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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衍義(2)

대학연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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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注
11-3-나11(按)
按 朱熹之於此章 發明剖析 無復餘蘊하니 今具其文 如右하노이다
夫所謂耳目口鼻四肢之欲者 目之於色 耳之於聲 口之於味 鼻之於臭注+古之於香臭, 通名之曰臭, 非如今人專以穢爲臭也. 四肢之於安佚 是也
四者之欲 未克則欲勝而理泯이니 安得有仁이리오 所以貴乎克也
原注
克者 戰勝攻取之謂 私欲害人 甚於寇賊이라 故必勇往力行하여 克而去之也니이다
克‧伐‧怨‧欲四者 皆私意也注+原憲之所謂克, 欲以勝人而非克己之謂. 原憲 但欲制之而不行 便以爲仁이라 夫子 所以不許之시니
若克己則奮然決去之辭而非抑遏不行之謂 如去惡木 不但翦其枝條而必發撅其本根이니 非顔子之大勇이면 聖人 肯輕許之哉
原注
仁之一字 見於經者 自仲虺之誥하니이라하고 伊尹 繼之曰 이라하니
前乎此者 如虞書所謂 卽所謂仁而未有仁之名이러니
至商書而名始著하나 然其所言 大抵皆仁之用이요 顔子之問‧孔子之答 乃仁之體也
原注
二帝三王 雖無己之可克이시나 然舜所謂
成湯之 其用功 初無異於顔子也
蓋必有顔子之仁而後 有二帝三王之仁이니
原注
有天下者 曷嘗無好仁之心而爲仁之難 反甚於學者 以物欲之爲害者 衆也
詞人作賦 乃以是 許漢光武焉曰 이라하니
自今觀之컨대 光武 則誠賢矣 皆私欲之爲也 其得以是稱乎
原注
若唐太宗之濟世安民 不可謂無仁之用者어니와 原其所本컨대 亦以其從諫改過하여 粗知所以自克者 故其效 亦不可揜이나
惟其自克之功 少而自縱之失 故僅能爲太宗之仁而不能爲二帝三王之仁이니
惟聖明之君 立志務學 以帝王爲的而不以漢唐自安이면
則於孔門克復之功 正當俛焉以用其力하여 必至於天理全而人欲泯이니 則天下歸仁 有日矣리니 臣不勝惓惓하노이다
此章 書言仁이니이다


原注
11-3-나11(按)
[臣按] 이 장에 대한 朱熹의 설명과 분석은 더 보탤 것이 없습니다. 지금 주희의 글을 갖추어 위와 같이 수록하였습니다.
이른바 ‘이목구비와 四肢의 욕망[耳目口鼻四肢之欲]’이라는 것은 눈의 美色에 대한 욕망과 귀의 美聲에 대한 욕망과 입의 맛에 대한 욕망과 코의 향기에 대한 욕망과注+고대에는 향기와 악취에 대해 모두 ‘臭’라고 일컬었으니, 요즘 사람들이 악취만을 ‘臭’라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四肢의 안락함에 대한 욕망이 이에 해당합니다.
네 가지의 사욕을 이기지 않으면 인욕이 이겨서 천리가 없어지게 되니 어떻게 仁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이기는 것[克]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입니다.
原注
‘克’은 싸워서 이기고 공격하여 빼앗는 것을 이릅니다. 사욕이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외적의 침범보다 심각합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용감히 나아가고 힘써 행하여 사욕을 이겨 없애는 것입니다.
原憲이 묻기를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克]과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려는 마음[伐]과 원망하는 마음[怨]과 탐하는 마음[欲]을 행하지 않으면 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仁인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과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려는 마음과 원망하는 마음과 탐하는 마음 이 네 가지는 모두 私心입니다.注+原憲이 말한 ‘克’은, 남을 이기고자 하는 것이지 사욕을 극복하는 것을 이른 것이 아니다. 原憲은 단지 이를 억눌러서 행하지 않는 것을 곧 ‘仁’으로 생각하고자 하였기에 孔夫子가 이를 허여하지 않은 것입니다.
克己(사욕을 이기는 것)는 분발하여 결연히 떨쳐버린다는 말이지 억누르고 막아서 행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해로운 나무를 제거할 때에 비단 그 가지와 줄기를 잘라낼 뿐만 아니라 반드시 그 뿌리를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顔子와 같은 큰 용기[大勇]가 아니라면 聖人인 孔子가 이를 쉽게 허여하고자 했겠습니까.
原注
‘仁’이라는 글자가 經書에 보이는 것은 《書經》 〈商書 仲虺之誥〉부터 나오기 시작하였으니, “능히 너그럽고 능히 인자하여 드러나서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으셨습니다.[克寬克仁 彰信兆民]”라고 하였고, 伊尹이 이를 이어서 “백성은 일정하게 흠앙하는 사람이 없어 어진 사람을 흠앙한다.[民罔常懷 懷于有仁]”라고 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에 있는 것으로는 이를테면 〈虞書〉에 이른바 “살려주기를 좋아하는 덕[好生之德]”과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면 은혜로운 것이다.[安民則惠]”와 같은 것이 곧 이른바 ‘仁’이지만 아직 ‘仁’이라는 명칭은 있지 않았습니다.
〈商書〉에 이르러 ‘仁’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나타났지만 〈商書〉에서 ‘仁’이라고 한 것은 대체로 모두 仁의 작용이고, 顔子가 묻고 孔子가 답한 것이 곧 仁의 본체입니다.
原注
二帝와 三王은 비록 이겨야 할 사욕이 없었지만 舜임금이 이른바 “人心은 위태롭고 道心은 은미하니, 정밀하게 살피고 專一하게 지켜야 한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라고 한 것과,
成湯이 “음란한 음악과 아름다운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고 재화와 이익을 증식하지 않으시며, 예에 따라 마음을 제어했다.[不邇聲色 不殖貨利 以禮制心]”라고 한 것은 그 힘을 쓴 것이 애당초 顔子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대개 반드시 顔子와 같은 仁을 소유한 뒤에야 二帝와 三王과 같은 仁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의 덕을 이루는 것과 만물의 덕을 이루어주는 것이 서로 끝과 시작이 되는 이유입니다.
原注
천하를 소유한 자가 어찌 仁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마는 仁을 행하는 어려움이 도리어 배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物欲이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詞人이 賦를 지을 때 바로 극기복례한 것으로 漢나라의 光武帝를 허여하여 “사욕을 이겨 예에 돌아가시어 진실로 孝文帝와 같이 되기를 기약하셨다.[克己復禮 允恭乎孝文]”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보면 광무제가 진실로 현군이기는 하였지만 정실 황후를 폐하고 태자를 바꾼 것은 모두 사욕이 한 것이었으니 어떻게 이를 가지고 칭송할 수 있겠습니까.
原注
唐 太宗이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 것으로 말하면 仁의 작용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 근본을 따져보면 또한 간언을 받아들여 과실을 고쳐 사욕을 이기는 것을 대강이나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성과가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욕을 이기는 공부는 적었고 사욕을 부리는 잘못은 많았기 때문에 겨우 太宗 정도의 仁이 될 수 있었을 뿐이고 二帝‧三王과 같은 仁은 될 수 없었습니다.
바라옵건대 聖明한 임금이 뜻을 세우고 학문에 힘쓰기를 二帝‧三王과 같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 漢‧唐 시대 임금들 정도에 스스로 안주하지 않는다면,
바로 孔門의 克己復禮하는 공부에 매진하여 그 힘을 써서 반드시 天理가 온전히 보존되고 인욕이 없어지는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 사람들이 仁으로 돌아가는 날이 머지않을 것입니다. 신은 간절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 장은 ‘仁’에 대해 서술하였습니다.


역주
역주1 原憲……知也 : 《論語》 〈憲問〉 제2장에 보인다.
역주2 克寬……兆民 : 《書經》 〈商書 仲虺之誥〉에 보인다.
역주3 民罔……有仁 : 《書經》 〈商書 太甲 下〉에 보인다.
역주4 好生之德 : 《書經》 〈虞書 大禹謨〉에 보인다.
역주5 安民則惠 : 《書經》 〈虞書 皐陶謨〉에 보인다.
역주6 人心……惟一 : 《書經》 〈虞書 大禹謨〉에 보인다.
역주7 不邇……制心 : 《書經》 〈商書 仲虺之誥〉에 보인다. 본래 仲虺가 湯王에게 간언한 말로, 해당 인용문은 중간에 생략된 자구가 있다.
역주8 成己……始也 : 《中庸》 제25장에 “誠은 자기만 이룰 뿐 아니라 남을 이루어주니, 자기를 이루는 것은 仁이고 남을 이루어주는 것은 智이다.[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 成己 仁也 成物 知也]”라고 하였다. 程子는 이와 관련하여 “옛날의 배우는 자들은 자기를 위한 학문을 하였지만 끝내는 남들까지 이루어주는 데 이르렀고, 지금의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하지만 끝내는 자신까지 잃고 마는 데 이르렀다.[古之學者 爲己 其終至於成物 今之學者 爲物 其終至於喪己]”라고 하였다. 《二程遺書 卷25 暢潛道本》
역주9 克己……孝文 : 班固의 〈東都賦〉에 보인다. 《後漢書 卷70下 班固傳》
역주10 允恭乎孝文 : 李賢에 따르면, ‘允恭乎孝文’은 “몸소 검약하여 문제와 같이 되기를 기약하였다.[躬自儉約同於文帝]”라는 뜻이다. 《後漢書 卷70下 班固傳 李賢注》
역주11 廢正后易太子 : 光武帝 劉秀가 첫 번째 황후였던 郭聖通을 폐하여 陰麗華를 황후로 세우고, 장남인 太子 劉彊을 폐하여 陰麗華의 소생인 4남 劉莊으로 바꾼 일을 가리킨다. 光武帝는 更始 2년(24) 봄에 郭聖通을 맞이하였고, 즉위한 建武 1년(25)에 貴人으로 봉하였다. 이 해에 곽성통이 황자 劉彊을 낳자, 建武 2년(26)에 皇后로 삼고 황자 劉彊을 태자로 삼았다. 당초 광무제는 更始 2년(24)에 음려화를 맞이하였는데, 매우 총애하여 즉위한 뒤 貴人에 봉하였다. 광무제는 그녀를 황후로 봉하고자 하였으나 음려화가 固辭하였다. 곽성통이 황자 彊을 낳자 곽성통을 황후로 삼았으나 음려화에 대한 총애는 여전히 깊었다. 곽황후는 자신에 대한 총애가 점차 줄자 자주 이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 결국 건무 17년(41)에 곽황후는 음려화를 질투했다는 명목으로 폐위되어 中山王太后로 강등되었고, 陰麗華가 황후로 책봉되었다. 이어 건무 19년(43)에는 폐황후 곽씨의 소생인 태자 劉彊을 폐하여 東海王으로 삼고 음황후의 소생인 4남 劉莊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後漢書 卷10上 光武郭皇后紀‧光烈陰皇后紀》

대학연의(2) 책은 2019.10.1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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