁하는 점이 있었다.
30년 동안 사방 영토 안이 편안하고 무사하여 戶口가 증가하여 세금을 내거나 요역을 제공하는 것이 歲賦에 그칠 뿐이었고, 아침에 나가 저녁에 귀가할 때까지 백성들이 자신의 일을 할 뿐이었다.注+① “歲賦”는 정규 세금이니, 〈“止於歲賦”는〉 규정 세액 이외의 것을 백성들에게 취하는 것이 없음을 말한다. 自事는 백성이 스스로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 민가에서는 글을 읽는 소리가 서로 들려서 선비들은 志操를 돈독히 하고, 향촌에서는 경박함을 부끄러워하였다. 江左(宋나라)의 風俗이 이 당시에 아름다웠기 때문에 후세에 정치를 말하는 자는 모두 元嘉時代를 칭송하였다.
역주
역주1魏罷沙門五十以下者 :
“廢佛(魏武의 法難)의 징조이다. 이 뒤로 6년 만에 사사로이 沙門을 양육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있게 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僧侶를 가려낸 것을 기록한 것이 세 번이다(이해(438)와 唐 高祖 武德 9년(626), 玄宗 開元 2년(714)이다.).[廢佛教之漸也 後六年而有私養沙門之禁矣 終綱目 書沙汰僧尼三(是年 唐高祖武德九年 玄宗開元二年)]” ≪書法≫
역주2宋立四學……不受 :
“‘立四學’이라고 기록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나무란 것이다. 道는 하나일 뿐이니, 儒學은 통하지 않는 것이 없는데 또다시 史學과 文學의 구분을 두는 것은 본디 이미 잘못된 것이다. 玄學이 무엇을 하는 것인데, 유학과 나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資治通鑑綱目≫에서 ‘立學’을 기록한 것은 모두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오직 漢나라 靈帝의 鴻都門學과 劉表의 學校와 宋나라 四學만이 나무라는 말이 된다.[書立四學 何 譏也 道一而已 儒無不通 又有史學文學之分 固已非矣 玄何爲者 而可與儒竝列哉 綱目書立學 皆美也 惟靈帝鴻都門學 劉表學校與宋四學爲譏辭]” ≪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