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目] 처음에 무제武帝가 붕崩하자, 제후諸侯에게 새서璽書(옥새玉璽를 찍은 황제의 친서)를 하사하였다.
연왕燕王 유단劉旦은 새서를 받고
곡哭하려 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새서의 봉함이 너무 작으니,
경사京師에
변란變亂이 있는가 의심된다.”
注+글이 적으면 봉함이 작은 것이다. 하고는, 총애하는 신하를 보내
장안長安에 가서 〈
국상國喪의〉
예의禮儀를 묻는다며 은밀히 조정의 일을 살펴 탐문하게 하였다.
注+음陰은 암지暗地(은밀히)라는 말과 같다. 날剌은 칠역七亦의 절切이니 살핌이요, 후候는 탐문함이다.
그러다가 황제가 조령詔令을 내려서 제후왕들에게 돈을 하사하고 봉지封地를 더해주자, 연왕燕王 유단劉旦은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황제가 되어야 하는데, 어찌 〈어린 황제(소제昭帝)가〉 돈을 하사한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제효왕齊孝王의 손자인
유택劉澤 등과 함께 계략을 꾸며, “
무제武帝 때에 내가
조령詔令을 받아 관리의 일을 주관해서
무비武備를 닦아 비상사태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注+제후諸侯는 백성과 관직의 일을 다스릴 수 없다. 이 때문에 “조령詔令을 받아서 관리의 일을 주관하고 군대를 일으켜 대비한다.”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또 간사한 글을 만들어 말하기를 “어린 황제는 무제武帝의 아들이 아니다.
천하가 마땅히 함께 토벌해야 한다.” 하고는, 사람을 보내 파발마로 군국郡國을 다니면서 백성들을 동요하게 하였다.
유택은
임치臨菑로 돌아가 군대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고,
注+임치臨菑는 제군태수齊郡太守와 청주랄사靑州剌史의 치소治所가 있는 곳이다. 유단은
군국郡國의 간사한 사람들을 불러와
동銅과
철鐵에 대한 세금을 거두어 갑옷과 병기를 만들고
거기車騎와
재관材官의 병사들을 자주 사열하였으며,
注+삭數(자주)은 음이 삭朔이다. 백성들을 징발해서 크게 사냥하여 병사와 말을 훈련시키면서 출동 기일을 기다렸다.
注+강講은 익힘이고, 수須는 기다림이다. 유택劉澤이 임치臨菑로 돌아가 거병擧兵을 도모하였으므로, 유단劉旦이 군대를 사열하면서 기일을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한의韓義 등 간諫하는 자 15명을 모두 죽였다.
目
[目] 처음에
무제武帝는
김일제金日磾가 반역을 도모한
마하라馬何羅를 체포한
공功이 있다 하여
유조遺詔를 내려
투후秺侯로 봉하게 하였는데,
注+투秺는 음이 여如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투후秺侯의 나라는 제음군濟陰郡에 속하였다.” 하였다. 김일제는 황제(
소제昭帝)의 나이가 어리다 하여 봉함을 받지 않았다.
그러다가 병이 위독하게 되자, 곽광霍光이 황제에게 아뢰어 후侯를 봉하였는데, 병석에 누워 인수印綬를 받고는 다음날에 졸卒하니, 시호를 경敬이라 하였다.
김일제의 두 아들인 김상金賞과 김건金建이 모두 시중侍中으로 궁중에서 황제를 모셔 상上과 함께 기거하였다.
김상은 수레를 받들고 김건은 부마도위駙馬都尉가 되었는데, 김상이 후侯를 계승하여 두 인수印綬를 차게 되자, 상上은 곽광에게 이르기를 “김씨金氏 형제 두 사람을 모두 후侯의 두 인수印綬를 차게 할 수는 없는가?” 하니, 곽광이 대답하기를 “김상은 본래 아버지를 뒤이어 후侯가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웃으며 말하기를 “후侯를 시키는 것은 나와 장군에게 달려 있지 않은가?” 하였으나, 곽광은 대답하기를 “선제先帝의 약속에 공功이 있어야 비로소 후侯에 봉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