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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4)

자치통감강목(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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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未年(B.C. 134)
정미년(B.C. 134)
元光元年注+以長星見, 改爲元光.이라
[綱] 나라 세종世宗 효무황제孝武皇帝 원광元光 원년이다.注+장성長星이 나타났기 때문에 원광元光으로 개원改元한 것이다.
冬十一月 初令郡國으로 擧孝廉各一人하다
[綱] 겨울 11월에 처음 군국郡國으로 하여금 효렴孝廉(효성스럽고 청렴한 사람) 각 1명을 천거하도록 하였다.
從董仲舒之言也
[目] 동중서董仲舒의 말을 따른 것이다.
遣將軍李廣, 程不識하여 將兵屯北邊하다
[綱] 장군將軍 이광李廣정불식程不識을 보내서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 변방에 주둔하게 하였다.
廣與不識 俱以將兵으로 有名當時
[目] 이광李廣정불식程不識이 모두 군대를 거느리는 것으로 당시에 이름이 났다.
行無部伍行陳하고 就善水草舍止하니 人人自便注+部者, 軍行各有部分. 伍者, 五人爲伍也. 部有校尉, 伍有伍長. 行, 胡郞切. 陳, 讀曰陣. 便, 頻面切, 安利也.하고 不擊刁斗自衛 莫府省約文書注+刁, 音貂, 古者軍行, 以銅作鐎, 受一斗. 晝炊飯食, 夜擊持行夜, 名曰刁斗. 鐎, 音焦.
이광은 행군 시에 를 나누고 진지陣地를 구축하지 않았으며, 수초水草가 좋은 곳을 잘 이용하여 머무니 군사들마다 편하게 여겼고,注+는 행군 시에 각기 나눈 부분部分(부대部隊)이 있는 것이고, 는 5명을 라 한다. 에는 교위校尉를 두고, 에는 오장伍長을 둔다. (항렬)은 호랑胡郞이다. (진지)은 으로 읽는다. 便빈면頻面이니, 편안하고 이롭게 여기는 뜻이다.조두刁斗를 쳐서 스스로 경계하지 않았으며, 막부幕府에서는 문서를 간략히 하였다.注+는 음이 이다. 옛날 행군 시에는 으로 (세 발 달린 냄비)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니, 1를 담을 수 있다. 낮에는 밥을 취사하는 데 사용하고, 밤에는 순찰할 때에 가지고 다니며 치니, 조두刁斗라고 불렀다. 는 음이 이다.
이나 亦遠斥候하여 未嘗遇害注+斥, 度也. 候, 視也, 望也. 斥候, 所以檢行險阻, 伺候盜賊.러라
그러나 또한 멀리까지 척후를 보내어 살펴서 해를 입은 적이 없었다.注+은 헤아리는 것이고 는 살피고 멀리 바라보는 것이니, “척후斥候”는 험한 곳을 답사하고 도적을 살피는 것이다.
不識 (王)[正]部曲行伍하고 營陳擊刁斗하고 治軍簿注+簿, 文簿也. 至明하여 軍不得休息하니 亦未嘗遇害러라
정불식은 항오行伍를 바르게 하며, 진지를 구축하고 조두를 치며, 군부軍簿를 처리하는 것을注+簿은 문서이다. 매우 분명하게 해서 군대가 휴식을 할 수 없었지만 또한 해를 입은 적이 없었다.
이나 匈奴畏李廣之略하고 士卒亦多樂從廣而苦程不識注+苦, 厭苦之也.하니라
그러나 흉노匈奴는 이광의 방략方略을 두려워하였으며, 사졸들도 대부분 이광을 따르는 것을 즐겁게 여겼고 정불식을 따르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겼다.注+는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司馬公曰
[目] 사마온공司馬溫公(사마광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易曰 師出以律이니이라도이라하니 言治衆而不用法이면 無不凶也
“《주역周易》에 ’ 하였으니, 군중을 다스리는데 법령으로써 하지 않으면 흉하지 않음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曰 兵事 以嚴終이라하니 爲將者亦嚴而已矣
그러므로 ‘군사軍事는 엄함으로써 끝마친다.’고 하였으니, 장수된 자는 또한 엄하게 해야 할 뿐이다.
然則傚程不識이면 雖無功이라도 猶不敗어니와 傚李廣이면 鮮不覆亡哉인저
그렇다면 정불식程不識을 본받으면 비록 공이 없더라도 오히려 패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이광李廣을 본받으면 패망하지 않는 경우가 드물 것이다.”
夏四月하다
[綱] 여름 4월에 사면赦免을 하였다.
[綱] 5월에 조령詔令을 내려 현량賢良문학文學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하여 황제가 친히 책문策問하였다.
◑ 秋七月 日食하다
[綱] 가을 7월에 일식이 있었다.
역주
역주1 군대를……흉하다 : 《周易》 師卦 初六 爻辭에 보인다.
역주2 詔擧賢良文學 親策之 : “‘親’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비난한 것이다. 무엇을 비난한 것인가? 황제가 몸소 친히 策問했는데도 얻은 사람이 公孫弘 한 사람뿐이었는데, 이것을 훌륭한 사람을 잃었다고 여겼으므로 비난한 것이다. 이 때문에 文帝가 책문하여 鼂錯를 얻었으면 ‘親’이라고 쓰고, 武帝가 책문하여 公孫弘을 얻었으면 ‘親’이라고 썼고, 唐나라 文宗이 선비들을 책문하여 劉蕡을 잃었으면 ‘親’이라고 썼으니,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함을 비난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친히 책문했다.[親策]’고 쓴 것은 3번뿐이다.[書親 何 譏也 何譏 躬親策之而所得者 公孫弘耳 以是爲失人 故譏之 是故文帝策士而得鼂錯 則書親 武帝策士而得公孫弘 則書親 文宗策士而失劉蕡 則書親 譏不知人也 終綱目 書親策三而已]” 《書法》

자치통감강목(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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