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0)

자치통감강목(10)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0)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3권 상
漢 獻帝 興平 원년(194)~漢 獻帝 建安 2년(197)
甲戌年(194)
사정전훈의 자치통감강목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13권 상
한 헌제漢 獻帝 흥평興平 원년(194)~한 헌제漢 獻帝 건안建安 2년(197)
갑술년甲戌年(194)
≪資治通鑑綱目≫ 제13권은 甲戌年 漢나라 獻帝 興平 원년(194)부터 戊子年 漢나라 獻帝 建安 13년(208)까지이다. 모두 15년이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제13권은 갑술년 한甲戌年 漢나라 헌제 흥평獻帝 興平 원년(194)부터 무자년 한戊子年 漢나라 헌제 건안獻帝 建安 13년(208)까지이다. 모두 15년이다.
興平元年이라 春正月 帝冠하다
나라 효헌황제 흥평孝獻皇帝 興平 원년이다. 봄 정월에 황제가 관례冠禮를 거행하였다.
◑二月 追尊母王夫人하여 爲靈懷皇后하다
】 2월에 모친 을 추존하여 영회황후靈懷皇后라 하였다.
有司奏立長秋宮이어늘 詔曰 皇妣宅兆未卜하니 何忍言後宮之選乎注+宅, 墓穴也. 兆, 塋域也.리오
유사有司을 아뢰었는데, 황제가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돌아가신 황비皇妣(모후母后)의 택조宅兆(묘소)도 아직 가려서 정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차마 을 선발하는 것을 말하겠는가.”注+묘혈墓穴이고, 영역塋域이다. 하였다.
於是 三公 奏改葬皇妣王夫人注+改葬于文昭陵.하고 追上尊號曰 靈懷皇后라하다
이에 삼공三公이 아뢰어 황비 왕부인皇妣 王夫人개장改葬하고注+문소릉文昭陵개장改葬한 것이다. 존호尊號추상追上하여 영회황후靈懷皇后라 하였다.
劉備救陶謙하니 表備爲豫州刺史하다
유비劉備도겸陶謙을 구원하자, 도겸이 표문表文을 올려 유비를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陶謙 告急於田楷어늘 楷與備救之하고 備遂歸謙하니 表領豫州하여 屯小沛注+沛國治相縣, 而沛自爲縣, 屬沛國, 時人謂沛縣爲小沛. 由此, 豫州刺史本治譙, 備領刺史而屯小沛. 按此時又有豫州刺史郭貢, 朝命不行, 私相署置者也.하다 曹操軍食亦盡하여 引兵還하다
도겸陶謙전해田楷에게 위급함을 고하자, 전해가 유비劉備와 함께 그를 구원하였다. 유비가 마침내 도겸에게 귀의하니, 도겸이 표문表文을 올려 유비를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아 소패小沛에 주둔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注+패국沛國상현相縣치소治所를 두었는데, 가 따로 이 되어서 패국에 속하니, 당시 사람들이 패현沛縣을 일러 소패小沛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예주자사豫州刺史는 본래 초현譙縣에 치소를 두었는데, 유비가 예주자사가 되어 소패小沛에 주둔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이때에 또 예주자사 곽공豫州刺史 郭貢이 있었으니, 이는 조정의 명령이 행해지지 못하여 사사로이 서로 임명하고 설치한 것이다. 조조曹操 또한 군량이 다하여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夏四月 曹操復攻陶謙하고 還擊劉備하여 破之러니 陳留太守張邈 迎呂布以拒操하니 操還攻之하다
】 여름 4월에 조조曹操가 다시 도겸陶謙을 공격하고 군대를 돌려서 유비劉備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는데, 진류태수 장막陳留太守 張邈여포呂布를 맞이하여 조조에게 항거하자, 조조가 군대를 돌려서 공격하였다.
曹操使荀彧, 程昱으로 守鄄城注+鄄城縣, 屬濟陰郡. 帝於鄄城置兗州, 蓋操以刺史始治此.하고 復往攻陶謙할새 所過 殘滅이러라
조조曹操순욱荀彧정욱程昱에게 견성鄄城을 지키게 하고注+견성현鄄城縣제음군濟陰郡에 속하였다. 헌제獻帝견성鄄城연주兗州를 설치하였는데 아마도 조조曹操연주자사兗州刺史가 되어 처음으로 이곳을 다스린 듯하다. 자신은 다시 가서 도겸陶謙을 공격하였는데注+도겸陶謙단양丹陽 사람이다., 지나가는 곳마다 잔인하게 멸망시켰다.
하여 擊破劉備於郯東하니하여 欲走歸丹陽注+謙, 丹陽人也.이러니 張邈叛操하니 操乃引還하다
군대를 돌려서 담현郯縣의 동쪽에서 유비劉備를 격파하자 도겸이 두려워하여 달아나 단양丹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는데, 이때 마침 장막張邈이 조조를 배반하니, 조조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연주兗州로 돌아갔다.
少時好游俠하니 袁紹及操皆與之善이러니 及紹爲盟主 有驕色이어늘 正議責紹한대
처음에 장막이 소싯적에 유협遊俠을 좋아하여 원소袁紹조조曹操가 모두 그와 친하였다. 그러나 원소가 맹주盟主가 되어 교만한 기색이 있자 장막이 바른말로 원소를 질책하니,
紹怒하여 使操殺之하니 操不聽호되 而邈 終不自安이러라
원소가 노하여 조조에게 장막을 죽이도록 하였다. 조조가 이를 따르지 않았으나 장막은 끝내 스스로 편안히 있지 못하였다.
前九江守邊讓 素有才名이러니 操以其譏議己而殺之하니 由是 兗州士大夫皆恐懼러라
전 구강태수前 九江太守 변양邊讓이 평소 재주와 명망이 있었는데, 조조曹操가 자신을 비판하고 의논한다 하여 죽였다. 이로 말미암아 연주兗州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陳宮 剛直壯烈이러니 內亦自疑하여 乃與邈弟超 共謀叛操하고 說邈曰
진궁陳宮은 성품이 강직하고 의기意氣가 장렬하였는데 마음속으로 또한 스스로 의심하고서 마침내 장막張邈의 아우 장초張超와 함께 조조를 배반할 것을 모의하고 다음과 같이 장막을 설득하였다.
今天下分崩하여 雄傑竝起하니이다 君以千里之衆으로 當四戰之地하여 撫劍顧眄이면 亦足以爲人豪어늘 而反受制於人하니 不亦鄙乎
“지금 천하가 와해되어 영웅호걸이 함께 일어났습니다. 이 천리에 달하는 넓은 지역의 무리를 거느리고서 사방이 〈평평하여〉 적의 공격을 받는 지역에 처하여 검을 어루만지면서 돌아보면 또한 인걸人傑이 될 만한데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제재를 받고 있으니, 또한 비루하지 않습니까.
今州軍東征 其處空虛注+州軍東征, 謂操兵征徐州也.하고 呂布 壯士 善戰無前하니
지금 연주兗州(조조曹操)의 군대가 동쪽으로 정벌하러 가서 경내境內가 텅 비었고注+주군동정州軍東征”은 조조曹操의 군대가 서주徐州를 정벌함을 이른다., 여포呂布장사壯士로서 전투에 뛰어나 그의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
若權迎之하여 共牧兗州하고 觀天下形勢하여 以俟時事之變이면 此亦縱橫之一時也니라
만약 임시로 그를 맞이하여 그와 함께 연주를 다스리고 천하의 형세를 관찰하면서 시국時局의 변화를 기다리면 이 또한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從之하여 遂迎布爲兗州牧하다 知邈爲亂하고 卽勒兵設備하고 急召東郡守夏侯惇於濮陽하니 布遂據濮陽注+濮陽縣, 屬東郡.하다
장막이 그의 말을 따라서 마침내 여포를 맞이하여 연주목兗州牧으로 삼았다. 순욱荀彧은 장막이 장차 난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을 알고 즉시 군대를 무장하여 대비하고서 동군태수 하후돈東郡太守 夏侯惇복양濮陽에서 급히 부르니, 여포가 마침내 복양을 점거하였다.注+복양현濮陽縣동군東郡에 속하였다.
豫州刺史郭貢 率衆數萬하고 來至城下하니 或言與布同謀
예주자사 곽공豫州刺史 郭貢이 수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견성鄄城 아래로 오자, 혹자가 ‘곽공이 여포呂布와 함께 일을 도모한다.’ 하였다.
求見彧한대 將往이러니 惇曰 君 一州鎭也 往必危注+一州鎭, 謂一州倚之爲重也.하리라
곽공이 순욱荀彧을 만날 것을 요구하자 순욱이 장차 가려고 하였는데, 하후돈夏侯惇이 말하기를 “은 온 전체가 의지하여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니, 가면 반드시 위험하게 될 것입니다.”注+일주진一州鎭”은 온 전체가 그에게 의지하여 중요하게 여김을 이른다. 하였다.
彧曰 貢與邈等 分非素結也注+分, 扶問切. 言郭貢與張邈ㆍ呂布等諸人, 其交分非素相結者. 今來速하니 計必未定이니
그러자 순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곽공과 장막張邈 등은 평소 교분交分을 맺었던 사이가 아닙니다.注+(친분, 교분)은 부문扶問이다. 〈“분비소결分非素結”은〉 곽공郭貢장막張邈, 여포呂布 등 여러 사람이 평소 서로 교분을 맺었던 사이가 아님을 말한다. 지금 신속히 왔기 때문에 틀림없이 계책을 정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及其未定하여 說之 縱不爲用이나 可使中立注+不令其有所去就也.이어니와 若先疑之 彼將怒而成計리라
계책을 정하기 전에 설득하면 비록 우리를 위해 쓰이지 않더라도 중립을 유지하게 할 수 있지만注+〈“가사중립可使中立”은〉 떠나가거나 나아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먼저 의심하면 저들은 장차 노하여 계책을 세울 것입니다.”
見彧無懼意하고 謂鄄城 未易攻이라하여 遂引兵去하다
곽공은 순욱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음을 보고 견성鄄城을 공격하기가 쉽지 않다고 여겨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떠나갔다.
是時 兗州郡縣 皆應布호되 唯鄄城, 范, 東阿不動注+賢曰 “范縣, 屬東郡, 今濮陽縣. 東阿縣, 屬東郡, 今濟州縣也.”이러니
】 이때에 연주兗州군현郡縣이 모두 여포呂布에게 호응하였는데 오직 견성鄄城범현范縣동아현東阿縣이 동요하지 않았다.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범현范縣동군東郡에 속하였으니, 지금의 복양현濮陽縣이다. 동아현東阿縣동군東郡에 속하였으니, 지금의 제주현濟州縣이다.” 하였다.
降者言호되 欲自將取東阿하고 又使嶷取范注+(汎)[氾], 符咸切, 姓也.이라하니
여포의 군사 중에 항복한 자가 말하기를 “진궁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장차 동아현東阿縣을 취하려 하고 또 범억氾嶷(범억)에게 범현范縣을 취하게 했습니다.”注+부함符咸이니, 이다. 하였다.
謂昱曰 今擧州皆叛하고 唯有此三城이어늘 宮等 以重兵臨之하니
순욱荀彧정욱程昱에게 이르기를 “지금 전체가 모두 배반하고 오직 이 세 만이 있을 뿐인데 진궁 등이 큰 병력으로 진공하니,
非有以深結其心이면 三城必動이니 民之望也 宜往撫之니라
이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단결시키지 않으면 세 이 틀림없이 동요할 것입니다. 동아현東阿縣의 백성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이니, 응당 가서 그들을 안무按撫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乃歸過范하여 說其令靳允曰注+靳, 姓也. 聞呂布執君母弟妻子라하니 孝子誠不可爲心이라
정욱程昱이 마침내 동아현東阿縣으로 돌아가는 길에 범현范縣에 들러서 현령 근윤縣令 靳允(근윤)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注+이다. “듣건대 여포呂布의 어머니와 아우와 처자식을 붙잡아두고 있다 하니, 효성스런 아들로서 참으로 마음을 가눌 수 없을 것입니다.
今天下大亂하여 英雄竝起 必有命世能息天下之亂者하리니 此智者所宜詳擇也
지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영웅들이 함께 일어났는데, 이 중에 틀림없이 명세지재命世之才로서 천하의 어지러움을 종식시킬 자가 있을 것이니, 이는 지혜로운 자가 마땅히 자세히 살펴 가려야 할 것이다.
夫布 麤中少親하고 剛而無禮하니 匹夫之雄耳注+麤, 心不精也. 宮等 以勢假合하니 不能相君也注+相, 如字. 言不能相與定君臣之分也.
저 여포는 타고난 성품이 거칠어서 친한 자가 적고 강퍅하여 무례하니 그저 용맹한 필부匹夫일 뿐이요,注+는 마음이 하지 못함이다. 진궁陳宮 등은 형세 때문에 잠시 여포와 연합하였으니 서로 군신君臣 간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注+은 본음대로 읽으니, 〈“불능상군不能相君”은〉 서로 더불어 군신君臣분의分義를 정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曹使君 智略不世出하니 殆天所授 君必固范하고 我守東阿하면 則田單之功 可立이니
조사군曹使君(조조曹操)의 지혜와 책략은 세상에 드무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낸 사람일 것이다. 이 반드시 범현范縣을 굳게 지키고 내가 동아현東阿縣을 지키면 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니,
孰與違忠從惡而母子俱亡乎 流涕許之하고 遂殺氾嶷하고 勒兵自守하다
충의忠義를 저버리고 악인惡人을 따라서 모자母子가 모두 함께 망하는 것에 비해 어떠한가.” 그러자 근윤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를 허락하고, 마침내 범억氾嶷을 죽이고 군대를 무장하여 스스로 성을 지켰다.
徐衆曰注+通鑑, 曰上有評字. 允於曹公 未成君臣이요 至親也 於義應去
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위에 자가 있다.근윤靳允조공曹公(조조曹操)에 대해서 아직 군신君臣의 관계를 이루지 않았고 어머니는 지친至親이니, 의리상 응당 범현范縣을 떠났어야 한다.
衛公子開方 仕齊하여 積年不返이어늘 管仲 以爲不懷其親하니 安能愛君注+齊桓公問管仲曰 “開方何如.” 對曰 “棄親以適君, 非人情, 難親.”이리오하니
나라 공자 개방公子 開方나라에서 벼슬하여 여러 해가 되어도 돌아가지 않자, 관중管仲이 ‘그 어버이를 그리워하지 않으니 어찌 군주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라고 평하였다.注+재 환공齊 桓公관중管仲에게 “개방開方은 어떠한가?” 하고 묻자, 관중이 대답하였다.
是以 求忠臣 必於孝子之門이니 宜先救至親이라 徐庶母爲曹公所得이어늘 劉備遣庶歸北하니
이 때문에 충신忠臣은 반드시 효자孝子의 집안에서 구해야 하는 것이다. 근윤은 마땅히 먼저 지친인 어머니를 구원했어야 한다. 서서徐庶의 어머니가 조공曹公에게 잡혀 있었는데, 유비劉備가 서서를 보내어 북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欲爲天下者 恕人子之情也 曹公 亦宜遣允이니라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남의 자식 된 자의 심정을 헤아려야 하니, 조공曹公 또한 마땅히 근윤을 보냈어야 한다.”
◑昱 又遣别騎하여 絶倉亭津注+ “倉亭津在范縣界, 東阿六十里.”하니 不得渡하다 至東阿注+句.하니 令棗祗已拒城堅守
정욱程昱이 또 별도의 기병대를 보내어 창정진倉亭津을 차단하자注+ 진궁陳宮이 강물을 건널 수 없었다. 정욱이 동아현東阿縣에 이르니注+여기서 를 뗀다., 현령 조지棗祗가 이미 을 점거하여 굳게 지키고 있었다.
卒完三城하여 以待操注+棗祗, 姓名, 東阿縣令也.하다 布攻鄄城不能下하고 西屯濮陽한대
정욱은 끝내 세 성을 보전하여 조조曹操의 대군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注+조지棗祗는 사람의 성명이니, 동아현東阿縣현령縣令이다. 여포呂布견성鄄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서쪽으로 가서 복양濮陽에 주둔하였다.
操曰 布不能據東平하여 斷亢父, 泰山之道하여 乘險要我하고 而乃屯濮陽하니 吾知其無能爲也라하고 乃進攻之注+東平國, 當亢父․泰山之道. 亢父本屬東平, 章帝元和元年, 分屬任城.하다
조조가 말하기를 “여포가 동평東平을 점거하지 못하여 항보亢父태산泰山의 길을 차단하고서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나의 군대를 막고서 자기는 도리어 복양에 주둔하니, 나는 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겠다.” 하고는 마침내 진격하였다.注+동평국東平國항보亢父태산泰山의 길에 위치하고 있다. 항보亢父는 본래 동평東平에 속하였는데, 장제 원화章帝 元和 원년(84)에 임성任城분속分屬되었다.
五月 將軍郭汜, 樊稠 竝開府如三公하다
】 5월에 장군 곽사將軍 郭汜번주樊稠가 모두 삼공三公처럼 개부開府(를 설치하고 속관屬官을 둠)하였다.
◑六月 分涼州하여 置雍州하다
】 6월에 양주涼州를 나누어 옹주雍州를 설치하였다.
河西四郡 以去涼州治遠하고 隔以河寇라하여 求别置州어늘 詔以邯鄲商爲雍州刺史注+涼州刺史本治漢陽郡冀縣, 時寇賊繁興, 遂與河西隔絶. 河寇, 蓋群盜阻河爲寇者. 邯鄲, 複姓. 商, 名也.하다
하서河西의 네 양주涼州치소治所와 거리가 멀고 하구河寇 때문에 단절되었다고 하여 별도로 한 를 설치할 것을 청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한단상邯鄲商옹주자사雍州刺史로 삼았다.注+양주자사涼州刺史는 본래 한양군 기현漢陽郡 冀縣치소治所를 두었는데, 당시 구적寇賊이 많이 일어나 마침내 하서河西와 단절되었다. 하구河寇는 아마도 황하黃河를 기반으로 하여 노략질을 하는 도둑 떼인 듯하다. 한단邯鄲복성複姓이고 은 이름이다.
경사京師에 두 번 지진이 있었다.
是月晦 日食하다
】 이달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秋七月 以楊定爲將軍하여 開府하다
】 가을 7월에 양정楊定을 장군으로 삼아 개부開府(를 설치하고 속관屬官을 둠)하게 하였다.
◑自四月 不雨하여 至于是月하다
】 4월부터 이달(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穀一斛 直錢五十萬하니 長安中 人相食이라 帝令侍御史侯汶으로 出太倉米豆하여 爲貧人作糜注+爲, 去聲. 糜, 粥也.호되 餓死者如故
】 곡식 1의 값이 50만 에 이르자, 장안성長安城 안에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이에 황제가 시어사 후문侍御史 侯汶(후민)에게 태창太倉의 쌀과 콩을 내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죽을 끓여 나누어 주게 하였다.注+(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는 죽이다. 그러나 굶어 죽는 사람의 수는 전과 다름없었다.
帝取米, 豆各五升하여 於御前作糜하여 得二盆하고 乃杖汶五十하니 於是 悉得全濟하다
九月 曹操攻呂布라가 不克하고 還走鄄城하다
典韋典韋
】 9월에 조조曹操여포呂布를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군대를 돌려 견성鄄城으로 달아났다.
呂布有别屯在濮陽西러니 曹操夜襲破之하니 布至하여 搏戰하여 相持甚急이어늘
여포呂布에게는 복양濮陽의 서쪽에 주둔시킨 별도의 군대가 있었는데 조조曹操가 야습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이때 마침 여포가 와서 육박전을 하여 양측이 격렬하게 대립해 형세가 매우 급박하였다.
司馬典韋 將應募者하여 進當之注+典韋, 姓名.할새 矢至如雨호되 韋不視하고 謂等人曰注+等人者, 立等以募人, 及等者, 謂之等人. 或曰 “等人, 一等應募之人也.” 虜來十步어든 乃白하라
조조의 사마 전위司馬 典韋가 모집에 응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나가 여포의 군대를 막을 적에注+전위典韋는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데도 전위는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등인等人에게 이르기를注+이란 등급을 세워서 사람을 모집하여 그 등급에 도달한 자를 등인等人이라 이른다. 혹자는 “등인等人은 일등으로 응모한 자이다.” 하였다. “적들이 10의 거리까지 오면 나에게 아뢰라.” 하였다.
呂布가 濮陽에서 曹操와 싸우다呂布가 濮陽에서 曹操와 싸우다
曰 十步라한대 又曰 五步어든 乃白하라 等人하여 疾言虜至어늘 韋持戟大呼而起하니 所抵 無不應手倒者
등인이 “10보입니다.” 하고 아뢰자, 전위는 또 말하기를 “5보의 거리까지 오면 나에게 아뢰라.” 하였다. 적이 가까이 다가오자, 등인이 두려워하여 적들이 이르렀다고 급박하게 말하였다. 이에 전위가 창을 잡아 쥐고서 큰 소리로 고함치며 일어나니, 창이 이르는 곳에 그의 손이 가는 대로 거꾸러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
操乃得引去하여 遂入濮陽하여 燒其東門하여 示無反意하다 及戰하여 軍敗 布騎得操而不識하여 釋之하니
조조가 이에 군대를 이끌고 떠나갈 수 있어서 마침내 복양濮陽에 들어가 그 동문東門을 불태우고 군대를 뒤로 물리려는 뜻이 없음을 보였다. 여포와의 전투에서 조조의 군대가 패하였는데 여포의 기병이 조조를 붙잡았으나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놓아주니,
操突火而出注+突, 觸也.하고 進復攻之하여 與布相守百餘日이러니 糧盡하여 各引去하여 還鄄城하고 屯山陽하다
조조가 불길을 뚫고서 탈출하여注+은 맞닥뜨림이다(돌진함이다).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진군해 다시 공격하여 여포와 백여 일 동안 대치하였다. 그러나 군량이 다하여 각각 군대를 이끌고 떠나갔는데, 조조는 견성甄城으로 돌아갔고 여포는 산양山陽에 주둔하였다.
袁紹使人說操하여 欲使遣家居鄴이어늘 操將許之러니
원소袁紹가 사람을 보내 조조曹操를 설득하여 조조에게 그의 가솔들을 보내서 업현鄴縣에 거주하게 하자, 조조가 이를 허락하려고 하였다.
程昱曰 意者컨대 將軍 殆臨事而懼로다 不然이면 何慮之不深也 夫袁紹有幷天下之心이나 而智不能濟也
이에 정욱程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생각건대 장군께서는 아마도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시는 듯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 원소가 천하를 병탄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지만 그 지모智謀가 일을 이루기에는 부족합니다.
將軍 自度能爲之下乎 今兗州雖殘이나 尙有三城하고 能戰之士 不下萬人이니
장군께서 스스로 헤아리시기에 저 원소의 아랫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연주兗州가 비록 잔파殘破되었지만 그래도 세 이 남아 있고 싸울 수 있는 군사들이 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니,
以將軍之神武 與文若, 昱等으로 收而用之하면 霸王之業 可成也注+文若, 荀彧字. 願將軍 更慮之하라 操乃止하다
장군의 을 가지고 순문약荀文若(순욱荀彧)과 저 정욱程昱 등과 함께 그들을 거두어서 쓰시면 패왕霸王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注+문약文若순욱荀彧의 자이다. 원컨대 장군께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자 조조가 마침내 이를 중지하였다.
유언劉焉하자, 그의 아들 유장劉璋익주목益州牧으로 삼았다.
天火燒緜竹城하니 劉焉 徙治成都注+焉, 初居緜竹.러니 疽發背而卒하다
면죽성緜竹城을 태우자 유언劉焉치소治所성도成都로 옮겼는데注+유언劉焉이 처음으로 면죽성緜竹城에 거처하였다., 등에 등창이 나서 하였다.
州大吏趙韙等 貪焉子璋溫仁하여 共上以爲刺史注+韙, 羽鬼切. 上, 時掌切.어늘 詔以爲益州牧하다
익주益州대리大吏조위趙韙(조위) 등이 유언의 아들 유장劉璋의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함을 탐내서 함께 표문表文을 올려 유장을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삼을 것을 청하자注+우귀羽鬼이다. (올림)은 시장時掌이다., 황제가 조령詔令을 내려 익주목益州牧으로 삼았다.
陶謙하니 하다
도겸陶謙하자, 유비劉備서주목徐州牧을 겸하였다.
疾篤 謂别駕麋竺曰 非劉備 不能安此州注+麋, 武悲切. 竺, 音竹. 麋竺, 姓名.니라커늘 率州人迎備한대
도겸陶謙이 병세가 위중하자, 별가종사 미축别駕從事 麋竺(미축)에게 이르기를 “유비劉備가 아니면 이 를 편안하게 할 수 없다.”注+무비武悲이다. 은 음이 이다. 하였다. 도겸이 하자, 미축이 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유비를 맞이하였는데,
備未敢當하여 曰 公路 四世五公으로 海內所歸注+公路, 袁術字. 自袁安至袁隗四世, 安爲司徒, 子敞爲司空, 孫湯爲司空, 曾孫逢爲司空, 隗爲太傅, 凡五公. 今近在壽春하니 君可以州與之니라
유비가 감히 이를 감당하지 못하여 말하기를 “원공로袁公路(원술袁術)의 집안은 4대에 걸쳐 다섯 을 배출하여 온 천하가 귀의하고 따르는 바이다.注+공로公路원술袁術의 자이다. 원안袁安부터 원외袁隗까지 4인데, 원안은 사도司徒가 되었고 아들 원창袁敞사공司空이 되었고 손자 원탕袁湯은 사공이 되었고 증손 원봉曾孫 袁逢은 사공이 되었고 원외는 태부太傅가 되었으니, 모두 5명의 삼공三公이다. 원공로가 지금 가까이 수춘壽春에 있으니, 그대는 서주徐州를 그에게 넘겨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典農校尉陳登曰注+陶謙表登爲典農校尉. 公路 驕豪하니 非治亂之主 今欲爲使君하여 合步騎十萬注+爲, 去聲.하노니
그러자 전농교위 진등典農校尉 陳登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도겸陶謙표문表文을 올려 진등陳登전농교위典農校尉로 삼도록 하였다. “원공로는 교만하고 방자하니, 난세를 다스릴 군주가 아닙니다. 지금 제가 사군使君(유비)을 위하여 보병과 기병 십만 명을 모으고자 하니注+(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上可以匡主濟民이요 下可以割地守境이니 若使君 不見聽許 登亦未敢聽使君也호리라
위로는 군주를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할 수 있고, 아래로는 한 지방을 할거割據하여 서주의 경내境內를 지킬 수 있습니다. 만약 사군使君이 허락해주지 않으면 저 진등 역시 사군使君의 말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北海相孔融 謂備曰 袁公路 豈憂國忘家者邪 冢中枯骨 何足介意注+正爲四世五公發也.리오
북해상 공융北海相 孔融이 유비에게 이르기를 “원공로가 어찌 나라를 걱정하여 집안을 잊는 자이겠습니까. 무덤 속의 해골을 어찌 개의할 것이 있겠습니까.注+〈“총중고골 하족개의冢中枯骨 何足介意”는〉 바로 4대에 걸쳐 5명의 삼공三公[사세오공四世五公]을 배출한 것을 말한 것이다.
今日之事 百姓與能注+與, 如字. 言百姓視能者而與之.이니 天與不取 悔不可追라한대 備遂領徐州하다
오늘의 일은 백성들이 유능한 자를 〈보고서〉 따르는 것이니注+는 본음대로 읽으니, 〈“백성여능百姓與能”은〉 백성들이 유능한 자를 보고서 따름을 말한다., 하늘이 주는데도 취하지 않으면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자, 유비가 마침내 서주목徐州牧을 겸하였다.
마일제馬日磾수춘壽春에서 하였다.
日磾與趙岐 俱奉使至壽春이러니 岐守志不撓하니 袁術 憚之하니라
】 처음에 마일제馬日磾조기趙岐와 함께 사명使命을 받들어 수춘壽春에 이르렀는데, 조기가 뜻을 지켜 굽히지 않자 원술袁術이 그를 꺼렸다.
日磾 頗有求於術이러니 借節視之라가 因奪不還하고 求去不遣하니 日磾嘔血而死하다
마일제가 원술에게 요구하는 바가 자못 많았는데, 원술이 〈조정에서 마일제에게 준〉 사절使節을 빌려서 보다가 빼앗고 돌려주지 않았다. 마일제가 떠나갈 것을 청하였으나 원술이 억류하고 보내주지 않으니, 마일제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袁術 表孫策하여 爲懷義校尉하다
원술袁術표문表文을 올려 손책孫策회의교위懷義校尉로 삼도록 하였다.
孫堅 娶錢塘吳氏하여 生四男하니 策, 權, 翊, 匡及一女 從軍於外 留家壽春이러니 策年十餘歲 已交結知名이러라
】 처음에 손견孫堅전당錢塘 사람 오씨吳氏를 아내로 삼아서 네 아들을 낳으니, 바로 손책孫策손권孫權손익孫翊손광孫匡이고, 이 밖에 딸 하나가 더 있었다. 손견이 밖에서 종군從軍할 적에 자기 집안을
周瑜周瑜
수춘壽春에 머물게 하였는데, 손책孫策은 나이 십여 세에 이미 명성이 알려진 사람들과 교분을 맺었다.
舒人周瑜 與策同年이라 亦英達夙成이러니 自舒來造하여 推結分好하고 勸策徙居舒注+分, 扶問切. 推結分好, 謂推分而結好也.하여 推道南大宅與策하고
서현舒縣 사람 주유周瑜손책孫策동년同年으로 또한 영명英明하고 활달豁達(활달)하며 숙성夙成하였다. 주유가 서현舒縣에서 수춘壽春으로 와서 〈손책을 만나보고〉 성심誠心을 미루어 교분을 맺고 손책에게 권하여 서현으로 옮겨가서 거주하게 하되注+(분수)은 부문扶問이다. “추결분호推結分好”는 성심誠心을 미루어 교분을 맺음을 이른다. 길 남쪽의 〈교통이 좋고 양지바른〉 큰 저택을 양보하여 손책에게 주고,
升堂拜母하고 有無通共注+推, 吐雷切.하다 及堅死 策年十七이라 還葬曲阿注+曲阿, 古雲陽縣也. 秦時言其地有天子氣, 始皇鑿北坑以敗其勢, 截直道, 使阿曲, 故謂之曲阿.하고 已乃度江하여 居江都注+江都, 禹貢揚州也. 景帝置江都國, 武帝更廣陵郡.하여 結納豪俊하여 有復讐之志注+以父堅爲黃祖所殺也.하니라
에 올라 손책의 모친에게 절을 올리고는 있고 없는 것을 서로 융통하여 구제하였다.注+(양보하다)는 토뢰吐雷이다. 손견이 죽었을 적에 손책은 나이가 열일곱이었는데 부친 손견의 영구를 곡아曲阿로 모셔와 안장하고注+곡아曲阿는 옛 운양현雲陽縣이다. 나라 때에 이 지역에 천자天子의 기운이 있다고 하여, 시황제始皇帝가 북쪽 언덕을 뚫어서 그 기세를 무너뜨리고 직도直道를 끊어서 굽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지명을 곡아曲阿라고 이른 것이다., 얼마 후 마침내 장강長江을 건너 강도江都에 거주하여注+강도江都는 ≪서경書經≫ 〈하서 우공夏書 禹貢〉의 양주揚州이다. 나라 경제景帝 때에 강도국江都國을 설치하였는데, 무제武帝 때에 광릉군廣陵郡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호걸들과 교분을 맺어 〈아버지를 위해〉 복수할 뜻이 있었다.注+〈“유복수지지有復讎之志”는〉 부친 손견孫堅황조黃祖에게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上策舅吳景領丹陽太守하고 從兄賁爲都尉注+上, 時掌切. 賁, 音祕.하다 往見術하고 涕泣言曰
원술袁術표문表文을 올려 손책孫策외숙 오경外叔 吳景에게 단양태수丹陽太守를 겸임하게 하고 종형 손비從兄 孫賁(손비)를 도위都尉로 삼도록 하였다.注+(올림)은 시장時掌이다. 는 음이 이다. 손책이 찾아가서 원술을 만나보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亡父昔從長沙入討董卓하고 與明使君으로 會於南陽하여 同盟結好러니 不幸遇難하여 勳業不終하니이다
선친先親께서 옛적에 장사長沙로부터 들어가 동탁董卓을 토벌하고 현명하신 사군使君남양南陽에서 함께 만나서 동맹同盟하여 우호를 맺었는데, 불행하게도 을 만나서 공업을 마치지 못하셨습니다.
感惟舊恩하여 欲自憑結하노니 願明使君 垂察其誠하라
저 손책이 옛 은혜에 감격하여 스스로 의지하여 교분을 맺고자 하오니, 현명하신 사군使君께서는 저의 정성을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甚奇之 然未肯還其父兵하고 謂曰 丹陽 精兵之地 可往召募니라
원술은 손책의 이 말을 매우 기특하게 여겼으나 그 부친의 군대를 되돌려주려고 하지 않고, 손책에게 이르기를 “단양군丹陽郡은 정예병이 많이 배출되는 지역이니, 단양군에 가면 군대를 불러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遂迎其母하여 詣曲阿하여 依舅氏하고 召募得數百人이러니 爲涇縣大帥祖郞所襲하여 幾至危殆注+涇縣, 屬丹陽郡. 祖, 姓也.
손책孫策이 마침내 그 모친을 맞이하여 곡아曲阿에 이르러서 외숙(오경吳景)에게 의지하고 군대를 불러 모아 수백 명을 얻었는데, 경현涇縣대수 조랑大帥 祖郞에게 습격을 받아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注+경현涇縣단양군丹陽郡에 속하였다. 는 성이다.
於是 復往見術한대 以堅餘兵千餘人으로 還策하고 拜懷義校尉하여 許以爲九江太守하다
이에 다시 찾아가서 원술袁術을 만나 보았는데, 원술이 손견의 남은 병력 천여 명을 손책에게 되돌려주고 회의교위懷義校尉에 임명하여 그를 구강태수九江太守로 삼을 것을 허락하였다.
已而 更用陳紀하고 又使攻廬江太守陸康하고 謂曰 今若得康이면 廬江 眞卿有也라하더니
그러나 이윽고 다시 〈바꾸어〉 진기陳紀를 구강태수로 임명하였다. 원술은 또 손책에게 여강태수 육강廬江太守 陸康을 공격하게 하고 이르기를 “지금 만약 육강을 잡으면 여강은 참으로 의 소유가 될 것이다.” 하였는데,
攻拔之한대 復用其故吏劉勳하니 益失望하니라
손책이 여강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원술은 또다시 그의 옛 속리屬吏유훈劉勳을 여강태수로 임명하니, 손책이 더욱 실망하였다.
以劉繇爲揚州刺史하다
유요劉繇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았다.
岱之弟也 素有盛名이러니 詔用爲揚州하니 以袁術已據壽春이라하여 欲南渡江注+續漢志 “揚州本治歷陽. 蓋中世以後, 徙治壽春.”한대
유요劉繇유대劉岱의 아우이다. 평소 높은 명망이 있었는데 황제가 조령詔令을 내려 그를 양주자사揚州刺史에 임용하니, 원술袁術이 이미 〈치소治所인〉 수춘壽春을 점거하였다고 하여 유요는 남쪽으로 가서 장강長江을 건너가 치소治所를 설치하고자 하였다.注+속한지續漢志≫에 “양주揚州는 본래 역양歷陽치소治所를 두었는데, 중세中世 이후에 수춘壽春으로 치소를 옮겼다.” 하였다.
吳景, 孫賁 迎置曲阿하다 久之 繇 以景, 賁本術所置라하여 迫逐之하니
그러자 오경吳景손비孫賁가 그를 곡아曲阿로 맞이해왔다. 오랜 시일이 지난 뒤에 유요가 오경과 손비는 본래 원술이 배치한 자들이라고 하여 핍박해 쫓아내었다.
景, 賁退屯歷陽注+歷陽縣, 屬九江郡.이어늘 繇遣將하여 屯橫江以拒之注+橫江, 卽橫塘也. 金陵覽古曰 “自江口沿淮築堤, 謂之橫塘.”하다
오경과 손비가 후퇴하여 역양歷陽에 주둔하자注+역양현歷陽縣구강군九江郡에 속하였다., 유요가 장수를 보내 횡강橫江에 주둔하게 하여 그들을 막았다.注+횡강橫江은 바로 횡당橫塘이다. ≪금릉남고金陵覽古≫에 “장강長江 어귀부터 회수淮水를 따라 둑을 축조하였는데, 이를 일러 횡당橫塘이라 한다.” 하였다.
역주
역주1 모친 王夫人 : 본명은 王榮으로 邯鄲 사람이다. 五官中郎將 王苞의 손녀로 靈帝 때에 궁에 들어와 美人에 봉해졌기 때문에 王美人으로도 불린다. 光和 4년(181)에 劉協을 낳았는데, 영제의 皇后 何氏가 이를 시기한 나머지 사람을 시켜 鴆毒으로 왕영을 살해하였다. 이에 영제가 격노하여 何氏를 폐출하고자 하였는데, 宦官들이 한사코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영이 살해당한 뒤에 영제는 왕영을 그리워하여 〈追德賦〉와 〈令儀頌〉을 지었으며 영제의 母后인 董氏가 유협을 직접 양육하였다. 中平 6년(189) 9월에 董氏의 일족인 董卓이 何氏의 소생인 少帝 劉辯을 폐위하고 왕영의 소생인 유협을 즉위시켰는바, 이가 바로 獻帝이다.(≪後漢書≫ 권9 〈獻帝紀〉, 권10下 〈靈思何皇后紀〉, 권27 〈孝獻皇帝紀〉)
역주2 長秋宮을 세울 것 : ‘長秋宮’은 본래 漢나라 高帝가 거처하였던 궁전의 명칭으로 ‘長秋’라고도 약칭하는데, 후대에는 皇后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後漢書≫ 권10上 〈明德馬皇后紀〉에 “明帝 永平 3년(60) 봄에 有司가 장추궁을 세울 것을 아뢰었으나 황제가 이에 대해 말하는 바가 있지 않았다.[永平三年春 有司奏立長秋宮 帝未有所言]”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李賢의 注에 “〈長秋宮은〉 황후가 거처하는 궁이다. ‘長’은 오램이고 ‘秋’는 만물이 성숙하는 시초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명명한 것이다. 황후를 세울 것을 청함에 감히 대놓고 가리켜서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궁으로써 일컬은 것이다.[皇后所居宮也 長者久也 秋者萬物成熟之初也 故以名焉 請立皇后 不敢指言 故以宮稱之]”라고 설명하였다.
역주3 後宮 : 본래는 妃와 嬪이 거처하는 궁전으로 妃와 嬪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특히 皇后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역주4 (汎)[氾] : 저본에는 ‘汎’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氾’으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같다.
역주5 田單의 공적 : 戰國時代에 멸망의 위기에 처한 齊나라를 구해낸 田單의 업적을 가리킨다. 燕나라 昭王이 樂毅에게 齊나라를 공격하게 하자 악의가 齊나라의 70여 성을 함락시키고, 齊나라 湣王이 재상 淖齒(요치)에게 죽임을 당하여 나라가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田單이 3년 동안 卽墨을 사수하면서 反間計를 써서 악의를 파면시키고, 1,000여 마리의 소에 五采와 용무늬를 그린 붉은 비단옷을 만들어 입히고 소의 뿔에 병기와 칼날을 묶고는 기름을 부은 갈대를 소꼬리에 묶어 불을 붙이고, 城에 수십 군데 구멍을 파놓은 다음 밤에 소를 풀어놓고 장사 5천 명이 그 뒤를 따르게 하였다. 꼬리가 뜨거워지자 성난 소들이 燕나라 군대로 달려가니, 燕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도망하였다. 전단이 이들을 추격하여 齊나라의 70여 성을 모두 수복하였다.(≪史記≫ 권46 〈田敬仲完世家〉, 권82 〈田單列傳〉)
역주6 徐衆이……評하였다 : 이는 徐衆이 지은 ≪三國評≫에 실려 있다. 서중은 東晉 때 사람으로 咸康 연간에 黃門侍郞이 되었고 建元 초에 侍中이 되었다. ≪삼국평≫은 본래 3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나 현재 독립된 책으로 전해지지 않으며 여러 史書에 그 片鱗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隋書≫ 권33 〈經籍志〉에는 ‘≪三國評志≫ 3권’을 徐爰이 撰한 것으로 되어 있다. 淸나라 杭世駿이 撰한 ≪三國志補註≫ 권2 〈魏書〉에도 ‘徐衆三國評曰’에 대해 “서중은 마땅히 서원이 되어야 한다.[徐衆當是徐爰]”라고 설명하였다.
역주7 어버이를……어렵습니다 : 이 내용은 ≪史記≫ 권32 〈齊太公世家〉에 보인다. 管仲의 병이 위독하자, 桓公이 병문안을 가서 관중의 후임으로 재상이 될 만한 자를 물으면서 開方을 언급하니, 관중이 “부모를 배반하고 군주에게 왔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가까이하기 어렵습니다.[倍親以適君 非人情 難近]”라고 대답하였다. 개방은 본래 衛나라 懿公의 庶長子로 衛나라가 齊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齊나라에 인질로 보내졌는데, 齊나라의 강성함을 보고 벼슬하기를 원하여 15년 동안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부모의 喪에도 奔喪하지 않았다. 이에 관중은 개방의 이러한 행위가 天理와 人情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환공은 관중의 말을 듣지 않고 개방을 총애하였는데, 이후 환공의 병이 위중해졌을 때에 개방은 易牙, 豎刁(수조)와 함께 환공을 室에 禁錮하여 굶어죽게 만들고 그 시신을 67일이나 방치하여 구더기가 문 밖에까지 기어 나오게 하였다.
역주8 (迷征去)[述征記] : 저본에는 ‘迷征去’로 되어 있으나, ≪水經注≫에 의거하여 ‘述征記’로 바로잡았다.
역주9 (記)[去] : 저본에는 ‘記’로 되어 있으나, ≪水經注≫에 의거하여 ‘去’로 바로잡았다.
역주10 (官)[宮] : 저본에는 ‘官’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宮’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1 述征記……하였다 : ≪水經注≫ 권5 〈河水〉에 “또 河水가 동북쪽으로 東阿縣 북쪽을 지나가며, 하수가 范縣의 동북쪽에서 흘러 倉亭津이 된다. ≪述征記≫에 말하였다. ‘창정진은 범현의 경계에 있으니, 동아현과의 거리가 60리이다.’[又東北過東阿縣北 河水于范縣東北流爲倉亭津 述征記曰 倉亭津在范縣界 去東阿六十里]” 하였다.
역주12 京師 地再震 : “京師에 지진이 있는 것은 작은 변고가 아니다. 順帝 때에 일찍이 이를 썼었고, 이때에 다시 썼는데 한 달에 지진이 두 번 있기까지 하였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地震’을 쓴 것이 101번인데, 한 해에 지진이 두 번 있었던 것이 12번이고, 한 달에 지진이 두 번 있었던 것이 2번이다.(桓帝 建和 3년(149)과 바로 이해이다.) 獻帝의 경우는 모두 京師에 지진이 있었던 것이 보이니, 桓帝에 견줄 바가 아니다.[地震京師 非小變也 順帝嘗書之矣 於是復書 而一月至再焉 終綱目 書地震一百一 一歲再震十二 而一月再震二(桓帝建和三年 是年) 獻皆見於京師 非桓比矣]다” ≪書法≫
역주13 황제가……치니 : 황제는 侍御史 侯汶에게 太倉의 쌀과 콩을 내어 죽을 쑤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게 하였으나 후민이 쌀과 콩을 빼돌리고 죽을 조금만 쑤어 먹였기 때문에 굶어 죽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은 것이다. 이때 황제가 쌀과 콩 각각 5升씩 취하여 죽을 쑤어 두 동이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후민이 그동안 쌀과 콩을 빼돌린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 곤장을 치게 한 것이다.
역주14 等人 : 元나라 王幼學의 ≪資治通鑑綱目集覽≫에는 “衆人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猶言衆人]”라고 설명하였다.
역주15 神武함 : 이는 본래 吉凶과 禍福으로 천하에 위엄을 보여 복종시키고 刑殺을 사용하지 않음을 이른다. ≪周易≫ 〈繫辭傳 上〉에 “옛날에 聰明하고 叡智하며 神武하여 죽이지 않는 자일 것이다.[古之聰明叡知神武而不殺者夫]”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孔穎達의 疏에 “저 ≪주역≫의 道는 深遠하여 길흉과 화복으로 만물에 위엄을 보여 복종시켰다. 그러므로 옛날에 聰明하고 叡智하며 神武한 군주는 伏羲氏 등을 이르니, 이 ≪주역≫의 道를 써서 천하에 위엄을 보여 복종시켰는바, 이는 刑殺을 사용하지 않고서 위엄을 보여 복종시킨 것이다.[夫易道深遠 以吉凶禍福威服萬物 故古之聰明叡知神武之君 謂伏犧等 用此易道 能威服天下 而不用刑殺而威服之也]”라고 설명하였다. 후대에는 ‘英明함과 威武를 갖추었다.’는 의미로 引伸되어서 帝王이나 將相의 지혜와 덕을 칭송하는 데에 많이 사용하였다.
역주16 劉焉卒……爲益州牧 : “관직을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劉焉을 죄준 것이다. 이로부터 牧鎭이 卒한 것에 대해 관직을 쓰지 않았으니, 이는 그가 上(황제)을 무시하였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卒함에 한결같이 삭제한 것이다.[不書官 何 罪焉也 自是牧鎭卒皆不書官 以爲無上也 故於其卒也 壹削之]” ≪書法≫
역주17 天火 : 천둥과 번개 또는 자연 발화 등의 원인으로 일어난 불을 가리킨다. ≪春秋左氏傳≫ 宣公 16년(B.C.593) 조에 “모든 火災에 사람이 방화한 것을 火라 하고, 자연적으로 발생한 불을 災라 한다.[凡火 人火曰火 天火曰災]”라고 보인다.
역주18 劉備兼領徐州 : “여기에서 徐州 사람들이 劉備를 맞이하였는데 유비가 袁術을 추대하자 사람들이 불가하다고 하여 유비가 마침내 徐州牧을 겸임하였으니, 그렇다면 詔命이 내린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스스로[自]’라고 일컫지 않았는가.(袁紹와 袁術이 ‘自領’이라고 쓴 것을 근거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은 유비에 대해서 면제해주는 말이 많으니, 이는 유비가 바르기 때문이다.[於是州人迎備 備推袁術 衆不可 遂領徐州 則非有詔命也 曷爲不稱自(據袁紹袁術書自領) 綱目於劉備多恕辭 正也]” ≪書法≫
역주19 馬日磾卒於壽春 : “馬日磾는 누구인가. 太傅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관직을 쓰지 않았는가. 使者로서 使節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마일제가 사명을 받들고 가서 關東 지방의 군벌들을 화해시켰는데, 袁術이 그를 속여서 그의 使節을 빼앗았으니, 이는 마일제가 〈使命을 저버려〉 군주의 명을 욕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壽春에서 卒하였다.’라고만 쓰고 그 관직을 삭제한 것이다. 東漢에서 牧鎭 이외의 人士가 卒했을 적에 관직을 쓰지 않은 경우가 3번(單超와 馬日磾와 荀攸)이고,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卒했을 적에 지명을 쓴 경우가 4번(馬日磾와 管寧, 太傅 司馬越과 楊復光)인데, 오직 마일제와 태부 사마월에 대해서만 비난하는 말이 된다.[日磾 何 太傅也 然則曷爲不書官 使(시)失節也 於是日磾奉使和解關東 袁術詐奪其節 是辱命也 故書卒於壽春 而削其官 東漢自牧鎭外卒不書官者三(單超日磾荀攸) 終綱目 卒以地者四(日磾管寧太傅越楊復光) 惟日磾太傅越爲譏辭]” ≪書法≫ “劉焉은 분수 밖의 일을 탐내고 도모하여 사치하고 참람하여 신하 노릇 하지 않았으며, 마일제는 사명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여 使節을 빼앗기고 자신을 굽혔기 때문에 모두 ‘卒’이라고만 쓰고 그 관직을 삭제한 것이다.[劉焉貪圖非 奢僭不臣 日磾奉使無状 失節屈身 故皆書卒而削去其官]” ≪發明≫

자치통감강목(10)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