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0)

자치통감강목(10)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0)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戊子年(208)
무자년戊子年(208)
十三年이라 春正月 曹操還鄴하여 作玄武池하여 以肄舟師注+鄴城, 有玄武苑, 操鑿池其中.하다
나라 효헌황제 건안孝獻皇帝 建安 13년이다. 봄 정월에 조조曹操업성鄴城으로 돌아와 현무지玄武池를 만들어 주사舟師(수군)를 훈련시켰다.注+업성鄴城현무원玄武苑이 있었는데, 조조曹操가 이 안에 못(현무지玄武池)을 판 것이다.
◑孫權 擊江夏太守黄祖하여 破斬之하다
손권孫權강하태수 황조江夏太守 黄祖를 격파하여 그를 참수하였다.
巴郡甘寧 將僮客八百人하여 歸劉表注+僮, 本作童. 說文 “男有罪曰奴, 奴曰童, 女曰妾.” 徐曰 “童, 卽罪人之子, 沒官, 供給使者也.”러니 觀表事勢 終必無成하고 欲東入吳호되
甘寧甘寧
】 처음에 파군巴郡 사람 감녕甘寧동객僮客 800명을 거느리고 유표劉表에게 귀의하였는데注+은 본래 으로 되어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남자 중에 죄가 있는 자를 라 하니, 이라 하고 여자를 이라 한다.” 하였는데, 서현徐鉉이 말하기를 “은 바로 죄인罪人의 자식으로 관청에 적몰되어 부역에 종사하는 자이다.” 하였다., 유표의 사세事勢가 끝내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을 내다보고는, 동쪽으로 오군吳郡(뒤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黄祖在夏口하여 軍不得過 乃留하여 依祖三年 祖以凡人畜之注+應劭曰 “沔水, 自江夏, 別至南郡華容, 爲夏水, 過江夏郡, 而入于江, 蓋指夏水入江之地爲夏口.” 庾仲雍曰 “夏口, 一曰沔口, 或曰魯口.” 水經註曰 “沔水南至江夏沙羨縣北, 南入于江.” 然則曰夏口以夏水得名, 曰沔口以沔水得名, 曰魯口以魯山得名, 實一處也.러니
그러나 황조黄祖하구夏口에 있어서 군대가 통과할 수 없었으므로, 감녕이 이에 머물러 황조에게 3년 동안 의지하였는데, 황조가 그를 보통 사람으로 대하였다.注+응소應劭가 말하기를 “면수沔水강하江夏로부터 따로 흘러 남군 화용南郡 華容에 이르러 하수夏水가 되고 강하군江夏郡을 지나 장강長江으로 들어가니, 하수夏水가 장강으로 들어가는 지역을 가리켜 하구夏口라 한다.” 하였다. 이 말하기를 “하구夏口는 일명 면구沔口이고 혹은 노구魯口라 한다.” 하였다. ≪수경주水經註≫에 “면수沔水는 남쪽으로 강하江夏사선현沙羨縣 북쪽에 이르러 남쪽으로 장강에 들어간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하구夏口하수夏水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이고, 면구沔口면수沔水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이고, 노구魯口노산魯山 때문에 이름을 얻은 것이니, 실로 한 곳이다.
孫權 擊祖하니 祖軍敗走어늘 權校尉凌操 急追之注+凌操, 姓名.한대 射殺操하니 祖得免하다
손권孫權이 황조를 공격하니 황조의 군대가 패주敗走하였는데, 손권의 교위校尉능조凌操가 급히 추격하였다.注+능조凌操는 사람의 성명이다. 감녕이 〈뒤에 있다가〉 능조를 사살射殺하니, 이 때문에 황조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軍罷還營 待寧如初하고 都督蘇飛 數薦寧호되 不用이라 乃白以爲邾長注+邾縣, 屬江夏郡. 長, 令長也.하니
군대를 해산하고 진영으로 돌아오자 황조가 감녕을 다시 처음과 같이 대우하였고, 도독 소비都督 蘇飛가 여러 번 감녕을 천거하였으나 등용하지 않았다. 이에 〈소비가 황조에게〉 아뢰어 감녕을 주현邾縣영장令長으로 삼았다.注+주현邾縣강하군江夏郡에 속하였다. 영장令長이다.
遂亡犇孫權이어늘 周瑜, 呂蒙 共薦達之하다
감녕이 마침내 도망하여 손권에게 달아나니, 주유周瑜여몽呂蒙이 함께 그를 천거하였다.
獻策曰 今漢祚日微하여 曹操終爲簒盗하리니 南荆形便 誠國之西勢也注+謂在吳之西, 據上流之形勢.
감녕甘寧손권孫權에게 다음과 같은 계책을 올렸다. “지금 나라의 국운國運이 날로 쇠약해져서 조조曹操가 끝내 황위皇位를 찬탈하는 도적이 될 것이니, 남쪽 형주荆州의 형세는 진실로 나라()의 서쪽에 있어 상류를 점거하고 있는 형세입니다.注+〈“남형형편 성국지서세야南荆形便 誠國之西勢也”는〉 형주荊州의 서쪽에 있어 상류上流를 점거하고 있는 형세임을 말한 것이다.
觀劉表컨대 慮旣不遠하고 兒子又劣注+言又弱於表也.하니 至尊 當早圖之 不可後操注+言若不先圖劉表, 必爲操所圖也.
제가 유표劉表를 관찰해보니 생각이 원대하지 못하고 자식도 못났으니注+〈“아자우렬兒子又劣”은〉 자식이 또 유표劉表보다 약함을 말한 것이다., 지존至尊께서 마땅히 일찍 도모해야 할 것이요, 조조보다 뒤져서는 안 됩니다.注+〈“불가후조不可後操”는〉 만약 먼저 유표劉表를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조조曹操에게 도모당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圖之之計 宜先取黄祖 祖今昏耄已甚하고 財榖竝乏하고 左右貪縱하여 吏士心怨注+耄, 音帽, 惽忘也.이라
도모하는 계책은 반드시 먼저 황조黄祖를 정벌하여 그 지역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황조는 지금 늙어서 정신이 흐리고 재물과 곡식이 모두 궁핍하며, 좌우左右 측근들이 탐욕스럽고 방종하여 관리와 병사들이 마음속으로 원망하고 있습니다.注+이니, 혼몽하여 잊음이다.
舟船戰具 頓廢不修하고 怠於耕農하며 軍無法伍注+頓, 讀曰鈍, 壞也.하니 至尊今往이면 其破 可必이라
그리하여 선박 등 전쟁에 쓰는 도구가 부서지고 못 쓰게 되었는데도 수리하지 않고 밭 갈고 농사를 짓는 데 태만하며 군대에 법령과 대오隊伍가 없으니注+으로 읽으니, 부서짐이다., 지존께서 지금 정벌하러 가시면 기필코 그를 격파할 수 있습니다.
一破祖軍하고 鼓行而西하여 據楚關이면 大勢彌廣하리니 卽可漸規巴, 蜀矣注+楚關, 扞關也, 蜀伐楚, 楚爲扞關以拒之, 故曰楚關.니이다 深納之하다
일단 황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북을 치면서 서쪽으로 행군하여 초관楚關을 점거하면 대세大勢가 더욱 넓어질 것이니, 그렇다면 점차 , 을 엿볼 수 있습니다.”注+초관楚關한관扞關(나라의 서쪽 관문)이니, 옛날 에서 나라를 공격할 적에 나라가 한관을 만들어서 막았다. 그러므로 〈한관을〉 초관楚關이라 한 것이다. 손권은 그의 말을 깊이 받아들였다.
張昭難曰 今吳下業業하니 若軍果行이면 恐必致亂注+業業, 危懼也.이리이다
】 이에 장소張昭가 힐난하기를 “지금 오하吳下 지방이 위태롭고 두려우니, 만약 군대가 과연 출동하면 반드시 혼란을 초래할 듯하다.”注+업업業業”은 위태롭고 두려움이다. 하였다.
謂昭曰 國家以蕭何之任付君이어늘 居守而憂亂하니 奚以希慕古人乎리오
감녕甘寧이 장소에게 이르기를 “국가에서는 를 그대에게 맡겼는데, 그대는 이곳에 머물러 지키면서 을 근심하니, 어떻게 고인古人을 본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擧酒屬寧曰 興霸 今年行討 如此酒矣注+屬, 猶勸也. 興霸, 寧字. 決以付卿하노니 但當勉建方略이니 何嫌張長史之言乎注+昭爲權長史.리오
손권孫權이 술잔을 들어 감녕에게 권하며 말하기를 “흥패興霸야! 내가 금년에 서쪽으로 가서 황조黃祖를 토벌하기를 이 술잔을 주는 것처럼注+(권하다)은 과 같다. 흥패興霸감녕甘寧이다. 에게 맡기기로 결정하였으니, 다만 마땅히 방략方略을 힘써 세워야 할 것이다. 어찌 장장사張長史(장소張昭)의 말을 혐의하는가.”注+장소張昭손권孫權장사長史로 있었다. 하였다.
遂西擊黄祖하니 祖横兩蒙衝하여 挾守沔口하여 大紲繫矴하고 千弩交射하니 軍不得前注+蒙衝, 字與艨艟通. 杜佑曰 “蒙衝, 以生牛皮, 蒙船覆背, 兩廂開掣棹孔, 左右有弩窓矛穴, 敵不得近, 矢石不能敗. 此不用大船, 務於速疾, 乘人之所不及, 非戰之船也.” 紲, 長繩也. 矴, 丁定切, 錘舟石也.이라
손권孫權이 마침내 서쪽으로 황조黄祖를 공격하였는데, 황조가 두 척의 몽충선蒙衝船을 가로놓아 면수沔水의 어구를 좌우에서 지키게 하고서 굵은 동아줄로 닻돌을 매달고 천 개의 쇠뇌를 양쪽에서 함께 발사하니, 손권의 군대가 전진할 수가 없었다.注+몽충蒙衝”은 글자가 몽동艨艟과 통한다. 두우杜佑가 말하였다. “몽충선蒙衝船생우피生牛皮(생소가죽)를 배에 씌워 위를 덮고는 양 곁에 노를 젓는 구멍을 만들고 좌우에 를 설치하는 창구멍이 있어서 적이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화살과 포석이 파괴시키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는 큰 배를 사용하지 않고 속력이 빠른 것을 힘써서 적이 미치지 못하는 틈을 타니, 전투하는 배가 아니다.” 은 긴 끈이다. 정정丁定이니, 배를 정지시키는 닻돌이다.
將軍董襲 司馬凌統 各將敢死百人호되 人被兩鎧하고 乘大舸하여 突入蒙衝裏注+舸, 賈我切, 大船也.하여
장군 동습將軍 董襲사마 능통司馬 凌統이 각각 결사대 100명을 거느리고 출동하였는데, 병사들에게 각자 두 벌의 갑옷을 껴입게 하고 큰 배를 타고 적군의 몽충선蒙衝船 사이로 돌진해 들어갔다.注+가아賈我이니, 큰 배이다.
襲以刀斷紲하니 蒙衝 乃横流어늘 大兵 遂進하다
동습이 칼로 동아줄을 끊으니, 몽충선이 마침내 마구 떠내려가므로 대군이 마침내 전진하였다.
祖令陳就逆戰이어늘 呂蒙 親梟就首하니 於是 水陸竝進하여 遂屠其城하다 祖挺身走어늘 追斬之注+挺, 拔也.하고
황조黃祖진취陳就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하였는데 여몽呂蒙이 직접 진취의 머리를 베어 효시梟示하니, 이에 손권孫權의 군대가 수륙水陸으로 동시에 공격하여 나아가서 마침내 강하江夏을 도륙하였다. 황조가 몸을 빼내어 달아나자 쫓아가 참수하였다.注+은 몸을 빼냄이다.
又欲殺蘇飛러니 甘寧 下席하여 叩頭流涕하고 言飛舊恩하여 乞其首領이어늘 乃舎之注+舊恩, 謂薦而不用, 又開之, 使奔吳也.하다
손권孫權은 또 소비蘇飛를 죽이고자 하였는데, 감녕甘寧이 자리 아래로 내려가 머리로 땅을 두드리고 눈물을 흘리며 소비의 옛 은혜를 말하여 그의 목을 온전히 해주기를 청하므로 손권이 마침내 그를 놓아주었다.注+구은舊恩소비蘇飛감녕甘寧을 천거하였는데 황조黄祖가 등용하지 않고, 또 소비가 길을 열어주어 감녕甘寧으로 하여금 지역으로 달아나게 한 것을 이른다.
凌操子統 欲殺寧이어늘 命統不得讐之하고 令寧屯他所하다
능조凌操의 아들 능통凌統이 감녕을 죽이려고 하자, 손권이 능통에게 명하여 보복하지 못하게 하고, 감녕으로 하여금 다른 곳에 군대를 주둔하게 하였다.
】 여름 6월 삼공三公의 관직을 파하고, 조조曹操가 스스로 승상丞相이 되었다.
操以崔琰爲西曹掾하고 毛玠爲東曹掾하고 司馬朗爲主簿하고 弟懿爲文學掾注+漢制, 公府西曹掾主府史署用, 東曹掾主二千石長吏遷除及軍吏, 黃閣主簿錄省衆事. 文學掾, 漢郡曹有之, 操於公府, 創置也.하니
조조曹操최염崔琰(최염)을 서조연西曹掾으로 삼고, 모개毛玠동조연東曹掾으로, 사마랑司馬朗주부主簿로, 사마랑의 아우 사마의司馬懿문학연文學掾으로 삼으니注+나라의 제도에 공부公府서조연西曹掾부사府史를 임용하는 것을 주관하고, 동조연東曹掾이천석二千石장리長吏의 승진과 제수 및 군리軍吏를 임용하는 것을 주관하고, 황각주부黃閣主簿는 여러 일을 기록하여 살폈다. 문학연文學掾나라 군조郡曹에 있었는데 조조曹操가 처음으로 공부公府에 둔 것이다.,
琰, 玠竝典選擧하여 其所擧用 皆清正之士 雖有盛名이나 而行不由本者 終莫得進이라
최염과 모개가 함께 선거選擧를 주관하였는데, 이들이 천거하여 등용한 자는 모두 청백하고 정직한 선비였고, 비록 훌륭한 명성이 있더라도 행실이 근본을 따르지 않는 자는 끝내 등용되지 못하였다.
拔敦實하고 斥華僞하며 進沖遜하고 抑阿黨注+
司馬懿司馬懿
行, 去聲. 沖, 謙虛也, 和也.
하니 由是 士以廉節自勵하여 雖貴寵이나 輿服 不敢過度
그리하여 돈후敦厚하고 진실한 자를 뽑아 쓰고 화려하고 거짓된 자를 배척하며, 겸손하고 공손한 자를 등용하고 아첨하고 무리 짓는 자들을 억제하니注+(행실)은 거성去聲이다. 은 겸허함이고 화함이다., 이로 말미암아 선비들이 청렴과 절개를 힘써서 비록 신분이 귀하고 총애를 받는 자라도 수레와 의복이 감히 법도를 넘지 못하였다.
長吏還者 垢面羸衣 獨乘柴車하고 軍吏入府 朝服徒行하니 吏潔於上하고 俗移於下注+垢, 塵也. 羸衣, 謂羸弊之衣也.
장리長吏를 지내고 조정으로 돌아가는 자는 때가 낀 얼굴에 해진 옷으로 섶나무를 싣는 수레를 혼자서 타고 가고, 군리軍吏에 들어올 적에 조복朝服을 입고 도보로 걸어가니, 관리들은 위에서 깨끗하고 백성들의 풍속이 아래에서 바뀌었다.注+는 먼지(때)이다. “이의羸衣”는 해진 옷을 이른다.
操聞之하고 歎曰 用人如此하니 使天下 人人自治 吾復何爲哉리오
조조가 듣고 감탄하기를 “사람을 등용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스스로 자기 몸을 다스리게 하였다. 내 다시 무슨 일을 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懿少聰達하고 多大略이라 謂朗曰 君弟聰亮明允하고 剛斷英特 非子所及也로다
사마의司馬懿는 젊어서부터 총명하여 사리에 통달하고 큰 지략이 많았다. 최염崔琰사마랑司馬朗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아우는 총명하고 진실하며 강하게 결단하고 영특하니, 그대가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操聞而辟之러니 懿辭以風痺한대 操怒하여 欲收之하니 懿懼하여 就職注+痺, 音庇, 脚冷濕病.하다
조조曹操가 듣고 그를 벽소辟召하였으나 사마의는 풍비風痺가 있다고 사양하였다. 조조가 노하여 체포하고자 하니, 사마의가 두려워하여 직책에 나아갔다.注+이니, 다리가 냉습冷濕이다.
操幼子倉舒卒 操傷惜之甚이러니 掾邴原 有女早亡이라 操欲求與倉舒合葬한대
조조曹操의 어린 아들 조창서曹倉舒가 죽자 조조는 몹시 서글퍼하고 애석해하였다. 아전인 병원邴原에게 일찍 죽은 딸이 있었는데, 조조가 조창서와 함께 합장合葬할 것을 청하자,
原辭曰 嫁殤 非禮也注+未成人而死曰殤. 生不以禮相接, 死而合之, 是亂人倫也, 故曰非禮. 原之所以自容於明公 公之所以待原者 以能守訓典而不易也
병원이 다음과 같이 사양하였다. “일찍 죽은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가 아닙니다.注+ 살아서 로써 서로 만나지 못하였는데 죽어서 합장한다면 이는 인륜人倫을 어지럽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제가 스스로 명공明公에게 용납되고 공이 저를 우대하는 이유는, 제가 능히 옛 가르침과 예법을 지켜 바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若聽明公之命이면 則是凡庸也 明公 焉以爲哉리오하니 操乃止하다
그런데 제가 만약 명공明公의 명령을 따른다면 이는 용렬한 보통의 사람이 되는 것이니, 명공明公이 저를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조조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以馬騰爲衛尉하다
마등馬騰위위衛尉로 삼았다.
以騰子超爲偏將軍하여 代統其衆注+曹魏置將軍四十號, 偏將軍ㆍ裨將軍居其末.하다
마등馬騰의 아들 마초馬超편장군偏將軍으로 삼아 마등을 대신하여 그 무리를 거느리게 하였다.注+조위曹魏에서는 40개의 장군將軍 칭호를 설치하였는바, 편장군偏將軍비장군裨將軍이 맨 끝에 있었다.
秋七月 曹操擊劉表하다
】 가을 7월에 조조曹操유표劉表를 공격하였다.
○八月 하고 夷其族하다
】 8월에 조조曹操태중대부 공융太中大夫 孔融을 죽이고 그 집안을 멸하였다.
恃其才望하여 數戯侮曹操하고 又上書하여 言 宜準古王畿之制하여 千里寰内 不以封建諸侯라한대
공융孔融은 자신의 재주와 명망을 믿고서 자주 조조曹操를 놀리고 업신여겼으며, 또 황제에게 글을 올려서 “마땅히 옛 왕기王畿의 제도를 따라 1,000리의 기내畿內에는 제후諸侯봉건封建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였다.
操疑融所論建漸廣하여 益憚之注+寰, 古縣字. 周禮 “方千里曰國畿, 其外方五百里曰侯畿.” 鄭玄曰 “畿, 限也.” 千里寰內不以封建, 則操不可以居鄴矣, 故憚之.러니 與御史大夫郗慮 有隙注+郗, 丑之切, 姓也.이라
조조는 공융이 건의하는 범위가 점점 넓어질까 의심해서 더욱 그를 두려워하였다.注+고자古字이다. ≪주례周禮≫ 〈하관 대사마夏官 大司馬〉에 “사방 1,000리를 국기國畿라 하고, 그 밖의 사방 500리를 후기侯畿라 한다.” 하였는데,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는 한계이다.” 하였다. 1,000리의 기내畿內봉건封建하지 않으면 조조曹操업현鄴縣에 거주할 수 없으므로 그를 꺼린 것이다. 공융은 어사대부 치려御史大夫 郗慮(치려)와 원한이 있었는데注+축지丑之이니, 이다.,
慮承操旨하여호되 昔在北海 招合徒衆하여 欲規不軌注+建安初, 融爲北海相.하고 與孫權使語 謗訕朝廷注+使, 疏吏切.하며
치려가 조조의 뜻을 받들어서 아뢰기를 “공융이 옛날 북해北海에 있을 적에 무리들을 불러 모아 불궤不軌(반역)를 도모하려 하였고注+건안建安 초기에 공융孔融북해北海을 지냈다., 손권孫權의 사자와 말할 적에 조정朝廷을 비방하였습니다.注+使(사자)는 소리疏吏이다.
又與禰衡更相贊揚하여 衡謂仲尼不死라하고 融答顔回復生이라하니 大逆不道라한대 操遂收融하여 幷其妻子하여 皆殺之하다
예형禰衡(예형)과 번갈아 서로 찬양해서 하니, 대역부도大逆不道합니다.” 하였다. 조조는 마침내 공융을 체포하여 그의 처자식과 아울러 모두 죽였다.
京兆脂習 與融善注+脂, 姓也.이라 每戒融剛直太過하니 必罹世患이라하더니
】 처음에 경조京兆 사람 지습脂習공융孔融과 친하였는데注+이다., 매번 공융에게 경계하기를 “강직함이 너무 지나치니, 반드시 세상의 환난患難에 걸릴 것이다.”라고 하였다.
及融死 許下莫敢收者로되 往撫尸하고 曰 文擧舍我死하니 吾何用生爲注+文擧, 融字.리오 操收習欲殺之러니 旣而 赦之하다
공융이 죽자 허하許下(허도許都)에서는 감히 그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가 없었는데, 지습이 가서 시신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문거文擧가 나를 버리고 죽었으니, 내가 살아서 무엇하겠는가.”注+문거文擧공융孔融이다. 하였다. 조조曹操는 지습을 체포하여 죽이려고 하다가 얼마 후에 용서하였다.
劉表卒하다 九月 操至新野하니 表子琮 擧州降하다
유표劉表하였다. 9월에 조조曹操신야新野에 이르니, 유표의 아들 유종劉琮형주荊州를 들어 항복하였다.
劉表二子 琦, 琮이라 表爲琮하여 娶其後妻蔡氏之姪하니 蔡氏遂愛琮而惡琦하니
】 처음에 유표劉表는 두 아들을 두었으니, 유기劉琦유종劉琮이었다. 유표가 유종을 위하여 자기의 후처後妻채씨蔡氏질녀姪女에게 장가들게 하니, 채씨가 마침내 유종을 사랑하고 유기를 미워하였다.
琦不自寧하여 與諸葛亮으로 謀自安之術한대 不對러라
유기가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자신을 편안히 할 계책을 제갈량諸葛亮과 상의하였으나 제갈량이 대답하지 않았다.
乃與亮으로 升樓去梯하고 謂曰 今日 上不至天이요 下不至地하여 言出子口而入吾耳 可以言未
뒤에 마침내 제갈량과 함께 누대에 올라가 사다리를 치우고 제갈량에게 이르기를 “오늘 위로는 하늘에 이르지 못하고 아래로는 땅에 이르지 못하여 말이 선생의 입에서 나와 내 귀로 들어올 뿐이니, 말씀해줄 수 있겠습니까?” 하자,
曰 君不見申生在内而危하고 重耳居外而安乎注+申生, 晉獻公之太子, 爲驪姬所譖, 自縊而死. 重耳, 申生之弟, 懼驪姬之讒, 出奔, 獻公卒後, 重耳入, 是爲文公, 遂爲霸主. 琦意感悟러니 黄祖死어늘 琦求代其任한대 表乃以琦爲江夏太守하다
제갈량이 대답하기를 “그대는 신생申生이 국내에 있어서 위태롭고 중이重耳가 국외에 있어서 편안했던 것을 보지 못했는가?”注+ 하였다. 유기는 마음속으로 감동하여 깨달았는데, 마침 황조黄祖가 죽자 유기가 그 임무를 대신할 것을 청하니, 유표는 이에 유기를 강하태수江夏太守로 삼았다.
表卒러니 未幾 曹操軍至하니 蒯越等 曰 逆順有大體하고 彊弱有定勢하니
유표劉表가 죽자 유종劉琮이 뒤를 이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조조曹操의 군대가 쳐들어오니, 괴월蒯越(괴월) 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순종하고 거역함에는 큰 도리가 있고 강하고 약함에는 일정한 형세가 있으니,
以人臣而拒人主 逆道也 以新造之楚而禦中國 必危也 且將軍 自料何如劉備
인신人臣으로서 인주人主를 막는 것은 거역하는 방도이고, 새로 물려받은 (형주荊州) 지방을 가지고 중국中國〈을 차지하고 있는 조조에게〉 항거하는 것은 반드시 위태로운 방법입니다. 또 장군將軍이 스스로 헤아려보건대 유비劉備와 비교하여 누가 더 낫다고 여깁니까?
若備不足禦曹公이면 則雖全楚라도 不能以自存也 若足禦曹公이면 則備不爲將軍下也리라
만약 유비가 조공曹公을 막지 못한다면 비록 지방 전체를 가지고 있더라도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 것이요, 만약 유비가 충분히 조공曹公을 막을 수 있다면 유비는 장군의 아래가 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從之하여 操至新野 擧州降하니 操遂進兵하다
유종이 그의 말을 따라 조조가 신야新野에 이르자 형주荊州를 들어 항복하니, 조조가 마침내 진군하였다.
劉備犇江陵이어늘 操追至當陽及之하니 備走夏口하다
유비劉備강릉江陵으로 달아나자 조조曹操가 추격하여 당양當陽에서 따라잡으니, 유비가 하구夏口로 달아났다.
劉備屯樊注+杜佑曰 “樊城, 今襄州安養縣.”이러니 降而不以告하여 備久乃覺하니 則操已在宛矣 備乃大驚이러라
유비劉備번성樊城에 주둔하고 있었는데注+두우杜佑가 말하였다. “번성樊城은 지금 양주襄州안양현安養縣이다.”, 유종劉琮조조曹操에게 항복하고도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유비가 오랜 뒤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달았는데 조조가 이미 완현宛縣에 와 있었으므로 유비가 이에 크게 놀랐다.
勸備攻琮이면 荆州 可得이라한대 備曰 劉荆州臨亡 託我以孤遺하니 背信自濟 死何面目以見劉荆州乎注+無父曰孤. 遺, 棄也. 言父母棄之而去, 故曰孤遺.리오
혹자가 유비에게 유종을 공격하면 형주荆州를 점령할 수 있다고 권하자, 유비가 말하기를 “유형주劉荆州(유표劉表)가 죽을 적에 나에게 어린 고아(유종)를 부탁하였으니, 내가 신의를 저버리고 스스로 성공하면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유형주를 만나보겠는가.”注+아버지가 없는 것을 라 한다. 는 버림이다.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세상을 떠났으므로 고유孤遺라 함을 말한 것이다. 하고는
將其衆去하여 過襄陽할새 呼琮하니하여 不能起 琮左右及荆州人 多歸備러라
자신의 무리를 거느리고 떠나가면서 양양襄陽을 지날 적에 유종을 부르니, 유종이 두려워하여 나오지 못하였다. 유종의 좌우와 형주荆州 사람들 중에 유비에게 귀의한 자가 많았다.
備過辭表墓하고 涕泣而去러니 比到當陽注+當陽縣, 屬南郡. 十餘萬人이요 輜重 數千兩이라 日行十餘里하고 别遣關羽하여 乘船會江陵하다
유비劉備유표劉表의 묘에 들러 하직하고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는데, 당양當陽에 이르자注+당양현當陽縣남군南郡에 속하였다. 무리가 10여만 명이고 치중輜重(짐수레)이 수천 대였다. 하루에 10여 리를 행군하면서 별도로 관우關羽를 보내어 배를 타고 가서 강릉江陵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或謂備호되 宜速行保江陵注+江陵, 南郡治所.이니 今擁大衆이나 被甲者少하니 曹公兵至하면 何以拒之
혹자가 유비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속히 행군하여 강릉江陵을 보전하여야 합니다.注+강릉江陵남군南郡치소治所가 있는 곳이다. 지금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으나 갑옷을 입은 군사가 적으니, 조공曹公의 군대가 닥쳐오면 어떻게 막겠습니까.” 하니,
備曰 夫濟大事 必以人爲本이라 今人歸吾하니 吾何忍棄去리오
유비가 말하기를 “대사大事를 성취하려면 반드시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지금 사람들이 나에게 귀의하였으니, 내 어찌 차마 그들을 버리고 가겠는가.” 하였다.
習鑿齒曰注+習姓, 鑿齒名, 晉人, 撰魏武本紀四卷. 玄德 顛沛險難而信義愈明하고 勢偪事危而言不失道하여
습착치習鑿齒가 다음과 같이 하였다.注+이고 착치鑿齒는 이름이니, 나라 사람으로 ≪위무본기魏武本紀≫ 네 권을 하였다.유현덕劉玄德은 전복되어 험난한데도 신의가 더욱 분명하고, 형세가 궁핍하고 일이 위태로운데도 말이 를 잃지 아니하여,
則情感三軍하고 則甘與同敗하니 終濟大業 不亦宜乎
경승景升(유표劉表)이 죽을 때에 자신을 돌아보고 부탁한 일을 추념하면 삼군三軍을 감동시키고, 의리에 따르는 선비들을 사랑하면 그들과 함께 패전하는 것을 달갑게 여겼으니, 끝내 대업大業을 성취한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琮將王威曰 曹操聞將軍已降, 劉備已走하고 必懈弛無備하여 輕行單進하리니
유종劉琮의 장수인 왕위王威가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조조曹操장군將軍이 이미 항복하고 유비劉備가 이미 패주했다는 말을 듣고는 반드시 마음이 해이해져서 대비를 갖추지 않고서 군대를 경무장하여 단독으로 진군하려 할 것입니다.
若給威奇兵數千하여 徼之於險이면 可獲也 獲操 卽威震四海하리니 非徒保守今日而已니이다 不納하다
만약 저에게 기병奇兵 수천 명을 주시어 험한 곳에서 요격邀擊하면 조조를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조조를 사로잡으면 위엄이 사해四海에 진동할 것이니, 다만 오늘의 형세를 보전하여 지킬 뿐만이 아닙니다.” 유종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操以江陵有軍實이라하여 恐劉備據之하여 乃釋輜重하고 將精兵急追之하여 及於當陽之長阪注+盛弘之荊州記 “當陽縣東, 有櫟林長阪.”하니
徐庶徐庶
조조曹操강릉江陵에 군수물자가 많이 있다 하여 유비劉備가 이곳을 점거할까 염려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치중대輜重隊를 버리고 정예병만을 거느리고서 급히 유비를 추격하여 당양當陽장판長阪에서 따라잡으니注+성홍지盛弘之의 ≪형주기荊州記≫에 “당양현當陽縣 동쪽에 역림櫟林장판長阪이 있다.” 하였다.,
備棄妻子하고 與諸葛亮, 張飛, 趙雲等數十騎하다
유비가 처자妻子를 버리고 제갈량諸葛亮장비張飛, 조운趙雲 등 수십 명의 기병騎兵과 함께 달아났다.
徐庶母爲操所獲이라 庶辭備할새 指其心曰 本欲與將軍共圖王霸之業者 以此方寸地也러니
서서徐庶의 어머니가 조조曹操에게 잡혀 있었다. 서서가 유비劉備에게 하직인사를 할 적에 자기 심장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본래 장군將軍과 함께 왕자王者패자霸者기업基業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은 이 방촌方寸(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今已失老母하니 方寸亂矣 無益於事하니 請從此别이라하고 遂詣操하다
그런데 지금 노모老母를 잃고 나니 이에 작별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마침내 조조에게로 갔다.
張飛拒後注+拒後, 卽古之殿也.러니 據水斷橋하여 瞋目横矛하고 曰 身是張翼德也注+自此迄于梁․陳, 士大夫率自謂曰身. 翼德, 飛字. 可來共決死라하니 操兵 無敢近者러라
장비張飛가 뒤에 남아서 조조曹操의 군대를 막고 있었는데注+거후拒後”는 바로 옛날의 殿(패주할 때에 후미에서 차단함)이다., 하수河水에 의지하여 다리를 끊고서 눈을 부릅뜨고 창을 비껴들고 말하기를 “이 몸이 바로 장익덕張翼德이니注+이로부터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대부士大夫들이 대체로 자신을 일러 (이 몸)이라 하였다. 익덕翼德장비張飛이다., 와서 나와 한판 싸워 사생死生을 결단하자.” 하니, 조조曹操의 군중에서 감히 접근하는 자가 없었다.
張飛가 長阪에서 다리를 끊고 曹操의 군대를 막다張飛가 長阪에서 다리를 끊고 曹操의 군대를 막다
抱備子禪하고 與關羽船會하여 得濟沔하고 遇劉琦衆萬餘人하여 與俱到夏口하다
조운趙雲유비劉備의 아들 유선劉禪을 안고 관우의 배를 만나 면수沔水를 건넜고 유기劉琦의 군대 만여 명과 만나서 함께 하구夏口에 도착하였다.
操進軍江陵하다
조조曹操강릉江陵으로 진군進軍하였다.
曹操進軍江陵하여 釋韓嵩之囚하여 以爲大鴻臚注+囚韓嵩事, 見上四年.하다
조조曹操강릉江陵으로 진군進軍하여 갇혀 있던 한숭韓嵩을 석방해서 대홍려大鴻臚로 삼았다.注+한숭韓嵩을 가둔 일은 앞의 건안建安 4년(199) 조에 보인다.
袁紹在冀州 遣使迎汝南士大夫하니 西平和洽 以爲 冀州 土平民强하여 英桀所利
】 처음에 원소袁紹기주冀州에 있을 적에 사자를 보내어 여남汝南사대부士大夫들을 맞이하니, 서평西平 사람 화흡和洽이 생각하기를 “기주冀州는 지형이 평탄하고 백성들이 강하여 영웅호걸들이 이롭게 여기는 곳이니,
四戰之地 不如荆州土險民弱하여 易依倚也注+西平縣, 屬汝南郡. 和洽, 姓名.라하고 遂從劉表하니 表以上客待之
사방으로 적을 맞아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지역이다. 지형이 험하고 백성들이 약하여 의지하기 쉬운 형주荊州만 못하다.”注+서평현西平縣여남군汝南郡에 속하였다. 화흡和洽은 사람의 성명이다. 하고 마침내 유표劉表를 따르니, 유표가 그를 상객上客으로 대우하였다.
洽曰 所以不從本初 辟爭地也注+辟, 讀曰避. 爭地, 謂冀州英桀必爭之地. 昏世之主 不可黷近이니 久而不去 讒慝將興이라하고 遂南之武陵注+黷, 數也. 近, 親近也.하다
화흡이 말하기를 “내가 본초本初(원소)를 따르지 않는 이유는 영웅호걸이 다투는 땅을 피한 것이다.注+(피하다)는 로 읽는다. “쟁지爭地”는 기주冀州는 영웅호걸이 반드시 〈차지하려고〉 다투는 땅을 말한 것이다. 혼란한 세상의 주군主君은 자주 가까이해서는 안 되니, 오래 머물고 떠나가지 않으면 참소와 원망이 장차 일어나게 된다.” 하고는 마침내 남쪽 무릉武陵으로 갔다.注+은 자주이다. 친근親近함이다.
表辟劉望之하여 爲從事러니 而其友二人 皆以讒誅하고 望之又以正諫不合이라하여 投傳告歸注+投, 棄也. 傳, 丁戀切, 符也.하니
유표劉表유망지劉望之벽소辟召하여 종사從事로 삼았는데, 그의 친구 두 사람이 모두 남의 참소로 죽임을 당하였고, 유망지도 직간直諫을 하였으나 뜻이 부합하지 않는다 해서 부절符節을 버리고 돌아갈 것을 고하였다.注+는 버림이다. 정련丁戀이니, 부절이다.
弟廙 謂曰注+廙, 逸職ㆍ羊至二切. 趙殺鳴犢 仲尼回輪注+孔子旣不得用於衛, 將西見趙簡子, 至河, 聞竇鳴犢․舜華之死也, 臨河嘆曰 “丘之不濟此, 命也夫. 竇鳴犢․舜華, 晉之賢大夫也, 今乃殺之.” 遂反衛.하시니 今兄 旣不能法柳下惠和光於内인댄
則宜模范蠡遷化於外注+法, 則效也. 和光, 言晦其光, 不以炫於人也. 模, 亦法也. 遷化於外, 謂范蠡去越而扁舟五湖, 卒居於陶, 隨其所遷而自爲變化也.어늘 坐而自絶於時하니 殆不可也니이다 望之不從이러니
마땅히 밖에서 시세에 따라 변화한 를 본받아야 할 것인데注+은 본받음이다. “화광和光”은 자신의 광채를 속에 감추어서 남에게 자랑하지 않음을 말한다. 또한 본받음이다. “천화어외遷化於外”는 범려范蠡나라를 떠나 오호五湖에 작은 배를 띄워서 마침내 땅에 거주하여 옮겨가는 바에 따라 스스로 변화變化함을 말한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스스로 세상과 끊으시니 아마도 불가不可할 듯합니다.” 하였으나, 유망지는 따르지 않았다.
尋亦見害하니 奔揚州하다 於是 操以洽, 廙爲掾屬하니 從人望也러라
얼마 후 유망지 또한 살해당하니, 유익이 양주揚州로 달아났다. 이에 조조가 화흡과 유익을 으로 삼았으니, 이는 인망人望을 따른 것이었다.
劉璋 遣别駕張松하여 致敬於操러니 爲人 短小放蕩이라 操已定荆州하고 走劉備 不存錄松注+存, 恤問也. 錄, 收拾也. 謂不存恤張松而錄用之.이어늘
유장劉璋별가 장송别駕 張松을 보내어 조조曹操에게 지극한 경의를 표하게 하였는데, 장송은 사람이 키가 작고 방탕放蕩하였다. 조조가 형주荆州를 평정하고 유비劉備를 패주시키자 장송을 위로하여 등용하지 않았다.注+은 긍휼이 여기고 위문함이요, 수습收拾함이니, 〈“부존록송不存錄松”은〉 장송張松을 위로하여 녹용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怨之하여 歸勸璋하여 絶操하고 與劉備相結하니 從之하다
장송이 원망하여 유장에게 돌아가서 조조와의 왕래를 끊고 유비와 결탁할 것을 권하니, 유장이 그의 말을 따랐다.
習鑿齒曰 昔 齊桓 一矜其功而叛者九國이요 曹操暫自驕伐而天下三分하니
습착치習鑿齒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옛날에 재 환공齊 桓公이 한 번 자기 공을 과시하자 배반한 나라가 아홉이었고, 조조曹操가 잠시 스스로 교만하여 자랑하자 천하天下가 셋으로 나뉘어졌다.
皆勤之於數十年之内하여 而棄之於俯仰之頃이라 豈不惜乎注+公羊傳 “葵丘之會, 桓公震而矜之, 叛者九國. 震之者, 何. 猶曰振振然, 矜之者, 何. 猶曰莫若我也.”리오
이들은 모두 수십 년 동안 부지런히 힘써서 사람들을 얻고서는 고개를 숙이고 구부리는 잠깐 사이에 사람들을 버렸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注+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희공僖公 9년에 “규구葵丘회맹會盟에서 환공桓公이 교만하게 굴고 뻐기자.[진이긍지震而矜之] 배반한 나라가 아홉이었다. ‘교만하게 굴다[진지震之]’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뻐긴다[긍지矜之]’라는 것은 무엇인가. 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冬十月朔 日食하다
】 겨울 10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조조曹操가 동쪽으로 내려오자 손권孫權주유周瑜노숙魯肅 등을 보내어 유비劉備와 함께 적벽赤壁에서 조조를 맞이하여 공격해서 대파大破하니,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魯肅 言於孫權曰 荆州 與國隣接하여 江山險固하고 沃野萬里 士民殷富하니 若據而有之 此帝王之資也
】 처음에 노숙魯肅손권孫權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형주荆州는 우리나라와 인접隣接하여 이 험고하고 비옥한 들이 만 리이며, 군대와 백성들이 많고 부유하니, 만약 이곳을 점거하여 소유하면 이는 제왕帝王이 될 수 있는 밑천입니다.
今劉表新亡 二子不協하니 軍中諸將 各有彼此注+謂有附琦者, 有附琮者. 劉備 天下梟雄으로 與操有隙注+梟, 勇健也. 有隙, 謂備欲殺操不遂也.하니
이제 유표劉表가 막 죽었는데 두 자식이 화합하지 못하니, 군중軍中의 장수들이 각기 이쪽과 저쪽으로 나누어져 대립하고 있습니다.注+〈“각유피차各有彼此”는〉 유기劉琦에게 귀의한 자가 있고 유종劉琮에게 귀의한 자가 있음을 이른다. 유비劉備천하天下의 용맹한 영웅으로 조조曹操와 사이가 나쁘니注+는 용맹하고 건장함이다. “유극有隙”은 유비劉備조조曹操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함을 이른다.,
若與彼協心하여 上下齊同이면 則宜撫安하여 與結盟好 如有離違하면 宜别圖之하여 以濟大事注+離違, 言人有離心, 互相違異也.
그가 유표의 두 아들과 협심하여 상하上下가 힘을 함께하면 마땅히 그들을 안무按撫하여 함께 동맹을 맺어야 할 것이요, 만일 그들 사이에 이반하는 마음이 있어서 분리되면 마땅히 별도로 도모해서 대사大事를 이루어야 합니다.注+이위離違”는 사람들이 이반하는 마음이 있어서 서로 나뉨을 말한 것이다.
請得奉命弔表二子하고 幷慰勞其軍中用事者하고 及說備使撫表衆하여 同心一意하여 共治曹操
제가 청컨대 명령을 받들고 가서 유표의 두 아들을 조문하고 아울러 그 군중軍中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또 유비를 설득하여 유표의 군대를 어루만져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함께 조조曹操를 다스리자고 하겠습니다.
備必喜而從命하리니 如其克諧 天下 可定也리이다 今不速往이면 恐爲操所先하노이다
이렇게 하면 유비가 반드시 기뻐하여 명을 따를 것이니, 만일 우리 두 나라가 화합하면 천하天下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이제 속히 가지 않으면 조조에게 선수를 뺏길까 두렵습니다.”
卽遣肅하니 行到夏口하여 聞操已向荆州하고 晨夜兼道하여 比至南郡 而琮 已降이러라
손권孫權이 즉시 노숙魯肅을 보냈다. 노숙이 길을 떠나 하구夏口에 이르러 조조曹操가 이미 형주荆州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길가는 속도를 배가倍加하여 남군南郡에 이르렀는데, 유종劉琮은 이미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遂迎備於當陽長阪하여 宣權旨하여 致殷勤之意하고
노숙魯肅이 마침내 유비劉備당양當陽장판長阪에서 맞이해서 손권孫權의 뜻을 전달하여 간곡한 뜻을 다하고,
且曰 孫討虜聰明仁惠하여 敬賢禮士 江表英豪 咸歸附之하여 已據有六郡하여 兵精糧多하니 足以立事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손토로孫討虜(손권)는 총명하고 인자하고 은혜로우며 현자賢者를 높이고 선비를 예우하여 강표江表(강동江東)의 영웅호걸들이 모두 그에게 귀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여섯 을 점거하여 군대가 정예롭고 군량이 많으니, 충분히 거사擧事할 수 있습니다.
今爲君計컨대 莫若遣腹心하여 自結於東하여 以共濟世業이니이다 備甚悦注+荊州在西, 吳在東. 世業, 猶言世事也.하니라
이제 을 위하여 계획해보건대, 심복을 보내어 스스로 동쪽 와 결탁하여 함께 대대로 이어갈 사업事業을 이루는 것만 못합니다.” 유비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注+형주荊州는 서쪽에 있고 는 동쪽에 있다. “세업世業”은 세사世事(대대로 이어갈 사업)라는 말과 같다.
又謂諸葛亮曰 我 子瑜友也라하고 卽共定交하니 子瑜者 亮兄瑾也 爲權長史注+子瑜, 瑾字.러라
노숙이 또 제갈량諸葛亮에게 말하기를 “나는 자유子瑜의 친구이다.” 하고는 즉시 함께 교분을 맺으니, 자유子瑜는 제갈량의 제갈근諸葛瑾으로 손권의 장사長史로 있었다.注+자유子瑜제갈근諸葛瑾이다.
備進住樊口注+水經註 “江水過鄂縣北而東流, 右得樊口, 樊山下寒溪水所注也.”하니 操將順江東下 謂備曰 事急矣 請奉命求救於孫將軍호리이다하고 遂與肅俱詣孫權하여
유비劉備번구樊口진주進住하니注+수경주水經註≫에 “강수江水(장강長江)는 악현鄂縣 북쪽을 지나 동쪽으로 유입되어 오른쪽으로 번구樊口에 이르니, 번산樊山 아래 차가운 시냇물이 주입되는 곳이 번구이다.” 하였다., 조조曹操는 장차 장강長江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오려 하였다. 제갈량諸葛亮이 유비에게 말하기를 “상황이 위급하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명을 받들어 장군에게 구원을 청하겠습니다.” 하고는 마침내 노숙魯肅과 함께 손권孫權에게 갔다.
見於柴桑注+柴桑縣, 屬豫章郡.하고 說曰 海内大亂 將軍 起兵江東하고 劉豫州 收衆漢南하여 與曹操 竝爭天下注+備甞爲豫州刺史.러니
시상柴桑에서 손권을 만나보고注+시상현柴桑縣예장군豫章郡에 속하였다.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해내海内가 크게 혼란함에 장군은 강동江東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유예주劉豫州한수漢水 남쪽에서 군대를 수습하여 조조曹操와 함께 천하를 다투었는데注+유비劉備가 일찍이 예주자사豫州刺史를 지냈다.,
今操芟夷大難하여 略已平矣注+芟, 刈也. 夷, 平也. 遂破荆州하여 威震四海하니 英雄 無用武之地
지금 조조가 큰 난리를 모두 수습하여 이미 거의 평정하였습니다.注+은 제거함이요, 는 평정함이다. 마침내 형주荆州를 격파하여 위엄이 사해四海를 진동하니, 영웅英雄이 기량을 발휘할 곳이 없습니다.
豫州遁逃至此하니 願將軍 量力而處之하라 若能以吳越之衆으로 與中國抗衡인댄 不如早與之絶이요
그러므로 유예주가 도망하여 이곳에 왔으니, 원컨대 장군은 힘을 헤아려 대처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능히 오월吳越의 군대를 가지고 중국中國(조조)과 대항할 수 있다면 일찍 조조와의 왕래를 끊는 것만 못하고,
若不能인댄 何不按兵束甲하여 北面而事之 今將軍 外託服從之名하고 而内懷猶豫之計하여 事急而不斷하니 禍至無日矣리이다
만약 이렇게 하지 못하신다면 어찌하여 병기를 거두고 갑옷을 묶어두고서 북면北面하여 조조를 섬기지 않습니까. 지금 장군이 밖으로는 조조에게 복종한다는 명분에 가탁하고 안으로는 일을 미룰 계책을 품어서 상황이 위급한데도 결단하지 않으시니, 화가 곧 닥칠 것입니다.”
權曰 苟如君言이면 劉豫州 何不遂事之乎 亮曰 田横 齊之壯士耳로되 猶守義不辱이어든
손권孫權이 “만약 그대의 말과 같다면 유예주劉豫州는 어찌하여 끝내 조조曹操를 섬기지 않는가?” 하고 반문하니, 제갈량諸葛亮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況劉豫州 王室之冑 英才蓋世하여 衆士慕仰 若水之歸海하니 若事之不濟 此乃天也 安能復爲之下乎잇가
하물며 유예주劉豫州황실皇室의 후손이요 영걸스러운 재주가 온 세상을 뒤덮어서 선비들이 사모하고 우러르기를 마치 강물이 바다로 돌아가듯 하니, 그동안 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이는 바로 천운天運입니다. 어찌 다시 조조의 아래가 되겠습니까.”
勃然曰 吾不能擧全吳之地, 十萬之衆하여 受制於人이니 吾計決矣
손권孫權이 발끈하여 말하기를 “내 나라 전체의 땅과 10만의 군대를 모두 보유하고서 남에게 제재를 받을 수 없으니, 나의 계책이 결정되었다.
諸葛亮이 孫權을 격동시키다諸葛亮이 孫權을 격동시키다
非劉豫州 莫可以當曹操者이나 豫州新敗하니 安能抗此難乎
유예주劉豫州가 아니면 조조曹操를 막아낼 자가 없다. 그러나 유예주가 막 패전하였으니, 어떻게 이 환난患難을 막아내겠는가?” 하였다.
亮曰 豫州軍 雖敗於長阪이나 今戰士還者及關羽水軍精甲 萬人이요 劉琦合江夏戰士하면 亦不下萬人이요
제갈량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예주劉豫州의 군대가 비록 장판長阪에서 패하였으나 지금 돌아온 전사戰士관우關羽수군水軍 중에 정예병이 만 명이고, 유기劉琦강하江夏전사戰士를 모으면 또한 만 명 이상일 것입니다.
曹操之衆 遠來疲敝 聞追豫州 輕騎一日一夜行三百餘里라하니 此所謂强弩之末 勢不能穿魯縞者也注+前書 “韓安國曰 ‘彊弩之末, 力不能入魯縞.’” 繒之精白者曰縞, 曲阜之俗, 善作之, 尤爲輕細, 故謂之魯縞.”
조조의 무리는 멀리 와서 피폐한데, 듣건대 유예주를 추격할 적에 경무장한 기병騎兵일주야一晝夜에 300리를 행군했다 하니, 이는 이른바 ‘강한 쇠뇌로 쏜 화살이 멀리 날아가면 힘이 약해져서 형세가 나라의 비단도 뚫지 못한다.’注+한서漢書≫에 “한안국韓安國이 말하기를 ‘강한 쇠뇌로 쏜 화살이 멀리 날아가면 힘이 약해져서 노호魯縞(나라에서 생산된 흰 비단)도 뚫지 못한다.’ 했다.” 하였다. 곱고 흰 비단을 라 하니, 곡부曲阜의 풍속이 이것을 잘 만들어서 매우 가볍고 가늘므로 이것을 노호魯縞라 한 것이다.”는 것입니다.
兵法 忌之하여 曰 必蹶上將軍注+兵法 “百里而趨利者, 蹶上將.”이라하니이다 且北方之人 不習水戰하고 又荆州之民附操者 偪兵勢耳 非心服也
그러므로 注+손자병법孫子兵法≫에 “100리를 행군하여 이익을 좇으면 상장군上將軍이 쓰러진다.” 하였다.라고 한 것입니다. 또 북방北方의 사람들은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고, 형주荆州의 백성 중에 조조에게 귀의한 자들은 조조의 군대의 위세에 핍박받았을 뿐, 마음으로 복종한 것이 아닙니다.
今將軍 誠能命猛將하여 統兵數萬하여 與豫州 協規同力이면 破操軍 必矣리이다
지금 장군이 진실로 용맹한 장수에게 명하여 수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유예주와 함께 계책을 상의하고 힘을 함께한다면 조조의 군대를 격파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操軍破 必北還하리니 如此 則荆, 吳之勢强하여 鼎足之形成矣注+荊, 謂備. 吳, 謂權.리니 成敗之機 在於今日이니이다 大悦이러라
조조의 군대가 격파되면 조조는 반드시 북쪽으로 돌아갈 것이니, 이와 같이 되면 (유비)과 (손권)의 형세가 강해져서 정족鼎足의 형세가 이루어질 것이니注+유비劉備를 이르고, 손권孫權을 이른다., 성패成敗의 기회가 금일今日에 달려 있습니다.” 이에 손권이 크게 기뻐하였다.
操遺權書曰 近者 奉辭伐罪하여 劉琮 束手 今治水軍八十萬衆하여 方與將軍으로 會獵於吳호리라
】 이때 조조曹操손권孫權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근자近者에 내가 황제의 말씀을 받들어 죄가 있는 자들을 정벌해서 유종劉琮이 손을 묶고 항복하였다. 내 이제 수군水軍 80만 명을 정돈하여 장군將軍과 함께 지방에서 모여 사냥하겠다.” 하였다.
以示群下하니 莫不失色이라 張昭等曰 曹公 豺虎也 挾天子以征四方하니 拒之不順이요
손권이 이 편지를 여러 부하들에게 보이니, 신하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얼굴빛이 변하였다. 장소張昭 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공曹公은 승냥이, 호랑이와 같습니다. 천자天子를 끼고서 사방을 정벌하니, 그를 막는 것은 도리상 순하지 못합니다.
且將軍大勢 可以拒操者 長江也어늘 今操得荆州水軍하니 蒙衝鬪艦 乃以千數
또 장군의 대세大勢로 볼 때 조조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장강長江뿐이었는데 지금 조조가 형주荆州수군水軍을 얻었으니 몽충蒙衝투함鬪艦이 마침내 1,000척으로 헤아려집니다.
浮以沿江하여 水陸俱下注+杜佑曰 “闘艦, 船上設女墻, 可高三尺, 墻下開掣棹孔. 船內五尺, 又建棚, 與女墻齊. 上又建女墻, 重列戰敵. 上無覆背, 前後左右, 樹牙旗幟旛金鼓, 此戰船也.”하니 此爲長江之險 已與我共之矣 而勢力衆寡 又不可論이라 愚謂大計不如迎之라하노이다
이 배들을 강에 띄워 물길을 따라 수로와 육로로 함께 내려오니注+두우杜佑가 말하였다. “투함闘艦은 배 위에 여장女墻(성가퀴)을 설치하니 높이가 3인데, 여장女牆 아래에 노 젓는 구멍을 만들어놓았다. 배 안은 5으로 또 (누각樓閣)을 세웠으니 여장女墻과 가지런하게 하고, 위에 또 여장을 세워서 전사戰士를 이중으로 나열하였다. 위에 덮개가 없고 전후前後좌우左右아기牙旗기치旗幟와 징과 북을 세우니, 이는 전선戰船이다.”, 이는 장강의 험함을 이미 우리와 함께 나누어 가진 것이니, 세력의 많고 적음을 또 논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는 생각건대, 큰 계책이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魯肅 獨不言이러니 權起更衣할새 追於宇下注+屋四垂爲宇, 又隤下曰宇.하니 知其意하고 執肅手曰 卿欲何言
노숙魯肅이 홀로 말하지 않고 있었는데, 손권孫權이 일어나 에 가려 하자 노숙이 처마 아래로 따라가니注+지붕의 사방이 , 손권이 그의 뜻을 알고는 노숙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가?” 하였다.
肅曰 向察衆人之議컨대 專欲誤將軍하니 不足與圖大事니이다 今肅 可迎操耳어니와 如將軍 不可也
이에 노숙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번에 여러 사람의 의견을 살펴보건대, 오로지 장군을 그르치고자 하니 그들과 더불어 대사大事를 도모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노숙은 조조曹操에게 항복해도 되지만 장군으로 말하면 불가합니다.
何以言之 今肅迎操 操當以肅還付鄉黨하여 品其名位하여 猶不失下曹從事하리니
어찌하여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지금 제가 조조에게 항복하면 조조는 마땅히 이 노숙을 향당鄉黨(향리鄕里)으로 돌려보내어 〈향리鄕里부로父老들에게〉 명성과 지위를 품별해 확정하게 하여 그래도 하조下曹종사관從事官이 못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乘犢車하고 從吏卒하고 交游士林하여 累官 故不失州郡也注+下曹從事, 諸曹從事之最下者. 晉志 “犢車, 牛車也. 古之貴者, 不乘牛車. 漢武帝推恩之末, 諸侯寡弱, 貧者至乘牛車. 其後稍貴之, 自靈․獻以來, 天子至士, 遂爲常乘. 從, 才用切. 士林, 多士之林, 謂京邑․大都四方賢士所聚也. 故, 通作固.어니와 將軍迎操 欲安所歸乎잇가
저는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관리와 병졸을 거느리고 사림士林들과 교유交遊하면서 여러 차례 관직을 지내다보면, 진실로 주군州郡의 직책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注+하조下曹종사從事는 여러 종사從事 중에 가장 낮은 자이다. ≪진서晉書≫ 〈백관지百官志〉에 “독차犢車는 소가 끄는 수레이다. 옛날 귀한 자는 소가 끄는 수레를 타지 않았다. 나라 무제武帝추은령推恩令(제후의 봉지를 물려줄 때 적장자 이외의 아들에게도 나누어주는 것)을 내린 끝에 제후諸侯 중에 세력이 약하여 가난한 자는 소가 모는 수레를 타기도 하였다. 그 뒤에 점점 귀해져서 영제靈帝헌제獻帝 이래로는 천자天子로부터 에 이르기까지 마침내 일반적으로 타는 수레가 되었다.” 하였다. (거느리다)은 재용才用이다. “사림士林”은 선비가 숲처럼 많은 것이니, 경읍京邑대도大都사방四方에서 현사賢士가 모이는 곳임을 말한 것이다. (진실로)는 와 통한다. 그러나 장군은 조조에게 항복하면, 어느 곳으로 돌아가고자 하십니까.
願早定大計하고 莫用衆人之議也하소서 歎息曰 諸人持議 甚失孤望이라 今卿 廓開大計하니 正與孤同이로다
원컨대 빨리 큰 계책을 결정하고 뭇사람들의 의논을 따르지 마소서.” 손권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여러 사람들이 주장하는 의논은 매우 나를 실망스럽게 하였다. 이제 이 큰 계책을 크게 열어주니, 바로 나와 뜻이 같다.” 하였다.
周瑜受使至番陽이라 勸權하여 召瑜還注+瑜已受命出使, 蓋行未遠也.하니 瑜至 謂權曰 操雖託名漢相이나 實漢賊也
】 이때 주유周瑜가 사명을 받들고 번양番陽(파양)까지 갔는데, 노숙魯肅손권孫權에게 권하여 주유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注+〈“주유수사지번양周瑜受使至番陽은”〉 주유周瑜가 이미 사명使命을 받들고 사자로 나갔으나 그리 멀리 가지 않은 것이다. 주유가 와서 손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조曹操가 비록 나라 승상丞相명의名義를 가탁하고 있으나 실제는 나라의 역적입니다.
將軍 以神武雄才 兼仗父兄之烈하여 割據江東하여 地方數千里 兵精足用하고 英雄樂業注+英雄之士, 猶樂其業, 言無他志也.하니
장군將軍은 신묘한 무용武勇과 영웅의 재주로 부형父兄공렬功烈을 겸하여 의지해서 강동江東 지방을 할거割據하여 땅이 사방 수천 리이고 병사들이 정예로워 전쟁에 충분히 쓸 수 있으며 영웅들이 〈다른 뜻이 없어〉 자신의 일을 즐기고 있으니注+〈“영웅락업英雄樂業”은〉 영웅호걸英雄豪傑들이 아직도 자신의 일을 즐거워하는 것이니, 다른 뜻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當横行天下하여 爲國家除殘去穢 況操自送死而可迎之邪잇가 請爲將軍籌之호리이다
마땅히 천하에 횡행하여 국가를 위해 백성들을 해치고 더럽히는 자들을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조조가 직접 죽으러 오는데 그에게 항복한단 말입니까. 청컨대 장군을 위해 계책을 세워보겠습니다.
今北土未平하여 馬超, 韓遂爲操後患이어늘 而操舍鞍馬하고 杖舟楫하여 與吳越爭衡注+北人便於鞍馬, 南人便於舟楫. 言操舍所長而就所短.하며
지금 북쪽 지역이 아직 평정되지 못해서 마초馬超한수韓遂가 조조의 후환後患이 되고 있는데, 조조는 안장을 얹은 말을 버리고 배와 노에 의지하여 우리 오월吳越 지역과 힘을 겨루려고 하며注+북쪽 사람들은 안장을 얹은 말을 편리하게 여기고 남쪽 사람들은 배와 노를 편리하게 여기니, 〈“조사안마 장주즙操舍鞍馬 仗舟楫”은〉 조조曹操가 자기들의 장점을 버리고 단점으로 나아감을 말한 것이다.,
又今盛寒 馬無槁草어늘 驅中國士衆하여 遠渉江湖之間하니 不習水土하여 必生疾病이리이다
또 지금 한 겨울 추위에 말들이 먹을 짚과 건초가 없는데 중국의 병사들을 몰아 멀리 강호江湖의 사이를 건너오니, 그들은 수토水土에 익숙하지 못하여 반드시 질병이 생길 것입니다.
此數者 用兵之患也어늘 而操皆冒行之하니 將軍禽操 宜在今日이라
이 몇 가지는 용병用兵의 큰 폐해인데 조조가 모두 무릅쓰고 행하니, 장군이 조조를 사로잡는 것은 마땅히 금일今日에 있습니다.
瑜請得精兵數萬人하여 進住夏口하여 保爲將軍破之호리이다
제가 청컨대 정예병 수만 명을 얻어서 하구夏口진주進住하여, 장담컨대 장군을 위해 조조를 격파하겠습니다.”
權曰 老賊 欲廢漢自立 久矣로되 徒忌二袁, 呂布, 劉表與孤耳
손권孫權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노적老賊(조조曹操)이 나라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나, 다만 두 원씨袁氏(원소袁紹원술袁術)와 여포呂布, 유표劉表와 나를 두려워했을 뿐이다.
今數雄已滅하고 惟孤尙存하니 孤與老賊으로 勢不兩立이라 君言當擊 甚與孤合하니 此天以君授孤也라하고
지금 여러 영웅들이 이미 멸망하고 오직 내가 아직 남아 있으니, 내 노적老賊과는 형세상 양립兩立할 수가 없다. 그대가 조조를 공격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나의 뜻과 매우 부합하니, 이는 하늘이 을 나에게 준 것이다.”
因拔刀하여 斫前奏案하고 曰 諸將吏敢復有言當迎操者 與此案同하리라하고 乃罷會하다
손권이 인하여 칼을 뽑아서 앞에 놓여 있는 상주문을 올려놓는 책상을 가르고 말하기를 “여러 장수와 관리 중에 감히 다시 조조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이 책상과 같이 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회의를 하였다.
是夜 瑜復見權하고 曰 諸人 徒見操書 言水步八十萬하고 而各恐懼하니 甚無謂也注+謂失於事宜也.
】 이날 밤 주유周瑜가 다시 손권孫權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다만 조조曹操의 편지에서 수군水軍보군步軍이 모두 80만이라고 한 것만 보고는 각각 두려워하니, 이는 매우 옳지 않습니다.注+〈“심무위甚無謂”는〉 일의 마땅함을 잃음을 이른다.
今以實校之하면 彼所將中國人 不過十五六萬이요 且已久疲 所得表衆 亦極七八萬耳어늘 尙懷狐疑注+言新附之人, 心懷狐疑, 未能出死命而爲之力戰也.니이다
이제 실제를 가지고 따져보면 저들이 거느린 중국의 병력은 15, 6만에 불과한데 이들은 또 이미 오랫동안 싸워 피로하며, 얻은 유표劉表의 무리는 또한 기껏해야 7, 8만이 될 뿐인데 이들은 아직도 의심하여 주저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注+〈“상회호의尙懷狐疑”는〉 새로 조조曹操에게 붙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의심을 품고 있어서 목숨을 바쳐 조조를 위해 힘껏 싸우지 않을 것임을 말한 것이다.
夫以疲病之卒 御狐疑之衆이면 衆數雖多 甚不足畏 瑜得精兵五萬이면 自足制之하리니 願將軍 勿慮하소서
피로하고 병든 병졸로 의심하여 주저하는 무리를 통솔한다면, 병사의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리 두려워할 것이 못 됩니다. 제가 정예병 5만을 얻는다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으니, 원컨대 장군은 염려하지 마소서.”
撫其背曰 公瑾 卿言至此하니 甚合孤心이로다 子布, 元表 各顧妻子하니 深失所望注+子布, 張昭字. 元, 當作文. 文表, 秦松字. 呂蒙傳 “子布ㆍ文表俱言迎之.”이요
손권孫權주유周瑜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공근公瑾아! 의 말이 이에 이르니, 나의 마음과 매우 부합한다. 자포子布원표元表는 각기 자기 처자妻子만을 돌아보니 내 크게 실망을 하였고注+자포子布장소張昭이다. 은 마땅히 이 되어야 하니, 문표文表진송秦松이다. ≪삼국지三國志≫ 〈오지 여몽전吳志 呂蒙傳〉에 “자포子布문표文表가 모두 조조曹操에게 항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였다.,
獨卿與子敬 與孤同耳注+子敬, 魯肅字. 天以卿二人賛孤也로다 已選三萬人하여 船糧戰具 俱辦하니
다만 자경子敬만이 나와 뜻이 같다.注+자경子敬노숙魯肅이다. 이는 하늘이 자경子敬 두 사람으로 나를 돕게 한 것이다. 내 이미 3만 명을 선발하여 배와 양식과 전쟁 도구를 모두 마련하였으니,
卿與子敬, 程公으로 便在前發하라 孤當續發人衆하여 多載資糧하여 爲卿後援注+程公, 程普也. 時江東諸將, 普年最長, 人皆呼程公.호리라하고
자경子敬, 정공程公(정보程普)과 함께 곧바로 앞에서 출발하라. 내 마땅히 뒤이어 병사들을 징발하여 물자와 양식을 많이 싣고서 경의 후원後援이 되겠다.”注+정공程公정보程普이니, 이때 강동江東의 여러 장수 중에 정보의 나이가 가장 많아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정공程公이라고 〈높여〉 불렀다. 하고는,
遂以周瑜, 程普爲左右督하여 與備幷力逆操하고 以魯肅爲贊軍校尉하여 助畫方略注+贊軍校尉, 使之贊軍謀, 因以爲官稱.하다
마침내 주유와 정보程普좌독左督우독右督으로 삼아서 유비劉備와 함께 힘을 합쳐 조조를 맞아 싸우게 하고, 노숙魯肅찬군교위贊軍校尉로 삼아 방략方略을 도와 계획하게 하였다.注+찬군교위贊軍校尉는 그로 하여금 군대의 계책을 돕게 하고 인하여 관직의 칭호로 삼은 것이다.
劉備望見瑜船하고 乘單舸하여 往見瑜하고 問戰卒有幾 瑜曰 三萬人이니이다
유비劉備주유周瑜의 배가 오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한 척의 배를 타고 가서 주유를 만나보고 “전투병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으니, 주유가 대답하기를 “3만 명입니다.” 하였다.
備曰 恨少로다 瑜曰 此自足用이니 豫州 但觀瑜破之니이다 備深愧喜러라
유비가 말하기를 “병력이 적은 것이 한스럽다.” 하자, 주유가 말하기를 “이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쓸 수 있으니, 유예주劉豫州는 다만 제가 조조曹操를 격파하는 것을 보기만 하십시오.” 하니, 유비가 깊이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뻐하였다.
하여 與操遇於赤壁注+水經註 “江水自沙羨而東, 右逕赤壁山北.” 郡縣志 “赤壁山, 在蒲圻縣西百二十里, 北岸烏林, 與赤壁相對.”하니 操軍 已有疾疫이라 初一交戰 操軍不利하여 引次江北하다
전진하여 조조曹操의 군대와 적벽赤壁에서 만났는데注+수경주水經註≫에 “장강長江의 물은 사선현沙羨縣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오른쪽으로 적벽산赤壁山 북쪽을 지난다.” 하였다. ≪군현지郡縣志≫에 “적벽산赤壁山포기현蒲圻縣 서쪽 120리 지점에 있으니, 북안北岸오림烏林적벽赤壁과 서로 마주했다.” 하였다., 이때 조조의 군중軍中에는 이미 역병疫病(전염병)이 돌고 있었다. 처음 교전交戰했을 적에 조조의 군대가 승리하지 못하자 병력을 이끌고 장강 북쪽에 주둔하였다.
瑜等 在南岸이러니 瑜部將黄蓋曰 今寇衆我寡하니 難與持久 操軍 方連船艦하여 首尾相接하니 可燒而走也라하고
주유周瑜 등은 장강 남안南岸에 주둔해 있었는데, 주유의 부장 황개部將 黄蓋가 말하기를 “지금 은 병력이 많고 우리는 적으니 지구전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조조曹操의 군대가 막 전함戰艦을 연결하여 선수船首선미船尾가 서로 이어져 있으니, 화공火攻으로 불을 놓고 달아나야 합니다.” 하고는
乃取蒙衝鬪艦十艘하여 載燥荻, 枯柴하여 灌油其中하고 裹以帷幕하여 上建旌旗하고
마침내 몽충蒙衝전함戰艦 10척을 취하여 마른 갈대와 마른 나무를 가득히 싣고서 이 가운데에 기름을 붓고 장막으로 싼 다음 배 위에 정기旌旗를 꽂아놓고,
豫備走舸하여 繫於其尾注+杜佑曰 “走舸, 舷上立女墻, 置棹夫多, 戰卒少, 皆選勇力精銳者, 往返如飛鷗, 乘人之所不及. 金鼓旗幟, 列之於上, 此戰船也.”하고 先以書遺操하여 詐云欲降하다
미리 주가走舸(가볍고 속도가 빠른 전선戰船)를 마련하여 큰 배의 뒤에 매달고注+두우杜佑가 말하였다. “주가走舸는 배 위에 여장女墻을 세우고, 노 젓는 사람은 많이 배치하고 전투병은 적게 배치하였으니, 모두 용맹과 힘이 뛰어나고 정예로운 자를 뽑아서 왕복하기를 날아다니는 갈매기와 같이 빠르게 하여 적이 미처 대비하지 못함을 틈타는 것이다. 징과 북과 기치旗幟를 그 위에 나열하니, 이는 전선戰船이다.”, 먼저 편지를 조조에게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고자 한다.” 하였다.
東南風이라 蓋以十艦으로 最著前하여 中江擧帆하고 餘船 以次俱進注+著, 陟略切. 帆, 符咸切. 舟上幔, 所以汎風.하다
】 이때 동남풍東南風이 매우 세차게 불었다. 황개黃蓋가 10척의 전함을 최전선에 배치하고 장강 한 가운데서 닻을 들어 올리니, 남은 배가 차례로 함께 전진하였다.注+(놓다)은 척략陟略이다. 부함符咸이니, 배 위에 휘장을 달아 풍력風力을 이용하는 것이다.
操軍吏士 皆出營立觀하여 指言蓋降이러니 去北軍二里餘 同時發火하니
조조曹操 군대의 관리와 병사들이 모두 진영을 나와 서서 구경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황개가 항복하러 온다.”라고 말하였다. 황개의 전함들이 북쪽 군대(조조曹操의 군대)와 2리 남짓 근접하자 동시에 불을 놓으니,
火烈風猛이라 船往如箭하여 燒盡北船하고 延及岸上營落이라 頃之 煙燄張天하여 人馬燒溺死者 甚衆注+張, 去聲.이러라
불길이 맹렬하고 바람이 거세어 배가 쏜살같이 치달려가서 북쪽의 배들을 모두 불 태우고 불길이 강안江岸의 진영에까지 뻗쳤다. 얼마 후 연기와 화염이 하늘을 뒤덮어서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조조의 병사와 말이 매우 많았다.注+(뒤덮다)은 거성去聲이다.
瑜等 率輕銳하고 繼其後하여 雷鼓大進注+雷, 盧對切. 疾擊鼓也.하니 北軍 大壞
주유周瑜 등이 정예병을 거느리고 그 뒤를 이어서 注+ 〈“뇌고雷鼓”는〉 북을 급히 치는 것이다. 북쪽 군대가 크게 무너졌다.
周瑜가 赤壁에서 曹操의 군대를 격파하다周瑜가 赤壁에서 曹操의 군대를 격파하다
操引軍走러니 遇泥濘하여 道不通하여 悉使羸兵으로 負草塡之하니 蹈藉死者甚衆이요 天又大風이러라
조조曹操가 군대를 이끌고 달아났는데, 진흙탕을 만나 길이 통하지 않자 피로한 병사들로 하여금 모두 풀을 져다가 진흙탕을 메꾸게 하니, 서로 밟히고 깔려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하늘에서는 또 큰 바람이 불었다.
劉備, 周瑜水陸竝進하여 追至南郡하니 操軍死者太半이라 操乃留曹仁하여 守江陵하고 樂進守襄陽하고 引軍北還하다
유비劉備와 주유가 수륙水陸으로 함께 전진해서 조조를 추격하여 남군南郡에 이르니, 조조의 병사 중에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조조는 마침내 조인曹仁을 남겨두어 강릉江陵을 지키게 하고 악진樂進에게 양양襄陽을 지키게 하고는,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갔다.
甘寧 徑進取夷陵하여 守之하니 益州將襲肅 擧軍降注+襲肅, 姓名. 先取夷陵, 則與益州爲隣, 故肅擧軍以降.이어늘 瑜以肅兵益呂蒙한대
감녕甘寧이 곧바로 전진해서 이릉夷陵을 점령하여 지키니, 익주益州의 장수 습숙襲肅이 온 병력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注+습숙襲肅은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먼저 이릉夷陵을 점령하면 익주益州와 이웃이 되므로 습숙이 익주의 병력을 데리고 와서 항복한 것이다. 주유周瑜가 습숙의 병력을 여몽呂蒙에게 보태어주자,
盛稱肅有膽用하고 且慕化遠來하니 於義 宜益이요 不宜奪也니이다 善其言하여 還肅兵하다
여몽은 습숙을 극구 칭찬하여 말하기를 “습숙이 담력과 재주가 있고, 또 우리의 교화를 사모하여 멀리서 귀순해왔으니, 의리상 마땅히 군대를 보태주어야지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손권孫權이 그의 말을 좋게 여겨 습숙의 병력을 다시 돌려주었다.
曹仁 圍甘寧注+通鑑 “曹仁遣兵, 圍甘寧.”이어늘 謂瑜曰 留凌公績於江陵注+公績, 統字.하고 蒙與君行하여 解圍釋急이면 勢亦不久 保公績能十日守也하노이다
조인曹仁감녕甘寧을 포위하였는데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 “조인曹仁이 군대를 보내어 감녕甘寧을 포위했다.” 하였다., 여몽呂蒙주유周瑜에게 이르기를 “능공적凌公績강릉江陵에 남겨두고注+공적公績능통凌統이다. 저는 과 함께 이릉夷陵으로 가서 감녕의 포위를 풀고 위급함을 풀어주면 형세가 또한 오래가지 않을 것이니, 제가 장담컨대 능공적이 10일 동안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瑜從之하여 大破仁兵於夷陵하니 於是 將士形勢自倍 瑜乃渡江하여 屯北岸하여 與仁相拒하다
주유가 그의 말을 따라 이릉에서 조인을 대파하니, 이에 장병들의 형세形勢(기세氣勢)가 절로 배가倍加되었다. 주유는 마침내 장강長江을 건너 북안北岸에 주둔해서 조인과 서로 대치하였다.
十二月 孫權 圍合肥注+合肥, 曹操置, 楊州刺史治焉. 時, 刺史已移治壽春.하다
】 12월에 손권孫權합비合肥를 포위하였다.注+합비合肥조조曹操가 설치한 곳으로 양주자사楊州刺史치소治所가 있었는데, 이때 자사刺史가 이미 치소治所수춘壽春으로 옮겼다.
◑劉備徇荆州江南諸郡하여 降之하다
유비劉備형주荆州장강長江 남쪽의 여러 을 경략하여 항복시켰다.
劉備表劉琦하여 爲荆州刺史하고 引兵南徇하니 武陵, 長沙, 桂陽, 零陵 皆降注+徇, 略也.하고 廬江營帥雷緒 率部曲數萬口하여 歸備注+雷, 姓也.하다
유비劉備표문表文을 올려 유기劉琦형주자사荆州刺史로 삼게 하고 군대를 이끌고 남쪽을 경략하니, 무릉武陵, 장사長沙, 계양桂陽, 영릉零陵이 모두 항복하였고注+경략經略함이다., 여강廬江 진영의 장수인 뇌서雷緒부곡部曲(부하) 수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유비에게 귀의하였다.注+이다.
備以諸葛亮으로 爲軍師中郎將하여 督諸郡賦税하여 以充軍實注+軍師, 古將軍號. 曹操初置軍師祭酒, 而備置軍師中郞將, 皆以一時軍事創置官名也. 然軍師祭酒, 只決軍謀, 中郞將則有兵柄.하다
유비는 제갈량諸葛亮군사중랑장軍師中郎將으로 삼아 여러 부세賦税를 감독하여 군실軍實(군대에서 쓰는 병기와 식량)을 충당하게 하였다.注+군사軍師는 옛 장군將軍의 칭호이다. 조조曹操가 처음 군사제주軍師祭酒를 설치하고 유비劉備군사중랑장軍師中郞將을 설치하였으니, 이는 모두 한때 군대의 일 때문에 만든 관명官名이다. 그러나 군사제주軍師祭酒는 다만 군사軍事상의 계책만을 결정하였으나, 중랑장中郞將병병兵柄(병권兵權)도 겸하여 가지고 있었다.
孫權 使其將賀齊 討黟賊하여 平之하다
손권孫權이 부하 장수 하제賀齊로 하여금 이현黟縣(이현)의 을 토벌하게 하여 평정하였다.
丹陽黟賊帥陳僕等二萬户 屯林歴山하니 四面壁立注+黟, 音伊. 魏氏春秋 “丹陽郡黟縣, 有林歷山.”이라
단양 이현丹陽 黟縣의 우두머리인 진복陳僕 등 2만 임력산林歴山에 주둔해 있었는데, 임력산은 사면四面이 절벽으로 둘려 있었다.注+이다. ≪위씨춘추魏氏春秋≫에 “단양군 이현丹陽郡 黟縣임력산林歷山이 있다.” 하였다.
齊募輕捷士하여 夜於隱處 以鐵戈 拓山而上하여 縣布以援下人하니 得上者 百餘人注+拓, 開也. 縣, 讀曰懸.이라
하제賀齊는 몸이 가볍고 민첩한 병사들을 모집하여 밤에 으슥한 곳에서 쇠창으로 산을 헤치고 올라가서 삼베를 매달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끌어올리니, 위로 올라간 자가 100여 명이었다.注+은 엶이다. (매달다)은 으로 읽는다.
分布四面하여 鳴鼓角하니 賊守路者 皆驚走還注+伐鼓吹角, 皆所以作勇也. 角, 長五尺, 以皮爲之, 或以竹木, 其形如竹筒, 本細而末大.이라 大軍 上攻하여 破之하니 以其地爲新都郡하고 齊爲太守하다
이들이 사방으로 흩어져서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부니, 길을 지키던 적병들이 모두 놀라 달아나 〈임력산의 주둔지로〉 돌아갔다.注+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것은 모두 용기를 진작하기 위한 것이다. 나팔은 길이가 5이니 가죽으로 만드는데 혹 대나무와 나무를 사용하며, 그 모습이 대통과 같은데 위는 가늘고 아래는 굵다. 하제의 대군大軍이 산 위로 올라가 공격해서 이들을 격파하니, 〈손권孫權은〉 이 땅을 신도군新都郡으로 만들고 하제를 신도태수新都太守로 삼았다.
역주
역주1 庾仲雍 : 東晉 혹은 東晉과 南朝 宋나라에 걸쳐 활동했던 사람으로, 이름은 穆之이며 仲雍은 그의 字이다. 湖北과 湖南 지역에서 오랫동안 거처하여 江漢의 水道와 地理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湘州記≫를 지었다.
역주2 蕭何의 임무 : 蕭何는 漢나라를 일으킨 高祖 劉邦의 開國功臣으로, 關中 지역에 머물면서 군량과 병력을 계속 공급해서 유방이 여러 번 項羽에게 패하여 곤경에 처했으나 이에 힘입어 끝내 成功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張良, 韓信과 함께 開國三傑로 알려지고 오랫동안 丞相을 맡아 많은 공적을 쌓았다.
역주3 罷三公官 曹操自爲丞相 : “특별히 쓴 것이다. 三公을 없앴다가 회복한 일을 쓴 것이 많은데, 여기에서 특별히 쓴 것은 어째서인가. 曹操가 전횡함을 비난한 것이다. 조조는 일찍이 스스로 大將軍이 되었다가 얼마 후에 袁紹를 두려워하여 스스로 司空이 되어 대장군의 지위를 원소에게 사양했었다. 그런데 이때에 원소가 멸망하니, 조조는 다시 대장군의 자리를 취하는 것이 부끄러웠으므로 三公의 관직을 없애고 스스로 丞相이 되었으니, 이와 같다면 굳이 대장군이 되지 않고도 존귀함이 그대로 있는 것이다. 조조의 간악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特書也 書三公罷復 多矣 此其爲特書 何 譏專也 操嘗自爲大將軍矣 旣而懼紹 自爲司空以讓之 於是紹滅 媿於復取也 故罷三公官而自爲丞相 如是則不必爲大將軍而尊固在矣 操之姦 可勝言哉]” ≪書法≫ “‘三公의 관직을 없애고 曹操가 스스로 丞相이 되었다.’라고 썼으니, 읽어보면 별다른 뜻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조조가 자신을 높이고 특이하게 하고자 하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와 同列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 은연중에 이 가운데 들어 있으니, 배우는 자가 알지 않으면 안 된다.[書罷三公官 曹操自爲丞相 讀之若無異義 然操自欲尊異 不肯復使他人得與己同列之意 自隱然在其中矣 學者不可不知]” ≪發明≫
역주4 成人이……한다 : 成人은 20세를 가리키는바, 殤은 20세가 되기 전에 죽은 것으로 ≪說文解字≫에 “殤은 성인이 되지 못한 것이다. 19세부터 16세까지를 長殤, 15세부터 12세까지를 中殤, 11세부터 8세까지를 下殤이라 한다.”라고 보이는바, 이들에게는 각각 상복을 낮추며 8세 이하는 상복이 없다.
역주5 操殺大中大夫孔融 : “예로부터 簒奪하는 逆賊은 반드시 자기가 꺼리는 사람을 먼저 제거하였다. 孔融이 뜻이 크고 학문이 높아서 海内에 명성이 성대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曹操가 꺼리는 바였다. 范曄의 ≪後漢書≫에 이르기를 “조조는 공융이 大業에 방해될까 염려했다.” 하였으니, 그 말이 옳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 ‘조조가 공융을 죽였다.’라고 특별히 쓰고, 공융의 관직을 떼어버리지 않은 것이다.[自古簒奪之賊 必先去其所憚之人 孔融志大术高 名重海内 此固操之所憚者 范史謂 操慮鯁大業 其言是矣 故綱目特書操殺 而不去其官]” ≪發明≫
역주6 예형은……탄생했다 : 仲尼는 孔子의 자이며, 顔回는 공자의 高弟로 字가 子淵인데 보통 顏淵으로 불렸다. 이는 곧 孔融을 공자와 같은 大聖人이라 하고 禰衡을 안회와 같은 大聖人이라고 하며 서로 추켜세우고, 曹操와 같은 인물을 높게 평가하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7 申生은……되었다 : 晉 獻公은 賈姬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었고, 아버지 武公의 첩인 齊姜과 간통하여 太子 申生을 낳았다. 또 戎에서 두 여인을 맞이하였는데 大戎 狐姬는 重耳를 낳고 小戎子는 夷吾를 낳았으며, 驪姬를 데려와서 奚齊를 얻고 여희의 여동생에게서 卓子를 얻었다. 헌공이 여희를 총애하자, 여희가 자기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신생을 모함하여 죽이니, 중이와 이오가 모두 외국으로 망명하였다. 헌공이 죽자, 해제와 탁자가 차례로 즉위하였으나 모두 里克에게 살해되었다. 그리하여 이오가 중이를 제치고 즉위하니, 이가 惠公이다. 혜공이 죽고 아들 懷公이 즉위하였으나 失政을 거듭한 끝에 중이에게 죽임을 당하고 중이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문공이다. ≪訓義≫에는 헌공이 죽고 중이가 곧바로 즉위한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역주8 追景升之顧 : ≪通鑑節要≫ 頭註에 “이는 劉表가 어린 고아를 부탁하였음을 생각한 것이다.[思劉表之托孤幼]”라 하였다.
역주9 戀赴義之士 : ≪通鑑節要≫ 頭註에 “이는 사람들이 劉備에게 귀의하므로 차마 버리고 떠나가지 못함을 이른다.[謂人歸而不忍棄去]”라 하였다.
역주10 方寸이……없으니 : 方寸은 사방 한 치란 뜻으로 心臟을 가리키며 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는 장군(유비)과 함께 軍中에서 일했던 것은 왕자와 패자의 일을 이루려는 마음에서였으나, 이제 어머니가 曹操에게 잡히니 마음이 혼란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므로 왕자와 패자의 일을 이루는 데에 유익함이 없으니 떠나고자 한다고 말한 것이다.
역주11 柳下惠 : 춘추시대 魯나라의 어진 大夫로 公族(王族)인데 이름은 展禽이니 柳下는 그의 食邑이고 惠는 시호라 한다. ≪孟子≫ 〈公孫丑 上〉에 “유하혜는 더러운 군주를 섬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낮은 벼슬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으며, 벼슬길에서 버림을 받아도 원망하지 않고 곤궁하여도 근심하지 않았다.[不羞汚君 不卑小官 遺佚而不怨 阨窮而不憫]”라고 보이며, 또 〈萬章 下〉에 “유하혜는 성인 중에 和한 자이다.[柳下惠聖之和者也]”라고 보인다.
역주12 范蠡 : 춘추시대 越나라의 名臣으로 越王 句踐을 도와 吳나라를 멸망시킨 다음 五湖에 배를 띄워 齊나라에 가서 성명을 바꾸고 재산을 증식하여 巨富가 되었다. 齊나라에서 그를 정승으로 삼으려 하자, 크게 탄식하며 “내가 집에서 千金의 부자가 되고 벼슬하여서는 卿相의 지위에 올랐으니, 이는 布衣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위이다. 오랫동안 높은 명망을 받는 것은 좋지 못하다.” 하고 정승의 印綬를 돌려주고 재물을 모두 흩어주었다. 뒤에 陶 땅에 가서 스스로 陶朱公이라 하고서 또다시 큰 부자가 되었다.
역주13 掾屬 : 三公府와 將軍府의 屬僚로 秩이 比四百石에서 比二百石이다. 삼공과 장군이 辟召하여 선임한다.
역주14 孔子가……돌아왔다 : 이 내용은 ≪史記≫ 권47 〈孔子世家〉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15 振振然 : 何休의 注에 “극에 달한 陽氣의 모습[亢陽之貌]”이라고 설명하였다.
역주16 그……못하다[莫若我] : 何休의 注에 “기색이 절로 아름답게 여기고 큰 체하는 모습[色自美大之貌]”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이에 대한 徐彦의 疏에 “그 얼굴빛에 절로 아름답게 여기고 큰 체하는 형세가 있음을 이른다.[謂其顔色自有美大之勢]”라고 해설하였다.
역주17 曹操東下……大破之 : “동쪽으로 내려왔다는 것은 무엇인가. 曹操가 강성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曹操를 맞이하여 공격했다.’라고 쓴 것이다. 이 싸움에 조조를 맞이하여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吴나라의 일이 영영 글러버렸을 것이다.[東下 何 盛辭也 故特書迎擊 是役也微迎擊 則吴事去矣]” ≪書法≫ “赤壁江의 승리에 吳나라 사람이 그 공을 독차지하였다. 이 때문에 後日 荆州를 다툴 적에 關羽가 魯肅에게 찾아가서 말하기를 ‘烏林의 싸움에 左将軍(劉備)이 직접 군대 사이에 있으면서 힘을 다해 역적을 격파했다.’라고 하자, 노숙은 말하기를 ‘처음 劉豫州(劉備)와 長坂에서 만났을 적에 뜻이 꺾이고 형세가 약하니, 主上(孫權)이 가엽게 여겨서 그 환란을 구제해주었다.’ 하였다. 이와 같다면 그 공이 진실로 돌아갈 곳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資治通鑑綱目≫에서 이에 대해 마침내 ‘周瑜와 노숙 등이 유비와 함께 曹操를 맞이하여 공격해서 대파했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조조가 동쪽으로 내려올 때를 당하여 吳나라 사람들이 떨고 두려워해서 조조를 맞이할 것을 도모하였으니, 비록 주유와 노숙이 안에서 계책을 정함이 있었으나 昭烈(유비)과 諸葛孔明이 밖에서 보필하고 感發함이 있지 않았다면 또한 반드시 이와 같이 빨리 成功하지 못했을 것이니, 柴桑에서 諸葛亮이 손권에게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書法이 이와 같으니, 이는 또한 그 사실을 미루어 찾아서 輕重을 저울질했을 뿐이다. 어찌 지나치겠는가.[赤壁之勝 吳人專有其功 是以他日荆州之爭 關羽方詣魯肅 以謂烏林之役 左将軍親在行間 戮力破賊 而魯肅則謂始與豫州觀於長坂 志勢摧弱 主上矜愍 以濟其患 如此則其功固有所歸矣 今綱目於此 乃書瑜肅等與備迎擊破之 何哉 蓋當曹操東下之時 吳人震懼 謀欲迎操 雖有周瑜魯肅定謀於内 然非昭烈孔明左右感發於外 則亦未必成功若是之捷 觀之柴桑之說 則可見矣 書法如此 蓋亦推求其實而權其輕重耳 夫豈過哉]” ≪發明≫
역주18 田横은……않았습니다 : 전횡은 秦나라 말기 사람으로 본래 齊王 田榮의 아우였는데, 전영이 죽자 대신 그 무리를 거느리고 項羽를 공격하여 齊나라 지역을 회복하고 전영의 아들 田廣을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전광이 漢나라 장수 韓信에게 패하여 죽자, 스스로 齊王이 되었다. 漢王 劉邦이 천하를 통일하자, 부하 500여 명과 海島로 도망하였는데 유방의 강제 소환에 따라 洛陽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자살하였다. 이에 남은 무리가 모두 그를 위해 죽었다.
역주19 兵法에……쓰러진다 : 兵法은 ≪孫子兵法≫을 가리킨다. ≪孫子≫ 〈軍爭〉에는 “갑옷을 말아가지고 급히 달려가서 밤낮으로 머물지 않고 행군속도를 倍加할 경우, 100리를 행군하여 이익을 다투면 三軍의 將軍이 사로잡히고, 〈병사 중에〉 굳센 자는 먼저 가고 피로한 자는 뒤처져서 그 기준이 10분의 1만 도착하며, 50리를 행군하여 이익을 다투면 上將軍이 쓰러지고 〈병사는〉 그 기준이 절반만 도착한다.[券甲而趨 日夜不處 倍道兼行 百里而爭利 則擒三將軍 勁者先 疲者後 其法十一而至 五十里而爭利 則蹶上將軍 其法半至]”라고 하여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역주20 (柵)[棚] : 저본에는 ‘柵’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棚’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1 更衣 : 옷을 갈아입거나 휴식하는 곳을 가리킨다. 一說에는 更衣가 옛날에 대소변을 완곡하게 이르는 말이라 하여 廁間을 가리킨다고 한다.
역주22 아래로……한다 : 이 말은 본래 ≪周禮≫ 〈冬官考工記 輪人〉에 “〈蓋에서〉 上은 높게 하고자 하고 宇는 낮게 하고자 한다. 上이 높고 宇가 낮으면 빗물이 빨리 흘러서 빠져나가고 멀리까지 흘러나간다.[上欲尊而宇欲卑 上尊而宇卑 則吐水疾而霤遠]”라고 한 것에 대한 鄭玄의 注이다. ‘蓋’는 수레에 설치하는 日傘모양의 덮개이며, ‘上’은 部에 근접한 평평한 부분을 이른다. ‘部’는 ‘柎(꽃받침)’와 통하는바, 蓋의 자루에서 맨 위쪽의 끝에 위치하여 그 역할이 마치 꽃받침과 같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으로, 漢나라 때에는 이를 ‘蓋斗’라고 불렀다. ‘宇’는 蓋에서 지붕의 처마처럼 아래로 비스듬히 내려온 부분으로, 그 길이는 4尺이다.
역주23 戰鼓를……공격하니 : ≪資治通鑑≫ 권65 〈漢紀57〉에는 “戰鼓를 급히 치자 그 소리가 크게 진동하니[雷鼓大震]”로 되어 있다.
역주24 雷는……切이니 : 이때 雷는 攂자와 통하는바, ‘급히 북을 치는 것[急擊鼓]’을 뜻한다.(≪集韻≫ 권7 隊)

자치통감강목(10)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