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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1)

대학연의(1)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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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6-1-나(按)
按 大學之道 在止於至善이라
爲人君‧爲人臣以至與國人交 各有所當止하니 止云者 必至於是而不遷之謂也
以君道言之컨대 有一毫未至於仁이면 不可以言止
知仁之當爲而或出焉或入焉이면 亦不可以言止
何謂仁
仁之體也 仁之用也
爲人君者 内必有以去物欲之私하여 使視聽言動으로 無一不合乎禮하고 外必有以廣民物之愛하여 으로 無一不遂其生이니
此所謂仁也
原注
必有是體然後 其用 行焉이라 故聖人論仁 莫先於克己也
人君 爲天下民物之主하니 痒痾疾痛 孰非同體리오
故君道 必主於仁호대 而爲仁 必極其至
所謂止於至善也
自古帝王 獨稱堯‧舜爲至仁者 以其兼體用之全하여 無纖微之間故也
하고 하니 是特區區之小善耳
其可以言至乎
其可遽止於是乎
以此推之則臣之敬‧子之孝‧父之慈‧與國人交之信 皆以極至 爲當止之地
若夫以貌恭爲敬하고 以從令爲孝하고 以長惡爲慈하고 以小諒爲信而曰止於是焉則非所敢知也로소이다


原注
6-1-나(按)
【臣按】 《大學》의 도는 지극한 善에 그치는 데에 있습니다.
임금이 되고 신하가 된 것에서부터 國人과 교유함에 이르기까지 각각 마땅히 그쳐야 할 바가 있으니, 여기에서 ‘그친다’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 이르고 이른 뒤에는 옮겨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임금의 道를 가지고 말하면, 조금이라도 仁에 이르지 못함이 있으면 ‘그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仁이 마땅히 해야 할 것임을 알면서도 때로는 仁의 범주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仁의 범주에 들어오기도 한다면, 이 역시 ‘그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무엇을 ‘仁’이라고 하겠습니까?
‘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가는 것[克己復禮]’은 仁의 體이고,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愛人利物]’은 仁의 用입니다.
임금이 된 자는 안으로는 반드시 사사로운 물욕을 버려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어느 하나 禮에 합치하지 않음이 없게 하고, 밖으로는 반드시 백성과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넓혀서 늙은 홀아비와 늙은 과부와 어린 고아와 자식 없는 노인으로 하여금 한 사람이라도 그 삶을 다 영위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仁’이라는 것입니다.
原注
반드시 이 體가 있은 뒤에 그 用이 행해지기 때문에 聖人이 仁을 논할 때 ‘사욕을 이기는 것[克己]’을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임금은 천하의 백성과 만물의 주인이니, 몹쓸 병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인들 임금과 한 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의 도는 반드시 仁을 위주로 하되 인을 행하는 것은 반드시 그 지극한 경지까지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지극한 선에 그친다[止於至善]’라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역대 聖王을 일컬을 때 堯임금과 舜임금만을 들어 ‘지극한 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분들이 仁의 體와 用을 온전히 겸하여 아주 작은 틈도 없기 때문입니다.
宋 襄公이 머리가 반백인 자는 사로잡지 않는 것을 仁으로 여기고 梁 惠王이 흉년에 백성을 옮기고 곡식을 옮기는 것을 仁으로 여긴 것은 단지 소소한 작은 善일 뿐입니다.
어찌 지극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여기에서 대번에 그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보면, 신하의 공경, 자식의 효도, 아버지의 자애로움, 國人과 교유할 때의 신의는 모두 ‘지극한 경지까지 다하는 것[極至]’을 ‘그쳐야 할 곳[當止之地]’으로 여긴 것입니다.
모습이 공손한 것을 공경으로 여기고 명령에 따르는 것을 효도로 여기며, 악을 조장하는 것을 자애로움으로 여기고 작은 의리를 신의로 여기면서 ‘여기에 그친다[止於是]’라고 하는 것은 신이 감히 아는 바가 아닙니다.


역주
역주1 克己復禮 : 《論語》 〈顔淵〉에 안연이 仁에 대해 묻자 “자기의 사욕을 이겨 禮로 돌아가는 것이 仁을 행하는 것이니, 하루 동안이라도 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仁을 許與할 것이다. 仁을 행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으니,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겠는가.[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라고 대답한 孔子의 말이 보인다.
역주2 愛人利物 : 《莊子》 〈天地〉에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을 ‘仁’이라고 한다.[愛人利物之謂仁]”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3 使 : 대전본‧사고본에는 없다.
역주4 鰥寡孤獨 : 《孟子》 〈梁惠王 下〉에 “늙어서 아내가 없는 사람을 ‘鰥’, 늙어서 남편이 없는 사람을 ‘寡’, 늙어서 자식이 없는 사람을 ‘獨’, 어려서 부모가 없는 사람을 ‘孤’라고 하니, 이 네 부류는 천하의 곤궁한 백성으로서 하소연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다. 文王은 정사를 펴고 仁을 베풀되 반드시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을 먼저 하였다.[老而無妻曰鰥 老而無夫曰寡 老而無子曰獨 幼而無父曰孤 此四者 天下之窮民而無告者 文王發政施仁 必先斯四者]”라는 내용이 보인다.
역주5 宋襄……爲仁 : 宋 襄公(기원전 652~기원전 637, 재위 기원전 650~기원전 637)은 春秋五霸의 한 사람으로, 姓은 子, 諱는 玆父이다. 송 양공은 魯 僖公 21년(기원전 639) 봄에 楚나라에 의해 盟主의 지위를 인정받았으나, 동년 가을에 楚나라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났다. 다음 해(기원전 638) 11월에 양공이 이를 설욕하기 위해 초나라와 동맹 관계에 있던 鄭나라를 공격하자,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끌고 달려와 송나라 내의 泓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송나라는 초나라 군대에 대패하였으며, 양공은 부상을 입어 이로 인해 이듬해 5월에 죽었다. 전투에서 대패한 뒤 國人들이 이를 비난하자, 양공은 “군자는 상처 입은 적을 거듭 상처 입히지 않고 반백인 사람은 사로잡지 않는다.[君子不重傷 不禽二毛]”라고 하였다 한다. 《春秋左氏傳 僖公 21年‧22年‧23年》
역주6 梁惠……爲仁 : ‘梁惠’는 魏나라 임금 罃으로, 惠는 시호이다. 大梁에 도읍하고 ‘王’을 참칭하였기 때문에 梁 惠王이라 부른다. 혜왕이 孟子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정사에 온 마음을 다하여 河內에 흉년이 들면 그 백성을 河東으로 이주시키고 그 곡식을 하내로 옮기며 하동에 흉년이 들어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이웃나라의 백성들은 더 적어지지 않고 자신의 백성들은 더 많아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 묻자, 맹자는 五十步百步의 비유를 들어 이러한 임시방편보다는 백성들의 생업을 안정시키는 것이 근본적인 대책임을 설파하였다. 《孟子 梁惠王 上》
역주7 : 사고본에는 이 뒤에 ‘之’가 있다.

대학연의(1) 책은 2019.06.0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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