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臣按】 《大學》의 도는 지극한 善에 그치는 데에 있습니다.
임금이 되고 신하가 된 것에서부터 國人과 교유함에 이르기까지 각각 마땅히 그쳐야 할 바가 있으니, 여기에서 ‘그친다’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 이르고 이른 뒤에는 옮겨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임금의 道를 가지고 말하면, 조금이라도 仁에 이르지 못함이 있으면 ‘그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仁이 마땅히 해야 할 것임을 알면서도 때로는 仁의 범주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仁의 범주에 들어오기도 한다면, 이 역시 ‘그친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욕을 이겨 예로 돌아가는 것[克己復禮]’은 仁의 體이고, ‘사람을 사랑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愛人利物]’은 仁의 用입니다.
임금이 된 자는 안으로는 반드시 사사로운 물욕을 버려서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어느 하나 禮에 합치하지 않음이 없게 하고, 밖으로는 반드시 백성과 만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넓혀서 늙은 홀아비와 늙은 과부와 어린 고아와 자식 없는 노인으로 하여금 한 사람이라도 그 삶을 다 영위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해야 합니다.
原注
반드시 이 體가 있은 뒤에 그 用이 행해지기 때문에 聖人이 仁을 논할 때 ‘사욕을 이기는 것[克己]’을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임금은 천하의 백성과 만물의 주인이니, 몹쓸 병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누구인들 임금과 한 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의 도는 반드시 仁을 위주로 하되 인을 행하는 것은 반드시 그 지극한 경지까지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지극한 선에 그친다[止於至善]’라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역대 聖王을 일컬을 때 堯임금과 舜임금만을 들어 ‘지극한 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분들이 仁의 體와 用을 온전히 겸하여 아주 작은 틈도 없기 때문입니다.
宋 襄公이 머리가 반백인 자는 사로잡지 않는 것을 仁으로 여기고 梁 惠王이 흉년에 백성을 옮기고 곡식을 옮기는 것을 仁으로 여긴 것은 단지 소소한 작은 善일 뿐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보면, 신하의 공경, 자식의 효도, 아버지의 자애로움, 國人과 교유할 때의 신의는 모두 ‘지극한 경지까지 다하는 것[極至]’을 ‘그쳐야 할 곳[當止之地]’으로 여긴 것입니다.
모습이 공손한 것을 공경으로 여기고 명령에 따르는 것을 효도로 여기며, 악을 조장하는 것을 자애로움으로 여기고 작은 의리를 신의로 여기면서 ‘여기에 그친다[止於是]’라고 하는 것은 신이 감히 아는 바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