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7)

자치통감강목(7)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戊寅年(A.D.18)
무인년戊寅年(A.D.18)
五年이라
나라 왕망 천봉王莽 天鳳 5년이다.
北軍南門注+北軍南門, 謂北軍壘門之南出者也.하다
】 봄에 북군北軍남문南門에 화재가 났다.注+북군北軍남문南門북군北軍누문壘門(군문軍門) 중에 남쪽으로 난 것을 이른다.
이러니 未行하다
왕망王莽비흥費興형주목荊州牧으로 삼았는데, 임지로 떠나기 전에 면직하였다.
以興爲荊州牧하고 見問到部方略注+見, 賢遍切, 謂引見而問其方略也.한대 興對曰 荊, 揚之民 率依阻山澤하여 以漁采爲業注+漁, 謂捕魚也. 采, 謂采取蔬果之屬.이러니
왕망王莽비흥費興형주목荊州牧으로 삼고 인견引見하여 에 부임한 다음 다스릴 방략을 묻자注+현편賢遍이니, 인견引見하여 그 방략을 물음을 이른다., 비흥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의 백성들이 대부분 산과 늪을 의지하여 물고기를 잡고 나물을 채취하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는데注+는 물고기를 잡음을 이르고, 채소菜蔬과실果實의 등속을 채취함을 이른다.,
間者 國張六筦하여 稅山澤하여 妨奪民之利하고 連年久旱하여 百姓饑窮이라 爲盜賊하니
근래에 나라에서 육관六筦을 만들어 산과 늪에 세금을 징수해서 백성들의 이익을 방해하여 빼앗고, 수년에 걸쳐 오래도록 가물어서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던 나머지 도둑이 되었습니다.
興到部 欲令明曉告盜賊하여 歸田里하고 假貸犁牛種食하고 闊其租賦하여 冀可以解釋安集注+闊, 寬也.하노이다하여 免興官하다
저 비흥은 에 부임하면, 도적들에게 분명히 깨우쳐주고 고해주어서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하고, 농사짓는 소와 종자와 양식을 빌려주고 조세를 너그럽게 하여 백성들이 곤궁함에서 벗어나 안정되고 화목할 수 있게 하려 합니다.”注+은 너그럽게 함이다. 이에 왕망이 노하여 비흥의 관직을 면직하였다.
考吏致富者하여 收其財以給軍하다
왕망王莽이 관리 중에 치부致富한 자를 살펴 가려서 그 재물을 환수하여 군대에 공급하였다.
吏以不得俸祿으로 竝爲姦利하고 郡尹, 縣宰 家累千金이라
】 관리들이 녹봉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모두 부정하게 이익을 취하였고, 군윤郡尹현재縣宰는 집안에 수천 금을 쌓아두었다.
乃考諸軍吏及緣邊吏爲姦利增産致富者하여 收其家所有財産五分之四하여 以助邊急注+助邊費之急也.하고
왕망王莽은 마침내 여러 군리軍吏와 변경의 관리로서 부정하게 이익을 취하여 재산을 증식하고 를 축적한 자들을 살펴 가려서 그 집안에 소유한 재산의 5분의 4를 징수하여 변방의 시급한 비용을 돕게 하고,注+〈“이조변급以助邊急”은〉 변방의 시급한 비용을 돕는 것이다.
開吏告其將하고 奴婢告其主하여 冀以禁姦이나 而姦愈甚하니라
관리가 장수를 고발하고 노비가 주인을 고발하는 제도를 열어놓아서 간악한 짓을 금지하기를 바랐으나, 간악한 일은 더욱 심해졌다.
莽孫宗 自殺하다
왕망王莽의 손자 왕종王宗이 자살하였다.
自畫容貌하고 被服天子衣冠이라가 發覺하여 自殺하다
왕종王宗이 스스로 자신의 용모를 그리고 천자天子의 옷을 입고 을 썼다가 발각되어 자살하였다.
왕망王莽대부大夫양웅揚雄이 죽었다.
成帝之世 雄以奏賦爲郞하여 給事黃門하여 與莽及劉秀竝列하고 哀帝之初 又與董賢同官이러니
성제成帝의 세대에 양웅揚雄시부詩賦를 바쳐 낭관郎官이 되어 급사황문시랑給事黃門侍郞으로서 왕망王莽, 유수劉秀(유흠劉歆)와 함께 반열에 올랐고, 애제哀帝의 초년에는 또 동현董賢과 함께 벼슬하였다.
莽, 賢 爲三公하여 權傾人主하여 所薦 莫不拔擢이로되 而雄 三世不徙官注+三世, 謂成․哀․平也.하다 及莽簒位 雄以耆老久次 轉爲大夫注+久次, 謂久在位次, 未得改除.하니
왕망과 동현은 삼공三公이 되어서 권세가 군주를 능가하여 그들이 추천하는 사람이 발탁되지 않는 경우가 없었으나, 양웅은 3에 걸쳐 관직이 승진되지 못하였다.注+3성제成帝, 애제哀帝, 평제平帝를 이른다. 왕망이 황제皇帝의 자리를 찬탈하게 되자, 양웅은 원로로서 오랫동안 한 관직에만 있었다고 해서 승진하여 대부大夫가 되었다.注+구차久次”는 오랫동안 위차位次에 있으면서 다른 관직을 제수받지 못함을 이른다.
恬於勢利하고 好古樂道하여 欲以文章으로 成名於後世注+恬, 安也.하여 乃作太玄, 法言하여 用心於內하고 不求於外
그러나 권세와 이익에 태연하고, 옛것을 좋아하고 를 즐거워하여 문장文章으로 후세에 명성을 이루고자 해서,注+은 태연함이다. 마침내 ≪태현경太玄經≫과 ≪법언法言≫을 지어 안에 마음을 쓰고 밖에서 구하지 않았다.
人皆忽之注+太玄以擬易, 法言以擬論語, 皆模倣前聖之遺言. 忽, 謂輕也.호되 唯劉秀及范逡 敬焉하고 而桓譚以爲絶倫이라하고 鉅鹿侯芭 師事焉注+絶倫, 無比類也. 芭, 音葩, 侯芭, 姓名.하니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소홀히 여겼으나注+태현경太玄經≫으로써 ≪주역周易≫을 모방하고, ≪법언法言≫으로써 ≪논어論語≫를 모방하였으니, 모두 옛 성인聖人유언遺言을 모방한 것이다. 은 경시함을 이른다. 오직 유수劉秀범준范逡(범준)이 그를 존경하였고, 환담桓譚은 특별히 뛰어난 사람이라고 여겼으며, 거록鉅鹿 사람 후파侯芭(후파)는 스승으로 섬겼다.注+절륜絶倫”은 견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는 음이 이니, 후파侯芭는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劉棻 嘗從雄學作奇字注+奇字, 古文之異者.러니 及棻坐事誅 辭連及雄하니
유분劉棻(유분)이 일찍이 양웅揚雄에게 기이한 글자를 쓰는 법을 배웠는데注+기자奇字”는 고문古文의 기이한 글자이다., , 옥사獄辭가 양웅에게까지 미쳤다.
校書天祿閣上注+天祿, 獸名. 漢時, 有貢此獸者, 因以名閣, 以藏秘書, 在未央宮.이라 使者來하여 欲收之한대 恐不能自免하여 乃從閣上自投下하여 幾死
이때 양웅은 천록각天祿閣 위에서 을 교정하고 있었는데注+천록天祿”은 짐승의 이름이다. 나라 때에 이 짐승을 바친 자가 있었으므로 인하여 을 이름하고 궁중宮中도서圖書를 보관하였으니, 미앙궁未央宮에 있었다., 사자使者가 와서 체포하려 하자, 양웅은 화를 면치 못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천록각에서 스스로 투신하여 거의 죽게 되었다.
聞之하고 以雄不知情이라하여 詔勿問하다이나 雄所作法言卒章 盛稱莽功德하여 可比伊尹周公하고
왕망은 이 말을 듣고 양웅이 실정을 알지 못한다고 여겨 명하여 죄를 묻지 말게 하였다. 그러나 양웅이 지은 ≪법언法言≫의 마지막 장에 왕망의 공덕을 크게 칭찬하여 이윤伊尹주공周公에 견줄 만하다고 하였고,
後又作劇秦美新之文하여 以頌莽하니 君子病焉注+劇, 甚也. 題曰劇秦美新, 蓋以秦皇無道爲甚, 而美新莽之德也.하니라
뒤에 또 〈극진미신劇秦美新〉이란 글을 지어서 왕망을 칭송하였으니, 군자君子가 이것을 나쁘게 여겼다.注+은 심함이다. 표제標題를 ‘극진미신劇秦美新’이라 하였으니, 진 시황秦 始皇무도無道함을 심하다 하고 나라 왕망王莽을 찬미한 것이다.
琅邪樊崇 東海刁子都等兵 皆起하다
낭야琅邪(낭야)의 번숭樊崇(번숭)과 동해東海조자도刁子都(조자도) 등의 군대가 모두 일어났다.
琅邪樊崇 起兵於莒하니 衆百餘人이라 群盜以崇猛勇이라하여 皆附之하니 一歲間 至萬餘人이요
낭야琅邪번숭樊崇에서 군대를 일으키니, 무리가 1백여 명이었다. 도둑들은 번숭이 용맹하다 하여 모두 그를 따르니, 1년 사이에 1만여 명에 이르렀다.
逢安, 徐宣, 謝祿, 楊音 各起兵하니 合數萬人이라 從崇하여 轉掠靑, 徐間하다
방안逢安(방안), 서선徐宣, 사록謝祿, 양음楊音이 각각 군대를 일으키니 합하면 수만 명이었는데, 이들은 번숭을 따라 사이를 노략질하였다.
又有東海刁子都 亦起兵하여 鈔擊徐兗注+刁, 音貂, 姓也, 子都, 其名. 鈔, 楚敎切, 略取也.이어늘 遣使者하여 發兵擊之호되 不能克하다
동해東海조자도刁子都 또한 군대를 일으켜 을 약탈하고 습격하였다.注+는 음이 이니 이요, 자도子都는 그의 이름이다. 초교楚敎이니, 약탈하여 취하는 것이다. 왕망王莽사자使者를 보내 군대를 징발하여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烏累單于死커늘 弟呼都而尸道皐若鞮單于輿立하다
】 〈흉노匈奴의〉 오루선우烏累單于가 죽자, 아우인 호도이시도고약제선우 여呼都而尸道皐若鞮單于 輿(흉노 제20대 선우)가 즉위하였다.
역주
역주1 莽以費興爲荊州牧 : “己巳年에 여러 관명을 바꾼 뒤로, 이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牧’이라고 썼고, 王莽이 죽을 때까지 ‘牧’이라고 쓴 것이 2번이다. 費興과 田況은 모두 賢良이었으나 제대로 등용되지 못한 자들이니, 세 州(荊州․靑州․徐州)의 백성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겼으므로 ‘牧’이라고 쓴 것이다.[自己巳改諸官名 至是 始書牧 終莽之身 書牧者再 費興田況皆賢而不果用者也 爲三州民惜之 故書]” ≪書法≫
역주2 莽大夫揚雄死 : “王莽의 신하를 모두 ‘死’라고 쓴 것은 逆賊으로 여긴 것이다. 왕망의 大夫가 많은데 특별히 揚雄을 쓴 것은 양웅을 더욱 나쁘게 여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죽었을 적에 ‘死’라고 쓴 것은 왕망의 신하 외에 앞에는 范增, 뒤에는 胡僧인 不空뿐이다.[莽臣皆書死 賊之也 莽大夫多矣 特書揚雄 所以深病雄也 終綱目 卒書死者 莽臣之外 前范增 後胡僧不空而已]” ≪書法≫ “士君子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가 出處의 즈음에 잘 살피고 거취의 義理에 밝기 때문이다. 武王이 大義를 행하여 殘賊(紂王)을 평정하자 온 천하가 누구도 이것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伯夷와 叔齊는 홀로 분연히 무왕의 소행을 부끄러워하여 周나라의 곡식(녹봉)을 먹지 않고 죽었으니, 백이와 숙제가 어찌 죽음을 좋아하고 삶을 싫어해서였겠는가. 이는 진실로 군주와 신하는 하늘과 땅의 큰 義理이니, 古今에 항상 걸쳐 있어서 泯滅되지 않으므로 차라리 죽을지언정 굽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世道가 무너지고 어두워짐으로부터 士君子가 大節에 밝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치욕을 참고 더러움을 뒤집어쓰면서 벼슬할 자리가 아닌데 벼슬한 자가 있었고, 그 사이에는 또한 혹 하급 관리로 있으면서 스스로 하급 관리의 은둔에 자취를 의탁하여 녹봉으로써 밭 가는 것을 대신한다 하여 이것을 빌려 자신의 말을 문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높은 자리를 사양하고 낮은 자리에 거하며 많은 녹봉을 사양하고 적은 녹봉에 거하는 것이, 어둡고 용렬한 군주의 세대에 있어서는 그래도 혹 스스로 변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簒逆한 사람의 나라에서는 어찌 단 하루라도 그 자리에 처할 수 있겠는가. 哀帝와 平帝의 재위 시절에는 揚雄이 진실로 일찍이 조정에 출사하여 董賢과 王莽의 무리와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반열을 함께하였는데, 이들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때에는 양웅이 구차히 따르거나 아첨하지 않고 편안히 물러나 있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가상히 여길 만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왕망이 나라를 찬탈한 뒤에 이르러는 양웅이 前朝의 옛 신하로서 이때에 급히 몸을 이끌고 물러가서 龔勝, 薛方, 郭欽, 蔣詡 등의 여러 賢者들과 나란히 말을 몰고 앞을 다투지 않고, 도리어 관작과 녹봉을 탐하고 연연하여 억지로 참고 떠나가지 않았다. 비록 지위가 현달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역적의 조정에 섰으니, 신하로 왕망을 섬긴 것이다. 왕망은 하찮은 器局과 도둑질하는 재주로 몸소 弑逆의 죄를 짓고 간사함과 거짓으로 문식하여 漢나라의 國統을 도둑질하였으니, 士君子로서 다소라도 人臣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라면 반드시 그의 얼굴과 눈을 바라보기를 부끄러워할 것이다. 어찌 그의 앞에서 절하고 엎드려서 臣子가 되어 그의 관작을 받고 그의 녹봉을 먹으면서 부끄러워할 줄을 모르는 자가 있겠는가. 양웅은 한 몸으로 두 姓王(朝)을 섬겨 큰 절개가 이미 훼손되었는데, 더구나 왕망의 공덕을 칭송하고 〈劇秦美新〉 등의 작품을 지음에 있어서이겠는가. 이는 또 君子가 나쁘게 여기는 것이니, 진실로 直筆로 깊이 폄하하는 것이 당연하다. 或者는 도리어 말하기를 “양웅의 집이 본래 가난하였으니, 진실로 왕망의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스스로 공급하여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말을 하는 자들이, 士君子는 마땅히 命과 義를 편안히 여기고 구차히 사는 것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됨을 어찌 알겠는가. 양웅이 만일 丘園에서 자취를 은둔하고서 굶어 죽었다면 이미 자신의 몸을 욕되지 않게 하여 얻은 바가 많을 것이다. 옛날 程伊川(程頤)이 말씀하기를 “굶어 죽는 일은 가장 가볍고 절개를 잃는 일은 가장 크다.” 하셨으니, ≪資治通鑑綱目≫에 ‘왕망의 大夫 양웅이 죽었다.’고 쓴 것을 보면 양웅이 왕망에게 절개를 잃은 것은 東海의 물결을 다 쏟아붓더라도 그 치욕을 씻을 수 없는 것이다. 士君子가 몸을 세운 것이 여기에 이르렀으니, 그렇다면 어찌 매우 한탄스럽지 않으며 또 어찌 매우 애석해할 만하지 않겠는가.[所貴乎士君子者 以其審於出處之際 明於去就之義者也 武王行大義 平殘賊 擧天下莫或非之 伯夷叔齊乃獨奮然恥其所爲 不食周粟而死 若二子者 豈好死而惡生哉 誠以君臣天地之大義 亘古今而不可泯 故寧死而不屈爾 自世道堙微 士君子不明於大節 故有忍恥蒙垢 仕非其地者 其間亦或身處下僚 自以爲託迹吏隱 祿以代耕 借是以文其說 抑不知辭尊居卑 辭富居貧 在昏庸之世 猶或可以自解 至於簒逆之人 烏可一日處其位哉 揚雄在哀平間 固嘗出仕於朝 與董賢王莽輩 比肩竝列 當其權勢熏灼 雄不苟於附媚 安於恬退 誠足嘉尙者 洎莽簒國之後 雄以前朝舊人 不於此時亟引而退 與龔勝薛方郭欽蔣詡諸賢 竝驅爭先 乃復貪戀爵祿 隱忍不去 雖位非通顯 然亦旣立其朝而臣事之矣 莽以斗筲穿窬之才 身負弑逆 文姦飾僞 盜竊漢祚 士君子稍有人心者 必羞見其面目 安有拜伏於前 爲之臣子 受其爵 食其祿 而不知愧恥者哉 雄以一身事二姓 大節已虧 況於稱莽功德 與夫劇秦美新等作 又君子之所病者 固宜直筆深貶之也 或者顧謂雄家素貧 苟不仕莽朝 何以自給 豈知士君子當安於命義 不當以苟活爲心 誠使遁迹丘園 饑餓而歿 旣能不辱其身 所獲多矣 昔程頤子有言 饑餓死最輕 失節事最大 觀綱目所書莽大夫揚雄死 則雄之失身於莽 盡東海之波 不足以湔其恥矣 士君子之立身至此 豈不深可歎哉 豈不深可惜哉]” ≪發明≫
역주3 유분이……되자 : 劉棻은 劉秀의 아들이다. 王莽의 심복이었던 甄豐의 옥사에 유분까지 연루되었다. 이 일은 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8권 상 新 王莽 始建國 2년에 보인다.

자치통감강목(7) 책은 2019.10.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