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畢云 呂氏春秋에 佃은 作田하니 是요 禮는 作禋하니 誤라하다
詒讓案 宋王偃이 爲齊湣王所滅하다 謚는 康이니 見國策宋策하다
呂氏春秋에 作宋康王하며 荀子王霸篇에 又作宋獻하다
佃不禮는 荀子解蔽篇楊注에 引亦作田不禋하며 漢書古今人表에 有田不禮하니 則似據趙世家也라
呂氏春秋淫辭篇에 云 宋王이 謂其相唐鞅曰 寡人所殺戮者가 衆矣로대 而群臣愈不畏하니 其故何也오
唐鞅이 對曰 王之所罪는 盡不善者也니 罪不善이면 善者故爲不畏니이다
王欲群臣之畏也는 不若無辨其善與不善而時罪之하니 若此면 則群臣畏矣리다한대 居無幾何하여 宋君殺唐鞅이라하다
荀子解蔽篇에 亦云 唐鞅이 蔽於欲權而逐戴子라하고 又云 唐鞅이 戮於宋이라하니 皆其事也라
史記趙世家에 載趙主父使田不禮로 相太子章이라가 後爲李兌所殺事하니 當宋康之末年하니 或卽一人先仕宋而後仕趙與인저
蘇云 宋康之亡은 當楚頃襄王十一年하니 上去楚惠王之卒一百四十三年이라
此不獨與墨子時世不値요 且與中山之亡相距止數年하니 而皆在孟子之後라
若此書爲墨子自著인댄 則墨子時世更在孟子之後하니 不知孟子之闢墨子는 正在墨學方盛之時니 其必不然也審矣라하다
注
‘佃’은 道藏本에 ‘伷’로 되어 있으니, 옳지 않다.
畢沅:≪呂氏春秋≫ 〈當染〉에 ‘佃’은 ‘田’으로 되어 있으니, 옳다. ‘禮’는 ‘禋’으로 되어 있으니, 잘못이다.
詒讓案:宋王 偃(宋 康王)이 齊 湣王에게 멸망하였다. 시호는 康이니, ≪戰國策≫ 〈宋策〉에 보인다.
≪呂氏春秋≫에는 ‘宋康王’으로 되어 있으며, ≪荀子≫ 〈王霸〉에는 또 ‘宋獻’으로 되어 있다.
‘佃不禮’는 ≪荀子≫ 〈解蔽〉 楊倞의 注에서 이 대목을 인용한 곳에는 또한 ‘田不禋’으로 되어 있으며, ≪漢書≫ 〈古今人表〉에 ‘田不禮’가 있으니, 아마도 ≪史記≫ 〈趙世家〉에 의거한 듯하다.
≪呂氏春秋≫ 〈淫辭〉에 “宋王이 그 재상 唐鞅에게 이르기를 ‘寡人에게 죽임을 당한 자가 많은데도, 群臣이 갈수록 나를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 하니,
唐鞅이 대답하기를 ‘王께서 징벌하는 자는 모두 不善한 자입니다. 不善한 자를 징벌하면 善한 자는 이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왕께서 群臣이 두려워하기를 바란다면 善한 자와 不善한 자를 구별하지 않고 그때그때 징벌하는 편이 좋으니, 이렇게 하시면 群臣이 두려워할 것입니다.’라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宋나라 임금이 唐鞅을 죽였다.”라 하였다.
≪荀子≫ 〈解蔽〉에 또한 이르기를 “唐鞅이 權力慾에 마음이 가려져 戴子를 축출하였다.”라 하였고, 또 “唐鞅이 宋나라 임금에게 죽임을 당하였다.”라 하였으니, 모두 그 일이다.
≪史記≫ 〈趙世家〉에 趙나라 主父가 田不禮로 하여금 太子 章을 보좌케 하였다가 이후에 李兌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故事가 실려 있는데, 이는 宋 康王의 末年에 해당하니, 어쩌면 동일한 사람이 먼저는 宋나라에서 벼슬하다가 나중에 趙나라에서 벼슬했던 것이리라.
蘇時學:宋 康王이 멸망한 해는 楚 頃襄王 11년에 해당하니, 楚 惠王이 죽은 해로부터 143년 이후이다.
이는 墨子의 시대와 겹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中山이 망한 해와도 단지 수년의 차이가 나니, 모두 孟子 사후의 일이다.
孟子가 말한 ‘方千里者九(사방 천 리 되는 제후국이 아홉)’는 中山이 아직 망하기 전이며, ‘宋王行仁政(宋나라 임금이 어진 정치를 행함)’은 宋나라 또한 아직 망하기 전이다.
만일 이 책이 墨子가 직접 지은 것이라면 墨子가 살았던 때가 다시 孟子보다 더 후대가 되니, 모르긴 해도 孟子가 墨子를 물리쳤다는 것은 그야말로 墨學이 한창 盛大했을 때였을 것이니, 필시 그렇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