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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0)

자치통감강목(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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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巳年(201)
신사년辛巳年(201)
六年이라 春三月朔 日食하다
나라 효헌황제 건안孝獻皇帝 建安 6년이다. 봄 3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夏四月 曹操擊袁紹倉亭하여 破之하다
】 여름 4월에 조조曹操창정倉亭에 주둔한 원소袁紹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曹操以袁紹新破라하여 欲以其間擊劉表注+間, 古莧切.러니 荀彧曰 紹旣新敗 其衆離心하니 宜乘其困하여 遂定之어늘
조조曹操원소袁紹를 이제 막 격파하였다고 하여 그 틈을 이용해 유표劉表를 공격하고자 하였는데注+(틈)은 고현古莧이다., 순욱荀彧이 말하기를 “원소가 이제 막 패하여 그 무리들의 마음이 떠났으니, 마땅히 곤궁한 때를 틈타 완전히 평정해야 합니다.
而欲遠師江漢하니 若紹收其餘燼하여 乘虛以出人後 則公事去矣리이다 操乃揚兵河上하여 擊紹倉亭軍하여 破之注+紹蓋遣軍屯亭津.하다
그런데 장강長江한수漢水 일대로 원정遠征하려고 하시니, 만약 원소가 잔존한 무리들을 거두어 빈틈을 타고 우리의 배후를 공격하면 대사大事가 글러버릴 것입니다.” 하였다. 조조가 마침내 하상河上(황하黃河의 가)에서 군대를 정렬하여 위용威容을 과시하고 창정倉亭에 주둔한 원소의 군대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注+원소袁紹가 군대를 보내어 창정진倉亭津에 주둔하게 한 것이다.
秋九月 擊劉備於汝南하니 備奔荊州하다
】 가을 9월에 〈조조曹操가〉 유비劉備여남汝南에서 공격하니, 유비가 형주荊州로 달아났다.
操擊備於汝南한대 備奔劉表하니 表聞備至하고 自出郊迎하여 以上賓禮待之하고 益其兵하여 使屯新野注+水經註 “新野縣, 在安衆縣東南.”하다
조조曹操유비劉備여남汝南에서 공격하니, 유비가 유표劉表에게로 달아났다. 유표는 유비가 온다는 말을 듣고 직접 교외郊外에 나가서 맞이하여 상빈上賓의 예로써 대우하고 병력을 증원해주어 신야新野에 주둔하게 하였다.注+수경주水經注≫에 말하였다. “신야현新野縣안중현安衆縣의 동남쪽에 있다.”
備在荊州數年이러니 嘗於表坐 起至厠이라가 慨然流涕注+坐, 徂卧切.어늘 表怪問備한대
유비가 형주荊州에 있은 지 몇 년이 되었다. 한번은 유표와 함께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일어나 측간에 갔다가 〈자기 넓적다리에 살이 찐 것을 보고는〉 개연慨然히 눈물을 흘렸다.注+(앉다)는 조와徂卧이다. 유표가 괴이하게 여겨 유비에게 묻자,
備曰 平常 身不離鞍하여 髀肉皆注+離, 力智切. 髀, 音陛, 股也.러니 今不復騎하니 髀裏肉生이라
유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평상시에는 몸이 말안장을 떠나지 않아서 넓적다리의 살이 항상 적었는데注+(떠나다)는 역지力智이다. 는 음이 이니, 넓적다리이다., 지금은 다시 말을 타지 않아 넓적다리 안쪽에 살이 붙었습니다.
日月如流하여 老將至矣어늘 而功業不建하니 是以悲耳라하니라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아서 늙음이 장차 이를 터인데 공업功業을 세우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趙韙圍成都라가 敗死하다
조위趙韙성도成都를 포위하였다가 싸움에 져서 죽었다.
韙旣敗死 其黨巴郡太守龎羲欲爲亂하여 遣吏程祁하여 宣旨於其父漢昌令畿러니 不得注+漢昌縣, 屬巴郡, 漢末分宕渠置. 畿, 祁之父名也.이라
조위趙韙가 싸움에 져서 죽은 뒤에 그 무리인 파군태수 방희巴郡太守 龎羲가 난을 일으키고자 하여, 속리 정기屬吏 程祁를 그의 아버지 한창령 정기漢昌令 程畿에게 보내어 〈군대를 징발하려는〉 자신의 뜻을 전달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注+한창현漢昌縣파군巴郡에 속하였으니, 나라 말엽에 탕거宕渠를 나누어 설치하였다. 정기程祁의 아버지의 이름이다.
羲怒하여 使人謂畿曰 不從太守 禍將及家리라 畿曰 樂羊食子 非無父子之恩이요 大義然也注+韓非子曰 “魏文侯遣樂羊攻中山, 時羊有子在中山, 中山君烹其子而遺之羹, 羊啜之, 攻拔中山.”
방희가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정기에게 이르기를 “나를 따르지 않으면 화난이 장차 집안에 미칠 것이다.” 하였는데, 정기가 말하기를 “악양樂羊이 아들의 고기를 먹은 것은 부자간의 은혜가 없었던 것이 아니요, 대의大義로써 그렇게 한 것이다.注+한비자韓非子≫에 말하였다.
今雖羹祁以賜畿라도 畿啜之矣리라 羲乃止하다
지금 비록 정기程祁를 죽여 국을 끓여서 나에게 주더라도 나는 그것을 마시겠다.” 하니, 방희가 이에 그만두었다.
張魯取巴郡하니 詔以魯爲漢寧太守하다
장로張魯파군巴郡을 점령하자, 조령詔令을 내려서 장로를 한녕태수漢寧太守로 삼았다.
張魯以鬼道敎民호되 使病者 自首其過하고 爲之請禱하니 實無益於治病이나 然小人昏愚하여 競共事之
장로張魯귀신鬼神로써 백성을 교화하였는데 병자에게 그 잘못을 자수自首하게 한 뒤에 그를 위하여 기도해주니, 실제로 병을 치료하는 데에는 아무런 유익함도 없었으나 소민小民들은 매우 어리석어서 다투어 함께 그를 섬겼다.
犯法者 三原然後 行刑注+原, 赦也. 三原, 猶言三宥也.하며 不置長吏하고 皆以祭酒爲治하니 民夷便樂之注+魯以鬼道敎民, 其來學者, 初名爲鬼卒, 後號祭酒, 祭酒各領部衆.러라
장로는 법을 범한 자에 대해서 세 번 용서한 뒤에 형벌을 시행하였으며注+은 용서함이니, “삼원三原”은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장리長吏를 두지 않고 모두 좨주祭酒를 통해서 다스리니, 백성들과 오랑캐들이 곧 그를 좋아하였다.注+장로張魯귀신鬼神로써 백성을 가르쳤는데, 와서 배우는 자들을 처음에는 귀졸鬼卒이라 명명하였다가 뒤에는 좨주祭酒라고 부르니, 좨주祭酒는 각각 부중部衆을 거느렸다.
遂襲取巴郡하니 朝廷 力不能征이라 遂就寵魯爲漢寧太守하여 通貢獻而已注+袁山松書曰 “建安二十年, 分漢中之安陽, 置漢寧郡.”러라
뒤에 마침내 파군巴郡을 습격하여 점령하였는데, 조정朝廷에서는 정벌할 힘이 없어서 마침내 현지에서 장로를 한녕태수漢寧太守로 삼아 조정에 공물을 바치도록 하였을 뿐이었다.注+원산송袁山松(원숭袁崧)의 ≪후한서後漢書≫에 말하였다. “건안建安 20년(215)에 한중漢中안양安陽을 나누어 한녕군漢寧郡을 설치하였다.”
民有地中 得玉印者어늘 群下欲尊魯爲漢寧王한대 閻輔諫曰 漢川之民 戶出十萬하고 財富土沃하고 四面險固하니
】 백성 중에 땅속에서 옥인玉印을 얻은 자가 있었는데, 아랫사람들이 이것을 기회로 삼아 장로張魯를 높여 한녕왕漢寧王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자 염보閻輔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한천漢川(한중군漢中郡)의 백성이 10만 가호이고 재화가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하며 사면의 지세가 험고하니,
上匡天子 則爲桓文이요 次及竇融이라도 不失富貴 今承制署置 勢足斬斷이라 不煩於王이니 願且不稱하여 勿爲禍先하라 魯從之하다
위로 천자를 보필하면 재 환공齊 桓公진 문공晉 文公이 될 수 있고, 지금 황제의 제명制命을 받들어 부서를 나누어 관직을 설치함에 형세상 충분히 마음대로 결단할 수 있으니, 이라는 칭호는 필요치 않습니다. 부디 을 칭하지 말아서 화난禍難을 맨 먼저 당하지 마십시오.” 이에 장로는 이 말을 따랐다.
역주
역주1 (名)[倉] : 저본에는 ‘名’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倉’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 (涓)[消] : 저본에는 ‘涓’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消’로 바로잡았다.
역주3 魏 文侯가……함락시켰다 : 이와 관련된 내용은 ≪韓非子≫ 권7 〈説林 上〉에 보인다.
역주4 三宥 : 죄를 용서하는 세 가지 경우로, ‘모르고 지은 죄[不識]’, ‘실수로 지은 죄[過失]’, ‘무심코 지은 죄[遺忘]’이다.(≪周禮≫ 〈秋官 司寇 司刺〉)
역주5 그……것입니다 : 이는 자신들이 할거하는 지역과 군사력을 가지고 天子를 섬기면 竇融처럼 漢나라 조정 안에서 강력한 권한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두융은 王莽의 新나라 말기와 後漢 건국 초기에 河西 지역에 할거하였던 軍閥로, 光武帝 劉秀에게 하서 지역을 가지고 귀의하여 涼州牧에 제수되어 隗囂(외효)를 격파하였다. 이후 建武 12년(36)에 入朝하여 大司空, 將作大匠, 行衛尉事 등의 顯職을 역임하였고, 永平 3년(60)에는 洛陽의 南宮 雲臺閣에 그의 화상이 그려지는 등 조정에서의 존귀함과 영예가 극에 달하였다.(≪後漢書≫ 권23 〈竇融列傳〉)

자치통감강목(10)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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