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注
14-2-나(안按)
[신안臣按] 제 선왕齊 宣王이 이미 제 환공齊 桓公과 진 문공晉 文公을 선망하였고 공손추가 또 관중管仲과 안자晏子를 선망하였으니, 패자霸者의 공리功利에 대한 설이 사람들의 마음에 깊숙이 파고들어가 그 시일이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시의 임금만 선망한 것이 아니라 학자도 선망하였는데 맹자는 증서曾西의 말을 인용하여 이를 꺾어버렸습니다. 자로가 비록 큰일을 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그가 배운 것은 본래 성현의 대학大學이었습니다.
그러나 관중이 등용된 것으로 말한다면 제 환공이 그에게 40여 년 동안 일임하였는데도 그 성취가 부국강병에 지나지 않았으니, 이것이 공자孔子의 문하에서 오패五霸에 대해 거론하기를 부끄럽게 여겼던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증서라 할지라도 관중처럼 되기를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맹자는 삼성三聖의 후계자를 자처하였으니, 관중과 비견되기를 달가워했겠습니까.
原注
선유 양시先儒 楊時가 말하기를, “공자가 자로의 재능을 두고 말하기를, ‘천승지국千乘之國에서 그 군대를 다스리게 할 만하다.’라고 하였으니, 설령 그 재능은 행동으로 나타났더라도 이와 같았을 따름이다.
관중이 제후들을 규합하고 천하를 한번 바로잡은 데 있어서는 진실로 따라가지 못할 점이 있었다. 그렇다면 증서가 자로는 추중하여 높이고 관중에는 비견되기를 부끄러워했던 것은 어째서인가?
수레를 모는 자에 비유한다면 자로는 자신의 말 모는 방식을 규범에 맞게 하여 짐승을 잡지 못한 자이고, 관중의 공은 규범에 맞지 않게 수레를 몰아 짐승과 만나게 하여 짐승을 잡은 격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 말에서 모두 설명하였습니다.
만약 맹자가 제나라에서 요직을 맡았다면 틀림없이 왕자王者의 도를 행했을 것이니, 맹자가 제나라를 가지고 왕도王道를 행하는 것은 참으로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쉬웠을 것입니다.
原注
혹자는 말합니다. “안자晏子는 제齊나라에 있어서 본래 언급할 만한 공렬功烈이 없었지만, 관중 같은 사람은 공자가 일찍이 ‘누가 그의 인仁만 하겠는가.’라고 칭찬하였습니다.
맹자는 공자를 배운 사람인데 어쩌면 그렇게 말이 다르단 말입니까.” 공자의 칭찬은 관중이 이적夷狄을 배격하고 중화中華를 존숭한 것을 칭찬했던 것이며, 맹자가 기롱했던 바는 그가 왕도를 버리고 패도를 사용한 것을 기롱한 것이니, 가리키는 대상이 본래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비록 그의 공은 칭찬하였으나 기국이 작다는 기롱과 예禮를 모른다는 기롱을 본래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세도世道는 날마다 낮은 데로 변하고 있는데 만약 맹자가 왕도를 버리고 패도를 사용한 관중의 죄를 더 이상 논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패도로 휩쓸리듯이 달려갔을 것이니, 거칠 것 없는 기세를 어느 누가 따라서 되돌리겠습니까.
이로써 백성들이 패도로 달려가는 것을 막았음에도, 상앙商鞅과 신불해申不害의 부류는 오히려 속임수와 무력으로 나라를 강성하게 하여 패도보다도 못한 수준에 머물기를 달가워했던 자들입니다.