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綱] 장군將軍조파노趙破奴를 보내 누란국樓蘭國을 공격해서 국왕인 고사姑師를 사로잡고, 마침내 거사車師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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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누란樓蘭의 국왕인 고사姑師가 한漢나라 사신을 공격하고 위협해서 흉노匈奴의 첩자 노릇을 하게 하자, 상上이 조파노趙破奴를 보내 공격하게 하였다.
조파노는 7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누란왕樓蘭王을 사로잡고 마침내 거사車師를 격파하였으며, 군대의 위엄을 동원하여 오손烏孫과 대완大宛 등을 곤궁하게 하니, 한漢나라에서는 조파노를 착야후浞野侯로 봉하였다.注+착浞은 사각士角의 절切이니, 착야浞野는 지명이다.
이에 주천군酒泉郡에 정장亭障을 진열하여 옥문관玉門關까지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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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처음으로 각저角抵의 놀이와 어룡魚龍, 만연曼延 등을 만들었다.注+저抵는 당해내다는 뜻이다. 각저角抵는 두 명씩 서로 맞붙어 힘을 겨루고 기예와 활쏘기와 말 모는 것을 겨룸을 이른다. 어룡魚龍은 사리舍利(사리猞猁)라는 짐승의 모형을 만들어서 먼저 뜰의 끝에서 놀이를 하고, 끝나면 궁전 앞으로 들어와서 물을 격동시키면 비목어比目魚로 변하는데, 뛰면서 물을 뿜어대어 안개를 만들어 태양을 가린다. 끝나면 다시 8길[장丈]의 황룡黃龍으로 변하는데, 물에서 나와 뜰에서 마음껏 놀아 광채가 햇빛처럼 빛났다.
에 “바다의 큰 물고기[해린海鱗]가 변하여 용龍을 이룬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만曼은 음이 만萬이고 연延은 익전弋戰의 절切이니, 만연曼延은 짐승의 이름인데, 바로 〈서경부〉에 이른바 ‘큰 짐승이 백 길[심尋]이라는 것이 바로 만연曼延이다.’라는 것이다.
綱
[綱] 순체荀彘가 양복楊僕을 사로잡고 그의 군대를 합병하니, 조선朝鮮 사람들이 왕 위우거衛右渠를 죽이고 항복하자, 낙랑군樂浪郡‧임둔군臨屯郡‧현토군玄菟郡‧진번군眞番郡을 설치하였으며, 순체荀彘는 죄로 불러다가 기시형棄市刑에 처하였다.注+악樂은 음이 낙洛이고, 낭浪은 음이 낭郞이다. 낙랑군樂浪郡은 조선현朝鮮縣을 치소治所로 했으니, 이는 위우거衛右渠가 도읍한 곳을 치소로 삼은 것이다. 둔屯은 음이 돈豚이니, 임둔군臨屯郡은 동이현東暆縣을 치소로 하였다. 토菟는 음이 도徒이니, 현토군玄菟郡(현도군)은 본래 고구려高句驪인데 옥저성沃沮城을 치소로 하였다. 진번군眞番郡은 삽현霅縣(합현)을 치소로 하였다. 저沮는 여지余支의 절切이고, 삽霅은 호갑胡甲의 절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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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한漢나라 군대가 조선朝鮮의 국경으로 쳐들어가니, 조선의 국왕인 위우거衛右渠가 군대를 출동시켜 험한 곳을 막고 있었다.
양복楊僕이 제齊 지방의 군대를 거느리고 먼저 도착했는데, 싸움에 패하여 도망하였다가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다시 모였다.
순체荀彘가 패수浿水 가에 있는 조선의 군대를 격파하고 마침내 전진하여 왕험성王險城 아래에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양복도 가서 회합하여 왕험성의 남쪽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몇 개월이 되어도 항복시키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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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순체荀彘가 거느리고 있는 연燕, 대代 지방의 병사들은 강하고 용맹한 자가 많아 용감하게 싸웠고, 양복은 일찍이 패주하여 병사들이 모두 두려워하였고 장수가 패주한 것을 마음속으로 부끄러워해서 항상 화친할 것을 주장하였다.注+장將(장수)은 즉량卽亮의 절切이다.
조선朝鮮의 대신大臣이 마침내 은밀히 사람을 보내 양복楊僕에게 항복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오고가며 결단하지 못하였다.
순체가 사람을 보내 조선을 항복시키려 하였으나 위우거衛右渠가 따르지 않았고, 또 여러 번 양복과 회합하여 함께 싸울 것을 기약하였으나, 양복은 조선과 화친하기로 한 약속을 성취하고자 하여 회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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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순체荀彘는 생각하기를 양복楊僕이 예전에 군대를 잃었고 지금 조선朝鮮과 은밀히 친하니 반란하려는 계책이 있는 것이라고 의심하였으나, 감히 이 일을 발설하지는 못하였다.注+의意는 의심함이고, 억측하여 헤아림이고, 생각함이다.
상上은 ‘두 장수가 마음이 맞지 않아서 전쟁이 오랫동안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제남태수濟南太守공손수公孫遂로 하여금 가서 시비곡직을 바로잡되, 편의에 따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게 하였다.注+“정지正之”는 그 시비와 곡직을 바로잡는 것이다.
공손수가 도착하자, 순체는 평소 자기가 생각했던 것을 자세히 말하니, 공손수 또한 그의 말을 옳게 여기고는 마침내 함께 양복을 사로잡고 그 군대를 합병하였다.注+병幷(합병하다)은 필정必政의 절切이다.
공손수가 돌아가 보고하자, 상上은 공손수를 처형하였다.注+〈“상上주수誅遂(상上이 공손수公孫遂를 처형한 것)”는〉 양복楊僕을 사로잡은 것을 잘못이라고 여긴 것이다.
순체가 조선을 더욱 맹렬하게 공격하니, 조선에서는 정승인 이계참尼谿參(니계삼) 등이 사람을 시켜 왕 위우거衛右渠를 죽이고 항복하였다.
이에 그 땅을 네 군郡으로 만들고,注+상相(정승)은 실량悉亮의 절切이다. 융적戎狄은 관직의 기강(체제)을 알지 못하므로 상相이라 칭한 것이다. 삼參은 음이 삼三이니, 이계참尼谿參은 한 사람이다. 혹자는 이르기를 “이계尼谿와 삼參이니, 두 정승의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순체는 불러 기시형棄市刑에 처하고 양복은 속죄하여 서인庶人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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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반고班固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현도玄菟와 낙랑樂浪은 본래 기자箕子를 봉한 곳이다.
기자가 이 지역 백성들에게 예의禮義와 농사짓고 누에치고 비단을 짜는 일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위하여 여덟 조항의 금령禁令을 만들어서, 서로 죽이면 당장에 죽음으로 보상하게 하고, 서로 상해를 입히면 곡식으로 보상하게 하고, 서로 도둑질한 자는 적몰籍沒하여 그 집안의 노비로 삼되, 스스로 속죄하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당 50만 전錢을 내게 하였다.
비록 죄를 면제받아 평민이 되더라도, 풍속에서는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죄를 지은 자들은〉 딸을 시집보내고 아들을 장가들일 적에 혼인시킬 데가 없었다.注+수售는 음이 수壽이니, 물건을 팔아 손에서 내놓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 나라 백성들이 끝내 서로 도둑질을 하지 아니하여 문을 닫는 일이 없었고, 부인들이 정조와 신의를 지켜서 방탕하고 음란한 짓을 하지 않았으며,注+벽辟(방탕하다)은 벽僻으로 읽는다. 전야田野에서는 음식을 마시고 먹을 적에 변두籩豆를 사용하고 도읍에서는 자못 관리들을 본받아서 술잔과 그릇을 사용하여 음식을 먹었다.注+관리들이 잔과 그릇을 사용하기 때문에 도읍 사람들도 자못 이것을 모방하여 본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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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그런데 한漢나라의 관리와 장사꾼으로서 이 지역에 간 자들이, 백성들이 문을 닫거나 물건을 감추어두지 않는 것을 보고는 왕왕 도둑질을 하여 풍속이 점점 더 야박해지니,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 “군郡에서는 처음에 요동遼東에서 관리를 데려왔는데, 관리들이 백성들이 문을 닫거나 물건을 감추어두지 않는 것을 보고는 장사꾼들과 함께 밤이 되면 도둑질을 하였다.” 하였다. 지금은 금령禁令을 범하는 일이 점점 많아져서 금령이 60여 조항에 이른다.
참으로 귀하게 여길 만하다.
인현仁賢의 교화여!
그러나 동이東夷는 천성이 유순해서 세 방위의 오랑캐와 달랐으니,注+“삼방三方”은 남쪽, 서쪽, 북쪽의 오랑캐를 이른다. 공자孔子께서 구이九夷에 살고자 하셨던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역주
역주1作角抵戲 :
“‘놀이를 만들었다.[作戲]’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황제가 놀이에 빠진 것[玩物]을 비판한 것이다. 武帝 시대에 처음 이 놀이를 만든 뒤로부터 殤帝에 이르러서야 파했으나, 隋나라에서 천하의 散樂을 불러 魚龍의 놀이가 아직도 남아 있었으니, 기이하고 음탕한 재주를 익힌 것이 사람들을 깊이 빠져들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치통감강목》에서 특별히 쓴 것이다.[書作戲 何 譏玩物也 自帝世始爲此戲 至殤帝而後罷之 然隋徵天下散樂 而魚龍之戲尙存 則奇淫之習 入人者深矣 故綱目特書]” 《書法》
역주2西京賦 :
後漢의 張衡이 지은 賦로 西京은 前漢의 수도인 長安을 가리킨다. 장형은 字가 平子이고 南陽 西鄂 사람으로 글을 잘하였는데, 당시 태평한 지 오래되어 王侯 이하가 모두 사치에 빠지자, 班固의 〈兩都賦〉를 모방하여 〈二京賦〉를 지어 풍자했다 한다. 《文選 張衡西京賦注》 二京은 西京과 後漢의 수도인 洛陽(東京)으로 〈二京賦〉는 〈西京賦〉와 〈東京賦〉를 가리킨다.
역주3(含)[舍] :
저본에는 ‘含’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舍’로 바로잡았다.
역주4彘 以罪徵棄市 :
“이때 荀彘가 楊僕이 모반할 계획이 있다고 의심하고는 使者에게 고하여 楊僕을 사로잡고 그 군대를 병합하여 朝鮮을 공격해서 항복시켰으니, 荀彘가 功이 있는데 ‘罪’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양복이 싸우기로 약속하고 모이지 않았을 뿐이요 모반한 것이 아닌데, 荀彘가 대번에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은 의리를 귀하게 여기고 功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니, 죄인의 죄를 쓰지 않으면 윗사람이 되기 어려운 것이다. 이 때문에 項籍이 宋義를 죽이고 秦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는데도, 《자치통감강목》에서 ‘황명을 사칭했다.[矯]’고 썼고, 순체가 양복을 사로잡고 朝鮮을 항복시켰는데도 《자치통감강목》에서 ‘죄가 있다.’고 썼으니, 모두 참람함과 혼란함을 막은 것이다. ‘棄市’라고 쓴 것이 이때 시작되었다.[於是 彘疑僕有反計 告使者執僕 幷其軍 擊朝鮮降之 則彘有功矣 其以罪書 何 楊僕期戰不會 非反也 而彘遽執之 綱目貴義 不貴功 不書罪 則難爲上矣 是故項籍殺宋義 破秦軍 而綱目書以矯 荀彘執楊僕 降朝鮮 而綱目書以罪 皆所以遏僭亂也 書棄市始此]” 《書法》
역주5(沮)[浿] :
저본에는 ‘沮’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浿’로 바로잡았다.
역주6(嘗)[償] :
저본에는 ‘嘗’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償’으로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