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상上이 배를 타고 해도海島에 들어가 신선神仙을 구하고자 하므로, 여러 신하들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마침 큰 바람이 불고 날이 어두워지면서 바닷물이 끓어오르니, 10여 일을 머물러 있다가 마침내 돌아왔다.
綱
[綱] 옹현雍縣에 구름이 없이 우레가 친 것이 세 번이었고, 운석隕石 두 개가 떨어졌는데 옻칠을 한 것처럼 검었다.注+경전經典에 여如와 이而는 통용된다. “무운여뢰無雲如雷(구름이 없이 우레가 쳤다.)”는 〈하늘에 구름이 끼지 않았는데〉 공연히 우렛소리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二는 운석의 숫자이다. 예黳는 어혜於兮의 절切이니, 조금 검은 것이다. 강남江南 사람들은 기름을 가지고 옻을 달여서 찌꺼기를 사용하여 물건을 꾸미는 것을 예黳라 한다.
綱
[綱] 3월에 황제가 거정鉅定에서 친경親耕을 하고 돌아오다가 태산泰山에 이르러 신인神人을 기다리는 방사方士들을 파하였다.
目
[目] 상上이 거정鉅定에서 친경親耕을 하고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거정현鉅定縣은 제국齊國에 속하였다.” 하였다. 돌아오다가 태산泰山에 행차하여 봉封을 보수하고 명당明堂에서 제사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을 만나보고 마침내 말하기를 “짐朕이 즉위한 이래로 미친 짓을 하고 도리道理에 어긋난 행동을 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근심하고 괴롭게 하였으니, 후회막급이다.
지금으로부터 백성들에게 상해(폐해)를 끼치고 천하에 재물을 낭비하는 일을 모두 파하라.” 하였다.
전천추田千秋가 아뢰기를 “방사方士로서 신선술神仙術을 말하는 자들이 매우 많으나 드러난 효험이 없으니, 모두 파하여 쫓아보낼 것을 청합니다.”注+척斥은 축출하다는 뜻이다. 하였다.
상上은 말하기를 “대홍려大鴻臚의 말이 옳다.” 하고, 이에 신인神人을 기다리는 여러 방사들을 모두 파하였다.
이 뒤에 상上은 매번 신하들을 대할 적에 스스로 탄식하기를 “지난번에 내가 어리석고 미혹되어서 방사들에게 속임을 당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신선神仙이 있겠는가.
모두 요망한 말일 뿐이다.
먹는 것을 절제하고 약을 먹으면 다소 병을 덜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目
[目]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사람은 자신의 허물을 아는 것보다 어려움이 없고, 허물을 뉘우치는 것보다 어려움이 없고, 허물을 고치는 것보다 더 어려움이 없으니, 미혹되어 알지 못하는 자들이 모두 그러하다.
한漢나라 무제武帝와 같은 사람은 나이 68세가 된 뒤에 지난날의 잘못을 알고 모두 고쳤으니, 비록 명민明敏하지 못하다고 하나, 허물을 알지 못하여 잘못을 끝까지 이루는 자와는 거리가 멀다.
아!
이는 참으로 제왕帝王이 인仁에 처하고 의義로 옮겨가는 법이 될 만하다.”
綱
[綱] 여름 6월에 황제가 환궁還宮하였다.
綱
[綱] 전천추田千秋를 승상丞相으로 삼아 부민후富民侯를 봉封하고 조과趙過를 수속도위搜粟都尉로 삼았다.
目
[目] 전천추田千秋는 다른 재능과 학술이 없고 또 벌열閥閱(문벌門閥)과 공로가 없었는데, 다만 한마디 말로 임금의 뜻을 깨우쳐서 수개월 만에 재상宰相의 지위를 취하고 후侯에 봉해지니, 세상에 일찍이 있지 않은 일이었다.注+옛날에 신하의 공功에 대한 등급이 다섯 가지가 있었으니, 덕德으로써 종묘宗廟를 세우고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것을 훈勳이라 하고, 말로써 한 것을 노勞라 하고, 힘으로 다툰 것을 공功이라 하고, 등급을 밝히는 것을 벌閥이라 하고, 공을 쌓음을 열閱이라 하였다. 혹은 가세家世의 문호門戶를 벌열閥閱이라 하니, 이는 잘못이다.
그러나 사람됨이 돈후敦厚하고 지혜가 있어서 지위에 있으면서 스스로 직책에 걸맞음이 전후의 여러 공公보다 더하였다.注+칭稱은 척증尺證의 절切이니 그 직책에 걸맞음을 말한다.
目
[目] 이보다 앞서 상홍양桑弘羊이 아뢰기를 “윤대輪臺의 동쪽에 물을 댈 수 있는 토지 5,000경頃 이상이 있으니,
둔전屯田하는 병졸을 보내어 교위校尉를 두고 백성 중에 신체가 건장하며 용감히 이주할 수 있는 자를 모집하여 밭이 있는 곳으로 가서 밭을 개간하고 정후亭候를 쌓아 서역西域의 나라들에게 위엄을 보여야 합니다.”注+간墾은 경작함이다. 만구정亭은 후망候望(정찰偵察)하는 자가 거주하는 곳이다. 하였다.
目
[目] 상上은 마침내 조령詔令을 내려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난번에 유사有司가 아뢰어 백성들의 세금을 30전錢을 더하여 변경의 비용을 돕고자 하였으니, 이는 노약자와 고아와 독신자들을 더욱 곤궁하게 하는 것이다.注+“삼십三十”은 매 인구마다 30전錢씩을 더 올리는 것이다. 중重(거듭)은 직용直用의 절切이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군대를 보내어 윤대輪臺에 둔전屯田할 것을 청하니, 윤대는 서쪽으로 차사국車師國과 천여 리 떨어져 있다.
지난번 거사車師를 공격하여 비록 그 왕王의 항복을 받았으나 거리가 멀고 식량이 부족해서 길에서 죽은 자가 수천 명이었는데, 더구나 더 서쪽에 있는 윤대이겠는가.
흉노匈奴는 항상 말하기를 ‘한漢나라가 지극히 크나 중국 사람들은 굶주림과 목마름을 견디지 못하니, 〈이러한 때에〉
’注+〈“실일랑失一狼주천양走千羊”은〉 흉노匈奴가 이리[낭狼]로써 자신을 비유하고 양羊으로써 한漢나라를 비유한 것이다. 하였다.
지금 이사장군貳師將軍의 군대가 패함에 병사들이 죽거나 사로잡혀 이산되었으니, 비통한 마음이 항상 내 가슴속에 있노라.注+“사략리산死略離散”은 죽거나 또는 사로잡혀서 모두 스스로 이산됨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또다시 멀리 윤대에 둔전할 것을 청하여 정수亭隧를 일으키고자 하니,注+수隧는 음이 수遂이니, 수隧는 깊고 험한 곳을 따라 도로를 개통해서 적의 노략질과 침략을 피하는 것이다. 이는 더욱 천하天下를 소란하고 수고롭게 하는 것이요 백성을 우대하는 것이 아니다.
짐朕은 차마 들어줄 수가 없노라.
그런데 대홍려大鴻臚 등이 또다시 의논하여 죄수들을 모집해서 흉노匈奴의 사자使者를 호송하여 돌려보낼 적에 후侯에 봉해지는 상賞을 밝혀 〈사자를 호송하는 죄수들에게 선우單于를 찔러 죽이게 하여〉 분노를 갚고자 하니, 이것은 오패五霸도 하지 않은 짓이다.注+“보분報忿”은 이들로 하여금 선우單于를 찔러 죽이게 해서 분노를 갚고자 한 것이다. 패伯(으뜸)는 패霸로 읽는다. 〈“오백소불위야五伯所弗爲也”는〉 오패五伯도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 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지금 대한大漢이 하겠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지금에 힘써야 할 것은 까다로움과 포악함을 금하고 멋대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중지하며, 본업인 농사에 힘쓰고 마복령馬復令을 닦아서注+여기서 구句를 뗀다. 결손된 것을 보충하여 무비武備를 궁핍하지 않게 함에 달려 있을 뿐이니,注+“천부擅賦”는 정상적인 부세가 아니고 멋대로 명목을 붙인 세금이다. 복復은 면제함이니, “마복馬復”은 말을 기름으로 인하여 요역과 부세를 면제해주는 것이다. “보결補缺”은 다만 없어진 것을 보충하는 것이다.군국郡國의 이천석二千石이 각각 말[마馬]을 기르는 방략方略과 변방을 보충하는 내용의 글(장狀)을 올리거든 상계上計하는 관리와 함께 와서 〈나를〉 대면하게 하라.”注+방方은 술책術策이고, 약略은 계모計謀이다. 장狀은 사정을 기술한 글이다. “여계대與計對”는 상계上計하는 관리와 함께 와서 대면하는 것이다.
目
[目] 이 뒤로 다시는 출병出兵하지 않고 전천추田千秋를 부민후富民侯로 봉해서 백성들을 쉬게 하고 부유하게 기를 것을 생각함을 밝혔다.注+《은택후표恩澤侯表》에 “부민후富民侯는 패군沛郡의 근현靳縣을 식읍食邑으로 하였다.” 하였다.
또 조과趙過를 수속도위搜粟都尉로 삼자, 조과가 백성들에게 대전代田을 하도록 가르치고 한 두둑에 세 고랑을 내었는데, 해마다 경작하는 곳을 바꾸었으므로 이름을 대전代田이라 하였다.注+견甽은 옛 견자畎字이니, 밭 가운데 도랑의 너비가 한 자이고 깊이가 한 자인 것을 견甽이라 한다. 대代는 바꿈이니, 해마다 그 농사짓는 곳을 바꿈을 이른다.
매번 김맬 적에 번번이 고랑의 흙으로 뿌리를 북돋아 덮어주니, 곡식의 뿌리가 깊이 뻗어 바람과 가뭄을 견디었으며,注+누耨는 풀을 제거하는 것이다. 〈“매누每耨첩부근輒附根”은〉 매번 풀을 김맬 적에 번번이 고랑의 흙으로 싹의 뿌리를 북돋아 덮어주는 것이다. 내能(견디다)는 내耐로 읽으니, 〈“근심능풍한根深能風旱”은〉 그 뿌리가 깊기 때문에 바람과 가뭄을 견디는 것이다. 밭을 갈고 김을 매는 농기구가 모두 간편하고 솜씨 있게 만들어서 힘을 적게 들이고도 곡식을 많이 얻으니, 백성들이 모두 편리하게 여겼다.
目
[目] 사마온공司馬溫公(사마광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천하天下에는 진실로 훌륭한 선비가 없지 않다.
무제武帝가 사이四夷를 정벌하는 공功을 좋아하자 용감하고 날쌔면서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무사武士들이 조정에 가득해서, 땅을 개척하고 영토를 넓히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뒤에 백성들을 휴식시키고 농업을 소중히 여기자, 조과趙過의 무리가 백성들에게 밭을 갈고 김을 매는 방법을 가르쳐서 백성들 또한 그 이로움을 받았다.注+주儔는 음이 주籌이니, 무리이다.
이는 군주君主 한 사람의 취향과 좋아함이 크게 달라짐에 선비들이 그때마다 응한 것이니, 만일 무제가 삼왕三王의 도량을 겸하여 상商나라와 주周나라의 훌륭한 정치를 일으키려 했다면, 어찌 삼대三代 시대의 훌륭한 신하가 없었겠는가.”
綱
[綱] 가을 8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역주
역주1罷方士候神人者 :
“元光 2년(B.C. 133)에 ‘方士를 보내어 신선을 구했다.’고 쓴 뒤로부터 이때까지 45년이 되었는데 그런 뒤에야 ‘方士를 파했다.’고 썼으니, 武帝의 늦게 깨달음이 심하다. 2년 뒤에 마침내 武帝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것을 쓴 것은 다행으로 여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종신토록 깨닫지 못했을 것이니, 秦나라 始皇帝와 무엇이 다르겠는가.[自元光二年 書遣方士求神仙 於是四十五年矣 而後始書罷方士 甚矣 帝之晩悟也 後二年而帝遂違世矣 書此 幸之也 否則終身弗悟 與秦皇何異焉]” 《書法》
역주2以田千秋爲丞相 :
“‘公孫弘을 丞相으로 삼고 平津侯에 봉했다.’고 쓴 뒤로부터, 승상이 侯가 되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쓰지 않은 것은 늘상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田千秋를 侯로 삼은 것을 쓴 것은 어째서인가? 백성을 부유하게 함을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 武帝는 창과 방패, 토목공사로 海內의 재정을 고갈시켰는데, 말년에 이르러서 本心이 안정되고 天理가 돌아와서 비로소 지난날의 후회를 말하여 멋대로 세금을 징수하는 것을 그치게 하고 本業인 농사를 힘쓰게 하여, 富民侯를 봉하고 搜粟都尉를 설치해서 백성들을 휴식시키고 부유하게 기를 뜻을 밝혔으니, 비록 멀리 가지 않고 돌아온 것은 아니나 혼미하여 돌아오지 못한 군주와는 다르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 특별히 쓴 것이다.[自公孫弘書爲丞相 封平津侯 是後丞相無不侯者 不書 常事也 此書侯千秋 何 重富民也 武帝干戈土木 海內虛耗 至其末年 本心定而天理還 始陳旣往之悔 止擅賦 力本農 封富民侯 置搜粟都尉 以明休息富養之意 雖非不遠之復 其與迷而不反者 異矣 故綱目特書之]” 《書法》 “武帝는 大統을 이은 초기에는 생각이 매우 아름다웠는데, 채 한두 해가 못 되어 처음에 품었던 뜻을 갑자기 잃었다. 이에 사치한 욕심을 부리고 무력을 끝까지 동원하며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고 신선을 구한 일이 없는 것이 없어서 끝내 海內의 재정을 고갈시켜 도적이 봉기함에 이르렀다. 그러나 武帝는 아직도 스스로 반성하지 못했는데, 巫蠱의 難이 일어남에 미쳐 골육 간에 주살하고 京師에서 피를 뿌려 禍와 변고가 이미 지극하였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크게 뉘우치고 깨달았으니, 마치 술에 취했다가 깬 것과 같고 꿈을 꾸다가 잠을 깬 것과 같았다. 마침내 方士들을 파하고 輪臺에 〈둔전하는 일을〉 포기하며 애통해하는 詔令을 내리고 기왕의 잘못을 말해서 백성들과 더불어 휴식하여 가혹하고 포악함을 금지하였다. 예전에 한 것을 돌아보면 거의 딴 사람과 같았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武帝는 천품이 평소 높았으므로 허물을 고침에 용감해서 딴 일에 이끌려 제재받고 나약하게 하는 잘못이 없었다. 이 때문에 한 번 마음을 바꾸는 사이에 일이 이미 크게 달라졌으니, 만일 이와 같은 자품으로 훌륭한 정치에 용감하였더라면 또한 어찌 불가함이 있었겠는가. 《자치통감강목》에서 富民侯와 搜粟都尉를 책에 크게 썼으니, 비록 다행이라고 여긴 것이나 또한 깊이 애석하게 여긴 것이다.[武帝繼統之初 意嚮甚美 未一二載 遽失初意 於是奢慾窮黷 聚斂神仙之事 無所不有 卒至海內虛耗 盜賊蜂起 帝猶未能自反 逮至巫蠱難作 骨肉誅夷 喋血京師 禍變已極 然後始大悔悟 如醉而醒 夢而覺 遂乃罷方士 棄輪臺 下哀痛之詔 陳旣往之失 與民休息 禁止苛暴 回視前日所爲 殆若二人 何哉 蓋帝天資素高 故勇於改過 無牽制委靡之失 是以一轉移之頃 而事已大異 使其以如是之資 而勇於願治 亦何不可之有 綱目於富民之侯搜粟都尉 大書於冊 雖曰幸之 蓋亦深惜之也]” 《發明》
역주3이리……있다 :
이리는 匈奴의 군사를, 양은 漢나라의 군대를 비유한다. 遠征으로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친 漢나라의 군대는 힘없는 양과 같아서 흉노의 군사 한 명이 漢나라의 군사 천 명을 상대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