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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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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年이라
趙建武六年이라
春正月 司空庾亮하니 以何充爲中書令하고 庾翼都督江荆等軍州事하다
時人 疑翼年少하여 不能繼其兄이러니 悉心爲治하여 戎政 嚴明하고 数年之間 公私充實하니 人皆稱其才러라
宇文逸豆歸 忌翰才名한대 乃陽狂乞食하니 舉國 賤之하여 不復省録이라 以故 得往來自遂하여 山川形便 皆黙記之注+省, 察也, 視也. 錄, 采也, 收也, 記也.하다
燕王皝 以翰因猜嫌出奔하여 雖在他國이나 常潜爲燕計注+如柳城之戰是也.라하여 乃遣商人王車하여 通市於宇文部以迎之하다
遂竊逸豆歸名馬하고 携其二子逃歸하니 大喜하여 厚遇之러라
有星孛于太微하다
◑三月 代始都雲中하다
◑秋 하다
趙王虎遺漢主壽書하여 欲連兵入寇하여 中分江南하니 壽大喜하여 集士卒爲舟師하여 大閲於成都注+秦時蜀守李冰, 穿二江成都中, 皆可行舟.어늘
龔壯 諫曰 陛下與胡通 孰若與晉通이니잇고 豺狼也 旣滅晉이면 不得不北面事之 若與争天下 則彊弱不敵하니 危亡之勢也니이다
群臣 亦皆叩頭泣諫하니 壽乃止하다
以爲人之行 莫大於忠孝라하여 旣報父叔之仇注+謂假手於壽, 以夷李特之子孫也.하고 又欲使壽事晉호되 壽不從이라
乃詐稱耳聾하고 辭歸하여 以文籍自娯하고 終身不復至成都하다
趙大發兵하여 以伐燕이어늘 燕人 襲之하여 入趙髙陽하니 趙師還하다
趙王虎 合兵五十萬하고 具船萬艘하여 自河通海하여 運榖千一百萬斛于樂安城注+樂安, 郡名, 屬靑州.하고 徙遼西, 北平, 漁陽萬餘户于兗, 豫, 雍, 洛注+石虎置司州於鄴, 以晉之司州爲洛州.하고 自幽州以東으로 至白狼 大興屯田注+白狼縣, 漢屬北平郡, 晉省. 水經註 “白狼水出白狼縣東南, 北逕白狼山, 又東北逕昌黎縣故城西, 又北逕黃龍城東, 又東北出, 東流爲二水, 右水, 卽渝水. 地理志曰 ‘渝水, 自塞南入海. 一水, 東北出塞, 爲白狼水, 又東南流, 至房縣, 注于遼.’”하고
括取民馬호되 敢匿者 腰斬하여 凡得四萬餘匹하여 大閱於宛陽하여 欲以擊燕하다
燕王皝曰 虎自以樂安城防守重複이라하여 薊城南北 必不設備리니 今若詭路하여 出其不意하면 可盡破也라하고
遂帥諸軍하고 入自蠮螉塞하여 直抵薊城하여 破武遂津하고 入髙陽하여 所至 焚燒積聚하고 略三萬餘家而去하니 趙兵 乃還注+蠮, 一結切. 螉, 烏公切. 蠮螉, 細腰蜂也, 以爲塞名. 自龍城, 取西道, 入蠮螉塞. 武遂縣, 前漢屬河間國, 後漢․晉屬安平國, 時屬武邑郡. 易水過其南, 曰武遂津. 積, 子賜切.하다
趙王虎 以韜爲太尉하여 與宣으로 迭日省可尚書奏事하고 不復啟白하니
司徒申鍾 諫曰 太子 職在視膳하니 不當預政이니이다 庶人邃覆車未遠也注+上三年, 虎廢邃爲庶人, 殺之. 且二政分權 鮮不階禍하니 愛之不以道 適所以害之也니이다 虎不聽注+左傳, 辛伯諗周桓公曰 “竝后匹嫡, 兩政耦國, 亂之本也.” 兩政, 卽二政. 此指宣․韜迭日决事.하다
中謁者令申扁 有寵於虎 宣亦昵之하여 使典機密注+中謁者, 宦官也.하니 虎旣不省事하고 而宣, 韜皆好酣飲畋獵이라
由是 除拜生殺 皆决於扁하니 自九卿以下 望塵而拜러라
遣使如趙하니 趙人 報之하다
漢主壽致書於後趙王虎할새 署曰趙王石君이라하니 虎不悦하다
中書監王波曰 壽旣僭大號하니 今以制詔與之하면 彼必酬返하리니 不若復爲書與之니이다
挹婁國 獻楛矢, 石砮於趙注+挹婁, 古肅愼氏之國也. 楛矢, 長尺有咫. 其國東北, 有山出石, 其利入鐵, 取以爲砮. 杜佑曰 “挹婁國, 在不咸山北, 夫餘東北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不知其北所極, 廣袤數千里. 人衆雖少, 而多勇力, 處山險, 善射. 弓長四尺, 力如弩, 矢用楛, 長尺八寸, 靑石爲鏃, 所謂石砮也. 其取石也, 必先祈神.” 楛, 侯古切, 木名, 似蓍. 砮, 音奴, 矢鏃也.하니 波因請以遺漢하고 曰 使其知我能服遠方也니이다
虎從之하여 遣漢亡將李閎하여 歸報하니 至成都 壽下詔曰 羯使來庭하여 貢其楛矢라하니 虎聞之하고하여 黜波以白衣領職하다


[] 나라(동진東晉) 현종顯宗 성황제成皇帝 함강咸康 6년이다.
[] 나라(후조後趙) 태조太祖 석호石虎 건무建武 6년이다.
[] 봄 정월에 사공司空 유량庾亮하니, 하충何充중서령中書令으로 삼고 유익庾翼도독강都督江형등군주사荆等軍州事로 삼았다.
[] 이때 사람들은 유익庾翼이 나이가 젊어서 형 유량庾亮을 계승하지 못할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런데 유익이 마음을 다하여 정치를 해서 군정軍政이 엄숙하고 분명하며 수년 사이에 공사간公私間의 저축이 충실充實하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재능을 칭찬하였다.
[] 모용한慕容翰우문부宇文部에서 나라(전연前燕)로 돌아갔다.
[] 우문일두귀宇文逸豆歸모용한慕容翰의 재주와 명성을 시기하자, 모용한이 마침내 거짓으로 미친 체하고 걸식乞食을 하니, 온 나라가 그를 천하게 여겨서 다시는 살펴보고 기억하지注+① 省은 살핌이고 봄이다. 錄은 채택함이고 거둠이고 기억함이다. 않았다. 이 때문에 모용한은 여러 곳을 자유롭게 왕래하며 산천의 지세를 모두 묵묵히 기억해두었다.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은 “ 항상 은밀히 나라를 위하여 계책을 세운다.”注+② 〈“常潜爲燕計”는〉 예컨대 과 같은 것이 이에 해당한다. 하여 마침내 상인商人왕차王車를 보내어 우문부宇文部에서 물건을 교역하다가 그를 맞이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모용한이 마침내 우문일두귀의 명마名馬를 훔쳐 자신의 두 아들을 데리고 도망하여 돌아오니, 모용황이 크게 기뻐하여 후대하였다.
[] 패성孛星태미성太微星 주변에 나타났다.
[] 3월에 나라가 처음으로 운중雲中에 도읍하였다.
[] 가을에 나라(성한成漢)가 성도成都에서 크게 열병식을 하였다.
[] 조왕趙王 석호石虎한주漢主 이수李壽에게 글을 보내어 군대를 연합하여 나라(동진東晉)를 침략해서 강남 지방을 반으로 나누고자 한다 하니, 이수가 크게 기뻐하여 사졸士卒을 모아 수군水軍을 만들어서 성도成都에서 크게 열병식을 하였다.注+① 秦나라 때에 蜀郡太守 李冰이 성도 가운데에 두 개의 강을 파서 모두 배가 다닐 수 있게 하였다.
이에 공장龔壯하기를 “폐하가 오랑캐와 통하는 것이 어찌 나라와 통하는 것보다 낫겠습니까. 오랑캐는 시랑豺狼과 같으니, 나라를 멸망시키고 나면 우리는 북면北面하여 오랑캐를 섬기지 않을 수가 없고, 만약 오랑캐와 천하를 다투게 되면 강하고 약한 형세가 상대가 되지 않으니, 우리는 위태롭고 망하는 형세에 처할 것입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또한 머리를 조아리고 울며 간하니, 이수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공장은 생각하기를 “사람의 행실은 충성과 효도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여 이미 자기 아버지와 숙부의 원수를 갚고注+② 〈“旣報父叔之仇”는〉 李壽에게 손을 빌려서 李特의 자손을 멸함을 이른다. 또 이수로 하여금 나라를 섬기게 하고자 하였으나, 이수가 따르지 않았다.
이에 거짓으로 귀가 먹었다고 칭하고는 사양하고 돌아와서 글을 짓고 독서하는 것을 즐기며 종신토록 다시는 성도에 가지 않았다.
[] 겨울에 나라(후조後趙)가 크게 군대를 출동해서 나라(전연前燕)를 공격하였는데, 나라 사람이 나라를 기습해서 나라의 고양高陽으로 쳐들어가니, 나라 군대가 돌아왔다.
[]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병력 50만 명을 모으고 배 1만 척을 준비하여 황하에서 바다를 통하여 곡식 1천 1백만 곡을 낙안성樂安城(낙안성)으로注+① 樂安은 郡의 이름이니, 靑州에 속하였다. 운반하고 요서遼西, 북평北平, 어양漁陽의 1만여 연주兗州, 예주豫州, 옹주雍州, 낙주洛州注+② 石虎가 司州를 鄴城에 설치하고 晉나라의 司州를 洛州라 하였다. 옮겼으며, 유주幽州 동쪽에서부터 백랑현白狼縣까지注+③ 白狼縣은 漢나라 때는 北平郡에 속하였는데, 晉나라 때는 없앴다. ≪水經註≫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白狼水가 백랑현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白狼山을 지나가고 또 동북쪽으로 昌黎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나간다. 다시 북쪽으로 黃龍城 동쪽을 지나가고 또 동북쪽으로 나와 동쪽으로 흘러 두 물이 되니, 오른쪽 물은 바로 渝水이다. 〈地理志〉에 말하기를 ‘渝水는 塞外로부터 남쪽으로 가서 바다로 유입하는데, 한 줄기의 물은 동북쪽으로 가서 塞外로 나와 백랑수가 되고 또 하나는 동남쪽으로 흘러 房縣에 이르러서 遼水로 유입한다.’ 하였다.” 둔전屯田을 크게 일으켰다.
그리고 백성들의 말을 찾아내어 탈취하였는데 감히 말을 숨기는 자는 요참형腰斬刑에 처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4만여 필을 얻어서 완양宛陽에서 크게 열병식을 하여 나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이 말하기를 “석호石虎가 스스로 낙안성樂安城방위防衛가 중첩되어 〈견고하다〉 하여 계성薊城의 남쪽과 북쪽에 반드시 방비防備를 마련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제 만약 길을 속여서 적이 예상하지 않은 곳으로 출동하면 모두 격파할 수 있다.” 하였다.
마침내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열옹새蠮螉塞(열옹새)를 통해 들어가서 곧장 계성에 이르러 무수진武遂津을 격파하고 고양髙陽에 들어가서 이르는 곳마다 쌓아놓은 물자와 곡식을 불태우고 3만여 가호家戶를 노략질하고 떠나가니,注+① 蠮는 一結의 切이고 螉은 烏公의 切이다. 蠮螉은 허리가 가느다란 벌이다. 이로써 요새의 이름을 삼은 것인데, 龍城으로부터 서쪽 길을 따라 蠮螉塞로 들어간다. 武遂縣은 前漢 때에는 河間國에 속하였고, 後漢 때와 晉나라 때에는 安平國에 속하였는데, 이때 武邑郡에 소속되었고 易水가 그 남쪽을 지나가니, 이곳을 武遂津이라 하였다. 積는 子賜의 切이다. 나라 군대가 마침내 돌아갔다.
[] 나라(후조後趙)가 그 태자太子 석선石宣 및 아우 석도石韜에게 명하여 상서尚書에서 아뢰는 일을 번갈아 살피게 하였다.
[] 조왕趙王 석호石虎석도石韜태위太尉로 삼아 석선石宣과 함께 상서尚書에서 아뢰는 일을 하루씩 번갈아서 재결裁決하고 두 번 다시 자신에게 보고가 올라오지 않게 하니,
사도司徒 신종申鍾이 간하기를 “태자의 직책은 임금의 음식을 살펴보는 것이니, 정사에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서인庶人이 된 석수石邃의 실패한 전철前轍이 얼마 전에 있었고,注+① 위 3년에 石虎가 石邃를 폐하여 庶人으로 삼고 죽였다. 게다가 두 사람이 권력을 나누어 정사를 할 경우 의 계제가 되지 않는 경우가 적으니, 자식을 바른 로써 사랑하지 않으면 다만 자식을 해칠 뿐입니다.”注+② ≪春秋左氏傳≫을 살펴보건대 辛伯이 周나라 桓公에게 고하기를 “妾이 王后와 같고, 庶子가 嫡子와 대등하고, 政令이 두 곳에서 나오고, 大都가 國都와 같은 것은 禍亂의 張本이다.” 하였다. 여기에서 말한 “兩政”은 바로 “二政”이니, 이는 石宣과 石韜가 하루씩 번갈아 일을 결정함을 가리킨다. 하였으나, 석호가 듣지 않았다.
중알자령中謁者令注+③ 中謁者는 환관이다. 신편申扁이 석호에게 총애를 받았고, 석선 또한 그와 친하여 그에게 국사의 기밀을 맡게 하였다. 석호는 이미 일을 살펴보지 않았고, 석선과 석도 모두 술 마시고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 때문에 관직을 제수하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을 모두 신편이 결정하니, 구경九卿부터 그 이하의 관리들이 멀리서 신편이 탄 수레가 일으키는 먼지를 바라보며 절을 하였다.
[] 나라(성한成漢)가 사신을 나라(후조後趙)에 보내니, 나라 사람이 여기에 답하였다.
[] 한주漢主 이수李壽후조왕後趙王 석호石虎에게 편지를 보낼 적에 겉면에 “조왕趙王 석군石君”이라 쓰니, 석호가 이를 보고 기뻐하지 않았다.
중서감中書監 왕파王波가 말하기를 “이수가 이미 황제를 참칭僭稱하였으니, 이제 황제의 조서詔書 형식으로 그에게 답서答書를 보내면 그도 반드시 그와 같은 형식으로 답서를 보내올 것입니다. 그에게 다시 답서를 써서 주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마침 읍루국挹婁國에서 싸리나무 화살과 돌 쇠뇌를 나라에 바치니,注+① 挹婁는 옛날 肅愼氏의 나라이다. 싸리나무 화살은 길이가 한 자 남짓이다. 숙신씨의 나라는 동북쪽에 돌이 나오는 산이 있는데, 그 돌의 예리함은 쇠를 뚫을 수 있으니, 이것을 취하여 화살촉을 만든다. 杜佑가 말하였다. “挹婁國은 不咸山 북쪽에 있으니, 夫餘의 동북쪽 1천여 리 지점이고 큰 바닷가에 있으며 남쪽으로 北沃沮와 인접하였다. 그 북쪽은 넓이가 수천 리여서 끝을 알지 못한다. 거주하는 사람들은 비록 적으나 매우 용맹하고 힘이 세며 험한 산속에서 살고 활쏘기를 잘한다. 활의 길이가 4척인데 위력이 쇠뇌와 같다. 화살은 싸리나무를 사용하는데 길이가 1척 8촌이며, 푸른 돌로 화살촉을 만드는데 이른바 ‘石砮(돌촉)’라는 것이다. 그 돌을 채취할 때에는 반드시 신에게 먼저 기도한다.” 楛는 侯古의 切이니, 나무 이름인데 蓍草와 비슷하다. 砮는 음이 奴이니, 화살촉이다. 왕파가 그것들을 나라에 보낼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저들로 하여금 우리가 먼 지방을 복종시키고 있음을 알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석호가 그 말을 따라서 나라에서 도망해온 장수 이굉李閎으로 하여금 돌아가 답서를 전하게 하였다. 이굉이 성도成都에 이르자 이수가 조령을 내리기를 “갈족羯族(후조後趙)의 사신이 조정에 와서 조공朝貢으로 싸리나무 화살을 바쳤다.” 하였다. 석호가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왕파를 폐출廢黜해서 백의白衣(평민平民)의 신분으로 직책을 수행하게 하였다.


역주
역주1 慕容翰……歸於燕 : “이것을 쓴 것은 인정한 것이다. 어찌하여 인정하였는가. 근본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니, 아직도 祖國에 대한 마음이 있었다.[書 予之也 曷爲予之 不忘本也 猶有宗國之心焉]” ≪書法≫
역주2 모용한이……있으나 : 본서 咸和 8년(333) 조에 보면 慕容皝이 세자였을 때 慕容翰이 용맹과 지략이 있고 전공이 있어 당시 군주였던 慕容廆에게 총애를 받자 모용황이 시기하였는데, 모용황이 즉위하자 모용한이 段氏에게 달아났다.
역주3 柳城의 전쟁 : 본서 晉 成帝 咸和 9년(334) 조에 보인다. 당시 段遼가 모용한 등을 보내 柳城을 공격하여 前燕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는데, 모용한이 본국을 위해 단료의 군대가 진격하지 못하게 하였다.
역주4 漢大閲於成都 : “漢나라가 크게 열병했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龔壯을 표창한 것이다. 李壽는 자기 힘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이를 만하니, 크게 열병했다고 쓴 것이 이때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에 ‘大閲’이라고 쓴 것이 두 번이고, ‘講武’라고 쓴 것이 세 번인데,(漢나라 靈帝 中平 5년에 자세히 보인다.) 모두 비난한 것이다.[書漢大閲 何 志龔壯也 李壽可謂不量力矣 書大閲始此 綱目書大閲二 書講武三(詳漢靈帝中平五年) 皆譏也]” ≪書法≫
역주5 趙命其太子……迭省尚書奏事 : “태자가 일을 살펴보는 것은 옛날 제도가 아니다. 앞에서는 趙나라 태자 石弘을 썼고, 여기에서는 石宣과 아우 石韜가 번갈아 살펴보았다고 썼으니, 이는 실로 태자가 두 명인 것이다. 형제가 서로 屠戮한 화가 이때 시작되었으므로 이것을 써서 비난한 것이다.[太子省事 非古也 前書趙太子弘矣 於是 宣與弟韜迭省 是二太子也 兄弟相屠之禍始此矣 故書譏之]” ≪書法≫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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