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삼공三公이 아뢰어 황비 왕부인皇妣 王夫人의 묘墓를 개장改葬하고注+문소릉文昭陵에 개장改葬한 것이다.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여 영회황후靈懷皇后라 하였다.
綱
【강綱】 유비劉備가 도겸陶謙을 구원하자, 도겸이 표문表文을 올려 유비를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을 것을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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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도겸陶謙이 전해田楷에게 위급함을 고하자, 전해가 유비劉備와 함께 그를 구원하였다. 유비가 마침내 도겸에게 귀의하니, 도겸이 표문表文을 올려 유비를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아 소패小沛에 주둔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注+패국沛國은 상현相縣에 치소治所를 두었는데, 패沛가 따로 현縣이 되어서 패국에 속하니, 당시 사람들이 패현沛縣을 일러 소패小沛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예주자사豫州刺史의 부府는 본래 초현譙縣에 치소를 두었는데, 유비가 예주자사가 되어 소패小沛에 주둔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이때에 또 예주자사 곽공豫州刺史 郭貢이 있었으니, 이는 조정의 명령이 행해지지 못하여 사사로이 서로 임명하고 설치한 것이다.조조曹操 또한 군량이 다하여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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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여름 4월에 조조曹操가 다시 도겸陶謙을 공격하고 군대를 돌려서 유비劉備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는데, 진류태수 장막陳留太守 張邈이 여포呂布를 맞이하여 조조에게 항거하자, 조조가 군대를 돌려서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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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조曹操가 순욱荀彧과 정욱程昱에게 견성鄄城을 지키게 하고注+견성현鄄城縣은 제음군濟陰郡에 속하였다. 헌제獻帝가 견성鄄城에 연주兗州를 설치하였는데 아마도 조조曹操가 연주자사兗州刺史가 되어 처음으로 이곳을 다스린 듯하다. 자신은 다시 가서 도겸陶謙을 공격하였는데注+도겸陶謙은 단양丹陽 사람이다., 지나가는 곳마다 잔인하게 멸망시켰다.
군대를 돌려서 담현郯縣의 동쪽에서 유비劉備를 격파하자 도겸이 두려워하여 달아나 단양丹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는데, 이때 마침 장막張邈이 조조를 배반하니, 조조가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연주兗州로 돌아갔다.
처음에 장막이 소싯적에 유협遊俠을 좋아하여 원소袁紹와 조조曹操가 모두 그와 친하였다. 그러나 원소가 맹주盟主가 되어 교만한 기색이 있자 장막이 바른말로 원소를 질책하니,
원소가 노하여 조조에게 장막을 죽이도록 하였다. 조조가 이를 따르지 않았으나 장막은 끝내 스스로 편안히 있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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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전 구강태수前 九江太守변양邊讓이 평소 재주와 명망이 있었는데, 조조曹操가 자신을 비판하고 의논한다 하여 죽였다. 이로 말미암아 연주兗州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진궁陳宮은 성품이 강직하고 의기意氣가 장렬하였는데 마음속으로 또한 스스로 의심하고서 마침내 장막張邈의 아우 장초張超와 함께 조조를 배반할 것을 모의하고 다음과 같이 장막을 설득하였다.
“지금 천하가 와해되어 영웅호걸이 함께 일어났습니다. 군君이 천리에 달하는 넓은 지역의 무리를 거느리고서 사방이 〈평평하여〉 적의 공격을 받는 지역에 처하여 검을 어루만지면서 돌아보면 또한 인걸人傑이 될 만한데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제재를 받고 있으니, 또한 비루하지 않습니까.
지금 연주兗州(조조曹操)의 군대가 동쪽으로 정벌하러 가서 경내境內가 텅 비었고注+“주군동정州軍東征”은 조조曹操의 군대가 서주徐州를 정벌함을 이른다., 여포呂布는 장사壯士로서 전투에 뛰어나 그의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
만약 임시로 그를 맞이하여 그와 함께 연주를 다스리고 천하의 형세를 관찰하면서 시국時局의 변화를 기다리면 이 또한 천하를 주름잡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장막이 그의 말을 따라서 마침내 여포를 맞이하여 연주목兗州牧으로 삼았다. 순욱荀彧은 장막이 장차 난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을 알고 즉시 군대를 무장하여 대비하고서 동군태수 하후돈東郡太守 夏侯惇을 복양濮陽에서 급히 부르니, 여포가 마침내 복양을 점거하였다.注+복양현濮陽縣은 동군東郡에 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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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예주자사 곽공豫州刺史 郭貢이 수만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견성鄄城 아래로 오자, 혹자가 ‘곽공이 여포呂布와 함께 일을 도모한다.’ 하였다.
곽공이 순욱荀彧을 만날 것을 요구하자 순욱이 장차 가려고 하였는데, 하후돈夏侯惇이 말하기를 “군君은 온 주州 전체가 의지하여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니, 가면 반드시 위험하게 될 것입니다.”注+“일주진一州鎭”은 온 주州 전체가 그에게 의지하여 중요하게 여김을 이른다. 하였다.
그러자 순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곽공과 장막張邈 등은 평소 교분交分을 맺었던 사이가 아닙니다.注+분分(친분, 교분)은 부문扶問의 절切이다. 〈“분비소결分非素結”은〉 곽공郭貢과 장막張邈, 여포呂布 등 여러 사람이 평소 서로 교분을 맺었던 사이가 아님을 말한다. 지금 신속히 왔기 때문에 틀림없이 계책을 정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계책을 정하기 전에 설득하면 비록 우리를 위해 쓰이지 않더라도 중립을 유지하게 할 수 있지만注+〈“가사중립可使中立”은〉 떠나가거나 나아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먼저 의심하면 저들은 장차 노하여 계책을 세울 것입니다.”
곽공은 순욱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음을 보고 견성鄄城을 공격하기가 쉽지 않다고 여겨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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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때에 연주兗州의 군현郡縣이 모두 여포呂布에게 호응하였는데 오직 견성鄄城과 범현范縣과 동아현東阿縣이 동요하지 않았다.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범현范縣은 동군東郡에 속하였으니, 지금의 복양현濮陽縣이다. 동아현東阿縣은 동군東郡에 속하였으니, 지금의 제주현濟州縣이다.” 하였다.
여포의 군사 중에 항복한 자가 말하기를 “진궁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장차 동아현東阿縣을 취하려 하고 또 범억氾嶷(범억)에게 범현范縣을 취하게 했습니다.”注+범氾은 부함符咸의 절切이니, 성姓이다. 하였다.
순욱荀彧이 정욱程昱에게 이르기를 “지금 주州 전체가 모두 배반하고 오직 이 세 성城만이 있을 뿐인데 진궁 등이 큰 병력으로 진공하니,
이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단결시키지 않으면 세 성城이 틀림없이 동요할 것입니다. 군君은 동아현東阿縣의 백성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이니, 응당 가서 그들을 안무按撫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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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정욱程昱이 마침내 동아현東阿縣으로 돌아가는 길에 범현范縣에 들러서 현령 근윤縣令 靳允(근윤)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注+근靳은 성姓이다. “듣건대 여포呂布가 군君의 어머니와 아우와 처자식을 붙잡아두고 있다 하니, 효성스런 아들로서 참으로 마음을 가눌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영웅들이 함께 일어났는데, 이 중에 틀림없이 명세지재命世之才로서 천하의 어지러움을 종식시킬 자가 있을 것이니, 이는 지혜로운 자가 마땅히 자세히 살펴 가려야 할 것이다.
저 여포는 타고난 성품이 거칠어서 친한 자가 적고 강퍅하여 무례하니 그저 용맹한 필부匹夫일 뿐이요,注+추麤는 마음이 정精하지 못함이다.진궁陳宮 등은 형세 때문에 잠시 여포와 연합하였으니 서로 군신君臣 간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注+상相은 본음대로 읽으니, 〈“불능상군不能相君”은〉 서로 더불어 군신君臣의 분의分義를 정할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조사군曹使君(조조曹操)의 지혜와 책략은 세상에 드무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낸 사람일 것이다. 군君이 반드시 범현范縣을 굳게 지키고 내가 동아현東阿縣을 지키면
진궁陳宮이 강물을 건널 수 없었다. 정욱이 동아현東阿縣에 이르니注+여기서 구句를 뗀다., 현령 조지棗祗가 이미 성城을 점거하여 굳게 지키고 있었다.
정욱은 끝내 세 성을 보전하여 조조曹操의 대군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注+조지棗祗는 사람의 성명이니, 동아현東阿縣의 현령縣令이다.여포呂布가 견성鄄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서쪽으로 가서 복양濮陽에 주둔하였다.
조조가 말하기를 “여포가 동평東平을 점거하지 못하여 항보亢父와 태산泰山의 길을 차단하고서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나의 군대를 막고서 자기는 도리어 복양에 주둔하니, 나는 그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겠다.” 하고는 마침내 진격하였다.注+동평국東平國은 항보亢父와 태산泰山의 길에 위치하고 있다. 항보亢父는 본래 동평東平에 속하였는데, 장제 원화章帝 元和 원년(84)에 임성任城에 분속分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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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5월에 장군 곽사將軍 郭汜와 번주樊稠가 모두 삼공三公처럼 개부開府(부府를 설치하고 속관屬官을 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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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6월에 양주涼州를 나누어 옹주雍州를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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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하서河西의 네 군郡은 양주涼州의 치소治所와 거리가 멀고 하구河寇 때문에 단절되었다고 하여 별도로 한 주州를 설치할 것을 청하자, 황제가 조서를 내려 한단상邯鄲商을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삼았다.注+양주자사涼州刺史는 본래 한양군 기현漢陽郡 冀縣에 치소治所를 두었는데, 당시 구적寇賊이 많이 일어나 마침내 하서河西와 단절되었다. 하구河寇는 아마도 황하黃河를 기반으로 하여 노략질을 하는 도둑 떼인 듯하다. 한단邯鄲은 복성複姓이고 상商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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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경사京師에 두 번 지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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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이달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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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 7월에 양정楊定을 장군으로 삼아 개부開府(부府를 설치하고 속관屬官을 둠)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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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4월부터 이달(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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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곡식 1곡斛의 값이 50만 전錢에 이르자, 장안성長安城 안에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이에 황제가 시어사 후문侍御史 侯汶(후민)에게 태창太倉의 쌀과 콩을 내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죽을 끓여 나누어 주게 하였다.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미糜는 죽이다. 그러나 굶어 죽는 사람의 수는 전과 다름없었다.
이란 등급을 세워서 사람을 모집하여 그 등급에 도달한 자를 등인等人이라 이른다. 혹자는 “등인等人은 일등으로 응모한 자이다.” 하였다. “적들이 10보步의 거리까지 오면 나에게 아뢰라.” 하였다.
呂布가 濮陽에서 曹操와 싸우다
등인이 “10보입니다.” 하고 아뢰자, 전위는 또 말하기를 “5보의 거리까지 오면 나에게 아뢰라.” 하였다. 적이 가까이 다가오자, 등인이 두려워하여 적들이 이르렀다고 급박하게 말하였다. 이에 전위가 창을 잡아 쥐고서 큰 소리로 고함치며 일어나니, 창이 이르는 곳에 그의 손이 가는 대로 거꾸러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
조조가 이에 군대를 이끌고 떠나갈 수 있어서 마침내 복양濮陽에 들어가 그 동문東門을 불태우고 군대를 뒤로 물리려는 뜻이 없음을 보였다. 여포와의 전투에서 조조의 군대가 패하였는데 여포의 기병이 조조를 붙잡았으나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놓아주니,
조조가 불길을 뚫고서 탈출하여注+돌突은 맞닥뜨림이다(돌진함이다).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진군해 다시 공격하여 여포와 백여 일 동안 대치하였다. 그러나 군량이 다하여 각각 군대를 이끌고 떠나갔는데, 조조는 견성甄城으로 돌아갔고 여포는 산양山陽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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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원소袁紹가 사람을 보내 조조曹操를 설득하여 조조에게 그의 가솔들을 보내서 업현鄴縣에 거주하게 하자, 조조가 이를 허락하려고 하였다.
이에 정욱程昱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생각건대 장군께서는 아마도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시는 듯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이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까. 저 원소가 천하를 병탄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지만 그 지모智謀가 일을 이루기에는 부족합니다.
장군께서 스스로 헤아리시기에 저 원소의 아랫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연주兗州가 비록 잔파殘破되었지만 그래도 세 성城이 남아 있고 싸울 수 있는 군사들이 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이니,
가 면죽성緜竹城을 태우자 유언劉焉이 치소治所를 성도成都로 옮겼는데注+유언劉焉이 처음으로 면죽성緜竹城에 거처하였다., 등에 등창이 나서 졸卒하였다.
익주益州의 대리大吏인 조위趙韙(조위) 등이 유언의 아들 유장劉璋의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함을 탐내서 함께 표문表文을 올려 유장을 익주자사益州刺史로 삼을 것을 청하자注+위韙는 우귀羽鬼의 절切이다. 상上(올림)은 시장時掌의 절切이다., 황제가 조령詔令을 내려 익주목益州牧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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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도겸陶謙이 졸卒하자, 유비劉備가 서주목徐州牧을 겸하였다.
目
【목目】 도겸陶謙이 병세가 위중하자, 별가종사 미축别駕從事 麋竺(미축)에게 이르기를 “유비劉備가 아니면 이 주州를 편안하게 할 수 없다.”注+미麋는 무비武悲의 절切이다. 축竺은 음이 죽竹이다. 하였다. 도겸이 졸卒하자, 미축이 주州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유비를 맞이하였는데,
유비가 감히 이를 감당하지 못하여 말하기를 “원공로袁公路(원술袁術)의 집안은 4대에 걸쳐 다섯 공公을 배출하여 온 천하가 귀의하고 따르는 바이다.注+공로公路는 원술袁術의 자이다. 원안袁安부터 원외袁隗까지 4세世인데, 원안은 사도司徒가 되었고 아들 원창袁敞은 사공司空이 되었고 손자 원탕袁湯은 사공이 되었고 증손 원봉曾孫 袁逢은 사공이 되었고 원외는 태부太傅가 되었으니, 모두 5명의 삼공三公이다. 원공로가 지금 가까이 수춘壽春에 있으니, 그대는 서주徐州를 그에게 넘겨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그러자 전농교위 진등典農校尉 陳登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도겸陶謙이 표문表文을 올려 진등陳登을 전농교위典農校尉로 삼도록 하였다. “원공로는 교만하고 방자하니, 난세를 다스릴 군주가 아닙니다. 지금 제가 사군使君(유비)을 위하여 보병과 기병 십만 명을 모으고자 하니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위로는 군주를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할 수 있고, 아래로는 한 지방을 할거割據하여 서주의 경내境內를 지킬 수 있습니다. 만약 사군使君이 허락해주지 않으면 저 진등 역시 사군使君의 말을 따르지 않겠습니다.”
북해상 공융北海相 孔融이 유비에게 이르기를 “원공로가 어찌 나라를 걱정하여 집안을 잊는 자이겠습니까. 무덤 속의 해골을 어찌 개의할 것이 있겠습니까.注+〈“총중고골 하족개의冢中枯骨 何足介意”는〉 바로 4대에 걸쳐 5명의 삼공三公[사세오공四世五公]을 배출한 것을 말한 것이다.
오늘의 일은 백성들이 유능한 자를 〈보고서〉 따르는 것이니注+여與는 본음대로 읽으니, 〈“백성여능百姓與能”은〉 백성들이 유능한 자를 보고서 따름을 말한다., 하늘이 주는데도 취하지 않으면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자, 유비가 마침내 서주목徐州牧을 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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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마일제馬日磾가 수춘壽春에서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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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마일제馬日磾가 조기趙岐와 함께 사명使命을 받들어 수춘壽春에 이르렀는데, 조기가 뜻을 지켜 굽히지 않자 원술袁術이 그를 꺼렸다.
마일제가 원술에게 요구하는 바가 자못 많았는데, 원술이 〈조정에서 마일제에게 준〉 사절使節을 빌려서 보다가 빼앗고 돌려주지 않았다. 마일제가 떠나갈 것을 청하였으나 원술이 억류하고 보내주지 않으니, 마일제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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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원술袁術이 표문表文을 올려 손책孫策을 회의교위懷義校尉로 삼도록 하였다.
目
【목目】 처음에 손견孫堅이 전당錢塘 사람 오씨吳氏를 아내로 삼아서 네 아들을 낳으니, 바로 손책孫策과 손권孫權과 손익孫翊과 손광孫匡이고, 이 밖에 딸 하나가 더 있었다. 손견이 밖에서 종군從軍할 적에 자기 집안을
周瑜
수춘壽春에 머물게 하였는데, 손책孫策은 나이 십여 세에 이미 명성이 알려진 사람들과 교분을 맺었다.
서현舒縣 사람 주유周瑜는 손책孫策과 동년同年으로 또한 영명英明하고 활달豁達(활달)하며 숙성夙成하였다. 주유가 서현舒縣에서 수춘壽春으로 와서 〈손책을 만나보고〉 성심誠心을 미루어 교분을 맺고 손책에게 권하여 서현으로 옮겨가서 거주하게 하되注+분分(분수)은 부문扶問의 절切이다. “추결분호推結分好”는 성심誠心을 미루어 교분을 맺음을 이른다. 길 남쪽의 〈교통이 좋고 양지바른〉 큰 저택을 양보하여 손책에게 주고,
당堂에 올라 손책의 모친에게 절을 올리고는 있고 없는 것을 서로 융통하여 구제하였다.注+퇴推(양보하다)는 토뢰吐雷의 절切이다. 손견이 죽었을 적에 손책은 나이가 열일곱이었는데 부친 손견의 영구를 곡아曲阿로 모셔와 안장하고注+곡아曲阿는 옛 운양현雲陽縣이다. 진秦나라 때에 이 지역에 천자天子의 기운이 있다고 하여, 시황제始皇帝가 북쪽 언덕을 뚫어서 그 기세를 무너뜨리고 직도直道를 끊어서 굽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에 지명을 곡아曲阿라고 이른 것이다., 얼마 후 마침내 장강長江을 건너 강도江都에 거주하여注+강도江都는 ≪서경書經≫ 〈하서 우공夏書 禹貢〉의 양주揚州이다.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에 강도국江都國을 설치하였는데, 무제武帝 때에 광릉군廣陵郡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호걸들과 교분을 맺어 〈아버지를 위해〉 복수할 뜻이 있었다.注+〈“유복수지지有復讎之志”는〉 부친 손견孫堅이 황조黃祖에게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目
【목目】 원술袁術이 표문表文을 올려 손책孫策의 외숙 오경外叔 吳景에게 단양태수丹陽太守를 겸임하게 하고 종형 손비從兄 孫賁(손비)를 도위都尉로 삼도록 하였다.注+상上(올림)은 시장時掌의 절切이다. 비賁는 음이 비祕이다. 손책이 찾아가서 원술을 만나보고 눈물을 흘리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선친先親께서 옛적에 장사長沙로부터 들어가 동탁董卓을 토벌하고 현명하신 사군使君과 남양南陽에서 함께 만나서 동맹同盟하여 우호를 맺었는데, 불행하게도 난難을 만나서 공업을 마치지 못하셨습니다.
저 손책이 옛 은혜에 감격하여 스스로 의지하여 교분을 맺고자 하오니, 현명하신 사군使君께서는 저의 정성을 살펴주시길 바랍니다.”
원술은 손책의 이 말을 매우 기특하게 여겼으나 그 부친의 군대를 되돌려주려고 하지 않고, 손책에게 이르기를 “단양군丹陽郡은 정예병이 많이 배출되는 지역이니, 단양군에 가면 군대를 불러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目
【목目】 손책孫策이 마침내 그 모친을 맞이하여 곡아曲阿에 이르러서 외숙(오경吳景)에게 의지하고 군대를 불러 모아 수백 명을 얻었는데, 경현涇縣의 대수 조랑大帥 祖郞에게 습격을 받아 거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注+경현涇縣은 단양군丹陽郡에 속하였다. 조祖는 성이다.
이에 다시 찾아가서 원술袁術을 만나 보았는데, 원술이 손견의 남은 병력 천여 명을 손책에게 되돌려주고 회의교위懷義校尉에 임명하여 그를 구강태수九江太守로 삼을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윽고 다시 〈바꾸어〉 진기陳紀를 구강태수로 임명하였다. 원술은 또 손책에게 여강태수 육강廬江太守 陸康을 공격하게 하고 이르기를 “지금 만약 육강을 잡으면 여강은 참으로 경卿의 소유가 될 것이다.” 하였는데,
손책이 여강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원술은 또다시 그의 옛 속리屬吏인 유훈劉勳을 여강태수로 임명하니, 손책이 더욱 실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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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유요劉繇를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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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유요劉繇는 유대劉岱의 아우이다. 평소 높은 명망이 있었는데 황제가 조령詔令을 내려 그를 양주자사揚州刺史에 임용하니, 원술袁術이 이미 〈치소治所인〉 수춘壽春을 점거하였다고 하여 유요는 남쪽으로 가서 장강長江을 건너가 치소治所를 설치하고자 하였다.注+≪속한지續漢志≫에 “양주揚州는 본래 역양歷陽에 치소治所를 두었는데, 중세中世 이후에 수춘壽春으로 치소를 옮겼다.” 하였다.
그러자 오경吳景과 손비孫賁가 그를 곡아曲阿로 맞이해왔다. 오랜 시일이 지난 뒤에 유요가 오경과 손비는 본래 원술이 배치한 자들이라고 하여 핍박해 쫓아내었다.
오경과 손비가 후퇴하여 역양歷陽에 주둔하자注+역양현歷陽縣은 구강군九江郡에 속하였다., 유요가 장수를 보내 횡강橫江에 주둔하게 하여 그들을 막았다.注+횡강橫江은 바로 횡당橫塘이다. ≪금릉람고金陵覽古≫에 “장강長江 어귀부터 회수淮水를 따라 둑을 축조하였는데, 이를 일러 횡당橫塘이라 한다.” 하였다.
역주
역주1모친 王夫人 :
본명은 王榮으로 邯鄲 사람이다. 五官中郎將 王苞의 손녀로 靈帝 때에 궁에 들어와 美人에 봉해졌기 때문에 王美人으로도 불린다. 光和 4년(181)에 劉協을 낳았는데, 영제의 皇后 何氏가 이를 시기한 나머지 사람을 시켜 鴆毒으로 왕영을 살해하였다. 이에 영제가 격노하여 何氏를 폐출하고자 하였는데, 宦官들이 한사코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왕영이 살해당한 뒤에 영제는 왕영을 그리워하여 〈追德賦〉와 〈令儀頌〉을 지었으며 영제의 母后인 董氏가 유협을 직접 양육하였다. 中平 6년(189) 9월에 董氏의 일족인 董卓이 何氏의 소생인 少帝 劉辯을 폐위하고 왕영의 소생인 유협을 즉위시켰는바, 이가 바로 獻帝이다.(≪後漢書≫ 권9 〈獻帝紀〉, 권10下 〈靈思何皇后紀〉, 권27 〈孝獻皇帝紀〉)
역주2長秋宮을 세울 것 :
‘長秋宮’은 본래 漢나라 高帝가 거처하였던 궁전의 명칭으로 ‘長秋’라고도 약칭하는데, 후대에는 皇后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였다. ≪後漢書≫ 권10上 〈明德馬皇后紀〉에 “明帝 永平 3년(60) 봄에 有司가 장추궁을 세울 것을 아뢰었으나 황제가 이에 대해 말하는 바가 있지 않았다.[永平三年春 有司奏立長秋宮 帝未有所言]”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李賢의 注에 “〈長秋宮은〉 황후가 거처하는 궁이다. ‘長’은 오램이고 ‘秋’는 만물이 성숙하는 시초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명명한 것이다. 황후를 세울 것을 청함에 감히 대놓고 가리켜서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궁으로써 일컬은 것이다.[皇后所居宮也 長者久也 秋者萬物成熟之初也 故以名焉 請立皇后 不敢指言 故以宮稱之]”라고 설명하였다.
역주3後宮 :
본래는 妃와 嬪이 거처하는 궁전으로 妃와 嬪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특히 皇后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역주4(汎)[氾] :
저본에는 ‘汎’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氾’으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같다.
역주5田單의 공적 :
戰國時代에 멸망의 위기에 처한 齊나라를 구해낸 田單의 업적을 가리킨다. 燕나라 昭王이 樂毅에게 齊나라를 공격하게 하자 악의가 齊나라의 70여 성을 함락시키고, 齊나라 湣王이 재상 淖齒(요치)에게 죽임을 당하여 나라가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田單이 3년 동안 卽墨을 사수하면서 反間計를 써서 악의를 파면시키고, 1,000여 마리의 소에 五采와 용무늬를 그린 붉은 비단옷을 만들어 입히고 소의 뿔에 병기와 칼날을 묶고는 기름을 부은 갈대를 소꼬리에 묶어 불을 붙이고, 城에 수십 군데 구멍을 파놓은 다음 밤에 소를 풀어놓고 장사 5천 명이 그 뒤를 따르게 하였다. 꼬리가 뜨거워지자 성난 소들이 燕나라 군대로 달려가니, 燕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도망하였다. 전단이 이들을 추격하여 齊나라의 70여 성을 모두 수복하였다.(≪史記≫ 권46 〈田敬仲完世家〉, 권82 〈田單列傳〉)
역주6徐衆이……評하였다 :
이는 徐衆이 지은 ≪三國評≫에 실려 있다. 서중은 東晉 때 사람으로 咸康 연간에 黃門侍郞이 되었고 建元 초에 侍中이 되었다. ≪삼국평≫은 본래 3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하나 현재 독립된 책으로 전해지지 않으며 여러 史書에 그 片鱗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隋書≫ 권33 〈經籍志〉에는 ‘≪三國評志≫ 3권’을 徐爰이 撰한 것으로 되어 있다. 淸나라 杭世駿이 撰한 ≪三國志補註≫ 권2 〈魏書〉에도 ‘徐衆三國評曰’에 대해 “서중은 마땅히 서원이 되어야 한다.[徐衆當是徐爰]”라고 설명하였다.
역주7어버이를……어렵습니다 :
이 내용은 ≪史記≫ 권32 〈齊太公世家〉에 보인다. 管仲의 병이 위독하자, 桓公이 병문안을 가서 관중의 후임으로 재상이 될 만한 자를 물으면서 開方을 언급하니, 관중이 “부모를 배반하고 군주에게 왔으니 인정에 어긋납니다. 가까이하기 어렵습니다.[倍親以適君 非人情 難近]”라고 대답하였다. 개방은 본래 衛나라 懿公의 庶長子로 衛나라가 齊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자 齊나라에 인질로 보내졌는데, 齊나라의 강성함을 보고 벼슬하기를 원하여 15년 동안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부모의 喪에도 奔喪하지 않았다. 이에 관중은 개방의 이러한 행위가 天理와 人情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환공은 관중의 말을 듣지 않고 개방을 총애하였는데, 이후 환공의 병이 위중해졌을 때에 개방은 易牙, 豎刁(수조)와 함께 환공을 室에 禁錮하여 굶어죽게 만들고 그 시신을 67일이나 방치하여 구더기가 문 밖에까지 기어 나오게 하였다.
역주8(迷征去)[述征記] :
저본에는 ‘迷征去’로 되어 있으나, ≪水經注≫에 의거하여 ‘述征記’로 바로잡았다.
역주9(記)[去] :
저본에는 ‘記’로 되어 있으나, ≪水經注≫에 의거하여 ‘去’로 바로잡았다.
역주10(官)[宮] :
저본에는 ‘官’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宮’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1述征記……하였다 :
≪水經注≫ 권5 〈河水〉에 “또 河水가 동북쪽으로 東阿縣 북쪽을 지나가며, 하수가 范縣의 동북쪽에서 흘러 倉亭津이 된다. ≪述征記≫에 말하였다. ‘창정진은 범현의 경계에 있으니, 동아현과의 거리가 60리이다.’[又東北過東阿縣北 河水于范縣東北流爲倉亭津 述征記曰 倉亭津在范縣界 去東阿六十里]” 하였다.
역주12京師 地再震 :
“京師에 지진이 있는 것은 작은 변고가 아니다. 順帝 때에 일찍이 이를 썼었고, 이때에 다시 썼는데 한 달에 지진이 두 번 있기까지 하였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地震’을 쓴 것이 101번인데, 한 해에 지진이 두 번 있었던 것이 12번이고, 한 달에 지진이 두 번 있었던 것이 2번이다.(桓帝 建和 3년(149)과 바로 이해이다.) 獻帝의 경우는 모두 京師에 지진이 있었던 것이 보이니, 桓帝에 견줄 바가 아니다.[地震京師 非小變也 順帝嘗書之矣 於是復書 而一月至再焉 終綱目 書地震一百一 一歲再震十二 而一月再震二(桓帝建和三年 是年) 獻皆見於京師 非桓比矣]다” ≪書法≫
역주13황제가……치니 :
황제는 侍御史 侯汶에게 太倉의 쌀과 콩을 내어 죽을 쑤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게 하였으나 후민이 쌀과 콩을 빼돌리고 죽을 조금만 쑤어 먹였기 때문에 굶어 죽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들지 않은 것이다. 이때 황제가 쌀과 콩 각각 5升씩 취하여 죽을 쑤어 두 동이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후민이 그동안 쌀과 콩을 빼돌린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에게 곤장을 치게 한 것이다.
역주14等人 :
元나라 王幼學의 ≪資治通鑑綱目集覽≫에는 “衆人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猶言衆人]”라고 설명하였다.
역주15神武함 :
이는 본래 吉凶과 禍福으로 천하에 위엄을 보여 복종시키고 刑殺을 사용하지 않음을 이른다. ≪周易≫ 〈繫辭傳 上〉에 “옛날에 聰明하고 叡智하며 神武하여 죽이지 않는 자일 것이다.[古之聰明叡知神武而不殺者夫]”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孔穎達의 疏에 “저 ≪주역≫의 道는 深遠하여 길흉과 화복으로 만물에 위엄을 보여 복종시켰다. 그러므로 옛날에 聰明하고 叡智하며 神武한 군주는 伏羲氏 등을 이르니, 이 ≪주역≫의 道를 써서 천하에 위엄을 보여 복종시켰는바, 이는 刑殺을 사용하지 않고서 위엄을 보여 복종시킨 것이다.[夫易道深遠 以吉凶禍福威服萬物 故古之聰明叡知神武之君 謂伏犧等 用此易道 能威服天下 而不用刑殺而威服之也]”라고 설명하였다. 후대에는 ‘英明함과 威武를 갖추었다.’는 의미로 引伸되어서 帝王이나 將相의 지혜와 덕을 칭송하는 데에 많이 사용하였다.
역주16劉焉卒……爲益州牧 :
“관직을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劉焉을 죄준 것이다. 이로부터 牧鎭이 卒한 것에 대해 관직을 쓰지 않았으니, 이는 그가 上(황제)을 무시하였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卒함에 한결같이 삭제한 것이다.[不書官 何 罪焉也 自是牧鎭卒皆不書官 以爲無上也 故於其卒也 壹削之]” ≪書法≫
역주17天火 :
천둥과 번개 또는 자연 발화 등의 원인으로 일어난 불을 가리킨다. ≪春秋左氏傳≫ 宣公 16년(B.C.593) 조에 “모든 火災에 사람이 방화한 것을 火라 하고, 자연적으로 발생한 불을 災라 한다.[凡火 人火曰火 天火曰災]”라고 보인다.
역주18劉備兼領徐州 :
“여기에서 徐州 사람들이 劉備를 맞이하였는데 유비가 袁術을 추대하자 사람들이 불가하다고 하여 유비가 마침내 徐州牧을 겸임하였으니, 그렇다면 詔命이 내린 것이 아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스스로[自]’라고 일컫지 않았는가.(袁紹와 袁術이 ‘自領’이라고 쓴 것을 근거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은 유비에 대해서 면제해주는 말이 많으니, 이는 유비가 바르기 때문이다.[於是州人迎備 備推袁術 衆不可 遂領徐州 則非有詔命也 曷爲不稱自(據袁紹袁術書自領) 綱目於劉備多恕辭 正也]” ≪書法≫
역주19馬日磾卒於壽春 :
“馬日磾는 누구인가. 太傅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관직을 쓰지 않았는가. 使者로서 使節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때에 마일제가 사명을 받들고 가서 關東 지방의 군벌들을 화해시켰는데, 袁術이 그를 속여서 그의 使節을 빼앗았으니, 이는 마일제가 〈使命을 저버려〉 군주의 명을 욕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壽春에서 卒하였다.’라고만 쓰고 그 관직을 삭제한 것이다. 東漢에서 牧鎭 이외의 人士가 卒했을 적에 관직을 쓰지 않은 경우가 3번(單超와 馬日磾와 荀攸)이고,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卒했을 적에 지명을 쓴 경우가 4번(馬日磾와 管寧, 太傅 司馬越과 楊復光)인데, 오직 마일제와 태부 사마월에 대해서만 비난하는 말이 된다.[日磾 何 太傅也 然則曷爲不書官 使(시)失節也 於是日磾奉使和解關東 袁術詐奪其節 是辱命也 故書卒於壽春 而削其官 東漢自牧鎭外卒不書官者三(單超日磾荀攸) 終綱目 卒以地者四(日磾管寧太傅越楊復光) 惟日磾太傅越爲譏辭]” ≪書法≫ “劉焉은 분수 밖의 일을 탐내고 도모하여 사치하고 참람하여 신하 노릇 하지 않았으며, 마일제는 사명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여 使節을 빼앗기고 자신을 굽혔기 때문에 모두 ‘卒’이라고만 쓰고 그 관직을 삭제한 것이다.[劉焉貪圖非 奢僭不臣 日磾奉使無状 失節屈身 故皆書卒而削去其官]” ≪發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