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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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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8)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宋泰始三年이요 魏皇興元年이라
春正月 魏取宋淮北四州及豫州淮西地하다
宋張永等 棄城夜走하니 會天大雪하여 士卒凍死太半하고 手足斷者 什七八이라
尉元 邀其前하고 薛安都 乗其後하여 大破永等於呂梁之東하니 死者以萬數 枕屍六十餘里하고 委棄資械不可勝計注+水經註 “泗水自彭城東南過呂縣南. 泗水之上有石梁焉, 故曰呂梁.”러라
宋主召蔡興宗하여 以敗書示之曰 我愧卿甚이로다 永及攸之皆坐貶하고 還屯淮陰하니
由是 失淮北四州及豫州淮西之地注+淮北四州, 謂靑․冀․徐․兗也. 豫州淮西, 謂汝南․新蔡․譙․梁․陳․南頓․潁川․汝南․汝陰諸郡也.하다
裴子野曰 太宗之初 威令所被 不滿百里 而能開誠布欵하여 以致平定이러니
既乃賈其餘勇하여 師出無名하여 而長淮以北 倐忽爲戎矣注+賈, 音古, 賣也. 若以向之虛懐 不矜不伐이면 則三叛 奚爲而起哉注+三叛, 謂薛安都․畢衆敬․常珍奇也.리오
魏東平王道符反長安이라가 伏誅注+道符, 翰之子也.하다
◑宋靑冀州平하다
尋陽既平 宋主遣沈文秀弟文炳하여 以詔書喻文秀하고 又遣將軍劉懐珍하여 將兵三千하여 與之偕行하여 進據朐城注+朐城, 漢東海郡之朐縣城也.이러니
會文秀攻靑州刺史明僧暠하여 走之하니 衆心兇懼하여 欲保郁洲注+明, 姓也. 僧暠, 其名. 上年僧暠起兵攻文秀, 以應建康. 水經註 “朐山西側, 有朐縣故城. 東北海中有大洲, 故謂之郁洲.”어늘
懐珍曰 文秀 欲以靑州歸하니 計齊之士民 安肯甘心左衽耶注+計, 料也. 靑州在齊地, 故曰齊. 今揚兵直前하여 宣布威德이면 諸城 可飛書而下리라 柰何守此不進하여 自爲沮撓乎
遂進하여 送文炳入城호되 文秀猶不降이어늘 衆謂宜且堅壁伺隙이라한대
懐珍曰 今衆少糧竭하여 懸軍深入하니 正當以精兵速進하여 掩其不備耳라하고 乃遣百騎하여 襲其城拔之하니 文秀請降하고 冀州刺史崔道固亦降하니 宋主皆復其位하다
魏將軍慕容白曜侵宋靑州하여 取四城하다
宋沈攸之 自彭城還也 留王玄載守下邳하고 沈韶守宿豫하며 睢陵淮陽 皆留兵戍之注+玄載, 玄謨之從弟也. 睢, 音雖. 睢陵縣, 前漢屬臨淮郡, 後漢屬下邳郡, 孝武大明元年度屬齊陰郡.하니
時申纂 守無鹽하고 劉休賓 守梁鄒注+梁鄒縣, 漢屬濟南郡.하고 房崇吉 守升城하고 張讜 守團城注+魏收志 “東太原郡太原縣治升城.” 據水經註, 東莞郡治團城, 城在春秋之鄆邑西南四十里.하여 與肥城麋溝垣苗 皆不附魏注+肥城縣, 前漢屬泰山郡, 後漢屬濟北郡, 晉罷, 宋復置濟北郡於肥城. 魏收志 “糜溝․垣苗二城亦在東太原郡太原縣界.”하니 魏遣將軍長孫陵慕容白曜等하여 將兵赴靑州注+白曜, 燕王皝之玄孫也.하니
白曜至無鹽하여 欲攻之어늘 將佐 皆以爲攻具未備하니 不宜遽進이라한대
司馬酈範曰 輕軍深入하니 豈宜淹緩이리오 且申纂 必謂我軍來速하니 不暇攻圍라하고 將不爲備하리니 今出其不意 可一鼓而克이라
白曜從之하여 引兵偽退하고 夜進攻之하여 拔無鹽하고 殺申纂하고 欲盡以其人爲軍賞이어늘
範曰 齊 形勝之地 宜遠爲經略이니 今人心未洽하고 連城相望하여 皆有拒守之志하니 非以德信懐之 未易平也니라 白曜曰 善타하고 皆免之하다
將攻肥城할새 範曰 肥城雖小 攻之引日注+引, 長也.이니 勝之라도 不益軍勢 不勝이면 足挫軍威 彼見無鹽之破하고 不敢不懼리니 若飛書喻之 不降則散矣리라
白曜從之한대 肥城果潰하니 得粟三十萬斛하다 白曜謂範曰 此行得卿하니 三齊 不足定也라하고 遂取垣苗糜溝二戍하고 一旬中 拔四城하니 威震齊土하더라
宋以蔡興宗爲郢州刺史하다
◑魏取升城하다
宋房崇吉 守升城하여 勝兵 不過七百人이라 魏慕容白曜 築長圍攻之하여 三月乃克注+勝, 音升. 勝兵者, 謂能操五兵而戰也.하니 忿其不降하여 欲盡阬之어늘
参軍事韓麒麟 諫曰 如此則自此以東으로 諸城皆人自爲守하여 不可攻矣리이다 白曜乃止하니 崇吉脫身走하다
其母及申纂妻與魏濟州刺史盧度世 有中表親이로되 然已疎遠이러니 及爲魏所虜 度世奉事甚恭하고 贍給優厚러라
度世閨門之内 和而有禮하니 百口怡怡하여 豐儉同之하더라
◑宋崔道固 閉門拒魏하고 沈文秀 遣使迎降하여 請兵於魏하니 白曜 欲遣兵救之어늘
酈範曰 文秀室家墳墓皆在江南注+文秀, 吳興武康人.하고 擁兵數萬하여 城固甲堅하니 彊則拒戰이요 屈則遁去어늘
今無朝夕之急하니 何遽求援이리오 且其使者視下色愧하고 語煩志怯하니 此必挾詐以誘我 不可從也
不若先取歴城하고 克盤陽하고 下梁鄒하고 平樂陵然後 案兵徐進이면 不患其不服也注+般陽縣, 漢屬濟南郡. 晉武帝分平原立樂陵郡, 宋文帝置樂陵郡於故千乘地.리라 白曜乃止하니 文秀果不降하다
◑魏尉元 表言호되 彭城 宋之要藩이라 不有重兵積粟이면 則不可固守 若資儲既廣이면 則宋人 不敢窺淮北矣
且賊向彭城 必由淸泗過宿豫하고 歴下邳하고 趨靑州 亦由下邳沂水經東安이니 此皆要地注+漢書地理志 “沂水出泰山, 蓋縣南至下邳入泗, 過郡五, 行六百里.” 胡三省曰 “東安縣, 前漢屬城陽國, 後漢屬琅邪郡, 晉屬東莞郡, 惠帝元康七年, 分東莞置東安郡.”
今先平之 則靑冀諸州 可不攻而克이어니와 不然則靑冀雖拔이라도 百姓狼顧하여 猶懐僥倖之心이니
臣愚以爲宜釋靑冀之師하고 先定東南하여 斷劉彧北顧之意하고 絶愚民南望之心하면 則淮北自擧하여 暫勞永逸矣리이다
若天雨既降 彼或運糧益衆하여 規爲進取 則近淮之民 翻然改圖하리니 靑冀二州 未可猝拔也리이다
◑宋沈攸之 自送運米至下邳어늘 魏人遣間詐之曰 薛安都欲降하여 求軍迎接이라한대 呉喜請赴之어늘 攸之不許러니
既而 來者益多하니 攸之謂曰 諸人 既有誠心하니 若能與薛徐州子弟 俱來者 即皆假以鄉縣하여 唯意所欲이어니와 如其不爾 無爲空往來也하라 自是 不復至러라
攸之 乃使軍主陳顯逹將千人하여 助戍下邳而還注+一軍之帥, 謂之軍主.하다
宋以袁粲爲僕射하다
◑秋八月 宋遣中領軍沈攸之擊彭城하고 將軍蕭道成鎭淮陰하다
宋主復遣沈攸之等하여 擊彭城하니 攸之以淸泗方涸하여 糧運不繼 固執以爲不可한대 宋主怒하여 彊遣之하고 而使行徐州事蕭道成으로 鎭淮陰하니 道成 收養豪俊하여 賓客始盛하다
魏之入彭城也 垣崇祖 將部曲하여 犇據朐山이어늘 道成 以爲戍主注+崇祖, 護之之從子也.하니 朐山 濵海孤絶하여 人情未安이러니 魏人得其叛將하여 遣騎二萬襲之하니
崇祖 方出送客이러니 城中人懼하여 皆下船欲去어늘 崇祖還하여 謂腹心曰
虜非有宿謀 承叛者之言而來耳 易誑也 今得百餘人還이면 事必濟矣리니 卿等 可亟去此二里外하여 大呼而來云호되 艾塘義人 已破虜하니 須戍軍速往逐之注+艾塘, 地名, 在東海郡朐山縣西北十里. 義人, 謂擧義之人. 宋人謂淮北起兵拒魏者爲義人.하라한대
舟中人 果喜하여 爭上岸이어늘 崇祖 引入據城하고 遣羸弱入島하여 人持兩炬하여 登山鼓譟하니 魏軍乃退어늘
垣榮祖亦自彭城犇朐山하여 遂依蕭道成於淮陰하고 劉僧嗣 將部曲二千人하여 居海島어늘 道成 亦召而撫之하다
髙四十三尺이라 用銅十萬斤 黄金六百斤하다
魏人拒擊宋師走之하고 遂取下邳하다
魏尉元 遣兵拒沈攸之하고 又以攸之前敗所喪士卒瘃墮膝行者還之하여 以沮其氣注+瘃, 陟玉切, 寒瘡也. 墮, 足趾墮落也.하니 宋主 尋悔遣攸之等하여 復召使還이러니
不及 攸之至睢淸口어늘 魏兵撃之한대 衆潰하여 還走淮陰하니 委資械以萬計注+淸水合於泗水, 故泗水亦得淸水之名. 水經註 “泗水過下邳縣西, 又東南得睢水口. 泗水又東南入于淮水, 故謂之睢淸口.”러라
尉元 以書 喻宋徐州刺史王玄載하니 玄載棄下邳走注+沈攸之留王玄載戍下邳, 因領徐州刺史.어늘 魏以辛紹先爲太守하니
紹先 不尙苛察하고 務擧大綱하여 敎民治生禦冦而已 由是 下邳安之러라
宋宿豫戍將淮陽太守 皆棄城走하니 慕容白曜 進屯瑕丘하니 宋將軍房法壽 襲據盤陽以降注+法壽, 崇吉從兄也.이어늘 白曜 表韓麒麟與法壽 對爲冀州刺史하고
白曜引兵하여 攻崔道固於歴城不下하고 攻沈文秀於東陽하니 文秀請降이러니 魏兵 入城暴掠하니 文秀 悔怒拒守하고 撃魏兵破之하다
魏主李夫人生子宏하니 馮太后 自撫養之러니 遂還政於魏主한대
魏主始親國事하여 勤於爲治하여 賞罰嚴明하고 拔淸節 黜貪汚하니 於是 魏之牧守 始有以廉潔著聞者러라
宋主遣使以金千兩으로 贖義陽王昶于魏한대 魏人不許하고 使昶與宋主書하여 爲兄弟之儀하니 宋主責其不稱臣하고 不答이어늘
魏主復使昶與宋主書한대 昶曰 臣本彧兄이라 未經爲臣하니 若改前書 是爲二敬이요 茍或不改 彼所不納이니 臣不敢奉詔니이다하니 乃止注+旣稱臣於魏, 復稱臣於宋, 是爲二敬也. 陳濟曰 “劉昶先與宋主書, 爲兄弟之儀而又改而稱臣, 則是二其敬也.”하다
魏人愛重昶하여 凡三尙公主하다
十二月 하다
常珍奇 雖降於魏 實懐二心이러니 劉勔 復以書招之하니라
會魏西河公石 攻汝陰이어늘 珍奇乗虛하여 燒刼懸瓠하고 驅掠上蔡安成平輿三縣民하여 屯於灌水하니 魏人攻之한대 珍奇犇壽陽注+晉志, 上蔡․安成․平輿三縣, 竝屬豫州汝南郡. 水經註 “灌水導源廬江金蘭縣西北東陵鄕大蘇山, 東北逕蓼縣故城西, 而北注決水.”하다


나라 태종太宗 명제明帝 유욱劉彧 태시泰始 3년이고, 북위北魏 현조顯祖 헌문제献文帝 탁발홍拓跋弘 황흥皇興 원년이다.
[] 봄 정월에 북위北魏나라 회북淮北의 4예주豫州회서淮西 지역을 빼앗았다.
[] 나라 장영張永 등이 성(하개성下礚城)을 버리고 밤에 도주하니 마침 하늘에서 크게 눈이 내려 사졸士卒들이 얼어 죽은 자가 태반이나 되고 손발이 잘린 자가 열 명 중에 일고여덟이었다.
울원尉元(울원)은 그 선두를 요격하고 설안도薛安都는 그 후미를 쳐서 여량呂梁 동쪽에서注+① ≪水經註≫에 “泗水는 彭城에서 동남쪽으로 가서 呂縣 남쪽을 지난다. 泗水 가에 石梁(돌다리)이 있으므로, 呂梁이라고 한다.” 하였다. 장영 등을 크게 격파하니 죽은 자가 1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시체가 60여 리에 깔렸고 내버린 물자와 기계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송주宋主(유욱劉彧)는 채흥종蔡興宗을 불러서 패전을 알리는 글을 그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장영張永심유지沈攸之는 모두 죄에 걸려 폄직되고 회음淮陰으로 돌아가 주둔하였다.
나라가 이로부터 회북淮北의 4注+② 淮北 4州는 靑州․冀州․徐州․兗州를 말한다. 豫州의 淮西 지역을 汝南郡․新蔡郡․譙郡․梁郡․陳郡․南頓郡․潁川郡․汝南郡․汝陰郡을 말한다. 예주豫州회서淮西 지역을 잃었다.
[] 배자야裴子野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태종太宗(유욱劉彧) 초기에는 위엄과 명령이 미친 곳이 100리도 못 되었으나 정성스러운 마음을 열어서 반란을 평정平定할 수 있었다.
이윽고 남은 위엄을 드러내고자 하여注+① 賈는 音이 古니, 판다는 뜻이다. 군사를 명분 없이 출동하여 회하淮河 이북이 대번에 오랑캐 지역이 되었다. 만일 이전의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교만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았다면 세 반란이注+② “三叛”은 薛安都, 畢衆敬, 常珍奇를 말한다. 어찌 일어났겠는가.”
[] 북위北魏 동평왕東平王 탁발도부拓跋道符注+① 拓跋道符는 拓跋翰의 아들이다. 장안長安에서 반란했다가 복주伏誅되었다.
[] 나라 청주靑州기주冀州가 평정되었다.
[] 예전에 심양尋陽이 평정되고 나서 송주宋主(유욱劉彧)는 심문수沈文秀의 아우 심문병沈文炳을 보내어 조서詔書를 가지고 심문수를 유시하고, 또 장군將軍 유회진劉懐珍을 보내어 병사 3천을 거느리고 심문병과 함께 가게 하여 나아가 구성朐城注+① 朐城은 漢나라 東海郡의 朐縣城이다. 점거하였다.
마침 심문수가 청주자사靑州刺史 명승고明僧暠를 공격하여 패주시키니, 유회진의 군사들이 마음속으로 두려워하여 욱주郁洲를 지키기를 원하였다.注+② 明은 姓이고, 僧暠는 그 이름이다. 지난해에 明僧暠가 군사를 일으켜서 沈文秀를 공격하여 建康에 호응하였다. ≪水經註≫에 “朐山 서쪽 가에 朐縣의 옛 성이 있다. 동북쪽 바다 가운데 큰 洲가 있으므로, 그곳을 郁洲라고 하였다.” 하였다.
유회진이 말하기를 “심문수가 청주靑州를 가지고서 삭로索虜(북위北魏)에게 귀순하려 하니, 헤아려보면 지역의 사민士民들이 어찌 마음에 달가워하여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오랑캐가 되려 하겠는가.注+③ 計는 헤아린다는 뜻이다. 靑州는 齊 지역에 있으므로, 齊라고 한 것이다. 지금 무기를 들고 곧바로 전진하여 조정의 위엄과 은덕을 펼치면 여러 성에 글을 화살에 매어 쏘아 보내기만 해도 항복할 것이다. 어찌 전진하지 않고 이곳을 지키면서 스스로 저지하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전진하여 심문병을 보내 성에 들어가게 하였는데 심문수는 여전히 항복하지 않았다. 군사들이 말하기를 “우선 영루營壘를 견고히 지키고 틈을 엿보아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유회진이 말하기를 “지금 군사는 적고 양식은 고갈되어 고립무원의 군대를 이끌고 깊이 들어왔으니, 바로 정예병을 가지고 신속히 전진하여 그들이 대비하지 않은 때에 습격해야 한다.”라고 하고 기병 100을 보내 그 성을 습격하여 함락시켰다. 심문수는 항복을 청하고 기주자사冀州刺史 최도고崔道固 역시 항복하니 송주宋主(유욱劉彧)는 그 지위를 모두 회복시켜주었다.
[] 북위北魏의 장군 모용백요慕容白曜나라 청주靑州를 침입하여 4을 빼앗았다.
[] 나라 심유지沈攸之팽성彭城에서 돌아올 적에 왕현재王玄載를 남겨서 하비下邳를 수비하게 하고, 심소沈韶숙예宿豫를 지키게 하고, 수릉睢陵(수릉)․회양淮陽에 모두 병사를 남겨 지키게 하였다.注+① 王玄載는 王玄謨의 從弟이다. 睢는 音이 雖이다. 睢陵縣은 前漢 때에는 臨淮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下邳郡에 속하였고, 宋 孝武帝 大明 원년(457)에 바뀌어 齊陰郡에 속하였다.
이때 신찬申纂무염無鹽을 수비하고, 유휴빈劉休賓양추梁鄒注+② 梁鄒縣은 漢나라 때에 濟南郡에 속하였다. 수비하고, 방숭길房崇吉승성升城을 수비하고, 장당張讜단성團城을 수비하여注+③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東太原郡의 太原縣은 升城을 治所로 삼았다.” 하였다. ≪水經註≫에 의거하면 東莞郡은 團城을 치소로 삼았으니, 단성은 春秋時代 鄆邑 서남쪽 40里에 있다. 비성肥城미구麋溝원묘垣苗注+④ 肥城縣은 前漢 때에는 泰山郡에 속하였고, 後漢 때에는 濟北郡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없앴고, 宋나라 때에 다시 濟北郡을 肥城에 설치하였다. ≪魏書≫ 〈地形志〉에 “糜溝․垣苗 두 城 역시 東太原郡 太原縣 경계에 있다.” 하였다. 군대와 함께 모두 북위北魏귀부歸附하지 않았으니, 북위北魏에서는 장군將軍 장손릉長孫陵모용백요慕容白曜注+⑤ 慕容白曜는 燕王 慕容皝의 玄孫이다.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청주靑州로 가게 하였다.
모용백요가 무염에 이르러 공격하려 하자, 장수와 보좌들이 모두 말하기를 “공성 기구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서둘러 진격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는데,
사마司馬 역범酈範이 말하기를 “경무장 군대로 깊이 들어왔으니 어찌 지체해서야 되겠습니까. 또 신찬은 반드시 우리의 군대가 빨리 와서 포위하여 공격할 겨를이 없을 것이라 여겨서 대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생각지 않았을 때에 출동하면 한 번 북소리로 함락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모용백요가 그 말을 따라서 병력을 인솔하여 거짓으로 후퇴하고 밤에 진격하여 무염을 함락하고 신찬을 죽이고, 성안의 사람들을 전부 군사들에게 상으로 주려 하였는데,
역범이 말하기를 “ 땅은 지세상 험요한 지역이니, 마땅히 원대한 경략經略을 세워야 합니다. 지금 인심人心이 아직 융화되지 않고 성들이 연합하여 서로 관망하면서 모두 항거하여 지킬 뜻이 있으니 은덕과 신뢰로 품어주지 않으면 쉽게 평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모용백요가 말하기를 “좋다.”라고 하고 모두 사면해주었다.
장차 비성을 공격할 적에 역범이 말하기를 “비성이 비록 작으나 공격하는 데 오랜 시일이 걸릴 것이니注+⑥ 引은 길다는 뜻이다. 함락시키더라도 군세軍勢가 불리해질 것이고 함락하지 못하면 군대의 위세가 꺾일 것입니다. 저들은 무염이 격파된 것을 알고서 겁을 먹고 있을 것이니 만일 편지를 화살에 묶어 쏘아 보내어 타이른다면 항복하지 않으면 흩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모용백요가 그 말을 따랐는데 비성이 과연 무너지니 곡식 30만 을 얻었다. 모용백요가 역범에게 말하기를 “이번 출동에서 을 얻었으니 지역은 평정할 거리도 못 된다.”라고 하고, 마침내 원묘․미구 두 수보戍堡를 빼앗고 10일 동안에 4개 을 함락시키니 위엄이 지역에 떨쳤다.
[] 나라가 채흥종蔡興宗영주자사郢州刺史로 삼았다.
[] 북위北魏승성升城을 빼앗았다.
[] 나라 방숭길房崇吉승성升城을 수비하였는데 싸울 수 있는 병사가注+① 勝(감당하다)은 음이 升이다. “勝兵”은 5가지 병기를 잡고 싸울 수 있음을 말한다. 700명에 불과하였다. 북위北魏 모용백요慕容白曜가 긴 포위망을 구축하여 공격하여 3개월 만에야 함락시켰다. 그들이 항복하지 않은 것에 분개하여 그들을 모두 파묻으려 하니,
참군사参軍事 한기린韓麒麟이 간언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여기서부터 동쪽의 여러 성들이 모두 사람들마다 지켜서 공격할 수 없게 됩니다.”라고 하자, 모용백요가 마침내 중지하니 방숭길이 몸을 빼어 도망갔다.
방숭길의 모친과 신찬申纂의 아내는 북위北魏 제주자사濟州刺史 노도세盧度世와는 외가 친족이었으나 이미 소원해졌다. 북위北魏에 포로로 잡혀서는 노도세가 받들어 모시기를 매우 공손하게 하고 물자도 넉넉하게 지급하였다.
노도세가 규문閨門의 안에서 온화하고 예절이 있었으니 온 친족이 화목하여 부유하고 곤궁함을 함께하였다.
[] 나라 최도고崔道固가 성문을 닫고 북위北魏에 항거하였고, 심문수沈文秀注+① 沈文秀는 吳興 武康 사람이다. 사자를 보내 북위北魏에게 병사를 청하고 영접하여 항복하고자 하니, 모용백요慕容白曜가 병사를 보내 구원하려 하였다.
역범酈範이 말하기를 “심문수沈文秀의 가족과 묘소가 모두 강남江南에 있으며, 병사 수만 명을 보유한데다 성이 굳건하며 갑주가 튼튼하니, 전황이 유리하면 항거할 것이고 불리하면 도망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침저녁에 닥칠 긴급함이 없으니 어찌 서둘러 구원을 청하겠습니까. 또 그 사자가 시선을 내리고 부끄러운 기색이 있고 말이 번잡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니, 이는 반드시 속임수를 써서 우리를 유혹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는 안 됩니다.
우선 역성歴城을 차지하고 반양盤陽을 쳐서 승리하고 양추梁鄒를 함락시키고 낙릉樂陵을 평정한 뒤에注+② 般陽縣은 漢나라 때에는 濟南郡에 속하였다. 晉 武帝가 平原을 나누어 樂陵郡을 설치하였고, 宋 文帝가 옛 千乘 지역에 樂陵郡을 설치하였다. 군대를 머물렀다가 천천히 전진하면 심문수가 복종하지 않는 것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모용백요가 마침내 중지하니 심문수가 과연 항복하지 않았다.
[] 북위北魏 울원尉元(울원)이 다음과 같이 표문表文을 올렸다. “팽성彭城나라의 중요한 울타리입니다. 많은 병력과 곡식이 있지 않으면 굳게 지킬 수가 없으니, 만약 팽성에 물자를 저축한 것이 이미 충분하다면 나라 사람들이 감히 회북淮北을 엿보지 못할 것입니다.
들이 팽성을 향해 올 적에는 반드시 청수淸水사수泗水를 경유하여 숙예宿豫를 지나고 하비下邳를 거치며, 청주靑州에 나갈 적에도 하비下邳기수沂水를 경유하여 동안東安을 지나게 되니 이곳들이 모두 요충지입니다.注+① ≪漢書≫ 〈地理志〉에 “沂水는 泰山에서 발원하여 蓋縣 남쪽으로 가서 下邳에 이르러 泗水로 들어가는데 5개 郡을 지나 6백 里를 간다.” 하였다. 胡三省이 말하기를 “東安縣은 前漢 때에는 城陽國에 속하고, 後漢 때에는 琅邪郡에 속하고, 晉나라 때에는 東莞郡에 속하였는데, 惠帝 元康 7년(297)에 東莞을 나누어 東安郡을 설치하였다.” 하였다.
지금 먼저 이곳들을 평정하면 청주靑州기주冀州를 공격하지 않아도 함락시킬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청주․기주를 비록 함락시킨다 해도 백성들이 고개를 돌려 나라를 바라보며 여전히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품게 될 것입니다.
은 생각건대 마땅히 청주․기주로 향하는 군사를 철수하고 먼저 동남쪽을 평정하여 유욱劉彧( 명제明帝)이 북쪽을 넘보려는 뜻을 단념시키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남쪽(나라)을 바라보는 마음을 단절시키면 회북淮北 지역이 스스로 귀순할 것이니, 잠시의 노고로 영원히 편안할 것입니다.
만일 하늘에서 비를 내려 강물이 불어난 뒤에 저들이 혹은 〈배를 통해〉 양식을 운반하고 병사를 보충하여 진격할 것을 꾀한다면 회수淮水 가의 백성들이 순식간에 생각을 바꿀 것이니 청주․기주를 쉽사리 함락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나라 심유지沈攸之가 스스로 쌀을 운송하여 하비下邳에 이르자, 북위北魏 사람들이 간첩을 보내어 속여 말하기를 “설안도薛安都가 항복하길 원하여 나라 군대를 청하여 영접하고자 한다.”라고 하였는데, 오희呉喜가 달려갈 것을 청하니, 심유지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윽고 와서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더욱 많아지자, 심유지가 말하기를 “그대들이 이미 이쪽에 성심을 가지고 있으니, 만약 설서주薛徐州(설안도薛安都)의 자제子弟들과 함께 올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즉시 모두 본향本鄕현령縣令으로 임명하여 마음에 원하는 바를 이루어줄 것이지만, 만일 그와 같이 하지 못한다면 공연히 왕래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다시 오지 않았다.
심유지는 군주軍主注+① 한 군대의 장수를 軍主라고 한다. 진현달陳顯逹을 보내 1천 명을 거느리고 하비를 도와 지키게 하고 되돌아왔다.
[] 나라가 원찬袁粲복야僕射로 삼았다.
[] 가을 8월에 나라가 중령군中領軍 심유지沈攸之를 보내어 팽성彭城을 공격하게 하고, 장군將軍 소도성蕭道成을 보내서 회음淮陰을 진무하게 하였다.
[] 송주宋主(유욱劉彧)는 다시 심유지沈攸之 등을 보내어 팽성彭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심유지가 청수淸水사수泗水가 한창 가물어서 〈배로〉 군량을 수송하는 것이 이어지지 않는다 하여 안 된다고 고집하였는데, 송주宋主가 노하여 강제로 보내고, 행서주사行徐州事 소도성蕭道成을 보내어 회음淮陰에 진수하게 하였는데, 소도성이 호걸들을 거두어 양성하여 빈객이 비로소 성대하게 되었다.
북위北魏팽성彭城으로 쳐들어갈 적에 원숭조垣崇祖注+① 垣崇祖는 垣護之의 從子이다. 부곡部曲을 거느리고 도주하여 구산朐山에 웅거하니, 소도성이 그를 수주戍主(한 지역을 지키는 장수)로 삼았다. 구산은 바닷가의 외진 곳이어서 인심이 안정되지 못하니, 북위北魏 사람들이 원숭조의 배반한 장수를 얻어서 기병騎兵 2만을 보내어 습격하였다.
원숭조가 막 나가서 을 전송하고 있었는데 성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배를 내려 떠나가려 하였다. 원숭조가 돌아와서 복심腹心들에게 말하기를
“오랑캐(북위北魏)가 오랫동안 준비한 것이 아니라 배반자의 말을 따라서 왔을 뿐이니 속이기가 쉽다. 지금 100여 명을 얻어서 성으로 돌아간다면 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들은 속히 여기를 떠나 2 밖의 지역으로 갔다가 돌아오면서 ‘애당艾塘의인義人들이注+② 艾塘은 地名이니, 東海郡 朐山縣 서북쪽 10里에 있다. 義人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이다. 宋나라 사람들은 淮北에서 군대를 일으켜 北魏에 항거한 이들을 義人이라 하였다. 이미 오랑캐를 격파하였으니 수군戍軍(구산을 지키는 군대)이 속히 출발하는 것을 기다려 오랑캐를 추격하라.’고 크게 외쳐라.”라고 하였다.
그렇게 하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과연 기뻐하여 다투어 해안으로 올라왔다. 원숭조가 그들을 이끌고 들어가 성을 점거하고 병약자들을 보내어 섬으로 들여보내고 사람들에게 횃불 두 개를 가지고 산으로 올라가 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게 하니, 북위北魏의 군대가 마침내 퇴각하였다.
원영조垣榮祖 또한 팽성에서 구산으로 도주하여 마침내 회음에서 소도성에게 의탁하였고, 유승사劉僧嗣부곡部曲 2천 명을 거느리고서 섬에 머물렀는데, 소도성이 또한 불러서 위무하였다.
[] 북위北魏가 큰 불상佛像을 만들었다.
[] 높이가 43이었다. 10만 근, 황금黄金 6백 근을 사용하였다.
[] 북위北魏 사람들이 나라 군대를 막아서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마침내 하비下邳를 점령하였다.
[] 북위北魏 울원尉元(울원)이 병사를 보내 심유지沈攸之를 막게 하고, 또 심유지가 예전에 패전하여 포로가 된 사졸士卒 중에 동상凍傷으로 다리가 잘려注+① 瘃은 陟玉의 切이니, 凍傷이다. 墮는 발 또는 발가락이 떨어져 나감이다. 무릎으로 다니는 자들을 심유지에게 돌려보내어 나라 군대의 사기를 저해시켰다. 송주宋主(유욱劉彧)가 얼마 후 심유지 등을 파견한 것을 후회하여 다시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사신이 이르기 전에 심유지가 수청구睢淸口注+② 淸水가 泗水와 합류하므로, 泗水 역시 淸水의 이름을 얻었다. ≪水經註≫에 “泗水는 下邳縣 서쪽을 지나서 또 동남쪽으로 가서 睢水口에 도달한다. 泗水는 또 동남쪽으로 가서 淮水로 들어가므로, 睢淸口라고 한다.” 하였다. 도착하였는데, 북위北魏 병사들이 공격하자 나라 군대가 무너져서 도로 회음淮陰으로 도주하니 버린 물자와 기계가 으로 헤아렸다.
울원이 편지를 보내 나라 서주자사徐州刺史 왕현재王玄載를 타이르니 왕현재는 하비下邳를 버리고 도주하자注+③ 沈攸之는 王玄載를 남겨서 下邳를 수비하게 하고, 이어서 徐州刺史를 겸직하게 하였다., 북위北魏신소선辛紹先태수太守로 삼았다.
신소선이 가혹하게 살펴서 다스리는 것을 숭상하지 않고 큰 강령만을 힘써 거행하여 백성을 교화하고 생업을 다스리고 도적을 막을 뿐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하비가 안정되었다.
나라 숙예宿豫수장戍將회양태수淮陽太守가 모두 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모용백요慕容白曜가 진군하여 하구瑕丘에 주둔하니 나라 장군將軍 방법수房法壽注+④ 房法壽는 房崇吉의 從兄이다. 반양盤陽을 습격하여 점거하고 모용백요에게 항복하니, 모용백요가 표문을 올려서 한기린韓麒麟방법수房法壽를 함께 기주자사冀州刺史로 삼게 하였다.
모용백요는 군사를 이끌고 역성歴城에서 최도고崔道固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고, 동양東陽에서 심문수沈文秀를 공격하였는데, 심문수가 항복을 청하였다. 북위北魏 병사들이 에 들어와서 노략질을 하니 심문수는 후회하고 분노하여 성문을 닫고 지키고서 북위北魏 병사를 격파하였다.
[] 위주魏主(탁발홍拓跋弘)가 비로소 정사를 친히 다스렸다.
[] 위주魏主(탁발홍拓跋弘)의 이부인李夫人이 아들 탁발굉拓跋宏을 낳았으니, 풍태후馮太后가 친히 탁발굉을 양육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정사를 위주魏主에게 돌려주었는데,
위주魏主가 비로소 국사를 친히 다스려서 정사를 행하는 데 부지런하여 상벌賞罰이 엄격하며 분명하고, 청렴하고 절개 있는 인물을 발탁하고 탐욕스럽고 더러운 인물을 축출하였다. 이에 북위北魏의 목민관들 중에 비로소 청렴결백함으로 드러나고 알려지는 자가 있게 되었다.
[] 겨울 10월에 나라가 황금黃金을 가지고 가서 북위北魏에서 의양왕義陽王 유창劉昶을 돌려받고자 하였다.
[] 송주宋主(유욱劉彧)가 사신을 보내 황금 1천 을 가지고 가서 의양왕義陽王 유창劉昶북위北魏에서 돌려받고자 하였는데 북위北魏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고 유창을 시켜서 송주宋主에게 편지를 보내어 형제兄弟 간의 예의를 펴게 하였다. 송주宋主는 유창이 하지 않은 것을 꾸짖고 회답하지 않았다.
위주魏主(탁발홍拓跋弘)는 다시 유창을 시켜 송주宋主에게 편지를 보내게 하였는데, 유창이 말하기를 “은 본래 유욱의 형입니다. 이 된 적이 없으니 만약 이전 편지를 고친다면 이는 두 나라 군주를 공경하는 것이 되고 만약 고치지 않는다면 그가 받아들이니 않을 것이니, 은 감히 조서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니, 마침내 중지하였다.注+① 이미 北魏에 신하를 칭하고 다시 宋나라에 신하를 칭하면 이는 양쪽을 공경하는 것이 된다. 가 말하기를 “劉昶이 먼저 宋主에게 편지를 보내어 兄弟 간의 예의를 펴서 임금으로 예우하지 않았는데, 또 고쳐서 臣이라고 稱하면 그 공경을 양쪽으로 하는 것이다.” 하였다.
북위北魏 사람들은 유창을 애지중지하여 세 번이나 공주와 혼인시켰다.
[] 12월에 상진기常珍奇북위北魏를 배반하고 나라에 귀순하였다.
[] 상진기常珍奇가 비록 북위北魏에 항복했으나 두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유면劉勔이 다시 편지로 상진기를 불렀다.
마침 북위北魏 서하공西河公 탁발석拓跋石여음汝陰을 공격하자 상진기가 빈틈을 이용하여 현호懸瓠를 불 지르고 약탈하고 상채上蔡안성安成평여平輿 3注+① ≪晉書≫ 〈地理志〉에는 上蔡․安成․平輿 3縣이 모두 豫州 汝南郡에 속해 있다. ≪水經註≫에 “灌水는 廬江 金蘭縣 서북쪽의 東陵鄕 大蘇山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가서 蓼縣의 故城 서쪽을 지나 북쪽으로 決水로 흘러간다.” 하였다. 백성들을 위협하여 약탈하고서 관수灌水에 주둔하였다. 북위北魏 사람들이 공격하였는데 상진기는 수양壽陽으로 도주하였다.


역주
역주1 내가……부끄럽다 : 宋 明帝 泰始 2년(466)에 明帝가 劉子勛을 평정하고 유자훈에게 호응하여 군사를 일으킨 淮北에 위엄을 보이고자 張永과 沈攸之에게 5만 군사를 거느리고 薛安都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蔡興宗이 큰 병력을 보내면 설안도가 의심하여 배반하고 北魏를 끌어들여 후환이 될 것이라 하였다. 이때 宋나라 군대가 北魏의 군대와 설안도에게 크게 패하자 명제가 채흥종에게 부끄러워한 것이다.
역주2 索(삭)虜 : 魏晉南北朝時代 때 南朝 사람들이 北朝 사람들을 천시해서 부르던 칭호이다. 索頭․索頭虜라고도 하는데, 북조 사람들이 辮髮한 것을 이르는 말이다. 북조에서는 남조를 島夷, 鱗介라고 칭하였다.
역주3 三齊 : 秦나라가 망한 뒤 項羽가 齊國의 옛 지역을 나누어 齊․膠東․濟北 3國으로 分封한 곳이다. 모두 지금의 山東 東部에 있는데, 이를 泛稱으로 三齊라 한다.
역주4 魏作大像 : “‘大像’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부처에게 아첨한 것을 나무란 것이다. ‘作大像’이라고 기록한 것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作大像’이라고 기록한 것은 3번이다(이해(467), 唐나라 則天武后 때 2번 기록하였다.).[書大像 何 譏媚佛也 書作大像始此 終綱目書作大像者三(是年 唐武氏再書)]” ≪書法≫
역주5 魏主始親政事 : “馮太后가 정사를 전담한 것이다.[太后専也]” ≪書法≫
역주6 宋以金贖義陽王昶于魏 : “이때에 北魏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宋나라의 의리를 인정해준 것이다. 비록 인정해주었으나 또한 애석해한 것이다. 황금을 가지고 가서 劉昶을 돌려받고자 한 것은 의리라고 말할 수 있으나, 유창이 臣을 칭하지 않은 것으로 끝내 회답하지 않은 것은 의리를 끝까지 하지 못한 것이다.[於是魏人不許 則其書何 予宋義也 雖予之也 亦惜之也 以金贖昶 可謂義矣 而以不稱臣 故終以不答 則爲義不終矣]” ≪書法≫
역주7 陳濟 : 1363~1424. 明나라 때 史學家로 字는 伯載이고 武進 사람이다. ≪資治通鑑綱目集覽正誤≫를 지었다.
역주8 (不答若)[不若君] : 저본에는 ‘不答若’으로 되어 있으나, ≪御批資治通鑑綱目≫에 의거하여 ‘不若君’으로 바로잡았다.
역주9 常珍奇叛魏歸宋 : “‘歸宋’은 바름으로 돌아온 것이다. 반드시 ‘叛魏’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반복한 것을 미워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반복한 것을 미워하였으니, 常珍奇가 北魏에 항복했을 적에 ‘叛(배반했다)’이라고 기록했고, 그가 宋나라에 귀순할 적에도 ‘叛’이라고 기록하였다. 北魏에서 歴城을 함락했을 적에는 ‘奔(도주했다)’이라고 기록했으니, 孟逹을 기록한 것과는 크게 다르다(蜀漢 後主 建興 5년(227)에 孟逹에게는 ‘叛’이라고 기록하지 않고 ‘來歸(귀순해 왔다)’라고 기록한 것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진기가 宋나라에 귀순한 것에 ‘叛魏’라고 기록하고(이해(467)), 陳伯이 梁나라에 귀순한 것에 ‘叛魏’라고 기록하고(丙戌年(506)), 趙匡賛과 侯益이 漢나라로 돌아왔을 적에 ‘叛蜀(蜀을 배반했다)’이라고 기록하였으니(戊申年(948)), 모두 그 배반을 미워한 것이다.[歸宋 反正也 必書叛魏 何 惡反覆也 綱目惡反覆 於其降魏也書叛 其歸宋也亦書叛 及魏拔歴城也 則書奔 與書孟逹大異矣(據漢後主建興五年 蓋逹不書叛 書來歸) 是故 珍奇歸宋書叛魏(是年) 陳伯之歸梁書叛魏(丙戌年) 趙匡賛侯益還漢書叛蜀(戊申年) 皆惡其反覆者也]” ≪書法≫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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