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
목目]
왕망王莽이
유자孺子에게
책서策書를 내려
정안공定安公으로 삼고 1만
호戶를 봉하니, 땅의 넓이가 100리였다.
注+① 왕망王莽은 평원平原과 안덕安德, 탑음漯陰(탑음)과 격鬲(격), 중구重丘 다섯 현縣을 정안국定安國으로 삼았다.
한漢나라 조종祖宗의 사당을 그의 나라에 세워서 주周나라의 후손과 함께 한漢나라의 정삭正朔과 의복衣服의 색깔을 시행하게 하고,
책서의 글을 다 읽자, 왕망이 직접 유자孺子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기를
“옛날 주공周公은 천자天子의 지위를 섭정하면서 끝내 성왕成王에게 밝은 군주의 자리를 돌려주었는데,
지금 나는 황천皇天의 위명威命에 압박을 받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하고,
중부中傅가
유자孺子를 데리고 궁전을 내려가서
북면北面하여
신臣이라 칭하니, 자리에 모시고 있던 백관들이 모두 슬퍼하고 두려워하였다.
注+② 한漢나라의 제후국에는 태부太傅와 중부中傅가 있었으니, 중부는 궁중宮中에 있으면서 왕王을 보좌하는 자이다. 혹자는 “중부는 환관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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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왕망王莽은 한漢나라의 태평한 기업基業을 인습하여 하루아침에 천하를 소유하니, 그 뜻에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한漢나라의 제도를 협소하게 여겨 바꾸어 크게 넓히고자 해서
注+① “미만未滿”은 만족하지 못함이다. 갱更(바꾸다)은 공형工衡의 절切이니, 제도를 변경하여 옛것을 따르고자 함을 말한다.
마침내 스스로 〈우리 왕씨王氏는〉 黃帝와 우순虞舜의 후손으로 제왕齊王 전건田建의 손자인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에 이르러 나라를 잃었는데,
제齊나라 사람들이 왕가王家라 하여 인하여 왕씨王氏로 삼았다고 말하였다.
그 러므로 黃帝를 초조初祖로 삼고 우제虞帝를 시조始祖로 삼고
진호공陳胡公을 추존하여 진호왕陳胡王, 전경중田敬仲을 추존하여 제경왕齊敬王이라 하고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을 시호하여
민왕愍王이라 하고
注+② 黃帝의 후손이 나뉘어 유우씨有虞氏가 되었고 유우씨有虞氏의 후손이 진陳나라에 봉해졌는데, 전경중田敬仲이 진陳나라에서 제齊나라로 달아나 전씨田氏가 되었으며, 전안田安의 후손이 왕가王家가 되었기 때문이다.
천하에
요씨姚氏‧
규씨嬀氏(구씨)‧
진씨陳氏‧
전씨田氏‧
왕씨王氏 다섯
성姓이 모두
종실宗室이 되었다.
注+③ 요姚는 음이 요遙이고, 규嬀는 음이 귀龜이다.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묘廟을
문조묘文祖廟라 하고
注+④ 을 본받고자 한 것이다. 한漢나라의
원묘園廟에 대한 제사와
천신薦新을 옛날처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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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왕망王莽은 유劉라는 글자가 ‘묘금도卯金刀’의 합자合字라 하여
조령詔令을 내려
정월正月의
강묘剛卯와 통용되던
금도金刀(돈)를 모두 유통하지 못하게 하고
注+① 강묘剛卯는 정월正月 묘일卯日에 만들어서 몸에 차니, 길이가 3촌寸이고 너비가 1촌寸이며, 사방에 옥玉을 사용하거나 금金을 사용하거나 혹은 복숭아나무를 사용하여 혁대에 착용하였다. 금도金刀는 왕망王莽이 주조한 돈이다. 왕망은 유劉자는 위에 묘卯가 있고 아래에 금金이 있고 옆에 또 도刀가 있다 하여 강묘剛卯와 금도金刀를 금지한 것이다.,
마침내 착도錯刀와 계도契刀, 오수전五銖錢을 없애고 다시 소전小錢을 만드니,
〈이 소전小錢을〉 앞서 50전錢짜리인 대전大錢과 두 가지 등급으로 나누었고,
백성들이 몰래 돈을 주조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동銅과 숯을 보관하지 못하게 금하였다.
注+② 협挾은 보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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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한 가장家長이 전지田地 100묘畝를 받아 10분의 1을 세금으로 바쳤는데,
진秦나라가 성인聖人의 제도를 파괴하여 정전법井田法을 폐지하니,
강한 자는 땅을 점유한 것이 1,000으로 헤아려지고 약한 자는 송곳조차 세울 땅이 없게 되었다.
또 노비奴婢의 시장을 설치하여 소, 말과 함께 노비를 가두어서 백성과 신하들에게 제재받게 하여 노비의 생명을 마음대로 결단하니,
천지天地의
성性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하다는 뜻에 어긋난다.
注+① 난闌은 가둠을 이르니, 〈“여우마동란與牛馬同闌”은〉 소와 말처럼 노비奴婢를 우리에 가두는 것이다.
한漢 나라는 전조田租를 경감하여 30분의 1을 세금으로 바쳤으나,
항상 또 다른 명목의 세금이 있어서 늙고 병든 자들도 모두 세금을 납부하였고, 호강豪强한 백성들이 침탈하고 능멸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전지田地를 세주고는 위협하여 그 세를 받으니,
실제로는 10분의 5를 세금으로 바쳤다.
注+② 갱更(바꾸다)은 공형工衡의 절切이다. 파罷(피폐하다)는 피疲로 읽고, 융癃은 음이 융隆이니 병듦이다. 비록 늙고 병든 자라도 모두 다시 사람의 수에 따른 세금인 구산口算을 냄을 말한다. “분전分田”은 가난한 자가 전지田地가 없어서 부유한 사람의 전지田地를 취하여 경작하고 그 수확을 함께 나눔을 말한다. 겁劫은 부유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의 세를 강제로 빼앗아서 침탈하고 능멸함을 이른다. 가假는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의 전지를 세내는 것을 이른다.
그러므로 부유한 자는 교만하여 사악한 짓을 하고, 가난한 자는 곤궁하여 간악한 짓을 하여서 함께 죄에 빠져 형벌이 이 때문에 없어지지 못하였다.
注+③ 착錯는 버려둔다는 뜻이다.
이제 이름을 바꾸어 천하의 전지田地를 왕전王田이라 하고 노비奴婢를 사속私屬이라 하여 모두 매매하지 못하게 하고,
일할 수 있는 남자가 8명이 못 되는데
전지田地가 1
정井을 넘는 자는 나머지 토지를 나누어
구족九族과
인리隣里,
향당鄕黨에 주게 하고
注+④ 여予(주다)는 여與로 읽는다.,
옛날에는 전지田地가 없다가 지금 전지田地를 받게 된 자는 제도와 같이 주되,
감히 성인聖人의 제도인 정전법井田法을 비난하여 법을 무시하고 백성들을 미혹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황시조皇始祖인
우제虞帝(
순舜임금)의
고사故事와 같이 사방 변방으로 귀양 보내서
이매魑魅(도깨비)를 막게 하라.”
注+⑤ 사이四夷는 옷자락의 끝과 같다. 그러므로 사방 변방을 “사예四裔”라 이른다. 이魑는 음이 이螭이니 산신山神이고, 매魅는 음이 미媚이니 오래된 물건의 정령精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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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정전제도井田制度는 훌륭한 법이니, 치평治平을 이루는 근본이다.
옛날의 제왕들은 천하를 공적인 것으로 여겨 백성들의 굶주림과 추위를 자기 몸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토지에서 얻는 이익을 균등하게 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그의 봉양을 독차지하지 않았다.
게다가 공公과 경卿, 제후諸侯는 어진 사람을 선발하고 덕德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여 함께 이 방도를 행해서 유구하게 지켰다.
그러므로 법이 확립되고 폐단이 생기지 아니하여 천여 년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진秦나라에 이르러 정전법井田法을 폐지하였고 한漢나라는 이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동중서董仲舒에 이르러 처음으로 한전법限田法을 실시하여 점점 옛 제도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니, 그 뜻이 참으로 아름답다.
그 러나 끝내 이것을 행하지 못한 것은 군주가 스스로 겸병을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청렴한 풍속을 일으키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 더구나 역적인 왕망王莽이 이것을 행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정전井田은 실로 만대의 훌륭한 법이요, 노비의 매매를 금지한 것 또한 인정仁政을 행함에 있어 마땅히 먼저 해야 할 바이니,
왕망이 일찍이 했던 것이라 하여 나쁜 제도라고 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